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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한 그루가 통째로 출렁대다
<날마다 날마다 생일> 박수서 시집
정서희(시인)
마흔아홉의 층계에 서서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1908~1961)는 지각의 현상학에서 나는 곧 ‘내몸’이라고 했다. 세계를 지각하는 주체가 ‘몸’이라는 인식은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는 관념을 뒤흔드는 새로운 인식론이다. 우리의 몸은 시시각각으로 시공간 어디에나 어떤 상태로든 놓여 있기 마련이다. 차를 운전하며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다거나 링거액을 달고 병실에 누워 있다거나 혹은 친구와 만나서 밥을 먹을 수도 있다. 메를로-퐁티는 이를 주체로서의 몸의 개념을 끌어들여서 “상황에 놓인 몸”(le corps propre situê)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는 정신과 육체라는 서양 철학의 이분법적 세계를 거부하고 인간의 현존(現存, exister)을 문제 삼는다. 메를로-퐁티의 “세계에의-존재”(être-au-monde)는 관념적인 정신과 상반되는 육체가 아니라 ‘살아있는 몸’ 그 자체이다.
박수서 시인의 7번째 시집 내 심장에 선인장 꽃이 피어서가 ‘마음’에 대해 주목하고 있다면, 8번째 신작 시집 날마다 날마다 생일은 ‘몸’에 대해서 탐색하고 있다. 그런데 그 몸은 생기 있고 역동적인 청춘의 몸이 아니고 여기저기 삐걱거리는 마흔아홉의 고장 난 몸이다. 시집 한 면을 무심코 따라가다 보면, 솔직하고 능란한 언어의 매력에 붙잡히고 만다. 각기 다른 시인들의 시 여러 편을 뒤죽박죽 흩트려 놓아도 시인의 작품을 가려낼 수 있을 만큼 언술이 독특하다. 자신의 시가 가야 할 지점을 이미 알고 있다고나 할까. 곳곳에 살아있는 시어들이 꿈틀거리면서 제 길을 만들어 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시집의 해설에서 김윤환 평론가는 마흔아홉이 주는 증상의 파토스(감성, 고통)와 그 저변의 현상을 시인만의 성찰의 에토스(공감)로 풀이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시인 박수서는 그간 7권의 시집을 통해서 문학의 본질인 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성복 시인은 그의 시론집 무한화서에서 좋은 시를 쓰려면 ‘자기 몸이 앓아서 알아낸 것만 쓰라’고 했다. 박수서 시인의 새로 나온 시집을 두고 하는 말 같아서 방점을 찍는다. 내가 생각하기에 좋은 시집이란, 한 번 쓱 훑어보다가 되돌아가서 다시 천천히 소리를 내어 읽고 싶은 시집이다. 이번 시집이 그랬다. 한 편씩 읽을 때마다 그다음이 궁금해서 한달음에 다 읽었다. 펄펄 끓는 몸에서 갓 찍어낸 열기가 그대로 묻어 있는 시였다. 남 다 자는 오밤중에 통증으로 잠 못 이룬 몸이 보내는 신음이 그대로 들리는 듯도 했다. 마흔아홉이라는 묵직한 나이, 아홉수가 던져준 불안과 몸의 고통이 때로는 은유로, 혹은 직설로 나를 잡아끌었다.
그저 가을이라 가슴이 시린 줄 알았다
노새 귀를 뚫는 바람이 밀어 올리는 계단 끝
가지 많은 나무처럼 몸 한 그루가 통째로 출렁댔다
바람은 어깨를 반도 걸치지 않았는데,
낙엽수처럼 흔들리다 쓰러지기 일쑤
여기저기 긁히고 베였다
나무는 쓸 만한 것이 먼저 베인다지만
사람은 쓸모없는 것이 먼저 베인다
살면서 작게 적게 베인 상처를 꿰매다 놓친 바늘이
수북이 쌓여 나는 잣나무처럼 뾰족해졌다
말미잘처럼 박힌 날카로운 모양이
신통하게 나이테가 되었고
마흔아홉 테에서 층계가 낮고 넓어졌다
- 「마흔아홉」 전문
인간은 생로병사(生老病死)라는 정해진 순서를 뛰어넘을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순간을 사는 존재이다. 쉰을 앞둔 마흔아홉 살의 어느 날, 화자는 “하루 종일 머리 껍질이 뭉치고 저리고 시리고 긁히는 두통이 시작됐다.”고 한다. ‘약을 복용하면 낫겠지’ 하고 기다리다가 “신경외과와 신경과 몇 곳을 돌고 돌아서 “진통제, 근이완제, 두통약, 편두통약, 삼환계항우울제까지”/ “이 약 저 약 다 먹어도 통증이 가시지 않았다.”(「죽상이다」) 갑자기 나타난 원인 모를 두통과 이명, 두근거림으로 화자는 몸 한 그루가 통째로 흔들리는 경험이었다고 쓰고 있다. “바람은 어깨를 반도 걸치지 않았는데,” “낙엽수처럼 흔들리다 쓰러지기 일쑤” “여기저기 긁히고 베였다”는 표현을 통해서 ‘몸’의 어떤 징후가 느껴진다.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키듯 나무는 쓸 만한 것이 먼저 손을 타지만, 사람은 쓸모가 없는 존재가 먼저 베인다는 것은 어찌 보면 냉정한 인간사의 당연한 이치인지도 모르겠다.
