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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탄압을 핑계로 한 남인 축출
그리고 순조가 왕위를 계승한다. 6월 정조가 승하하자 7월에 11세의 순조가 어린 나이로 즉위한다. 그러자 영조의 계비이며 대왕대비인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정순왕후는 사도세자의 죽음에 찬동하였던 벽파의 실세 김귀주의 누이로 벽파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안 가리는 인물이었다. 옥새를 거머쥔 정순왕후는 우선 친정 6촌 오빠인 김관주를 이조참판 직에 앉히고 벽파들을 대거 등용한다.
권력을 잡은 김관주, 심환지 등은 정조의 탕평을 보좌하였던 인물들을 대거 살육함으로써 벽파 정권을 수립한다. 그리고 정순왕후는 즉시 왕의 즉위를 공포하는 글에서 ‘척사’를 표방했다. 이는 곧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신유박해가 생긴다.
천주교는 1794년 말에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를 영입하는 등 조직적인 교회활동으로 1800년에는 교인 1만 명으로 교세가 확대되었다. 이러한 천주신앙의 전파에 대하여 천주교를 공격하는 공서파(攻西派)의 세력에 의한 성토ㆍ상소ㆍ박해운동이 일어난다.
정조는 “사교(邪敎)는 자기자멸(自起自滅)할 것이며 유학의 진흥에 의해 사학을 막을 수 있다.”고 적극적 박해를 회피하였다. 또한 천주교를 신봉하는 양반 남인 시파(時派)의 실권자인 재상 채제공(蔡濟恭)의 묵인도 있었다. 그래서 1791년 상을 당하여 내종형제(4촌)인 윤지충, 권상연(權尙然)이 함께 신주를 없애고 천주교식으로 장례를 치루었다는 죄목으로 구금되어 순교할 때 외척으로 연루된 정약용과 그 형제들은 살 수 있었다. 윤지충은 윤선도의 6대손이자 윤두서의 증손자이다. 아울러 정약용과 외사촌간이다.
그러나 정조와 채제공이 죽자 정계의 주도세력이 벽파(僻派)로 바뀌면서 박해가 일어나게 되었다.
정순왕후 즉 대왕대비 김씨가 어린 순조의 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벽파는 남인 시파의 세력을 꺾기 위하여 대왕대비를 움직여 시파와 종교적 신서파(信西派)에 대하여 일대 정치적 공세를 취하게 되었다.
벽파는 천주교를 무부무군(無父無君)의 멸륜지교(滅倫之敎)로 몰아붙여 탄압을 가하였다. 또한 그의 배후 정치세력을 일소하고자 1801년 대왕대비 언교(諺敎)로 박해령을 선포, 전국의 천주교도를 수색하였다.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동원한 수색에서 많은 교인들이 체포되었고 300여 명의 순교자가 생겼다. 신유박해의 대표적 순교자로는 중국인 주문모와 초대 교회의 창설자인 지도자적 평신도들이었다. 주문모는 한때 피신하였다가 스스로 의금부에 나타나 취조를 받은 뒤 새남터에서 군문효수(軍門梟首)되었다.
그리고 초기교회의 지도자이던 이승훈(李承薰)ㆍ정약종(丁若鍾)ㆍ최창현(崔昌顯)ㆍ강완숙(姜完淑)ㆍ최필공(崔必恭)ㆍ홍교만(洪敎萬)ㆍ김건순(金健淳)ㆍ홍낙민(洪樂敏) 등은 서소문 밖에서 참수(斬首)되었고, 왕족인 송씨(宋氏 : 정조의 서제(庶弟)인 은언군(恩彦君)의 부인)와 신씨(申氏 : 은언군의 며느리)도 사사(賜死)되었다. 한편, 지방교회 지도자들도 다수 순교하였다.
내포교회(內浦敎會)의 사도로 불리던 이존창(李存昌)은 공주에서, 전주교회의 지도적 교인이던
유항검(柳恒儉)ㆍ관검(觀儉) 형제는 전주에서 순교하였다.
이 때 정약용과 그의 둘째 형 정약전은 정약종과는 달리 이미 천주교를 버린 뒤였으나, 노론에서는 이미 이들을 제거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정약종만 천주교 신자일 뿐, 정약전과 정약용은 천주교에 거리를 둔 점이 확인되면서 사형에서 유배로 감형되었다. 그리하여 정약용과 정약전은 강진과 흑산도로 유배되었으며, 정약종은 천주교 신앙을 버리지 않아 참수를 당해 죽었다.
