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노무현과 황금심의 묘소
이원우
그제는 주일(主日)이었다. 성당 미사 참예(參詣) 못 한 지도 몇 주 지났으니, 참으로 답답함을 느꼈다. 이재현은 절망하며 중얼거렸다. 하느님도 ‘코로나19’가 내린 금족령(禁足令)을 어쩔 수 없으신 모양이구나. 그분이 현존을 증명해 보이셨으면….
그는 아침 뉴스를 틀었다. 모든 방송이 ‘코로나 19’ 상황을 내보내고 있다. 신음 소리가 절로 터져 나온다. 이러다가는 나까지?
하지만 별로 두려움은 없다. 웬만큼 살았다는 만족감을 가진 지 오래니까. 이제 이것도 하나의 타성(惰性)으로 굳어졌는가 싶었다.
그런데 텔레비전 채널이 갑자기 자동으로 바뀌는 게 아닌가? 24번에서 111번으로. 제목을 얼핏 보니 ‘황금동’이다.
아내에게 왜 저런지 물어 볼 수밖에. 아내는 웃으며 대답한다. 막내 손자가 예약을 해 놓은 모양이라고. 100 이상 올라가면 시도 때도 없이 만화 프로를 내보내는데, 녀석이 무심결에 111에 맞춰 놓았다는 거다. 그러곤 아내는 거실로 나가 하던 일을 계속한다.
그런데 다음 순간 이재현은 자신도 모르게 고함을 지르고 말았다.
“와, 이럴 수가. 드디어 오늘 갈 데가 생겼다!”
소리가 좀 컸던지 아내와 딸 내외가 소스라치게 놀란 표정으로 달려왔다. 셋 다 눈이 동그랗다. 그는 약간 겸연쩍은 표정으로 텔레비전 화면을 가리켰다. 아내가 까닭을 몰라 어리둥절해 한다. 딸도 마찬가지. 한참 뒤 사위가 던지는 말이다.
“‘황금동’은 111번에서 방영하는, 중국 멤버인 레이가 주연 판타지 수사물(搜査物)이에요.”
“그건 아무래도 좋네, 이보게. 황금동이라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어.”
“누구신데요?”
“황금심 가수야. 그분 가수 데뷔 전 이름이 황금동이었어. 자네와 함께도 가 봤잖은가? 천주교공원묘원 말일세. 남편 고복수 가수와, 먼저 간 그들의 아들도 가까이 잠든 곳.”
그러고는 황금심 아니 황금동(호적 이름/ 천주교 본명은 마리아) 내외의 가족 묘소(묘원)를 찾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준비라 해 봤자 <가톨릭 기도서>와 <복음 성가집>, 간단한 음향기기 등이다.
‘부창부수(夫唱婦隨)’란 헛말이 아닌 모양이다. 아내 배차선도 어느새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매만지고 있으니까 하는 말이다. 성당 미사를 중단한 상태라 딸은 집에 있겠다는데, 사위는 묘소 참배를 같이 하겠단다. 그럴 때 사위가 더 좋다. 물론 손자 둘은 집에 남기로 했고.
이윽고 집을 나섰다. 아내가 묻는다.
“두 분 묘소 참배 얼마 만이지요?”
“지난 가을이었으니, 다섯 달쯤 되는 것 같아. 재작년 겨울에는 영하 19도 되는 날 박 서방과 가서 많이 떨었어. 황병기 가야금 명인(名人) 산소에도 들렀었지.”
“그땐 몸이라도 괜찮지 않았어요? 당신 회전근개파열과 오십견 수술받은 지 겨우 다섯 달이고. 운전도 오랜만에 하는데 말이에요. 박 서방한테 운전 맡기세요.””
“천주교공원묘원 구석구석에 포장이 되어 있어 괜찮아. 지형도 내가 제일 잘 알아. 왕복 두 시간이면 족해. 그리고 내 차는 내가 몰아야 해요. 운전 면허 얻은 지 10년 넘었으니, 베테랑이야, 허허.”
아내도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날씨는 좋았다. 이윽고 공원묘원 입구에 차가 닿았다. 꽃가게 몇 군데가 눈에 들어왔는데, 이재현은 단골인 ‘백합화 꽃집’이란 현판이 걸린 집의 문을 밀치고 들어선다. 주인아주머니와 아주 자연스럽게 인사가 오갔다. 여섯 달 가까운 시일이 흘렀다는 둥, 코로나 바람에 장사가 잘 안 되어 어쩌느냐는 둥….아닌 게 아니라 평소와는 달리 주인아주머니는 울상을 짓는다. 이재현은 위로의 말을 건넸다.
“자, 3만 원 짜리 꽃다발 세 개만 만들어 주세요.”
“정말 감사합니다. 오늘은 더 이상 안 팔릴지도 모르겠습니다.”
묘원 관리 사무실에 들러 부산이 고향인 은기택 팀장에게 따뜻한 인사를 하고 곧장 차를 몰았다.
셋은 저 유명한 황병기 가야금 명인 묘소부터 찾았다. 몇 년 전 선종(善終)한, 한말숙 원로 작가의 남편이다. 거기서 셋은 묵주기도를 바치고 복음 성가 ‘살아 계신 주’를 봉헌했다. 주 하느님 (개신교는 ‘하나님’) 외아들(개신교 ‘독생자’) 예수/ 날 위하여 오시었네/ 내 모든 죄 다 사하시고/ 무덤에서 부활하시 나의 구세주/ 살아 계신 주 나의 참된 소망/ 걱정 근심 전혀 없네/ 사랑의 주 내 갈 길 인도하니/ 내 모든 삶의 기쁨 늘 충만하네…
이현재가 입을 열었다.
