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나무 가시
이광조
덤덤했던 고향이 살가워진다. 한 살 두 살 나이가 쌓이면서 가슴에서 고향이 점점 더 커지는 것 같다. 태어나서 14년을 살았던 곳이지만,(라) 50년 이상 거주한 대구에 비하면 그리 긴 기간도 아니다. 그것도 아득한 반세기 이전의 일이니 내려놓을 만도 한데 그렇질 않다. 고향집에 들르면 잊고 살아온 옛일이 불쑥 불쑥 떠오르고, 실마리 하나가 잡히면 고구마 줄기처럼 옛일이 주저리지어 일어난다. ‘그 때를 아십니까?’라는 기록 영상을 보듯이 아련하게 와 닿는 게 대부분이지만, 나무에 생긴 옹이처럼 아직 그대로 남아서 걸리는 일도 있다.
해질녘 기르던 개가 사정(정신)없이 날뛰면서 집 안팎과 근처 논밭을 쏘다녔다. 쥐약을 먹고 속이 녹아내리는 고통을 그렇게 이겨 보려는 것 같았다. 붙잡아서 어떻게 해보고 싶었지만 워낙 맹렬하게 설치자 겁이 나서 식구들이 모두 방안으로 피했다. 해가 저물고 어둠이 깔리면서 소리가 줄어들더니 깜깜한 밤이 되어서야 소란은 멎었다. 뒤숭숭한 밤이 지나고 날이 밝자 온 식구가 나서서 마을 주변을 훑으며 개를 찾았지만 종적이 묘연했다. 주인이 찾는 걸 단념하자, 죽은 개를 찾아내어 구워먹겠다고 동네 청년들이 골짜기를 샅샅이 뒤진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허탕을 친 것 같았다.
일주일 가까이 지난 어느 날, 아침 식사를 마치고(밥을 먹고) 방에서 나오는데 개가 비틀거리며 마당 끝에(가에) 와서 엎드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보였다.) 사력을 다해 기어와서 마당 끝에 이르자 더 이상 발을 옮겨놓을 기력이 없었던 모양이다. “개가 왔다!”고 소리를 지르면서, 달려가 안으니 축 늘어졌다. 소리를 듣고 식구들이 모두 방에서 나와서 개를 둘러쌌다.
해독하라고 녹두즙을 만들어 먹였고, 한기를 막기 위해 천으로 덮어주며 소죽솥 아궁이 앞에서 불을 쬐게 했다. 할머니가 좁쌀죽을 끓여서 숟가락으로 떠먹이자 몇 차례 받아먹다가 머리를 가눌 기운이 없어서 잦아지곤 했다. 그렇게 보살핀 끝에 며칠 뒤 부터 다시 밥을 먹게 되었고, 두어 달 지나자 앙상하던 몸에 살이 오르기 시작했다. 똥개라고 천대하며 제대로 한 번 안아준 적이 없던 녀석이 최고의 관심과 호사를 누린 짧은 기간이었다.
그 시절 우리 집에는 '개를 사랑한다'는 개념이 아예 없었다. 낯선 사람이 오면 짖어서 경계하는 역할과 다 자라서 덩치가 커지면 개장사에게 팔아서 몇 푼 소득을 올리는 게 개를 기르던 목적이었다. 열한명이나 되는 대가족에다 큰 소와 송아지가 있었고 여남은 마리 닭에다 염소도 두세 마리는 늘 있었으니 어느 겨를에 개를 애지중지 할 수 있었겠는가.
아기가 마당에 똥을 누면 맛있게 먹어치웠고, 골목을 나다니다가 눈에 띄는 것이 있으면 알아서 주워 먹던 똥개였다. 점심은 본래 없는 것이었고 조석으로 밥 남은 찌꺼기를 조금씩 주었을 뿐이다. 그런 대접을 받으면서도 제 도리는 다했다. 낯선 사람이 오면 확실하게 방어하며 주인에게 알렸고, 외출했다 돌아오면 일어서서 꼬리를 흔드는 일도 잊지 않았던 녀석이다.
그런데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오니 개가 집 앞 고욤나무에 매달린 채 몽둥이를 맞아 죽어가고 있었다. 집 나갔던 개를 너무 오래 기르면 안 된다는 속설을 믿은 어른들이 마을에 개장수가 오자 팔았고, 그들은 집 앞에 큰 나무가 있는 것을 보고는 거기서 아예 잡아가겠다며 벌인 일이라고 했다. 두들겨 패 잡아야 고기가 맛이 있다고 생각했던 그들은 무지막지하게 매질을 해서 끝장을 본 모양이었다.
어른들이 하는 일은 다 옳다고 여기며 살았던 그 어린 나이에도 ‘이건 아니다’는 생각을 했었다. 사경을 헤매다가 살아서 돌아온 기특한 개를 일 년도 돌보지 않고 팔아버렸고, 가족들이 지켜보는 데서 몽둥이를 찜질을 당하고 숨이 끊어지게 한 건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을 하며 화가 났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 때 느꼈던 안타까움은 기억 속에서 서서히 옅어졌고, 어느 때부턴가 개가 고비를 잘 넘기고 살아 돌아온 사실만 아름답게 남아있었다. 그러면서 언젠가 그 이야기를 글로 써봐야겠다는 생각도 종종 했었다. 충견 이야기나 수 백리를 걸어서 고향으로 찾아간 진돗개 예기를 접하면서 꼭 그렇게 해보리라 (써보리라) 다짐 하곤 했다. 그런데 10여 년 전 어떤 스님이 겪은 일을 알고 난 후부터 생각이 복잡해 졌다.
