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는 많은 중국의 학자들이 “문자로 이루어진 가운데 최고의 문자다”. 라고 극찬했었던 아마도 반야심경, 법성게등과 같이 아주 유명한 신심명이라는 텍스트를 가지고, 불교에서 얘기하고 전하려고 하는 핵심이 신심명이라는 짤막한 글귀 속에 담겨져 있거든요. 오늘은 이것에 대해서 공부해 보려고 합니다.
신심명은 4글자 4글자로 이루어져서 4언절구라 하는데, 8글자씩 총73구절로 이루어져 있고요.
제가 주보에도 좀 적어놨는데요.
중국에서 초조 달마스님부터 시작하여 2조 혜가 3조 승찬 4조 도선 5조 홍인 이렇게 해서 6조 혜능스님이 조계에서 법을 폈다하여 조계종이라고 하고, 6조 혜능스님의 법을 이은 종단입니다. 그리고 혜능스님은 초조 달마에서 시작하여 2조 혜가 3조 승찬 4조 도선 5조 홍인 6대조까지 넘어오면서 법을 이어 받은 스님이 되겠죠.
초조 2조 3조 4조 5조 스님들 또한 많이 익숙히 들었던 스님입니다.
그중 신심명은 3조 승찬대사가 쓴 저작입니다.
오늘 공부하게 될 신심명이라 할 때 신심이라는 것은 신심이 있다, 신심이 없다에 대한 것일 수도 있는데요. 신심이 뭐에 대한 신심이냐 하면 법에 대한 신심인데요. 신심은 보통 불.법.승. 삼보에 대한 신심인데, 마찬가지죠. 부처님 부처님가르침에 대한 신심, 내안에 불성 마음자리 원래 면목이라고 부르고 있는 해탈 열반이라고 하는 그 자리가 있다는 것에 대한 굳은 신심을 가져야 공부를 할 수 있는 거죠. 그래서 자신의 참마음 자리를 갖는거를 신심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신심에 대해서 깊이 명심해야 할 글이라고 신심명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승찬대사는 수나라 양제 때 서기 606년 입적했다는 기록만 있고 언제 태어 나셨는지는 기록이 없고요. 600년 전 쯤의 인물이니까 지금으로부터 1400여 년 전 인물이죠.
승찬대사는 대풍질병에 걸려서 지금으로 말하면 문둥병에 걸려서 너무 고통을 당하다 보니 삶과 죽음에 대한 아주 근본적인 고뇌가 있었겠죠. 그러다 보니 내가 어떻게 해야 이 고통을 없앨 수 있을까? 남들 같으면 문둥병에 걸렸고 최악의 병에 걸렸으면 병을 나아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이러한 문둥병에 걸렸던 그 인연이 내가 이 고통에서 해방되고 싶다는 발심을 하게 돼서 2조 혜가대사를 찾아가게 됩니다. (5분녹취/49분17초)
<!--[if !supportEmptyParas]--><!--[endif]-->이것처럼 볼 수 있듯이 우리도 마찬가지거든요. 큰 고통이 찾아올 때 괴로움이 찾아올 때 괴로움이 우리를 깨달음에 발심하게 만듭니다. 공부를 하도록 만들고 우리를 공부로 이끌게 됩니다. 그래서 2조 혜가대사에게 찾아갑니다. 여기 첫 번째 장에 해 놓은 건데요.
3조 승찬이 출가하기 전이죠. 2조 혜가대사를 찾아가 묻습니다.
“저는 이 제자는 문둥병을 앓고 있습니다. 화상께서는 저의 죄를 참회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그래 알겠다. 그대는 그 죄를 가져 오너라. 그렇다면 마땅히 그 죄를 참회시켜 주겠다”.
죄를 아무리 찾아봐도 죄가 없죠.“ 죄를 아무리 찾아봐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그렇다면 그대의 죄는 모두 참회된게 아니냐.참회되었느니라”. 죄가 있어야 참회하게 해 줄 수가 있을 텐데 어디서 어떻게 죄를 찾을 수가 있느냐? 죄가 실체가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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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과거에 잘못한 것에 대해서 죄의식을 갖는 것은 생각이 일어날 때만 죄의식에 사로잡힐 뿐, 생각이 없을 때는 아무것도 없거든요. 죄도 사라지고 그리고 죄의식에 사로잡힌 마음만 있고 죄를 찾아보려고 아무리 뒤져도 죄의식의 실체가 있는 게 아니거든요.
이 말은 우리 스스로 생각으로 한 생각으로 일으켜 스스로 일으켜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겁니다. 스스로 죄의식을 창조해 내는 거죠.
사실은 세상의 모든 괴로움, 모든 행복, 삼라만상 내 인생에 벌어진 모든 것들은 전부 다 내가 만들어 내는 거죠.
하나님 부처님 내가 만들어 내는 겁니다. 실제 특정한 존재가 있는 게 아니죠. 부처님은 부처님이라는 존재가 있지 않습니다. 불교의 어떤 진리 이런 거 없죠. 불교는 방편으로 만들어 진 거죠. 실체가 아닙니다.
불교는 사람들이 한 생각 일으켜서 고통을 만들어 내니까 그 고통을 없애 주기 위한 방편으로 다양한 가르침을 설했고 지금 있는 그 고통 늙고 병들고 죽고 그 고통을 없앨 수 있다.