“정말 잊을 수 없는 복음 성가야. 오늘 따라 신상옥 안드레아 형제가 생각나네. 그의 테이프를 통해 내가 그걸 배웠잖아? 그걸 내가 다시 복음성가를 부천의 개신교 ‘경찰방송’에서 봉헌하다니 그게 은혜요 은총이야. 같은 주님이신데, 그분을 믿는 신자들 간에 반목이 있으니 서글퍼.”
다음은 가까운 곳에 있는 최희준 가수. 그 앞에 서서 ‘살아 계신 주’를 어찌 빼놓을 수 있으랴. 셋은 서로 미소를 주고받은 뒤에 같이 ‘맨발의 청춘’과 ‘하숙생’도 열창(?)했다.
그리고 다섯은 곧장 황금심 ‧ 고복수 내외의 묘 앞에 섰다. 마지막 남은 꽃다발을 놓고 향까지 피웠다. 묵주 기도 ‘환희의 신비’를 봉헌하는 가운데, ‘살아 계신 주’와 ‘주 날개 밑을’부르려니 목이 멨다. 그럴 만한 특별한 사연이 있어서다.
참, 거긴 가족 묘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동남아를 강타한 쓰나미에 휩쓸려 목숨을 잃은 아들 고병준의 묘소도 있다.
자리를 깔고 넷은 앉았다. 갖고 간 과일이며 과자 통닭 들을 놓고 소주를 따르곤 큰절을 했다. 그러자 이현재가 고복수의 ‘타향살이’ 노래비 앞에 서더니 음향기기를 조작하고 미리 만들어온 MR 반주를 재생시키는 게 아닌가! 전주(前奏)가 일정 부분 나오자 그가 목소릴 높인다. 타향살이 몇 해던가 손꼽아 헤어 보니/ 고향 떠난 십여 년에 청춘만 늙었소// 부평 같은 내 신세가 혼자도 기막혀서/ 창문 열고 바라보니 하늘은 저쪽// 고향 앞에 버드나무 올봄도 푸르련만/ 호드기를 꺾어 불던 그 때가 옛날…
그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타관에 온 지 십 년이기 때문이다. 부산에서 여기저기 노인학교에 수업을 다니면서, 그 많은 노인 학생들과 목이 메던 노래였으니까, 어찌 보면 당연한 눈물이다. 잔디위로 떨어지지 않는 게 되레 이상했다고 하자.
손수건으로 눈가를 슬쩍 훔친 그가 입을 열었다.
“오늘의 백미(?)를 내가 연출하려 해. 여보, 당신은 황금심 선생님의 ‘낙화유정’이란 곡을 알겠지? 우선 그걸 내가 불러볼게. 부창부수요.”
낙화 유정 뒷골목에 누구를 찾아/ 정든 고향 다 버리고 흘러온 타향/ 하룻밤 풋사랑을 화투장에 점을 치니/ 내도 날짜 애태우며 내도 날짜 애태우며/ 기다리는 여자라오// 칠보단장 베갯머리 나란히 누워/ 없는 정도 있는 듯이 아양을 떨며/ 하룻밤 풋사람에 잘난 돈과 못난 돈에/ 짓밟히고 괄시받는 짓밟히고 괄시받는/ 나의 팔자 누가 알랴…
한숨을 돌리는 겸 잠시 쉬는 사이 아내가 묻는다. ‘내도’ 날짜라니 내도가 틀린 게 아니냐고. 화투 치는 화류계 여성이라면, 당연히 ‘2월 매조(梅鳥)’가 맞을 거라고. 하지만 이현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처음엔 그랬을지 모르지만, ‘매조’는 일본말 찌꺼기라 ‘내도(來到)’로 바뀌었다며. ‘내도’는 소설가협회 김호운 이사장의 유권 해석이기도 하지만, 우리만 사전에도 나와 있는 말이라고 덧붙였다. 누가 어떤 지점에 와 닿는 거라나?
그 다음에 그의 입 밖으로 흘러나온 노래는 사위로서는 예상 밖이었다. 서울의 어느 스튜디오에서 역시 MR로 만들어 온 반주에 맞추어 그가 목소리를 높였는데…. 까마득히 내려다보이는 사무실 근처에서 방금 차에서 내린 참배객이 고개를 든다. 나아가 그들은 뜻밖에도 손을 흔들었다. 다시 재생시켜 들어보자.
꿈이었다고 생각하기엔 너무나도 아쉬움 남아/ 가슴 태우며 기다리기엔 너무나도 멀이진 그대/ 사랑했던 마음도 미워했던 마음도/허공 속에 묻어야만 할 슬픈 옛이야기/스쳐버린 그날들 잊어야말 그날들/ 허공 속에 묻힐 그날들// 잊는다고 생각하기엔 너무나도 미련이 남아/돌아선 마음 달래보기엔 너무나도 멀어진 그대/ 설레-던 마음도 기다리던 마음도/ 허공 속애 묻어야만 될 슬픈 옛 이야기/스쳐버린 그 약속 잊어야 할 그 약속/허공 속에 묻힐 그 약속
조용필의 ‘허공’이다. 그의 목소리는 그야말로 거침없는 절창으로 변환되어, 바람결에 실려 낙하(落下)했다. 드넓고 높낮이가 이어진 천주교 공원묘원이, 궁창(穹蒼) 밑에서 긴 침묵에 빠졌다고 엎드렸다고 해야 하나? 마침내 이재현은 그야말로 정색을 하고 말했다.