천축산 무문관 수행의 주인공 제선濟禪스님의 출가동기를 접하게 된 것이었다. 밖에서 문을 걸어 잠근 좁은 방에서 하루 한 끼로 연명하며 6년간 잠을 자지 않고 정진했던 분이었다.
일본의 친척 집에서 하숙하던 청년은 주인집 개를 교외의 숲에 내다 버린다. 개가 밥을 먹지 않아서 자꾸 여위자 죽을 경우 뒤처리를 걱정하여 주인이 그렇게 시킨 것이었다. 눈치를 채고 한사코 따라 붙는 개를 가까스로 따돌리고 돌아왔지만 며칠 뒤 그 개는 다시 찾아온다. 그렇지만 믿고 따르던 자신을 버린 것을 알아차린 개는 한을 품은 모습으로 으르렁거리다가 며칠 뒤 사라진다.
유학을 마친 청년은 고향 제주로 돌아와 결혼을 하고 잘 생긴 아들을 낳(았)는데, 초등학교에 들어간 아이가 어느 날 뚜렷한 이유 없이 죽고 만다. 허망하게 아들을 잃은 공허감에 허덕이던 청년은 뭍으로 건너와 떠돌다가 묘향산의 어느 절에 이른다. 아들이 죽은 원인을 알지 않고는 살아갈 이유를 찾지 못하겠다는 젊은이에게 스님은 자지 않고 7일만 공을 들이면 답을 알 수 있다며 기도를 권한다.
목숨을 건 정진으로 그 과정을 끝냈지만 반응이 없자 배신감으로 치를 떨며 불상의 목을 쳐버리겠다고 뛰어나가다가 탁자에 옷깃이 걸려 넘어지면서 (환상 속에) 아들을 보게 된다. 안으려고 다가가면 계속 달아나는 아들이 얄미워 엉덩이를 차는 순간 ‘깨갱’하는 소리와 함께 아이는 자신이 버렸던 개로 변하여 젊은이를 노려본 것이었다.(보고 있었다.)
따르던 자신을 내다버린 데 대한 앙심을 품고 그 집 아들로 태어나 급사함으로써 아비의 가슴을 후벼 판(것이었다.) 인과응보의 이치에 소름이 끼친 젊은이는 그 자리에서 삭발을 하고 스님이 된다. 밖에서 문을 걸어 잠근 좁은 방에서 하루 한 끼로 연명하며 6년간 잠을 자지 않고 정진했던, 천축산 무문관 수행의 주인공 제선濟禪스님의 출가동기를 접하게 된 것이었다.
사람도 겨우 먹고 살던 시절에 별 생각 없이 이루어진 일이라 여기며 기억을 지우다가도 이내 고개를 가로 젓곤 한다. 사경을 헤매(며)고 나서 가라앉은 몸뚱이를 죽을힘을 다해 끌고 왔던 그(개)가 아닌가. 주인을 찾아가야한다는 일념으로 돌아온 존재를(녀석을) ‘집나갔던 개’라는 낙인을 찍어 생지옥으로 밀어 넣었던(넣다니.) (그 못된) 행위를 한낱 옛일로 돌리기에는 아직 흐른 세월이 모자라는 걸까. 편치가 않다.
시간이 흐를수록 마음이 더 가는 (그리움이 더하는) 고향에 오면(가면), 아련한 옛일들이 떠(올라 미소 짓는다.) 오르고 소리 없이 웃으며 음미한다. 그러나 장미나무의 가시처럼 아픈 기억도 더러 있어서, 생각에 잠기게 되니 인간사 다 좋을 수는 없는 모양이다.
젊은 날의 초상
이연희
수필반의 김 작가님이(수필반에서 함께 수강하는 문우님이) 간식 봉지를 돌렸다. 집에 와서 보니 (캔커피와 함께) 수십 년 만에 보는 청포도 사탕도 두 알 들어 있다. 이 세상에서 오직 나만이 기억하는 추억 하나(가 떠올랐다.). 청포도 사랑 아닌 청포도 사탕 이야기.(사랑이다.)
대학 4학년, 스산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늦가을이었다. 오늘이 어제 같고 내일도 오늘 같을(,) 틀에 박힌 생활이 너무 따분했다. 종합시험 준비기간이라 결석도(이) 가능했다. 그렇지만 학교라도 안 가면 밖에 나갈 핑계가 없으니 그냥 갔다. 나는 갈 길이 정해졌지만 취업준비에 바쁜 친구들도 있어 같이 수다 떨지도 못한다. 수업도(을) 빼먹고 싶고 종합시험 준비도 하기 싫다.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었다. 누구랑 같이 가 아니고 혼자 가야만 한다. 그래야 (마음껏 사색) 생각도 하고 폼도 난다. (날 것이다.)
혼자 일탈을 감행하기로 했다. 집에선 바쁜척하고 1교시 수업에 맞춰 나왔다. (대구)역에서 부산행 열차를 무조건 탔다. 어디를 가던 옆자리가 비면(에) 누가 앉을까 싶어 가슴이 두근거린다.
다른 곳에 빈자리가 있는데도 말끔한 신사가 겉옷을 벗어 내 옆자리에 놓고, 선반에 가방을 올려놓는다. 슬쩍 내 옷 깃에 붙은 뱃지를 본다. 과의 남학생들과 달리 좋은 향기도(가) 나고 세련된 외모다. 가슴은(이) 두근두근 얼굴은 화끈화끈거린다.