그 없앤 자리를 임의적으로 “해탈” “열반”이라고 한다. 그 괴로움이 없어진 사람을 “부처”라고 한다. 라고 가설로 이름을 지은 것일 뿐이지 .진짜 해탈, 열반이 따로 있는게 아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공”이라고 하죠. 텅 비어서 티끌하나 붙을 자리가 없다.
그 말은 뭐냐 하면 모든 것이 가상현실입니다. 여러분이 괴로움에 빠져 있다면 그것은 특정한 생각이 나를 괴롭히는 것입니다. 내가 만든 특정한 생각이 나를 괴롭히는 것이죠.외부에서 나를 괴롭힐만한 무언가가 있는 게 아니라 내 바깥에 있는 중립적인 어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내 스스로 내식대로 좋다 나쁘다 해석해 놓고 거기 스스로 걸려 넘어지는 것과 똑같다.
여기서 말하는 것처럼 죄를 찾아봐도 죄를 찾을 수 없다. 그럼 모두 참회되었다. 그 이유는 그 죄를 만들어 낸 게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문둥병에 걸린 자체가 옛날 사람들은 (지금도 마찬가지겠지만) 내가 문둥병에 걸렸으니 업장이 두터운 사람이니 내가 참회를 해야 문둥병이 없어지지 않겠나 이런 생각을 가진 것입니다.
그래서 문둥병을 앓고 있습니다. 제 죄를 참회케 해 주십시오. 죄가 참회되면 문둥병이 낫게 될 거라 생각하고 있는 거죠.
요즘 사람들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거든요.
힘든 일이 있고 괴로운 일이 있고 일이 안 풀리고 돈이 안 벌리고 내가 뜻하는 바대로 안 풀려갈 때 내가 업장이 두터워서 그렇구나 이렇게 생각해요.
자식이 내 마음대로 안 될 때 내 일이 내 마음대로 안 풀릴 때, 내가 업장이 얼마나 두터워서 이럴까 생각합니다. 그것은 업장이 두터워서 그렇다는 내 생각으로 만들어 낸 것일 뿐이다. 지금 내 현실은 있는 그대로의 중립적인 해석할 수 없는 현실이거든요. 머리가 해석할 수 있는 일체의 모든 해석은 내 머리를 가지고 내가 만들어 낸 것 일 뿐입니다.(10분녹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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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들이 가져야 될 아주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아주 잘못 알고 있는 것 중 하나가 괴로운 일이 생기는 것은 업장이 두터운 사람에게 생긴다는 착각입니다. 큰 괴로움이 있는 사람은 나는 큰 업장이 있는 사람이라서 닦아야 할 업이 많다고 생각 하는 것입니다.
처음에 제가 전에 말씀 드린 것처럼, 절에 오는 분들 중에 불교를 안 믿다가 나름대로 이런 저런 고통이 있어서 오는 분들인데 그렇지 않으면 부처님과 인연이 많아서 오시는 분들인데요. 그러니 절에 오셔서 이런 저런 고통을 호소하는 분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 가운데 너무 힘들어 하는 것 중에 하나가 아들·딸을 잃은 분들이 의외로 많이 계시 더 라구요. 그런 분들이 하시는 말씀이 “다른 절에 갔더니 업장이 두터워서 그렇다 고 한다” 는 것 이예요. 그래서 부모님들이 너무 상처를 받았다는 거죠. “내 업장이 두터워서 내 자식이 죽은 건가” “내가 죽인건가” 이런 죄의식에 사로 잡혀 있더라는 거죠. 저는 그 말씀을 듣고 스스로 너무 충격적 이였습니다. 불교를 그런 식으로 전파한다는 사람들이 문제고, 그렇게 해석을 하면서 죄의식에 사로잡힌다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인지 모릅니다. 분명하게 말씀을 보고 계시잖아요.
“죄를 찾아봐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미 참회되었다.” 이 말이 뭐겠습니까? 죄는 실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내 스스로 만든 가상의 어떤 괴로움이 있을 뿐이지, 그게 진리가 아니다. 내 스스로 업장이라는 무언가를 만들어 놓고 “업장이 난 두터운 거야” 가상의 생각을 만들고 스스로 그 생각에 얽매여서 “나는 업장이 두터운 사람이니까 남들 일이 술술 풀리는 사람과는 달라. 저 사람은 복이 많으니까 되고, 나는 업장이 두터워서 안 돼” 이렇게 생각해요.
근데 중요한 사실은 스스로 복이 없고 업장이 두터운 거라고 생각하고 있으면 “나에는 괴로운 일이 벌어질 거야” 라고 믿게 되거든요. 자존감이 스스로 떨어지게 되거든요. 스스로 내가 내 인생을 규정하게 되거든요. 무엇을 가지고 하냐하면 내 마음을 가지고요.
내가 내 인생을 그렇게 창조 하는 것이 되거든요. 내가 나의 신이거든요. 내가 조물주고 내가 창조주죠. 내가 그런 식으로 나는 복이 없고 업장이 두터워 라고 내 인생을 창조하니까 스스로 그런 사람이 될 수 밖 에 없는 거죠. 괴로움이 오는 것은 업장이 두텁거나 복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괴로움이 찾아 왔다는 것은 “깨어나라는 신호” “메세지(message)” 요즘 말로 시그널(signal) 을 주는 거죠. 이처럼 고통이 있어야 사람들은 “이 고통을 벗어나야 겠다” 는 간절한 마음을 일으키거든요. 불교에서 발심은 고통을 있는 그대로 직시 하는 것입니다.
"나는 괴롭구나”라는 절절한 자각, 그게 고성제(苦聖諦) 거든요.
