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명- 그러므로 떠남은 언제나 옳다
책명 -그러므로 떠남은 언제나 옳다(오소희 에세이).hwp
책명- 그러므로 떠남은 언제나 옳다
저- 오소희 여행에세이
(사람여행을 하고 있다. 우리와 다른 속도로 사는 이들 사이를 아이와 함께 느릿느릿 거닐고 있다.
출-북하우스(2014.11.12.400쪽)
독정-2019년 2월 26.화요일
· 야트막한 산 정상에 차를 에위 패러글라이딩에 적합한 정상에 50여 미터 폭의 평지가 있었다. 활공장으로 딱 맞는 지형. 평지가 뚝 끊어지는 곳 아래로는 푸른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다시 산맥, 다시 들판, 다시 산맥이었다. 그 일대는 치카모카 국립공원으로 미국 그랜드캐년처럼 콜럼비아에서는 협곡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프른 들판을 가로질러 상쾌한 바람이 불어왔다. 시속 10~15킬로미터 정도 맞바람이 패러글라이딩에 꼭 필요한 바람이다. 시원하면서도 부드럽다. 스테프들이 기구를 꺼내고 캐노피를 펼치고 줄을 풀었다. 헬멧과 장갑 등 안전장비를 착용했다. 그동안 우리는 보고타에서 온 콜롬비아 가족과 친해졌다. 11상 소년은 우리 아이처럼 들떠 있었다. 조종사의 무르팍에 하네스를 얹듯 앉자 두 명의 스테프들이 달려들어 가슴과 다리 사이에서 버클을 채웠다. 준비가 끝나자, 조종사와 여자가 보조를 맞춰 달렸다. 바람이 캐노피를 잡아챘다. 두둥실 떠올랐다. 드라마틱하게 멀어졌다. 우아, 멋지다. 문제는 이때부터다. 여자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미친 듯이. 바이킹처럼 패러글라이더가 위아래로 움직였기 때문이다. 꺄악! 애처로운 비명이 하늘을 찔렀다. 패러글라이더가 뚝 떨어졌다. 쑥 올라왔다. 롤러코스터처럼 돌고 돌았다,. 끔직한 비명이 하늘을 가리가리 찢었다. 지상에 있는 스테프들은 즐거워 죽겠다는 듯 낄낄거렸다. 다음 차례는 중빈과 나. 나는 머릿속이 하얘졌다. 뭐야? 원래 이런 거야? 나는 독수리처럼 우아하게 협곡 위를 활공하는 상상을 했을 뿐이다. 까마득한 협곡 위에서 자이로드롭을 타는 상상이 아니라! 머릿속에서 번개처럼 빠르게 꼐산이 시작되었다. 여기서 못 한다고 나가자빠지면 환불 해줄까? 돈보다 너무 창피한데. 간신히 용ㅇ치글 내고 있는 꼬마들 앞에서
“중빈아, 넌 무섭지 않니?”
“오오, 엄마! 난 죽었어, 난 죽은 몸이라고, 마지막 기도나 올려야겠어. 내가 죽으면 아빠한테 그동안 고마웠다고 꼭 전해줘! 내 장간감은 누굴 주냐면…….”
“탈, 탈 거야?“
“당연하지!!!”
깨갱, 아들이 헬멧을 쓰고 큼직한 하네스를 맸다. 조그만 몸이 발라당 뒤로 젖혀질 것 같았다. 나는 아이를 저 여자처럼 태우면 절대 절대 절대 안 된다고 신신당부 했다 조종사가 대답 대신 손을 들어 엄지와 검지로 동그라미를 만들어보였다. 중빈이 조종사의 무릎에 하네스(벨트)를 얹고 앉았다. 중빈의 말이 점점 빨라졌다.
“엄마, 그동안 고마웠어. 짧지만 멋진 인생이었어. 그리고 그, 그 책이랑 장난감은 사촌동생들을 주는 게 좋겠어. 이렇게 빨리 갈 줄 알았으면 착한 일을 더 많이 할 걸. 내가 천국 갈 수 있을까? 설마 지옥에 가진…….”
조종사가 웃으며 냅다 달렸다.
“으악, 으악 잠깐만요! 아저씨 잠깐만…….우유후~! 엄마!!! 최고야 최고.”
아이는 삼시간에 멀어졌다. 높아졌다 조종사는 약속을 지켰다. 적당한 높이까지 ㅇ돌라간 뒤엔 열기구를 탈 때처럼 평화롭게 순항했다. 공중에서 약속된 시간은 12분이었다. 여행사에서 예약할 때 12분은 고작이었다. 여자가 비명을 질ㄹ 때 12분은 영원이었다. 아이가 까마득한 숲 속으로 날아올라 들릴 듯 말 듯 나를 부르고 노래를 부르고 깔깔 웃는 지금, 12분은 쾌감이 행복으로 유지되기에 가장 적당한 시간이었다. 버스로 달리며 볼 때도 아름답기 그지없던 콜롬비아의 초록 들판들이, 능선이 되고 고원이 되어 대지의 끝까지 펼쳐졌다. 세상의 모든 초록을 모아 잔치를 벌이는 듯했다. 저편 하늘은 뻥 뚫려 해가 쨍쨍했다. 또 다른 편 하늘은 우릉우릉 소리를 내더니 샤워기처럼 비를 쏟아냈다. 높고 부드럽게 본다는 것의 쾌감이 온몸을 꽉 채웠다. 육지에서 마찰하던 발이 떨어지니 이렇게 부드럽게 공기를 타는구나. 순식간에 새처럼 가벼운 환희에 도달했다. 사람들의 탄성을 듣는 것만으로도, 미소를 보낸 것만으로도 12분은 매번 새로웠다. 간간이 빗방울이 떨어졌다가 새파란 하늘이 되었다가. 바람이 초록 계곡과 평원을 지나 싱그러운 파도처럼 밀려왔다. 마음속 한 톨 먼지까지도 깨끗이 씻어주면서.
곁에는 골동품이 된 검은 화병에 새빨갛게 입을 벌린 난 한 송이가 담겨 있었다. 품격이라는 것은 아름다움이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 균형 상태에서 은은하게 뿜어져 나오는 분위기 같다. 먼저 세월을 입어야 햐고 그 세월 속에서 살아낸 내용이 격이 있어야 한다. 그 공간이 딱 그랬다.
· 야윈 남자에게는 정체해 있는 물에 오래 괴어 있는 존재의 무기력함과 나른함이 있었다. 그 고택에 가득한 골동품처럼, 그리고 그것은 차 한 대 다니지 않는 시골마을의, 빗소리에 모든 것이 파묻혀버린 밤과 잘 어울렸다. 남자는 움직임 없이 내 옆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한참 만에 무언가 생각난 듯 일어서더니 대대로 물려받은 보물 상자 같은 것을 들고 왔다. 실로 그곳에서는 상자 하나까지도 골동품이 아닌 것이 벗는 듯했다.
나는 전 세계의 돈을 모아요.“
상자 안에는 세계 각국의 지폐와 동전이 있었다. 남미와 유럽은 물론, 중국과 일본 것까지, 내가 그이 켈렉션에 찬사를 보낸 뒤에 말했다.
“한국 돈은 없군요. 제 가방에 한국 동전이 몇 개 있을 거예요. 찾아보고 있으면 내일 드리죠.”
남자가 환하게 웃었다. 남자가 크고 튼튼한 검은 우산을 빌려 주었다. 나는 내일 동전과 함께 돌려주겠다며 고마움읖 표하고 길을 나섰다. 대문을 나서자마자. 우리는 비명을 질렀다. 길이 휩쓸려 나갈 지경이었다. 몇 걸음 만에 신발이 물에 잠기고 바지가 홀딱 젖었다. 겁이 덜컥 났다. 이거 대체 여기가 어디쯤인지조차 모르겠다. 여차하면 나뭇잎처럼 떠내려가겠다. 골목엔 아무도 없다. 폭우 때문에 일시적으로 정전이 된 듯 일대가 다 칠흑이다. 집집마다 대문은 물론 창문의 덧문까지 꽁꽁 닫혔다. 작은 마을이니 설마 길을 잃으랴. 일단 마을의 중심인 광장을 찾아내려가기로 했다 그런데 쉽지 않았다. 길 곳곳이 보수 중이었고 거기서 흘러내린 흙모래가 신발을 덮치거나. 낮에 파놓은 구멍이 발목을 비틀었다. 광장 쪽으로 내려올수록 빗물은 흙물이 되었고 점점 깊어졌다.
아이가 겁에 질려 자꾸 나를 불렀다.
“엄마아~!”
“뭐 이런 비가 다 있다니?”