어느 학교냐고 묻는다. 자존심 상하네. 그 당시에는 한강 이남에서 최고라고 한(정평인 난) 국립대를 모르다니 . K대공대라 대답하고 자연스레 대화가 이어졌다.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준다. 어라(,) 신문기자다. 어쩐지 좀 세련된 거 같더라니.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선반에서 007 가방을 내리더니 청포도 사탕을 한 봉지 꺼내서 준다. 그 사탕은 그즈음에 나온 신상이었다. 순간 여자 꼬시는 전문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각자 볼 일을 본 뒤 부산역에서 만나 같은 기차를 타기로 했다.
해운대행 버스를 타고 바닷가로 갔다. 인적 드문 늦가을의 바닷가가 영화(의) 한 장면 같다. 파도와 갈매기(와),모래밭과 (그리고) 적당하게 부는 바람이 맑은 하늘과 잘 어우러진다. 무슨 치기에서 인지 사람도 없는 철 지난 모래밭에 오도카니 앉아 고독을 즐겼다. 지금 생각하니 유치하기 이를 데 없다. 겨울도 아닌데(이 아니건만) 그날따라 바닷바람이 차게 느껴졌다. 집에서 눈치 채지 못하도록 평상시처럼 자연스레 입고 나왔더니 좀 춥다. 추운 게 문제냐 얼마 만에 맡아보는 비릿한 바다 냄새인지.(내음인가.) 아니 집에서 벗어난 자유의 냄새인지도 모르겠다.
멋진 남자 친구라도 옆에 있으면 좋겠지만 그게 뭔 대수냐. 바닷가라서 좋고 혼자라도 좋기만 하다. 때 맞춰 영화처럼 긴 생머리도 막 휘날린다. 머리 위를 나르는 갈매기마저 친근한 느낌이다. 그중에 간 큰 녀석은 내 발치에까지 와서 노닌다. 장난으로 가방에서 크래커를 하나 꺼내서 던져줬다. 크래커 조각을 씹으며 긴 시간을 보냈다. 추워서 덜덜 떨리는 몸을 녹이러 근처 다방에 갔다. 연유를 찔끔 부어주는 커피를 마셨다. 대충 시간 맞춰 역으로 갔더니 그가 웃으며 다가온다. 고맙게 내 차표도 끊어 놨다.
전공 관련 이야기, 앞으로의 진로며 여러 얘기를 하다 보니 대구역이 가까워진다. 플랫폼에 기차가 들어서니 갑자기 대구에 취재할게 생겼다고 내린단다. (따라 내린다.) 내리더니 향촌동 가서 맥주 한 잔 하잔다. 매너도 좋고 직업도 맘에 들어서 순진한 마음에 가고는 싶었다. 하지만 하늘 아래에서 제일 무서운 아버지 얼굴이 떠오른다. 서울의 기자 남친은 꽤 괜찮은 그림이지만, 아버지가 무서워서.(무섭다.) 한 번 경을 칠 생각을 하고 따라갈까 싶은 마음이 들었다. 향촌동 초입에 들어서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급한 일이 있다고 뿌리쳤다. 울듯한 내 얼굴을 보고는 순순히 보내줬다. 그날 일은 완전히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이다. 그 길을 갔다면 인생이 바뀌었을까?
시간은 평소보다 늦었지만 다행히 아버지가 안 계셔서 혼나지(는) 않았다. 며칠간 야금야금 청포도사탕을 깨물 때마다 그 기자 생각이 났다. 도망가듯이(치듯) 가버리는 나를 보고 얼마나 우습고(황당하고) 허망했을까. 아득한 기억 속의 빛바랜 추억이다. 그 기자는 나를 기억도 하지 못할 것이다. 나도 얼굴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냥 훌쩍 스쳐가버린 젊은 날의 초상이다.(이 아련하다.) 맛있는 간식 봉지 덕분에 옛 생각에 잠시 잠겨본다. (사탕 한 알을 우물거리며 옛 생각에 잠긴다. 향촌동 맥주 맛을 봤다면 내 팔자가 고쳐졌을까?)
금손 아닌 (똥 손) 남자가 사는 법
엄영희
암흑천지다.(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간에 우리 집불이 폭삭 꺼졌다.)
베이징 동계올림픽에서 황대헌 선수가 남자1(,)500m 쇼트트랙에서 첫 금메달을 딴 날이다. 기분이 날아갈 듯 하루를 마감한다 싶었는데, (웬일이야.) 안방 전기스위치 하나를 올리는 순간 번쩍(!) 하더니 집안 모든 전기가 나가고 말았다.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간이다.
집안에 불빛이라고는 스마트폰 앱으로 실행한 라이트 하나 밖에 없다. 충전량도 얼마 남지 않았다. 누전차단기는 현관 입구 신발장 안쪽에 감춰져 있다. 남편과 둘이서 낑낑대며 신발장 두 칸을 다 비웠다. 말이 두 칸이지 윗칸에는 철 지난 신발들이 겹겹이 쌓여있어 꺼내 놓으니 현관에 한가득이다. 신발을 다 들어내고 보니 칸막이가 가로지르고 있어 누전차단기 뚜껑이 열리지 않는다. 이번엔 칸막이를 들어내느라 한참 씨름을 했다. 모습을 제대로 드러낸 누전차단기 앞에 선 남편이 스위치를 올려보고, 내려 보고 해 보았지만 집안은 여전히 암흑천지다.
