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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달아 그도 식은땀이 흘렀다. 어느덧 이륙을 마친 비행기는 평행으로 날기 시작했지만, 규휘의 상태는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우욱.”
비명을 질러대던 규휘가 헛구역질을 했다. 놀라서 다시 달려온 승무원과 대환은 그녀를 화장실로 옮길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규휘가 그에게 준비해온 비닐봉지가 주머니에 있다고 알려주자 대환은 그것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막 규휘의 입으로 가져가려는 찰나 그녀의 안에 있던 것들이 먼저 역류해 올라와 버렸다. 대환은 급한 마음에 양손을 들이밀었다. 규휘는 속에 있는 것을 올리면서도 그의 손을 거부했지만 이미 그의 양손은 이물질로 가득 차 흘러넘쳤다. 더 이상 나올 것이 없는데도 규휘는 노란 위액까지 꾸역꾸역 계속 토해냈다.
“도와 드릴게요.”
옆에서 구경만 하고 있던 승무원이 어느새 쓰레기통을 가지고 와 규휘가 뱉어낸 것들을 치웠다. 그리고 대환에게는 물수건을 내 밀었다. 어느 정도 그녀가 진정을 하자 대환은 물수건으로 대충 손을 닦아내고는 화장실을 사용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름시름 앓아가는 규휘가 그의 옷자락을 잡았다. 그가 자리를 비우는 것도 불안한 모양이었다.
“금방 다녀올게. 이제 괜찮아.”
빠르게 화장실을 다녀온 그는 승무원이 내미는 차가운 찜질 팩을 받아들어 수건에 감쌌다. 그리고 기진맥진 해 있는 규휘의 얼굴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혹시 모르는 이러한 사태를 대비해 그는 허브 차와 초콜릿을 준비해 왔다. 그가 승무원에게 허브를 내밀며 따뜻하게 끓여 달라는 부탁을 했다.
“어지러워.”
규휘는 차가운 찜질에도 몸이 나아지지 않는지 괴로운 음색으로 말했다. 대신 앓아줄 수만 있다면 수백 번 이라도 그리 하겠건만, 그러하지 못하는 현실에 그는 마음만 아플 뿐 이었다.
“오빠, 모든 게 핑핑 돌아. 몸이 내 것 같지가 않아…어지러워.”
“지금까지 잘 해 왔어. 조금만 더 참아봐. 현기증은 금방 사라질 거야.”
그녀의 손을 꼭 쥐고, 한 손으로는 찜질 팩을 이리 저리 옮겨 주었다. 계속 어지럽다는 말만 되풀이 하던 규휘는 어느새 잠이 들었다. 쌔근거리며 자는 그녀의 모습에 대환은 그제야 안도의 한 숨을 내쉬며 승무원이 내민 와인을 받아 들이켰다. 한차례 격한 폭풍이 지나간 후라 그런지 그의 몸에 퍼지는 와인의 맛이 어느 때보다 진하고 좋았다.
“허브 차는 깨어나시는 대로 준비 해 드릴게요.”
승무원의 짜여진 친절에 대환은 알았다는 말을 마치고 잠들어 있는 규휘를 내려다보았다. 온기가 없던 그녀의 몸이 조금씩 정상으로 되돌아오고 있었다. 대환은 상황이 어떻게 역전 될지 몰라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저 불안한 마음으로 그녀의 곁을 쉬지 않고 지켰다. 책이나 신문도 읽지 않았다. 음악도 듣지 않고, 영화도 시청하지 않았다. 오로지 규휘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두 시간쯤 흐른 것 같았다. 규휘의 몸이 뒤척거리더니 그녀가 두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누워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나, 괜찮아? 우욱.”
갑자기 일어난 탓에 또 다시 헛구역질을 하는 규휘는 입으로 두 손을 가져갔다.
“여전히 울렁거려?”
걱정스런 얼굴로 그가 물었다. 규휘는 헛구역질을 한 번 뱉어내고는 괜찮은지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가슴은? 아직도 두근거려?”
“응. 하지만 처음 보다는 좋아졌어요.”
