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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공원에 조성된 여흥민씨 조형물.전면/대전중구 | ||
뿌리공원에 조성된 여흥민씨 조형물.후면/대전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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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공원에 새겨진 여흥민씨 유래>
우리겨레는 고래로 하늘을 공경하고 조상을 숭배하며 도덕을 숭상하고 절의를 존중 하여 왔으며, 어질고 착하고 예의 바른 민족으로서 東方仁國을 이루어 왔다. 우리 閔門의 조상들은 여러 가지 미덕과 양풍을 이어받아 부모님께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 하면서 연면하게 이나라를 빛내며 명예로운 생활을 하여왔다. 빛나는 공적을 세운 일을 모두 기록할 수 없으므로 주로 충절활동을 소개하여 후세의 교훈이 되며 귀감이 되도록 하고자 한다.
여흥민씨의 본관 여흥은 현재의 경기도 여주의 옛 이름이며 여흥단본으로 통하고 있다. 시조는 고려때 尙衣奉御(상의봉어)를 지낸 휘(稱道)칭도이며, 여흥민씨는 조선왕조 때 네분의 왕비를 배출하였으니 즉 태종비 元敬王后(원경왕후), 숙종비 仁顯王后(인현왕후), 고종황제비 明成皇后(명성황후), 순종황제비 純明皇后(순명황후)등이다. 원경왕후는 성군 세종대왕의 어머니이시며, 인현왕후는 예의 바르고 정숙하신 분이시며, 명성황후는 기울어 가는 왕조와 나라를 위하여 勞心焦思(노심초사) 정성을 다하신 분이시다.
고려조가 망하자 절개를 지켰던 杜門洞(두문동) 諸賢 가운데 민씨로는 安富(안부) 농은공, 普文(보문) 소윤공, 愉(유) 여흥군 세분이 있으며, 임진왜란 때는 汝雲 (여운) 仁老(인로)등 의병장들과 호성공신 希騫(희건) 여원군을 위시하여 많은 민문종족이 용감하게 왜적과 싸웠으며, 병자호란 때는 騂(성) 충민공과 그의 아들 3형제등 가족13명이 모두 순절하였으며 경상 우병사 櫺(영) 충장공도 순절하였다. 한말인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泳煥(영환) 충정공은 백관을 이끌고 궁궐에 연좌하여 조약의 파기를 상소하였으나 일본 헌병들의 강제 해산으로 실패하자 국민에 고하는 애절한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여 순국하였다.
뒤에 그 혈의를 두었던 곳에 푸른 대나무 몇 줄기가 마루의 틈새로 돋아나와 푸르고 늠름한 모양을 띠었으니 그것을 血竹(혈죽)이라고 한다. 한말과 왜정시대를 거치면서 충정공 이외에도 肯鎬(긍호), 宗植(종식)등 의병장들과 致道(치도), 弼鎬(필호) 등 독립운동가들이 목숨을 바쳐서 왜병과 싸워 전사하거나 옥사하였으며 혹은 만주벌판과 중국광야에 서 風餐露宿(풍찬노숙)하면서 일편 단심 겨레의 생존과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투쟁 하였으니 그 우국충정을 길이 우리 마음에 깊은 감동을 주게 될 것이다.
이제 우리 후손들은 선조의 父母孝養(부모효양)하고 見善必行(경선필행)하며 患難相救(환난상 구)하고 隣里和同(인리화동)하던 옛 미풍을 오늘에 되살려 국가사회 발전의 一翼 (일익)이 되고자 한다. 우리선조의 거룩한 大義를 밝혀서 百世淸風(백세청풍)의 아름다운 良俗이 이어지고 도덕정신 發揚(발양)되도록 하자고 하는 뜻에서 이 조형물을 세운다.
1997년 9월20일
여흥민씨 대종중
여흥민씨(驪興閔氏) -현대인물
민복기(대법원장).민관식(국회의원.문교부장관.국회의장직무대리).민병기(국회의원.내무장관).민경천(홍익대총장).민장식(문교부차관).민유동(총무처차관).민석홍(서울대교수).민병초(국회의원).민병훈(재무부차관).민희식(초대교통부장관).민수홍(원자력청장).민준식(전남대총장).민문기(대법관).민세홍(판사).민병철(서울대교수).민영남(전남지사.국회의원).민후식(해태유업회장).민중기(대한제당대표).민제영(롯데제과대표).
민병순(경희대치과대학장).민병훈(변호사).민병채(부산대교수).민영규(연대명예교수).민병갑(전남대교수).민동근(충남대교수).민영복(중앙대교수).민만기(고려대교수).민명언(해양대교수).민방기(전남대교수).민경범(변호사).민희식(한양대교수).민철홍(서울대교수).민장식(서울대병원근무).민경찬(전주교대교수).민병호(전북대부고교장).민승기(의학박사).민승원(서안복음병원장).민병구(서울의대교수).민진식(연대교수).민병섭(충남대교수).민수홍(인하대교수).민영옥(부산대교수).민영재(삼육재활원장).민윤식(서예가).민복진(조각가).민이식(동양화가).민건식(검사).민병섬(인천적십자결핵요양원장).민병훈(민소아과원장).민흥식(대검검사.변호사).민영기(국립천문대장.이학박사).민헌기(서울대교수).
민기식(육군참모총장.국회의원).민석원(정우개발회장).민병도(경춘관광개발).민경희(숙대이과대학장).민규호(언론인).민인식(판사).민영일(경희대교수).민병구(서울대교수).민병석(의학박사).민병천(동국대교수).민수홍(인하대교수).민정식(의학박사).민병구(충남도립병원장).민동식(변호사).민병근(중앙대부총장).민두식(서울대교수).민양기(서울대교수).민관식(홍익부고교장).민정박(전북대법대학장).민건식(의학박사).민영룡(의학박사).민상식(제중병원정형외과).민성길(연대교수).민홍기(이대교수).민만식(외대교수).
