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松堂 漫筆> 코로나 어려움을 견디면서 주어진 삶을 누리기 위하여 - 비속(卑俗) 취미 - 박 성 환
코로나 탓에 어쩔 수 없이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다. 그러다보니 자연 TV시청이 잦아진다. TV를 켜고 아래위로 채널을 돌려보니 대중가요를 담아 방영하는 프로가 많기도 하다. 대중가요는 예전에는 ‘창가’, ‘유행가’, ‘뽕짝’ 등으로 불리더니 요즘 ‘트롯’이라 불리며 새삼 유행이다. 까마득한 옛날얘기지만 우리 소싯적에는 학교에서 배운 동요를 부르지 않고 ‘유행가’를 부르면 담배 피우다 들킨 아이처럼 꾸지람을 듣곤 하였다. 대중가요나 유행가는 저속한 노래로 낙인 찍혀 아이들에게는 금기시되었다. 대학 들어가서도 유행가는 여전히 입에 잘 올리지 않던 것이었다. 대학생다운 품위와 교양 있는 처신을 해야 한다는 무슨 선민의식(選民意識) 때문이었다. 유행가를 흥얼거리기보다는 소위 ‘클래식’이라는 서양 고전음악을 감상할 줄 알아야 대학생다운 교양인으로 치부되었다.
제대로 된 ‘고전음악—클래식(classical music)’의 생음악 연주를 접하게 된 것은 KBS에 근무하던 고향친구 張모군 덕택이었다. 그는 KBS의 정기연주회 때마다 초대권을 나누어주곤 하였다. 張군은 클래식음악에 대하여 많이 알고 있었다. 그의 배려는 나를 비롯한 우리 친구들에게는 ‘고상틱(사이비 ‘고상함’을 조롱하는 말)’하다는 소리밖에 듣지 못하던 절름발이 교양인을 제법 제대로 된 ‘고상(高尙)’한 교양을 갖게 해주었다. 우아한 교양과 고고한 품위를 갖춘 상류계층 사람들이 출입하는 연주회장에 한 자리 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배려 덕택이었다. 연주회장에 입장하면 길들인 양처럼 조신하게 처신해야 하고, 행여 품위를 잃어 옆 사람에게 예절 모르는 무교양인임이 드러나지나 않을까 신경을 곤두세우곤 하였다. 혹 그런 자가 주변에서 발견되기라도 하면 도도한 표정을 지으며 회심의 비웃음을 짓곤 하였다.
친구들과 어울려 소위 ‘니나노 집’에를 들러 술잔깨나 나누는 일이 더러 있었다. 한복을 차려입은 ‘색시’들이 사이사이에 끼어 앉아 흥을 돋운다. 술이 몇 순배 돌고 나면 ‘색시’에게 집적대는 수작으로 어느 누군가가 “야, 창가 한번 해봐”라고 운을 떼면 노래가 뒤따른다. 교양 없는 자들이 부르는 저속한 노래라는 인식에도 불구하고 너 나 할 것 없이 젓가락으로 술상을 두드리며 장단을 맞추면서 목청껏 ‘창가’를 부른다. 이럴 때 오페라 아리아 등 ‘클래식’을 부르면 뜬금없이 분위기 깨는 주책바가지로 손가락질 당한다. 말로는 저속하다면서 유행가를 불러야 흥이 돋우어지는 것이었다.
클래식에 관심이라도 있다는 티를 내는 자들은 고전음악을 ‘클래식’이라고 품위를 덧붙인(?) 듯한 명칭으로 지칭하고, 흘러간 옛 창가-유행가는 ‘대중가요의 고전’(?)이라는 의미를 나타내려는 듯, 왜식(倭式)으로 이름을 만들어 “구라식구”라는 은어로 부르곤 하였다. 품위가 덧씌워진 ‘클래식’이란 말에 빗대어 ‘비속(卑俗)한 노래’라는 취지로 조롱조로 갖다붙인 명칭이다. 부르주아 상류문화에 길들여진 자들은 ‘클래식’에 대한 소양이 그 사람의 교양을 잴 수 있는 푯대 나는 지표라 여겼다.