광장에 이르자 사람들이 보였다. 스페인풍 처마는 이런 ᅟᅡᆫㄹ씨에 매우 유용했다. 우리처럼 집으로 돌아갈 때를 놓친 사람들 몇몇이 처마 아래 오종종 모여 있었다. 재난 속에서 사람들은 한 팀이 된다,. 오지인에게 퉁명스럽던 시골 사람들은 간 곳 없고 서둘러 처마의 한 켠을 내어주며 미소 짓는 이들이 거기 있었다. 사람이 안도감을 느끼려면 ‘함께 있는 것’ 그리고 ‘처마’만으로 충분하였다. 한참이 지났다. 폭포처럼 쏟아지던 빗줄기가 가늘어졌다. 사람들이 하나둘 집으로 돌아갔다. 우리도 징검다리 건너듯 몇몇 급물살을 건너 어느 식당으로 들어갔다. 신발을 털어 벽에 새워두고 물이 뚝뚝 떨어진ㄴ 양말은 나무의자에 걸어두었다. 의자 위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주문을 했다. 손님은 우리 뿐. 무뚝뚝한 주인 아낙이 부엌로 가자, 이내 숯불에 익는 고기 냄새가 젖은 대기 속에 펴졌다. 열린 나무 덧문 사이로 어딘가에 숨어 있던 사람들이 서둘러 귀가하는 모습이 보였다. 처마에서는 졸졸 빗물이 흘렀다. 불현 듯 무한한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다. 주인 아낙이 옥수수와 당근이 든 야채수프를 내왔다. 뒤이어 숯 향기가 벤 소고기와 파삭하게 구운 카사바를 접시에 담아왔다., 허기진 우리는 조용히 먹는데 집중했다. 한참 만에 아이가 말했다.
“이런 날은 처음이야. 재수 없는 날이야.”
아이는 폭우를 재해로만 받아들였다.
“아주 특별한 날이기도 해. 날씨 하나로도 잊지 못할 추억이 생기니까. 나중에 엄마와 오늘 밤에 대해 두고두고 얘기하게 될 걸.”
계산을 하면서 주인 아낙에게 아는 단어를 건넸다.
“리코.” (맛있어요.)
무뚝뚝한 얼굴에 어색한 미소가 어렸다. 호기심 많은 그녀의 아들딸들이 길가에까지 나와 배웅해주었다. 호스텔로 돌아와서야 젖은 양말을 식당 의자에 걸어두고 온 것을 알았다.
<마술사가 데려온 길 고양이 가토>
· 마을 전망대로 갔다. 마을 끝자락 가장 높은 언덕에 만들어놓은 소박한 나무 정자였다. 전망대에서 바라보니 마을은 참 작고 둘러싼 자연은 참 거대했다. 거대한 산과 들에서 수많은 생명들이 새 아침을 맞은 환희를 노래했다. 기쁘기도 할 것이다. 폭우에서 살아남았으니, 격하게 우는 새, 둥글둥글 우는 새. 뽀송뽀송 우는 새, 간질간질 우는 새. 찌르찌르 풀벌레……. 하늘은 그렇게 퍼붓고도 아직 못 다한 이야기가 있던 걸까. 남쪽에서부터 슬금슬금 안개를 밀고 왔다. 일대 지형을 뒤덮는 거대한 안개였다. 이내 전망대 건너편 산을 가리고 아래쪽 벌판을 채웠다. 아이도 나고 안개에 잠겼다 설마. 설마, 하는 결코 길지 않은 사이, 세상천지가 새하얀 안개로 휩싸였다. 한 걸음 떨어져 있는 아이가 보이지 않았다.
“엄마, 완전히 구름 속에 갇혔어!”
어릴 적 방역차를 뒤쫓을 때와 같은 스릴과 갑갑함에 사로잡혔다 .작은 생명들도 긴장한 모양이었다. 환희의 노래가 딱 멈췄다. 안개 속에 깊은 정적이 흘렀다. 매 한 마리만 안개 속에서 검은 형체를 나타냈다 사라졌다. 바리차라는 정말 희한한 곳이구나. 비로, 안개로, 낮이나 밤이나 사람을 오도가도 못 하게 하는구나. 그때였다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정적을 깼다. 아기 고양이였다 갇힌 것이 두려운 듯 요란하게 울어댔다. 고양이 울음이란 본디 날카롭지만, 불안과 두려움을 가득 담은 어린 것의 그것은 특히 더 날카로웠다. 그러나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아 어디쯤에 아기 고양이가가 있는지 방향조차 감 잡을 수 없었다. 차고 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조금씩 안개가 바람에 쓸렸다. 전망대 아래쪽 초원이 흐릿하게 푸른 색채를 드러냈다. 그러고는 휙, 마술사가 지팡이라도 휘두른 듯 안개가 사라져버렸다. 동시에 마술사가 남겨놓은 검은 아기 고양이가 노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다섯 걸음쯤 떨어진 곳에서 여전히 격렬하게 야옹거리며. 어미는 없었다. 길을 잃은 모양이었다. 중빈이 다가갔다. 고양이는 다가가는 만큼 뒷걸음질 쳤다. 중빈이 주저앉아 손을 내밀었다. 뒷걸음질을 멈춘 채 또 야옹야옹. 앙상한 몸이 굶주려보였다.
“고양아, 이리 와! 이리 와!”
보족한 귀를 쫑긋 세우고 고양이는 중빈을 똑바로 바라보기만 했다.
“엄마, 스페인어로 고양이가 뭐지?”
“가토.”
중빈은 고양이가 다가오지 않는 것이 한국어로 부르기 때문이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가토? 가토!”
줄기차게 불러댔지만 고양이는 다가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이도 주저앉은 엉덩이를 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먼저 포기하는 건 언제나 어른이다.
“가자, 중빈, 우린 데려갈 집도 없잖아.”
“엄마 혼자 가! 난 끝까지 이 고야일 구할 거야!”
어린아이들은 집중하면 시간을 잊는다. 중빈은 족히 한 시간 동안 가토를 부렀다. 고양이가 아주 조금씩 중빈에게 다가왔다. 중빈의 언저리에 다 와서도 한참을 이리저리 탐색한 뒤에 마침내 손으로 들어왔다. 증반이 고양이를 안아들었다. 얼굴을 보니, 지구를 구하러 나선 슈퍼맨이 따로 없다. 사명감이 훨훨 불탄다.
“엄마, 가자 빨리 사료를 사줘야 해!”
아이가 가게를 찾아 성큼성큼 걸었다. 내가 그 뒷모습을 카메라에 담자 대노했다.
“엄마는 지금 이 상황에 사진이 중요했! 빨리 와!‘
흐음, 그러니까 지금 이 상황이란, 엄마가 전시의 포토저널리스트들처럼 존재론적 고민을 해야 하는 상황인 거냐? ‘찍느냐 구하느나, 이것이 문제로다.’ 그러나 아이를 뒤따라가는 그 길은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새파란 하늘 아래 키 작은 집들이 붉은 기와를 맞대고 이어졌다. 정방형의 돌들이 정갈하게 깔린 길에는 가장자리마다 붉은 흙을 비집고 고양이 귀 같은 풀들이 쫑긋쫑긋 솟아 있었다. 마을 상점에는 기꺼이 조언 해줄 여인들이 여럿 모여 있었다.
“사료 있어요?”
“당신 고양이에요?”
“아뇨.”
“엄마, 내 고양이 맞잖아.”
“으이구, 좀 가만히 있어봐.”
“사료는 이렇게 대용량으로밖에 안 팔아요. 개다가 사료 먹기엔 너무 어려서…….”
“빵을 줘 봐요.”
“빵이요? 고양이가 빵을 먹을까요?”
“그럼요!”
“우리 집 고양이도 빵을 아주 좋아한다우.”
우리는 ‘방 하나와 생수를 샀다. 상점 앞에 빵 조각을 내려놓으니 가토는 부스러기 몇 개만 핥을 뿐 계속 긴장을 풀지 못하고 야옹거렸다. 전망대로 돌아가서 계단에 방과 물을 놓아주자. 그러쟈 내 신발과 다리는 오르락내리락하며 빵을 먹고 장난을 쳤다. 한 입 먹고 자전거 소리가 나면 계단 위에 올라가 보고, 한 입 먹고 개가 지나가면 숨어서 쳐다보았다.
“중빈, 얘 먹는 거 너랑 똑같다 아이고, 심란해라. 얜 또 언제 인간이, 아니 고양이가 된다니?”
증빈이 깔깔 웃는다. 의심 많던 처음과 달리, 가토는 금방 손을 탔다. 중빈은 가토를 쓰다듬고 어르고 열심히 물과 빵을 먹였다.
“아이고, 얘 때문에 오늘 하루 떠 여기 묵어야겠구나.”
내 말을 아이가 간절하게 붙잡았다.
“엄마, 얘 데려갈까? 데리고 다니면서 여행하면 안 될까?”
세 돌짜리를 데리고도 여행을 다녔는데, 우리 둘이 어떻게 고양이 한 마리를 못 돌볼까? 그런 생각을 잠깐 하긴 했다. 하지만 곡 장거리 버스 속에서 고양이가 열 시간 내내 야옹거리는 장면이 떠올랐다. 아이고, 말도 안 돼. 그때였다. 도사견처럼 커다란 개 세 마리가 전망대 계단을 뛰어내려왔다. 우리는 너무 놀라 엉덩방아를 찧듯 주저앉았는데, 글쎄, 요 조그만 고양이가 털과 발톱을 있는 대로 세우고 개들에게 대드는 게 아닌가. 개들은 금방이라도 고양이를 삼켜버릴 듯 다가왔다. 한입 거리도 되지 않을 터였다. 우리가 비명을 질렀다. 개 주인이 나타나 휘파람을 불었다. 개들이 와르르 올라갔다. 나는 가토를 번쩍 안았다.