민병순(단대교수).민영순(숙대교수).민희식(이대교수).민병용(농학박사).민경갑(동양화가).민경식(수산한의원장).민영덕(초등교교장).민병국(변호사).민화식(신경과의사).민경대(전적십자사충남지사장).민병연(전삼동국민학교장).민병수(공주고.대전고 교사.고교교장).민동근(충남대명예교수).민명기(閔明基,대전 유성 노은동 열매마을 910동2005호.전대전월평초등학교교장.여흥민씨뿌리연구).민제홍(대전시관리공단본부장).민인홍(하나은행대전시청지점장).민경완(공주영명고교사) 등등
여흥민씨(驪興閔氏)
호당에 6명 문과급제자 234명,인현왕후.명성황후
등 왕비 4명 화려한 예가종문
최초교과서 <동몽선습>은 공술(共述)한것, 민제인이 찬(撰)
여흥민씨(驪興閔氏)의 본관인 여흥(驪興)은 경기도 여주의 옛 지명으로 신라 경덕왕 때 황효현으로 고쳤고 고려초에는 황려현,고종 때는 영의(永義)로 개칭되었다.
조선 태종때는 여흥부(驪興府)였고 예종때 여주목(牧)으로 하여 1914년에 여주군이 되었다.
여흥민씨 관향비(驪興閔氏 貫鄕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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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흥민씨 유래>
민씨(閔氏)의 유래(由來)에 대해서는 양설(兩說)이 있다. 그 하나는 중국 민자건(閔子騫.민손 閔損)의 자손이라 했고, 또 다른 설(說)은 경기도 여주(驪州)에 있는 민굴(閔窟)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민굴설(閔窟說)은 태고시대 신화(神話)에나 나오는 신빙성이 없는 말이며 중국에서 나왔다는 설(說)은 시대적으로 보나 문헌상(文獻上) 증거가 있어 과학적이라고 해석(解釋)된다고 밝히고 있다.<여흥민씨 대종중>
<여흥민씨대종중>은 고려때 동국이상국집을 지은 이규보(李奎報,백운거사)가 상시민공식(常侍閔公湜,상시는 우산기상시(정3품 벼슬) 민 식)에게 올린 시(詩)에 "세가전벌열(世家傳閥閱) 계출(系出) 비후현(費候賢)"이라고 하여 세가의 전해온 벌열은 비후(費侯:비후는 노나라 비(費)땅의 수재 守宰)인 민자건(閔子騫)에게서 나왔다고 하였고, 또 학자들이 민씨(閔氏)를 문장(文章)으로 표시할 때는 요요 화주(華胄)라 하고(요요 화주(華胄)는 중국에서 나온 민자건(閔子騫)의 자손이라는 말) 혹은 문수화벌(汶水華閥)이니 문수후예(汶水後裔)라고 많이 쓰고 있다.
문수(汶水)는 논어(論語)에 민자건(閔子騫)이 오기재문수지상(吾基在汶水之上)이라 하는 말에 근거한다.
또한 일부문헌에는 ""<…민씨(閔氏) 계출중국농서(系出中國瀧西) 금지감숙성(今之甘肅省) 난주야(蘭州也) 주경왕시(周敬王時) 서기 1010년전 유민손이한무제시(有閔損而漢武帝時) 유민중숙지고기야(有閔仲叔之古記也) 아여흥민씨지시조(我驪興閔氏之始祖) 민칭도이(閔稱道而) 고려상의봉어(高麗尙依奉御)…>라는 문헌으로 보아 중국에서 나왔다는 말이 신빙할 수 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로 설명하고 있다.
<번역> <..민씨는 지금의 감숙성 난주인 중국 농서에서 계출되었다.
서기 1010년전에 주나라 경왕때 민손이 있었다는 한무제때 민중숙의 옛기록이 있다.
우리 여흥민씨의 시조는 민칭도인데 고려 상의봉어 이시다>
민자건은 공자(孔子)10 제자의 한사람으로 효성이 지극하고 예절에 밝았다고 한다.
따라서 민문(閔門)을 예가(禮家)의 종문(宗門)이라고 한다.출처-(여흥민씨대종중)
<편집자주> ...고려상의 봉어(高麗尙依奉御)의 기록은 고려상의봉어(高麗尙衣奉御)의 오기인듯.. 상의봉어(尙衣奉御)는 고려때 임금의 옷을 공급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청인 상의국(尙衣局)의 정6품 벼슬이 봉어(奉御)임.
경모재(景慕齋) 4세조 고려 태자태사(太子太師:정1품 벼슬)에 오른 문경공(文景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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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명기(閔明基:전대전월평초등학교교장)의
"일부내용 반론 및 동몽선습(童蒙先習)은 민제인 찬(撰)"
그러나 여흥민문(門)의 뿌리에 대해 다년간 연구(硏究)해온 민명기(閔明基,대전시 유성구 노은동)는 <여흥민씨>의 유래에 대해 "민자건의 후예"라고 주장하는 것은
"모화사상"의 발로 임을 강조한다.
민명기선생은 "중국의 경우 도서공정.동북공정에 이어 이제는 성씨공정(姓氏工程)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즉 중국에서 계출된 세계의 모든 성씨는 곧 중국인이라는 인식하에 공정(工程)을 시작한거죠"
그는 이런 싯점에 우리 스스로 우리의 뿌리에 대한 정체성을 명확히 해야한다고 강조한다.
더구나 백운거사 이규보선생이 민 식(閔湜)에게 올린 시(詩)중에 "..세가전벌열(世家傳閥閱) 계출(系出) 비후현(費候賢)"이라는 구절을 단순 인용하여 여흥민문의 유래를 단정짓는 것은 무리가 많다고 반론을 제기 하였다.
당시 백운거사 이규보는 많은 낭사(郎舍)들에게 올린 고율시(古律詩)중 우산기상시(정3품 벼슬) 민 식(閔湜)에게도 올린 시(詩) ."...계출비후현(系出費侯賢).."의 근거로 민씨의 유래가 "민자건"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지나친 확대해석이라고 말했다.