교양이란 긴 세월에 걸쳐 쌓이면서 서서히 몸에 스며드는 것--그 내면이 야단스럽지 않게 은연 중에 표출되어야 한다. ‘고상틱’한 자세를 들먹이며 왜 저속한 ‘구라식구’ 창가를 부르느냐는 힐난조의 어조에 대하여는 ‘비속취미’라는 말을 갖다 붙인다. 비속취미(卑俗趣味)란 ‘격이 낮고 속되지만 멋을 이해하고 감상하는 능력’이란 뜻이다. 고상한 인품과 교양을 지닌 상류계층에 속하기 때문에 그에 걸맞게 천박하지 않고 격 높은 아름다움이나 멋을 이해하고 감상하는 ‘고상한 취미’라는 말과 대척적(對蹠的)인 어구다. 여기에 언급되는 ‘비속취미’라는 말은 ‘고상한 취미’를 강조하기 위하여 동원된 어구일 뿐이다. 자신의 고상함이 짐짓 비속해 보일지 모르지만 통속적인 사람들과도 함께 할 수 있는 ‘공감적 취미(?)’ 쯤도 지니고 있다는, 무슨 보시(布施)라도 하듯 내보이는 오만함이 엿보인다. * 상류층이 하류층의 문화에 탐닉하여 비속취미를 채우는 이야기는 희랍신화에서도 엿볼 수 있다.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비너스)는 “아프로디테 포르네(Aphrodite porne: 음란한 아프로디테)”란 별명에 어울리게 하계의 인간에까지 비속적 육욕의 손길을 뻗었다. 그녀는 이다(Ida)산의 안키세스(Anchises)라는 양치기 인간을 유혹하여 그 가슴에 안긴다. 신이 인간세계에게서 비속취미를 찾게 되니 신과 인간의 경계는 무너진다. 비록 비대칭적 애정관계일지라도 성적 대상으로만 비하하기보다 위계적 경계를 뛰어넘어 신의 지위가 아니라 한갓 여인으로 인간남자를 유혹한다. 미국 남부에서 노예제도가 한창 기승을 부리고 있을 때 이상하게도 노예들의 자살률보다 노예주들의 자살률이 높았다고 한다. 비참한 노예들의 자살률이 높을 것 같으나 실제로는 그 반대였다. 흑인노예들은 블루스를 부르며 함께 노래함으로써 고통과 우울을 떨쳐내고 자살을 막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노예주들에게도 그들만이 즐길 수 있는 고전음악이 있었지만 우울에 대한 대처로는 역부족이었다는 것이다. 목화밭에서 노동하던 흑인노예들이 즐겨 부르던 블루스음악은 아프리카 원산의 음악 전통을 유럽의 음악과 접목하여 탄생시킨 단순한 대중음악이지만 저절로 몸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 있다. 고된 노동, 압박과 설움, 분노에 베인 흑인노예들의 상처를 어루만져주며 위로해주었다.
대중가요에 비하여 클래식은 음악과 몸동작이 분리되어 있다. 클래식 연주회장에서는 오직 지휘자만이 몸을 움직일 수 있다. 음악이 연주되는 동안 청중은 꼼짝하지 말아야 한다. 지휘자의 격렬한 지휘 동작에서 몸 움직임의 대리만족을 얻을 뿐이다. 몸으로 느낄 수 없는 음악은 현대 대중들에게는 그 매력을 잃고 있단다. 그래서 서구 클래식이 인기를 잃어간다는 견해는 터무니없는 주장만은 아니다.
이태리로 유학 간 어느 성악가는 어려운 공부에 지치고 고향이 그리워질 때면 고국에서 자주 듣던 유행가를 부르면서 향수를 달래곤 하였다고 털어놓은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대중가요 한 곡은 3분에 불과하지만 가슴에 와 닿는 느낌은 그 파고가 높다. 어렵고 힘들 때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비속취미’의 ‘구라식구’가 고개를 든 것이겠다.
