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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장엄경론 제10권
21. 각분품(覺分品) ①[1]
[보살의 부끄러운 모양]
[釋] 여러 보살에게 부끄러운 모양이 있으니, 이 가운데서 마땅히 말하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치장(治障)과 합지(合智)와
연경(緣境)과 또한 성생(成生)이다.
보살에게 부끄러운 모양이 있으니
이와 같이 네 가지의 차별이다.
[釋] 이 게송은 보살에게 네 가지의 부끄러운 모양이 있음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첫째는 자기 성품이요, 둘째는 반류(伴類)요, 셋째는 경계요, 넷째는 작업이다.
‘치장(治障)’이라 함은 이른바 여의어서 부끄러움이 없게 하는 것이니, 이는 곧 부끄러움의 자기 성품인 것이다.
‘합지(合智)’라 함은 분별이 없는 지혜와 더불어 서로 응하는 것이니, 이 지혜는 부끄러움의 반류(伴類)이다.
‘연경(緣境)’이라 함은 보살은 소승의 장애가 없는 중생으로 부끄러움의 경계로 삼는 것이니, 곧 성문과 연각들이다. 소승이라 함은 대승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장애가 없다고 함은 번뇌의 장애를 깨뜨렸기 때문이다.
‘성생(成生)’이라 함은 보살은 부끄러움이 있는 것으로써 중생을 건립함을 업으로 삼는다. 이것이 부끄러움이 있는 네 가지의 모양이다.
여러 보살이 부끄러움이 있는 것을 어느 행 가운데서 일으킵니까?
게송으로 말한다.
보살이 여섯 가지의 바라밀에서
장애가 더하거나 다스려서 줄어들거나
부지런하지 아니하거나 또한 부지런히 행함,
여기에서 부끄러움이 일어난다.
[釋] 여러 보살들이 네 가지의 일 가운데서 극히 부끄러움을 낸다.
첫째는 여러 바라밀에서 장애가 더할 때에 극히 부끄러움을 내고,
둘째는 여러 장애를 다스려서 줄어들 때에 극히 부끄러움을 내고,
셋째는 여러 바라밀을 닦다가 게으름을 피울 때에 극히 부끄러움을 내고,
넷째는 번뇌의 법을 수순하여 부지런히 행할 때에 극히 부끄러움을 낸다.
이른바 모든 근(根)을 항상 열어서 금하여 지키지 않을 때이다.
보살이 부끄러움이 있는 종류의 차별은 어떻게 봅니까?
게송으로 말한다.
여섯 가지의 품과 두 가지의 품과
7지(地)와 2승(乘)과
또한 같으면 아래가 되니
이를 뒤집으면 마땅히 위인 줄 알라.
[釋] ‘여섯 가지의 품’이라고 함은 부정지(不定地) 가운데 앞의 여섯 품이니, 부끄러움이 있어서 아래가 된다.
‘두 가지의 품’이라 함은 여러 정지(定地) 가운데 앞의 두 품이니, 부끄러움이 있어 아래가 된다.
‘7지(地)’라 함은 보살의 10지 가운데 앞의 7지로서 부끄러움이 있어 아래가 된다.
‘2승(乘)’이라 함은 이른바 하심(下心)의 중생으로서 부끄러움이 있어 아래가 되니, 증상만이 있음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또한 같다’고 함은 이른바 무생인(無生忍)을 얻지 못한 보살로서 그들이 부끄러움이 있어서 또한 아래가 된다.
이 모든 아래의 부끄러움이 있는 것을 뒤집으면 마땅히 이것이 위가 되는 부끄러움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문] 어떤 법이 부끄러움이 있는 장애이며, 그 장애에는 몇 가지의 허물과 실수가 있습니까?
게송으로 말한다.
부끄러움이 없으면 혹도 끊지 못하고
세 가지의 해(害)와 여섯 가지의 꾸짖음도 끊지 못하네.
떨어짐과 어려움과 물러섬의 세 가지의 고통 있어,
앞과 같은 열두 가지의 과실 생기네.
[釋] ‘부끄러움이 없다’고 함은 보살의 부끄러움이 있는 장애이니,
만일 이 장애가 있으면 곧 번뇌를 끊지 못하는 것이요,
번뇌를 끊지 못하면 먼저 세 가지의 해를 낸다.
첫째는 스스로 해함이니 이른바 바르지 못하게 사유하여 스스로 번뇌하기 때문이요,
둘째는 남이 해하는 것으로서 이른바 성냄과 버리는 것이니, 남을 괴롭게 함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문] 성내는 자가 중생을 괴롭히는 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버리는 것은 어찌해서 중생을 괴롭히는 것입니까?
