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사무소 문을 나서자마자 날카로운 공기가 볼을 찔렀다. 체감온도가 영하 10도쯤은 될 듯했다. 입주자대표회장이 된 지도 열흘이 넘었다. 바쁜 말일(末日)을 피해 서둘러 결재를 마쳤다. 언뜻 경비반장 이야기가 떠올랐다. 자식뻘도 안 되는 젊은이에게 얻어맞았으니 분통이 터질 노릇이었다. 마음의 상처가 담석(膽石)만큼이나 괴로웠을 것이다. 그래도 그는 담담해 보였다. 국회의원을 지냈다는 사촌 형 이야기와 대학교수인 조카 이야기, 지방법원 판사로 있는 동생 이야기에 열을 올렸다. 어깨 부상만 아니었어도 이름난 배구선수가 되었을 거라고 그는 말했다. 강만수, 김호철과는 함께 운동하던 사이였고 현직 프로팀 배구 감독 중에도 직계 후배들이 있다고 자랑했다. 그는 운동을 그만두고 중식 요리사가 되었는데 요즘 잘 나가는 이연복 셰프(chef)가 2년 후배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나는 예상치 못했던 그의 자존감과 용기에 감탄했다. 그의 담담함과 그의 용기와 그의 자신감은 어디에서 연유되는 것일까. 그의 천연덕스러운 자정능력(自淨能力) 시스템이 은근히 부러웠다. 마음의 생채기가 아물지 않아 고생하던 젊은 시절이 생각났다. 그때, 마음을 아프게 하던 생채기들은 소나무 옹이처럼 내 마음속에 굳은살로 박혀버렸다.
안경에 김이 서려 앞이 보이지 않았다. 마스크 때문이었다. 어쩔 수 없이 안경을 벗어 주머니에 넣었다. 손가락 마디를 구부려 엘리베이터 단추를 눌렀다. 코로나19가 유행하고 나서부터는 늘 이런 식이었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컴퓨터를 켰다. 보수작업이 필요한 아파트 단지(團地) 안의 시설물 내용을 꼼꼼히 기록했다. 공직에서 물러나 동네 아저씨가 된 이상, 이왕이면 바지런하고 능력 있는 아저씨가 되고 싶었다. 모두들 기피하는 동대표 자리였지만 흔쾌히 자원하지 않았던가. 마땅히 처리되어야 할 일들이 의결정족수 부족으로 방치되고 있다는 안내문을 읽고 난 직후였다. 중국 시인 도연명(陶淵明) 흉내나 내면서 맘 편히 살려고 했던 내가 제 발로 관리사무소를 찾아갔으니 아무리 봐도 예삿일은 아니었다. 그게 허세였는지 의협심이었는지는 나도 가늠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내게 공분(公憤)할 줄 아는 열정이 조금은 남아있었다는 생각에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한기(寒氣)를 떨쳐낼 겸 뜨거운 물로 몸을 씻었다. 따뜻한 물이 등줄기를 따라 흘러내리자 온몸이 나른해졌다. 뭉툭하게 부풀어 오른 뱃살이 손바닥 안에 느껴졌다. 갑자기 내 나이를 떠올렸다. 십 년 후면 일흔넷이다. 언제부턴가 나이를 물으면 십 년 후 나이를 말하는 버릇이 생겼다. 십 년 안에 뭔가 이뤄내야 한다는 강박(强迫)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앞으로 십 년까지는 무탈할 거라는 무모한 자신감 때문이었을까. 그러나 앞으로의 십 년이 마치 내 삶의 보장보험처럼 느껴지는 것은 망상일 뿐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런 상념에 빠져 있다 보니 하루하루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정작 시간을 금쪽처럼 나눠 쓸 묘안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럴만한 재주도 그럴만한 열정도 없었다. 그래서 조금은 서글퍼졌다. 이렇다 할 걱정거리 없이 건강하게 지낼 수만 있다면 그만으로도 복이 아닌가 싶다가도 한편으론 왠지 나약한 자기합리화 같아서 이내 마음이 씁쓸해졌다.
벽에 걸린 수건이 언뜻 눈에 띄었다. ‘유좌근 선생, 김순례 여사 고희 기념’, 인쇄된 글씨가 비교적 또렷했다. 친구 부모님 고희연에 갔을 때 받아온 수건이었다. 하지만 오래전 일이어서 어느 때였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지금은 극노인(極老人)이 되셨을 친구 부모님 안부가 궁금해졌다. 핸드폰으로 수건을 찍어 친구에게 보냈다.
“아니 그 수건을 아직도 쓰고 있나? 벌써 20년 전 일일세. 세월이 참 무상도 하지.”
아버지는 폭력성 치매를 앓고 계셨고 어머니는 심한 관절염으로 고생하신다고 했다. 두 분 모두 올해로 90세가 되셨다. 두 분을 정성껏 봉양하고 있는 친구가 존경스러웠다.
십 년 후엔 일흔넷, 그로부터 십 년 후엔 여든넷, 그로부터 육 년 후엔 아흔......
무심코 숫자를 헤아려 보았다.
‘시간을 금쪽처럼 나눠 쓸 묘안이 필요한데...... 열정이 필요한데......’
창문 밖을 내려다봤다. 반바지 차림의 젊은이 두 사람이 천변길을 줄기차게 뛰고 있었다.
첫댓글 좋은 글 잘 감상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새해에는 더욱 건강하시고 문운이 왕성하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