그리고 이 때 동복 오씨에서도 오석충(吳錫忠)이 피해를 입는다. 오석충은 오시수의 증손이자 오상부의 손자이다. 정약용이 쓴 오석충의 묘지명을 그대로 옮겨 당시 상황을 살펴보자.
『과거 선조(先朝 정조) 을묘년 봄에 내(다산: 정약용)가 하대부(下大夫)로 승진되어 명례방(明禮坊: 을지로 입구에서 명동성당입구)에 살았다. 그 때 마침 용진(龍津) 민수(閔叟 수(叟)는 학덕(學德)과 나이가 높음을 가리킴)가 찾아왔다. 민수가 막 자리에 앉자 별안간 매장(오석충)이 충주에 사는 허복(許澓)을 데리고 왔으나 민수는 이들과 아는 사이가 아니었다.
내가,
"이상합니다. 옛날 숙종(肅宗) 때 허공(許公 허적(許積))이 영상(領相)이 되고 민공(閔公 민희(閔熙))이 좌상(左相)이 되고 오공(吳公 오시수(吳始壽))이 우상(右相)이 되었더니, 지금 세 분의 손자가 자리를 함께 하게 된 것은 참으로 희기(稀奇)한 일입니다. 어찌 상견례(相見禮)를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하니, 민수가 왼손으로 허복의 손을 오른손으로는 매장의 손을 잡고 목 놓아 크게 울고는 술을 사오라 하여 즐겁게 놀았으나, 좌중(座中)에는 비풍(悲風(구슬픈 느낌을 주는 바람)이 쓸쓸하여 마치 연(燕) 나라와 조(趙) 나라 선비가 만난 것처럼 비분강개한 기색이 감돌았으니, 당고(黨錮) 이후로 고가 유족(故家遺族)들의 영락(零落)이 이토록 화기(和氣)를 감상(感傷)케 했던 것이다. 이 일이 있은 7년 뒤에 매장이 옥에서 죽었으니, 아! 슬프다.
매장의 휘(諱)는 석충(錫忠), 자는 유원(幼源)이며, 매자항(梅子巷)에 살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매장(梅丈)이라 불렀다. 동복 오씨(同福吳氏)로 원조(遠祖)는 문간공(文簡公) 식(軾,시조로부터 8세)이다. 문간공 뒤로 3대가 높은 벼슬에 올랐고, 또 3대는 음사(蔭仕)하였는데, 억령(億齡:만취공)이 홍문관 제학이 되고 백령(百齡:묵제공:오준의 부)이 이조 참판이 되면서부터 가운(家運)이 번창하여 온갖 꽃이 일제히 피는 것과 같았다. 백령의 아들 단(端)과 단의 아들 정원(挺垣)이 모두 관찰사를 지냈고, 정원은 계부(季父)에게 출계(出系)하였다. 정원이 우의정 시수(始壽)를 낳았으니, 우의정이 바로 공의 증조부이다. 조부 진사(進士) 상부(尙溥)와 아버지 기운(箕運)은 모두 포의(布衣 벼슬 없는 선비)로 평생을 마쳤으니 이는 시운(時運)이 비색해서였다.
우상공(右相公)이 일찍이 원접사(遠接使)가 되었을 적에 청나라 사신이 주약신강(主弱臣强)이란 말을 하므로 상공(相公)이 이 말을 역말로 급히 보고케 하였다가 마침내 이로 인해 죄를 입었다. 숙종 때 경신대옥(庚申大獄)이 일어나자, 당인(黨人)들이 상공을 끝없이 무함하여 신유년 봄에 사사(賜死)되었다. 기사년에 신원(申寃)되었다가 갑술년에 다시 삭탈관작(削奪官爵)되어 오래도록 복작(復爵)되지 않으니, 공은 포의(布衣)로서 분연히 일어나 죽음을 무릅쓰고 상공(相公)의 억울함을 여러 차례 호소하였으나 당로자(當路者)가 이를 방해하였다.
때마침, 채번암(蔡樊菴)이 사신(使臣)으로 심양(瀋陽)에 갔다가 당시 주약신강에 대한 설(說)이 자세히 기록된 청나라 사람의 문자(文字)를 구해 왔으므로 주약신강이란 말이 상공이 가탁한 것이 아니라 하여 드디어 선대왕(先大王)의 은혜를 입어 신원되고 복작되었다. 사람마다 공의 효성을 칭찬하여, 그 명성이 일세(一世)를 떠들썩하게 하였다.