그러니까 괴로움이 찾아온다 는 것은 저절로 고성제(苦聖諦) 진리가 찾아 온 거죠. 남들은 없는 괴로움이 찾아 왔다고 해서 절망이고 아픔이고 업장이 두텁고 복이 없다고 생각 하십니까?
그것은 복이 없거나 업장이 두터워서 가 아니라 “이제 깨어나야 한다” 는 하나의 신호를 보내 주는 거죠. 고성제(苦聖諦)를 깨달을 수 있도록 부처님이 우리를 자비로운 마음으로 괴로움이라는 성스런 진리를 일깨울 수 있도록 고성제(苦聖諦)로 이끌어 주는 거죠. 그래야만 깨달음으로 나아 갈 수 있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다들 오판(誤判)을 하고 있었던 거죠. 그러니까 잘 나가는 사람, 승승장구 하는 사람들은 복이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오판(誤判)하기 쉽습니다. 잘 나가고 앞만 보고 가는 사람이 진리에 대해서 사무치는 마음이 생길까요? 진리를 깨달으려는 마음을 갖지 않습니다.(15분녹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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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로움이 없는데 진리를 깨달으려고 하겠습니까? 진리는 다른 게 아니고 괴로움을 없애겠다고 하는 마음이 진리를 찾는 마음이거든요. 그런데 괴로움이 없는 사람이 괴로움을 없애겠다는 생각을 내겠습니까? 세간(세속)으로 보면 잘 나 가는 게 좋은 거지만 출세간의 입장에서 보면 잘 나 가는 게 좋은 게 아닙니다. 본인의 아상만 높아지죠. 우월감 이런 것만 높아져서 “내가 잘 났다”라는 생각만 높아져서 아상이 극대화 되고 겸손해지지 못하고 하심하지를 못합니다. 나라는 아상이 커지게 되면 나라는 존재가 커지다 보니, 나라는 상이 탁 깨어졌을 때 깨달음이 오는 것이거든요. 괴로움이 끝나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나라는 것이 계속해서 확장이 되니까 그 사람이 괴로움을 해결 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이죠. 점점 더 깨달음과는 거리가 멀어 지는 것이죠. 잘 나가면서 나라는 존재가 확장 되는 것은 자아의 확장은 곧 정신적으로는 절망스러운 일입니다. 물론 자아가 확장되면서도 마음공부에 뜻을 둔 분들이라면 전혀 그렇지 않겠죠. 정말 공부 복이 있는 사람들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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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높은 자리에 계신 분 들이나 돈을 많이 벌거나 자아가 많이 확장 되더라도 그것과 상관없이 겸손하게 마음 공부하면서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사시는 분들도 많이 계시거든요. 그래서 괴로움에 대한 내 생각 관점을 바꿔야 한다는 얘기죠. 나는 “죄가 많아.” “나는 복이 많아.”“나는 업장이 두터워.” “나는 뭘 해도 안 돼.” 이런 생각은 모두 극단입니다. 중도적이지 않죠. 그래서 죄를 찾아 봐도 찾을 수가 없다고 하니까 죄는 다 참회되었다. “찾을 수가 없는데, 뭘 참회할 것인가. 뭐가 있어야 그걸 참회 시켜 줄 것이 아니냐. 찾을 수 없다면 이미 참회 된 거 아니냐.”는 것이죠.
죄를 한번 샅샅이 찾아보세요. 뒤져 보세요.
찾아보면 두터운 업장이 나오거나, 내가 지금 어디가 아프니까 이건 업장 아닌가요?
아픈 것을 업장이라고 해석 한 거지. 그게 어떻게 업장입니까?
그냥 아무 문제없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지.
그대는 불.법.승(三寶)에 의지하여 그곳에 안주 하거나, 내가 아프다. 내가 죄가 많고 업장이 두터워서 병에 걸렸다. 이런 허망한 착각, 망상, 분별심을 따라 가지 말고 지금까지 너는 문둥병 때문에, 그 스스로 만든 생각 때문에 그 생각을 따라 가느라고 온갖 고통을 부여 안고 있었던 거 아니냐? 그런 허망한 것을 따라 가지 말고 영원한 것, 참된 진리에 안주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즉 초기 불교에서 말하는 삼보에 귀의 하라는 얘기거든요. 부처님께서 도 상당히 많이 말씀 하셨거든요. 두려움을 없애려 거든 불.법.승(三寶)에 귀의 하거나 의지하라는 얘기를 많이 해요. 선(禪)에서도 마찬가지죠. 우리도 법회 할 때마다 첫 번째로 하는 게 삼귀의례를 하는 것도 그런 거죠.
불.법.승(三寶)에 안주하여 귀의 한다는 것은 “내가 부처다.” 라는 것에 대한 굳은 믿음이거든요. 내 바깥에 부처를 따라 갈 필요가 없고 “내가 바로 완전한 부처다.”나는 불완전한 존재이거나 부처가 불완전한 존재겠습니까? 나는 불완전한 중생이 아니라는 거죠. “나는 부족한 어리석은 망상의 중생이 아니라, 나는 있는 그대로 부처다.”라는 믿음. 그리고 법(진리)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내안에 있거든요. 여러분들이 법당에 나오고 법회에 자꾸 참석하는 것도 내 안에 있는 부처와 바깥에 있는 부처가 서로 공명을 하니까 , 같은 파장은 유유상종 이라고 하잖아요. 같은 파장은 서로 닮아 가게 되죠. 같은 파장은 서로 끌어당기게 되어 있어요.(20분18초)
내가 의도하든 하지 않든, 귀인을 만나는데 우연히 만난다고 생각하죠?