“안 되겠다. 나도 모르겠다. 여기 두면 얘 죽는 건 시간문제일 것 같아.”
마을로 데려가 혹시라도 키울 사람을 찾아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정 임자가 안 나타나면? 중빈이 환호하며 뒤따랐다. 그런데 전망대를 벗어나자 가토가 다시 버르럭거리기 시작했다. 발톱을 세우고 품에서 벗어났다. 안으면 벗어나고, 안으면 다시 벗어났다 그리고는 처음처럼 뒷걸음질만 치다가 마침내 더는 쳐다보지 않고 멀어졌다. 증빈은 안타깝게 가토를 부르다 결국 입을 다물었다. 나는 중빈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네가 지금 느끼는 것을 엄마도 느껴. 그런데 동물들에겐 본능으로 선택하는 운명이란 게 있어서, 그걸 사람이 억지로 바꿀 수는 없어, 가토는 익숙한 장소에 머무길 선택한 거야. 너무 걱정하지는 말자. 아까 큰 개들에게 대드는 것 봤지? 가토는 스스로 앞가림하면서 용감한 고양이로 자랄 거야.”
터덜터덜 마을로 돌아왔다. 자그만 소리만 나도 뒤돌아보면서.
“돌아가면 검은 고양이 한 마리 키우자. 길냥이 입양해서.”
“응, 우리 그 고양이 이름은 가토라고 짓자.”
“그래!”
· 메데인에서 우리는 시간 날 때마다 산토도밍고를 찾았다. 산토도밍고는 메데인 지하철의 역 이름이자 산동네 이름이다. 지하철에서 내려 연계 케이블카로 갈아타면 해발 2,000미터에 자리한 이 산동네에 떨어뜨려준다. 케이불카는 6인승인데 사방이 유리라 밖이 환히 보인다. 지하철역에서부터 산동네 꼭대기까지 연결된 두 줄의 케이블, 븍 상행선과 하행선을 따라 여러 대의 케이블카가 택시처럼 오르락내리락한다. 케이블카란 것이 대개 관광지에 걸려 있어 주로 관광지 풍경을 보여준다면 산토도밍고의 그것은 완전히 날 것이었다 다짜고짜 발아래 산동네 풍경이 펼쳐졌다. 다닥다닥 붙은 집들, 옥상 위 빨래를 너는 여인, 창문 밖을 내다보는 웃통 벗은 남자, 지붕 고치는 사내들 거리마다 넘치는 아이들. 메데인의 혈관 속을 달리는 기분이었다.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창문에서 원색 꽃무늬 커튼이 형식적으로 펄럭였다. 이 정도 시끌벅적함이야 일상이라는 듯 늙은 개가 열린 현관문에 드러누워 심드렁히 밖을 내다 보았다. 아이들은 순진한 눈을 하고 다가와 말을 걸었다.
“딱 엄마 취향인데.”
나는 대답 대신 커다랗게 미소를 지었다. 과일 가게에서 딸기를 샀다. 문간에 난 앉아 숙제하는 예쁜 여자 아이들에게 딸기를 좀 씻어달라고 했다. 착하게도 연필을 내려놓고 딸기를 씻어왔다. 여자아이들과 나란히 앉아 딸기는 나눠 먹었다. 두 소년이 다가와 인사를 건했다. 에디슨은 키가 크고 껄렁껄렁한 여드름쟁이였고 마태오는 조금 작고 통통했다. 우리는 그들이 인도하는 대로 산동네의 숨겨진 좁은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저 아래 메데인 시냐가 통째로 내려다보였다.
“우와 잔디 축구장이다!”
브라질이세도 콜롬비아에서도, 동네에 관공서가 없을지언정 축구장은 반드시 있다. 달동네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유소년 축구팀이 시합을 하고 있었다. 때마침 스콜이 쏟아졌다. 유소년 축구팀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홀딱 젖으며 시합을 계속 했다. 전반전이 끝나고 쉬는 시간, 비에 흠뻑 젖은 선수들이 우리에게 몰려와서 어디서 왔냐. 이름 나이를 물었다. 스콜이 그치고 해가 뜨자, 산동네가 물걸레질을 해놓은 듯 반짝거렸다.
산토도밍고는 메데인으로 상경한 시골 사람들이 저렴하게 살 곳을 찾아 산비탈에 둥지를 틀었던 곳이다. 지금도 때때로 당나귀에 짐을 싣고 내려간ㄴ 이들로부터 옛 흔적을 볼 수 있다. 그런데 가난하고 소외되었던 이 산동네가 케이블카로 도심과 연결되고, 첨단 도서관으로서 도심 못지않은 문화시설을 가지게 된 것이다. 주민들은 이 두 시설에 굉장한 자부심을 지니고 있다. 내가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중빈은 도서관 앞에서 새로 사귄 동갑내기 친구들과 축구를 하고 있었다. 그 친구는 한쪽 입술을 씩 올려 미소 지을 때만다 상대방을 빨아들이는 매력 소년이었다. 세 녀석은 호흡이 철척 맞았다. 저녁이 올 때까지 축구는 계속 되었다. 나는 도서관 새하얀 책상과 의자에 앉아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가끔 말썽꾸러기 손자가 그 지팡이를 휘두르며 칼싸움을 합니다 저녁거리를 사러 나온 엄마는 딸과 팔짱을 끼고 바짝 붙어 걷습니다. 엄마가 양파를 고르는 동안 딸은 재재거리며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보고합니다.
중빈은
“오 분만 더!”
합니다. 저도
‘오 분만 더?‘
하며 주저앉았죠. 둘러보면 놀라데 돼요. 모두가 웃고 있어요. 이곳에 올 때 다른 여행자들은 그렇게 위험한 산동네에 뭘 하러 가느냐 했지요. 가거든 카메라는 꺼내지 말라고도 했지요. 그러나 모두가 각자 즐기고 행복하느라, 제 카메라 따위엔 관심도 없네요.
· 내일이나 내년을 금심하며 두 베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딱 오늘 하루치의 일만 충실히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것.
돌아와 사랑하는 이들과 밥을 짓고 손을 잡고 별 아래를 걷는 게 행복이다.
“차오(안녕!”를 했다. 서로서로 꼭 끌어안고 땀에 젖은 조그맣고 예쁜 등에 손바닥을 얹으니 다시 보지 못할지도 로른다는 생각에 짠해졌다. 우리는 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수십 번 차오를 했다. 증빈이 땀 젖은 얼굴에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여긴 무언가 특별해. 천사들이 하늘 위를 날아다니는 것 같아.”
· 생애는 굴곡이 있는 법이고, 그 리듬을 타며 춤을 추느냐 엎어지느냐 하는 것은 자신이 속한 국기의 성쇠에 못지않게 그가 일생을 통해 구축해온 내면의 긍정성에 더 많이 좌우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시련 속에서만 진정한 자신의 ‘강도’를 실험 당한다. 장기배낭여행을 마친 여자가 가장 먼저 하고 싶은 건 구질구질함을 벗는 것, 너덜너덜한 옷을 집어던지고 내 스타일의 옷을 입고 내내 질끈 동여맸던 머리를 풀어 제대로 손질하는 것이다.
· 저 위에 거대한 밥공기를 엎어 놓은 듯 시커먼 바위가 보였다 저 무게가 천ㅁㄴ 톤 정도라지. 바위 꼭대기까지 올라가야하는데, 아직 바위엔 도착도 안했는데, 헉헉, 시작부터 숨찬 오르막이구나. 나는 거대한 바위를 가리키며 중반을 놀렸다.
“우리 저기 암벽등반으로 올라가야 됑,”
“농담도 재밌게 하여.”
이젠 잘 속지 않지만 그래도 살짝 얼굴에 긴장이 어린다. 조금 더 가까이 가자, 바위의 가운데에 수직으로 갈라진 틈이 보였다. 틈은 지그재그 형태의 콘크리트 계단으로 메워져 있었다. 마치 재건축 직전의 낡은 아파트 비상용 계단처럼 흉측하게.
아무리 잘 ㅇ안 보이는 틈이지만, 영험한 바위를 저렇게 망쳐놔도 되나? 여기서 보니까 꼭 엄마가 바느질로 꿰매놓은 것 같잖아.“
푸하하, 아이가 웃었다. 내 비뚤비뚤 바느질 솜씨는 유명하다. 아이는 어쨌든 계단의 존재에 안도한 눈치였다.
“저 계단이 모두 몇 개더라? 우리 세면서 올라가볼까?”
“스페인어로?”
“으악, 엄마! 그럼 난 아마 죽고 말 거야!”