공은 성격이 기이(奇異)하고 체격이 크며 뜻이 크고 기개가 있어 고가(古家)의 기풍이 있었다. 9척 장신(長身)에 풍골(風骨)이 준수(俊秀)하며 음성이 우렁찼다. 비록 가난에 찌들었으나 기개가 드높아 조금도 비굴함이 없었다. 건륭(乾隆) 갑진년에 번암이 참소를 입어 벼슬을 내어놓고 교외(郊外)에 머물고 있을 때 채홍리(蔡弘履)와 목만중(睦萬中) 등은 모두 등을 돌리고 번암을 해쳤다. 이때 공은 비록 평민이었으나 사림(士林)의 영수(領袖)로서 항상 언론이 준엄하였다. 이때 승지 유항주(兪恒柱)가 번암에게 편지를 보내어 채홍리의 배은망덕(背恩忘德)을 공격하니, 목만중은 그래도 홍원(弘遠 번암의 양자)이 홍리와 인연을 끊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그러자 공은 즉석에서 면대(面對)하여 만중의 말을 꺾어버리기를,
“홍원이 홍리를 끊지 않는다면 이는 무부(無父)의 나라가 되는 것이다.”하였다. 공은 이 말로 인해 결국 목만중에게 미움을 사게 되었다.
무신년 봄에 번암이 정승으로 들어가 12년 동안 정권을 주도하였으나, 공이 그 집에 드물게 갔었고, 번암도 공을 천거하지 않았으므로 고생이 여전하였건만 끝내 원망하는 기색이 없었으니, 공의 지조를 알 만하다.
을묘년에 목만중이 이가환(李家煥)을 모살(謀殺)하려 할 때 공은 또 윤신(尹愼)에게 편지를 보내어 가환의 무죄를 밝혔다가 불량배(不良輩)들에게 크게 미움을 샀다. 신유년 봄에 목만중ㆍ홍낙안 등이 대사간 신봉조(申鳳朝)를 시켜 발계(發啓)하기를,
“오석충(吳錫忠)은 바로 이가환의 호법신(護法神)(불법을 수호하는 신: 자기를 도와주는 고마운 사람)으로 흉얼(凶孼)과 체결(締結)하여 성원(聲援)으로 삼았다.”
하였으니, 흉얼이란 바로 홍봉한(洪鳳漢)의 아들 홍낙임(洪樂任)을 지적한 것이다. 공이 체포되어 옥에 갇히자 옥관이 체결한 사실을 캐내기 위하여 말할 수 없는 참혹한 고문(拷問)을 가하니, 공은 정신이 혼미하여 거짓으로 자백하기를,
“병신(丙申)년 가을에 한 번 가서 만난 사실이 있다.”하였다. 아! 丙申년 가을이라면 홍인한(洪麟漢)이 사사(賜死)된 때인데, 어느 누가 홍낙임을 만나보러 갔겠는가. 옥사가 오래도록 결말이 나지 않자 하루는 옥관이 나에게 묻기에 내가 강개(慷慨)하게 변론하기를,
“오석충은 나와 가장 친하다. 내가 군직(軍職)으로 받는 녹 중에서 2말(斗)은 반드시 매자항(梅子巷)의 오석충에게 나누어 주었고, 또 오랜 장마나 한 겨울에 나무장사가 끊기면 나는 반드시 한 짐의 나무를 매자항의 석충에게 보냈으니, 석충이 체결한 일이 있다면 다른 사람은 다 몰라도 나는 반드시 알 것이다. 석충이 체결한 일은 없다.”하니, 옥관이 묻기를,
“이가환이 목만중에게 물어보면 석충이 체결한 일을 알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건 무슨 말인가?”하기에, 내가,
“그것은 가환이 거짓으로 고한 것이다. 내가 석충과 가장 친하고 가환이 다음으로 친하며 만중은 석충과 원수이니, 만약 체결한 일이 있다면 내가 제일 먼저 알고 다음에 가환이 알고 그 다음에 모든 사람이 다 알게 된 뒤에야 만중이 알게 될 것이다. 체결한 비밀스런 일을 친한 사람도 모르고 있는데 원수가 어찌 먼저 알 수 있겠는가?”