살다 보면 나도 모르게 여기저기서 베인 상처가 흔적으로 남는다. 그 나이테가 찔리는 가시가 되고 신체의 고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우리 몸에 어떤 징후가 나타나지 않으면, 순간순간 내가 몸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잊는다. 인간의 오감은 의식보다 훨씬 날카롭고 민첩하다. “마흔아홉 테에서 층계가 낮고 넓어진” 것은 눈이 그 어떤 감각보다 앞서서 예리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 한 편으로는 그만큼 인생을 바라보는 눈이 깊어지고 넓어졌음을 의미하는데 한 마디로 인생에 철이 들어가고 있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뭐라 설명해도 느낌을 살릴 수 없지만, 꼭 그런 느낌 오십이 되어 알았지
먹힌 개구리가 뱃속에서 세게 꿈틀하다 힘 빠져
기진맥진 찾아온 왼쪽 가슴의 덜컹함
하루 열대여섯 번 아주 잠시 심장이 멈춘 것 같은 무서운 기분
심장내과에서 병명을 듣고 집에 오는데 현관 앞에 스티로폼 냉동식품 택배가 놓여 있어
열어보니 조기 오십 마리네
열 마리 한 팩씩 돌돌 말아 냉동실에 넣고 문을 닫고 생각해보니 이불처럼 접혀 냉동실에 먹힌 저 조기 떼는 꽁꽁 얼어
냉동실조기수축 되겠지 싶네
- 「심실조기수축」 부분
‘심실조기수축’은 심장의 비정상적인 수축을 나타내는 증상이다. 사람에 따라서 다르지만, 가슴 통증이나 어지러움 등을 동반한다. “기진맥진 찾아온 왼쪽 가슴의 덜컹함”, “하루 열대여섯 번 아주 잠시 심장이 멈춘 것 같은 무서운 기분”을 느끼는 화자의 몸과 심리상태를 보여주고 있다. 생략된 본문을 살펴보면, 일곱 살 때 논두렁에서 본 뱀 한 마리가 개구리를 삼키는 장면이 나온다. 개구리는 뱀의 배 속에서 조금씩 꿈틀거리다가 작아지고 뱀의 심장이 부풀러 ‘쿵’ 하고 숨죽이는 모습과 같다고 묘사했다. 어느 날 화자는 심장 내과에서 ‘심실조기수축’이라는 병명을 듣고 집에 온다. 문 앞에 배달된 냉동 조기를 보고 자신의 몸과 비교하며 “냉동실 조기수축” 되겠다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익살스럽고 재치 있게 다가오지만 깊이 생각해보면 고통스러운 자신의 몸을 냉동 ‘조기’에 빗대어 희화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먹힌 개구리가 뱃속에서 세게 꿈틀하다 힘 빠져”/ “기진맥진 찾아온 왼쪽 가슴의 덜컹함”은 나의 신체가 느끼는 감각적인 이미지를 그대로 형상화하고 있다. 꿈틀거리는 개구리를 ‘심장의 꿈틀거림’으로 나타낸 것이 돋보인다. 내가 감각으로 느낀 실제가 시로 창조됨으로써 체험의 구체성과 더불어 실존성을 획득하고 있다. 신체는 우리가 세상을 인식하고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작용을 한다. 나의 몸이 없다면 오월의 훈풍과 가을의 청량함을 어떻게 느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신체를 통해서 세계의 물상들과 만나고 관계를 형성하며 소통한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도 말테의 수기에서 “시는 감정이 아니고 수많은 경험 중의 하나”라고 강조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이 시는 화자의 몸을 직접 통과한 ‘통증’이라는 경험을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막걸리 한 사발 마시는데 화장실을 대여섯 번 가야 해
별이 제일 반짝이는 시간에 반딧불처럼 일어나 변기 뚜껑을 열어야 해
직행버스를 타고 가는 내내 잔뇨가 나올까 조마조마해
런닝타임이 긴 영화를 보면 한 번은 상영관을 나갔다 오느라 필름을 끊어먹어
동양화 짝을 맞추기라도 하는 날은 절박뇨 때문에 급하게 일어나다 파투로 만들어
- 「전립샘증식증」 부분
시 「전립샘증식증」 역시 남성의 방광 배출 장애를 나타내는 증상을 통칭한 하부요로 증상에 대한 시이다. 막걸리 한 잔을 앞에 놓고도 마실까, 말까, 전전긍긍 염려해야 하고 오밤중이나 새벽녘이나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빈뇨 현상, 장거리 여행 시에 느끼는 불안감은 또 말해서 무엇 하나, 영화 한 편, 화투 한판 치는 것이 이토록 어려울 줄이야, 한창 팔팔할 때는 생각하지도 못한 일들이다. 내가 내 몸을 통제하고 조절할 수 있다고 자부하던 때가 언제였던가, 이젠 내 몸이 나를 질질 끌고 다니는 형국이다. 마음은 품위 있게 늙고 싶지만, 몸이 따라 주지 않는다.
