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시인 김남주를 다시 읽는다 [펌]
민들레 / 김경윤(시인·김남주기념사업회장) 2024.02.15
만인을 위해 내가 싸울 때 나는 자유이다.
피 흘려 함께 싸우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 김남주, '자유' 중에서
1980년대 사회변혁운동의 이념과 정신을 온몸으로 밀고나간 '전사(戰士)시인' 김남주! 그가 우리 곁을 떠난 지 벌써 30주년이 되었다. 일찍이 염무웅 선생이 "... 80년대의 한국문학을 버티고 있는 것은 김남주"라 지적했듯이, 그는 80년대 우리 민족문학의 한 정점이었다.
그의 시가 우리 문학사의 전통 위에서 빼어난 점은 1980년대라는 한 시대를 대표하면서도 동시에 고난에 찬 우리 역사로부터 민중적·민족적 전통을 올곧게 이어받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한용운, 이상화, 심훈, 이육사, 윤동주 등 식민지 시대의 진보적 양심적 시인들의 유산을 ... 물려받고 있다는 것이다. ....
한 시대의
불행한 아들로 태어나 고독과 공포에 결코 굴하지 않았던 사람
암울한 시대 한가운데
말뚝처럼 횃불처럼 우뚝 서서
한 시대의 아픔을
온몸으로 한몸으로 껴안고
피투성이로 싸웠던 사람
//(중략)//
누구보다도 자기 시대를
가장 정열적으로 사랑하고
누구보다도 자기 시대를
가장 격정적으로 노래하고 싸우고
한 시대와 더불어 사라지는데
기꺼이 동의했던 사람.
- '황토현에 부치는 노래' 중에서
이 시는 김남주 시인이 녹두장군 전봉준을 추모하며 쓴 시이다. 그런데 나는 이 시를 읽을 때면 늘 전봉준과 김남주 시인의 생애가 오버랩된다.
김남주는 1945년 10월 16일 전남 해남군 삼산면 봉학리에서 해방둥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30여 년 동안 남의 집 머슴이었고, 어머니는 ... 주인집 딸이었다. .....
예나 지금이나 세상으로부터 천대받고 무시당하는 농민들의 가장 큰 꿈은 자식 중 누군가가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김남주가 “뺑돌이 의자에 앉아 펜대만 까닥까딱하고도/ 먹을 것 걱정 안 하고 사는 그런 사람이 되어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김남주는 끝내 아버지가 바라던 그런 사람과는 너무도 먼 길을 선택했다. 호남의 명문이라는 광주제일고 2학년 때 오직 일류대를 가기 위한 전쟁터 같은 학교가 싫다는 이유로 덜컥 자퇴서를 내버린 것이다. 그 후 검정고시를 거쳐 전남대 영문과에 입학한 후, 3선 개헌 반대투쟁, 교련반대 시위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면서 반독재 투쟁에 앞장서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972년 대학 4학년 때, 박정희 정권이 유신헌법을 선포하자 친구 이강과 함께 전국 최초로 반유신투쟁 지하신문 '함성'을 제작 배포하여, 세칭 ‘함성’지 사건으로 구속되어 8개월 옥고를 치르고 이 사건으로 전남대에서 제적당했다.
내가 처음
시라는 것을 써 본 것은
감옥에서였다.
연필도 없고
종이도 없고
둘러보아 사방이 벽뿐인
그 벽에 하얀 벽에
나는 새겨 놓았다.
이빨로 손톱을 깨물어
피의 문자로 새겨 놓았다.
- '그 방을 나오면서' 중에서
김남주는 1974년 석방 후 해남으로 낙향하여 농사일을 거드는 한편 옥중생활에서 겪은 가혹한 고문 체험과 농민들의 생활상을 시로 쓴 '진혼가' '잿더미' 등 8편의 시를 <창작과비평> 여름호에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했다.
그러나 김남주는 시를 쓰는 일로 만족하지 않고 1977년 지역활동가들과 광주에서 ‘민중문화연구소’를 개설하여 ‘사회문화운동’ 의 구심 역할을 하다 수배되었다. 1978년 서울에서 도피 생활 중 당시 가장 강력한 반유신 지하조직인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에 가입한다. 이때부터 김남주는 혁명을 꿈꾸며 전사(戰士)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러다 1979년 10월 80여 명의 동지들과 체포되어 60일 동안 가혹한 고문 수사를 받고, 이듬해 1980년 징역 15년을 선고받아 광주교도소로 이감된 후, 1988년 12월 전주교도소에서 형 집행 정지로 석방될 때까지 9년 3개월 동안을 감옥 안에서 ‘전사 시인’의 삶을 살았다.
