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 처| 성홍모 목사
교회력은 대림절로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 대림절 첫 번째 주일은 11월 30일에서 가장 가까운 주일이 됩니다. 대림절 첫 번째 주일은 11월 27일에서 12월 3일 사이에 있는 주일이 되는 것입니다. 대림절이란 Advent 라고 하여 "도착한다"는 말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 대림절이란 절기는 오시기로 약속하신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우리는 이 대림절기를 보내면서 이미 2천년 전에 이 땅에 육신을 입고 강림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감사하면서, 지금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과 삶의 현장에 말씀과 영으로 새롭게 임재하여 주시기를 사모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마지막 때에 영광의 주님으로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시간으로 보내야 할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한 자리에 모일 때마다 그들이 주고받은 인사는 "마란아타"라는 말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16:22의 말씀에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여기의 "주여 오시옵소서"라는 말이 "마란아타"라는 말입니다.
신약성경이 그리스어로 쓰여졌지만, "마란아타"라는 말은 예수님 시대에 유대인들이 사용하였던 아람어였습니다.
이 말은 우리 성도들 사이에서 인사말로 사용하고 있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오십니다"
우리 주님이 다시 오신다고 하는 것은 우리 성도들에게는 무한한 위로와 용기를 주는 말씀이요, 하나님을 떠나서 사리사욕을 좇아 살던 사람들에게는 무서운 심판을 가져올 것입니다.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라는 말이 반가운 소식으로 들리십니까?
아니면 겁나는 말로 들리십니까?
주님이 오시기는 하셔야 하지만 왜 그렇게 빨리 오시려고 하십니까?
나는 아직도 주님을 만나볼 준비를 하지 못하였으니 천천히 오시라고 할 것입니까?
오늘의 본문 이사야 64:1-9의 역사적인 배경을 살펴본다면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되어 고국으로 돌아왔을 때의 어려운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주전 538년 페르시아의 고레스 황제의 칙령에 의하여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도성인 예루살렘으로 귀국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신 땅, 약속의 땅, 조상들이 살던 고국에 돌아왔지만 그들을 살아가기 매우 힘든 가난한 형편에서 벗어날 길이 막막하였습니다.
고국에 돌아가면 먼저 성전을 짓고, 회당 학교를 세우고 그리고 우리의 집을 짓자고 하였지만, 성전 재건이 중단되고 보니 모든 것이 제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잃어버린 나라의 주권을 회복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으며, 바벨론에 잡혀가지 않고 유대 땅에 남아 있던 사람들과 포로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사람들 간에도 적지 않은 갈등이 있었습니다.
오늘 이사야 선지자는 "주여,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소서"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1절 말씀에 "원컨대 주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고" 3절 말씀에 "주께서 강림하사"라고 하셨습니다.
이 헝클어진 세상을 구원하실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주님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셔야 한다는 소망이었습니다. 이 세상은 소망이 없어 보입니다. 과학이 발달하고 문화 수준이 높아지면 인류의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다시 이 땅에 강림하시는 길만이 인류의 숙제를 해결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땅에는 테러에 테러 소식으로 불안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2001년도 9.11테러 사건이 터졌을 때에도 세계는 경악하였지만, 아직도 미국과 이스라엘을 상대하는 테러는 계속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어떤 양상으로 발전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미국과 이라크와의 관계가 언제 악화될는지 그것도 시간문제입니다. 투쟁적인 이슬람과 테러리즘과의 차이는 아주 미미하기 때문에 투쟁적인 이슬람주의자들은 언제든지 테러를 감행할 수 있습니다. 미국과 사우디의 관계가 지금과 같이 앞으로도 좋을 것이라고는 보지를 않습니다. 현재는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하려면 사우디의 석유를 사용하여야 하며, 공항과 기지를 이용하여야 하기 때문에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9. 11 테러의 납치범 19명 중에 15명이 사우디 아라비아 사람이라는 것을 미국에서는 매우 심각하게 보는 것입니다.