“중빈아 농담이었어. 계단 세지 말고 풍경 좀 봐”
“아냐, 엄마, 우리 풍경 보지 말자. 그리고 꼭대기에 올라가서 깜짝 놀라자.”
“좋아! 것도 재밋겠다.”
저점 더 높아졌다. 슬쩍 곁을 내려다보면 무서웠다 .바야흐로 못생긴 시멘크 계단의 실용성에 실토할 수밖에
“이 계단 앞뒤 곽 막힌 콘크리트로 짓기 잘했다. 쇠나 나무로 만들었어 봐. 밑이 다 보일 거 아냐.”
· 귤을 쥐고 야무지게 껍질을 벗기더니 오목조목 알차게 씹어 먹었다. 다 먹은 끈적한 손을 내 바지에 문질러 닦고는 생끗 웃는다. 오래 알고 지낸 이모에게처럼. 버스가 조금 더 달리고 타마라가 이내 끄덕끄덕 고개를 흔들었다. 내 어깨에 머리를 놓아주니 편히 잠이 들어버렸다. 처음 보는 사람과 사람이 , 한 번 보고 말 사람과 사람이, 문을 열어준다, 앉게 해주고 안아준다. 팔을 벌리고 쉬게 해준다. 손을 잡아주고 잠들게 ㅎ ㅐ준다. 내가 받은 체온이 다시 다른 이에게고 옮아간다. 따뜻함이 식을 새가 없다. 호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주저할 새가 없다. 이 신비한 곳의 배경음악은 ‘쪽쪽’이다. 나는 모락모락 솟아오르는 아이의 달큰한 살내를 맡으며, 신비의 비밀을 끝끝내 밝히지 못하더라도 그저 머물고 싶다는 생각
“엄마, 좀 깜깜하지만 우리 산토도밍고 들렀다. 가자.”
“응? 비도 오는데.”
“젖으면 되지.”
“그래, 그러자.”
·콜롬비아에서 지역 폭력은 항상 이 당파간의 다툼과 연관되어 있었다. 1991년 헌법 이전까지 20세기 거의 내내 콜롬비아는 대통령에게 모든 지역의 기관 간부들을 임명할 권리를 부여했다 그 결과 보고타에서 임명받고 파견된 수장과 내내 지역민이었던 조직원들 사이에 끔찍한 대립이 끊이지 않았다. 보고타에서 파견된 읻ㄹ은 다툼에 휘말려 간신히 중심 도시만을 돌보기에도 바빴다. 반군의 최대 수입원이던 코카인 재배면적이 매년 줄어들고 있는데다 부 번재 수입원이었던 납치와 유괴도 90% 줄었다. 새 대통령 후안 마누엘 산토스는 자랑스럽게 발표했다. 콜롬비아 커피 농장 생각만해도 향기로웠다. 온통 참하게 경작된 커피밭 천지였다. 오, 좋아 종아.
트럭에는 두 명 동양인이 먼저 ㅌ카고 있었다. 남학생이 우리를 보더니 조금 망설이다. “안녕하세요?”했다. 아들이 광복을 맞이한 조선인처럼 반갑게 부르짖었다.
“엄마, 한국 사람이야? 한국사람!”
놀라기는 우리보다 학생들이 더 놀랐다. 여기서 한국인 꼬맹이를 만다게 될 줄이야. 남학생이 한국에 쌍둥이 여동생이 있다하자 중빈이 좋아라했다.
“그럼 어렸을 때 괴롭히느라 굉장히 재미있었겠네요.”
“너 뭘 좀 아는구나, 나 엄마한테 많이 맞았다.”
키득키득, 차 안의 분위기는 한껏 고조되었다. 잠시 후 트럭이 또 다른 호스텔 앞에 멈춰 섰다. 캐나다 남성이다. “저런 키 작은 사람이 좋을 때도 있다는 게 위로가 되네요.”
“맞아요. 가끔은 공평해야죠.”
모두들 다가올 일들에 한껏 부풀어 풍선처럼 가벼운 미소를 교환하는 순간
질문 있는 것처럼 손을 들었다.
이 커피농장엔 핫쵸크도 있나요?“
난감한 커피 농장 주인의 표정 위로 일행들의 웃음이 깔렸다. 커피의 다양한 향 중에는 마늘, 양파. 오이 향까지 포함되어 있다.
·동굴 바위벽에는 전에 없던 성모의 형상이 그려져 있었다. 그런데 물감이나 페인트로 그려진 것이 아니라. 신비롭게 새겨진 형상이었다. 바로 여기에 계단이 세워지고 성당이 지어져 오늘날의 라스 라하스 성당이 되었다.
신라면 봉지를 터뜨려 냄새 맡자 분노가 폭풍처럼 몰아쳤다.
“니뇨(어린이)랑 다니는 거 안 보여요? 니뇨 데리고 나쁜 짓을 하면 뭘 한다고 이렇게 음식까지 찢고 난리예요?”
옆에 있던 페루 아가씨도 경찰이 핸드백을 뒤집어 자증이 나 있던 터였다. 어리둥절한 경찰에게 내 역성을 들어 ‘창조적으로’ 통역했다.
“이게 니노가 먹을 음식인데 그렇게 뜯어놓으면 니뇨가 어떻게 먹느냐고 하잖아요!”
애한테 음식 먹인다는 에미를 이길 경찰은 없다 그는 매우 무안한 얼굴이 되었다 나는 북북 소리 나게 가방 지퍼를 딛고 버스에 올라탔다. 그제야 사태를 눈치 챈 중빈이 분노의 후폭풍을 몰아쳤다.
“뭐라고! 저 아저씨가 우리 라면을 뜯었다고!”
·물물 교환-저지대 정글 생산품을 들고 온 사람들과 고원지대엣 특산품을 들고 내려온 사람들이 서로 물물교환을 했던 곳이다 .오늘날 이 장터에는 가축과 식료품 등을 사는 지역민과 공예품을 쇼핑하는 관광객, 두 부류 사람들이 모인다.
·넓은 뒤뜰로 나서자 꽃나무가 바람에 출렁거렸다 숙소를 나서니 길이고 궁원이고 할 것 없이 곧바로 장터였다. 가장 화려한 포인트는 목걸이였다. 구 겹에서 수십 겹까지 반작이는 금줄을 목에 늘어뜨린 사람들. 족히 백년은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온 것 같다. 골목을 꺾어 돌면 인디언 여인이 등에 아기를 업은 채 차분하게 블라우스에 수를 놓고 있었다. 도 다른 아이들은 수레 아래에서 눈에 띄지도 않게 얌전하게 시간을 보냈다. 날마다 볕에 익은 화가의 손등이 까맸다 그의 곁에는 귀걸이, 팔찌는 물론, 그물처럼 엮은 색구슬 목걸이가 있는가하면 손수 꿰매 만든 인디언 헝겊 인형들이 산처럼 쌓여 있다. 그 앞에 인형과 똑같은 옷차림과 머리 모양을 한 여자아이가 조금 더 큰 인형처럼 서성거렸다. 먹자골목에서는 여인들이 자루 가득 담아온 빵을 팔았다. 저 정도 양이면 밤새 화덕에 불이 났겠다. 좀 더 진한 기름내가 나는 곳에선 보쌈처럼 커다란 고기 덩어리를 절절 끓는 기름에서 꺼내 도마에 올려놓고 쓱쓱 잘라 팔았다. 한 점시 청해 입에 넣으니 고기가 솜사탕처럼 살살 녹는다. 한 점시 더 청했다. 질리지 않고 입에 들어갔다. 엄마야. 이거 칼로리 엄청 나겠다 내 옆에선 아까부터 어린아이가 꼬치에
끼운 소시시지를 그릴에 굽고 있다. 제때 제대 꼭 알맞게 뒤집는 솜씨가 보동이 아니다. 아내가 종일 물건을 팔았으면 남편이 나타나 정리를 도와주는 식이었다. 판매대 아래에서 이 순간만을 기다렸던 아이들도 서둘러 밖으로 나와 부모를 도왔다. 서로의 아기를 받아 안거나, 하루치의 노동을 마친 홀가분함으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이미 볼리비아와 페루를 거쳐 다양한 인디오 물건을 구영한 터라 장터 물건보다 정리 장면이 더 인상적이었다. 수레 근처에 매어둔 남의 자전거 옆에 쪼그리고 앉아 소심하게 페달을 손으로 돌리다가. 도로 수레 밑으로 돌아가는 정도였다. 사실 그런 아이들이 지천이었다. 바닥을 기거나 쪼그려 앉아 종일 부모를 기다리는 아이들, 그들은 마치 땅바닥이야말로 날 때부터 정해진 운명의 무대에서 불평할 줄도 칭얼댈 줄도 모른 듯 잠자코 부모를 기다렸다. 부모가 장사가 끝났음을 알 리가 두 사내아이가 수레에서 기어 나왔다. 나오자마자 군말 없이 옷 정리를 돕기 시작했다. 떠돌이 장사라 옷걸이에 걸어 진열해두었던 옷을 모조리 도로 거둬서 보관해야만 했다. 부부가 하나하나 걸었던 옷걸이를 하나하나 내리고, 옷걸이에서 옷을 분리해 새것처럼 개켰다 .그들에게 돈이 되고 밥이 될 옷, 한 벌 한 벌을 정성스레 쌓았다. 내일이면 다시 옷걸이에 걸어 진열해야 한다. 모든 것은 반복이다 그럼에도 부부는 불평 없이 오늘 할 일을 했다. 불평 없기는 어린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부부가 옷을 빼내고 옷걸이를 뭉텅이로 넘기면 두 아들이 뒤엉킨 옷걸이들을 빼내 차곡차곡 묶었다. 믿기지 않게도 네 살 된 막내마저 느리지만 신중하게 그 일을 해냈다. 부부는 옷 정리를 마친 뒤 마네킹을 분해했다 일시적으로 부스 역할을 했던 철근도 분리해 묶었다. 인내를 요하는 건 시간이었다. 하루를 공들여 세우고 다시 공들여 무너뜨리는 일, 그럼에도 아이들은 배고프다거나 어서 가자고 조르지 않았다. 수레 주변에서 뛰어 노는 것조차 하지 않았다. 끝까지 옷걸이와 씨름했고 씨름이 끝나자 부부가 하는 일을 지켜봤다. 옷, 마네킹, 철근, 옷걸이가 수레에 곱게 ‘쌓였을 즈음, 어둠이 제대로 내렸다. 4인 가족이 모두 매달려 종일 얼마를 벌었을까? 에콰도르의 물가는 낮으며 그들의 옷은 시장에서 흔한 물건일 뿐이다. 그들은 후련하고 단란하게 정리된 수레를 밀었다. 이제 그들이 찾아가는 건, 먼 미래에 대한 근심이 아니라 이 저녁의 따뜻한 밥일 것이다. 그들 덕분에 아들은 7살 때부터 제 3세계 어린이들과 연주하고 책을 읽는 활동을 함께 해왔다. 거리의 악사 역시 같은 맥락이었다.
