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장 바꾸기, 거꾸로 관점’이 역지사지이다.
그것은 모자(帽子)에도 숨어있다. 한번은 장애인 복지단체 후원을 위한 겨울 음악 컨서트에 초대받아 간 적이 있었다. 앞쪽에 여성 한 분이 뜨개질로 손수 빚은 듯한 털모자를 쓰고 있었다. 행사가 끝난 뒤 나오면서 일행에게 “공연장에서 예의 없는 거 같다”고 흉을 보니까 “저 분은 암 치료를 오래 받아 머리숱이 다 빠졌고 이번 콘서트 후원자 중의 한 분이라 특별히 초대받았다.”는 설명을 들었다. 아차! 싶었다.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난 모자만 보았다. 머리 위 모자 속에 들어있던 힘들고 아픈 사연을 읽지 못했다.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마음가짐이 모자랐다.
수년 전 겨울, 서양식 레스토랑에 들려 일행 네 명과 점심 주문을 하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미국 라스베이거스 CES(소비자 가전 전시회)에 출장 중이었을 때다. 조금 지나자 바로 옆 원탁 테이블에 한국인 세 사람이 와 앉았다. 첫눈에 알아본 유명인 가수 한 분은 모자를 계속 쓴 채로 앉았다. 가슴에 명찰을 단 지배인이 그에게 다가오더니, 영어로 “이 식당 안에서는 모자를 벗으셔야 합니다. 저희 100년 전통입니다.” 하니까, 그분도 영어로 “대머리(baldheaded)인데 쓰도록 허락해 달라.” 하자, “No, Sir” 소리가 들렸다. 그 즉시 세 사람은 꼿꼿이 일어나 조용히 나가버렸다. 그분의 모자에서는 ‘전통이 고객보다 먼저인가. 여기서 나간다고 우린 굶지 않는다. 입장 바꿔봐’ 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입장 바꾸기의 드라마틱한 스토리도 있다. 한적한 시골 성당에 부임한 신부(神父)한테 고해성사를 보러 온 여성 한 분이 있었다. "고해소 안에서, 시어머니 흉을 한참동안이나 늘어 놓다가 중간에 침묵을 하길래, 자매님, 잘 듣고 있습니다. 계속하세요” 하니까 “신부님, 잘 못했어요. 제가 지나친 거 같아요. 시어머니 탓으로 돌리기만 했네요. 앞으로 생각을 바꾸어 시어머니한테 잘하겠습니다” 라는 말을 하더라고 했다. 한없이 남을 흉보면 역지사지의 마음이 신기하게 저절로 솟아나는지도 모르겠다.
우리 동네 대형 할인마트가 있다, 고객들이 주차장에 세우지 않고 인도(人道)를 완전히 가로질러 주차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대부분의 주민들을 찻길로 몰아넣는 것이다. 교통사고가 나면 보험 처리가 안되기 쉽고 상해를 당한 사람은 인도에 주차한 사람을 상대로 소송해야 한다고 한다. 이 경우 50% 책임이 나오면 다행이라고 한다. 도로교통법상 인도를 1센티미터만 침범해 주차해도 과태료 처분 대상이다. 인도에 조금 걸쳐 주차하면 과태료 대상이 아니라고 착각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몰상식하게 불법주차 하는 사람에게 ‘입장 바꿔봐’ 라고 말하고 싶다..
세상은 급변하고 역지사지할 일은 어디에나 있다. 로봇 청소기, 거꾸로 접는 우산, 이어폰, 디지털 피아노, 벽에 붙는 메모지, ATM기 등은 역지사지의 산물이다. 그것은 신제품 개발 아이디어의 원산지이다. 모든 히트 상품은 고객 입장, 즉 거꾸로 생각해 보기에서 나왔다. 자전거 도로, 휠체어 이용자를 위한 경사로, 개그콘서트와 연극에서 고객 참여형으로 바꾸는 트렌드도 역지사지의 아이디어이다.
악어와 악어새, 말미잘과 흰동가리, 대기업과 협력회사의 상생도 역지사지에서 출발한다고 보면 어떨까. 이해와 공감은 역지사지의 정신에서 나온다. 욕심, 이기심, 분노, 편견은 역지사지의 앞길을 막는다. 아우 먼저 형님 먼저의 양보 정신은 역지사지로 가는 지름길이다. 그것은 겨울날 화롯불에서 나오는 따스한 열기와 같다. 그것은 급전이 필요한 사람을 곧바로 돕는 마음이다. 대학교에 큰 기부금을 내는 사람은 어릴 적 불우하게 자라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한 분이다. 큰 물고기가 치어부터 성장한 옛날을 생각한다거나 개구리 올챙이 때 시절을 떠올리는 마음가짐(mindset)은 역지사지에서 솟아난다.
