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의 달 9月 마지막날에
~~~선비의 발자취인 "회연서원"을 둘러보다~~~
언 제 ; 2018년 9월 30일
갔는곳 ;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동강한강로9
명상의 달 9月 마지막날에 옛 문화와 현인들의 지혜가
듬뿍 담겨있는 선비촌락을 살펴 보면서 여러곳에 감미로운
자욱들이 남겨져 있어서 보고 또 봐도 아~~하는 감탄사가 연거퍼
나올 정도이니 이런 문화와 역사를 자주 음미하고픔을 느끼면서 하루의
즐거운 시간들을 장식하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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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연서원 배치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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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흘구곡의 시구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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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연서원은===
수륜면 신정동(현: 신정리) 양정마을 봉비암 아래 남향받이 서원이 하나 있다.
교남(嶠南), 곧 영남 오현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한강 정구(寒岡 鄭逑, 1543~1620)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회연서원(檜淵書院)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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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구가 제자들을 교육하던 회연초당이 그의 사후인 인조 5년(1627)에
이 지방 유림의 공의에 따라 서원이 되었고, 숙종 16년(1690) 사액되었다.
고종 5년(1868)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원되었다가 1974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대부분의 건물이 보수·복원되거나 신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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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연서원은 한강 정구가 제자들을 교육하던 회연초당이 그
의 사후에 그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사림들의 공의에 따라 서원이 되었다.
일반적으로 서원건축은 교육공간과 선현추모의 공간이 일직선상에 놓이는 전학후묘(前學後廟)
또는 전묘후학(前廟後學)의 구조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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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회연서원은 비교적 좌우가 길고 평평하며
너른 지형 탓인지 그것이 나란히 놓였다. 새로 지은 누각에 올라 보면
오른쪽에 강당과 수학하는 유생들이 기거하는 동재·서재가 자리잡았고
두 구역을 가르는 담을 사이에 두고 왼쪽에 사우(祠宇)가 배치되었음이 한눈에 조망된다.
그밖의 부속건물들이 이 주위를 감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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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당을 제외한 건물들은 모두 새로 손을 보아 그리 눈에 들지 않는다.
정면 5칸 측면 2칸 홑처마 맞배지붕의 강당 건물은 길게 빠진 지붕에 비해
덤벙주초 위에 놓인 두리기둥이 다소 가늘어 하부가 약해 보인다. 가운데 6칸 마루가
널찍하고 그 양 옆에 측실이 하나씩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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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연서원 설명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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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선생 신도비석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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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 안쪽 벽에는 사액되었다는 측기가 적힌 ‘檜淵書院’ 현판을 가운데 두고
독특한 글씨체로 유명한 미수 허목(眉叟 許穆, 1595~1682)이 쓴 ‘望雲巖’(망운암),
‘玉雪軒’(옥설헌) 편액이 좌우에 걸렸고, 돌아가며 두어 점 제영이 덧붙었다.
한강이 이곳에 초당을 꾸밀 때는 뜰에 가득 매화나무를 심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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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하여 백매원(百梅園).
“자그마한 산 앞에
자그마한 집 하나
뜰 가득 매화 국화 해마다 늘고
물과 구름 있으니 그림이어라
뉘 있어 나만큼 사치로울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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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읊조리던 그 뜰은 비었고, 한 장의 나무판에 새겨진 노래만이 남았다.
왼쪽 측실 옆 퇴보 위에도 미수 글씨의 현판이 또 한 장 걸렸다.