민명기는 여흥민씨의 뿌리는 시조 민칭도 이전 상계(上系)에 대한 정확한 문헌을 찾는 것은 현대를 사는 우리와 후대의 몫으로 둬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명기는 시조 민칭도 이전 상계(上系)의 문헌 발굴을 위해 지속적인 연구를 해나가겠다고 밝혔다.
민명기(閔明基), 동몽선습(童蒙先習)의 저자 수정보완요구
일반적으로 동몽선습(童蒙先習:최초의 아동 교과서)의 저자는 박세무로 알려져왔으나,1981년 서지학자 안춘근이 1543년 평양에서 초간된 민제인 찬(撰) 윤인서 발문의 동몽선습 목판본이 발견되면서 동몽선습의 저자는 민제인(閔齊仁:평안감사 지냄)을 비롯한 공술자(共述者)가 있음이 처음 밝혀졌다.
또한 1989년 서지학자 유부현의 석사논문에서도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된 1541년 박세무 친필본이라는 동몽선습 필사본이 1742년 이후에 박세무가 아닌 다른사람이 고의로 박세무가 쓴 것처럼 위작(僞作)한 것이라고 규명하였다.
여흥민씨 민명기(閔明基,대전 유성 노은동 521번지 열매마을)는 상기와 같은 사실을 토대로 최근
한국학중앙연구원 민족문화대백과사전 편찬실에 <동몽선습>의 잘못된 내용을 수정보완해줄것을 요구하고 증빙자료를 제출했다.
우산기상시(右散騎常時;정3품벼슬) 민 식(閔湜)에게 올린 시(詩)
저자 이규보(李奎報,1168~1241.백운거사)-고려의 문인이며 문신이다. 명문장가로 그의 시풍은 당대를 풍미하였고 저서에 <동국이상국집> <국선생전>이 있으며 작품에는 <동명왕편>이 있음.
*내성(內省)의 제랑(諸郞:모든 낭사에게 올림)에게 올리다*
무오년(戊午年:서기 1198년)
<내성(內省)은 내사문하성(內史門下省)으로 고려때 최고중앙의정기관으로 문하성을 합한명칭이며 뒤에 내사성을 중서성(中書省)으로 개칭하여 중서문하성으로 고침. 최고벼슬은 종1품 내사령이고 문하시중을 지낸사람이 맡음>
우산기상시(右散騎常時:고려때 중서문하성의 낭사(郎舍)로 정3품 벼슬.뒤에 우상시로 고침)민 식(閔湜,후에 형부상서 지냄)에게 올리다
예전부터 대대로 벌열로 내려와 / 世家傳閥閱
조상에는 비후 같은 분을 모셨네 / 系出費侯賢
*비후(費侯)-비후는 민자건을 노(魯)나라 비(費) 지방의 수재(守宰)로 삼은것을 말한듯(?)*
난옥에 쌍 가지 빼어나 / 蘭玉雙枝秀
무지개처럼 한 기운이 연했구나 / 虹霓一氣連
벼슬길에 형제가 순탄히 승진되어 / 雲梯同坦步
좋은 자리 서로 번갈아 하네 / 仙省迭相遷
나무에는 닭이 교대해 깃들고/ 樹代鷄新舊
하늘에는 기러기가 앞뒤로 나는구나 / 天分雁後先
우산기(右散騎:우산기상시)는 최고 영광스러운 자리니 / 右貂榮最劇
방승하는 은총 한 몸에 듬뿍 받았네 / 旁乘寵何偏
오색 실로 임금의 곤룡포(袞龍袍)를 꿰맸으며 / 五色絲縫袞
시편(詩篇)은 삼장(三丈)의 눈처럼 청신하구나 / 三條雪入篇
주금이 이제부터 뛰어나오게 되었으니 / 鑄金從踴躍
새 새끼가 날아 다니도록 도와 주오 / 翼鷇助騰騫
도리(桃李)밑에 나 있는 오솔길이 사랑스러워 / 爲愛蹊成下
화벽(和璧)을 가지고 외람되게 앞을 바치오 / 叨將璧至前
* 화벽(和璧:화씨지벽 和氏之壁)-천하의 명옥(玉)으로 한비자가 어리석은 군주를
깨우치기 위해 화씨의 옥(玉)을 비유로 설파한것.
조만 간에 송곳을 주머니에 넣어 주시고 / 囊錐容早晩
환선은 설마 중도에 안버리실테고/ 紈扇豈中損
*환선(紈扇)-얇은 깁으로 만든 부채.
더구나 우리는 척분(戚分:성은 다른데 일가가 되는 관계)이 있는 처지니 / 况接葭莩幸
평생에 그 인연을 믿으렵니다 / 平生恃淺緣
민씨(閔氏)는 중국 농서현에서 나온 성씨(姓氏)로 성인(聖人) 공자의 10 제자 중 한사람인 민손(閔損,민자건)의 후손 민칭도(閔稱道)가 고려 중엽에 사신으로 왔다가 귀화하여 여흥(여주)에 정착한 것이 우리나라 민씨(閔氏)의 시초가 된다.
민씨(閔氏)의 본관은 여흥을 비롯하여 황려.영주.여주.해남.대전민씨 등 32본이 있는 것으로 전해지나 모두가 같은 뿌리로 여흥민씨(驪興閔氏)의 세거하는 지명(地名)이라고 한다.
민씨는 시조 민칭도(閔稱道)의 증손 민영모(閔令謨)가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정2품벼슬)를 거쳐 태자태사(太子太師:정1품 벼슬)에 이르렀으며,
신종때 형부상서(刑部尙書:정3품 벼슬.법무부 장관)에 오른 아들 민 식(閔湜)과 판병부사(判兵部事)와 태자소보(太子少保:고려때 동궁의 2품 벼슬로 태자의 스승)를 지낸 민공규(閔公珪) 형제가 가문의 양대 산맥을 이루어 가세를 크게 일으켰다.