“노무현과 내가 불렀었던 ‘허공’이야. 동향인(同鄕人)인, 한 살 위인 정풍송 선생이 가사를 짓고 곡을 붙인….‘허공’은 공전의 히트곡이고말고. ‘작사 정욱’과 작곡가 정풍송은 같은 사람이야. 주제가 민주화라는 데에서 우리 모두로 하여금 깊은 상념에 젖어들게 한다고 해야겠지.”
배차선과 사위는 침묵을 지킬 수밖에. 이현재는 곧이어 폭탄선언이라도 쏟아낼 듯이 너무나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더니, 다물었던 입을 열었다.
“4월 15일이 21대 국회의원 선거 날이잖아? 보름 남짓이면 투표를 해야지. 나는 이맘때면 언제나 몸살을 앓아. 2000년 4월 13일 16대 국회의원 선거 때로 되돌아가 보자구. 그로부터 20년이야. 16 ‧ 17 ‧ 18 ‧ 19 ‧ 20대에 이어 보름 남짓 지나면, 21대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지지 않아? 모니카, 당신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으니 한 귀로 흘리면 되고 말이야.”
아래에 재구성하여 옮기는 것은 고복수 ‧ 황금심 묘소 앞에서 이현재가 한 이야기다.
그는 뜻밖에 너무나 뜻밖에도 먼저 노무현 이름 석 자를 들먹였다.
“‘노무현’이 반드시 들어가야 ‘20년 역사’가 증명이 돼. 노무현과 ‘허공’을 부른 적이 있거든? 거기에다 알파도 덧붙이고. 허태열도 등장해. 지금 여당대표인 이해찬 당시 교육부장관도 둘의 대화에 끼어들었어. 아 참, 제목을 하나 잡기로 하지. ‘노무현과 황금심의 묘소’….어때, 그럴싸해?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냐는 의미야.”
1999년 9월 1일에 이재현은 부산시 강서구 가락 초등학교 처음 교장으로 발령을 받는다. 크나큰 애로 사항은 자기 승용차가 없는 데다 운전을 할 줄 모른다는 것. 하는 수 없이 버스를 타고 나와, 도중에서 다른 직원의 승용차에 편승해야만 했다. 그만큼 힘들었다는 얘기다. 어느 날, 부산중고등학교 동창회 사무실에서 전화가 왔다. 사무국장이었다.
“선배님, 허태열 동창을 아십니까?”
“글쎄, 들어 본 이름 같기도 하고. 누구지?”
“17회입니다. 선배님의 3회 후배입니다. 16대 국회의원에 출마할 겁니다, 북강서을 선거구에….형님의 무료 노인학교가 게리맨더링 적용을 받고 있어서, 그곳에서 이야기할 시간을 얻고 싶어 합니다. 행정고시 출신이고 서른아홉 살에 충북지사를 지낸….며칠 지나면 그분이 선배님을 찾아뵙겠다고 하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나는 환영이오. 내 노인 학교야 토요일 오후라, 내가 교육 공무원이지만 남들로부터 이래라 저래라 간섭을 안 받아요.”
게리맨더링? 사무국장과의 통화 중 그걸 설명했으나 아리송했다. 그래 노인학교에 두서너 번 봉사 활동을 한, 이동형 부장에게 물어 보기로 했다. 그의 대답이 이랬다.
“노인학교 주소가 덕천 1동(경로당 2층)이지 않습니까? 그곳은 북 강서갑 선거구입니다. 그런데, 교장 선생님의 노인학교에는 여기 강서구에서도 많은 노인 학생들이 출석하는 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상당수의 학생은 화명 1 ‧2‧ 3동과 금곡동에 거주하는 분들이지요. 매주 토요일 오후 170명이 모인다면, ‘북 강서 갑’에 주소를 둔 쪽과 ‘북 강서 을’ 쪽을 비교해 보면 반반이 될 겁니다. 그야말로 기가 막히는 곳에 노인 학교가 위치하고 있다는 결론이지요.”
이동형 부장이 나가고 난 뒤 이재현 교장은 혼자서 생각에 잠겼다. 자신의 노인학교엔 구포 1 ‧ 2 ‧ 동, 만덕 1 ‧ 2 ‧ 동, 덕천 1 ‧ 2 ‧ 동 등 ‘북 강서 갑’ 지역구 노인 학생들과, 비슷한 수의 ‘북 강서 을’ 지역구 노인 학생들이 출석한다? 뭐 게리맨더링이라니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이미 ‘북 강서 을’ 출신 정형근 의원은 이미 노인학교에 몇 번이나 다녀간 터다.
어쨌든 며칠이 지난 뒤 허태열이 교장실로 이재현을 찾아왔다. 그는 노크를 하고 혼자서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서는 허리를 굽힐 대로 굽혀 선배인 이재현에게 예를 표했다, 수행하는 이도 없이 말이다. 물론 운전기사와 비서는 승용차 안에서 기다리는 눈치였고.
“허태열이라고 합니다, 교장선생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굉장하시던데요?”
“원 별 말씀을 하십니다. 부족합니다. 앞으로 형님이라 부르도록 양해해 주시지요.”
이재현 교장이 약간은 의외라 여겨 답을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로써 호칭은 ‘형님’으로 양해된 셈이다. 그는 물론 허태열을 위원장이라 부르기로 했고말고. 노무현과의 일전(一戰)임은 입에 올려 강조할 필요가 없었다.