[답] 보살이 중생을 응화(應化)해야 하는데 그를 버려서 교화하지 않으면 이를 일러 괴롭힌다고 이른다.
함께 해친다고 함은 이른바 계율을 깨뜨리는 것이니, 이는 자기와 남을 괴롭히기 때문이다.
세 가지의 해를 일으켰으니 곧 현재의 법에서 여섯 가지의 꾸짖음을 얻은 것이다.
이것은 의심하여 후회하고, 이익을 잃게 되고, 보호를 잃게 되고, 버리게 되고, 벌주어 다스리게 되고, 악한 이름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그 순서대로 여섯 가지의 꾸짖음을 얻는다. 이른바 스스로 꾸짖음으로부터 시방(十方) 사람들의 꾸짖음을 받는 데에 이른 것이다.
이와 같이 한 뒤에 다시 세 가지의 허물과 실수가 생겨나게 되니,
첫째는 온갖 어려운 곳에 물러서서 떨어지는 것이고,
둘째는 이미 얻었거나 아직 얻지 못한 선법에서 물러나 잃게 되는 것이며,
셋째는 큰 고수(苦受)를 내게 되는 것이니,
이를 일러 부끄러움이 없는 데서 생기는 열두 가지의 허물과 실수라고 이른다.
[문] 이미 부끄러움이 없는 것의 장애됨과 허물과 실수를 알았습니다.
어떤 것을 부끄러움이 있는 공덕이라 합니까?
게송으로 말한다.
이러한 것들의 일체의 악을
보살이 만일 부끄러워할 줄 알면
마땅히 알라. 일체가 다 없어지니
그것들의 대치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하늘과 사람들의 총명한 지혜가 나고
두 무더기를 속히 원만히 하여서
중생들을 이루어 후퇴하여 물러나지 않게 하니
떠나고 떠나지 아니함이 과(果)가 된다.
[釋] 처음의 게송은 부끄러움이 있으면 허물을 여의는 공덕을 나타내 보인 것이니, 앞에서 말한 허물과 실수와 같아서 보살에게 부끄러움이 있으면 일체를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뒤의 게송은 부끄러움이 있으면 공덕이 구족한 무더기를 모아 얻게 됨을 나타내 보인 것이니, 다섯 가지의 뛰어난 과를 모두 갖추기 때문이다.
‘하늘과 사람들의 총명한 지혜가 난다’고 함은 과보의 과를 얻은 것이니, 이른바 항상 하늘 위나 사람들 가운데 태어나고 항상 총명한 지혜를 얻기 때문이다.
‘두 무더기를 속히 원만히 한다’고 함은 증상(增上)의 과를 얻는 것이니, 이른바 큰 보리의 두 무더기를 얻기 때문이다.
‘중생들을 이루어 후퇴하여 물러나지 않게 한다’고 함은 장부(丈夫)의 과를 얻은 것이니, 장부가 짓는 것이기 때문이다.
‘떠난다’고 함은 상리(相離)의 과를 얻는 것이니, 장애를 벗어나기 때문이다.
‘떠나지 않는다’고 함은 의(依)의 과를 얻은 것이니, 일체의 태어나는 곳에서 장애를 대치함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문] 부끄러움이 있는 공용(功用)을 비유하여 무엇이라 하겠습니까?
게송으로 말한다.
세간의 옷에 때가 묻어 있어도
범부들은 부끄러워할 줄 모른다.
하늘 옷은 다시 때가 없어도
보살들은 부끄러워하는구나.
보살들은 부끄러움이 구족하여서
허공과 같이 더럽혀질 수 없다.
모든 보살들에서 뛰어나고자 하여
또한 부끄러움으로써 장엄하게 꾸민다.
비유하면 어머니의 사랑과 같아
중생들을 부끄럽게 보호함도 그러하여
태어남과 화생함을 보니
이 일은 부끄러움으로 말미암아 일어난다.
[釋] 여기서 첫째 게송은 부끄러움이 의복과 같음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어찌하여 그런가?
부끄러움이 있는 자는 허물의 때가 능히 더럽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둘째 게송 위의 두 구절은 부끄러움이 허공과 같음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어찌하여 그런가?
부끄러움이 있는 자는 비록 세간의 여덟 가지의 법을 만나도 더러움을 입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게송 아래의 두 구절은 부끄러움이 장엄과 같음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어찌하여 그런가?
부끄러움이 있는 자는 단정한 것이 다른 보살들보다 뛰어나기 때문이다.
셋째 게송은 부끄러움이 어머니와 같음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어찌하여 그런가?