상서공(尙書公) 민 식(閔湜)의 후손에서는 증손 민 지(閔漬)가 여흥군(驪興君)에 봉해졌으며, 문장이 뛰어나 [세대편년절요]와 [본국편년강목]을 저술했고 아들 민상정(閔祥正)과 민상백(閔祥伯)이 가문을 빛냈다.
조선 초기의 인물로는 여평군 민 적의 손자 민 제(閔霽)와 민 개(閔開) 형제가 유명했다.
공민왕때 19세로 문과(文科:문신을 뽑기위한 과거.대과)에 올랐던 민 제는 예조판서(禮曹判書:정2품 벼슬.장관)와 한양부윤(府尹:조선조 종2품의 외관직)을 역임했고,조선 태조때 정당문학(政堂文學:중서문하성의 종2품 관직)에 올라 여흥백(驪興伯)에 봉해졌다. 그는 사치와 오만을 배격하였으며 병자에게 약(藥)을 주는 국민보건운동에 앞장섰다고 한다.
그는 아들 민무구(여강군 驪江君),민무질(여성군 驪城君),민무휼(한성윤 漢城尹),민무회(여산군)형제를 두었는데 이들은 태종비 원경왕후(元敬王后)의 동생들이다.
민무구는 1398년(태조7) 중군총제(中軍摠制:각 군영의 대장.절도사.통제사 등에 버금가던 장군을 중군)로서 [제1차 왕자의 난]때 공을 세워 정사일등공신(定社一等功臣)에 책록되고 여강군(驪江君)에 봉해졌다.
그는 1402년(태종 2) 승추부참지사(承樞府參知事)를 지냈는데 아버지 민 제(閔霽)의 우려대로 서기1407년 동생 민무질(閔無疾) 및 신극례(辛克禮) 등과 종친간의 이간을 꾀하였다가 이 화(李和)등의 탄핵으로 연안(延安)에 유배되어 사사되었다.
명종과 선조대의 명신 민 기(閔箕)는 여흥민씨(驪興閔氏)의 중흥인물이다.
민 기(閔箕,1504~1568)는 김안국의 문인으로 중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고 호는 관물재.시호는 문경이다.
그는 서기1539년(명종 34)에 문과(文科:대과)에 급제하고 대사간(大司諫:왕에게 간하던 일을 맡아본 관청인 사간원의 으뜸 정3품 벼슬)과 대사헌(大司憲:백관을 규찰하던 사헌부의 종2품 으뜸 벼슬).병조참판(兵曹參判:종2품벼슬.국방부 차관).이조참판(吏曹參判:종2품 벼슬.차관)을 거쳐
홍문관 제학(弘文觀 提學:홍문관은 삼사(三司)의 하나 경서와 사적의 관리 문한의 처리 및 왕의 자문에 응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아.제학은 홍문관의 종2품 벼슬)과 한성판윤(判尹:정2품 외관직인 한성부 장관)에 올랐으며 우참찬(右參贊:의정부의 정2품 벼슬)을 거쳐, 선조때 우의정(右議政:정1품 벼슬.의정부 정승)에 이르렀다.
우암 송시열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했던 민정중(閔鼎重)은 참찬의정부사를 지냈으나 숙종이 즉위하자 남인(南人)의 득세로 장흥부에 유배되었다가 <경신대출척>으로 풀려나와 좌의정(左議政:의정부 정1품 벼슬.정승)에 올랐다.
민유중 신도비(神道碑) | ||
민유중(閔維重,1630~1687.시호 문정) 민유중의 본관은 여흥(驪興)이며 자는 지숙(持叔). 호는 둔촌(屯村). 시호는 문정(文貞)이다.숙종의 비(妃) 인현왕후(仁顯王后)의 아버지이다. 1650년(효종 1) 증광문과(增廣文科:증광은 나라에 경사가있을때 기념으로 보던 과거)에 급제하고 예문관을 거쳐, 1674년(숙종 즉위년) 호조판서(判書:정2품 장관)가 되었다. 이때 자의대비(慈懿大妃)복상문제가 일어나자 대공설(大功說)을 따랐다. 1681년(숙종7) 딸이 숙종의 계비가 되자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에 책봉 되었다. 노론(老論)에 속했으며 경서(經書)에 밝아 명망이 높았다. <비문해설> 세자사 시 문정 민공신도비.(世子師 諡 文貞 閔公神道碑) 세자찬선 권상하 찬 (世子贊善 權尙夏 撰) 우참찬 민진후 서(右參贊 閔鎭厚 書) 진무사 민진원 전(鎭撫使 閔鎭遠 篆) *세자사(世子師)-동궁에 소속되어 세자(고려때는 태자)의 교육을 담당하던 관직으로 덕행이높고 학문이 뛰어난 정승급의 신하가 임명됨. *찬선(贊善)-세자시강원에 속하여 왕세자의 교육을 맡아보던 정3품 벼슬로 역시 덕망과 학행이 뛰어난 사람을 뽑았음. *진무사(鎭撫使:조선시대때 진무영(營)의 으뜸 벼슬로 부윤(府尹:2품벼슬)이 겸임함. 권상하(權尙夏,1641~1721,호는 수암.시호는 문순.우암송시열의 수제자) 권상하는 조선 중기의 학자로 본관은 안동이며 서울에서 출생했다. 자는 치도(致道).호는 수암(遂菴).한수재(寒水齋).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1660년(현종 1) 19세로 진사(進士)가 되었으나,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의 제자로 학문에 전심했으며, 송시열의 수제자가 되었다.숙종이 특히 총애하여 우의정.좌의정을 제수하였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민진후(閔鎭厚,1659~1720.시호 충문)-민진후는 민유중의 아들로 인현왕후의 오빠다. 충청도관찰사.한성판윤(判尹:서울시장.정2품 벼슬).의정부 우참찬(정2품 벼슬) 지냄. *민진원(閔鎭遠)-민유중의 아들로 민진후의 동생이며 인현왕후의 남동생이다. 전라도 관찰사.좌의정(정1품 정승).영중추부사(領中樞府使:왕명을 출납하고 궁중을 숙위하던 정1품 벼슬로 정승을 지낸사람이 맡음)에 이르렀고 어머니는 송준길의 딸이다. 민진원은 노론의 영수였음.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민유중(閔維重,1630~1687.시호 문정)묘 전경 |
숙종 때 명망이 높았던 민유중은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장흥의 연곡서원과 벽동의 구봉서원에 제향되었고 그의 딸이 숙종의 계비인 인현왕후이다.
