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한국지회(韓國支會)
신호는?
일 분 정도 정지했다가 우리 쪽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장로님들이 그놈과 부딪친 걸까?
그런 것도 같은데 모르겠습니다, 도련님.
사도평의 대답을 듣고 미간을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겨 창밖을 바라보던 양화군의 눈에 갑자기 놀라는 기색이 떠올랐다.
차 세워!
격렬한 어조로 외치는 양화군의 말에 운전을 하던 친위대원은 있는 힘껏 브레이크를 밟았다.
끼이익!
왕복 2차선 도로를 신호와 속도 제한을 무시하며 120킬로미터가 넘는 속도로 질주하던 검은색 차가 요란한 타이어 마찰음과 함께 급정거했다.
달리던 속도를 못 이긴 차는 도로에서 서너 바퀴를 돌다가 덜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정지했다. 차량이 뜸한 산길이었기에 망정이지 다른 차가 있었다면 대형사고로 이어졌을 것이 분명했다. 차가 뒤집히지 않은 것만도 천만다행이다 싶을 만큼 위험한 급정거였다.
정지한 차에서 사도평과 양화군이 동시에 뛰어나왔다. 그들의 눈은 도로 우측의 숲을 향하고 있었다.
진 장로님!
경악 섞인 목소리와 함께 양화군의 신형이 순간적으로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들이 60미터쯤 지나쳐온 뒤쪽 도로변에 나타났다.
그 뒤를 사도평이 따랐다. 운전을 하던 친위대원은 차를 도로변에 세우고 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양화군은 한쪽 무릎을 꿇으며 땅에 쓰러져 있는 사람의 상체를 들어 가슴에 앉았다. 막 양화군의 뒤에 도착해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도평의 안색이 시체처럼 창백하게 질렸다.
양화군의 가슴에 앉긴 사람은 오른팔이 어깨에서부터 매끈하게 잘려 나가고 왼쪽 가슴이 반쯤 함몰되었을 뿐 아니라 복부는 중단전부터 하단전까지 수직으로 갈라져 있었다. 그곳으로 구렁이 같은 내장이 꾸역꾸역 흘러나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칠공으로 피를 흘리며 초점이 사라진 눈으로 양화군을 올려다보고 있는 사람은 진영충이었다.
이게.
사도평은 떨리는 음성으로 말문을 열었지만 말을 잇지 못했다. 신호가 그들을 향해 달려오는 것을 모니터로 보며, 그는 발신 장치를 몸에 부착하고 있는 주광 장로와 일행이 그들을 향해 오는 것으로만 알았다.
그런데 나타난 것은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만 같은 모습의 진 영충 장로 단 한 명이었다. 사도평이 말을 잇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상상도 못한 장면이기 때문이다.
진 영충의 상체를 끌어안고 그의 명문혈을 짚은 손을 통해 진기(眞氣)를 보내려던 양화군은 어깨를 움찔했다.
정신을 잃은 것으로 보이던 진 영충이 반쯤 눈을 뜨며 양화군의 팔뚝을 잡고 말을 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장로님, 말씀하지 마십시오. 위험합니다. 급한 대로 응급 치료를 하겠습니다.
양화군의 음성은 나직했지만 피를 토하는 듯 절절했다.
소회주 그만 이 자리를벗어나야.
피 가래가 끓는 소리와 함께 진 영충의 입에서 힘겨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공포와 분노가 가득한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만이었다. 진 영충은 정신을 잃고 양화군의 품에서 축 늘어졌다.
양화군의 안색은 철가면이라도 뒤집어쓰고 있는 것처럼 딱딱하게 변했다. 진 영충이 말한 그가 누구인지는 자명했다. 임한이다. 그에 대해 언급하며 진 영충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진 영충은 대한호국회의 장로이고 냉철함과 대담함은 양 천종도 인정하는 인물이다.