허태열은 겸손했다. 하기야 표가 필요한데, ‘형님’ 이상의 대접이 어디 있겠는가? 허태열은 상대 노무현 후보를 깎아 내리지도 않았다. 정작 실언(?)은 이재현의 입에서 터져 나왔으니, 그로 말미암아 둘이 같이 배꼽을 잡았다. 그의 말이다.
“교직 사회에서 이회(해)창이 여론이 굉장히 안 좋아요.”
“아니, 형님. 우리 당 총재님을 그렇게 욕하십니까?”
“아, 미안합니다. 이회창이 아니고 이해찬을 말하는 겁니다. 그가 장관으로 오는 바람에 대학의 교원들은 65세 정년 그대론데, 초 중등학교는 62세로 낮춰졌습니다. 빨리 되돌려야 합니다.”
“형님, 깜짝 놀랐잖아요? 하기야 이름을 부르려면 경상도 분은 힘듦을 느끼지요. 이회창과 이해찬. 하하.”
이재현은 부산 중고등학교의 두 해 선배인 B 시의회 부회장한테서 많은 걸 배워 오던 중이어서, 그 덕분에 허태열과의 기싸움(?)에서 상당히 깊은 인상을 주었으리라. B부의장의 지론은 이랬으니까.
어떤 교장이 있다 하자. 어느 날 그를 교육장이 찾아왔다면, 교장석을 양보하지 않는다. 물론 뭔가를 아는 교육장이라 치자. 그 교육장도 교장석에 앉지 않는다. 교육감이나 교육부 장관이라도 마찬가지. 구청장이 동장석에 시장이 구청장석에 앉는 것은 상례이지만, 교장석은 오직 교장만이 것이다. 한데 그런 실랑이(?)를 차단하려는 속셈에서 이재현은 부임하는 날, 교장석 자체를 아예 없애버렸으니, 그날 무언중에서도 허태열은 뭔가를 느꼈으리라.
하여튼 4월 첫째 주 월요일 아침이었다. 강서노인학교로부터 전화가 온 것이다. 프로야구 감독 강병철의 춘부장 강종수 어른이었다(아흔이 가까운데도 대저초등학교 동창회 회장을 맡고 있었다.). 다가오는 목요일 열 시에 노인학교에 좀 나와 줄 수 있느냐는 거였다. 별다른 일정이 없어 그러겠다고 대답하며 무슨 일이야고 반문하였다.
“노인학교 개학(강)식이야. 강사 대표로 당신을 초청했어. 이왕이면 수업도 좀 하고 말이야. 허태열과 노무현이 참석하니까, 와서 멋진 시간을 이끌어 줬으면 좋겠어.”
여기서 잠깐 강서 노인학교와의 인연을 좀 소개해야겠다. 이재현이 초임 교감 발령을 대저초등학교에 받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점잖은 차림의 노인들이 대여섯 학교로 이재현을 만나러 왔다. 이재현이 자신의 무료 노인학교를 6년째 운영해 왔을 즈음이었다. <경향신문>이며 <부산일보> <국제신문>, 부산 MBC-TV, KBS-TV 등에 소개되었었던 자료를 그들은 갖고 있었다. 매주 목요일 오후 두 시부터 한 시간씩 노인학교에 와서 노래(주로 민요)를 지도해 달라는 게 아닌가! 학교장의 허락이 나야 한다니 그건 자기들이 책임지겠단다.
눈치를 보니 이미 교장실에 갔다 온 느낌을 주기도 했다. 그래서 자신의 노인학교 운영도 버거운데, 강서노인학교에 수업을 가외로 또 한 시간을 맡게 되었던 것. 꼬박 2년 반 동안 그렇게 강서노인학교에 거의 빠지지 않고 걸음을 했고 목청을 드높였었던 터였는데, 6년 뒤에 또 강서구 가락초등학교장으로 부임했던 것. 이게 바로 시쳇말로 운명의 장난? 그쯤 해 두자.
어쨌든 이재현은 두어 주일에 한 번은 거기에 나갔었던 거다. 포복절도할 사건 하나가 섬광처럼 머리에 떠올랐다. 이재현은 대저초등학교에서 2년 반 있다가 멀리 부암초등학교로 옮기게 되었었다. 이임 인사를 하러 노인학교에 갔더니 강종수 회장 왈
“너 나쁜 놈이잖아? 교장 승진할 때까지 대저초등학교에 있기로 철석같이 약속해 놓고서….여기 노인학교 수업을 어쩌라고?”
욕지거리를 그분이 퍼부어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끔찍이 생각해 주는 마음씨가 눈물겨웠다는 게 정직한 표현이리라.
하여튼 이재현은 근무상황부에 ‘출장’ 이라 기록해 놓고 택시를 하나 어렵사리 불러 강서 노인학교로 부리나케 달려갔다. 이럴 때의 ‘기록’은 참으로 중요하다. 만약에 도중에 어떤 사고라도 난다고 치자. 무단 이석이 되기 때문이다.
이재현이 교실로 들어갔을 때,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졌다. 함성의 크기가 이만저만 아니었고. 교실 안을 쩌렁쩌렁 린 연호 또 연호. 이재현! 이재현! 이재현 !
강서구청 관내 어지간한 기관장들이 다 모여 있었다. 구의회 의장과 의원 등도…. 놀랍게도 구청장 바로 옆에 이재현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 밑으로 몇몇 동장들이 앉았고.
항상 그래왔듯이 개학식은 국민의례부터 시작했다. 이재현이 지휘봉을 들었음은 물론이고, 애국가 선창(先唱)까지 했다. 애국가를 노인학교에서는 4절까지다. 노인 학생들은 끝까지 따라 부르는데, 정작 기관장이나 내빈들은 갈수록 입모양부터 안 바르다. 그는 웃었다.