휴대용 충전기에 꽂힌(아 둔) 코브라 등과 비상시 쓰는 충전용 등을 동원하여 집을 밝힌다. 관리사무소에 체면불고(불구하고) 전화를 했다. (너무 늦은 시간이라 벌써 잠자리에 든 것일까,). 신호는 가는데 감감 무소식이다. 너무 늦은 시간이라 벌써 잠자리에 든 것일까. 정전시 처치 방법을 검색했다.(더니)한전의 스마트앱을 실행해 보라고 한다.
플레이 스토어(play store)를 더듬거리고 있는데 휴대전화가 울린다. 관리사무소 직원이다. 사정을 들은 직원이 바로 갈 테니 동·호수를 알려달라고 한다. 직원이(은) 오자 힘들게 신발 꺼내고 드러내놓은 누전차단기는 쳐다보지도 않는다. 현관 밖 계단 벽에 있는 (붙은) 전기계량기 박스를 열고 스위치를 올리니 집안이 환해진다. 원인을 알 수 없지만 순간 과부하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 부부는) 결혼 초기부터 보건진료소 관사에서 살았다. 거기에는 상수도시설이 되어있지 않았다. (않아) 겨울이 문제였다. 우물물을 자동펌프로 퍼 올려 식수와 허드렛물로 사용했는데 기온이 낮은 밤에는 얼어버리는 것이었다. 물 없이 살 수 있는가? 당시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자동펌프가 얼거나 공회전하지 않고 물이 잘 나오는 것이었다.
한겨울 아침, 눈을 뜨면 먼저(눈이 벌어지자마자) 확인하는 것이 수도꼭지였다. 꼭지에 소식이 없을 때 남편이 그 임무를 담당해야 했다. (소식 없는 꼭지 깨우기는 남편 몫이었다.) (남편은) 건물 벽에 수직으로 부착된 철제 (수직)사다리를 타고 올라 옥상 위 청색 물탱크와 배관을 확인하는 일을 남편은 버거워했다. 모자를 쓰고, 중무장을 한 체 (애써) 올라가긴 해도 정상적으로 물이 나올 확률은 적었다. (용빼는 재주가 없어 물은 나오지 않았다.)
자동펌프가 얼지 않도록 관리하는 것도 어려웠다. 헌 이불을 덮고, 그 위에 보온재를 덧씌우거나(운 뒤에) 밤새 수도꼭지를 조금만 열어두면 된다. (두곤 했다.) 이럴 경우에는 (그리 공을 들여도) 펌프 모터에 과부하가 걸리거나 공회전으로 고장이 나기도 했다.(났다.) 한 번은 자다가
(어느 겨울이던가, 한밤중에 불이 났다.)
"불이야!"
외치는 사람들의 소리에 깜짝 놀라 일어났다. 이웃주민들 여러 명이 양동이를 들고(로 물을 퍼부어) 보건진료소 뒤편 자동펌프가 설치되어 있는 곳의 불을 끄고 있는 것이 아닌가. 다행히 큰 불로 번지지는 않았지만 펌프 바로 옆에 둔 휘발유통이 열기로 휘어져 있었다. 휘발유통에 불이 옮겨 붙었다면 큰 화재로 번졌을 것이다.
당시 단골 배관 사장님과 전화 연결하기는 (거짓말 좀 보태) 대통령 만나기보다 어려웠다. 통화가 되더라도 그는 바쁠 것이 없었다. 느지막이 담배냄새를 풍기며 까치 머리에 슬리퍼를 끌고 나타났다. 방문해 주는 것만으로도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이 분이 (그가) 오면 (희한하게도)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 사장님이 수리하는 동안 남편은 그 옆을 떠나지 않고, 그의 말동무를 하며 일거수일투족을 지켜 보았다.(보곤 했다.) 다음에는(부턴) 남편의 힘으로 모터수리가 가능하려나? 기대를 하였지만 그 후에도 같은 상황은 반복되었다.
남편은 전형적인 책상물림이다. 직업 탓도 있겠지만 다른 곳에 관심을 두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러는 본인은 편할지 모르지만 같이 사는 사람은 여간 고역이 아니다. 살다보면 잔손이 필요한 때가 한두 번인가.
“똥손 아저씨”
라고 놀리면 그럴 때마다 남편이 하는 말이 있다.
“머리로 사는 사람이 있고, 손으로 사는 사람도 있지 사람이 어찌 다 잘 할 수 있는가?”
듣고 보니 맞는 말이기도 하다.
한밤중에 일어난 정전은 관리사무소 기사의 방문으로 큰 불편 없이 마무리되었다. 너무 늦은 시간이라 미안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이튿날 아침까지 미룰 수는 없지 않는(은)가? 감사하다고 입으로만 인사하는 나를 제치고 남편이 상자 하나를 쓱 내민다. (내밀었다.)
“밤늦은 시간에 너무 감사합니다.”
“안 그러셔도 됩니다.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인걸요. 다른 기사들과 나눠 먹을게요.”
환해진 서재를 언제 다녀왔는지, 그가 건넨 것은 평소 내게도 주지 않던 인삼과 녹용이 든 건강식품이었다. 금손 아닌 “똥손 아저씨”가 (받은 도움이 고마워 빈손으로 돌려세우지 못하는 사람, 우리 ‘똥손 아저씨’)가 사는 법이다.(2022년 2월/ 12.3매)
새해 첫날에
이형국
시작부터 기분이 좋다.
11시쯤 되니, 맑고 푸른 하늘에 따스한 햇볕이 걷고 있는 나의 온몸을 감싼다. 바람은 차갑지만, 이렇게 신선한 따스함은 무어라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나의 마음을 들뜨게 한다. 눕혀졌던 풀꽃들이 다시 일어설 것 같다.