그런 그가 공포에 질렸다는 것은 그가 입은 상처보다도 오히려 심각한 일이었다.
양화군은 상황이 자신이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음을 알았다.
돌아간다.
난데없는 양화군의 지시에 사도평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말없이 돌아서서 차를 향했다. 진 영충을 두 팔에 안은 양화군의 모습도 차 안으로 사라졌다.
그들이 탄 자동차는 그 자리에서 유턴하더니 온 길을 되짚어가기 시작했다. 올 때와 마찬가지로 신호와 속도 제한을 무시한 차의 속도는 올 때보다 더 빨랐다. 자동차의 요란한 엔진과 배기음이 그들이 떠난 자리를 메웠다.
양화군 일행이 탄 승용차가 야트막한 산을 끼고 사라졌을 때, 진 영충이 쓰러져 있던 곳에서 불과 10여 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은 숲의 나뭇가지들이 흔들리며 한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
입고 있는 옷이 피에 절어 걸레처럼 변했고, 분을 칠한 듯 희게 탈색된 얼굴이 심상치 않은 상처를 입은 듯했지만 냉혹하다 싶을 정도로 무심한 눈빛과 안색을 가진 사내였다.
쫓을 건가요? 서늘한 시선으로 승용차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임한의 등 뒤에서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가와 한의 오른편에 걸음을 멈춘 이 수진은 전신에 피를 뒤집어 쓰고 있었다.
수선화처럼 청초한 그녀가 피를 뒤집어쓴 모습은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느끼게 했다.
그녀의 눈은 격전의 현장을 떠나왔음에도 얼음처럼 차가운 살기와 분노가 파도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당연히!
한은 짤막하게 대답한 후 오른손을 폈다. 가로 세로 십 센티미터가 조금 안 되는 납작한 모니터가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모니터 상엔 점멸하는 노란 점 하나가 빠른 속도로 서북쪽을 향해 멀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그것은 한이 주광 등의 장로 일행을 따르던 호국무단의 인솔자의 몸에서 찾아낸 것이었다. 그가 그 추적 장치를 주목하게 된 것은 이 수진 덕이었다.
한은 윤 찬경과 남 국현이 예상했듯이 아무런 생각 없이 대검찰청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 아니었다. 현재와 같은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할 그가 아니었다.
그는 이 수진과 사전에 계획을 짰다.
이 준하와 이 세영의 장례식이 치러지는 광주로 내려갈 수는 없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한다고 하지만 광주는 사지였다. 가면 살아 돌아올 수 있는 확률은 전혀 없었다.
전쟁은 자신이 유리한 상황에서 이루어져야 승리를 기약할 수 있는 법이다. 그는 광주에 있는 호국회의 주력을 끌어내기로 했다. 방법은 간단했다. 그가 모습을 드러내면 되었다. 그러면 그들은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광주에서라면 필승의 자신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이 광주로 올 확률은 반반이었고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결코 광주로 오지 않을 거라는 것을 그들도 알고 있을 터였다. 한이 자살할 생각을 갖고 있지 않다면 말이다.
그 때문에 한은 자신이 모습을 드러내면 그들이 움직일 것이라는 것을 확신했고, 그들이 움직인다면 주력이 전부 움직이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설사 회의 장로들이라 할지라도 회의 인물 한둘로 그를 제거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명백한 사실이었다.
한은 광주로 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들이 원하는 대로 움직일 생각은 없었다. 적이 이미 모든 준비를 갖추고 그를 기다리는 곳으로 간다는 것은 절대적인 자신이 있거나 자포자기하지 않은 이상 불가능한 일이다.
그와 회의 싸움은 생사를 건 전쟁이었다. 그가 아무리 이 준하와 이 세영을 존경하고 사랑한다 해도 감정에 이끌려 큰일을 그르칠 정도로 그는 감상적이지 않았다.