민유중의 증조부는 민여건(閔汝健)이고 조부는 경주부윤(府尹:2품 지방장관)을 지내고 영의정에 추증된 민 기(閔機)이며 아버지는 강원도관찰사(觀察使:종2품.감사)를 지낸 민광훈(閔光勳),어머니는 이조판서를 지낸 연안이씨 이광정(李光庭)의 딸이다.
민유중(閔維重,1630~1687.시호 문정)의 자는 지숙(持叔).호는 둔촌(屯村).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1650년(효종 1) 증광문과(增廣文科:증광은 나라에 경사가있을때 기념으로 보던 과거)에 급제하고 예문관을 거쳐, 1674년(숙종 즉위) 호조판서(判書:정2품 장관)가 되었다. 이때 자의대비(慈懿大妃)복상문제가 일어나자 대공설(大功說:9개월)을 따랐다. 1681년(숙종7) 딸이 숙종의 계비가 되자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에 책봉되었다. 노론(老論)에 속했으며 경서(經書)에 밝아 명망이 높았다.
민진후(閔鎭厚,1659~1720.시호 충문)는 민유중의 아들로 인현왕후의 오빠다.
충청도관찰사.한성판윤(判尹:서울시장.정2품 벼슬).의정부 우참찬(右參贊:의정부의 정2품 벼슬)을 지냈다.
민진원(閔鎭遠)은 민진후의 동생이며 인현왕후의 남동생이다.
민진원(閔鎭遠)은 누이인 인현왕후가 복위되자 등용되어 병조정랑(兵曹正郞:정5품 벼슬로 전랑이라함.품계에 비해 그 권한이 대단했음)과 사복시정(司僕寺 正:고려.조선조에 궁중의 수레와 말 따위를 관리하던 관아.그곳의 벼슬)을 거쳐 전라도 관찰사(觀察使:종2품 외관직 벼슬.감사)로 나갔다.
후에 신임사화로 성주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와 우의정(右議政:정1품 벼슬.정승).좌의정(左議政:정1품벼슬.정승),영중추부사(領中樞府使:왕명을 출납하고 궁중을 숙위던 정1품 벼슬로 정승을 지낸사람이 맡음)에 이르렀고 어머니는 송준길의 딸로 노론(老論)의 영수였다.
인현왕후(仁顯王后) 어진(御眞) |
증 영의정 민기(閔機)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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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기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어릴 때부터 효성과 우애가 극진하였으며, 제주목사(牧使:정3품 외관직)로 재임 중에는 탐관오리를 숙청하고, 부역과 조세를 가볍게 하여 백성들의 신망을 크게 얻었다고 한다.< 충북 제천시 백운면 도곡리 1리 25번지 우경마을> |
여양부원군 민유중(閔維重)의 5세손인 민치록은 딸이 명성황후(조선 제 26대왕 고종의 비.초대황제 고종의 비)가 되자 여흥민씨의 세도정치(勢道政治:조선 정조 이후 세도가에 의해 좌우되던 정치)가 다시 시작되었다.
명성황후는 16세 때 왕비로 간택되어 한말 국내외의 정치적 거센 바람을 한 몸으로 감당하며시아버지 대원군(大院君:왕위를 이을 적자가 없어 왕족중에서 왕위를 이어 받을 때 그 임금의 친아버지에게 봉하던 작위)과 권력 싸움으로 파란 많은 일생을 살았다.
고종황제비 명성황후 어진 |
그밖의 인물로는 민치록의 아들 민승호(閔升鎬)가 여동생 명성황후를 도와 국정전반에 참여하여 민씨일족의 거두(巨頭)였으며 영의정(領議政:정1품 벼슬. 정승)에 오른 민규호(閔奎鎬)와 함께 명성을 떨쳤다
한말의 순국열사 민영환(閔泳煥:1861~1905.호는 계정.민겸호의 아들로 민태호에게 입양)은 여흥민씨가 자랑하는 인물이다.
그는 한말의 문신으로 1871년 대과에 장원급제하고 초고속승진을 거듭하여 1882년 21세때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정3품 으뜸벼슬). 예조판서.형조판서.병조판서(兵曹判書:정2품 벼슬.국방부 장관)를 비롯한 한성판윤(判尹:정2품 외관직 벼슬) 등 여러 요직을 역임한 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미 대세가 기울어짐을 보고 전동 이완식의 집에 가서 "아, 나라의 수치와 백성의 욕됨이 이에 이르렀으니……"로 시작된 유서 3통을 남기고 자결했다.
그가 자결한 후 피묻은 옷을 지하실에 간직하고 그 방을 봉했는데 이듬해 봄 그 자리에서 대나무가 솟아올라 사람들은 이것을 그의 충절을 말하는 혈죽(血竹)이라 불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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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정공 민영환(1861~1905.시호 충정 忠正) 독립협회의 핵심인 정 교(鄭喬)는 현재 정부 요인중 국민이 신임할 수 있는 인물은 한규설과 민영환밖에 없으므로 민영환을 군부 대신과 경무사에 임명하면 민심이 수습될 것이라고 고종에게 상주 하였다. 민영환은 1905년 11월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여 외교권을 박탈하자 죽음으로 항거할것을 결심하고 본가에서 자결하였다.
충정공 민영환의 혈죽(피를먹고 자란 대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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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외에도 민영익(閔泳翊),민종식,민긍호(閔肯鎬),민치도(閔致道),민형식(閔衡植),민제호(閔濟鎬),민필호(閔弼鎬) 등이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겨레와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여흥민씨를 더욱 빛나게 하였다.