이윽고 식이 끝났다. 사무국장이 몇 가지 연락 사항을 전하는 가운데, 허태열을 비롯한 몇몇이서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앞을 지나는 지나며 허태열이 하는 인사말, 큰 소리로!
“형님, 바빠서 먼저 갑니다. 형님 역시 인기 대단하시군요. 오늘 수업 잘하십시오. 그리고 이번 주 토요일엔 형님의 덕성토요노인대학에 들르겠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노무현은 이재현이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그저 환갑을 앞둔 초로(初老)? 뭐 그 정도로 짐작됐겠지. 그는 속으로 그랬으리라. 허태열이 형님이라 부르다니 뭔가 심상찮은(?) 인연쯤은 있겠군 그래. 하기야 아까 내빈 소개할 때 초등학교 교장이라 했으렷다? 그래 두고 보는 수밖에,
드디어 수업이 시작되었다. 이재현인들 어찌 긴장하지 않을 수 있으랴. 천하의 노무현 앞이 아닌가 말이다. 하지만 그는 부르짖다시피 이 말부터 쏟아내었다.
“승진 발령받은 지 벌써 여섯 달이 지났군요. 여러분과 어깨동무를 하고 지낸 생활을 합하면, 교감 시절이 2년 반이니 모두 3년입니다. 우리 가락초등학교 학구 내 경로당은 다 들러본다는 계획이었는데, 어찌 그게 제대로 안 됐습니다. 미안합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반응이 튀어나왔다. 아이고, 고마바라. 학교 일도 정신없을 텐데 노인까지 챙긴다면 빨리 늙습니데이. 덕성토요노인대학 일도 바쁘고 힘찬데….오기는 한 번 오이소!
이재현이 말을 이어 받았다.
“둔치도 경로당에 십 원짜리 고스톱을 치러간다고 약속했잖습니까? 학년도 초 바쁜 일만 끝나면 갈게요. 우리 학교 분교장(分敎場)이 있는 덴데….”
다시 박수가 터졌다. 여기저기서 노래 한 곡 부르라는 성화다.
이재현이 답한다. 낙화유정 뒷골목에 누구를 찾아/ 정든 고향 다 버리고 흘러 온 타향/ 하룻밤 풋사랑을 화투장에 점을 치며…
2절까지 구성지게 ‘낙화유정’을 쏟아낸 이재현이 말을 이어나가는데 기가 막힌다.
“부산중학교라면 영남 최고의 명문이지요. 조금 전 나간 허태열 후보는 그 중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저는 중학교만 거기 나왔습니다. 중학교 3학년 때 가라는 학교에 안 가고, 나쁜 친구들과 어울려 2본 동시 상영을 하는 3류 극장에 드나들었습니다. 마침내 덜미가 잡혀, 고향 밀양군 단장면 국전리에 유배(?)되었는데….말이 재수지 밤이면 밤마다 노래를 불렀습니다. 낮에도 마찬가지. 그때 유행하던 노래가 황금심의 ‘낙화유정’이었지요. 경주 이 씨 집성촌, 마흔 호 가까이 마을을 이루고 있었어요. 일가들이니까 처녀 총각들이 모이기만 하면 민화투나 ‘육백’도 쳤습니다. 황금심의 먼 질녀 되는 사람이 시집을 왔어요. 그때는 신부에게 노래도 시키고 이것저것 묻고 했지요. 그 형수가 어찌나 ‘삼다도 소식’과 ‘낙화유정’을 멋지게 불렀던지….저는 노인들과 고스톱을 치면서 이 노래를 계속 부릅니다.”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찮은 걸 노무현도 눈치 챈 모양이다. 이재현의 괴짜 행색이 드러나는 순간이었으니까. 어느 노인 학생 간부가 말했다.
“허태열 후보가 교장 선생님 보고 형님이라 부릅디다. 언제부터 호형호제하는 사이입니까?”
“제가 세 살이나 많으니 호형호제(呼兄呼弟)란 말은 맞지 않습니다. 그건 한 살 차이쯤 날 때, 서로 상대를 존경하거나 자신을 낮추기 위해 쓰는 말이지요. 저는 허태열 후보를 형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허태열 후보도 저를 절대 아우라 할 수 없지요. 만약 허태열 후보와 노무현 후보가 절친하다면, 나이가 비슷하니 호형호제할 수 있겠지요. 노래 한 곡 더 부를까요?”
학생들은 좀 어리둥절해 했다. 더러는 혼란에 빠지기도 했으리라. 답을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가락초등학교 바로 앞 죽림동에서 자라탕 전문점을 하는 최고령 구(具) 씨 할머니는 일어서서 박수를 보냈다. 이재현의 말이다.
“노무현 후보님의 애창곡이 더러 있는 줄 압니다. ‘외나무다리’와 ‘허공’ 등등. 나머지는 생략합니다. 자 우선 제가 그 '허공'을 부르겠습니다. 노무현 후보님이 도와주시겠지요, 아니 2절은 노무현 후보님이 부르고 제가 도와드리지요.”
꿈이었다고 생각하기엔 너무나도 아쉬움 남아/ 가슴 태우며 기다리기엔 너무나도 멀어진 그대……
노무현은 노래보다 춤을 택했다. 하기야 이재현이 낸 첫 음을 따라 부르다가는 도중에 무리가 갈 거란 예감에서였는지 모르지만….끝날 때까지 노무현은 춤을 추었다. 어색해 보이는 그의 ‘관광 춤’이 자신에게 감표 요인이 되지는 않았으리라. 2절까지 끝나고 난 뒤, 학생들이 그에게 청한 곡은 ‘외나무다리’였다. ‘임을 위한 행진곡’? 노인 학생들 앞에서 그런 걸 선보였다간 마구 표가 날아갔으리라. 하여튼 그의 노래 솜씨는 그런 대로 괜찮았다.