이번에 케냐에서 발생한 여객기 피격 미수 사건과 호텔폭발 참사는 아주 적은 테러에 불과합니다. 지난 11월 28일에 케냐의 제2의 도시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즐겨 찾는 해변 휴양 도시인 몸바사에서 조금 떨어진 [파라다이스 몸바사 호텔]에 3명의 아랍계 사람들이 호텔에 들어가려다가 거절당하자, 차량으로 돌진하여 들어와 한 사람은 자기 몸에 두른 폭약을 터뜨렸고, 두 사람은 차량에 적재된 폭약을 터뜨렸습니다. 이번 테러로 15명이 현장에서 죽었고, 90여명이 부상을 당하였는데 상당수가 중상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같은 날 28일 오전 7시쯤 이스라엘 관광객들이 타고온 여객기가 몸바사 공항을 이륙하여 이스라엘로 돌아가려다 2발의 미사일 공격을 받았습니다. 정말 다행스럽게 발사된 미사일은 목표물을 비켜갔습니다. 이 여객기에는 승객 261명과 승무원10명이 탑승하고 있었습니다. 미사일 두 발 중에 한발이라도 맞았으면 비행기는 폭발하고 전원 다 죽었을 것입니다. 우리 지구상에는 이런 끔찍한 일들이 날마다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에 어디를 가보아도 평화는 찾아보기가 매우 힘들어졌습니다.
러시아에서는 옛날 악명 높았던 비밀 경찰 조직인 KGB가 다시 부활되고 있다고 세계 유명 언론에서는 우려하고 있습니다. 지난 10월 모스크바 극장에 체첸 테러리스트로부터 인질 800명을 구하기 위하여 독가스를 투입하여 128명이 희생되고 인질극은 끝났습니다.
이 일을 지휘한 기관이 과거 KGB의 후신인 연방보안국이었습니다. 세계가 경악할 일입니다. 이것을 놓고 러시아의 대통령 푸틴을 나무랄 것인가? 아니면 체첸 공화국의 테러리스트를 나쁘다고 해야할 것입니다. 먼저 체첸의 테러가 잘못되었습니다. 그 사건이 있은 후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여 하는 말이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내려야 했던 매우 힘든 결정들을 잘 이해한다"고 한 마디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힘을 실어준 것입니다. 부시는 강력한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푸틴을 비난하지만, 실은 테러리스트들을 비난해야 한다"고 말하고 다녔습니다. 잘잘못을 따지기 전에 하여튼 세계 어디를 가도 진정한 평화는 없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성지순례를 가고 싶어도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하도 자살 폭탄테러를 일으키니 성지에 갈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모이는 장소라면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폭탄을 들고 들어와 자살테러를 감행하니 무서워서 성지 순례는 생각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성지순례를 다녀오신 목사님이 있어 말씀하는데, 예루살렘의 그 큰 호텔에 당신의 일행만 10여명만 들어 있었다고 합니다. 성지가 아주 썰렁합니다. 가장 평화스러운 지역이어야 할 성지 팔레스틴에는 하루도 편할 날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 주님이 다시 오시는 길 밖에 해결책이 없습니다.
우리나라 안팎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2002년도가 끝나는 이 시점에서 무언가 새로운 국면으로 넘어가는 어떤 경계선에 서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한마디로 기로에 서 있다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에게 선택을 요구하는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12월 19일의 대통령 선거가 놓여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기권이란 있을 수 없는 국민된 권리의 직무유기라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기권하려고 하면 투표소에 가서 투표용지를 가지고 기권의사를 밝혀야 합니다. 투표율을 떨어뜨리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오늘의 본문 4절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주님을 앙망하는 자들이라고 했는데 그 말은 표준새번역 성경에서는 "주님을 기다리는 자"라고 했습니다.
1-2절 말씀에 "원컨대 주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고 주의 앞에서 산들이 진동하기를 불이 섶을 사르고 불이 물을 끓임 같게 하사 주의 원수들이 주의 이름을 알게 하시며 이방 나라들로 주 앞에서 떨게 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
대체로 구약의 번역이 어렵습니다. 표준 새번역성경에는 좀 더 자세하게 번역하고 있는데, "주께서 하늘을 가르시고 내려오시면, 산들이 주님 앞에서 떨 것입니다. 마치 불이 섶을 사르듯, 불이 물을 끓이듯 할 것입니다. 주의 대적들에게 주의 이름을 알게 하시고 이방 나라들이 주 앞에서 떨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오늘의 비참한 환경을 놓고 탄식하던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 세대의 유일한 소망은 주님이 하늘을 가르시고 내려오셔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오늘의 비참한 환경은 사람의 힘으로 바꿀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범죄하여 하나님과 관계를 바르게 가지지 못하고 어그러진 채로 이방 여러 나라들에게 괴로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새로운 천년이라고 얼마나 떠들고, 새로운 천년이 되면 무엇인가 새로워지고 달라질 것으로 보지 않았습니까? 달라지기는 무엇이 달라지는 것입니까? 내가 달라지지 않았는데, 세상이 달라질 리가 있습니까? 뉴 밀레니엄이라고 하여 떠들썩하였지만, 부정과 부패는 더욱 극심해지고 도덕은 땅에 떨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주님이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이미 오신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신앙입니다.