1985년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민씨는 총 33,706가구에 인구는141,328명으로 나타났으며,
지난 2000년에는 43,887가구에 인구는 142,572명으로 조사되었다.
관향인 여흥은 지금의 경기도 여주의 옛 지명으로1896년에 경기도 여주군이 되었고 여성(驪城)이라는 별호가 있었다.1914년 군.면 폐합으로 관할 15개 면을 9개로 통합하였고,1941년에 여주면이 여주읍으로 승격하고 현재는 여주시가 되었다.
여흥민씨(驪興閔氏)는 조선조에 왕비 4명을 배출하였고 상신(相臣:정1품 정승)12명,대제학(大提學:홍문관.예문관의 정2품 벼슬.문형) 3명,호당(湖堂:문과 출신중 덕망과 학행이 뛰어난 인재를 선정하여 장의사(藏義寺)에서 사가독서를 한데서 비롯되었는데 최고의 영예로 여김)에 6명이나 들어 명성을 떨쳤고,
청백리3명,공신 7명,문과급제자 234명을 배출하여 문과급제자 제6위의 명문중(名門中)이다.
여흥민씨는 조선시대에 문과(文科:대과)에 234명,무과(武科;무관을 뽑던과거로 시험은 무예와 병서)에 27명,사마시(司馬試:생원.진사를 뽑던 과거)에 465명,역과에 5명,음양과(陰陽科:천문.지리 등에 밝은 사람을 뽑던 과거)에 1명 등 모두 732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여 큰 명성을 날렸다.
본관소재지 : 경기도 여주
여흥(驪興)은 경기도 여주시의 옛 지명으로 고구려 때에는 골내근현과 술천성이 있었다.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황효현으로 바뀌었고 기천군의 관할에 들었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황려현으로 바뀌었다가 1018년(현종 9)에 원주에 영속되었다. 1257년(고종 44)에 영의현으로 개편되었고, 1305년(충렬왕 31)에 여흥군으로 승격하였다. 이후 1388년(우왕 14)에 황려부로 다시 승격하였다가 1389년(공양왕 1) 여흥군으로 강등되기도 하였다. 1401년(태종 1)에 음죽현의 북부를 편입하여 여흥부로 승격되면서 관할이 충청도에서 경기도로 변경되었다. 1413년(태종 13)에는 도호부가 설치되었고 1469년(예종 1)에 세종대왕 능인 영릉을 왕대리로 옮기면서 천령현을 병합하여 여주목으로 승격하였다. 1501년(연산군 7)에 여주목을 폐하고 충주부(忠州府)의 관할하에 두었다. 1895년(고종 32)에 충주부 여주군이 되었고, 1896년에 경기도 여주군이 되었다. 여성이라는 별호가 있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관할 15개 면을 9개로 통합하였고, 1941년에 여주면이 여주읍으로 승격하였다.
인물
민칭도(閔稱道)의 증손 민영모(閔令謨)가 고려 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이부 원외랑(吏部員外郞)을 지내고 명종이 즉위하자 왕의 총애를 받았으며, 벼슬은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거쳐 태자 태사(太子太師)에 이르렀고, 신종 때 형부 상서(刑部尙書)에 오른 아들 민식(閔湜)과 판병부사(判兵部事)와 태자 소보(太子小保)를 지낸 민공규(閔公珪) 형제를 낳아 가문의 양대 산맥을 이루어 가세를 크게 일으켰다.
과거급제자(조선시대)
민이(閔○, 1455 乙亥生) : 문과(文科) 성종17년(1486) 식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민시중(閔時中, 1519 己卯生) : 문과(文科) 명종4년(1549) 식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민덕봉(閔德鳳, 1514 甲戌生) : 문과(文科) 명종15년(1560) 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민인백(閔仁伯, 1552 壬子生) : 문과(文科) 선조17년(1584) 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민유부(閔有孚, 1559 己未生) : 문과(文科) 선조24년(1591) 식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민광훈(閔光勳, 1595 乙未生) : 문과(文科) 인조6년(1628) 알성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민우(閔愚, 1597 丁酉生) : 문과(文科) 인조9년(1631) 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민정중(閔鼎重, 1628 戊辰生) : 문과(文科) 인조27년(1649) 정시2 갑과(甲科) 장원급제
민주면(閔周冕, 1629 己巳生) : 문과(文科) 효종4년(1653) 알성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민중로(閔重魯, 1624 甲子生) : 문과(文科) 효종8년(1657) 식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파명
여흥민씨는 시조 민칭도에서 4세 민영모까지는 독자이며, 민영모는 두 아들을 두었다. 따라서 여흥민씨는 5세부터 양대 산맥으로 크게 나누어 진다(파계보 참고). 맏아들 민식은 형부상서에 올라 상서공파(尙書公派)라고 하며 상서공파에서는 25개의 파로 분류되었다. 민영모의 둘째 아들 민공규는 시호를 따서 정의공파(定懿公派)라고 하며 20개의 파로 분류되었다. 따라서 여흥민씨는 총 45개의 파로 분류된다. 이에 대한 파계보는 여흥민씨 파명을 참고바란다. 이와 별도로 상서공 민식의 후손에서 수정승을 지낸 학자인 8세 민지(閔漬)를 중시조로 하는 문인공(文仁公)파와, 정의공 민공규의 후손으로 같은 시기에 대제학을 지낸 9세 민적(閔釣)의 문순공(文順公)파로 2개로 분류하기도 한다. 따라서 상서공파와 문인공파, 정의공파와 문순공파는 같은 줄기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항렬
여흥민씨의 항렬은 대체로 대동항열에 따르나 홍목지애공파, 역암공파, 돈령공파에서는 다르게 하고 있다(여흥민씨 항열표 참고). 항열자만 보면 몇 세손인지 바로 알 수 있으므로 과거에는 여자 외에는 항열을 철저히 따르는 편이었지만, 무시되는 경향도 있다. 항열표에는 대동항렬의 경우 1세조부터 나오지만, 당시는 물론 약 17세조까지는 항렬이 없다고 보는 편이 타당할 것 같다. 또한 18세조 이후에도 이와는 다르게 항렬을 일정하게 붙이기도 하였으며, 동일한 항렬을 보이는 것은 24세조부터로 판단된다. 특히 외자 이름이 많이 나오므로 항렬의 개념이 없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형제에 따라서 왕(王)자나 수(水) 같은 변을 기준으로 글을 만들어 이름을 짖거나(예로서 珏, 珪, 琦, 瑞 등), 일부 형제만 같은 항렬을 사용한 경우도 있다.