큰 어금니와 작은 어금니 사이 음식이 끼기 시작할 때 알았어야했다
잇몸에서 피가 보이고 계속해서 이 사이에 질겅질겅한 미나리나 갈비가 끼어
신경 쓰이고 불편했을 때, 이미 견디기 어려운 염증에 시달려 왔다는 것을
(중략)
어떤 미련이나 퉁퉁 부은 마음의 염증이 계속 둘레를 넓혀 아쉬운 마음을 잡아두고 있는 것과 같으니
세상 사는 일 절반이 사랑하는 일인데
욕심이란 쓸데없는 헛것을 지긋이 사랑하며, 뭐 한다고 그렇게 살다 농까지 차올랐을까
이를 뽑고 알았다
뽑는 이의 빈자리는 인공 이로 잡아둘 수 있지만 살며 패인 마음의 염증은 결국 내가 지주대를 심어야 하는 것을
- 「만성단순치주염」 부분
우리 몸의 기관은 나이가 들수록 퇴화하고 몸의 일부들이 하나둘 고장 나기 시작한다. 잠시 방심하는 사이 무너진 잇몸에서 피가 나고 염증이 생길 때, 우리는 ‘씹어야 사는 존재이고 먹어야 유지되는 몸이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된다. 메를로 퐁티식으로 이해하면, 우리 신체의 각 부분이 그 어떤 학문이나 냉철한 이성보다 더욱 소중하다. ‘농까지 차오른 치조골’에 대한 서사가 이 시의 겉보기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속을 들여다보면, 인간의 ‘욕망’이 고통의 핵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시적 화자는 여기서 인간이 충동과 욕망에 사로잡혀 사는 존재임을 부인하지 않는다.
특히 이 시에서 눈여겨볼 만한 것은 박수서 시인의 뛰어난 언어 부리기 능력이다. “욕심이란 쓸데없는 헛것을 지긋이 사랑하며, 뭐 한다고 그렇게 살다 농까지 차올랐을까”로 은유한 문장은 ‘만성 치주염’이라는 병증을 통해서 존재론적 성찰에까지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 이외에도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일은 잠들고 있는 일”이라는 불면증에 관한 기록인 「수면장애」와 「불안장애」 그리고 하루 동안 먹는 약을 나란히 열거한 「하루」 등의 시를 통해서도 아픈 몸을 섬세하게 보여주고 있다.
화자는 마흔아홉에 이르는 동안 맛있는 삶을 만드느라고 “스스로 생이 으깨지는 줄도 모르고 끓어서 졸아든 것”(「뼈마디가 시린 이유」)이라고 고백한다. 그의 시는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고 경험하는 일들을 시적 재료로 삼아서 삶의 가치와 비애를 느끼게 한다.