좋아졌다는 한 마디에 대환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녀가 잠들어 있는 두 시간여 동안 불안한 기운을 떨쳐 버릴 수 없었는데 이렇게 건강한 모습으로 앞에 있는 규휘를 보니 기뻐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너 때문에 수명 단축 되겠다. 올 때는 다른 수단을 찾던가 해야지…”
“습관 들면 괜찮아 진다면서요? 거짓말 이었어?”
“네가 습관 들기 전에 내가 심장마비로 먼저 죽게 생겼어.”
“피. 난 젊은 나이에 과부되기 싫단 말이야.”
“나도 홀아비 되기 싫은 건 마찬가지야.”
제법 그와 농담을 주고받던 규휘는 또 다시 현기증이 이는지 자리에 누웠다. 대환은 승무원을 불러 그가 부탁 한 것을 내와 달라고 했다. 규휘는 그게 무엇인지 궁금했지만, 승무원이 가지고 올 때까지 말을 아껴두었다.
“따뜻한 허브 찹니다.”
보기만 해도 따뜻한 김이 나는 차를 규휘에게 승무원이 내 밀고 갔다. 그녀가 그를 쳐다보자 대환은 어서 마셔보라고 채근 하였다. 규휘는 후후 뜨거운 김을 불자 향긋한 허브향이 답답했던 콧속을 뻥 뚫어주었다. 깊숙하게 들이키면서 한 모금 입에 가득 물어 삼키자 목 안에 화한 기운이 감돌았다.
“기분 좋아 보이네.”
좀 전과 다르게 생기가 도는 얼굴에 그가 기분 좋게 물었다.
“응 막혔던 것들이 전부 뚫린 것 같아. 아까 올리면서 눈이 굉장히 뻑뻑했는데 눈까지 촉촉해지는 것 같아.”
“휴. 천만다행이구나.”
“어떻게 이런 생각을 다 했어?”
“홀아비 안 되려면 만반의 준비는 다 해야 하는 것 아니겠어?”
규휘의 입가엔 절로 웃음꽃이 피어났다. 그러다 종래에는 그것을 다 들이마셨다. 금 새 온몸이 따뜻하게 데워지는 것 같았다. 속이 비어 버린 컵을 양손으로 받쳐 들고 그녀가 대환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그는 초콜릿을 꺼내 규휘에게 내 밀었다.
“기분이 더 나이질 거야. 어서 먹어.”
대환이 직접 껍질을 벗겨 규휘의 입에 초콜릿을 넣어주었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것이 그녀의 입 안에서 사르륵 녹아 내렸다.
“아직도 불안해?”
“아니요. 어지러운 것 빼고는 이제 괜찮아.”
규휘가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는 어리광 부리듯 말했다.
“얼큰한 김치찌개도 생각나고, 구수한 된장찌개도 먹고 싶다. 울 엄마는 그런 것 못 하는데 한인 식당 찾아가서 먹어야 하나? 그런데 오빠 나 자는 동안 뭐 했어요? 심심했지?”
“언제 또 게워낼지 몰라서 턱에 손 받치고 있었지.”
대환의 장난스런 말에 규휘는 얼굴을 붉히며 그를 흘겨보았다.
“난, 오빠가 토하면 버리고 갈 거야. 절대 그거 못 봐줘.”
“걱정 마. 누구처럼 먹은 것 확인 할 일은 추호도 없을 테니까.”
규휘는 여전히 눈을 흘기며 무료한지 손을 높이 치켜들어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손으로 어깨를 토닥거리고 다리도 주물렀다. 몸이 뻐근한 모양이었다. 대환은 그녀의 작은 손을 잡고 자신이 직접 규휘의 어깨를 주물러 주었다. 그의 안마를 받던 규휘가 대환의 손을 잡고 물었다.
“나 더 이상 잠도 안 올 것 같은데, 오빤 잘 거예요?”
“네가 깨어 있는데 잠이 오겠어?”
“잘됐다. 그럼 우리 카드하고 놀아요.”
“뭘 해? 이젠 날 노름꾼으로 전략시킬 생각이야?”
그의 핀잔에 규휘는 검은 눈동자를 굴리며 웃더니 슬며시 주머니에서 무언가 꺼내들며 그에게 보였다.
“짜잔, 지루함 달래기 위해 내가 미리 준비해 왔지 롱.”
