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재 지; | 경기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6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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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의 만안교(萬安橋)는 정조대왕의 효심이 서린 뜻깊은 다리이다. 만안교(萬安橋)는 정조의 융릉 행차시에 참배행렬이 지나갈 수 있도록 만든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홍예석교이다. 1795년에 조영되었다. 길이 31.2m, 나비 8m. 현재 아랫부분은 모래 속에 묻혀서 확실한 상태를 알 수 없고, 7개의 수문은 매끄럽게 다듬은 장대석을 총총하게 잇대어 아치를 형성하였는데, 아치는 하단부부터 곡선을 그려 전체의 모양은 완전한 반원형을 이루고 있다. 정조(正祖)가 아버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무덤 현륭원(顯隆園)에 전배할 때 가설한 다리로 그 옆에는 만안교비가 세워져 있다. 이 비에 의하면 다리의 가설은 부근의 유수(留守)까지 동원된 큰 공사였다고 한다. 정조임금이 그의 부친 사도세자의 묘소를 찾던 화산능행(花山陵幸)을 6차(1795)부터 과천로에서 시흥로로 변경하면서 안양에는 안양행궁(安養行宮)과 더불어 만안교(萬安橋)가 가설되었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능을 양주(楊州)에서 수원 화산으로 옮긴 후 자주 참배하여 아버지의 원혼을 위로하였다. 원래 서울에서 수원으로 가는 길은 용산에서 노량진으로 가서 한강을 건너고 동작을 거쳐 과천으로 통하는 길이었다. 그러나 그 길에는 다리가 많고 고갯길이 있어서 행차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또한 그 길은 사도세자의 처벌에 적극 참여한 김상로(金尙魯)의 형 김약로(金若魯)의 묘를 지나게 되므로 정조가 이를 불쾌히 여겨 시흥 ~ 수원 쪽으로 길을 바꾸도록 하면서 이곳 안양천을 지나게 되었다. 원래 만안교가 가설되기 이전 삼성천에는 사람들의 통행을 위한 목교가 가설되어 있었다. 그러나 부실한 목교로는 임금이 행차하는 어가의 행렬을 지탱하기 어려웠던 연유로 해서 당시 금천현감 서 유방에 의해서 정조 19년(1795) 9월, 착공 3개월만에 완공을 보게 된 것이 바로 만안교이다. 만안교가 이렇게 빨리 완공을 보게된 것은 부근의 하천에서 교량 건축용 좋은 석재들이 많이 발굴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만안교가 완공된 것을 크게 기뻐한 정조는 감독자에게 후한 상을 내리고, 교량을 건설한 편의가 만백성에게 미쳐 원근의 짐꾸러미들이 이 튼튼한 다리를 통하여 만년동안 편안하게 건너게 된 것을 기린다는 뜻에서 만안교란 다리의 이름도 직접 지었다는 내용이 만안교비(萬安橋碑)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만안교가 가설된 이듬해부터 정조는 일반적으로 말하는 다섯 번이 아닌 도합 네 번 이 다리를 통과하여 화산(花山)에 있는 부친의 묘소를 찾았다. 만안교(萬安橋)는 원래는 지금의 위치에서 남쪽으로 200m정도 벗어난 지점에 있던 것을 1980년 국도 확장과 함께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