하여튼 열기가 조금은 뜨거워졌다. 한 번 발동이 걸리면, 언제나처럼 이재현이 좌중의 분위기를 휘어잡는다. 그게 수백 추천 번에 걸쳐 이루어진 불문율의 산물이기도 하다. 부여된 시간은 40분. 이재현은 노래를 바꾸어 열창했다. 하나 더 예를 들자. 제주도 민요, ‘너영나영타령’이다. 노인 학생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신작로 복판에 택시가 놀고요/ 택시 복판에 신랑신부 논다/ 나냐 너냐 두리둥실 안고요/ 낮이 낮이나 밤이 밤이나 참사람이로구나// 물 길러 간다고 술 걸러 이고요 오동나무 수풀 속에 임 찾아간다/나냐 너냐 두리둥실 놀고요/ 낮이 낮이나 밤이 밤이나 참사랑이로구나
노인 학생들의 목소리는 여기 잘못 옮겨 적었다. 그 시절 그들은 거의 모두 ‘택시’라 하지 않고 일본말 ‘하이야’를 동원시키는 거다. 거의 백 퍼센트 그렇다.
거의 수업이 끝날 무렵이었다. 어느 노인 학생이 손을 든 것이다. 그리고 하는 말
“허태열 후보는 우리 선생님 보고 형님이라 부르던데, 노 후보님은 그랄 수 없겠능교?”
정적이 흐르는가 싶었는데 순간 그건 깨어졌다. 많은 표가 자칫하면 날아갈 절체절명의 순간인데 그걸 마다할 만큼 어리석은 노무현이 아니었다. 귀엣말의 흉내를 냈지만 들릴락 말락 할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크기로 그는, 이재현에게 정겨운 한마디를 던졌다. 혀 ㅇ님.
선거에까지는 많은 일화가 있었다. 명덕초등학교 운동장에서 허태열의 유세가 있었다. 그가 단상에서 열변을 토하는데, 가까이 서서 듣고 있던 이재현 옆에 정형근이 다가왔다. 그냥 성원 차 온 거다. 정형근이 이재현에게 말했다.
“학장님, 저 친구, 너무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내용을 거침없이 토해 내는 것 같습니다.”
“…….”
화명동 시영 아파트에 노인 학생들이 워낙 많이 산다. 그들이 몇몇 둘 가까이 달려오더니 알은체를 했다. 키가 작지만 야무지고 아름다운 정형근의 부인도 한데 어울려 담소를 나누었다.
이튿날 밤이었을 거다. 노무현의 저녁 유세가 있었던 것은. 이재현이 사는 금곡동 한솔 아파트 근처의 어린이 놀이터에서였다. 노무현은 허태열과 연설 내용에 있어서 그 간극이 컸다. 지역감정은 망국(亡國)의 길임을 강조했다. 역시 시영 아파트의 노인 학생들이 두서넛 이재현을 둘러싸고 있었다. 끝나고 나서 그가 노무현 가까이 갈 수밖에. 한마디씩 서로에게 던졌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노무현 후보님.”
“아! 학장님, 아니 혀ㅇ님….”
여기서 세 음절의 정확한 표기는 상상에 맡기자.
선거는 허태열의 승리로 끝났다. 허태열 53.22%: 노무현 35.69%!허태열이 노무현을 거의 압도했던 것이다.
그런 뒤 이재현과 허태열은 급속도로 가까워지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부산중고등학교 동창회에 이재현도 가입하게 되고, 허태열은 어김없이 거기에 참석했기 때문이다. 만날 때마다 허태열은 이재현을 형님이라 깍듯이 불렀다. 동창회는 강서구와 북구 동창회를 합동해서 열기도 했다. 그 ‘형님’을 더 강조해 무슨 소용이랴! 여담이다. 부산중학교만 졸업한 이재현은 나중에 부산중고등학교 북구 동창회장까지 맡게 된다.
명덕초등학교장으로 자리를 옮긴 이재현이 퇴임하기 전까지만 해도, 여전히 그는 북구 관내의 여러 기지 일에 관여하고 있었다. 북구 문인협회도 창설하여 회장에 취임하고, 이윽고 북구문화예술인협회장이라는 중책도 짊어진다. 덕성토요노인대학의 졸업식이나 정기 학예발표회도 북구청 대회의실에서 열곤 했다. 북구 민속 예술제에도 관여해, 경찰악대에 반주에 맞춰 가곡도 불렀다. 공물(貢物) 하역 작업을 북구문화원 주최로 재현했는데, 낙동 민속보존회 여자 회원들 앞에서 상투를 틀고, 홑바지 저고리 차림으로 뱃노래 앞소리도 불렀다.
연거푸 세 번이나 당선된 허태열의 대(對) 이재현 호칭이 형님에서 선배님, 그리고 교장선생님, 학장님으로 바뀌어져갔다. 우스갯소린데, 그 중에서 이재현이 가장 듣기 좋아했던 호칭은 ‘형님’이었다. 그동안에 북 강서 갑 국회의원은 정형근에서 박민식(재선), 전재수(현) 등으로 바뀌었다. 정형근은 8년 동안 그야말로 부지런히 노인학교에 드나들었었다. 그는 노인학교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 1억 3천 9백만 원이라는 예산을 확보하여(특별교부금), 덕천 1동 경로당 2층에 조립식으로 서른네 평짜리 노인학교 공간을 마련해 주었던 것. 지금 와병 중에 있는 당시의 청장은 권익이었다. 그도 부산중고등학교 동창회 회원이었다. 정형근은 경남중 출신이었고.