중증 환자를 다루거나 산부인과 의사들이 의협 파업에 동참하지 않는 것, 다섯 살 아이가 드라마를 보다가 눈물 흘리는 엄마에게 휴지를 가져다주는 것, 밤길에 맹인이 촛불을 들고 길을 가는 것도 뒤집어 생각하기의 시작점이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한다는 손자병법은 모든 스포츠 경기에서 그 ‘거꾸로 관점’의 원리를 적용하라는 말이다.
역지사지의 태도는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건 아니다. 생활 속에서 살며시 나오는 그것은 한 송이 꽃이다. 눈보라와 비바람이 꽃을 피우는 조연인 것처럼 그 멘털은 하루아침에 툭 튀어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숙성되고 발효되어 손님에게 내놓은 식당의 '묵은지 찌개'와 같다.
또 그것은 아주 작은 예의이면서 하나의 도덕심이다. 지하철 좌석에 앉은 청년이 나이 든 어른에게 자리를 내주거나 무거운 보따리를 들고 계단을 오르는 노인을 돕는 사소한 품성도 거기서 나온다. 그것은 상처 나면서 생긴 고난의 흔적인 나무의 옹이와 같다. 더 많이 실패하고 더 많은 경륜을 가진 백전노장의 프로에게서 더 자주 볼 수 있는 게 역지사지의 사고방식(way of thinking)이다. '뒤생보'( 뒤집어 생각해 보기)는 어디에서든 기다리고 있다. 마음을 쓰면 보이지만 마음을 두지 않으면 안 보이는 게 그것이다. 생활 속에서의 '뒤생보'는 잠깐의 여유 시간, 10 초만 생각하면 된다. 곡괭이로 땀흘며 캐는 것도 아니요, 비싼 돈이 드는 것도 아니다. 상대방 가슴안으로 잠깐 들어가려는 '눈치'만 있으면 된다.
갈등을 풀어 주는 열쇠가 역지사지이다. 아파트 층간 소음의 갈등은 이웃 주민 간의 일상을 불편하게 한다. 서로 만나 이해하고 공감하며 갈등을 풀면 두 세대 간에 행복과 이익의 총합은 훨씬 늘어난다.
“대접받기를 원하는 대로 남에게 베풀라”는 말이 있다. 이 시대에 현명한 처세술은 '거꾸로 관점' 안에 있다. 인정 많은 푸근한 사회의 순환를 위해서는 ‘뒤집어 생각하기 , 입장 바꿔보기’ 의 정신은 필수품이다. 또 그것은 두 사람 이상이 모인 곳에서의 지혜로운 공감 능력이면서 실천해야 할 행동원리이다.
상대방의 뇌파에서 나오는 생각의 주파수에 맞추어 내 것을 조절하는 일은 쉽지 않다. 또 그 사람 가슴 속에 감정의 스파이(Spy)를 파견해 알아 내는 것은 더 어렵다. 상대방에 먼저 귀 기울이거나, 나 자신을 더 낮추면 손해본다고 생각한 적이 내겐 많았으니 '뒤생보'가 끼어들 틈이 없었다. 사실 지금도 속 좁은 사람이지만.....
세상살이 속 점차 잃어버리는 것 같은 역지사지를, 여기저기서 애타게 찾고있다. 거기에 이르는 가까운 길은 공감과 겸손이라 생각한다.
2024년 6월 23일 13.9 매
첫댓글 매번 무궁무진한 사례가 있는 안홍진 선생님의 글이 부럽습니다. '안작가님이 어떻게 생각을 시작하는가' 보여주고 있어 흥미롭지요. 굿.
김하임 선생님^^ 산만하게 쓴 글을 읽어주시고 격려와 칭찬을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더 생각하고 더 노력하겠습니다^^
<역지사지>의 뜻을 다양하게 짚으신 알퐁소 선생님의 해박함이 번번히 재밌습니다. '고해성소 안의 그 여인,
역지사지의 주인공이네요.
요모조모 세상에 널려 있는 <역지사지>를 모아주신 선생님의 글, 흥미있게 읽었습니다.
쓰고 보면 저는 졸필인데 과분한 칭찬을 주시고 늘 격려해주시는 엄희자 안젤라 선생님께 경외심과 감사한 마음을 올립니다. 더 고민하고 공부하는 *학생*이 되겠습니다.
알퐁소님이 일찍 글을 써서 올리는데 저는 생각 속에 헤매느라 선생님 글 읽는 걸 놓쳤네요. 역지사지에 대한 다양한 글을 진즉 읽었으면 저도 그 중에서 좋은 소재를 건졌겠어요. 많은 생각을 하신 선생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항상 놀라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