입압공파와 삼방파
입암공은 4분의 아들(민사용, 민사관, 민사안, 민사선)을 두셨으며, 맏아들 민사용은 8남 3녀를 두었다(입압공파 파보 참고). 큰 아들은 민여건(汝健)으로서 아들이 없으므로 둘째 아들인 민여준(汝俊)으로부터 민기(機)를 양자로 들인다. 이 민기의 아들이 민광훈으로 삼방파의 파조로서, 숙종시대부터 조선 말까지 권력의 핵심을 이루게 된다(예로서 민시중 형제들, 인현왕후, 명성황후, 민영익, 민영환 등).
민사용의 6째 아들은 18세 민여검(汝儉)으로서 운촌공(雲村公)이고, 파보에는 나타내지 않았지만 세분하여 운촌공파라고도 하며, 제가 이분의 직계손인 것이다(입암공파 파보 참고). 입암공파에서 삼방파는 18세조에서 분리되어 나갔지만, 숙종부터 조선말 이후까지 크게 역사에 영향을 미친 인물들이 많으며, 조선 말로 보면 분리 시기가 8대조 정도뿐이 차이가 나지 않으므로, 삼방파에 대하여 파보를 만들었다(삼방파 파보 참고). 이들에 대하여서는 인물 소개에서 보다 자세히 요약하여 설명할 것이다.
운촌공파
운천공 민여검의 후손은 '민씨삼세칠효'로 일컬 듯이 효자가 많이 나왔다. 민여검의 첫째 아들이 19세 민평, 둘째 아들이 민환(桓)을 비롯하여 21세조까지 3세대에 걸쳐 7명의 효자가 나온 것이다..
삼계공 민환은 현재 도룡동(호동, 범골)의 롯데 호텔 뒷편에 산소를 잡고 계신다. 도룡동과 대덕밸리와 이 산소와의 얽힌 사연은 도룡동 전설을 참고 바란다. 민환의 맏 아들이 21세 민덕중(德重)이고, 손자가 22세 애일당 민진강(鎭綱)으로 옥천군 서대리에서 시제를 지내시는 분이다. 민진강-23세 민종수(宗洙) → 24世 백희(百禧) → 25世 시현(時顯) → 26世 치기(致驥)→ 27世 근호(近鎬) → 28世 영덕(泳悳) → 29세 민우식(優植) → 30세 민병태(丙泰) → 31세 민웅기(雄基)로 이어져서 내 아들까지 연결되는 것이다. 한편 민덕중의 둘째 아들은 민행중이고, 셋째는 민휘중, 넷째는 민득중으로서 이분들은 29세 "식(植)"자 항렬까지만 나타냈다. 입암파 전체 족보를 나타내기는 너무 분량이 많으므로, 운촌공부터 인명을 실은 것이다. 가능하면 쉽게 알아보도록 하려고 하였지만 헷갈리기 쉬우므로 연결되는 부분을 차례로 눌러가면서 찾아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상서공파(尙書公派)-민식
(1)전의감사공파(典醫監事公派).(2)감찰공파(監察公派).(3)사용공파(司勇公派).(4)현감공파(縣監公派).(5)공목공파(恭穆公派). (6) 지애공파(芝崖公派). (7)감사공파(監司公派).(8)역암공파( 菴公派).(9)직장공파(直長公派).(10)소경공파(少卿公派).(11)평의사공파(評議事公派).(12)교위공파(校尉公派). (13)이판공파(吏判公派).(14)장령공파(掌令公派).(15)첨지공파(僉知公派).(16)돈령공파(敦寧公派).(17)의암공파(義菴公派).(18) 우후공파(虞候公派). (19) 참공공파( 奉公派). (20) 졸수공파( 公派). (21)창주공파( 州公派). (22)야와공파(野窩公派). (23)갈전공파(葛田公派). (24) 위양공파(威襄公派). (25)이정공파(梨亭公派).
정의공파(定懿公派)-민공규
(26)전서공파(典書公派), (27) 참봉공파( 奉公派).(28) 해관지후공파(解官祗候公派) (29)한성공파(漢城公派) (30)이참공파(吏 公派).(31)상의정공파(尙衣正公派). (32)공안부윤공파(恭安府尹公派).(33)호참공파(戶 公派).(34) 삼방파(三房派).(35) 입암공파(立岩公派).(36) 당진공파(唐津公派). (37)석봉공파(石峰公派). (38) 단양공파(丹陽公派). (39) 사과공파(司果公派). (40) 문도공파(文度公派). (41)부윤공파(府尹公派). (42)충정공파(忠貞公派). (43)청백리공파(淸白吏公派). (44)지둔령공파(知敦寧公派). (45)합문지후공파(閤門祗候公派).
