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림
‘민중의 벗’ 신경림, 하늘로 떠나다…추모 물결~
향년 88세. 깊이 있는 성찰과 날카로운 현실감각으로 문인과 독자 모두에게 사랑받은 시인답게 장례도 대한민국 문인장(文人葬)으로 치러집니다.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한국 문단의 거목이자 대표 민중 시인 신경림. 지난 22일 오전, 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발인은 오늘(25일) 새벽 5시 반, 신 시인은 이제 충북 충주시 노은면 선산에서 영면에 들었습니다.
영결식에는 수많은 문학계 인사들이 찾아왔습니다. 국립한국문학관장인 문정희 시인의 추도사 낭독, 전 대한민국예술원회장 이근배 시인의 조시 낭독이 있었습니다. 여서완·강정화 시인의 '가난한 사랑노래'·'농무' 시 낭송도 이어졌습니다.
가난한 사랑 노래
-이웃의 한 젊은이를 위하여
신경림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보지만
집 뒤 감나무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 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 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 신경림 가난한 사랑노래 전문
■ "신경림, 등불이자 나침판"
고인을 기리는 영결식은 어제 (24일) 저녁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1층 행사장에서 엄수됐습니다.
장례위원장인 염무웅 영남대 명예교수는 신경림 시인을 기리며 추모사를 낭독했습니다.
염 위원장은 1970년 계간 '창작과 비평' 편집위원으로 신경림 시인을 발굴하고, 창비 대표를 역임한 인물입니다.
염 위원장은 추모사에서 "고인은 70년 가까운 문필생활을 통해 수많은 시와 산문을 민족문학의 자산으로 남겼고, 일제강점기부터 오늘에 이르는 고난의 세월을 이웃 동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정직하고 치열하게 살아냈다"고 그의 삶을 평가했습니다.
"일반 독자의 접근 가능성을 향해 누구보다 넓게 열려 있다"며 "그 안에서 독자들이 누릴 수 있는 문학적 자양분 또한 가장 보편적인 언어로 구성돼 있다"고 그의 예술 세계를 설명했습니다.
故 신경림 시인 (창비 제공)
그러면서 "고인은 이름난 시인이 되고 난 다음에도 유명인 행세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1970, 80년대의 군사독재 시절 경찰의 감시와 연행에 수시로 시달리면서도 스스로 민주인사인 체 내세우지 않았다"고 기억했습니다.
염 위원장은 "고인의 끊임없는 자기성찰은 고인의 발길을 바르게 이끈 등불이고 나침판이었다"며 "자신의 시대적 임무를 마치고 떠나는 선생님, 우리의 생이 다하는 순간까지 선생님이 남긴 아름다운 추억을 간직하며 문학을 이어가겠다"고 전했습니다.
24일 열린 故 신경림 시인 영결식
■ 시로 마음을 울리다…'민중의 벗' 신경림
신경림은 민중의 삶과 애환을 묘사해온 민중 시인이었습니다.
고인의 첫 시집이자 대표작 '농무'. 서슬 퍼런 개발독재 시대, 그는 2·3차 산업 부흥에 밀려 소외된 농촌의 열악한 현실을 포착했고 시편 하나하나에 담아냈습니다.
이는 서정시만 존재했던 1970년대 우리 시단에 큰 충격을 던져줬고, 신 시인은 '농민들의 울분과 허탈감을 시로 승화시켰다'는 평가를 받으며 제1회 만해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 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 신경림 '가난한 사랑노래' 中
이후 1988년 나온 시집 '가난한 사랑노래'에서 신 시인은 도시 빈민층의 고달픈 삶에 집중했습니다. 이 시집으로 고인은 농민 시인에서 민중 시인으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신 시인은 민중 시의 장을 열며 우리 문단의 거목으로 평가받았고, 만해문학상과 한국문학작가상, 이산문학상 등도 수상했습니다. 2001년에는 문학적 공로를 인정받아 은관문화훈장도 수훈했습니다.
낮은 자, 소외된 자들의 고달픔에 주목하며 함께 아파했던 故 신경림 시인. 이제 평화로운 안식에 들기를 그를 사랑했던 벗들과 독자들은 바라고 있습니다.