한은 이 수진과 그녀가 이끄는 수세보원기를 태기산에 잠복시켰다. 무슨 일이 있어도 오후에는 회의 주력을 유인해 그곳에 도착할 것이라는 약속과 함께.
그렇게 이 수진은 수세보원기를 이끌고 태기산 가운데 잠복하고 있었고, 한이 태기산에 접어들어 주광과 부딪친 순간 그녀는 수보기의 형제들과 함께 움직였다.
한과 주광이 교환한 강렬한 일격은 막대한 기파를 생성했고, 그것은 긴장한 채 근처에 잠복해 있던 그녀와 일행들에 의해 곧바로 포착되었다.
한은 암향부동을 시전해 바람처럼 이동하면서 일정 정도의 기를 개방하고 있었다.
그것은 고수라면 느끼기 어렵지 않았고 이 수진은 한이 흘리는 기운을 따라 곧 그와의 거리를 좁힐 수 있었다.
그렇게 이동하던 그녀는 수직으로 양단(兩端)된 주광의 시신을 발견했다. 그가 누군지 아는 그녀와 수보기의 일행들은 경악했지만 놀라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한을 추적하는 자는 아직도 많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동하던 이 수진은 시신 옆에 떨어져 있는 위치 발신 장치를 발견 할 수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수확이었다. 그녀와 일행은 제때 한과 합류할 수 있었고 전투가 시작되기 전 그녀는 한에게 주광의 시신에서 발견한 위치 발신 장치를 건네줄 수 있었다.
무서운 싸움이었어요.
이 수진은 어눌하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그녀의 눈에 살기와 분노 대신 슬픔과 흐릿한 공포가 떠올라 있었다.
한은 묵묵히 고개만을 끄덕일 뿐이었다. 지금의 그녀를 위로할 마땅한 말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수진은 태기산에서의 전투로 형제 일곱을 잃었다. 한에 의해 절반 이상의 호국무단의 단원들이 죽고 남은 자들도 온전한 자가 드물었던 상황을 생각한다면 희생이 컸다. 그것은 그만큼 호국무단의 인물들이 강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만일 한이 하경운과 진 영충을 막아서지 못했다면 수보기의 인물들은 모두 태기산에 뼈를 묻어야 했을 것이다.
몸은? 그 상태로 지금 움직인다면 상처가 깊어질 거예요.
이 수진은 화제를 바꾸었다. 한은 당장이라도 양화군 일행이 탄 차를 쫓아갈 기세였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 비친 한은 쓰러지지 않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심각한 상처를 입은 사람이었다. 태기산에서 한이 보여준 신위(神威)를 떠올린 그녀의 눈에 경외감이 어렸다.
하지만 가지 않을 수 없소.
한은 잘라 말했다. 그라고 쉬고 싶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쉬어야 하지도 했다. 그의 상처는 이 수진이 보는 것보다도 더 무거웠다. 현재의 몸 상태로 미행을 들킨다면 그는 양화군을 상대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었다.
진 영충은 능력이 있어 그의 손을 피해 달아날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한이 살려줄 생각이 없었다면 진 영충 또한 하 경운과 마찬가지로 태기산에서 뼈를 묻어야 했다. 그러나 한은 진 영충을 살리는 쪽을 택했다. 물론 그에게 수년 내로는 회복을 기약하기 어려운 치명적인 상처를 안겨주긴 했지만.
그는 전투 중 이 수진에게 건네받은 위치 추적 장치를 몸에 부착했다. 그의 허리에 나 있는 십 센티미터가 넘는 상처와 교환한 작업이었다. 그러나 그 상처는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진 영충의 몸에 부착한 추적 장치 덕에 양화군 일행은 그의 시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호국무단원들을 공격할 때는 맨 앞에 있던 인솔자의 손에 들려 있던 모니터의 용도를 몰랐다. 하지만 이 수진이 건네준 발신 장치를 보자 그 모니터가 어떤 용도로 쓰이는 물건인지 깨닫는 데는 일초도 걸리지 않았다.