하니, 옥관은 내 말을 납득하고서 이 뒤로는 고문을 하지 않았다.
악인(惡人)들은 석충이 죄에서 벗어나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은밀히 다른 죄수(罪囚)의 집에서 압수한 서서(西書) 1권을 가져다가 석충의 서가(書架)에 끼워 놓았다. 옥관은 곧 이것을 증거로 삼아 석충을 임자도(荏子島)로 유배시켰다. 임자도(전남 신안군 임자면)는 영광(靈光) 앞 바다 가운데 있다. 공이 귀양가기 위하여 옥에서 나와 탄식하기를,
“우리 할아버지께서도 신유년 봄에 옥에 갇혀 돌아가셨고, 나 역시 신유년 봄에 옥에 갇혔으니 이 신유년은 무슨 해인가?”하였다. 몇 해 뒤에 내가 돈 두 꾸러미를 해상(海商) 편에 부탁하여 임자도로 보냈더니, 이미 공이 죽은 지 한 달이 지난 때였다. 공의 죽은 연월도 자세치 않고 공의 무덤 역시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묘지(墓誌)를 지어 공의 무덤이 있는 곳을 아는 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노라.
공은 딸 하나를 두었는데 권상문(權相問)의 아내가 되어 아들 형제를 두었다. 공은 마침내 대(代)를 잇지 못하였으니 누가 공을 알겠는가. 아, 슬프다. 명은 다음과 같다. 병인년 9월에 졸(卒)했고, 묘는 과천(果川) 금정(錦亭) 선영의 남쪽에 있다.-명은 생략.』
여기서 나타난 오석충의 사위 권상문의 아버지 권일신을 살펴보자. 천주교에 대한 대략적인 계보가 나와 있어 전부 옮긴다.
『본관은 안동(安東). 호는 직암(稷庵). 세례명은 프란시스 자비에르(Fran-cis Xavier). 갈산 출신. 권근(近)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관찰사 권암(巖)이고, 형이 권철신(哲身)이며, 역사학자 안정복(安鼎福)의 사위이다.
남인계의 학자로 양명학을 연구하다가 1782년(정조 6) 이벽(李蘗)의 권유로 천주교에 입교, 청나라에서 영세를 받고 온 이승훈(李承薰)에게 최초로 프란시스라는 세례명으로 영세를 받았다.
그 뒤 이벽ㆍ이승훈과 함께 포교에 전력해 충청도 내포(內浦)의 이존창(李存倉, 혹은 李端源)을 입교시키고, 또 전주의 유항검(柳恒儉)을 개종시켰다. 1785년에는 서울 명례동에 있는 역관 김범우(金範禹)의 집에서 정식으로 교회 집회를 열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추조적발사건(秋曹摘發事件)이 일어났지만 학행(學行)과 가문으로 인해 무사하였다.
그 뒤 1787년에 이벽이 사망하자 조선 교회의 재건을 위해 조동섬(趙東暹)과 함께 용문사(龍門寺)에 들어가 8일간 피정(避靜 : 도피해 조용히 지냄)하면서 신앙을 더욱 두텁게 하였다. 그리고 추조적발사건으로 흩어졌던 초대 교회의 주역들인 이승훈ㆍ정약용(丁若鏞) 형제 등과 함께 더욱 견고한 교회의 건설을 위해 교계제도(敎階制度)를 세웠다.
이것을 가성직자단(假聖職者團)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주교(主敎)가 되었고 다른 동료 교우들인 이승훈ㆍ정약종ㆍ최창현ㆍ이단원ㆍ유항검 등은 각기 신부로 지명되어 본격적으로 천주교 사목(司牧)을 시작하였다.
최창현(崔昌顯)의 도움을 받으면서 더욱 열심히 천주교 포교에 전력하다가 1791년에 진산사건(珍山事件)이 일어나자 홍낙안(洪樂安)ㆍ목만중(睦萬中) 등의 고발로 체포되었다. 그는 당시 자질과 덕망을 높이 평가받던 터라 제주도로 유배되는 데 그쳤으나, 제주목사로 하여금 한 달에 세 번씩 신문하라는 하교를 첨가시켰다.