목계장터
신경림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 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산서리 맵차거든 풀 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민물새우 끓어 넘는 토방 툇마루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로 변해
짐 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신경림
1956년 《문학예술》에 갈대 등이 추천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
시집 『농무』 『새재』 『가난한 사랑노래』 『길』 『쓰러진 자의 꿈』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뿔』 『낙타』 외
농무(農舞)
신경림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 달린 가설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 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조무래기들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벼락에 붙어 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 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 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라리를 불거나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거나.
(『창작과비평』 22호, 1971. 가을)
[어휘풀이]
-꺽정이 ⸱ 서림이 :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에 나오는 인물
-쇠전 : 우시장(牛市長). 소를 파는 시장
-도수장 : 도살장. 짐승을 잡는 곳.
[작품해설]
이 시는 산업화의 거센 물결로 인해 급속도로 와해되어 가던 1970년대 초반의 농촌을 배경으로 농민들의 한과 고뇌를 노래하고 있는 작품이다. 농촌의 절망과 농민의 울분을 고발 ⸱ 토로하고 있으면서도, 그 울분이 선동적이거나 전투적인 느낌으로 발전되지 않는다. 그것은 ‘날라리를 불’고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드’는 ‘신명’으로 끝나는 작품 구조에 의해서 교묘한 역설과 시적 운치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시는 울분과 절망을 정반대의 ‘신명’으로 극복하고자 하는 농민들의 처절한 몸짓을 통해 그들의 아픔이 역설적으로 고양되는 효과를 얻게 된다.
연구 분이 없는 20행 단연 시 구조의 이 시는 내용상 4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1단락은 1~6행으로, 농무가 끝난 뒤 농민들이 ‘소줏집’에서 답답하고 고달픈 심정을 술로 달래는 모습을 보여 준다.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로 시작되는 1행은, 농무가 두렛일의 흥겨움보다는 농민들의 자조적인 한탄과 원한의 몸직임을 타타내기 위한 예고의 의미를 지닌다. 또한 농무가 끝난 뒤의 ‘텅 빈 운동장’이 주는 공허감은 이젠 더 이상 농무에 신명을 느낄 수 없는 농민들의 의식을 반영한 것이자, 이런 현실에 대한 공연자의 안타까움과 공허함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한’ 그들은 텅 빈 마음과 고달픈 삶을 그저 술로 달랠 뿐이다.
2단락은 7~10행으로, 농악패에 대한 농민들의 냉담한 반응을 통해 예전과 달라진 농촌의 모습을 제시한다. 그들이 옛날의 풍습대로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보아도, 신명나게 놀아주던 어른들 대신, ‘조무래기들’만 악을 쓰며 따라붙거나 ‘기름집 담벽에 붙어 서서 / 철없이 킬킬대는’ 처녀애들뿐이다.
3단락은 11~16행으로,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를 ‘여편네이게나 맡겨 두고’ 나온 그들이 자신의 울분을 춤으로 삭이는 모습을 보여 준다. 춤을 추는 그들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거나 ‘서림이처럼 해해대’며 즐거워하지만, 결국은 ‘산 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하며 자신들의 삶을 자학하거나 체념하고 만다. 임꺽정과 서림은 민중을 대표하는 인물들로, 이들을 구체적으로 거명한 까닭은 농민들의 한과 슬픔이 다만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민중의 삶과 함께해 온 역사적 인것 임을 드러내기 위한 의도적 배려로 볼 수 있다.
4단락은 17~20행으로, 자신의 한과 고뇌를 신명난 춤을 통해 극복하는 모습이다.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이르렀을 때, 농민들의 현실에 대한 분노는 ‘살의’가 느껴질 정도로 극에 달하지만, 오히려 ‘날라리를 불고’ 덩실덩실 ‘어깨를 흔드’는 신명으로 바뀜으로써 그들의 비애가 그만큼 심화되어 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 준다. 그러므로 농민들이 추는 춤은 그들이 말로 표현하지 못했던 현실에 대한 불만과 저항의 강한 몸짓이며, 자신들의 고뇌와 한의 뜨거운 발산임을 알 수 있다.
이 시는 생활 터전을 지키려는 농민들의 안타까운 몸부림을 농촌의 일상 언어를 통하여 사실적으로 표현함으로써 농민들의 정취와 정감을 물씬 느끼게 해 준다. 또한 이 시는 농민들의 격학 감정을 직접적인 서술로 표출하면서도 농무의 동작이나 농악기의 소리로 적절히 제어함으로써 탄탄한 서정성을 아울러 갖추고 있다. 가난과 절망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농민과 소외된 농촌을 상기시켜 주는 뛰어난 문학성에 힘입어 이 시는 제1회 만해문학상의 영광을 안게 되었다.