잠시 태기산에서의 전투를 돌아본 한의 눈이 침침하게 가라앉았다.
하 경운과 진 영충의 능력은 가공할 정도였다. 이미 주광을 죽이며 상처를 입은 그였기에 그 혼자였다면 두 사람을 상대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곳에 있었던 것은 그 혼자만이 아니었다. 이 수진이 이끄는 수보기의 형제들이 그와 함께 있었다. 호국무단원들의 개인적인 능력은 수보기의 인물들보다 한 수 위였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몸이 정상적이었을 경우였다. 살아남은 무단원들은 이미 한에 의해 심한 내외상을 입은 상태였다.
수보기의 인물들 열다섯이 무단원들을 맡았고, 한이 하 경운을 상대할 때 이 수진은 진 영충에게 수보기의 형제 다섯 명을 잃었다.
그들과 호국회의 장로인 진 영충의 무예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났다. 말 그대로 이란격석(以卵擊石)이었다. 하 경운을 쓰러뜨린 한이 합류하지 않았다면 이 수진도 태기산에 뼈를 묻어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한과 진 영충의 대결이 이어졌다.
진 영충의 전세가 기울었음을 알았다. 하 경운은 한의 무정도에 의해 허리가 양단된 채 처참한 주검으로 널브러졌고, 무단의 인물들은 하나씩 죽어가고 있었다. 전세를 역전시킬 방법이 없었다.
하 경운이 그의 최후절기인 혈옥수(血玉手)로 한의 십이경락(十二經絡)을 뒤흔들어놓지 않았다면 그도 한의 손에서 일 초를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진 영충은 그 자리를 벗어날 각오를 했고 행동에 옮겼다.
그가 떠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한 밖에 없었다. 이 수진이나 수보기의 인물이 그이 앞을 막는 것은 자살 행위였다.
그러나 진 영충이 온전한 몸으로 그 자리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진 영충도 각오한 일이었다. 한이라는 초강고수의 수하(手下)를 벗어나려고 하면서 대가를 치르지 않을 수는 없었다.
당신 혼자서는 너무 위험해요.
이 수진의 눈 밑에 드리워진 그늘은 걷히지 않고 있었다. 그녀도 한의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태기산에서 쓰러진 자들은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는 저들의 주력이오. 저들에게, 쓰러진 자들만큼의 힘이 더 남아 있다면 이 싸움은 정말 해보나마나지. 그러나 저들에게 그 정도의 힘이 있었다면 지금처럼 몰릴 리가 없고. 나는 저들에게 아직 여력이 남아 있다고 믿지 않소. 당신은 수보기 형제들과 함께 뒤를 수습한 후 나를 따라오시오.
최선을 다해 당신을 따르겠어요. 가능하면 우리가 갈 때까지 기다려주세요. 당신은 아무리 강하다 해도 저들은 혼자가 아니잖아요.
걱정은 고맙지만 괜찮소. 당신이 말한 그 양화군이라는 친구 외에는 내 상대가 될 수 있는 인물이 더 있을 것 같지는 않으니까. 저들에게 힘이 보강되기 전에 쳐야 하오. 지원군이 온 다음이라면 이런 기회를 다시 만들기란 정말 불가능에 가까울 거요.
이 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한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시 이런 기회가 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그리고 몇 명은 공항으로 보내는 것을 잊지 마시오.
공항이오?
진 영충은 치명상을 입었지만 그렇다고 말을 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오. 양화군이 바보가 아니라면 분명 지원을 요청할 거요. 중국이나 일본에서 사람을 모아 이곳으로 온다면 우리에게 저들을 처리할 수 있는 시간 여유는 서너 시간에 불과하오. 나는 그 안에 일을 끝내야만 하오. 그들의 지원이 도착한다면 나와 당신들이 힘을 합한다 해도 상대하기 어렵소. 만약 그 회주라는 양 천종이라도 온다면 두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고.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 일을 끝내고 흔적을 지워야하오. 우리다 사라진다면 그들도 한국에 있을 수는 없소. 이미 회가 무너진 곳에서 그들이 움직인다면 각개 격파 당할 위험이 너무 크니까. 알겠소? 그들이 오기 전에 이번 일은 마무리되어야 하오. 그리고 그들이 들어오는 것을 반드시 포착해야 하오. 타이밍이 이번 일의 성패를 가를 것이오.
