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충성과 배신
해는 이미 중천에 떠올라 있었다.
이곳은 그렇게 크지도 적지도 않은 고을이었다. 바로 서성 경내에 있는 건계포(乾溪浦)라는 곳이었다.
이 고을은 별로 흥청거리지 않았고 몇 가닥의 좁다란 거리에도 몇 명 되지 않는 행인들이 오가고 있을 뿐이었다.
군유명과 금미 두 사람은 막 이곳에 도달한 터였다. 그들은 지름길로 걸어서 이곳에 당도한 것이었다.
그들이 방법을 강구해서 두 필의 말이나 탈 것을 마련하지 않은 이유는 혹시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네들의 행적이 발견되고 소문이 퍼져나가 뜻밖의 귀찮은 일을 당할까봐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여전히 산을 내려올 때의 그 옷차림이었다. 이번에 먼 거리를 달려오게 된 후라 더욱 흙먼지를 뒤집어쓰게 된 꼴이었으며 땀이 온 얼굴을 뒤덮고 있었다.
그들은 결코 직접 굴 안으로 뛰어들지 않고 빙글빙글 뒤로 돌아서 밭둑을 따라 급히 걸음을 옮겨 놓고 있었다.
때로는 약간의 나무나 짚더미 혹은 집 담장에다가 몸을 숨기는 등, 될 수 있으면 그들의 종적을 감추려고 애를 썼다.
이제 그들은 한 채의 착실하며 견고하게 지어진 그런 벽돌집 후원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이 한 채의 집은 그저 평소 여느 사람들이 거처하는 그런 전형적인 격식을 갖추고 있었고 조금도 눈에 거슬리거나 더러워진 점이 없어서 매우 보편적이면서도 평범한 가옥이었다.
금미는 가볍게 코끝에 잔잔하게 땀방울을 훔치고 걸음을 옮겨 놓으면서 입을 열었다.
『군유명, 당신은 어떤 사건이 나지 않으리라고 단정할 수 있나요?』
군유명은 걸음을 빨리하면서 나직이 말했다.
『오래 전에 나는 이곳에다가 이런 곳을 설치해 놓고 있었소. 이 집의 성질은 매우 기밀에 속하는 것이고 내가 이런 집을 설치한 주요 목적은 바로 만일의 경우 장래에 미처 예측하지 못하는 경우를 당하게 되었을 때를 대비해서 몸을 숨기고 머물 곳을 마련하자는 것이었소. 그러나 우리들은 줄곧 평온하고도 태평스런 세월을 보내왔으며 설사 약간의 귀찮은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전적으로 놀람만 있었지 위험은 없이 순조롭게 극복할 수 있었소. 그렇기 때문에 줄곧 이 장소를 이용하지 않았던 것인데 뜻밖에도 이제 와서는 처음으로 이 장소를 사용하는 곳이 바로 내 자신이구려.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기도 하오.』
금미는 여전히 마음을 놓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정말 아는 사람이 없나요?』
군유명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그 누구도 모르리라고 생각하고 있소. 왜냐하면 이곳은 내가 미리 예방책으로 비밀리에 만든 장소이며 역시 피난 때 가장 퇴로가 될 곳이었소. 그러나 대세가 기울어지기 전에 나는 사용치 않으리라고 작정하고 있었소. 만약에 아무렇게나 누설을 하게 된다면 어떻게 몸을 숨길 곳으로 다시 이용을 할 수가 있었겠소. 그렇기 때문에 나는 한 번도 다른 사람에게 들먹인 적이 없었소. 그 누구를 막론하고 말이오…』
금미는 잠시 망설이더니 입을 열었다.
『그녀들 두 사람에 대해서는 어때요?』
군유명은 그녀가 가르키는 것이 바로 그의 약혼녀인 비상상과 누이동생이 군기라는 것을 알고 씁쓸히 웃었다.
『역시 들먹이지 않았소. 솔직히 말해서 나는 결코 그녀들에게 숨기고 싶은 생각은 없었소. 다만 나는 들먹일 가치조차 없다고 느꼈소. 왜냐하면 나는 내 한평생 이런 장소에 피난할 목적으로 사용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오. 더군다나 나는 그녀들이 그러한 사실을 알게 되었을 적에 마음이 불안해져서 나에게 어떤 불리한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걱정할까봐 말하지 않았던 것이오.』
금미는 방그레 웃고는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당신이 그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된 것이 천만다행이군요.』
군유명은 땀을 한 번 훔치고는 자조하듯 말했다.