이재현은 그렇게 힘든 일에 부대끼는 동안, 신병으로 말미암아 거의 식물인간에 가까울 정도로 고생하기도 했다. 그러나 기어서라도 토요일 오후엔 노인학교엔 나갔다. 그러다가 겨우 건강을 회복하고 버텨내다가 04년 8월 31일자로 정년퇴임을 한다. 44년 동안의 기나긴 교직생활의 막을 내렸던 것이다. 노인학교에 더 이상 매달릴 명분도 없어 스스로 옷을 벗었다. 만 21년! 안도의 숨을 쉬면서 그가 신음소리와 함께 뱉어낸 말은 이것이었다.
“원도 한도 없었다. 돈 관련 불상사가 말썽이 없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만약 그런 게 있었다면 21년을 견뎌내지 못했겠지. 언젠가 ‘노인학교 이야기’를 한 권의 소설로 쓴다!”
다시 세월이 흘렀다. 모든 걸 내려놓아야 할 처지에 이재현은, 다시 노인학교라는 거스를 수 없는 큰 물줄기에 휩쓸리게 된다. 천주교 부산 교구 은빛 사목지원 단장이라는, 직함을 하나 얻게 된 것이다. 그것도 노인학교 관계자들의 직접 선거에 의해 뽑힌, 거대한(?) 조직의 장이다. 부산 교구에 있는 천주교 성당 부설 노인학교의 강사를 발굴하고 지원하는 게 주된 업무다. 물론 어느 노인학교에 마침 강사가 없어 수업이 결손 될 염려가 있을 때는, 부리나케 현장으로 달려가야 했다. 밀양이나 양산까지 부산교구의 관할 내에 있는 노인학교는 가리지 않았다. 한 시간에 5만원이 강사료로 책정되어 있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사직 성당에서 열한 시에 수업을 마치고 지하철을 탄다. 구포에서 열차로 환승하여 밀양에까지 간다. 다시 택시를 이용하여 삼문동 밀양 성당 노인학교에 다다르면 엄마 아버지 봉안당에 인사를 드리고 나서, 노인학교에 내려와 밀양 아리랑을 부른다! 그러면 10만원의 수입이 생긴다. 경비를 제하고 나서 8만원을 아내의 손에 쥐어 주면 그 또한 기쁨이었고말고.
그러던 중 사범학교 동기동창 박건수 친구의 전화를 받는다.
“여보 이 교장, 당신 진영노인대학과 김해노인대학에 수업 좀 해 줘야겠소.”
“뜬금없이 무슨 소리요?”
“알다시피 내가 교직 생활은 짧게 했지만, 김해시청 공무원을 오해 했잖아?”
“그건 나도 알지.”
“지금 대한노인회 김해 지부 사무국장 일을 보고 있는데, 김해와 진영노인대학에 스타 강사가 부족해. 당신이 적임자야. 좀 도와주소. 매주 수요일 오후 두 시부터야. 60분 수업.”
이래서 이재현은 김해시의 두 노인학교에 수업을 맡게 된 거다. 근데 김해 노인학교는 김해 노인회 사무실 바로 밑 1층에 있고, 진영 노인대학은 진영대창초등학교 도로 건너편에 있다.
김해 노인회 사무실로 올라가지 전에 반드시 경로당을 거쳐야 한다. 이재현은 곧장 그 문을 열고 들어가서, 노인 학생들과 십 원짜리 고스톱에 열중하기도 했다. 동전 주머니도 하나 마련해 두고 있었다. 제 버릇 남 못 준다던가? 혼자서 그런 생각을 하고 고소를 날리기도 했다.
진영노인대학은 학생수가 1백 명이 훨씬 넘어 교실 안이 비좁다. 어느덧 일흔에 가까워진 이재현 자신으로 봐서도 남녀 학생 나이가 기껏해야 대여섯 살 위다. 비슷한 또래인들 왜 없으랴! 그 옛날 삼랑진에서 부산으로 통학할 때 안면을 익힌 듯한 남학생들도 더러 있어서, 걸쭉한 농담을 주고받기 예사였다.
진영노인대학 학생들과는 그래서 정서가 부합되었다. 제2의 고향 삼랑진에서 한림정을 지나면 바로 진영 아닌가 말이다. 그 시절의 풍속도를 다시 후지(厚紙) 위에 옮길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마저 은근히 생기는 게 아닌가.
진영이라면 단연 노무현이다. 그리고 그의 모교 대창초등학교. 당시만 해도 소읍(小邑)이었는데 그 소읍의 초등학교가, 한 대통령과 두 영부인 모교다? 그런 기가 막히는 사연을 기억하면서 수업을 했다. 물론 노래를 중심으로. 민요와 가요다. 그 즈음에는 동요 혹은 가곡은 지도하지 않았다. 삼랑진 출신 가수 남백송의 ‘방앗간 처녀’를 선보였더니, 적잖은 학생들이 따라 부르지 않는가? 이재현은 쾌재를 부르짖었다. 그들은 그야말로 혼연일체가 되었다. 분침(分針)이 한 바퀴 돌도록 수업을 하면 이재현의 온 몸에 땀이 흥건했다.