·종이, 나무, 불을 대놓고 주물럭거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불은 들여다보면 들여다볼수록 ‘빠져들게 되는 원시적 마력이 있다.
· 현대의 가장 큰 오물은 미디어의 쓰나미가 아닐까? 중빈은 남녀가 침대서 응응대는 신음이 버스 안에 가득 퍼지자 무얼 얼마만큼 알고나 있는 건지 “뭐 저런 걸 보여주나?” 투덜대며 급작스럽게 책을 펼쳐들고 얼굴을 묻었다. 에콰도로는 스페인어로 ‘적도’란 뜻이다.
·안으로 들어서자 어처구니없을 만큼 화려하고 슬프도록 아름답다. 온통 황금으로 도배된 실내에 사용된 황금의 무게는 무려 7톤에 달한다 식민지시절, 그 황금을 어디서 어떻게 얻었을지는 뻔한 일이다 그럼에도 이 성당은 자신들이 착취한 인디오들에게 문을 닫아걸고 있다. 에콰도르의 물가를 생각한다면 턱없이 비싼 2달러라는 입장료를 내야만 들어올 수 있게 한 것이다. 결국 지불 능력이 있는 외국인 여행자 몇몇 만 성단에 모여 있었다. 내가 들어올 때 쇠창살이 둘러진 교회 밖에서 인디오 신자들이 창살 안으로 최대한 팔을 집어넣은 채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믿음의 이름으로 ㅈ비어진 성소에 가난한 믿음은 발 들일 자리가 없다니. 조각상과 몰딩과 패널의 경탄할 만한 조화, 손톱만큼의 여백도 없을 만큼 장식으로 가득한 계단, 이 모두를 뒤덮고서 빛나는 황금 때문에 나는 눈이 아팠다.
“7톤의 황금을 캐려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을까? 진자 피조물을 사랑하는 신이라면 이렇게 이기적인 공간엔 무안해서 발도 못 들일 것 같아.”
·계단 다음 계단, 그 께단을 꺾어 돌면 다시 계단,
“또 계단이야? 오 마이 갓!”
증빈은 한 층을 오를 때마다 그런 식으로 뒤따르는 내개 사전 정보를 전했다.
“헉, 여긴 아예 계단이 한 칸 빠졌어?”
·자녀가 외국어 공부를 싫어한다면, 아마도 이것이 가장 좋은 비법이 될 것이다 .싫다는 학원에 계속 보내지 말고 그 돈으로 함께 여행을 하는 것. 그 언어를 쓰는 곳으로 가서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구름이 낮게 내려앉아 앞이 잘 보이지 않는 길을 운전사는 굽이굽이 느리게 돌았다 어느 지점에선가부터 버스기 내리막을 따라 전진했다. 기온이 높아지고 끈적거리기 시작했다.
아침이 되자, 비가 들이치던 창문으로 소리가 들이쳤다. 사람들의 외침과 오토바이 모터소리와 버스의 경적소리, 나는 아래로 내려가 바네사를 찾았다. 그런데 이럴 수가 동아줄이 끊어졌다. 바네사는 아침 일찍 떠났다는 것이다.
·녹음과 원색 햐얀 기와 기기묘묘한 냄새, 신맛과 달콤한 사이를 걸었다. 우리가 발길을 옮길때마다 잉어 떼들이 깜작 놀라 일제히 방향을 뒤집었다. 연못 위로 너울대는 나뭇가지가 흔들릴 때마다 수면 위에서 빛의 편린들이 흩어지고 다시 모였다. 어느 방향으로 걸어도 아담한 산책로가 펼쳐졌다. 자연의 색감과 향미가 충일한 길들이, 식물에 관심이 없는 중빈초자 신이 나 뺨에 열매를 갖다 대곢, 꽃마다 코를 벌름대고, 나무에 올라 펄쩍 뛰어내렸다. 창문 밖나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옷을 벗었다. 물을 틀자 찬물이 쏟아졌다. 빅토리아가 옳았다 부엌에 비교하면 굵은 물줄기였다 찬물로 들어섰다. 머리가 젖었다. 창문으로 흠씬 들어오는 저녁 햇살이 물줄기에 포개져 얼굴을 덮었다. 뜨거운 물이 철철 흐르는 내 집 욕실에는 창문이 없다. 이렇게 고운 빛과 물속에 한꺼번에 담겨져 몸을 씻는 것이 얼마만인가. 접시에 놓자, 같은 계열의 두 빛깔이 나란히 곱다. 무엇보다도 온몸을 날려 데굴데굴 구르며 넘어지며 까르르까르르 웃으며 미친 듯이 공을 향해 덤빌 줄 알았다.
공터에는 함정이 많았다. 풀에 가려 보이지 않는 구멍도 제법 되었고, 돌부리도 여기저기 솟아 있었다. 우리는 공을 쫓으며 예사로 넘어졌다,. 발목을 삐끗하며 비명을 지르기도 했다. 공을 뺏기고 풀밭 위에 대자로 드러눕기도 했다. 그 어떤 ㄱ덧도 우리의 뜀박질을 멈추게 하지 못했다. 나도 천 번쯤 이름을 외친 것 같았다. 모락모락 먼지에 싸인 나탈리에게 드러 누워 숨을 헐떡이는 나탈리에게, 소담스러운 산자락을 배경으로 우뚝 있는 나탈리에게, 공을 보내고 또 보냈다. 나탈리는 간지럼 타는 아이처럼 까르르까르르 웃고 또 웃었다. 양팔을 벌려 흔들흔들 균형을 잡으면서, 선로에서 떨어지는 사람이 있으면 대열의 순서가 뒤바뀌었다. 기찻길이 소실되는 지점에는 먹구름이 가득했다. 분화구에만 남아 있는 저녁햇살과 까맣게 몰려드는 먹구름의 대조는 너무 아름다워서 가슴이 뻐근해질 지경이었다. 버근한 가슴을 다독이기 위해 숨을 크게 들이킬 때마다. 비를 머금은 바람이 페부 깊숙이 파고들었다. 비는 내릴 듯 내릴 듯 내리지 않았다. 기찻길 옆 초원 속에서 어린 송아지가 촉촉한 바람을 맞으며 어미의 젖을 빨았다 개들이 나부끼는 풀 사이를 늑대처럼 홀연히 거닐었다. 근교의 마을 안으로 들어섰다 아이들이 정말 많았다. 아이들의 소란스런 외침 사이로 매우 아름다운 멜로디가 흘렀다. 먹구름과 햇살이 비를 머금은 저녁, 개와 늑대의 환영이 노니는 저녁, 땀과 웃음을 실컷 흘려 얼굴이 꽃봉오리처럼 환해진 소녀들의 손을 잡고 거니는 저녁, 안 그래도 뻐근한 가슴을 더욱 뻐근하게 하는 멜로디였다. 엘린은 그동안 자신이 이곳에서 일궜던 재산을 양도하듯 내개 일일ㅇ 일러주었다.
여기는 동네 사람들이 매주 모여 춤도 추고 운동도 하는 곳이야. 너도 참여할 수 있어.