이제 오십 줄에 들어선 친구는 떨어진 주식보다 머리카락에 더 심쿵한다
한때 버드나무처럼 바람에 날리던 말총의 촉감을 알기에
이제는 함께 할 수 없는 수지부모한 신체발부에서
빠져 버린 발(髮)의 표면면적 확장을 어떻게든 막으려 고군분투한다
남겨진 머리카락을 지키기 위해 유전자에 맞서 용맹하게 싸운다
나야 머리숱이 많아 그 맘 잘 모르지만
나라고 머리카락에 불만이 없을까
아침마다 샴푸 하면 세면기에 매생이처럼 머리카락이 빠져 있는데도
언제나 풍성한 두발 자유화는 다행이지만,
도끼빗으로 빗어도 잘 풀리지 않는 곱슬머리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고 파마로 다스리고 관리한 지 수년
무엇보다 새치의 영역에서 확실히 벗어난 백발의 낌새
꼬이고 쇤 머리카락 불만을 늘어놓았더니
점점 두상이 덩샤오핑 닮아가는 친구는 팔짱을 끼고 노려보며 한마디 한다
검은 털이든 흰털이든 머리에 잘 붙어 있는 털이 좋은 털이다
- 「흑모백모론」 전문
「흑모백모론」은 탈모인들에게 주로 회자 되는 용어로 검은 머리든 흰머리든 많으면 다 좋다는 의미로 널리 쓰인다. 나이가 들면 몸의 여러 기능이 약화 되고 확연히 드러나는 것이 두상, 바로 휑한 정수리다. 옛말에 ‘머리가 열두 가지 흉을 가린다’는 말도 있다. 머리 모양에 따라서 용모가 달리 보인다는 말이니 탈모 때문에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세상에 그 어떤 것보다 더 애착을 갖게 하는 것이 머리카락이다. 화자의 친구가 나날이 영토를 확장해가는 면적을 줄여볼 요량으로 고군분투하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꼬이고 쇤 머리카락 불만을 늘어놓았더니”/ “점점 두상이 덩샤오핑 닮아가는 친구는 팔짱을 끼고”/ “노려보며 한마디 한다” 검든 희든 머리에 붙어만 있어도 좋은 털이라는 결론이다. 빙그레 웃다가 갑자기 서글픔이 몰려온다. 늙음으로부터 달아나려고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소용이 없다. 그 누구도 이 인생의 순리를 거스를 수 없는 것이다.
겨울만 있는 나라는 없다
혼자 사는 사택이라 현관문을 살짝 열어 놓고 잠드는 밤
잘살아 보겠다고 담배도 끊고 술도 끊었지만
지속되는 통증에 두려워 울고 있는 불안한 마음은
밤이면 밤마다 쿵쾅쿵쾅 철문을 두드리고
방바닥은 뜨겁고 등골은 써늘하고
세상에 여름만 있는 나라는 있어도 겨울만 있는 나라는 없다고
사는 동안 여러 번 머무는 겨울은 있어도 겨울만 있지는 않다고
겨울에 자란 보리가 국수가 되고 고추장이 되고 빵이 되고
꿀 발라 먹는 날이 한 번은 있다고
- 「소설」 부분
신작 시집 날마다 날마다 생일에서 박수서는 “마흔아홉은 더디게 지나갔다/ 담배 술 없이 써진 첫 시집”(「시인의 말」)이라고 했다. 예로부터 9, 19, 49 등 아홉이 든 수는 불길한 나이로 여겨져서 고난과 불행이 뒤따라온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홉수가 든 해는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널 정도로 매사에 신중했다. 돌아보면, 젊음의 시기는 쏜 화살처럼 찰나적으로 쉬이 지나간다. 또한 나이가 들수록 몸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피천득은 그의 수필 「봄」에서 그 어떤 지식과 지혜도 젊음만 못해서 “늙으면 플라톤도 허수아비가 된다”라고 역설했다. 시적 화자는 “잘살아 보겠다고 담배도 끊고 술도 끊었지만”/ “지속되는 통증에 두려워 울고 있는 불안한 마음은”/ “밤이면 밤마다 쿵쾅쿵쾅 철문을 두드리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희망의 끈을 버리지 않는다. “세상에 여름만 있는 나라는 있어도 겨울만 있는 나라는 없다고” “겨울에 자란 보리가 국수가 되고 고추장이 되고 빵이 되고”/ “꿀 발라 먹는 날이 한 번은 있다고” 눈보라 치는 겨울이 지나고 나면, 겨우내 덜덜 떨며 자란 보리가 열매를 맺게 된다는 희망이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운다. 고통을 희망으로 승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성게처럼 따갑게 박힌 잔가시를 발라 주시던 아버지는
꼭 준치처럼 살라 하셨다
썩어도 맛이 좋아 비싸다는 준치처럼,
사람도 제 맛에 비싸게 굴 줄 알아야 한다 하셨다
낡은 등산복과 함께 평생 산을 오르며 살다 가신 아버지는
창자 샛길 주머니를 달고, 독한 진통제를 맞으면서도
병실 침대에서는 대위처럼 자세가 또렷했다.