‘不愧寢’(불괴침) ― 부끄럼 없는 잠자리. 부끄러움 없는 하루를 보내고 드는 잠자리는 꿈도 없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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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나무 없는 백매원 뜰을 나와 왼쪽으로 담장을 끼고 돌면 사람 하나 근근이
들락거릴 문 하나를 남기고 사방을 두른 담장 안에 한강의 신도비가 섰다. 무덤으로
향하는 길, 곧 신도에 세우는 비라서 신도비인데 무슨 연유로 여기에 있는지 모를 일이나
흔치는 않은 경우다. 사면 가득 글씨가 빽빽한 비문은 읽어볼 엄두가 나지 않는 대신,
툭 불거진 눈을 하여 흡사 개구리를 닮은 얼굴에 유심히 보아야 눈에 띄는 두 가닥 수염을
밭은 목에 붙인 귀부가 어쭙잖은 모습으로 눈길을 끈다. 비문은 월상계택(月象谿澤)으로 나란히
불리던 조선 중기 4대 문장가의 한 사람 상촌 신흠(象村 申欽, 1566~1628)이 짓고, 글씨는
김세렴(金世濂, 1593~1646)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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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구의 자는 도가(道可), 호는 한강(寒岡),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본관은 청주, 출신은 성주이다. 아버지 사중(思中)이 성주 이씨와 혼인하여 성주에 정착했다.
한훤당 김굉필의 외증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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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부터 총명했던 그가 본격적으로 수업의 길에 들어선 것은 13세부터이다.
그에게는 종이모부가 되는 남명의 고제(高弟) 덕계 오건(德溪 吳健)이 성주향교의
교수로 부임했던 것이다. 21세 되는 1563년에는 퇴계를 찾아 도산 문하에 발을 들여놓았다.
이어 24세 때인 1566년에는 남명에게 나아가 덕천 문하에도 이름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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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세 봄에 과거를 보러 상경하였다가 명종의 외척 윤원형 등의 전횡으로
과거장이 문란함을 보고 느낀 바 있어 시험에 응하지 않고 그대로 낙향하여
이후로는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1573년 동향으로 이미 벼슬을 하던
동강 김우옹의 추천으로 예빈시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후 여러 벼슬을 거쳐 광해군이 즉위하던 1608년에는 대사헌에 오르기도 하였으나,
당쟁으로 시끄러운 내직을 피해 주로 외직에 있으면서 지방 학문의 육성과
백성의 교화에 자신의 이상을 심으려고 노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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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사람들은 한강을 한훤당 김굉필, 일두 정여창, 회재 이언적, 퇴계 이황에
이어 교남의 5현으로 꼽기도 하고, 동향의 친구이자 문신이었던 동강 김우옹과 함께 흔히
이강(二岡)으로 부르며 자랑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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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강 김우옹선생~~~
===상세내용===
이 비는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 1540~1603)의 학문적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경종 3년(1723)에 건립된 신도비(神道碑)이다. 귀부(龜趺)와 이수(螭首)는 화강암으로
모두 완전한 형태이고, 비신(碑身)은 오석(烏石)으로 되어 있다. 전체 높이는 404㎝이고
비신의 높이 216㎝, 귀부의 높이 88㎝, 이수의 높이 100㎝, 두께 28㎝이다. 비문은
해서체(楷書體)로 되어 있으며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이 짓고 미수(眉叟) 허목(許穆)의
글을 집자(集字)하였다. 앞면과 뒷면 각 27행, 측면 7행으로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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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옹은 성주 칠봉리(七峰里-사도실) 출신으로 자는 숙부(肅夫)이며 호는 동강이다.
어려서부터 한강(寒岡) 정구(鄭逑)와 함께 영남학파의 양대 산맥인 남명(南冥) 조식(曺植)과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하에 출입하며 정통 성리학(性理學)의 맥을 이어 받았다.
명종 7년(1552)에 진사(進士)가 되고, 선조 즉위년(1567)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지성과 행동을 겸비한 깨어있는 선비들이 주로 임용되던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쳐 직제학(直提學)·대사간(大司諫)·대사헌(大司憲)·참판(參判)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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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후(死後)에는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고
시호(諡號)는 문정(文貞)이며, 청천서원(晴川書院)에 배향되었다.
동강은 한강과 함께 성주권(星州圈)의 양강(兩岡)으로서 정치적·학문적으로
많은 업적을 남겼으며, 『동강집(東岡集)』·『속자치통감강목(續資治通鑑綱目)』과 함께
『일기(日記)』 등 많은 시문(詩文)을 저술하였다.
가을 향기 가득한 연주곡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