당시 유배지로 출발하기 위해 서울에 있는 매부 이윤하(李潤夏)의 집에서 상처를 치료하며 행장을 준비하고 있을 때, 정조의 명령을 받은 별감이 와서 당시 80세가 된 어머니와 유배지인 제주의 거리를 다시금 환기시키며 천주교와 유교에 대한 애매한 글귀를 내놓고 수결(手決 : 서명)하기를 권하자 마음대로 처리하도록 하였다.
이로 인해 유배지가 예산으로 바뀌게 되었지만, 한편으로 달레(Ch. Dallet)의 〈한국천주교회사〉에는 부모에 대한 지나친 인성적(人性的) 사랑 때문에 배교했다고 기록되기에 이르렀다.
그 뒤 예산으로 유배가던 중 혹심했던 장독으로 인해 주막에서 사망하였다. 명문의 집안에서 태어난 학자로서 서학에 일생을 종사하다가 순교한 것이다.』
여기에서 잠깐 정약용과 그의 가계도 살펴보자.
정약용은 조선 후기 유형원과 이익의 학문과 사상을 계승하여 실학을 집대성한 실학자이다. 본관은 나주, 자는 미용, 송보, 호는 사암, 여유당이며 그는 출중한 학식과 재능을 바탕으로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 신유사옥 후 전라남도 강진으로 유배되었는데, 그는 이곳에서 독서와 저술에 힘을 기울여 그의 학문체계를 완성했다. 그는 피폐한 농촌사회의 모순에 관심을 갖고 정치개혁과 사회개혁에 대한 체계적으로 연구했다. 특히 <경세유표>·<목민심서>·<흠흠신서>를 통해 실현 가능한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다산은 다양한 분야에서 천재에 가까운 인물로, 자연과학에도 관심을 기울여, 홍역과 천연두의 치료법에 대한 책을 내기도 했고, 도량형과 화폐의 통일을 제안했으며 건축기술인 거중기를 고안하기도 했다.
또 정약용의 큰 형은 정약현인데 처남이 이벽이다. 그리고 사위로 황사영을 얻는다. 그리고 이승훈은 정약용의 매형이다. 모두 초대 천주학의 주요 인물들이다.
이렇게 연결된 가문대 가문으로 오석충도 천주교도로 몰려 유배 후 그곳에서 죽는다. 사위 권상문에게 시집 간 딸은 권황ㆍ권경 두 아들을 둔다. 그리고 권상문은 1801년(신유박해) 양근에서 박해로 참수되어 순교한다.
오석충 사돈으로 권철신(권상문이 백부에게 양자 감) 다음 이윤하가 있는데 족보나 다른 기록에는 없다. 다만 최근 연구되고 있는 ‘이순이’라는 천주교도에 관련 기록이 있어 오석충에게 다른 자식이 있어서 이윤하의 자식과 결혼시킨 것이 증명된다. 그 사위 이름이 이경도인데 딸로 ‘동아’도 둔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정약용이 오석충의 차녀를 모르지 않았겠지만 세상에 아무런 자취도 남기지 못하고 떠난 그들을 새삼 언급할 이유는 없어 묘지명에 없게 된다.
이즈음 동복오씨 사돈가를 알아보면 먼저 오석희의 사위로 이수일이 들어온다. 이수일은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자준(子俊), 호는 구호(龜湖). 영의정 이산해(李山海)의 7대손이며, 아버지는 이성(李宬)이며, 어머니는 채성윤(蔡成胤)의 딸이다.1740년(영조 16)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거쳐 1756년에 지평에 올랐다. 1762년 삼남지방에 흉년이 들자 장령으로서 제군문(諸軍門)의 경비를 경감할 것 등 8조의 황정책(荒政策)을 진언하였다. 1771년 다시 헌납이 되고 이어 승지에 올랐다. 후손 수당 이남규와 연결된다.
다음은 진보이씨 이수약이다. 오상직의 장인이다. 퇴계 이황의 6대손으로 고조는 이영도이다. 이영도는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는 안동에 내려가 의병을 모집하여 왜군과 싸웠다. 이듬해 연원도찰방으로 나가 전쟁의 재해를 입은 백성들의 구호와 군량미를 조달하여 명관으로 이름을 떨쳤고, 1594년 충청도판관을 겸직, 피난민들에게 농사를 짓게 하여 전란중에서도 수만 석의 양곡을 생산하였다.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추록되었으며,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오경의 장인은 정언충이다.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국이(國耳), 호는 구옹(龜翁). 정유석(鄭有錫)의 증손으로, 1740년(영조 16)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754년 사헌부장령으로 천보되어 당시 국가시책의 급선무로서 붕당을 없애고 국가기강을 세우며, 언로를 개방하고, 백성의 생활안정을 추구하며, 군비를 갖추는 일 등을 주장하였다. 1796년(정조 20) 판윤 권엄(權엄)에 의하여 청백리로 천거되었다.