부끄러움이 있는 자는 생사의 모든 허물과 실수를 옹호하는 것이 마치 코끼리와 말의 군사와 같기 때문이다.
태어남[生]과 화생함[化生]을 관하는 것이 이로 말미암아 일어난다.
의복의 비유는 부끄러움이 능히 모든 번뇌에 머문 것을 대치한 데 비유한 것이고,
허공의 비유는 부끄러움이 능히 여덟 가지의 법에 염착됨을 대치한 데 비유한 것이며,
장엄의 비유는 부끄러움이 능히 수순하여 같이 행하는 데에 비유한 것이고,
어머니의 비유는 부끄러움이 능히 중생들을 성숙시키는 데 비유한 것이다.
[문] 보살이 부끄러움을 행하는 데 어떠한 모양이 있습니까?
게송으로 말한다.
참지 못함과 행하지 아니함과
또한 참음과 행함,
마땅히 알아라. 이 네 가지는
부끄러움을 행하는 모양이라고 말한다.
[釋] 이 게송은 네 가지의 부끄러움을 행하는 모양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첫째는 참지 못함이요, 둘째는 행하지 아니함이요, 셋째는 참음이요, 넷째는 행함이다.
어찌하여 그런가?
부끄러움이 있는 자는 모든 허물과 악에서 앞의 두 가지의 모양이 있기 때문이니, 참지 못하기 때문이요, 행하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일체의 공덕에서 뒤의 두 가지의 모양이 있으니, 참기 때문이요, 행하기 때문이다.
[문] 무엇을 일러 부끄러움에는 위없음을 얻는다고 합니까?
게송으로 말한다.
부끄러움을 닦아 익히면
또한 다섯 가지의 자기 뜻에서 일어나니
믿음과 법 등이 다르기 때문에
위없음은 전과 같음을 알아라.
[釋] ‘전과 같음을 알라’고 함은
대승경에서 부끄러움을 말한 곳에서 청정한 믿음을 내기 때문이요,
아홉 가지의 깊은 마음으로 닦아 익히기 때문이요,
허공장 등의 정을 의지하여 닦아 익히기 때문이요,
분별이 없는 지혜에 섭수함으로 말미암기 때문이요,
하나의 과로써 모든 과에 들어가기 때문이라 한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두려움 없음]
이미 보살의 부끄러움 있음을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보살의 두려움 없음에 대해 말하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모든 보살의 두려움 없음은
체상(體相)과 차별과
견고함과 더불어 뛰어남이니
이제 마땅히 순서대로 해석한다.
[釋] 보살의 두려움 없는 데는 네 가지 뜻의 해석이 있으니,
첫째는 체상이요, 둘째는 차별이요, 셋째는 견고함이요, 넷째는 뛰어남이다.
[문] 체상은 무엇이라고 이릅니까?
게송으로 말한다.
정진과 선정과 지혜의 셋이 일어나고
용(勇)과 건(健)과 근(勤)과 맹(猛)을 지으면
이를 두려움 없는 모양이라고 말하니,
또한 이것은 여러 가지의 이름을 나타낸다.
[釋] 정진과 선정과 지혜, 이 셋이 일어나면 이는 두려움이 없는 체상이다.
용과 건과 근과 맹, 이 넷은 두려움 없는 것의 여러 이름을 나타낸 것이다.
[문] 이 셋은 어느 행 가운데의 두려움 없는 것입니까?
게송으로 말한다.
모든 짓는 것이 있는 가운데
아래요, 움직임이 있고 어리석으면 두렵고
셋을 떠나서 셋이 결정되면
이를 두려움이 없는 안정이라고 이른다.
[釋] 보살이 여러 짓는 것 가운데 그의 마음이 아래이고 움직이고 어리석으면 두려움을 낸다.
어찌하여 그런가?
아래의 마음인 자는 부지런히 닦음이 없고, 움직이는 마음인 자는 마음이 한 곳에 머무르지 아니하며, 어리석음의 마음인 자는 방편이 없기 때문이니, 그 셋을 대치하여야 한다.
그의 순서에 따르면 이는 정진과 선정과 지혜이다. 그러기에 정진 등의 셋이 결정을 얻으면 곧 두려움이 없다고 이른다.
[문] 어떻게 결정합니까?
[답] 이 셋을 대치하여 정진 등이 마음대로 일어나 앞에 나타나는 것을 결정이라고 이른다.
[문] 이미 부끄러움의 체상을 말하였습니다.
무엇을 일러 차별이라 합니까?
게송으로 말한다.