그의 삶과 문학은 세상의 불의와 불펑등을 상대로 한 치열한 싸움으로만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김남주에게 있어서 '싸움'의 대상은 정치적 독재와, 반통일, 착취, 외세 따위였다.
시인이여
누구보다 먼저 그대 자신이
싸움이 되어서는 안 되는가
시인이여
누구보다 먼저 그대 자신이
압제자의 가슴에 꽃히는
창이 되어서는 안 되는가
- '시인이여' 중에서
김남주에게 감옥은 창작의 산실이자 투쟁의 현장이었다. 감옥은 김남주 시의 출발점이었으며 옥중시가 그의 대표시가 되었다. 그는 칫솔을 못처럼 갈아서 우유곽 안의 은박지에 시를 새겼으며, 교도관의 은밀한 도움을 받아 밑씻개용으로 나오는 손바닥만한 크기의 똥색 종이에 볼펜으로 쓰기도 하고, 인쇄되지 않은 책의 페이지를 뜯어서 그 위에 시를 썼다.
김남주는 생전에 모두 510여 편의 시를 남겼는데, 그중 360여 편이 옥중에서 씌어진 것이다. 그가 감옥에서 쓴 시들은 당시 대학생들의 의식화 교재가 되었고, 노래패는 그의 시를 노래로 만들어냈다. 암울했던 시대, 그의 시만큼 강한 무기는 없었다. 그의 시는 가장 선동적인 격문이었고 가장 투쟁적인 노래였다. 시가 물리적 힘의 전환되는 신화를 탄생시켰다. 감옥에 있는 동안 그는 어느새 하나의 전설이 되었다. 안치환이 부른 '노래(죽창가)'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자유' 등은 이때 쓰여진 시들이다.
이 두메는 날라와 더불어
꽃이 되자 하네 꽃이
피어 눈물로 고여 발등에서 갈라지는
녹두꽃이 되자 하네.
// 중략 //
되자 하네 되고자 하네
다시 한 번 이 고을은
죽창이 되자 하네 죽창이
- '노래' 중에서
김남주는 감옥에서 나온 옥중에 얻은 지병(췌장암)으로 투병하다 1994년 2월 13일, 향년 49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민중이 해방되기를 바라는 혁명의 노래를 남긴 채 그는 하나의 역사가 되었다. 김남주의 생애는 “부당한 세계를 향해 날아가는 화살촉 같은 자유인”이었으며, ‘피로 씌어진 언어의 화살'인 그의 시에는 '피묻은 진실'이 담겨 있었다.
그가 감옥 안에 있건, 밖에 있건 그는 우리 시대의 중심에서 타는 가장 뜨거운 불이었다. 그의 시가 힘을 갖는 것은 바로 꾸밈없는 그의 순결성과 정직성 때문이었다. 우리가 김남주를 통해 배울 것은 바로 이것이다.
김남주가 제기하고 투쟁했던 문제들은 오늘 이 시간에도 여전히 우리 앞에 거대한 담론으로 살아 있다. 재빠른 변종과 개종으로 얼굴을 바꾸고 있지만, 그가 싸움의 대상으로 삼았던 적들은 아직도 시퍼렇게 살아 있다. 더욱 교묘하고 교활하게 ‘신자유주의’의 얼굴로 분장하고 우리의 숨통을 조여 오고 있는 형국이다.
남북분단이 존재하는 한, 자본주의의 모순이 그대로 살아 있는 한, 김남주의 시는 여전히 우리 앞에 칼날로 살아 있을 것이다. ...(하략)
출처; 시민언론 민들레 https://www.mindle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7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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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김남주 시인이 떠난지 어느덧 30년이 되는군요.
의기 넘치는 그의 시들은 지금도 이 시대를 향해 소리치는 듯 합니다.
유명한 그 시 '노래' 전문을 소개합니다. ㅣ
노래 (일명 죽창가)
김 남 주
이 두메는 날라와 더불어
꽃이 되자 하네 꽃이
피어 눈물로 고여 발등에서 갈라지는
녹두꽃이 되자 하네.
이 산골은 날라와 더불어
새가 되자 하네 새가
아랫녘 윗녘에서 울어대는
파랑새가 되자 하네.
이 들판은 날라와 더불어
불이 되자 하네 불이
타는 들녘 어둠을 사르는
들불이 되자 하네.
되자 하네 되고자 하네
다시 한번 이 고을은
반란에 되자 하네
청송녹죽(靑松綠竹) 가슴으로 곶히는
죽창이 되자 하네 죽창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