- 「준치」 부분
준치는 맛은 좋지만, 가시가 많아서 먹을 때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생선이다. 오죽 맛이 좋으면 ‘썩어도 준치’라는 말까지 생겨났을까. 젓가락으로 살살 뜯어서 아들의 숟가락에 얹어 주는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른다. “제 맛에 비싸게 굴어야 한다”는 것’은 방자하고 교만하게 행동하라는 의미가 아니고 제값을 하며 살라는 의미로 읽힌다. “살면서 당장 탐나 덥석 물고 씹은 생선이” 나를 옥죄는 덫이 될 수도 있으니 삼가 조심하며 살라는 뜻도 겹친다. 말년의 아버지가 인공 항문을 달고 진통제를 맞으면서도 대위처럼 꼿꼿한 의기를 간직하고 사셨듯이 시적 화자인 아들 역시 이와 비슷한 결기를 보여준다. “한 계단만 올라서 다시 시작하자” 세상이 내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는 않지만 “사십 구세, 로켓 주먹 불끈 쥐고” 대퇴 사두근이 복어알처럼 알차고/ 단단해지게”(「지표면」)살아내야 한다고 굳게 다짐하고 있다.
날마다 생일이면 좋겠네
생일날 일요일 식구들과 점심 먹으러 동네에서 제법 큰 중국집에 갔습니다
고추잡채, 깐풍기, 유린기, 탕수육, 쟁반짜장, 짬뽕 이것저것 주문했습니다
아무래도 휴일 중식으로 중식을 먹으려면 고량주 한 병은 있어야 할 것 같아
작은 병 하나 시켰습니다
말이 떨어지자마자 이구동성으로 왜 시켰냐 원성입니다
생일이니까 한 잔은 해야지 말하니
아빠는 날마다 날마다 생일이냐고 묻습니다
아, 오늘따라 이 집 요리는 왜 이렇게 일품인지
씹기 바빠 쉴 새 없는 입 때문에
말 한 마디 못하고 꼭꼭 씹어 먹었습니다
- 「날마다 날마다 생일」
본 시집의 표제시에 해당이 되는 「날마다 날마다 생일은」을 동심의 마음으로 돌아가서 ‘날마다 생일이었으면 좋겠다’는 즐겁고 천진한 마음으로 읽었다.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하루’라는 스물네 시간은 한 번 가면 다시 오지 않는다. 그래서 귀하고 소중한 선물이요, 축하를 받아야 하는 날이다.
술을 좋아하는 시인이 생일날 가족들과 함께 간 중국집에서 술을 시키자 온 식구들의 원성이 자자하다. “아빠는 날마다 날마다 생일이냐고 묻”는 아이들의 발랄한 야유(?)와 걱정스러운 표정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그 말을 받아서 “아, 이 집 요리는 왜 이렇게 일품인지”하고 재치 있게 눙치는 문장에서 웃음이 절로 나온다. 참고로 세 번째 시집의 표제가 슬픔에도 주량이 있다면이다. 그에게 술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경계를 허물고 소통하게 하는 매개체인 듯하다. 하루에도 알약을 밥 먹듯이 삼키지만, 그의 시는 아주 낙심하거나 오래도록 슬프지는 않다. 그는 준치처럼 제맛을 잃지 않으려고 몸부림친다. “한쪽은 매우 심한 고통”/ “반대쪽은 너무 좋은 즐거움”(「잊지는 못하겠지」)이 공존하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라는 것을 이미 알아챈 것이리라.
박수서 시인의 이번 시집의 특징은 그동안 여러 권의 시집에서 보여주었던 익살과 재치스러움 대신 아픈 몸에 대한 성찰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시편마다 잠을 못 이루고 끙끙 앓는 시적 화자의 비명과 신음이 새어 나오고 있다.
자고이래 시는 고통과 상처의 언어였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상처도 때때로 입안에 담아두지 말고/ 입 밖으로 내몰아야 꽃이 핀다”(「청운리」)고 말한다. 그는 30여 년 동안 자기만의 언어로 시의 꽃을 피웠다. “청춘은 가고 뼈마디가 시린”(「뼈마디가 시린 이유」) 겨울이지만, 끝까지 “시절 없이 꽃 피우는 심매화(心媒花)”(「주름」)로 찬란하게 피었다가 아름답게 몰락하기를… 날마다 날마다 생일날처럼 행복했으면 좋겠다.
정서희
1966년 충남 서산 출생.
창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 수료.
2020년 문학과 사람 신인 추천으로 작품 활동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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