다음은 오국관의 장인 정영신이다. 정영신은 나주정씨로 조부가 정시한, 아버지는 정도항이다.정시한은 오직 이현일(李玄逸)·이유장(李惟樟) 등과 교유하면서 학문에 힘쓰고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1690년(숙종 16) 「만언소(萬言疏)」를 올려, ‘왕의 마음을 바로잡을 것’, ‘집안 다스리기를 엄격히 할 것’, ‘나라의 근본을 배양할 것’, ‘조정을 바르게 할 것’, ‘인재를 쓰고 버림에 신중히 할 것’, ‘언로를 열 것’의 6조를 제시하였다. 이 상소의 구절에 왕이 분노하여 관직을 삭탈하도록 명하였다. 또 1691년 서인을 몰아내고 남인이 집권한 기사환국이 일어나자, 그는 남인에 속하면서도 인현왕후를 폐위시킨 일은 잘못이라고 소를 올렸다가 삭탈관직 당하였다. 그의 생애와 인품에 대해 『숙종실록』에서는 “일찍부터 과거 공부를 버리고 편안하게 고향에서 지냈다. 어버이를 섬겨 효도했으며, 성품이 공손하고 조심스러워 남과 비교될 바가 아니었다고 전한다.
따라서 영정조때 시율과 문장에 뛰어나 사림의 모범으로 명성을 얻은 정범조에게 오국관은 고모부가 되는 것이다.
다음은 오해운 장인 심단이다.심단은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덕여(德輿)로 아버지는 평시령(平市令) 심광면(沈光沔)이고 어머니는 해남 윤씨로, 예조참의 윤선도(尹善道)의 딸이다. 1680년 남인세력이 서인세력에 의하여 쫓겨나는 경신대출척으로 양덕에 유배되어 10년 간 지내다가, 1689년 남인이 득세하는 기사환국으로 다시 풀려나 교리·부응교(副應敎)·수원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유배 생활의 경험을 백성편에서 상소하여 왕의 인정을 받았다. 당시 인현왕후(仁顯王后)민비가 쫓겨나자, 박태보(朴泰輔) 등이 이를 반대하다가 참살을 당하였다. 심단은 비록 반대파이지만, 박태보의 충성을 칭찬하기도 하였다.
다음은 남양홍씨이다. 오처중의 장인 홍일환, 오응운의 장인 홍일지, 오석사의 장인 홍일항 모두 홍우원의 손자이다. 홍우원은 할아버지는 형조판서 홍가신(洪可臣)이고, 아버지는 한성서윤 홍영(洪榮)이며, 어머니는 이조판서 허성(許筬)의 딸이다. 1654년 수찬이 되었는데, 강빈(姜嬪: 昭顯世子嬪) 옥사의 허위임을 직언하다 장살(杖殺)당한 황해도관찰사 김홍욱(金弘郁)의 신원(伸寃: 원통함을 풀어 버림.)을 주장하다 파직당하였다. 1663년 다시 수찬이 되어 조대비(趙大妃: 仁祖繼妃慈懿王后)의 복상문제로 유배된 윤선도(尹善道)의 석방을 주장하다 파직되었다. 1676년(숙종 2) 대사성·예조판서·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이듬 해 우참찬이 되어 흉년임을 들어 대동미(大同米)를 감량할 것, 납물교생(納物校生)의 면역(免役)을 중지할 것, 납속자(納粟子)에 대한 불신을 없앨 것 등을 진언하였다. 1680년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이 몰락하자 허적(許積)의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명천으로 유배되었다. 그러다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문천으로 이배된 뒤, 1687년 현지에서 죽었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복작(復爵)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학문이 고명(高明)하고 성품이 직절(直節)하다 해서 파직되었을 때마다 조정에서는 서용(敍用: 죄로 벼슬을 면한 사람에게 다시 관직을 주어 발탁함.)할 것을 국왕에게 진언하였다. 안성의 남파서원(南坡書院)·백봉서원(白峯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남파집(南坡集)』 13권이 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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