[작가소개]
신경림(申庚林)
1935년 충청북도 중원 출생
동국대학교 영문과 졸업
1956년 『문학예술』에 시 「갈대」, 「탑」 등이 추천되어 등단
1974년 제1회 만해문학상 수상
1975년 고은, 백낙청, 박태순, 이문구, 염무웅 등과 함께 자유실천문인현의회 창립
1981년 제8회 한국문학작가상 수상
1983년 민요연구회 창립
1987년 민족문학작가회의 민족문학연구소 소장
1988년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창립, 사무총장 역임
1990년 제2회 이산문학상 수상
1991년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장 및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공동 의장
시집 : 『농무』(1973), 『새재』(1979), 『새벽을 기다리며』(1985), 『달넘세』(1985), 『남한강』(1987), 『씻김굿』(1987), 『가난한 사랑 노래』(1988), 『우리들의 북』(1988), 『저푸른 자유의 하늘』(1989), 『길』(1990), 『쓰러진 자의 꿈』(1993), 『갈대』(1996),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1998), 『목계장터』(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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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떠난 신경림 시인의 ‘가난한 사랑 노래’ [고두현의 아침 시편]
고두현2024. 5. 22. 23:56
‘한국 시단의 거목’ 신경림 선생께서 오늘(22일) 아침에 돌아가셨습니다. 향년 88세. 깊이 있는 성찰과 날카로운 현실감각으로 문인과 독자 모두에게 사랑받은 시인답게 장례도 대한민국 문인장(文人葬)으로 치러집니다.
선생은 저에게도 특별한 분이셨습니다. 맥주잔을 앞에 놓고 구수한 옛날이야기와 시작(詩作) 뒷얘기를 즐겁게 들려주셨고, “시는 혼자 골방에 들어앉아 머리로 쓰는 게 아니라 생생한 삶터에서 치열하게 부대끼며 온몸으로 쓰는 것”이라며 “힘닿는 데까지 일터를 지키면서 살아있는 시를 쓰라”고 말씀하셨지요.
2005년에는 제 시집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문예중앙)의 표4(표지 뒷면)에 감동적인 추천사를 써 주셨습니다. 그때의 숨결이 그대로 느껴지는 추천사를 다시 읽어보며 지난 시간을 되돌아봅니다.
“해맑고 아름답고, 곧고 깊은 그의 시는 ‘속 다 비치는 맨몸’(「남해 멸치」)의 남해 멸치처럼 해맑고, ‘절벽에 빗금 치며 꽂히는 별빛’(「별에게 묻다」)처럼 아름답다. 이 해맑음과 아름다움은 마땅히 그의 시에 대중성을 갖게 해줄 터요, 시가 독자와 괴리되고 있는 점이 우리 시의 큰 문제로 지적되고 있는 현실에서 이것만도 큰 미덕일 터이다. 그러나 이 해맑음과 아름다움이 ‘신의 소리를 한 번만이라도 들을 수’(「폭포」) 있기를 바라는 진실에 대한 간절한 바람과 ‘내 묻힌 치욕의 강토 (……) 칼집으로 삼겠도다’(「칼을 베고 눕다」)라는 역사에 대한 뜨거운 관심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알지 않고서는 그의 시를 제대로 읽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그의 시는 또한 곧고 깊다. 그의 시를 읽고 많은 독자들은 말할 것이다, 그 시 참 진국이라고,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는 시라고, 왜 이제야 그의 시들을 읽게 되었느냐고.(「진미 생태찌개」)” ―신경림 (시인)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만큼 선생의 시 「가난한 사랑 노래」를 다시 음미하기로 하고, 3년 전 ‘아침 시편’에 배달했던 편지를 다시 실어 보냅니다.
▶▶▶[관련 뉴스] '가난한 사랑의 노래' 문학계 거목 신경림 시인 별세
「가난한 사랑 노래」는 언제 읽어도 콧등이 찡해지는 시입니다. 언젠가 신경림 시인이 이 시를 쓰게 된 사연을 들려주었습니다.
서울 성북구 길음동 산동네에 살 때였다고 합니다. 집 근처에 자주 들르던 술집이 있었는데, 거기에서 그 집 딸과 연인 사이인 한 청년을 만났다는군요. 그는 부조리한 세상에 맞서는 열정을 지녔지만, 한편으론 많이 배우지 못하고 가난한 처지를 못내 부끄러워하는 순박한 젊은이였죠.
