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은 모르고
일때문에
장비 연장 다~챙겨서
하럴빈에 간다
유엘엠 1대
텐덤 트라이크 2대
파라모터 2대
열기구 00대
이걸 추럭에 싣고 36시간 간단다 헐~
산넘고 물건너고 바다도 건넌단다
나는 중국측 사장과 행사 오너와 뱅기 타고 간다ㅑㅆ
차 타고 가는 중국교관 족 될기다 ㅠㅠ~
하얼빈
(병)Haerbin (웨)Haerhpin (영)Harbin.
중국 둥베이 지구[東北地區 : 옛 이름은 만주]에서 2번째로 큰 도시.
헤
이룽장 성[黑龍江省]의 성도로, 쑹화 강[松花江]에 면해 있다. 19세기말과 20세기초에 러시아인들이 중둥[中東] 철도를
건설하면서 이 도시가 생겼다. 1904년에 완공된 이 노선은 시베리아 바이칼 호의 동쪽 지점에서 시작하는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동해에 면해 있는 러시아 항구인 블라디보스토크와 이어주었다. 하얼빈은 러일전쟁(1904~05) 동안 만주에서의 러시아의
군사작전기지였다. 전쟁이 끝날 무렵 일시적으로 중국과 일본이 공동 관리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뒤 러시아에서 도망친 사람들의
피난처가 되었으며 한때는 소련 밖의 도시 가운데 러시아인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곳이었다.
일
본이 만주국(1932~45)을 지배하던 시기에 하얼빈은 빈장[濱江]이란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다. 1945년 소련군이 이 도시를
점령했으며, 1년 뒤에는 중국공산군이 진격해와 이곳에서 만주 정복작전을 지휘했다. 1949년 이후 하얼빈은 중국 북동부의
주요산업기지가 되었다. 전통적으로 식품가공산업이 유명한데 콩가공 공장, 사탕무를 정제하는 제당공장, 제분소 등이 있다.
담배·가죽·비누 공장도 있다. 근대적인 산업으로는 공작기계, 채광 및 야금 기구 제조를 비롯해 농기구, 플라스틱, 전력 터빈,
보일러, 발전기 제조공장이 있다. 북서쪽의 다칭[大慶] 유전에서 필요로 하는 장비를 공급하는 곳이기도 하다. 주변 농업지역에서는
밀·콩·사탕무·옥수수·아마·수수가 재배된다. 하얼빈은 중국의 나머지 지역으로 보내는 농산물과 임산물의 선적 중심지이다. 공항은 시
남쪽 교외에 있다. 하얼빈 시는 쑹화 강 오른쪽(남쪽) 기슭에 바싹 붙어 있지만 겨울철 항만시설은 왼쪽(북쪽) 기슭, 강을
지나는 큰 철교 가까이에 있다. 따라서 새 도시도 왼쪽 기슭에 개발되었다. 외국에 의해 개발된 중국 도시의 대부분이 그렇듯이
하얼빈은 오른쪽 기슭의 항구와 산업지구, 바로 옆의 다오리 상업지구, 오래된 중국인 거주지역, 상점들이 있고 도소매 활동이
이루어지는 지역, 일본 사람이 세운 주거지역, 강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며 하얼빈에서 비교적 새로운 지역 등 여러 구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마지막의 비교적 새로운 지역에는 철도역과 시청이 있으며 제1차 세계대전 뒤로 주로 발전했다. 이 지역들은 1949년 이후
시의 전체 인구가 증가하면서 매우 급속히 팽창되었다. 최근에는 넓은 아파트 단지들이 이들 지역의 교외에 건설되고 있다. 시의
외곽은 대체로 직4각형 격자 형태이다. 하얼빈 시는 강에서 가까운 곳을 빼놓고는 일반적으로 기복이 평탄한 지세 위에 있다. 강
근처에서는 나즈막한 절벽들이 점차 낮아지면서 넓은 범람원으로 이어진다. 겨울에 언 강 위에서 스케이트와 썰매를 타는 것이 스포츠로
대중화되어 있다. 버스편으로 시의 여러 지역이 이어지지만, 자동차와 트럭은 비교적 드물다. 극장·도서관·병원·학교는 골고루
보급되어 있다. 하얼빈 시가 러시아적 분위기를 계속 지니고 있지만, 러시아인이 지었거나 러시아의 영향을 받은 건물 가운데 많은
것이 철근 콘크리트 건물로 바뀌고 있다. 또한 항일 독립운동가였던 안중근이 1909년 조선통감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한
곳으로서 한국인에게는 익숙한 지명이다. 인구 2,586,978(1999).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 만주 하얼빈 역에서 총성이 울렸다.
대한의군 참모 중장, 특파독립대장, 아령지구 군사장인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향하여 쏜 정의의 총성이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의 근대화를 이룬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이고
또 초대 내각 총리대신으로 임명된 인물이기도 하다.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에서는 영웅이지만
대한민국의 측에서는 최대의 원수로 볼 수밖에 없었다.
1905년 조선의 초대 통감부가 된 이토는
조선의 왕실을 모욕하였고 조선 지배 계획을 착실히 수행하였다.
이런 상황에 안중근 의사가 나서서 그를 처단한 것이다.
그는 러시아군에 의해 붙잡혀 일본으로 넘겨졌고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는 괴로운 감옥생활 동안에도 '동양평화론'이란 책을 집필하였다.
또한 그의 곧은 의지는
그를 감시하던 일본인 간수마저 그를 존경하게 만들 정도였다.
이런 안중근 의사의 의거에
당시 만주 철도 이사였던 일본인 다나카 세이타로는
안중근 의사의 인품과 사상에 감동을 받아서 이런 말을 남겼다.
"일본인으로서 이런 말을 하게 된 것은 가슴 아픈 일이지만,
안중근은 내가 만난 사람들 중 가장 위대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15분,
안중근 의사는 31세의 젊은 나이에 결국 순국하고 말았다.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쳐 희생하셨던 안중근 의사.
그런데 여러분들은
아직도 안중근 의사의 유해도 찾지 못했다는 사실을 아시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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爲國獻身軍人本分
見利思義見危授命
人無遠慮難成大業
白日莫虛渡靑春不再來
나라를 위해 몸 바침은 군인의 본분이다.
위익을 보거든 정의를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보거든 목숨을 바쳐라.
사람이 멀리 생각하지 못하면 큰일을 이루기 어렵다.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말라. 청춘은 다시 오지 않는다.
- 안 중 근-
![](file:///C:/DOCUME%7E1/ADMINI%7E1/LOCALS%7E1/Temp/moz-screenshot.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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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great peop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