“학교로 가는 버스는 여기서 타며 ㄴ돼. 가서 자원봉사를 하고 싶다 말하면 얼마든지 자리가 있을 거야.”
그녀는 골목골목마다 걸음을 멈췄다. 목소리에서 애정과 아쉬움이 뚝뚝 묻어났다. 아이들은 마치 접착제로 붙은 손을 떼어내기가 힘든 것처럼, 가게 안에 들어서면서까지도 애일린과 내 손을 놓지 않았다.
“나는 오늘 정람 행복했어. 네 뒤를 졸졸 쫓아다니는 동안 한 사람이 새로운 곳에서 얼마나 아름답게 뿌리를 내리고, 얼마나 커다란 결실을 거둘 수 있는 가를 직접 분으로 확인할 수 있었으니까 말이야. 네가 추수한 소중한 낟알들을 아낌ㅇ벗이 내게 남겨주어 고마워. 비록 일주일 남짓 머물겠지만, 힘닿는 데까지 그것들을 돌볼게. 특히 카를린 자매를 돌보는 걸 잊지 않을게 언젠가 아이들이 폭포에 놀러갔을 때 굉장히 행복해 했다고 했지? 다음 주말에 꼭 거길 데려가겠다고 약속할게. 정말이지, 너는 그 어떤 척박한 곳에 떨어져도 행복의 씨앗을 뿌리는 사람 같아. 도 다른 곳에서 아름다운 결실을 거두게 되거든 꼭 내개 알려줘야 해!
·나무 덧문을 열자 아침 햇살이 물결처럼 방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드넓은 평원 쪽으로는 라벤더 꽃들이 무더기무더기 진한 향기를 내뿜었다. 그러니 누구라도 취한 듯 걸 수밖에. 입속에 빗물이 든다. 달다.
·빵을 주문했다. 몸 안에서 음식은 눈송이처럼 스르르 녹아버렸다. 따뜻했다. 달콤하다. 부드럽다 그런데 아직이다.
“중빈아. 엄마는 계속 배가 고파, 그리고 느끼해, 우리 발리 수크레 가서 마지막 남은 신라면을 해치우자!”
“그래!”
중빈은 남자아이들에게 에워싸인 채 짧은 스페인어로 아이들의 질문을 받아내고 있었는데 눈길은 추구를 하고 있는 형들 무리에 가 있었다. 중빈 같은 작은 아이를 끼워줄 리 만무한 실력이었다 축구가 한창일 때 한 아이가 장난으로 축구공을 교실 안에 감췄다. 교실 안 아이들이 창가에 매달려 키득댔다. 중빈이 교실에 들어가 따져 물었다.
“축구공 어딨어?”
순진한 아이들은 또 키득대며 금세 공을 돌려주었다 중빈이 공을 들고 나오자, 밖에서 축구를 하다 멈춘 형들이 함성과 휘파람으로 맞아 주었다. 중빈은 공짜로 영웅이 되었다. 덕분에 형들의 축구팀에 감히 길 수 있게 되었다. 시간이 되면 자신에게도 꼭 좀 바이올린을 가르쳐 달라면서
“네, 저는 정말 제가 배운 걸 아주 아주 잘 가르쳐줄 수 있어요!”
흐음, 한 문장 속에 정말이 한번 아주가 두 번이로구나. 불안한데. 끌어안듯 부여안듯 소중하게 기타를 품었다 . 그리고 움악이 터져 나왔다. 불꽃을 터뜨리듯 음악을 터뜨렸다. 부드럽고 정교하게 진지하고 조화롭게, 때로는 단순하게, 화려하게, 부모 잔소리와 돈의 힘으로 쥐어짜내기가 아니었다. 스스로 정성을 다해 빚어낸 소리였다. 간절함에서 기원한 소리였다. 그들의 음악에는 보석만큼이나 값진 것이 담겨 있었다. 열정, 배우고사 하는 넘치는 열정, 안데스 음악에는 교재도 악보도 없다. 모두 어깨너머로 주법을 배운다. 돈을 내고 배울 형편은 더더욱 안 된다 형이나 아버지는 물론, 친구나 동생에게도 배운다. 그저 나보다 조금 더 잘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스승이다. 모자란 쪽에서는 배우는 것이 부끄럽지 않고 넘치는 쪽에서는 돕는 것이 당연하다. 누구나 그렇게 시작하기 때문이다. 상하 없이 열린 자세는 여기서 생겨난다. 또 인데스 음악은 혼자서 여러 악기를 섭립한다. 열린 자세로 이것저것 다 해본다. 대부분의 영주자가 인뎃 악기의 절반 이상을 연주할 줄 안다. 교재와 선생과 돈이 없는 배움, 즉 경계 없는 배움 덕분에 오히려 간ㅇ한 일이다. 이런 식의 배움으로는 카네기홀에서 독주를 펼치기에는 부족한 실력이지만 서로 보완하며 합주하는 흥겨움이 목적이 되는 안데스 음악에서는 반드시 필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시험 때 지금처럼 하면 쟤네 빵점 받아. 연습 많이 해야 해.”
꼬마 교사는 걱정이 태산이었다. 그러나 걱정은 늘 일 분을 넘기지 못했다 그네와 시소가 있는 쪽을 바라보다가 빈자리가 생기면 냉큼 달려가 올라타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학교를 나서면 맛있는 음식을 먹고 나설 때와 똑같은 어조로 말했다.
“아, 너무 좋았다!”
열린 마음을 감사히 받기로 했다. 아이들은 내 전화번호를 적어달라고 서로 다투어 노트를 내밀었다. 너무나 순진해서 연락처를 주고받는 이 행위가 이별의 아쉬움을 달래는 하나의 ‘의식’일 뿐, 정말로 에콰도르에서 대한민국까지 이 번호를 쓰게 될 일은 없을 거라는 걸 모르고 있었다.
“내 전화번호는 필요하지 않아요?”
서운한 듯 묻는 아이들에게 일일이 전화번호를 받으면서 나는 가슴이 아팠다. 여행 중 마음이 풀어헤쳐진 날이면 우리는 아무 마 ㄹ도 하지 않는 것이 어느덧 습관처럼 되어버렸다. 마음의 테두리 밖으로 무럭무럭 퍼져 나오는 마음 갈피를 잡지 못해서 말을 고를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해초처럼 일렁이며 바다를 건너는 그 순간,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조용ㅎ 행복했다. 아ㅇ;ㅣ들은 숲 가운데 잘 닦인 길을 내버려두고 길을 따라 쌓은 돌담에 올라가 한 줄로 걸었다 돌담은 초링 키보다 약간 높았는데 초링은 용감하게 형 누나를 ‘다라 걸었다. 초링의 누나는 이제 겨우 여덟 살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동생을 잘 돌봤다. 나뭇가지가 튀어나와 있다든지 돌담의 폭이 좁아진다든지 할 때마다 얼른 초랑의 손을 잡았고 초랑이 넘어져 피를 흘렸을 때에도 누스느라는 빛의 속도로 뛰어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손으로 동생의 피를 문질러 닦았다. 초링은 마치 여덟 살 누나가 세상에서 가장 듬직한 존대인 양 마음껏 울며 의지했다. 아이들은 내가 나누어준 사탕을 초장에 먹어치워 버렸는데 누스트라는 이런 때를 대비했다는 듯, 초랑의 우는 입에 아껴두었던 자신의 사탕을 집어넣었다. 그제야 초랑은 울음을 멈추었다. 이런 아이를 볼 때마다 생각한다. 인간은 여지가 있는 만큼만큼 적응한다. 여지가 있는 만큼어리광을 부린다. 팍팍한 삶의 여건은 본능처럼 아이들의 등짝에 들러붙고, 아이들은 덜 울고 덜 보챔으로써 나아기 미처 손이 닿지 ㅇ낳는 어른의 역할을 분담하고 그것을 어른 못지않게 잘 해나감으로서 생존을 배운다. 특히나 여자아이들은 유아 때부터 엄마 노릇을 대신하는 것으로 시작, 사춘기에 조혼을 하면서 진자 엄마 노릇으로 이어진다. 한평생 휴식 없는 고된 엄마 노동을 하는 것이다 그것을 아는 나는 안쓰럽게 누스트라를 바라보는데, 그것을 아직 모르는 그는 제 작은 몸에 담긴 열과 성을 지극하게 꺼내서 오직 초랑에게 쏟아 붓고 있었다. 아이들은 언제나 나보다 앞서 뛰었다. 함성을 지르면서 흔들다리를 뛰어 건넜다 아이들 특유의 에너지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하자. 서로서로 자연스럽게 섞이며 균형을 맞추기 시작했다. 타키도 내게서 멀어져 아이들 무리속으로 들어갔다. 계곡물에 젖은 동생들을 위해 큰 녀석들이 알아서 겉옷을 벗어주었다. 젖은 옷도 금방 따끈하게 말려주었다. 뛰고 소리치고 잡고 넘어진고 웃는 동안, 아이들 얼굴에 그늘 한 점 없는 순간이 왔다. 놀이가 칭가 되는 순간은 아마도 이런 순간일 것이다. 누스는 옥수수만 먹었다. 고기는 아껴두었다가 초링에게 주었다. 초링은 그것을 선뜩 받지 않고, 도로 누나에게 내밀어 누나가 한입 깨물고 나자 그제야 자기 입에 넣었다. 여덟 살과 다섯 살밖에 안 되는 아이들이 고기를 서로 양보하는 것과 차력사가 이발로 기차를 끄는 것 중 어느 게 더 어려울까?