“역사는 일인(一人)의 자유에서 만인(萬人)의 자유로 이행해 오는 과정”(야스퍼스Karl Jaspers)이라 하였다. 왕 한 사람만 자유를 누리다가 점차 일반백성들이 자유를 누리는 대중사회로 발전해 왔다는 것이다. 대중이 모두 자유를 누리게 되었지만 윤리적 질서는 혼란해지고 사회는 저질화 비속화되었다. 자유를 누릴 자격이 없는 자들이 늘어나고 생존경쟁은 치열해졌다. 경쟁 상태에서는 비교의 심리가 곧잘 작동한다. 타인과 비교해서 자신의 지위를 확인하고 타인들보다 우위에 있어야 한다는 의식에 사로잡힌다. 자신이 누구인가보다 어느 계층에 속하는가를 먼저 따진다. 이런 심리는 “내가 비즈니스 석 타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아, 내 친구들이 이코노미 석을 타야지!”로 잘 표현된다. ‘비교우위’ 의식의 작동이다[심리학자 페스팅거]. ‘비속취미’와 ‘고상한 취미’라는 이분법적(二分法的) 계층 분류가 자생한다. ‘비속취미’와 대척적인 관계에 있는 ‘고상한 취미’는 자칫 ‘사치욕구’와 동전의 앞 뒤 면과 같다. 사치는 ‘필요’나 ‘유용성’에 앞서 비교우위를 추구하는 매우 인간적인 속성이다. 상류층의 사치적 소비행태는 하류층에게까지 퍼져나가는 경향이 있다. 상류층이 즐긴다고 알려졌던 귀한 음식을 하류층이 마침내 맛보게 되면 억눌렸던 식욕이 증폭하여 소비가 급증한단다. 하나의 과일밖에 갖지 못한 소년이 새로운 과일을 맛보게 되면 처음 과일은 내치는 것과 같다. 일단 대중화되고 나면 그 음식은 금방 매력을 상실하는 데서 사치의 속성을 알 수 있다. 사치는 사회적 성공과 매혹을 뜻하지만 언젠가는 하류계층 사람들에게 현실화되는 욕망의 표상이기도 하여 계층 간의 경계를 소멸시키는 데 기여하기도 한다. 비속취미가 상류계층이 하류계층 문화에 도취되는 하향적 과정이라면, 사치욕구는 하류계층이 상류계층 문화에 젖어드는 동인(動因)이 될 수 있다.
“말똥구리는 제가 굴리는 말똥을 사랑하므로 용의 여의주를 부러워하지 않고, 용 또한 자기에게 여의주가 있다 하여 말똥구리를 비웃지 않는 법이다.”[연암 박지원]. 말똥은 더럽고 천(賤)하며 여의주는 깨끗하고 귀(貴)하다는 통념을 일시에 무화시킨다.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 처해질지라도 인간의 존엄, 자존, 공존의 의식은 버릴 수 없다. 다만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지는 알아야 한다. 비속취미에 마음이 쏠리든 사치욕구에 사로잡히든 그윽한 깊이 없는 아름다운 표면은 존재하지 않는다. 멋있고 아름다운 정신을 어루만져주는 여유는 있어야 하는 것. “우아함이나 사치의 반대는 빈곤이 아니라 천박함”이라고 설파한 패션 디자이너 가브리엘 샤넬(Channel)의 말은 새겨들을 만하다. 우리 속담에 “닭장이 아무리 좋아도 봉황은 깃들지 않는다” 하였다. ‘봉황’은 인간의 존엄과 자존과 공존의 심성을 지닌 사람의 은유이겠다. ‘비속취미’에 탐닉하는 상류층이든 ‘사치욕구’에 현혹되는 하류층이든 어떤 사람은 어려움을 견디며 살아가고 어떤 사람은 즐기며 살아가는 것이다. 삶은 아무래도 공평하지가 않다. 사람은 결국 자기 수준에서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 아니겠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