여흥 민씨(驪興 閔氏) 항렬표(行列表)
대동항렬(大同行列表)
世 | 1세 | 2세 | 3세 | 4세 | 5세 | 6세 | 7세 |
항렬자行列字 | 영(泳) 규(圭) 배(培) | 식(植) | 병(丙) | 기(基) | 경(庚) 원(源) | 홍(泓) 재(在) | 동(東) |
8세 | 9세 | 10세 | 11세 | 12세 | 13세 | 14세 | 15세 |
희(熙) | 형(馨) | 석(錫) | 준(準) | 권(權) | 용(容) | 범(範) | 선(善) |
16세 | 17세 | 18세 | 19세 | 20세 | 21세 | 22세 | 23세 |
순(淳) | 상(相) | 영(榮) | 원(遠) | 종(鍾) | 태(泰) | 주(柱) | 양(陽) |
24세 | 25세 | 26세 | 27세 | 28세 | 29세 | 30세 | 31세 |
백(白) | ○혁(赫) ○현(顯) | 치(致)○ | ○호(鎬)○용(鏞) | 영(泳)○ | ○식(植) | 병(丙)○ | ○기(基) ○규(圭) ○배(培) |
32세 | 33세 | 34세 | 35세 | 36세 | 37세 | 38세 | 39세 |
경(庚)○ | ○홍(泓) ○원(源) | 동(東)○ | ○희(熙) | 형(馨)○ 재(在)○ | ○석(錫) | 준(準)○ | ○권(權) |
40세 | 41세 | 42세 | 43세 | 44세 | 45세 | 46세 | 47세 |
용(容)○ | ○범(範) | 선(善)○ | ○순(淳) | 상(相)○ | ○영(榮) | 원(遠)○ | ○종(鍾) |
48세 | 49세 | 50세 | 51세 | 52세 | 53세 | 54세 | 55세 |
태(泰)○ | ○주(柱) | 양陽)○ |
공목·지애공파(恭穆·芝崖公派)
世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항렬자 | ○세世 | 종種○ | ○훈;勳 | 재載○ | ○현鉉 | 태泰○ | ○근根, 동東 | 병炳○, 경慶, 형炯 |
32 | 33 | 34 | 35 | 36 | 37 | 38 | 39 | 40 |
○준;準 | 사思○ | ○구九 | 회會○ | ○은殷 | 성成○ | ○범範 | 경庚○ | ○재宰 |
역암공파(역菴公派)
世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항렬자 | 창昌○ | ○상祥 | 경景○ | ○행行 | 응應○ | ○진鎭 | 승·시○, 承·始 | ○영榮 |
32 | 33 | 34 | 35 | 36 | 37 | 38 | 39 | 40 |
광光○ | ○사思 | 구九○ | ○회會 | 은殷○ | ○성成 | ○범範 | 경庚○ | ○재宰 |
돈령공파(敦寧公派)
世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항렬자 | 금金○ | ○건騫; | 광光○ | ○중重 | 현鉉○ | ○수(변)水 | 근根○ | ○섭燮 |
32 | 33 | 34 | 35 | 36 | 37 | 38 | 39 | 40 |
재在○ | ○종鍾 | 영永○ | ○래來 | 형炯○ | ○성成 | 범範○ | ○庚 | 재宰○ |
항렬배자대조표 (行列排字對照表)
세(世) | 대동항렬 (大同行列) | 돈녕공파 (敦寧公派) | 늑암공파 (櫟菴公派) | 공목공. 지애공파 (恭穆公, 芝崖公派) | 역암공파 (櫟菴公派) |
二四世 | 백(百)○ | 김(金)○ | 창(昌)○ | ○세(世) | 창(昌)○ |
二五世 | ○현(顯) ○혁(爀) | ○건(騫) | ○상(祥) | 종(種)○ | ○상(祥) |
二六世 | 치(致)○ | 광(光)○ | 경(景)○ | ○훈(勳) | 경(景)○ |
二七世 | ○용(鏞) ○호(鎬) | 중(重)○ | ○행(行) | 재(載)○ | ○행(行) |
二八世 | 영(泳)○ | ○현(鉉) | 응(應)○ | ○현(鉉) | 응(應)○ |
二九世 | ○식(植) | 수( )○ | ○진(鎭) | 태(泰)○ | ○진(鎭) |
三十世 | 병(丙)○ | ○근(根) | 시(始)○ 승(承)○ | ○동(東) ○근(根) | ○승(承) ○시(始) |
三一世 | ○배(培) ○규(圭) ○기(基) | ○섭(燮) | ○영(榮) | 형(炯)○ 병(炳)○ 경(慶)○ | ○영(榮) |
三二世 | 경(庚)○ | 재(在)○ | 광(光)○ | ○준(準) | 광(光)○ |
三三世 | ○원(源) ○홍(泓) | 종(鍾) | 사(思)○ | 사(思)○ | ○사(思) |
三四世 | 동(東)○ | ○영(永) | ○구(九) | ○구(九) | 구(九)○ |
三五世 | ○희(熙) | ○래(來) | 회(會)○ | 회(會)○ | ○회(會) |
三六世 | 재(在)○ 형(馨)○ | 형(炯)○ | ○은(殷) | ○은(殷) | 은(殷)○ |
三七世 | ○석(錫) | 성(成)○ | 성(成)○ | 성(成)○ | ○성(成) |
三八世 | 준(準)○ | ○범(範) | ○범(範) | ○범(範) | ○범(範) |
三九世 | ○권(權) | 강(康)○ | 강(康)○ | 강(康)○ | 경(庚)○ |
四十世 | 용(容)○ | ○재(宰) | ○재(宰) | ○재(宰) | ○재(宰) |
四一世 | ○범(範) | 수(垂)○ | 수(垂)○ | 수(垂)○ | 수(垂)○ |
四二世 | 선(善)○ | ○규(葵) | ○규(葵) | ○규(葵) | ○규(葵) |
四三世 | ○순(淳) | ○순(淳) | ○순(淳) | ○순(淳) | ○순(淳) |
四四世 | 상(相)○ | 이하 대동항렬(大同行列)과 같음 | |||
四五世 | ○영(榮) | ||||
四六世 | 원(遠)○ | ||||
四七世 | ○종(鍾) | ||||
四八世 | 태(泰)○ | ||||
四九世 | ○주(柱) | ||||
五十世 | 양(陽)○ |
인구조사에 의하면 여흥민씨는
1985년에는 총 32,858가구에 인구는 137,317명이었으며,
2000년에는 총 43,887가구에 인구는 142,572명으로 조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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