알겠어요. 형제들에게 최선을 다하도록 일러둘게요.
그녀의 대답을 들은 한은 담담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 수진과 수보기는 그에겐 이미 동료였다.
그녀의 눈앞에서 한의 신형이 흐릿해졌다. 그녀의 시선이 삼십여 미터 전방으로 이동했다. 그녀의 앞에 남은 것은 그의 잔영(殘影)이었다. 한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정말 강인한 사람이다. 알아주지도, 그리고 알릴 수도 없는 고독한 전쟁을 저렇게 묵묵히 수행하다니
나직하게 중얼거리며 한이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는 이 수진의 눈빛이 아련해졌다.
오카야마 미노루는 보고를 하고 있는 관동지부장 이께다의 말을 손을 들어 막았다.
그의 왼편에 놓여 있는 세 대의 전화기 중 흰색 전화기의 벨이 요란하게 울리고 있었다. 본회와의 직통 전화다.
오카야마입니다.
독고양훈입니다.
수화기를 들은 오오야마의 차갑게 굳어 있던 안색에 진중한 빛이 떠올랐다. 상대는 그보다 십여 년 연하였고 일정한 직책을 갖고 있지는 않은 자였지만 무시할 수 없는 무게의 소유자였다.
독고양훈은 근 이십여 년 동안 양 천종에게서 십 보 이상을 떨어진 적이 없었다.
그래서 양 천종의 그림자라고도 불리는 사내였다.
회주의 명령을 전하겠습니다.
회주의 명령이 사적으로 전해진 이런 경우는 최근 십 수 년간 한 번도 없었다.
오카야마는 긴장했다.
말씀하십시오.
지금 즉시 일본지회의 무력을 책임지는 호국무단원들을 전원 집합시켜 한국으로 가십시오. 그곳에서 양화군 소회주와 합류한 후 소회주의 지시를 따르십시오.
알겠습니다.
오카야마는 군말 없이 대답했다. 회주의 지시다. 일의 전말을 알지 못하기에 이해하기 어려운 지시였지만 따르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3분 후 다시 전화를 하겠습니다. 궁금하신 점은 그때 풀어드리지요. 먼저 지시를 하십시오.
수화기를 내려놓은 오카야마는 이께다를 향해 말문을 열었다.
지금 즉시 지부의 무력 책임자들을 소집해라. 매우 급하다. 나리타 공항 대합실에서 세 시간 후 만난다. 질문은 받지 않겠다.
도끼로 내려치는 듯 단호한 음성이다.
이께다는 양손으로 다다미 바닥을 짚고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이께다가 문을 열고 나가자 차갑게 굳어 있던 오카야마의 얼굴에 의혹의 기운이 번졌다.
일본지회는 지난 대망호의 격전으로 보유하고 있던 무력의 삼분의 일을 잃었다. 그중에는 오타야마의 대제자 다께다 마루도 섞여 있었다.