노무현과의 오랜 인연을 소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산 강서 노인학교에서 비롯된….그 리고 거기 얽히고설켰던 이야기로 그럴싸하게 포장도 했다. 자연스럽게 튀어나오는 노래가 ‘허공’이었다. ‘허공’이 그처럼 인기가 있다는 걸 비로소 절감하면서 수요일마다 거길 찾았다. 황금심의 ‘낙화유정’도 어느덧 진영노인학교 학생들의 애창곡이 되었다.
학생들은 노무현의 어린 시절이며 권양숙과의 결혼, 사법 고시 합격, 군대 생활 등을 화두에 올리더라. 물론 수업 시간이 아니라 시작되기 전이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의 장인이 빨치산에 깊숙이 관계했던 이야기를 들으며 이재현은 몸을 움찔거렸다. 그의 장인은 면사무소에 근무했었는데, 메틸알코올을 물에 희석시켜 마시다가 실명이 됐다더라. 그렇게 앞을 못 보는 그의 장인은 손바닥을 만져서 매끄러운 사람은 반동으로 취급 처형하게 했다는 것이 아닌가.
이재현은 중얼거렸다. 내 아버지는 노무현 장인보다 한 참 먼저 태어났고, 면사무소 호병계장으로 있었지만, 빨찌산으로부터 모진 곤욕을 치르지 않았던가! 노무현의 장인은 밀양농잠학교 출신이지만 내 아버지는 무학(無學)이었고.
그래도 ‘허공’은 불렀다. 워낙 학생들이 좋아했기 때문이다. 이재현은 그런 노무현의 사저(私邸)에 가고 싶지 않았다. 사범학교 동기들이 인근에 많이 살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그 일을 애써 외면한 것이다.
그런데 노무현이 부엉이 바위에서 뛰어내렸다는 급보였다. 이재현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었다.
“불효를 저질렀다. 노무현은 그의 장모에게 참척(慘慽)을 겪게 했으니….”
당장 조선일보 독자 칼럼난에 원고지 10장 분량의 잡문을 기고했더니 그게 실렸다. 청소년들이 본받으면 어쩌려고 그런 짓을 했느냐는 인생 4년 선배의 일갈이요 질타였다. 댓글이 상당수 달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노무현의 장례식 날에도 이재현과 학생들은 ‘허공’을 열창(?)했다. 그리고 독차 칼럼을 이재현이 읽고 학생들은 들었다. 그래도 이재현은 노무현의 사저에는 안 갔다. 대신 부엉이 바위에는 몇 번 올랐다. 김해 친구 넷과 함께. 저 멀리 내려다보이는 노무현의 사저 둘레에는 장번 친구가 중심이 되어 심은 장군차(將軍茶) 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그러다가 이재현 자신이 참척을 겪는다. 노무현이 아니었으면 그런 불행은 없었으리란 안타까움과 분노가 그를 휩싸고 떠나지 않는다. 동시대 같은 청천벽력을 안고 사는 부모가 자신을 비롯해 대여섯이다. 노무현을 두고 이재현이 백지 위에 그려본 부등식이 ‘애(愛)<증(憎)’에 가까울 수밖에 없는 까닭은 자명한다. 그래도 그의 지역감정 타파를 위한 노력에는 긍정한다.
20년 세월에 길몽과 흉몽이 섞여 유수(流水)가 되었다. 하필이면 올해 4월 초, 기나긴 개인사(個人史)를 회억하게 되다니….그게 설사 섭리라 해도 이재현은 너무 잔인하다는 느낌이 든다. 몸서리가 쳐진다. 듣고 있던 아내인들 어찌 눈물 아니 흘릴 수 있었으랴.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말한다. 코로나만 없었더라도, 진영노인대학에 들러 한 시간 수업을 하고, 노무현의 모교에도 들러 머물다가 와야 하는데…. 그게 앞을 가로막고 있는 거다. 4월 6일엔가 개학을 한다? 기다려 보자.
이재현의 이야기는 여기가 끝이다. 시작부터 두 시간 이상 걸렸다. 내려오다가 김수환 추기경과 노기남 대주교 묘소도 여느 때처럼 참배했다. 조금 늦었지만, 도중에 있는 식당은 외면하고 곧장 집에 가서 점심을 먹을 생각이다. 신음소리처럼 그의 입술을 타고 새어나오는 말.
“욕심을 보탠다. 진영에서 완행을 타고 삼랑진에 내려 옛집 앞을 지나 ‘오순절 평화의 마을’로 가서, 사흘을 묵었으면…. 주일에 삼랑진 성당에서, 오랜 인연이 있는 송기인 신부와 나란히 앉아 미사를 봉헌하고 말이야. 그 기회가 속절없이 날아가면 어쩐다? 아니 그런 불길한 예감 갖지 말자. 노무현의 장례식장에서, 송기인 신부가 토한 절규가 아직도 귓전에 맴돈다. ‘주님, 죄인 노무현 유스토의 영혼을 받아 주소서!’ 그렇다. 이 세상에서 죄인 아닌 사람이 어디 있는가? 노무현은 송기인 신부로부터 영세(領洗)했었지. 노무현이 선종하고 난 뒤 난 기일에 맞춰 연미사를 넣어왔다. 내 충정을 저승의 노무현도 알 거다.”
한숨 돌린 그가 다시 마지막 한마디를 덧붙인다.
“난 어느 누구보다 자주 현충원에 들렀지만, 국가 원수의 묘역에 발걸음하지 않았다. 무슨 뜻? 노무현도 예외일 수 없음을 강조함이다. 그런 껌목이 못 된다는 자괴지심인들 왜 없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