“멍청한 여자야, 여기도 카드는 있어. 짐 되게 뭐 하러 가져 다녀?”
“비행기 처음 탔을 때는 죽는 줄 알았다고요. 이런 게 있는지 생각이나 했겠어요?”
“후훗. 사실 나도 허브 차는 없는 줄 알고 준비 해 왔는데 다 있더라고. 그나저나 카드나 할 줄 알아?”
무시하는 발언에 규휘가 인상을 쓰며 그에게 귀염성 있는 목소리로 자신 있게 말했다.
“훌라만 할줄 알지요. 하자 오빠야. 응?”
그는 마지못해 수긍을 하고는 그녀가 카드를 배팅하는 대로 가만히 지켜만 보았다.
시작하기 전에 몇 가지 준수사항을 알려 드립니다. 이규휘 식 룰이 있어요. 게임에 진 사람은 승자가 묻는 말에 진실만을 답하기. 단 하나의 질문만 할 수 있어요.”
“진실게임이라도 하자는 거야?”
“뭐, 비슷한…그러니까 어떠한 비밀도 거짓도 없이 말하기. 만약 거짓말을 말하면 우리 앞날에 불행과 큰 재앙이 닥칠 거예요. 그걸 원치 않는다면 진실만 말하면 되겠지요?”
“뭐가 그렇게 거창하고 섬뜩해? 앞날까지 예언 하면서 꼭 진실게임을 해야 돼?”
다시 한번 되묻는 대환의 말에 규휘의 고개가 사정없이 위 아래로 여러 번 끄덕여졌다. 그는 규휘가 비행기 공포증을 이기고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제의해 오는 게임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며 그녀의 룰에 맞춰 훌라를 시작해 나갔다. 하기 싫은 마음이 동해서 인지 첫판은 규휘의 승리로 돌아갔다.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던 규휘가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나는 여자를 몸매나 얼굴만 보고 사겨 본적이 있다. Yes Or No로 답하기.”
“Yes.”
망설임 없이 Yes라고 말하는 대환이 의외였지만, 규휘는 마음을 숨기고 두 번째 판 배팅을 시작하였다. 이번엔 대환이 이겼다. 그는 무엇을 물어야 할까 고민하던 차에 갑자기 태준이 떠올랐다.
“이규휘의 첫사랑은 장대환이다.”
너무나도 핀트가 어긋나는 질문. 아닌 걸 누구보다 뻔히 잘 알면서 그는 욕심을 냈다. 몸은 아니어도 마음만은 그렇길 간절하게 바라면서. 규휘의 입에서 어떠한 대답이 나올지 기대와 관심을 갖고 지켜보았다. 달싹거리던 그녀의 입술이 벌어졌다.
“No.”
“그럼 누구야?”
단호한 그녀의 대답에 그는 규휘가 말한 게임의 룰도 잊고 반문을 하였다.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지르는 그로 인해 그녀는 잠시 말이 없어졌다. 대환은 그녀가 아니라고 말하길 바라면서 마음속에 있는 말을 꺼내 다른 질문을 했다. 짝사랑은 결코 첫사랑이 될 수 없다고 주문처럼 되 뇌이면서…….
“대학 선배?”
“Yes.”