그 일 이후 아카야마는 본회에서 한국에 장로를 포함한 상당수의 무단원들이 지원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지원 이전에도 강우림을 비롯한 한국 내 호국회의 무력은 막강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불과 십여 일이 지난 지금 다시 일본지회의 무력을 한국으로 지원하라는 지시가 본회에서 떨어진 것이다. 오카야마가 의아스러워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도 지난 밤 한국 내에서 조폭들 간의 치열한 전쟁이 있었고 그 와중에 검경의 합동 검거 작전이 벌어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일본도 그렇지만 한국지회도 하부 인력의 상당 부분을 조폭으로부터 공급받고 있었다. 그 때문에 어젯밤의 일로 한국지회가 타격을 받았을 가능성은 있었지만 구체적인 정보가 한국지회로부터 그에게 전해진 것이 없었기에 타격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타격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하부의 이야기였다. 호국회는 상부가 건재하면 언제든 하부를 재건할 수 있는 역량을 갖고 있는 조직이었다. 일본지회의 지원이 필요한 상황이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일본지회의 지원이 필요하다면 그가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 한국 내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임한!
오카야마의 뇌리에 임한의 얼굴이 떠올랐다. 동시에 그의 입술 사이로 이가 갈리는 듯한 미세한 소음이 흘러나왔다.
그에게 임한은 불구대천지수(不俱戴天之?)라 할 수 있었다. 그가 평생을 통해 키운 사랑하는 제자 두 명이 모두 임한의 손에 의해 유명을 달리했기 때문이다.
한국 내에서 벌어지는 일 중 회가 통제하지 못하는 경우는 단 한명과 관련된 일밖에 없었다. 임한, 바로 그와 관련된 일인 것이다.
임한이 변수이긴 하지만 한국에 지원된 무력은 실로 막강하다. 임한 혼자서는 그가 설사 장로님들 이상의 무력을 갖고 있다고 해도 그 전력을 상대할 수는 없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
오카야마가 미간에 내 천 자를 그리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다시 본회와 직통으로 연결된 전화의 벨이 울렸다.
독고양훈입니다.
세 시간 후 저를 비롯한 일본지회의 무단원들이 한국으로 출발할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겁니까?
저희도 방금 한국에서 연락을 받았습니다. 주광, 하 경운 장로님이 돌아가시고 진영충 장로님은 무공이 폐지되는 치명상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한국 내의 무단원과 소회주의 친위대을 합한 삼십 오 명이 모두 사망했습니다.
도고양훈의 말을 들은 오카야마의 얼굴이 망연자실함으로 풀어졌다. 그는 옆에서 폭탄이 터져도 눈 하나 깜박이지 않을 강한 정력의 소유자였지만 독고양훈이 전한 소식은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평정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그게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립니까? 그 전력을 그처럼 상하게 할 수 있는 힘이 한국에 존재한다는 말입니까?
임한이 한 짓입니다.
어떻게 그 자에게 그런 힘이 있을 수 있소?
방조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살아 돌아온 진 영충 장로님의 말씀으로는 이십여 명이 넘는 자들이 임한을 도왔다고 합니다. 그들 개개인의 능력은 무단원들에 비해 그리 쳐지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설사 그렇다 해도 장로님들이 세 분이나 계셨는데 그자의 능력은 상리(常理)를 벗어납니다. 회주께서 직접 한국으로 가시기 위해 준비 중입니다. 소회주님만으로는 도저히 현재의 국면을 만회할 수 없다고 판단하신 듯합니다.
회주께서 직접 말입니까?
놀란 오카야마의 목소리가 자신도 모르게 높아졌다. 백두대전 이후 양 천종이 본국을 떠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가 직접 움직일 정도로 임한의 중요성이 커진 것이다.
놀라 치켜떠졌던 오카야마의 눈빛이 곧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양 천종이 움직인다는 것이 그를 놀라게 했지만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을 곧 수긍했기 때문이다. 지금 독고양훈이 말한 대로라면 임한을 저대로 두었을 경우 회의 존립을 위태롭게 만들 정도로 성장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지금도 한국지회는 거의 붕괴 직전인 것이다.