청년이 고민을 털어놨습니다. 그 집 딸을 진심으로 사랑하지만, 너무 가난해서 결혼 얘기를 꺼내기가 힘들다는 것이었습니다. 하긴 딸 가진 부모로서는 그런 사위를 맞아들이기가 쉽지 않겠지요. 그래서 청년은 그 집 딸과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기를 여러 번이나 했다고 합니다.
그 얘기를 듣고 시인은 청년에게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둘이 결혼하면 주례도 해 주고 결혼 축시도 써주겠노라고 약속했습니다. 그 말에 힘을 얻어서 둘은 머잖아 결혼식을 올리게 됐지요.
결혼식장에서 시인은 그들을 위해 「너희 사랑」이라는 축시를 읽어주었습니다.
너희 사랑
-누이를 위하여
낡은 교회 담벼락에 쓰여진
자잘한 낙서에서 너희 사랑은 싹텄다
흙바람 맵찬 골목과 불기 없는
자취방을 오가며 너희 사랑은 자랐다
가난이 싫다고 이렇게 살고 싶지는 않다고
반병의 소주와 한 마리 노가리를 놓고
망설이고 헤어지기 여러 번이었지만
뉘우치고 다짐하기 또 여러 밤이었지만
망설임과 헤매임 속에서 너희 사랑은
굳어졌다 새 삶 찾아 나서는
다짐 속에서 너희 사랑은 깊어졌다
돌팔매와 최루탄에 찬 마룻바닥과
푸른 옷에 비틀대기도 했으나
소주집과 생맥주집을 오가며
다시 너희 사랑은 다져졌다
그리하여 이제 너희 사랑은
낡은 교회 담벼락에 쓰여진
낙서처럼 눈에 익은 너희 사랑은
단비가 되어 산동네를 적시는구나
훈풍이 되어 산동네를 누비는구나
골목길 오가며 싹튼 너희 사랑은
새 삶 찾아 나서는 다짐 속에서
깊어지고 다져진 너희 사랑은
결혼식은 어느 건물의 비좁고 허름한 지하실을 빌려서 했습니다. 청년이 노동운동으로 지명수배를 받아 쫓기는 신세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지요.
숨어서 치른 결혼식은 자못 감동스러웠습니다. 축하객은 다 합쳐봐야 열 명 정도밖에 안 되었지만, 얼마나 가슴 저린 사랑의 결실인지 알고 있었기에 저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축하를 보냈습니다.
그날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곧장 집으로 돌아온 시인은 두 사람이 겪은 마음고생과 인생의 쓰라림을 달래는 마음으로 시 한 편을 더 썼습니다. 그때 탄생한 시가 바로 「가난한 사랑 노래」입니다.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첫 구절만 읽어도 금세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시입니다. 방범대원의 호각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철렁하고 밤마다 잠도 이루지 못하면서 낮에는 또 육중한 현실의 기계음에 시달리는 청년의 마음에 어찌 두려움과 그리움이 없었겠습니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 뒤에 터지던 네 울음.’
절절하다 못해 안타깝기 그지없는 사랑의 아픔 속에서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그가 ‘가난하다고 왜 모르겠는가’ 말입니다.
결핍이 오히려 이들의 사랑을 완성한 힘일지도 모릅니다. 시인의 얘기처럼 가난이란 인생의 커다란 멍에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외면하거나 꿈을 접을 수는 없지 않은가요.
‘가난하기에 오히려 더 치열하게 살아야만 한다’고 시인은 이 시를 통해 말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쉽게 좌절하지 않고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젊음에는 반드시 좋은 결과가 있다는 것을 시인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신경림 시인은 스물한 살 때 「갈대」라는 시로 등단한 이후, 자청해서 남을 위한 헌사를 붙인 시를 쓴 적이 없습니다. 이 두 편의 시는 그가 ‘이웃의 한 젊은이’와 ‘누이’에게 주는 각별한 애정의 증표이지요.
그렇습니다. 때로는 결핍이 충족을 완성하기도 합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꿈을 꾸고, 뜨겁게 사랑하고, 더 나은 삶을 향해 나아가는 게 곧 우리 인생이니까요.
■ 고두현 시인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오래된 길이 돌아서서 나를 바라볼 때』 등 출간. 유심작품상, 김만중문학상,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