1. 주님은 우리의 희망이기에 주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1-4)
기독교의 희망은 종말론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무섭기에 정신 차리게 되었고, 천국과 지옥이 있으니 무서운 마음에서 하나님을 믿게 되는 것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재림만이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험한 사회에 내려오셔서 더럽고 추한 사회를 수술하시고 우리들이 예측하지도 못한 놀라운 일을 행하셔서 열방을 놀라게 하셔야 합니다.
3절 말씀에 "주께서 강림하사 우리의 생각밖에 두려운 일을 행하던 그 때에 산들이 주의 앞에서 진동하였사오니"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높은 산과 같은 세력이라고 할지라도 주님이 강림하시면 주의 앞에서 산들이 두려워 떨 것입니다.
기다릴 것이 없는 사람은 절망입니다. 아무런 소망이 없다고 하면 그 때는 인생의 끝에 이 기다림이 없는 사람은 절망입니다. 이제 그것으로 끝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약속의 아들을 기다렸습니다. 하늘의 많은 별과 바다의 모래와 같은 자손의 번성을 기다렸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허락하시는 가나안 땅을 들어갈 때까지 수 없는 인내로 기다렸습니다. 이스라엘은 여러 민족과 나라들로 인하여 너무나 많은 고난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도 인내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보내시는 메시아가 오신다는 약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내와 기다림이란 하나님의 사람들의 행동 양식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을 기독교인답게 살게 하는 원동력은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데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 중에 주님의 다시 오심을 진정으로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정말 상 주어야 할 사람입니다. 먼 하늘에 구름만 떠도 우리 주님이 저 구름을 타고 오실 것인가를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다시 봐야 할 사람입니다. 재림에 대한 소망이 다 말뿐입니다. 안타깝게 사모하는 그런 사람들은 이미 다 죽었습니다. 내가 잘된다는 하니 믿어두는 그런 사람들만 남은 것 같습니다.
우리는 번영의 신학에 익숙하여 있고, 종말의 신앙에 대하여 무디어 진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들은 그냥 잘 된다는 말에 익숙해졌습니다. 그냥 믿기만 하면 잘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좋아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만사 형통한다는 말에 다 속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잘 믿은 사람을 말하라고 하면 주님의 12제자들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을 보면 한결같이 고난을 받은 사람이요, 순교의 길을 걸어간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고난을 영광으로 알고 감당할 수 있었다는 것이 은혜요, 축복이었던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우리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었으며, 그들은 진정으로 다시 오시는 주님을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영광스럽게 다시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다시 오시는 주님을 기다릴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인생의 순례의 길이 다 끝나고 천국에서 만날 주님을 기다리는 것 또한 하나의 기다림입니다. 기다림의 신학은 기독교의 또 하나의 중요한 교리입니다. 막연히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기다림의 실체, 즉 기다림의 내용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다시 오시는 주님,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거할 곳을 예비해놓으신 주님 그 분을 기다려야 합니다.
4절입니다. "주 외에는 자기를 앙망하는 자를 위하여 이런 일을 행한 신을 옛부터 들은 자도 없고 귀로 들은 자도 없고 눈으로 본 자도 없나이다" 오직 우리 주님만이 우리의 소망이요, 주 외에는 우리의 사모할 분이 없습니다.
엄청나게 잘 사는 것도 원치 않습니다. 그렇게 잘 산다고 하루에 밥을 10차례 먹는 것도 아닙니다. 화려한 옷을 입었다고 누가 알아주는 시대도 아닙니다. 적은 집에 살면서 웃음꽃을 피우면서 정답게 사는 것이 좋지 않습니까? 우리의 소원이 무엇입니까? 주님만이 우리의 소망이요, 우리는 다시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2. 우리는 구원받기 위하여 주님의 오심을 기다려야 합니다. (5-7)
5절 말씀에 "주께서 기쁘게 공의를 행하는 자와 주의 길에서 주를 기억하는 자를 선대하시거늘 우리가 범죄하므로 주께서 진노하셨사오며 이 현상이 이미 오랬사오니 우리가 어찌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라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말은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으로 변화되었다는 확신을 가지는 것입니다.
예수 믿어서 어떤 변화를 가져왔습니까?
이 정도로 사는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인정하실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들이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하나님의 진노를 쌓을 수밖에 없는 사람인 것을 고백하게 됩니다.
우리가 전한 대로 살았다고 하면 이미 천사가 되었을 것이요, 들을 말씀대로 살았다고 하면 천사들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나와 할 수 있는 기도가 있다면 회개의 기도 외에 다른 기도를 할 수가 없습니다.
