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나도 장가 가고 싶다.
철진의 가슴이 터질 듯 두근거린다. 때론 좀 부담스러웠던 자신감 넘치는 똑 떨어지는 그녀의 옆 얼굴도 오늘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을 만큼 든든하다.
‘난 이제 곧 결혼 할 수 있다. 친구들 결혼식에 백일이며 돌잔치에 봉투를 들고 찾아가서 맛도 없는 뷔페 음식을 뒤적이다 한껏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다 쓸쓸히 뒤돌아 오는 일도 더 이상 없을 것이다 올 가을엔 꼭 결혼해야지. 내년 겨울쯤이면 첫 아이가 백일을 맞을 수 있을까?’
내년이면 마흔이 되는 노총각 철진이, 군살하나 없는 몸매로 자신의 다섯 걸음쯤 앞에서 하이힐 소리도 똑 소리 나게 걷고 있는 혜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상념에 젖어든다.
그동안의 수많은 소개팅과 맞선들, 그리고 데리고 간 철진이 사랑했던 한 사람 한 사람을 강하고 날카로운 톱날로 필요 없는 가지를 사정없이 쳐내는 정원사처럼 이런 저런 이유로 반대하며 돌아 앉으셨던 어머니.
철진은 가지를 쳐내고 곧게 자라는 정원수 같은 모습이 아닌 헤아릴 수 없는 상처로 피투성이가 된 자신의 가슴을 들여다본다.
해맑은 미소로 직장 신입사원으로서의 긴장과 서투른 일처리에 기죽던 철진의 어깨를 다시 세워준 해심이, 첫 사랑이었던 그녀와 걷던 덕수궁 돌담길의 눈처럼 쏟아지는 벚꽃 잎과 늦가을의 단풍잎은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비 개인 6월의 오후에 빗방울을 함초롬히 매달고 있는 수국 꽃처럼 싱그러웠던 상아 씨, 이어폰을 하나 씩 나눠 꽂고 듣던 오페라 아리아들이 떠오른다.
친구 영환이 소개시켜준 지선, 불우이웃 모금함을 한 번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전철에서 만난 껌이나 초콜렛등을 파는 할머니나 아이들의 모습에도 한껏 동정의 눈빛으로 지갑을 열던 그녀는 철진에게 지구가 100 인의 마을이라면 이라는 책을 소개하며 더불어 사는 지구촌의 사람들, 그리고 우리가 누리고 있는 넘치는 축복과 혜택에 대해서도 다시금 자각하게 해주었다. 사실 지선과의 이별이 철진에게는 제일 힘들었다. 지선은 이별을 고하는 자신의 말을 한 마디 한 마디를 이해하려고 애쓰며 경청해 주었다. 그리고 한참을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겼다가
“이해해요. 옛날 분들 그러시죠...... 처자는 의복과 같고 부모는 수족과 같다고, 의복은 바꿔 입을 수 있지만 수족은 바꿀 수 없다고. 어머니께 잘 맞추고 사세요” 그녀의 말투와 톤이 마치 중견 아나운서의 노련한 멘트 같아서 놀라는 자신을, 지선은 잠시 무표정하게 바라보고는 뒤돌아서 가버렸다. 단 한번도 뒤돌아 보지 않고.
집안 어느 구석에도 먼지 하나 허락하지 않는 철진의 모친 계선여사는 결혼 40 여 년이 다 되도록 가계부를 하루도 빼지 않고 써왔다. 매 월, 매 계절, 또 매 년의 계획을 빈틈없이 세우고 거의 완벽하게 계획대로 살아왔다. 남편과 자녀들의 용돈 관리며 제철음식을 식탁에 올리는 것, 아파트 평수와 집안 살림을 점점 늘리고 친지들 경조사를 챙기는 것도 절대 소홀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철진과 동생 그리고 아버지의 얼굴에는 항상 손바닥 만한 그늘이 자리 잡고 있었다. 계선 여사의 머리와 가슴에는 스캐너가 달린 커다란 계산기가 하나씩 있는 것 같다. 어떤 사건이나 사람, 사물도 계선 여사를 통과해 나오면 수치나 도표로 변한다. 그리고 그 수치나 도표는 절대 만점과 최고점을 가리키지 않았다.
철진은 친구들 집이나 자취방을 방문 했을 때 느끼는 그 자유로움과 따스함이 항상 부러웠다.
따스하고 자유로운 가정을 이루기를 꿈꾸던 철진이 ‘다 접고 마흔 전에 결혼하는 걸 목표’로 삼고 고른 여자는 엄마와 꼭 닮은 혜란이다. 성격, 생활 방식, 심지어 생김새와 표정까지도 계선 여사를 닮았다.
철진의 예상대로 혜란을 마주 한 계선 여사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오른다. 연봉과 그에 따른 저축와 엥겔 계수, 또 5 년을 주기로 인생의 계획은 무엇인지 기상시간과 취침시간을 비롯하여 척척 죽이 잘 맞는 그녀들의 대화는 모두가 다 수치로 전환하여 기록해도 될 것 같다. 심지어 접대용으로 내어 놓은 과일을 몇 조각으로 어떤 모양으로 깎아야 제일 보기 좋은지까지.
‘더 이상은 바라지 말자. 일단 결혼 먼저 하고 결혼 초반부터 서로 조율하면서 좀 자유롭고 인간미 나는 가정을 만들어 가면 되겠지 숫자로 나타낼 수 없는 삶의 아름다움과 따스함을 맛보게 해 주겠어’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는 철진은 이제 노총각 신세를 면할 것이라는 기대로 마음 한 쪽 씁쓸한 기분을 밀어내고 있다.
혜란이 철진의 집을 방문한 며칠 후, 예고도 없이 철진의 아버지가 퇴근시간에 맞춰 회사 앞으로 찾아왔다.
“아들아, 난 이 결혼, 혜란이라는 여자 절대 찬성 못한다. 내가 살아 있는 한 그 애와 결혼은 포기해라”
술잔을 마주한 아버지의 입에서 그동안 열 번도 더 들었던 어떤 사정이나 설득도 통하지 않았던 엄마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 며칠 아버지의 얼굴은 많이도 상하셨다. 푹 꺼진 눈이랑 십 년을 더 늙어 보이는 아버지의 쑥 들어간 두 뺨.
‘아, 장가가고 싶은데.....’
** 기흥백합교회 사모( 010 6736 2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