사람을 만날 때 “내가 그 자리에 가지 않았으면 이 남편을 안 만나서 더 좋은 사람을 만났을 텐데 ” 라고 생각하지만 그게 우연이라고 생각해요? 그건 우연이 아니라 인연입니다.
같은 업의 파장은 서로 진동하고 공명하게 되어 있는 거죠.
그러니까 내안에 있는 불법승이 법당이라는 바깥에 있는 불법승을 자꾸 끌어당기는 거죠.
서로 파동이 일치하는 거죠. 그러니까 절에도 어떨 때 확 끌려서 절에 열심히 나올 때가 있고요. 열심히 공부하던 사람이 갑자기 마음이 확 떨어져서 1~2년 확 쉬어 버리고, 몇 년 있다가 나타나시는 분도 보이시는데요.
마음의 초점이 딴 데 가서 있었던 거죠.
그렇지만 근원에서 마음공부가 자꾸 나를 끌어당기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 이유는 내가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내 바깥에 있는 부처 형상이 자꾸 끌려가는 거예요. 거기가 좋은 거예요. 그 파동과 일치하는 거죠. 절이라는 파동이 내안에 있는 불법승 삼보와 하나가 되는 거죠. 그래서 내안에 본래 불법승이 있기 때문에 불법승을 여러분이 찾는 겁니다.
그래서 공부도 내가 아상으로 하는 게 아니라 내안의 불법승이 무위로서 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내가 부처고, 내안의 법이 온전히 있다. “내가 바로 스님이다” “내가 바로 청정한 스님이다”절을 찾는 마음 그게 바로 스님이거든요. 불교는 상을 깨는 종교잖아요.
불교는 상을 깨는 종교인데, 상에 얽매여 있어요.
우선 스님의 복장이나 헤어스타일이 부처가 다른 종교와는 다른 상을 만들어 놨잖아요.
그러니까 상을 따라 가면 안됩니다. 머리 깎았다고 승복을 입었다고 우리가 따라가면 안 된다 는 거죠. 그건 하나의 상입니다.
스님과 재가자(在家者)가 다를까요? 다른 종교는 실체화를 시킵니다. 신은 실체적인 존재니까요. 이건 범접할 수 실체. 불교는 부처를 실체라고 하지 않습니다. 아마 똑같아요. 내 바깥에 있는 완전한 절대적인 실체, 나는 어리석은 중생 이렇게 얘기하지 않습니다.
서양 종교는 실체관이다 보니 신이 실체라는 실체관에 사로 잡혀 있지만, 불교는 그 어떤 것도 실체적인 무언가를 내세우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 타종교 성직자들은 성직자가 되면 그것은 신의 절대적인 권능을 부여 받았다고 생각 하거든요. 그래서 중생들과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되어 버려요. 신의 권능을 탁 부여 받았으니까요. 그러니까 타종교 성직자들은 여러분들과 전혀 다른 존재인거죠. 신과 중간자니까 신이 있고, 중생이 있고, 중간자가 성직자니까.
그런데 사실은 불자들도 그렇게 생각해요.
스님들은 부처와 우리 중생들의 중간자라고 부처의 대변자로 우리와는 다른 분들일 꺼야” 제가 스님이고 법사면서 굳이 이런 얘기를 왜 하겠습니까? 상을 타파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불교계 안에 상이 엄청 많습니다. 제가 처음에 이것을 깨달은 것이 출가할 때입니다. 출가하고 얼마 안 되었는데, 제 은사 스님께서 제가 일주일간 머리를 기르고 행자 생활을 하고 있는데, 며칠 안 되었을 때인데, 갑자기 스님이 아침에 새벽기도를 끝내고 올라오라고 그러시더니 머리를 깎아 주고 행자복을 입혀 주는 게 아니고 갑자기 승복을 입으라 하더니 옆에 있는 스님에게 염불하는 걸 가르쳐 주라고 하시는 거예요. 쉽게 말하자면 “야매로”왜 이렇게 급히 가르쳐 주시나 했거든요. 그 이유는 그날 스님들이 중요한 일이 있어서 다 빠져 나가야 할 일이 생겨서 저보고 절에서 기도를 해야 된다고요.(25분20초)
어쩔 수 없이 갑자기 그날 하루아침에 스님이 되어 버렸어요. 그렇게 기도를 시켜놓고 그 다음에 승복을 벗길 수가 없으니까 3~4일 만에 갑자기 스님이 되어서 그길로 행자생활을 승복을 입고했어요. 스님이 권능을 주시면서 , 일주일 안에 갑자기 신도님이 상을 당하셨는데, 마지막 재를 하고 나서 산에까지 가서 기도를 해줘라 하셨어요. 한 번도 해 본적이 없는데, 갑자기 가르쳐 주시더라고요. 왜 이 말씀을 드리느냐 하면 이처럼 불교에서는 실체적인 무엇이 없습니다. 만약에 스님이라는 존재가 어떤 실체적인 무언가가 있어서 특정한 절차를 거치지 않으면 절대 스님이 될 수 없다고 하는 Rule 이 있다고 하면 잘못된 거죠.
옛날 큰 스님들은 이러한 방법으로 출가시켰는데요. 그것보다 더한 분이 부처님입니다.