자기의 성품과 큰 원과
돌보지 아니함과 물러서지 아니함과
깊은 법을 들음과 또한 능히 교화함과
자신을 부처님의 몸에 두는 것과
또한 여러 고행을 행하는 것과
생사를 버리지 아니함과
생사가 능히 염오하지 못함,
이것이 열 가지의 차별이다.
[釋] 이 두 게송은 그 차례대로 두려움이 없음에 열 가지의 차별이 있음을 말한 것이다.
첫째는 자기의 성품이니, 이른바 성품을 성취하여 두려움 없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둘째는 큰 원이니, 이른바 보리의 마음을 발해서 두려움 없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셋째는 돌보지 아니함이니, 이른바 자기의 이로움을 부지런히 닦을 때에 몸과 목숨을 돌보지 않아 두려움 없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넷째는 물러서지 아니함이니, 이른바 남을 이롭게 함을 부지런히 닦을 때에 거슬리고 거슬은 자가 있어도 두려움 없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깊은 법을 들음이니, 이른바 진실한 뜻을 들었을 때에 두려움 없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능히 교화함이니, 이른바 교화하기 어려운 중생을 신통의 힘으로써 교화해서 두려움 없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일곱째는 자신을 부처님의 몸에 두는 것이니, 이른바 중생을 큰 보리에 건립하여 두려움 없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여덟째는 또한 온갖 고행을 행하는 것이니, 이른바 가지가지의 행하기 어려운 고행을 행하여 두려움 없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아홉째는 생과 사를 버리지 아니함이니, 이른바 일부러 생을 받아서 두려움 없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열째는 생사가 능히 염오하지 못함이니, 이른바 염오된 데 처하여도 염오되지 않아 두려움 없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문] 이미 차별을 말하였으니, 무엇을 일러 견고하다고 합니까?
게송으로 말한다.
악한 벗과 무거운 고통과
깊은 법을 듣고 능히 물러서지 않으면
비유하면 메뚜기의 바람과 같고
움직이지 않으면 수미산이 바다에 있는 듯하다.
[釋] 보살의 두려움 없음은 세 가지의 연에서 움직이지 않음을 얻으니,
첫째는 악한 벗을 만남이요,
둘째는 무거운 고통을 만남이요,
셋째는 깊은 법을 들음이다.
비유하면 메뚜기가 날개를 떨침과 같아서 능히 바다를 진동하고 산을 흔들지 못하지만 그 세 가지의 연이 능히 보살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다.
그러기에 보살의 두려움 없음이 견고하게 된다.
[문] 이미 두려움 없음이 견고하다고 함은 말하였거니와 무엇을 뛰어나다고 이릅니까?
게송으로 말한다.
모든 두려움 없음을 말한 가운데에서
보살의 두려움 없음이 위이니
모양이 다르고 견고하고 뛰어나서
자신과 더불어 서로 같지 않다.
[釋] 앞의 세 가지의 뜻이 뛰어남으로 말미암는다. 그러기에 보살의 두려움 없음이 모든 두려움 없음을 말한 가운데 가장 뛰어남이 된다.
[물러서지 않음]
이미 보살의 두려움 없음을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보살의 물러서지 않음에 대해 말하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물러서지 않는 여러 보살들의
품류(品類)에 세 가지의 일이 있으니
들음과 정진과 고뇌 때문이고
부끄러움과 용맹으로 의지를 삼는다.
큰 보리를 욕락(欲樂)하니
이는 물러서지 않는 성품이라 말한다.
이루지 않음과 이룸과 극히 이룸의
차별은 여러 지위를 나타낸다.
[釋] 이 두 게송은 물러서지 않는 품류와 의지와 자기의 성품과 차별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품류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법을 듣고 싫어함이 없어 물러서지 아니함이요,
둘째는 항상 크게 정진하여 물러서지 아니함이요,
셋째는 생사의 고뇌(苦惱)에서 물러서지 아니함이다.
의지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부끄러워함이요, 둘째는 용맹함이다.
부끄러움이 있는 자는 물러서지 아니하고, 물러서는 자는 가히 부끄럽기 때문이며,
용맹이 있는 자는 물러서지 아니하고, 물러서는 자는 용맹하고 건장함이 아니다.
자기의 성품이라 함은, 이른바 큰 보리를 욕락함이니 욕락에서 만일 돌리면 곧 물러섬을 얻기 때문이다.
차별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이루지 못한 것이니 이른바 신행지(信行地)의 보살이 물러서지 않는 것이다.
둘째는 이룸이니, 이른바 초지로부터 7지에 이르는 보살이 물러서지 않는 것이다.
셋째는 극히 이룸이니, 이른바 8지 이상의 보살이 물러서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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