어제까지만 해도 차가움에(,) 앙상한 가지를 어지러이 내뻗고 공중에다 호소하는 듯한 나무들(이다.), 하지만 어제가 오늘을 맞이했듯이 오늘이 내일을 데려오고 머잖아 봄조차 맞이하게 된다면, (머잖아 봄이 오면) 나무의 웃음소리도 들을 수 있을 거다.
코로나 때문에 오늘도 마스크에 신선한 산소 덩이를 빼앗기며 길거리를 걷는다. 따스한 햇살임에도 불구하고 산소 부족인지 얼마 걷지 않아도 숨이 가빠온다. 가슴 한복판이 땅기면서 발걸음 속도를 늦춘다. 작년 여름부터 이런 증세가 생겼다. 길을 나서 5분 정도면 증세가 나타나는데, 숨을 길게 내쉬고 길게 들이키면서 가슴팍을 마사지하며 걷는다. 또 5분 정도 걸으면, 나도 모르는 새 사라진다.
아직은 코로나가 활개 치고 있다. 하지만 해가 뜨고 나니, (요즈음은) 비록 소규모지만 줄어들었다고 한다. 새해 첫날이 이렇다면, 이것은 좋은 징조가 아닌가! 세계 감염내과 전문의들이 조심스레 내놓는 전망은 지난겨울에 발견된 전 세계의 코로나 감염자를 폭증시키는 변이바이러스 오미크론omikron은 앞으로 하향 소멸이거나 감기 정도의 허약한 바이러스로의 길을 들어설 거라고 한다. 곧 코로나는 변곡점을 지나게 될 것이란다.
마스크를 벗게 되는 날, 나는 길거리에 나가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칠지도 모른다. 정말로 만약에 이렇게 코로나가 끝난다면, 우리나라의 방역은 성공임이 틀림없다. K-방역! 전 세계에 내놔도 자랑스러운 방역 성공이다. 확진자 수와 비율, 사망자 수와 비율, 어느 것을 살펴봐도 우리 방역의 성공이다.
공항 출입국이 어떠니, 마스크가 어떠니, 백신이 어떠니, 하지 말자. 모든 사건의 잘잘못은 경중의 문제지, 어디서나 나타난다. 수고로웠던 우리 의료진, 더 나아가 정부 시책에 솔선수범으로 주위를 이끌었던 우리 국민 모두의 승리임에는 부인할 수 없다. 코로나 시간의 흐름 속에 각 분야의 자영업자 등 소상공인의 피눈물 젖은 적극적 협조는 유네스코에 등재된다 해도 아깝지 않을 터다.
새해는 5년 만의 국가수반을 선출하는 해이다.
향후 5년간 국가의 짐을 짊어져야 할 가장 적정한 사람을 선출해야 한다. 나도 거룩한 한 표를 사용할 것이다. 앞으로 내 생에를 통하여 몇 명의 국가 지도자 선출에 나의 표를 행사할 수 있겠는가. 솔직히 말해 이번 대선 후보 면면은 내가 존경하거나 흥미를 느낄만한 인물이 없다. 그래도 그중에서 가장 거짓말을 덜 하는 사람에게 투표해야겠다.
5월에는 지방 자치단체장과 지방 자치의원을 선출한다. 그만큼 새해는 중요한 한 해가 될 것이다. 국가든, 지방 자치지역이든 수장을 뽑는 일은 신중한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 우리 생활의 질과 직접 연관되는 일을 그들에게 맡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거운 이야기는 그만하자. 그렇지 않아도 이젠 모든 것이 무겁게 느껴진다. 이제부터 새해를 맞이하며, 나와 내 가정을 위해 새롭게 하고 싶은 일을 생각하고 싶다. 먼저 내 가정을 위해 아내와 같이하는 시간을 많이 가져야겠다. 물론 방 하나에 엉켜 살면 가장 많은 시간을 갖겠지만, 그건 이젠 싫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고 아내는 더할 거다. 서로가 자유롭게 삶을 즐기는데, 되려 사이가 멀어지는 계기가 될 것 같다.
낮 동안 눈앞에 많이 얼쩡거리면서 재잘거려 볼까, 그러면 좋아할까? 아니다, 그건 정말 아니다. 채신머리없다고 정이 더 떨어진다 할 거다. 제일 좋은 방법이야 있다. 돈 벌어다 주면 될 텐데, 어려울 것 같다.
강의 듣는다고 나다니고, 들어오면 줄곧 제 방에서 컴퓨터 앞이 아니면, 침대에 누워 책이나 보고 있으니. 아내가 가장 싫어하는 일인데, 돈이 제일 좋을 텐데, 아이고! 안 되겠다. 접자, 그만두자. 내 할 일이나 생각해 보자. 새로운 건 없다, 지금 진행하는 일에 무두질이나 잘 해야겠다.
“글쓰기 하네, 영어회화 하네.” 하지만, 그 진행 과정이 마음에 드는 게 없다. 속만 탄다. 시작이야 노후의 시간 활용으로는 ‘배움 만한 것이 없다.’라는 신조로 출발했지만, 내가 문제다. 했다 하면 끝장 보려는 젊은 시절의 혈기가 아직도 몸속에 남아 있다니! 시력이 계속 망가지고 있음을 느낀다. 졸음이 계속 괴롭힌다.
그래도 지금, 나는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 ‘쳇! 글 같잖은 글로 글 쓴다고? 혀도 돌아가지 않으면서 회화한다고? 용쓰지 마라, 날 저물었다.’ 내가 자신에게 비아냥하는 소리다. 그래, 정했다. 꼴같잖은 성질머리나 뜯어고치는 거로 하자.