백두대전으로 끝난 듯했던 그들과 천외천부와의 악연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운전대를 잡고 있던 독고양훈은 어깨가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백미러로 보이는 양천종의 안색이 믿기 어려울 정도로 가라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양 천종을 데리고 수도국제공항으로 가는 길이었다. 최근에는 차가 많아져서 북경의 도로도 막히는 곳이 많았지만 아직 퇴근 시간 전이어서인지 도로는 혼잡하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들이 타고 있는 벤츠는 마치 100미터 달리기를 하는 육상 선수처럼 전력으로 도로를 질주하고 있었다. 독고양훈은 쌍 라이트를 깜박여 앞에서 달리던 차를 비켜나게 하고, 엑셀러레이터를 밟고 있던 발에 약간의 힘을 더했다. 벤츠가 스포츠카처럼 도로를 질주했다. 그의 눈앞에 보이는 속도계 바늘은 130을 넘나들고 있었다.
다른 차였다면 당장 공안에 의해 제지를 당하거나 주변의 차들이 미친 듯이 욕설을 했을 테지만 벤츠의 앞에서 펄럭이는 작은 사가의 붉은색 깃발을 본 사람들은 묵묵히 길을 비킬 뿐이었다.
국기의 모양을 축소시킨 사각 깃발은 당의 중요 인사가 타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그것은 감히 공안이 잡을 수 없는 차라는 표식이기도 했다.
시간에 맞출 수 있을까?
소회주님의 능력을 믿을 뿐입니다.
독고양훈의 대답을 들은 양 천종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함정에 빠져 전멸이라 흔적을 추적당한다면 군아도 위험하다.
쉽게 당할 분이 아닙니다.
독고양훈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안다. 하지만 한국에서 죽거나 폐인이 된 장로의 숫자가 이미 다섯이다. 장로 여덟 명 중 다섯이 임한에게 당했어. 그리고 그들 중 군아보다 못한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양 천종은 잠시 후 다시 말을 이었다. 낮은 중얼거림이었다.
천외천부천부명불허전이야. 내가 그동안 너무 방심했다. 그들의 끈질긴 생명력을 경시했어.
양 천종의 음성은 착잡했다.
독고양훈은 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는 양 천종이 자책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자책할 일을 하는 것을 본 적도 없었다. 양 천종은 그에게 하늘과 같은 사람이었다.
그들이 비록 끈질기다고는 하지만 이번에 모습을 드러냈으니 완전히 뿌리를 뽑을 수 있을 겁니다. 희생은 크지만 그들과의 전쟁은 늘 피로 얼룩졌었습니다. 지금 흘리는 피로 천부의 맥을 완전히 끊을 수 있다면 오히려 값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네 말도 옳다. 그러나 흘리지 않을 수 있던 피가 흐르고 있어. 검혼의 죽음 이후 내가 마음을 놓지 않았다면 오늘과 같은 상황이 조성될 때까지 어떻게 내가 모를 수 있었겠느냐. 내 탓이다.
독고양훈은 이를 악물었다. 그의 두 눈이 시퍼런 살기로 물들었다.
양 천종은 독고양훈의 살기가 점점 강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독고양훈의 마음도 자신과 다르지 않을 것이기에 양 천종은 그 살기를 오히려 편안하게 받아들였다. 한국에서 죽은 호국무단원들은 독고양훈의 후배들인 것이다.
독고양훈은 어린 시절부터 탁월한 무재(武才)를 보였고, 지금의 나이는 오십이 되지 않았지만 백두대전에 참여했던 전대 호국무단원 중의 일인이었다.
백두대전에서 그의 손에 쓰러진 천외천부의 인물이 모두 다섯 명에 달했다. 그의 탁월한 능력과 회에 대한 충성심은 양 천종뿐만 아니라 원로원에서도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그는 양 천종의 수행비서 겸 경호원 역할을 맡은 지 이미 이십 년이 넘었다.
이제 십오 분 정도를 더 달리면 공항이었다. 출국 수속을 지시해 놓았으니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빠른 한국행 비행기를 탈 수 있을 터였다.
창밖을 바라보는 양 천종의 손아귀에 조금씩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