부처님은 출가하겠다고 찾아오면 “오라 비구여” 한 마디면 그 자리에서 바로 스님입니다.
부처님이 “오라 비구여” 하면 바로 스님이 되는 거예요.
거추장스런 절차가 있고 행자생활 6개월이 필요한 게 아니었습니다. 나중에 필요에 의해서 조금씩 조금씩 절차를 만들고 했죠.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냐 하면 불교는 실체적인 무언가가 있는 게 아니라 스님이 되었다고 특정한 힘이 부여되거나 신도님들이 축원하고 기도하면 약발이 안 받고, 스님이 하면 엄청난 기운이 생기고 이런 게 아니라는 거죠. 신도님들 중에도 정말 청정한 마음으로 열심히 기도한다면 스님보다 기도의 공덕이 깃들 수 있죠. 당연히 승복을 입었기 때문에, 출가한지 몇 년이 되기 때문에, 유력한 종단이기 때문에, 큰절에 있었기 때문에 그런 건 전부 다 상임니다. 정말 상이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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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그렇게 뚝딱 스님이 되고 나니까, 아~ 이렇게 갑자기 나는 정신은 스님이 아닌데, 몸은 스님이 돼 버린 거 에요. 그때 제가 깨달았죠. “스님은 환상이 였구나. 승복을 입혀 놓으니까 되는 구나” 그런데 그 때부터 내 마음자세가 달라지더라고요. “나는 스님이다 ”라는 생각 이 마음이 스님을 만드는 거지, 몸이 만드는 게 아니었구나.
이것은 별일 아닌 에피소드 인데, 그때 전국에 무량 큰스님 찾아다니면서 천도제를 봉행하는 단체가 있었어요. 은사스님 계시는 절에 와서 한번 하겠다고 해서 제가 집전을 했는데요. 그러고 나서 그날 나름대로 약간 특이한 체험을 했었는데요. 그전에 같으면 두려운 체험 같으면 두려움에 떨었던 거 같은데요. 그런 제가 떨지 않고 “야 어디 이 스님한테 감히 이런 마음으로” 그 어떤 두려운 경계가 오는데도 하나도 두렵지가 않더라고요.
나중에 가만히 보니 제가 달라진 건 하나도 없는데, 제 의식이 “나는 스님이야”.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기 전, 성도 직전에 마왕 파순이 와서 온갖 공격을 했지만, 마왕 파순이 물러갔듯이 , 그 온갖 경계가 오더라도 “부처님을 따르는 스님인데 말이지”란 마음이 있으니까 전혀 두렵지 않더라고요. 그런데, 그것이 스님이니까 생긴 게 아니라 “내가 스님이야”라는 의식이 생기니까 깃든 거 였더라고 요.
불법승 삼보중에 승보는 특정한 부처님의 모습을 얘기 하는 게 아닙니다. 내 마음의 청정한 내가 깨달음을 얻겠다는 발심한 마음, 그 마음이 승보입니다.(30분11초)
즉 확실하게 말씀드리는데, 여러분의 마음속에 “내가 청정한 승보(승가)다” “수행자 다” 라는 굳은 믿음이 있으면, 승복 입은 분에게는 힘든 일이 있을 때 더 도와주는데, 승복 안 입었다고 덜 도와줄까요? 부처님이 그렇게 상에 빠져서 승복 입은 상을 보고서 판단을 할까요?
사람을 그런 상을 갖고 판단하면 그게 무슨 부처겠습니까? 일체 상은 상관없는 거예요. 우리는 그냥 편의상 세속에서 “스님이다” “재가자다” 이렇게 이름붙일 뿐이지. 여러분 내면에 내가 법을 구하는 마음이 간절하게 있다. 그것이 바로 승보거든요. 내가 바로 스님인 것입니다. 사실은 아무런 차이, 차별이 없어요.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신도님들이 이런 면에 있어서 좀 깨어나셔야 합니다. 그래서 너무 과도하게 상을 가지고 스님들을 대하면 스님들이 이제 아상 ~상 ~상 중생상에 이어 스님상이 생겨 버립니다. 이게 스님들의 공부를 방해하는 아주 견고한 상이 되어 버려요. 저는 그러한 것들을 많이 봤거든요. 아 그러니까 오죽 했으면 스님들이 중생들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상만 버리면 되는데, 스님들은 아인중생수자 중상까지 버려야 된다. 이게 제일 견고하다. 이런 표현까지 쓰겠습니까? 모든 상은 타파해야 되는 거죠. “남자다” “여자다” “재가자다” 온갖 상들이 있잖아요. 다 진실이 아닙니다. 상을 깨는 게 불교인데, 불자들이 상에 얽매여서 되겠습니까? 그래서 불자가 “내가 바로 불법승 삼보 다” 라는 굳은 믿음, 굳은 믿음에 의지하는 것 그것이야 말로 삼귀의 정신이죠.
그래서 불교경전에 뭐라고 나와 있냐 하면 불법승 삼보의 굳은 믿음을 가진 사람은 그 어떤 두려움에 처해도 삼보를 믿고 의지하면 그러고 삼보를 생각하고 떠올리고 삼보를 부르면 바로 그 두려움에서 벗어 날 수 있다. 이런 표현들이 나오거든요.