흑호黑虎님, 제발 부탁이오니, 마스크 벗고 햇살에 주둥이 말리며, 풀냄새, 꽃냄새 실컷 맡게 해주소서. 가물거리는 그 언제처럼, 글동무들과 화전놀이나 한 번 할 수 있게 해주소서. 대선이든 지방선거이든 일 잘하는 일꾼을 뽑아주소서, 정치꾼은 제발……. 내 자식, 손주들, 고생하지 않을 나라를 만들어 주소서. 아내에게도 냄새나는 노인네가 되지 않게 해주시고, 손주들에게도 용돈 줄 수 있는 할아비가 되게 하소서. 마지막으로 이왕 시작한 거니, 배움에 있어 뭐든 하나라도 성취하여, 나의 혈기를 만족게 하여 주소서. (2022.01.01.) (14.6매)
비익조
권자이
입춘이 지났으니 완두콩을 파종해야한다.
햇볕도 좋고 바람이 없어 딱 좋은 날씨다. 완두콩은 싹이 나서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도 얼어 죽지는 않는다. 그러나 태양의 열기가 강하면 물을 주어도 입과 줄기가 마른다. 그래서 일찍 심어야 한다. 지난겨울엔 비도 눈도 한번오지 않았다. 삽으로 땅을 뒤집고 고르자니 바람이 일지 않아도 폭삭 폭삭한 먼지가 사방으로 날린다. 씨를 넣을 때까지는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했다. 씨를 넣고 물을 흠뻑 주고(준 뒤) 비닐을 씌우려니 시샘이라도 하듯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일찍 심어야 하는 완두콩 같은 식물에는 구멍 뚫린 비닐을 덮으면 싹이 올라오지 않는다. 그냥 흰 비닐을 덮어서 싹이 나오는 순서대로 뚫어 올려야 한다.(↘)
여러 집이 같이하는 농장이라(다.) 몇 망 건너에 할아버지 할머니도 날씨가 좋아서 완두콩을 심으로(러) 나오신 것 같다. 거동이 좀 불편해 보이는 할머니는 퇴비를 뿌리시고, 할아버지는 땅을 뒤집으셨다.(는다.) 할머니는 씨를 넣으시고 할아버지는 물을 길러 오신다. 두 분 모두 허리도 굽으시고 (가 굽은데,) 할머니는 보행 보조기를 밀고 다니신다.
일찍 심어야 하는 완두콩 같은 식물에는 구멍 뚫린 비닐을 덮으면 싹이 올라오지 않는다. 그냥 흰 비닐을 덮어서 싹이 나오는 순서대로 뚫어 올려야 한다.(↖)
비닐을 덮으면서 (정겨운)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내 기억의 창고에선 빛바랜 명화 한 점이 소환되어 나온다. (떠오른다.) 83년 봄, 수도자 단체에 껴 봉사차간(하러 간) 소록도(의 정경이다.), 그때만 해도 어린 마음에 두려움이 없진 않았다. 아주어린시절 보리밭에서부터 시작되던 나환자들에 관한 이야기가 생각나서일까.(어떤 이야기?)
새벽녘에 서울서 출발해서 고흥에 도착하니(가니) 오후였다. 고흥에서 배를 타고 소록도에 도착하니 춘3(삼)월해가 서산에 얹힐 려고 했다. 승합차를 타고 들길을 달리는데 비닐하우스들 사이에 고랑과 이랑이 정갈하게(시루떡처럼 정갈하였다.) 다듬어진 밭 한 귀퉁이엔 노란 유채꽃이 이방인을 반겼다. 그런데 (신기한 모습이 시선을 끌었다.) 우리의 시선은 (유채꽃 너머 저 멀리) 밭 한가운데쯤(에) 남자가 어른 여자를 등에 업고 서서 고개를 떨구고 발을 조금씩 움직이는(움직여 전진하는) 모습이(었다.) 신기하게 느껴졌다. 궁금해서 차를 세우고 유심히 보니 거리가 좀 있긴 해도 등에 업힌 여자가 씨를 떨어뜨리니 남자가 발로 흙을 덮는(어 나가는) 것이 아닌가. (그 모습이) 이상하다 싶고 호기심도 생겨 좀 더 가까이 가보았다.
‘아! 이게 왠(웬) 일 인가.’ 그다음 우리는 서로 쳐다보며 말을 잃었다. 손이 문드러진(몽땅해진) 남편이 발이 문드러진 아내를 등에 업었다. 아내는 남편 등에서 씨를 뿌리고 남편이 적당한 간격으로 흙을 덮는 것이 아닌가. 밀레의 그림이 어찌 이보다 더 아름다울까? 아름답다는 감동을 넘어 거룩해 보였다.
‘서로에게 손발이 되어 준다는 말이 저런 모습을 두고 한 말이 아닐까.’
‘저런 모습이 바로 절체절명의 삶이던가'!(.)
봉사를 한답시고 3박4일 일정으로 간 그곳에서 나 자신 너무나 큰 감동을 받고 지난 이십 수년의 삶을 되돌아 보게 되었다. 그들에게서 오히려 마음에(의) 봉사를 받고 왔다. 살면서 잘 안 되었던 모든 일들은 전부 다른 사람들의 탓으로 생각하고 불평불만에(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했던 일들이 정말 부끄러웠다.
그날 이후로 난 내가 남 보기에 불편해 보이는 걸음걸이에 대한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서 생활에 불편함 없는 것에 사무치게 감사함을 느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온전히 걷는 것 하나로도 사무치게 감사하며 살고 있다.)