할머니들이 달팽이처럼 느리게, 그러나 끝가지 포기하지 않고 녹슨 관절을 움직여 동작 하나를 성취할 때마다 사람들이 왁자하게 웃으며 박수를 쳫다. 거기선 나도 의젓하게 진도를 맞출 수 있었다.
주인 남자가 수상해서 일부러 다가가 거짓말을 했다.“내일 아침에 남편과 여기서 만나기로 했어요. 그는 산티아고에서 일하느 경찰이에요. 그가 이침 일찍 올 테니, 우리가 묵는 방을 알려주세요.”
방으로 돌아와 불을 켜놓고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여관은 정반대 분위기였다. 남자는 퇴근했고 상냥한 아주머니 두 분이 바지런히 여관 곳곳을 쓸고 닦는 중이었다. 바느질에 대한 그녀들 애정은 대단했다. 냉장고 위에는 냉장고보가, 전화 수화기에는 수화기 보가. 찬문마다 투명한 아침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여인들은 화분에 일일이 물을 주었다. 수레마다 생과일주스가 넘쳤고 시장은 번화했다. 냉온수가 철철 흐르는 숙소에 있다 보면, 창밖으로 보이는 모래언덕이 마치 홀로그램처럼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마개형 고무 물주머니를 빌려주었을 때 나는 속으로 ‘에게게’하는 마음이었다. 다쳐올 사막의 무시무시한 추위 속에서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할지 모른 채.
이불에도 바닥에도 어디에나 사막의 모래가 스며들었다. 모래와는 이제 친구가 되어야 할 판. 남미에 도착하자마자 침낭이 보란 듯이 미끄덩 허리띠를 빠져나와 길바닥을 구르기 시작했다. 내가 씩씩거리며 침낭을 도로 붙들어 맬 때마다 그것은 내게 신세한탄을 했다.
“예, 대체 누가 2만 원짜리 침낭을 만들면서 그 용도를 남미로 생각하겠니? .너를 만나 시도때도 없이 길바닥을 굴러야하는 내 팔자도 참 오지구나.”
운전사가 6명 각자의 카메라를 순서대로 바꿔가며 똑같은 장면을 담아야했다. 지프차는 앞서 달려간 차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 파놓은 골과 골 사이를 오가며 울퉁불퉁 달렸다. 거대한 ㄹ흙먼지가 뒷바퀴에서 솟아올라 날개처럼 펼쳐졌다. 광활함 앞에 나는 점이고 개미일뿐, 사막에 서면 나는 그저 티끌일 뿐. 시간은 수만 수억 년을 단위로 움직인다는 것을 깨닫 게 된다. 그가 지층을 수수깡처럼 부러뜨려 당신을 만들어놓은 것을, 화산을 비눗방울처럼 터뜨려 지층으로 덮어버린 것을, 정면으로 마주하면서 무한한 힘, 시간, 곡간에 대해 누구라도 철학적 고찰을 하게 된다. 어쩌면 사감은 유일한 인간이 무한을 자각하게 가장 완벽한 체험학습장일지도. 개미 인간은 고백하고야난다. 나는 당신을 경외합니다. 나는 당신의 뜻을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사랑하는 이가 갑자기 목숨을 잃어도 그래서 당신께 왜라고 묻지 않습니다. 대신 무릎 꿇습니다 인간은 당신을 서로 다른 종료로 체계화하고 발전시켜왔다. 끝끝내 인간의 지력으로 이해할 수 없는 삶의 고난들은 그렇게 위로받았고 인간은 다시 일어설 힘을 얻었다. 커튼 뒤에 숨겨져 있는 무대처럼, 거대한 등마루 뒤에 숨어 있었다. 자연은 언제나 인간을 앞지른다. 그것은 우리가 상상했던 그 어떤 푸른 빛깔도 능가하는 푸른빛이었다.
“이 호수엔 구리가 많아서 저런 물빛을 냅니다. 구리의 독성 때문에 어떤 생명체도 살지 않아요.”
호숫가에는 소원을 비는 돌탑이 여러 개샇여 있었다. 사람들은 하나씩 돌을 보태 돌탑의 키를 높였다 오랜 친구지간인 알레롸 곤잘로는 조용히 거닐었고, 나탈리는 카메라 앞에서 돌탑과 다소 어울리지 않는 높은 점프를 선보였다. 중빈은 소원을 빌기 위해 매우 어려운 길을 택했다. 열 살 내기가 보기엔 영 시시껄렁한 돌메이탑 대신 바위 탑을 쌓는 것으로, 그러고는 영차영차 바위를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얘애, 이 고도에서 그렇게 용쓰다 병난다.
·만년을 단위로 만든 시계, 세월계가 있다면 바로 저런 바위의 모양일라 만 년이 지날 때마다 작은 바위부터 하나씩 사리지는, 그러니까 스스로 소멸함으로써 세월을 알리는 세월계가 될 터이다.
·일을 보는 사람들은 알아서 적당한 자리를 찾았고, 일을 보지 않는 사람은 알아서 적당히 시선을 피했다. 여행을 다니다보면 화장실 상황은 천차만별이 된다 하지만 새로운 화장실에 적응하는 데 필요한 요소는 언제나 한 가지뿐이다. 방광이 채워지는 데 걸리는 시간.
“애를 낳아봐. 이 날씨에 수용복으로 갈아입는 건 돈 주고 하례도 못해”
바로 나다. 냉기가 무서운 온돌 나라 출신 아줌마
“난 평소에도 고혈압이야. 이 고도에서 물에 들어갔다 나오면 큰일 날 거야.”
바로 알레힌드로다. 칠레 사회복지과 공무원.
· 어둠은 일찌감치 내리고 부엌에선 향긋한 음식 냄새가 진동을 하는데 달리 할 일이 없을 때 여행자들은 개가 된다. 이야기를 하고 있어도 실은 음식의 추이에 모든 감각이 동원되어 있다. 나느 부엌에 머물렀기에 먼저 저녁 메뉴를 알아내는 특권을 누렸다. 수프와 토마토 스파게티, 디저트는 통조림 복숭아였다. 개로 치자면 나야말로 개 중에서 상개. 혀를 길게 빼물고 저녁을 기다렸다. 부엌 여신의 손길이 닿았으니 무조건 맛있겠지.
·제임스는 점점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호수에 도착하면 나탈리는 다정한 성품의 알ㄹ와 곤잘로를 찾았고 그들과 되도록 멀리까지 걷다가 돌아왔다. 취침용 양말을 신은 뒤 아주 고급스러운 침낭으로 들어갔다. 오 좋겠다. 아들아, 미안, 오늘밤 우리 꼭 살아남자. 랜턴을 끄자 완벽한 어둠이었다. 완벽한 고요였다. 추위는 생각보다 견딜 만했다.
중빈은 꾸러기답게 벽에 혀를 대고 맛부터 보았다.
“에퉤퉤! 소금 맞아!”
정말로 모든 여건이 어제보다 좋았다. 방에 들어서면 소금이 소리를 빨아들이는지 방음시설마저 완벽해 고요했다. 이제 사람들의 관심은 소금에서 온수로 옮아갔다. 제임스가 제일 먼저 샤워를 하러 들어갔다 씻고 싶어 안달이 난 나머지 사람들이 화장실 밖에 줄을 섰다. 위아래가 뚫린 허름한 나무문을 사이에 두고 제임스와 먼지투성이 사람들이 대화를 나눴다.
“물 따뜻해?”
“오오, 따뜻해!”
:와~!“
먼지투성이들이 박수를 쳤다.
“으악, 차가워!”
“우우~”
먼지투성이들이 야유를 보냈다.
“오오, 다시 따뜻해!”
“와~!~”
다시 박수
“으악, 차거!”
“우우!!”박우와 야유를 오가며 깔깔거리는 동안 조금씩 줄이 짧아졌다. 사막이었고 물탱크는 하나였고, 도착 인원은 30 명가량, 두말할 것 없이 물을 아껴 써야 했다. 찬물이든 뜨거운 물이든 3,4분 안에 샴푸하고 행구고 나와야 하는 상황이었다. 좋다는 개념은 다른 사람마을을 기준으로 하는 것일 뿐 커다란 탱크 하나를 매일 새로 채우기 위해 대대로 산 후안에서 유지해오던 물 사용량에는 큰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스테이크는 타이어처럼 질겼고 그나마 다 새카맣게 태워버려서 먹을 수 있는 부위를 찾기가 어려웠다. 와인은 음. 어쨌든 와인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대체로 맛보다 분위기에 만족하고 있었다.
