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성산 등반을 마치고 한천리-도천리를 거쳐 곰나루쪽으로 난 길로 직행했다
질마고개를 거쳐 공주보를 들렀다
불과 40여년 전만해도 비가 많이 올때면 배로 건너야만 했던 이 곳이 이제 보강된 시설로 인해 물난리 걱정없는 도로는 물론 공주보까지 신설해 공주시내와 이어진 현실이 지나간 과거의 일들을 추억하게 한다
4대강 사업이 자연스런 환경에 문제가 될 것이라는 수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과거 이명박 정권에서 무대뽀로 밀어부치더니 이제는 세금이 아까울 정도로 효율성이 떨어지고 한낱 구경거리로만 전락하게 된 공주보. 다행히 현정권이 들어선 후 수문을 많이 개방하며 아름다운 금강을 다시 찾는 중이다
저 멀리 곰나루가 보인다
곰나루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내려온다. 아득한 옛날 한 사냥꾼이 사냥을 하러 강을 건너 갔다가 여자로 화한 곰에게 붙들려서 본의 아니게 동굴에 갇혀 암곰과 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곰은 의심이 많아서 밖으로 나갈때는 동굴의 입구를 바위로 막아 놓고 나가곤 하였다. 그렇게 수년간을 살아오면서 아이 셋을 낳았는데 하루는 곰이 방심한 틈을 타서 사냥꾼이 동굴을 빠져나와 강을 건너오고 말았다.
탈출을 한 사냥꾼에게 곰은 다시 돌아오라고 애처롭게 호소하였지만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곰은 도망간 남편을 원망 하면서 세 아이를 안고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고 한다. 그 뒤로는 죽은 곰의 원혼 탓인지는 몰라도 농사를 지으면 계속 흉년이 들고 배를 타면 물결이 세차게 일어 배가 전복되는 일이 자주 발생하여 사람들이 조금 떨어진 곳에 은곰의 원혼을 달래기 위한 사당을 세운 뒤에는 그런 일이 없어졌다고 한다. 지금도 송림 사이에 웅신을 모신 곰사당이 있어, 곰과 인간의 애닯은 사랑 이야기를 들 려주고 있다.
공주보를 통해 공주 웅진동 황새바위를 찾았다
공주 황새바위 천주교순교유적(公州 황새바위 天主敎殉敎遺蹟)은 공주시 교동 1-6에 있는 조선시대 충청도 감영에 체포된 천주교인들을 처형한 유적지이다.
공주 감영 또는 우영(右營)에 체포된 교인들은 현 교동성당 인근에 있는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이곳에서 처형되었는데, 내포의 사도라 불리는 이존창(李存昌)도 이곳에서 참수되었으며, 치명일기에 기록된 순교자만 164인에 이른다.
가장 높은 언덕에 이렇게 순교자들의 이름을 돌에 새겨 그 영혼을 위로하고 있다
당시 이곳에서 이들이 처형되는 광경을 구경하기 위해 반대 공산성 성루에서 수많은 군중이 슬픔을 같이 했다고 한다
반대 공산성 모습이 이곳에서 지척이다
성리학(주자학)을 근본학문으로 정한 조선은 후대로 오면서 과격한 서인 노론계열이 정권을 찬탈하고 학문에 대한 경직성을 더욱 강화해 종교성까지 가미시킨다
결국 자신들의 정권에 해가 되는 서학의 평등사상에 위기감을 느껴 이같은 만행을 저지르게 된다
아울러 초기 천주학은 서인 노론정권의 정치공작에 의해 중앙정계에서 밀려난 남인 인물들에 의해 주체적으로 수용되고 이것이 서민층 사이 급속도로 퍼져 나간다 이에 중앙정계를 차지한 노론 보수정권은 이 천주학을 이용 몇 안 되는 남인까지 절멸시키려고 더욱더 박해가 심해진다
이벽,이승훈, 권일신,정약용 같은 인물들이 이와 연계되어 있다
당시 천주교인으로 순교한 이순이의 옥중편지이다 이순이는 이윤하의 딸로 이윤하는 지봉 이수광의 8대손이다. 성호 이익(李瀷)의 문하에서 이승훈,김원성(金源星) 등과 수학하고 천진암 · 주어사 강학회의 일원으로 활약하였다.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이 일어났을 때 처남인 권일신(權日身) 등과 함께 형조에 압수된 성물(聖物)들을 찾아오는 등 한국 천주교회 창설을 전후로 꾸준히 활동하였다
이 이윤하와 사돈으로 엮어진 우리 동복오씨 오석충 할아버지(이윤하 아들 이경도의 장인)도 결국 이 천주교에 얽혀져 임자도로 유배를 간 뒤 바로 장독으로 돌아가셨다. 바로 공주 우성 단지리 월굴 수촌공 오시수의 증손이다
어쨌든 이 곳은 그런 역사를 간직한 한많은 영혼들의 모습이 서려있는 공간이다 지금은 이들의 안타까운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 순교자의 무덤 등 다양한 시설을 꾸며 놓고 있다
그러나 이 또한 천주교 조직에서 이들을 통해 교세를 확장시키려는 꼼수가 아닌가 반성해볼 때다. 우리나라 개신교는 이러한 순교까지 감내하며 서학을 추구해야 했던 그 시대 민중들의 한맺힌 이상사회를 더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한다
옆에 있는 공주중학교 야구부 학생들의 힘찬 훈련 소리를 들으며 황새바위를 내려온 후 가까운 공주향교를 들렀다
우성 이외 우리 집이 이 곳에 있어 내가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보냈던 곳이라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하기도 해서이다
최근에 세워진 오강표 순국지사의 안내판이 있다 예전엔 없던 것이다
공주향교는 충남 공주시 교동에 있는 향교로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75호이다. 창건 연대는 미상이며 원래 웅진동 숭산 기슭에 있던 것을 1623년 순찰사 신감과 목사 송흥주가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전해진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3칸의 대성전을 중심으로 동무(東廡)·서무(西廡)·신문(神門)·제기고(祭器庫)·명륜당·강학루(講學樓)·동재(東齋)·서재(西齋)·존경각(尊經閣)·외삼문(外三門)·고직실(庫直室) 등이 있다.
이어 우리 집이 있던 곳을 둘러보고 봉황산 오르는 산마루에 있는 단군성전을 들렀다
조선시대 지도엔 이곳 부근에 사직단이 있는 것으로 표시되는데 현재는 단군성전이 있다
분명 우리나라 역사에서 단군조선은 커다란 자취를 남기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대부분의 우리 민족 독자적인 사료(여러 역사서 등)이 일본사학자들에 의해 없애지고 현재 우리는 단군을 그냥 몇 줄 안되는 신화로만 기억하고 있다
요즘 환단고기라는 사료로 단군 및 그전 환인 환단시대, 환웅 배달시대가 서술되어 있으나 일본사학자의 후배들인 현재까지의 우리나라 역사학자들은 이를 허무맹랑한 담론으로만 취급하고 있다 단재 신채호 선생 등이 단군시대를 비중있게 다룬 것으로 보아 분명히 조선말기까지 단군시대는 우리가 현재 생각하는 단군시대와는 차원이 다른 그 무엇이 있을 것이다 빨리 근접한 진실을 찾고 싶다
가운데 향교 앞으로 보이는 어두운 빨간집이 들어선 터가 우리 옛 집터이다 개발에 밀려 그냥 내준게 안타깝다
날이 저물어 천안으로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