제가 하여간 출가초기에 다양한 경계체험들을 하고 공부하다 가도 온갖 체험들을 할 때도 아무런 정말 흔적이 없었던 것들이 “내가 삼보인데 말이지” “내가 거룩한 불로서 삼보가 거하는 법당인데” 이런 굳은 믿음이 있으니까 그 어떤 것도 두렵지가 않더란 말이죠. 그래서 불법승 삼보가 내안에 있다고 생각하는 굳은 믿음, 의지 여기에 안주하는 것이야 말로 가장 큰 공부기 때문에 스님께서 “그대는 불법승 삼보에 의지해서 안주하라” 그랬더니 지금 화상을 배웠고 승보는 화상 “ 아~ 훌륭한 법문을 해 주시니 당신이 바로 승보시군요. 당신이 거룩한 스님이 시군요. 거룩한 스님에 대한 믿음이 생겼습니다. 승보는 제가 알았는데, 그럼 어떤 것을 불보와 법보라 합니까? 불보와 법보는 대단한 게 아니다. 마음이 바로 부처고 법이다.
여러분 다 마음을 갖고 계시잖아요. 여러분이 가진 이 마음을 ~~~~에서는 일심이문이라는 표현을 하는데, 즉 마음은 하나의 마음이지만 방편으로 두 가지로 칭합니다. 하나는 진여문이고 하나는 샛별심입니다. 즉 진여심 샛별심이라는 거죠. 즉 우리 마음은 본래 하나인데, 한마음인데, 한마음을 편의상 중생들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면 우리가 분별심을 일으키는 마음을 중생심, 마음 중에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마음, 느낌, 의지 실체가 아니잖아요. 생각 의지 의식 이런 것들은 전부 다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허망한 샛별심이죠. 그건 중생심이죠.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마음이 있어요. 그런데, 마음이 생겨났다가 사라지려면 바탕이 있어야 돼요.
여러분, 나무가 자라려면 허공에서 자랄 수는 없잖아요. 뿌리가 땅이라는 배경, 바탕에 뿌리가 있어야 거기에 뿌리를 내려 자랄 수 있거든요. 그림을 그리려면 허공에다 그리면 그림이 아니잖아요. 스케치북이란 바탕이 있어야 거기다 그림을 그려야 그림이 드러나잖아요.(35분/18초)
바탕이 없으면 결코 드러나지 않습니다. 빔 프로젝트가 아무리 빛을 쏴줘도 하얀 스크린이 있지 않으면 그림은 드러나지 않아요. 허공중에 사라져 버리죠. 즉 우리는 생멸심이라는 중생의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잖아요. 이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은 얘가 나온 자리가 있어야죠. 본바탕에 마음이 있어야죠. 그걸 진여문 이라고 합니다. 진여가 바로 부처거든요. 참되고 여여한 본마음이 있다는 거죠. 여여하다는 것은 한결같다는 거죠. 생겨나고 사라지지 않는 마음 즉 불생불멸의 마음. 무생법인의 마음. 즉 우리 마음의 본바탕은 그렇게 진여, 부처의 마음 그 위에 생멸심이 왔다 갔다 할 뿐이죠. 그런데, 생멸심과 진여심은 둘이 아닌 하나예요. 내 마음이 불성을 깨달으면 “생각이 일어났어요” 생각이 일어났다는 그 자체는 중생심이 일어 났다는 건데, 중생심이 일어났다는 자체가 어디서 일어났느냐 부처라는 배경이 없으면 그 생각이 일어 날 수가 없습니다.
바다와 파도의 비유처럼 바다가 있어야 파도가 치잖아요. 온갖 파도들은 생멸심입니다. 바다 자체가 진여문, 진여심이죠. 생각이 일어났다. 감정이 일어났다. 여러분이 이 소리를 들었다.(죽비 치는 소리) 모든 작용이 일어났다.
일어난 바탕이 있다. 배경이나 나온 자리가 있다는 말입니다. 원래 자리. 말이 나오면, 말이 나온 자리가 있다는 겁니다. 말머리가 있다고 불러서 말보다 앞서 머리가 있다. 말이 나올려면 말이 나온 배경에 말의 앞자리가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그게 말머리라고 해서 화두입니다. 화두라고 말은 쓰지만, 그 말을 보라는 게 아니에요. 말이 나온 자리, 말이 나온 이전자리를 보라는 겁니다. 이처럼 우리가 마음이 있다는 것은 중생심이 있다는 거죠. 중생심이 있다는 것은 곧 본래 마음에 부처의 마음이 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그래서 번뇌즉불 이라고 합니다. 번뇌가 있다는 것은 그 안에 부처가 있다는 거죠.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은 벌써 부처가 있다는 걸 증명합니다.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도 육근이 육경을 접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독자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보는 놈이 있다. 듣는 놈이 있다. 라는 표현을 쓰죠. 그래서 우리에게 마음이 있다고 하는 것은 생멸심을 마음이라고 여기지만 생멸심을 일으키는 바탕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 바탕을 불교에서는 한마음, 일심 이라고도 하고 통상 그것을 마음이라고 해서 깨달음이 뭐냐 하면 마음을 깨닫는 것이라고 하잖아요. 불성, 본래면목, 참아, 진아 이런 것을 마음이라고 표현합니다.
