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化解說士 동산과 함께 하는 文化探訪
□일시: 3월20일(수) 오후 3시
□모이는 곳: 광화문역 5번 출구
□답사코스
○근대 건축은 일본 풍에서 서양의 것을 이식 식민통치
수단으로 사용 되었다.
○1919년 3.1운동 이후 1920년대 사회 변화가 일어 났다. 일본이 중공업을 육성하고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자 도시 개조작업을 시작 새로운 상황이 전개된다.
건축 방식에도 새로운 요구가 생긴다.
철근콘크리트 방식과 타일등 새로운 방식이 도입된다.
○동산의 문화 해설로 그동안 알지 못했던 것을 알아갈때 큰 기쁨으로 다가온다.
자, 시간 여행을 떠나보자~~
일민 미술관
양식주의에서 실용주의 과도기 모습
언론과 문화 진흥에 헌신한 일민 김상만의 유지를 기르기 위해 설립된 비영리 문화 단체
동아일보 사옥
1909년 안순환이 차린 명월관 자리
층별 100평 20개의 객실
수라상(임금이 먹던 상차림)을 일반 백성이 먹는 다는 개념으로 크게 번창 약 10여년 영업 최초의 사설 식당
그러나 화재로 소실 되었다.
명월관 기생들이 일제에 항거 독립 운동을 했다.
청계천 모형 물길
다리가 표시되어 있다.
청계천 상류 모습
박경호 하순월부부
廣通橋 아래에서 해설 하는 동산
광통교는 교통 흐름에 방해가 되어 상류쪽 150여m 이동 大廣通橋 태조때 흙다리가 유실 되어 태종이
石橋로 지었다.
신덕왕후 강씨에 대한 태종의 반감으로 무덤 봉분을
정릉동으로 옮기고 병풍석과 석물을 가져와 보수 공사에 사용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광통교 아래에 쳐 박아둔 탓에 21C까지 온전한 상태로 남아 있다.
석물을 거꾸로 뒤집어 놓은 모습
교각이 45도로 틀어져 있는 것은 물살 저항을 줄이기
위함이다.
庚辰地平 1760년 영조 36년 땅을 평평하게 하고 기준을 세웠다.
영조가 스스로 잘 한 일 세가지를 꼽았다.
1.탕평책(서인,남인을 골고루 등용)
2.균역법(세제 개혁,세금을 군포와 쌀로 내게 해서 탐관오리의 부정을 막았다.
3.청계천 준천(준설)
癸巳更澹 1833년계사년에 순조 33년에 다시 준설후
오간수문에서 큰 잔치를 베풀었다.
한전 서울 본부
1923년 관동 대지진후 내진 설계를 했다.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철근 콘크리트 건물
실용주의 건축물 기둥이 없고 복도 개념이 사라졌다.
(내부 공간 확장성)
국가 등록 문화재 1호
1~3층 수직 창 (벽이 힘을 받게 설계)
꼭대기는 철근 콘크리트 내력벽 설계
옛 한전 모습 오른편 뒤에 명동성당
옛 경성 전기 본사 모습을 보여주는 동산
민족 자본을 위해 우리 스스로 건립한 은행
1899년 고종황제께서 대한제국 경제 근대화와 금융 자주화를 위해 창립한 대한 천일 은행
식민 자본에 저항하기 위해 내탕금을 써서 만든 은행
대한제국 광통관
조선 상업은행 종로 지점
대한 천일은행 본점
이 당시 남대문통 거리 모습을 가르키는 동산
옛 광통교 자리
조흥은행 본점
돌출 되어 있는 모습
한국인 건축가 김중업이 설계
普信閣을 배경으로 단체 사진을 찍었다.
普信閣
원래 이름은 종루
1869년 고종 6년에 재건
王의 중요한 임무중 하나가 시간을 정해 주는 것이다.
관상감(하늘을 관측)이 광화문 문루에서 북을 치면 보신각에서 종을 쳤다.
밤에 28번 (인정 반 자시 28번의 북소리)
아침에 33번 조용한 가운데 울려 퍼지는 북소리
상상만 해도 전율이 느껴진다.
근대 건축물 남계양행
미국에서 공부한 건축가 박인준의 설계사무소
NH농협은행
1926년 7월5일 조선일보 사옥으로 건립
조선중앙일보 사옥으로 쓰였다.
당시 사장 여운형이 1936년 8월13일자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 선수 일장기를 지워 일제에 의해
폐간 되었다. 양정고 선생 시절 여운형이 손기정에게
마라톤을 가르쳤다고 설명하는 동산
후지산 모양 이었으나 세멘으로 지워버린 모습
태화빌딩
옛 태화관 자리
1918년 명월관(태화관 종로 분점)
33인이 독립선언문을 낭독하는 모습
승동교회
종로구 인사동에 위치한 대한예수교 장로회 소속 교회
외국인 교수를 추방 조선인 교수들에 의한 조선 신학교가 시작
백정교회
백정은 세습 경제적 여유가 있어 길드 조직
백정 출신 박성춘 장로의 인도로 10여명 백정이 다님
옛 승동교회
3.1운동 당시 학생들 집합장소였다.
승동교회 정문 앞이 탑골 공원이다.
박성춘장로 아들 박서양
조선인 최초 세브란스 의대 서양 의사
만주 용정에서 조선인 치료
윤동주,신흥무관학교가 있던 용정
민병옥 가옥 앞에 서서 해설 하는 동산
우리나라 1세대건축가 박길용 설계
개량한옥 문화주택
한옥이 현대 사회에서 카페,한옥 스테이,사무실,호텔로
활용 되어 공간 재 창조가 진행되고 있다고 설명하는 동산
천도교 중앙 교당
동학 조선시대 천도교인이 300만
불교 다음으로 교세가 컸다.
중앙교당은 1919년 완공 하려 했으나 3.1운동으로 1920년에 완공 되었다.
이 당시 서울 3대 건축물은 남산 조선총독부, 명동성당
운리동 천도교 중앙 교당
교당 앞에서 정석영 윤규숙부부
벽돌 조적
벽돌하고 돌을 사용
2.000명을 수용 할 수 있는 중앙교당
기둥이 없다.
천도교 중앙 교당 관계자께서 천도교에 대해 설명해 주시고 있다.
나선형 철제 계단과 원래 4.000명 규모로 설계 했으나
조선총독부 반대로 2.000명 수용 공간으로 지었다.
바닥은 마루였고 중앙에 기둥이 없는 구조다.
당시 독립운동에 전재산을 바친 천도교인이 많았다.
헌법 제 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제국에서 최초로 대한민국으로 바꾼 천도교
국내적으로 큰 혁명 같은 사건 이라고 설명하신다.
교인끼리 서로 동덕이라 부른다.
동덕여중고 동덕여대 천도교의 미션 스쿨이다.
3.1운동, 개벽 간행,어린이 여성 인권,지구환경까지 존중하는 천도교
소파 방정환 선생은 천도교인이다.
어린이라는 말을 만들었고 어린이날은 천도교에서
시작되었다.
문화탐방 후 브라암스라는 찻집에서 근대 건축물 투어를 마치고 담소를 나누는 문화탐방팀
문화해설사 동산 김인철동기
31회 정구승 동기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