팔순을 넘기신 두 노인네가 소일거리로(삼아) 하는 일이지만 한분이선 (혼자서는) 못할(하실) 것 같다. 비닐을 덮으면서는 바람이부니 서로 이쪽부터 (비닐을) 덮어나가야 한다면서(며) 옥신각신 하지만 그 모습도 듣기엔 다정스럽게 보인다. 다정스러우시다.
그 시절 철없이 순수하기만 하던 젊은 날, 한편의 감동이 세월이 흐른 지금도 저렇게 비익조처럼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사십 여 년이 흐른 지금도 내 뇌리에서는 한 폭의 빛바랜 명화로 소환된다.
(눈과 날개가 하나씩이라서 짝을 짓지 않으면 날지 못한다는 전설의 비익조다. 아내를 등에 업고 씨를 뿌려 덮던 소록도 부부나, 티격태격 비닐을 덮는 노부부가 바로 그 모습이다. 생활에 부대낄 때마다 그 정경을 떠올리면 한 알의 아스피린처럼 열이 내린다.)
부부 (행복을 향하여)
이지연
“물하고 불이라서 마이 자그락댄단다.”
결혼 전에 사주를 보고 오신 엄마의 말이었다. 남편은 가부장적이고 남아 선호 사상이 팽배한 집안의 장손이다. 위로 누나가 셋이나 있는 가운데 태어난 아들이니 어떤 대접을 받았을지 알만하다. 자기주장이 강하며 고집도 세고 성질까지 불같다. 나 또한 5남매 막내딸로 양보나 헌신을 미덕으로 여기며 성장하지는 않았으며 남편과 서열 다툼을 할 정도의 고집을 갖고 있다. (지니고 있다.)
결혼을 하고보니 여섯 살 위인 남편은 매사에 나를 가르치려 들었다. 나도 가르치기를 즐기는 성향이라 그의 입장에서는 나의 언행이 무례하기 짝이 없었으리라. 그와는 (가치관은 물론) 이상도 가치관이 달라 부딪히는 일이 많았지만 남이 억지로 맺어준 (나 좋아 맺어진) 인연이 아니었기에 하소연할 수도 없었다.
남편의 제일(가장) 큰 목표는 ‘부자’가 되는 것이었다. 종친회 일에 매여 집안 경제는 등한시 한 부친의 영향이었는지(컸으리라.) 남편의 제일 큰 목표는 ‘부자’가 되는 것이었다. 결혼 초 사업 실패로 경제적 어려움을 한차례 겪은 후로는 ‘돈’에 대한 갈망이 더 커졌다. 주는 것보다 받는 것에 익숙한 나는 욕심은 있을지언정 돈만을 좇는 삶을 살고 싶지는 않았다. 나에게는 현재의 행복이 중요한데 남편은 ‘현재는 일하는 시기, 노년은 보상 받는 시기’로 규정해 놓고 앞만 보고 달렸다. 심지어 아내는 ‘현모양처 형’이 제일(가장) 좋은 줄 아는 사람이었기에 나의 사회생활을 막으려고 애를 썼다.
엄마가 전한 말이(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물과 불은 요란하게 10년 세월을 살아왔다. 한 10년 살다보니 서로에게 동화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깨달았다. 우리는 아주 벽창호는 아니었던지 상대 본연의 모습을 인정하는 방식을 택했다.(↘)
(나는 다문화 가정을 지원하는 직업을 갖고 있다.) 사실 나는 집안 살림에 보탬이 되려고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일이 좋고 재미있다. 집안일을 할 때보다 신난다. 남편은 일을 하게 해 준 자기에게 고마워하라는 너스레를 떨지만(떤다.) 일리가 없는 건 아니다. 그의 말처럼 (사실) 얼마 안 되는 (내) 월급으로 자동차 유지비에 화장품값, 밥값 빼면 남는 것이 별로 없다. 그럼에도 일을 놓을 수 없는 건 맏며느리의 무거운 짐을 잊을 수 있게 해주는 숨구멍이기 때문이다.
20년(?)이 넘는 세월을 안팎을 넘나들며 그런대로 잘 꾸려온(왔다고 자부한다.) (남편은 그런) 나에게 고마워하기는커녕 되레 깔아뭉개는 듯한 발언에도 (가끔 한다.) (그래도) 발끈하지 않는 것은 그의 내면 깊숙한 곳에는 나를 인정하는 믿음이 깔려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음주와는 거리가 먼 내가 남편의 술친구들과 동석하여 안줏발을 세울 때가 있다. 술이 거하게 취하면 말발 센 그는 적당한 타이밍에 내 사사로운 이야기를 노출시킨다.
“이 사람이 다문화 전문가잖아.”
“학생들은 선생 말이라면 다 믿잖아. 이 사람이 좋다는 후보한테 무조건 투표하거든!”
“이번 달에 ‘팔공메아리’에 나온 기업 있잖아. 그 기사 이 사람이 썼잖아.”
은근슬쩍 치켜세우는 그 말에서 그의(남편의) 마음을 읽는다.