선에서는 마음, 법이라고 표현합니다. 법을 깨달아야 된다. 마음을 깨달아야 된다. 그것은 생멸심을 깨달아야 하는 게 아니라 진여심을 깨달아야 한다는 거죠. 그래서 뭐가 부처냐 하면 그 마음 안에 있는 본래 마음, 마음이 법이고 부처다. 불교에서는 마음이나 법으로 이름 부쳐진 다양한 반야, 열반, 해탈이니 그 근원의 자리를 이름 붙일 순 없지만 마음이 바로 법이고 부처입니다. 법과 부처는 둘이 아니다. 불법승 삼보가 세 가지가 아닙니다. 따로 떨어져 다니는 게 아니라 내안에 다 구족되어 있다. “오늘에야 비로소 죄의 성품이 마음 안에도 마음 밖에도 중간에도 있지 않았으며, 마음이 그러하듯 불보와 법보도 둘이 아닌 줄 알았습니다”. 죄의 성품을 찾아봐라, 안에 있나, 밖에 있나 중간에도 없다. 이런 표현을 씁니다.
이에 혜가 대사께서 그가 법기 인 줄 아시고 바로 기특하게 여기시어 머리를 깎아 주시며 말씀하셨다. “너는 나의 보배이다. 구슬찬 자를 써서 승찬 이라고 한다. (40분/13초)
제자로 받아들이는 장면입니다. 그래서 혜가의 제자가 되어서 3조가 된 모습입니다.
그리고 한동안 병도 차츰 나아지고 구족계를 받았고 혜가스님을 한동안 시봉하기도 했습니다. 이 스님은 특이하게도 큰 나무 아래서 합장한 채 서서 열반하셨다고 씌어져 있습니다.
성철스님께서는 이 신심명을 중요한 텍스트로 여기셨는데, 성철스님이 중도를 불교의 핵심이라고 하면서 많이 설파하셨고 중도의 총론이 바로 신심명 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철스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부처님께서 한평생 말씀하신 중도를 이토록 아름다운 언어로 어떻게 이렇게 설명 할 수 있었는지 놀라울 정도다. 중도에 대해서 신심명보다 더 잘 설명 할 수는 없다”신심명이야 말로 “불이법”“중도의 사상”“무분별의 사상”을 가장 잘 설파하는 가르침이다. 라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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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다음부터 신심명의 본문을 공부할 텐데요. 신심명의 핵심 가르침은 이 첫 번째도 나오듯이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나니 다만 분별하여 선택하지 말라” “불이법”둘로 나누지 않는 차별하지 않는 “불이중도”를 설하고 있습니다. 둘로 쪼개고 나누어서 그것을 분별하고 해석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분별의식이 작용해서 분별의식이 우리를 즐겁다느니, 슬프다느니, 행복하다느니 좋다느니 불행하다느니 나쁘다니 우리 인생이 있는 그대로 아무 문제없는 인생을 좋다거나 나쁘다는 인생으로 뒤바꿔 놓기 시작합니다. 가상현실을 만들어 내기 시작하는 창조주가 바로 이 분별심입니다. 거짓 창조주가 내 인생은 아무 문제없이 있는 그대로 펼쳐지고 있는데, “내 인생은 괴로워” “저사람 인생은 행복할꺼야 ”이렇게 거짓 정보를 진짜라고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죠. 그런 거짓정보를 만들어 내는 조작공장이 바로 분별심이죠. 분별의식은 끊임없이 우리를 남들과 비교하게 만듦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자꾸 거부하게 만듦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세상 모든 것과 나를 비교하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사람을 만나면 자동반사적으로 그 사람이 나보다 나은지 못한지 비교합니다. 그래서 나보다 나으면 길 수 밖에 없고 열등감을 느낄 수밖에 없고, 나보다 못한 사람 앞에서는 우월감을 느끼면서 잘난 척을 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사람으로 자동적으로 모든 사람을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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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얘기를 하잖아요. 남자들은 서로 만나면 일단 서열정리부터 한다. 형님인지, 아우인지, 보다 위인지, 아래인지, 그 정리가 끝나야 서로 친해 질 수 가 있다는 거죠.
그런 것처럼 분별이 되어서 그 분별한 것 중에 어느 정도인지 해석하기를 바랍니다. 정해놓기를 바랍니다. 정해진 다음에 나는 이정도 이니까, 이렇게 나아가야 하고 추구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걸 향해서 끊임없이 앞만 보고 달려가죠. 죽을 때 까지 한 번도 쉬지 않고 그 추구한 끝에 뭐가 있을지는 모른 채, 끊임없이 추구만 하다가 그 추구한 것을 이루자 마자 그 다음날 죽을병에 걸리거나 교통사고로 죽을 수도 있는데, 그렇다면 수십년 동안 추구한게 허망한거 아닙니까? 그 추구 할 시간에 있는 그대로 삶을 누리고 감동하고 살았으면 삶을 온전히 살 수 있었을 텐데, 우리는 주어진 삶을 살지를 못하잖아요. 우리는 주어진 삶을 살지를 못하는 것은요. 생각이 일어나는 것은 생각은 무조건 과거와 미래와 연동되어 일어 날 수 있거든요. 생각이 분별심을 가져다 주거든요. 생각이 일어난 순간 과거와 미래와 연동된 가상현실이 시작된 겁니다.(45분10초)
과거나 미래로 생각이 가거나 오거나 하게 되면 지금 이 순간에 결코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존재하거나 아니면 생각하거나 둘 중에 하나밖에 하지 못하거든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존재하지 못하고 생각 속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지금 이대로 여기에 생각이 없을 때 그 어떤 분별도 일으키지 않았을 때, 지금 이대로 있는 이 평범하고 아무 맛이 없는 맛(무맛), 물 같은 , 아무 특별할 것도 없는 평상심, 아무렇지도 않는 있는 그대로의 아무 일없는 자리, 이 자리를 귀한 줄 모르는 것입니다.