·아들이 먹기 싫다며 오렌지를 화장실 변기에 버려 화장실이 막혔다. 엄마가 나서 변기를 뚫자 아들이 울먹울먹
“엄마, 진자로 미안해.”
“사고 접수되었다니까 괜찮나. 자, 사과 기념으로 우리 악수나 할까?”
내가 비닐봉지 낀 손을 변기에서 꺼냈다.
“으악! 아냐! 아냐! 안 해도 돼! 정말 정말 괜찮아.”
우리는 변기 앞에서 한참 웃었다.
“그리고 괜ㅊ낳자. 엄마가 된다는 건 이런 부분도 포함하는 거야. 익숙한 일이야. 모두에게 피해가 되기 전에 알려줘서 고마워.”
양말이 땀으로 흥건했다 신발 바닥도 물기로 흥건했다 . 세상에 이 녀석, 우유니에서 소금이 녹도록 뛰어다녔구먼.
·그는 이 여행에서 종종 영감을 얻는 것 같았다. 그러므로 눈물이 있다면 흘려버리는 게 좋다. 자신을 충분히 위무해주고 다시 일어설 힘이 날 터이므로.
“이 차로 과연 사막을 건널 수 있을까?”
노구의 차 한 대를 사기 위해 페드로는 집안의 돈을 있는 대ㅔ로 긁어모았을 것이다. 적잖이 빚도 졌을 것이다 이 노구의 차는 그의 모든 것일 터다. 그는 손바닥처럼 샅샅이 차를 읽을 수 있으리라. 그래서 우리는 질문을 말로 꺼내진 않았다. 이후 테드로는 정확한 간격으로 차를 세운 뒤 뒷바퀴로 가 나사를 조이고 왔다. 빨간 토요타는 그의 손길이라는 부품이 더 해질 때에만 비로소 완벽한 차가 되어 달릴 수 있는 것 같았다. 하늘의 불을 끄고 지평선에 핑크색 페인트 통을 엎어버린 듯, 어두워진 하늘에 핑크빛 띠가 번졌다. 택시를 탔는데 운전기사가 가족을 합승시켰다가 나중에 2인조 강도로 돌변했다는 이야기, 고장을 핑계로 외딴곳에 차를 세워두고 미리 기다리던 친구들과 승객을 약탈한 이야기. 지금 우리는 범죄의 관점에서 매우 전형적인 상황에 처해 있다. 불이 있는 식당은 따뜻했고 향기는 눈물이 쏙 나올 만큼 반가웠다. 방안에 침낭을 펴면서도 그저 감사한 마음뿐이었다.
“우리 강아지 고생 많아.”
그런데 그림 속 하얀 집에 들어와 있기는 아이도 마찬가지인 듯 했다. 고무팩을 소중하게 끌어안으며 이렇게 웅얼거렸다.“아, 따뜻하다. 이게 어디야.”
소박한 숙소에 들었다. 우리가 머문 방에는 더블베드와 그 머리맡에 작은 창문이 하나 있었다. 그게 다였다 그러나 작은 창문으로는 충분한 볕과 아이들 뛰어 노는 소리가 기분 좋게 흘러들었다. 투숙객은 우리 외에 거의 없었다. 문을 열 때마다 마주치는 것은, 밤낮으로 청소하고 또 청소하는 아주머니의 성실한 얼굴이었다. 아주 먼 덕분에 공용화장실에는 얼룩 한 점 없었다. 샤워기를 틀어놓으면 뜨거운 물이 펑펑 쏟아졌다. 문이 잠기지 않아 누군가 들어올까. 밖에서 여러 명이 기다릴까. 뜨거운 물이 찬물로 바꾸지 않을까 혹은 감자기 물이 안 나오지 않을까 하는 근심 없이 청결한 화장실을 홀로 차지하고 샤워를 할 때면 불과 며칠 전 30명이 함께 쓰던 변기에서 오렌지를 꺼냈던 기억은 참으로 멀게 느껴졌다. 방문을 열면 창문에서 변함없이 환한 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고 침대 곁에는 더러운 여행 가방이 놓여 있었는데 그러면 ‘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넘치는 것도 모자란 것도 없이, 나의 생은 거기 그대로 멈춰도 좋을 것만 같았다. 가장 이상적인 공간이라는 것은 결국 소두자의 방처럼 검박하고 단순한 얼굴을 하고 있다. 침대 하나와 가방 하나. 그리고 세상과 통하는 창문 하나. 그 방에 들어서서 한쪽 구서에 낡을 대로 낡은 운동활ㄹ 벗어놓으면 그늘로 얼룩진 어른들의 삶에는 좀처럼 들어오지 않는 단어 ‘진정성’이란 단어가 뜨거운 찻물처럼 가슴에 스며들었다. 신선한 아보카드를 으깨 얹은 방과 진한 커피는 잘 어울렸다. 식사를 한 뒤에는 서로 계산을 하겠다고 우겨 작은 다툼이 일었다. 알레가 이겼다. 영화관을 지나고 미술관도 지나갔다. 최대한의 시간을 함께 보내기 위해 애썼다. 남은 아쉬움을 길 위에ㅐ 털어내려는 듯 걷고 또 걸었다. 뭐랄까. 두 손을 호주머니에 넣고 걸을 때조차 서로의 간격 사이로 애틋한 가족에 같은 것이 흘렀다. 이 가족은 매우 특별한 가족이다. 집을 떠나서야 만날 수 있는 가족, 친하게 만나고 곧 헤어져버리는 가족. 그런데 이 가족들은 지구 어디에서나 서로 다는 인종의 얼굴을 하소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면서 숱하게 만날 수 있다. 그래서 한 번의 떠남이 소중하고 한 명의 사람이 소중하고 한 번의 난마이 소중해진다. 떠남을 계속하는 것이 소중해진다. 우리는 함께 있으면서도 이미 서로를 그리워하는 걸음을 느릿느릿 내디뎠다.
집 떠나는 누나가 동생에게 막내를 부탁하듯 먼저 말했다.
“알레, 곤잘로를 잘 돌봐줘‘”
알레는 오랜 친구의 눈물을 멈추게 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싫어! 절대! 다른 사람은 몰라도 곤잘로는 감당 안 돼!”
우리는 모두 크게 웃었다. 남반구의 초화창한 본말 오후였다.
“우리 집은 재테크를 할 필요가 없다니까. 이렇게 여행만 한 번 다녀오면 도는 게 좋다고 하니 말이야.”
아이가 세달 만에 가장 먹고 싶어한 한식은 돼지갈비였다. 대충 들어간 식당에서 남편이 형편없는 고기 맛에 대해 투덜거렸다. 아이와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남편을 쳐다보았다. 남미에서 음식 주문은 모험이었다. 스페인어가 형편없었으므로 예상과 빗나가거나 엉뚱한 음식이 나오기 다반사였다. 하지만 어떻게든 먹었다. 우리의 입은 겸손해졌다. 그래서 동시에 남편에게 말했다.
“괜찮아. 주문한 음식이 제대로 나왔잖아!”중빈은 학교로 돌아가
빼먹은 수업과 우정을 보충하느라 분주했다. 아이들은 교실 책꽂이에 꽂힌 중빈의 여행기를 돌려 읽으며 함께 남미를 여행했다. 여행기는 다음과 같이 끝을 맺었다.
“여행이 끝나간다. 지금까지 중에서 제일 길고 재밌고 새롭고 환상적인 여행이었다. 새로운 경험과 친구들과 장소가 지금 내 머릿속에서 떠오르고 폭탄처럼 터지기도 한다. 이런 저런 느낌이 너무 많아서 다 표현할 수 없다. 금 7톤으로 코팅된 교회에 앉아 있을 때는 잠이 확 깨며 바로 옆에 번개가 친 것 같았다. 아구아수 폭포 옆에서는 전기가 물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 같았다. 나한테 바이올린을 배우는 애들을 보며 자랑스러웠다. 나도 세상을 보고 기억으로 가져가지만, 나도 세상에게 줄 수 있는 게 있어서 좋다.”
나는 한동안 집이 어색했다. 공간을 나눠 쓰고 소유하지 않던 시간들. 천천히 일상에 합류한다. 지금 세 달 간의 거친 여행으로 담금질된 순수와 담백의 흰 옷을 입은 채, 나는 망설인다. 핸드폰 충전기를 찾고 옷을 갈아 입어야하는 순간을 맞아. 가진 게 너무 많은 옷장 앞에서 순수와 담백(욕심 없는 깨끗한 마음)의 흰 옷을 대신할 옷을 골라내지 못하여 한숨을 쉰다. 그 더럽거나 깨끗했던 화장실과 맛있거나 맛없었던 음식들과 비좁거나 널찍했던 방들, 그 안팎에서 무조건적으로 포옹하고 입 맞췄던 사람들. 내가 지닌 것이 가방 하나뿐이어서 나는 그렇게 많이 끌어안고 입 맞출 수 있었다. 아디오스(스페인어로 작별인사. 안녕!) 가방 하나에 가득했던 순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