규휘도 모르게 인정해 버린 그 대답에 순간 그의 머리를 스치는 단 하나의 이름이 있었다. 규휘의 선후배를 모두 꿰어 찬 것은 아니지만 대환의 머리를 스친 이름은 단 하나. 자신의 앞에 당당히 꽃바구니를 들고 와 이제야 사랑을 느꼈다고, 규휘를 울리면 그에게서 빼앗아 가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던 강태준이다. 대환은 게임을 제안한 규휘가 원망스러워졌다. 아니 쉽게 응한 자신을 못났다며 탓했다. 왜 그런 질문을 해서 스스로 늪에 빠졌는지 자신을 힐난하기 바빴다. Yes라는 한마디를 했을 뿐인데, 그는 혼자서 갖가지 상상을 하기 바빴다. 그의 기준에 첫사랑이라 함은 처음 마음을 준 것과 더불어 처음 키스를 하고 첫 경험을 허락한 것이다. 그렇다면 강태준이 규휘의 첫 상대라는 말인가? 말도 안돼. 그의 입으로 강제로 그녀에게 해열제를 먹였던 날 분명 그녀 입으로 그렇게 말 했었다. ‘태준 선배 랑도 안 해본 내 첫 키스를 오빠가 뭔데 이렇게 짓밟아 버려요.’ 도대체 뭐가 진실이란 말 인가? 지금 그녀는 거짓 없이 진실만을 말 하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그때 뱉은 말이 거짓이라는 거겠지? 그래, 홧김에 충분히 그런 말 할 수 있지. 그렇게 되면 첫사랑도 그녀의 처음도 강태준이었던 것이다. 그의 상념이 밑바닥을 치닫자 대환은 온 몸의 피가 거꾸로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 대체 왜 처음도 강태준이냐고 따져 묻고 싶은 걸 꾹꾹 눌러 참았다. 입 밖으로 그 말이 튀어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 이를 악 물고 혀도 꾹 깨물었다. 화를 못 이기는 그의 마음을 알리 없는 규휘는 세 번째 배팅을 했다. 그만 하자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공포증을 잊고 카드에 재미를 붙인 그녀가 대견스러워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대환은 지나가는 승무원에게 독한 위스키를 한잔 부탁하고는 게임에 몰두했다. 흥분한 탓인지 또 규휘의 승리로 돌아갔다.
“마음에도 없는 여자와 잘 수도 있는 것이 남자다.”
“통상적으로 남자를 빗대는 대답이면 Yes, 나 장대환만의 생각을 말하자면 No.”
그가 많은 여자와 잠자리를 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번 대답도 조금 의외였다. 그렇다면 그는 마음에 없는 여자와는 잠자리를 하지 않는 다는 것인가? 규휘는 자신이 내 뱉은 룰도 잊어버리고 대환이 그랬던 것처럼 한 번 더 질문을 던졌다.
“그럼 오빠는 사랑 없으면 여자와는 절대 잠자리를 하지 않는다는 말이야?”
“당연하지. 비록 그 사랑의 유효기간이 단 30분이라 할지라도 난, 사랑 없으면 함부로 몸을 섞지는 않아. 뭐…간혹 갖고 노는 경향은 있어도.”
“하, 완전히 지저분한 카사노바네.”
저돌적인 규휘의 말에 대환은 그만 하자며 카드를 내려놓았다. 그녀의 입에서 저런 말이 튀어나올 줄 예상이라도 했다면 룰을 어기고서라도 거짓말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럴 수 없다며 네 번째 배팅을 시작했다. 먼저 카드를 들고 설치는 통에 그는 또 한번 규휘의 뜻대로 따라가 주었다. 이번에도 그녀가 이겼다. 대환은 승무원이 건네준 위스키를 한잔 들이마시고 한잔을 더 주문했다.
“이규휘가 평창동에 들어온 이후로는 여자를 품에 안은 적은 없다.”
그가 주문한 위스키를 가지고 승무원이 다시 돌아왔다. 스트레이트로 그것을 단번에 마셔버렸다. 그리고 잠시 생각했다. 그녀가 들어온 후라. 빌어먹을! 깊게 생각 할 것도 없이 규휘에게 명확한 감정이 생기기 전 까지는 여러 번 있었다.
“Yes.”
게임을 시작한 이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녀의 룰을 어겼다. 차마 No라는 대답은 하지 못했다. 규휘가 그를 지저분한 카사노바로 몰아가는 것이 싫었다. 그것이 그의 실생활 이었지만 그녀에게 만큼은 그런 소릴 듣는 것이 싫었다. 규휘를 사랑하기 전 과거의 일 이었다. 앞으로 미래와 현재가 중요한 것이지 과거는 중요하지 않다 해도 더 이상 자신의 과오를 들춰내어 그녀에게 지저분한 카사노바로 낙인찍히고 싶은 마음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그것 하나는 마음에 드네. 흥.”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녀에게 미운털 하나가 덜 박혔다는 사실에 그는 때론 거짓말로 필요하구나 하며 스스로 자신의 거짓말에 만족해했다. 거짓말을 말하게 되면 불행과 큰 재앙이 닥칠 거라는 그녀가 말했던 룰은 잊어버린 채…….
다녀가신 흔적을 남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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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