마치 뭐와 같나 하면 이것을 아잔브라함 스님은 이런 표현을 쓰셨어요.
시골에 있는 어부가 꿈을 꾸기 시작한 것이죠. 내가 도시에 가서 열심히 돈을 벌어서 10년 ,20년 동안 종자돈을 벌어서 차곡차곡 안 쓰고 시골에 와서 이것보다 더 좋은 배를 사서 수확을 해서 물고기를 엄청 잡아서 돈을 벌어 배를 두척 서너척 사서 주식회사를 해서 배를 수백대 사서 돈을 벌어야 되겠지. 그때 되면 나는 노후가 되겠지. 그때 나는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통통배를 사서 편안하게 배를 띄우고 물고기를 잡으면서 노후를 즐기리라. 이렇게 생각한다는 거죠.
그 현실이 지금 있는 거 아니냐? 지금 이 사람이 통통배 하나로 하고 있는데, 지금 이미 이루어져 있는데, 그렇게 수십 년을 번거롭게 일을 벌여서 하느냐? 그런 다음에 다시 할려고 하느냐? 지금 이미 그것이 완전하게 구족되어 있는데, 그것과 똑같은 것이죠.
일없는 사람, 일없는 사람이란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 하되, 한바 없이 하게 되었을 때, 분별함 없이 분별 되었을 때, 거기에 얽매이고 구속됨이 없이 그걸 하게 된다는 거죠.
깨달음이라는 것이 엄청난 것을 돌고 돌아서 무언가를 엄청나게 설득하는 자리가 아니라 지금 이미 이 자리에 구족되어 있는데, 얼마나 완전한 것인지를 다시금 돌이켜 깨닫는 것입니다.
이 신심명을 공부해 보면 게송들이 너무나 아름답고 놀라울 정도입니다.
그래서 그 부분에 대해서 좀 더 공부를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49분26초) 끝.
첫댓글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2강을 녹취하고 있습니다. 함께 해요. 랄랄라.
이것처럼 볼 수 있듯이 우리도 마찬가지거든요. 큰 고통이 찾아올 때 괴로움이 찾아올 때 괴로움이 우리를 깨달음에 발심하게 만듭니다. 공부를 하도록 만들고 우리를 공부로 이끌게 됩니다.
우리가 과거에 잘못한 것에 대해서 죄의식을 갖는 것은 생각이 일어날 때만 죄의식에 사로잡힐 뿐, 생각이 없을 때는 아무것도 없거든요. 죄도 사라지고 그리고 죄의식에 사로잡힌 마음만 있고 죄를 찾아보려고 아무리 뒤져도 죄의식의 실체가 있는 게 아니거든요.
이 말은 우리 스스로 생각으로 한 생각으로 일으켜 스스로 일으켜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겁니다. 스스로 죄의식을 창조해 내는 거죠.
@무멍나 여러분이 괴로움에 빠져 있다면 그것은 특정한 생각이 나를 괴롭히는 것입니다. 내가 만든 특정한 생각이 나를 괴롭히는 것이죠.외부에서 나를 괴롭힐만한 무언가가 있는 게 아니라 내 바깥에 있는 중립적인 어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내 스스로 내식대로 좋다 나쁘다 해석해 놓고 거기 스스로 걸려 넘어지는 것과 똑같다.
괴로움을 없애겠다고 하는 마음이 진리를 찾는 마음이거든요
(20분 18초)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무멍나 절을 찾는 마음 그게 바로 스님이거든요.
“나는 스님이다 ”라는 생각 이 마음이 스님을 만드는 거지, 몸이 만드는 게 아니었구나.
내 마음의 청정한 내가 깨달음을 얻겠다는 발심한 마음, 그 마음이 승보입니다.(30분11초)
천도재/천도재(薦度齋)는 죽은 이의 명복을 빌기 위해 독경 · 시식(施食) · 불공 등을 베푸는 의식을 말한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30분 11초)
@무멍나 여여하다는 것은 한결같다는 거죠.
그래서 뭐가 부처냐 하면 그 마음 안에 있는 본래 마음, 마음이 법이고 부처다. 불교에서는 마음이나 법으로 이름 부쳐진 다양한 반야, 열반, 해탈이니 그 근원의 자리를 이름 붙일 순 없지만 마음이 바로 법이고 부처입니다. 법과 부처는 둘이 아니다. 불법승 삼보가 세 가지가 아닙니다.
(40분 13초)
@무멍나 4조 도신
이것처럼 볼 수 있듯이 우리도 마찬가지거든요. 큰 고통이 찾아올 때 괴로움이 찾아올 때 괴로움이 우리를 깨달음에 발심하게 만듭니다. 공부를 하도록 만들고 우리를 공부로 이끌게 됩니다.
자식이 내 마음대로 안 될 때 내 일이 내 마음대로 안 풀릴 때, 내가 업장이 얼마나 두터워서 이럴까 생각합니다. 그것은 업장이 두터워서 그렇다는 내 생각으로 만들어 낸 것일 뿐이다. 지금 내 현실은 있는 그대로의 중립적인 해석할 수 없는 현실이거든요. 머리가 해석할 수 있는 일체의 모든 해석은 내 머리를 가지고 내가 만들어 낸 것 일 뿐입니다
괴로움이 찾아 왔다는 것은 “깨어나라는 신호” “메세지(message)” 요즘 말로 시그널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_()_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_()_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요번주 아카데미 휴강이라서요... 용기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따라서 일단 시작해봅니다. 저는 3강 녹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