학창시절, 이웃집으로 돈을 빌리러 가시는 어머니의 모습은(이) 일생 남편의 생채기로 남아 있다. 아이들한테만큼은 그런(빈곤한) 모습을 보이지 않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말했다.(한다.)(↘) 딸아이가 중3이 되었을 무렵이다. “ 살다보면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이 돈은 애경이 대학교 등록금으로 쓰게 따로 통장을 만들어 놓는 게 좋겠어.” 하며 거금을 내놓았다. 그 후 2년. 아들의 학자금 통장도 생겼다. IMF를 혹독하게 겪은 남편의 준비성이었다. 이 일은 지인들에게 두고두고 칭찬거리로 내놓는 일이 되고 있다. 그러고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정말로 놀랄 일이 일어났다. “장모님이 연로하시니 돈 필요할 때 내 눈치 보지 말고(말라며) 이 돈으로 써라.”며 제법 묵직한 비상금을 만들어 주었다. “아, 참말로 이 사람이 진국이구나!” (싶었다.) 이 일은 남의 부부싸움을 부추길까 조심조심 자랑한다. (가슴 뿌듯한) 그의 일화를 들려주면 누구라도 세상에 둘도 없는 멋진 남편이라 칭찬하며 부러워한다. 비상금이 생긴지 10년이 다 되어간다. 하지만 원금은 그대로 있다. 아무래도 남편이 나보다 한 수 위인 것임은 틀림이 없다.(가 분명하다.)
자신이 가치 있다고 믿는 그 일에 최선을 다하는 남편이기에(이다.) (성실한 남편이기에) 어지간히 마뜩찮은 일에는(일 말고는 알고도 모른 척) 눈감아 주게 된다. 예컨대 술을 사거나 밥을 사는(먹는) 돈은 아까워하지 않지만,(당연한 지출이지만,) 커피 값은 아까워하기에(아까워한다.) 그러기에 우리 가족은 외식을 하더라도 2차로 커피숍에 가자는 제안은 할 수 없다. 같은 책을 나눠 읽고 싶고, 주말이면 함께 영화도 보고 싶은 로망이 있지만 TV를 더 좋아하는 남편 그대로를 존중해주는 것이 내 몫임을 받아들인다.
작은아이가 취직만 하면 편하게 여행하며 살겠다던 말을 입버릇처럼 하던(살자던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산) 남편이다. (생각은 시시각각 변하는 모양이다.) 아이는(가) 중요한 시험을 치고 긍정적인 결과를 기대하는 시점에 있다. 이제 (서) 남편이 말을 바꾸었다. 멋진 차를 사는 걸(로 목표가 바뀐 것이다.) 목표를 세우고 저축을 하고 있다. 목표한 금액에 도달하면 (찻값을 모았다 싶은) 그때는 정말로 모든 일에서 은퇴하겠다고 선언했다.
(남편의 목표가 달라진들 어떠랴.) 부부는 서로에게 맞춰가며 이해하며 한평생 살아가는 게 (부부가) 아닐까 싶다. (장점이 많은 남편이다.) 주택의 잡다한 고장은 웬만해서는 (웬만한 집수리는) A/S를 신청하지 않아도 될 만큼 눈썰미 좋은 재주꾼에,(이다.) 뉴스나 스포츠 프로를 보면서도 내 상식을 뛰어넘은(는) 박학다식함이 드러나니(난다.) 그깟 독서 좀 안 하는 게 무슨 대수인가.(싶다.) 매사에 최선을 다하며 소신껏 살아가는 남편의(이다.) (이런 훌륭한 남편의) 다가올 노년이 편안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어떤 장례식(로또 장례)
배정행
종조할아버지 장례식 날 상주가 아닌 종조할머니와 나는 제단 옆에 딸린 작은 방에 누워 쉬고 있었다 당숙은 혼자서 문상객 받아내느라 무릎이 접힐 때마다 아이고 아이고 아픈 소릴 내고 종조할머닌 조문객보다 낯빛이 더 밝았다
그 망할 영감탱이 잘 죽었다 아이가 속이 다 시원하데이 맨날 술에 쩔어 와가꼬 밥상 패대기 치고 소릴 질러쌌디만 머시 그리 급한지 일찍 가뿌네 내가 인자 다리 쭉 뻗고 자게 생깄다 아이가 근데 니 시집은 언제 가노 빨리 가야제 사람은 있나 그라고 저노무 자슥은 와 저래 무릎 아프다고 엄살이고 저거 아부지 살았을 땐 코삐도 안 비치디만
한겨울 보일러 한 번 틀지 않고 전기 장판 한 장 달랑 켜놓고 사는 종조할아버지 댁엔 아버지도 가기 싫어했다 연락 안하고 가서 찬 없다고 내놓은 소금단지 같은 된장찌개 뚝배기 안엔 건더기도 없이 된장만 둥둥
종조할머닌 금슬이 좋지 않았는데도 얼마 후 시름시름 앓다가 종조할아버지 따라 먼 길 떠났다 종조할할아버지 살아 있을 때 늘 꽉 쥐고 있던 주먹이 탁 풀리니까 맥도 덩달아 풀렸는지 정신줄 놓아 버렸다 종조할머니 장례식장은 잔칫집 같았다 당숙 아지매 입에선 참고 있어도 신음 소리 같은 웃음 절로 새 나오고 꿈을 꾸듯 먼 산만 바라 보았다
억 소리 나는 통장이 발견됐고 종조할머니 살던 상가주택이 아파트 단지로 재개발 된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 산문 시 형태(쉼표, 마침표 X)
↳ 재미있습니다.
첫댓글 문법 그런 거 잘 모릅니다.
이상한 문맥이나 오 탈자 따위가 눈에 띌 뿐인데요, 그걸 표기한 겁니다.
다른 문학반에서는 깨지기만 하는 제가 어쩌다 보니 주도하고 있네요.
살다 보니 참 ㅎㅎ
선생님 항상 감사합니다~^^
열심히 써 보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