잘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 자체가 이기적인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보다 더 잘 되면 어떻게 하겠다는 것입니까?
예전에 가난할 때가 지금보다 더 잘 믿은 것 같지 않습니까?
예수를 믿는 것도 사실은 내가 잘되어야 하기 때문에 믿어두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표준새번역 성경에서는 "그러나 주님, 보십시오. 주께서 진노하신 것은 우리가 오랫동안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찌 구원을 받겠습니까?"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죄를 지었습니다. 사실 욕심스럽게 오래 산다고 하는 것 자체가 죄를 더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6절에서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우리는 부정한 자들입니다. 구원받을 자격이 좀 있다고 말할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원욕이 끊어지지 않습니다. 이생의 자랑이 우리를 휘어 감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것들은 다 보암직하고 탐스럽고 다 좋아 보입니다.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구원하시고 돌아오기를 무한정 기다려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면 벌써 죽었을 것입니다.
7절에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으며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가 없사오니 이는 주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숨기시며 우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소멸되게 하셨음이니다"
좀 고상한 인격과 믿음을 가지고 이 사회를 이끌어갈 만한 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말씀 중심으로 살아가는 이들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위안이 되는 것은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기를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하셨으니 다행스러운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러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고 사모해야 합니다. 정말 구원받기 위하여 주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3. 우리는 주의 백성이기에 주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8-9)
"그러나 여호와여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 여호와여 너무 분노하지 마시오며 죄악을 영원히 기억하지 마시옵소서. 구하오니 보시옵소서. 보시옵소서. 우리는 다 주의 백성이니이다"
우리는 우리의 생애를 주님에게 위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느껴봅니다. 우리의 한계는 너무나 분명합니다. 우리는 진흙이요, 하나님은 토기장이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요, 우리의 하나님이시며, 우리는 그 분의 백성이기에 우리는 주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문제는 나 자신입니다. 내가 문제이지 남의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나빠서 우리 사회가 이 모양이 되었습니다. 우리 사회가 나쁘기에 내가 나빠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신학적으로도 내가 문제요, 도덕과 윤리를 말하지만 언제나 내가 문제였지 남의 잘못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나만 탓하고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우리는 다 부정한 자요, 우리가 입은 옷이란 더러운 옷을 입었습니다. 잎사귀가 잎사귀이지만 시들었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 없습니다. 분발하여 주님을 붙드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진흙이요, 하나님은 토기장이이시고,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기에 무한정 기다려 주시고 용서해주시고 또 받아주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오늘도 기다리는 것입니다.
토기장이는 귀히 쓰는 그릇도 만드시고, 천히 쓰는 그릇도 만드시고 있습니다. 수억원대 나가는 청자 백자도 만드시고, 헐값으로 팔리는 질그릇도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의 생사화복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도하신 대로 만들어졌습니다. 나는 나대로 존재할 이유가 있고, 당신은 당신 나름대로 살아갈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절망할 이유가 있습니까? 살아갈 이유가 훨씬 더 크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라는 사람은 인구 60억명 중에 오직 단 한 사람으로 하나님은 천하보다 더 귀한 존재가 보아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사랑하시고 받아주실 주님이시기에 우리는 주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자요, 하나님은 너는 내 것이라고 불러주신 사람들입니다. 조금 키가 작게 만드신 것도 하나님이 하신 일이기에 나에게 유익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도 같은 사람이 없게 하셨습니다.
흙과 인생은 불가분리의 관계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주는 교훈입니다.
흙으로 지음 받았기에 흙을 밟고 살면서 흙에 자란 것을 먹고, 흙에서 솟구치는 물을 마시고, 종래에는
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를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위대하시기에 우리 자신도 소중한 존재요, 자랑스러운 존재인 것입니다. 우리는 예레미아 선지자가 고백한대로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선한 대로 만들더라"고 하셨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기다린 것 같은데 사실은 하나님이 기다려주셨습니다. 사람이 되라고 기다려 주셨고, 목사가 되라고 기다려 주셨고, 그래도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자랑거리 하나라도 만들어보라고 기다려주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절기를 맞이하여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려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제가 귀하게 여기고 소중하게 여기는 말씀 한 구절 암송하고 마치려고 합니다.
시편 37:5-7절 말씀입니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여러분은 누구를 기다리시겠습니까?
우리 주님을 기다리시는 분들은 세상에서 가장 복 받은 사람들이십니다.
우리 주님을 맞이하기 위하여 준비하고 기다리시는 중에 복된 생애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성경 벌레들 글쓴이: 성경 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