『내가 이런 곳에 설치하긴 했으나 원래 이런 날이 있으리라고는 예측하지 못하고 있었소. 다만 나는 개성적으로 치밀하게 조처를 취해 놓는 것이 평소의 습성이었소. 그런데 나는 이제 이용을 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내 자신이 먼저 사용하게 되었구려.』
금미는 걸음을 빨리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요. 군유명, 이곳을 주관하고 있는 인물은 뭐라고 했지요… 염룡(焰龍) 방청곡(方靑谷)이라고 했던가요?』
군유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았소. 그는 나의 오래된 형제이며 나의 충성스러서 믿을 만하고 위인됨이 또한 착실하다오. 간혹 성질이 거치를 때가 있긴 하지만 결코 의리를 저버리고 나를 배반할 사람은 아니오.』
금미는 나직이 말했다.
『역시 조심하는 것이 좋을 거예요.』
그녀는 무슨 문제를 떠올린 듯 그와 같이 전제하고 입을 열었다.
『그 방씨 성을 가진 사람이 당신의 심복이라면 어째서 철위부의 그 도움이 되는 수하들 가운데서 전혀 그 이름이 끼어 있는 것을 들을 수 없었을까요? 더군다나 바깥에서도 그에 관한 소문은 없었어요.』
군유명은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방청곡은 성격이 강직하고 칼날 같은 데다가 또한 장비보다 더한 급한 성격이라오. 그의 몇 수 솜씨는 상당히 매서운 데다가 오직 한 마음으로 충성을 다하며 의를 지키는, 정말 힘이 되는 사람이라오. 그런데 내가 어째서 그를 내쫓다시피 이와같이 소문에도 들을 수가 없고 또한 권리나 재물도 없는 외로운 지방으로 보낼 이유가 있겠소? 사실에 있어서는 그가 스스로 이곳으로 오겠다고 요구를 했을 뿐만 아니라 무척 고집을 피웠기 때문이라오.』
금미는 그들 눈앞에 있는 한 채의 집을 한 번 바라보았다.
사방 몇 곳에 대나무를 심어 놓고 있는 벽돌로 지은 집의 후원을 한 번 살펴보더니 다시 의아한 어조로 물었다.
『그것은 어째서죠?』
군유명은 간단히 대답했다.
『그는 심적으로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오.』
금미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해 줄 수 없나요?』
군유명은 왼손에 들고 있던 검은 부드러운 가죽의 보따리를 오른손으로 옮기고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여인이오. 한 여인을 위해서였소.』
금미는 매우 흥미를 느끼고 다그치듯 물었다.
『그것은 어떻게 하시는 말씀이죠?』
군유명은 한숨을 내쉬었다.
『장안 철위부에서 일을 본 지 일 년도 채 되기 전에 방청곡은 어느 전장 주인의 외동딸을 사랑하게 되었소. 당신도 알다시피 그와 같이 직선적인 개성의 사내들은 한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 모든 정을 쏟게 되며 한 마음 한 뜻으로 끝까지 박차를 가하게 되며 몽둥이로 때려도 돌아서지 않는다오. 그는 그와 같이 깊이 그 처녀를 사랑했지만 애석하게도 그 처녀는 그를 사랑하지 않았소.』
금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중에 어떻게 되었나요?』
군유명은 어깨를 으쓱했다.
『나중에는 전해 내려오는 흔하디흔한 이야기에 보듯이 남녀의 전형적인 비극으로 끝났소. 그러니까 대략 방청곡이 목숨을 떼어 놓다시피 하고 오로지 외골수로 상대방을 일 년 남짓하게 따라다니게 된 후에 그 처녀는 시집을 가고 말았다오. 물론 신랑은 방청곡이 아니었소.』
금미는 애석하다는 듯이 말했다.
『정말 야단났군요…』
군유명은 빙그레 웃었다.
『그 처녀가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간 후에 방청곡은 온종일 술을 퍼 먹고 주사를 뿌렸으며 화를 일으켰는가 하면 일을 시끄럽게 만드는 등 비단 적지 않은 내부의 사람들에게 죄를 짓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와 같이 철위부에 참가한 형제들과도 하루 종일 밤낮을 가리지 않고 언쟁을 벌여 그야말로 닭들이나 개들까지도 제대로 살아갈 수 없을 정도로 소란을 왈칵 피우기 일쑤였으며 좀처럼 가라앉을 때가 없었소. 거기다가 정신마저 오락가락하는지 혼자서 중얼중얼하는 것이 마치 실성을 한 사람처럼 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이었소. 그 때 나는 그를 붙잡아 두는 것이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그를 외지로 내보내 한동안 쉬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소. 그러나 그는 가려고 하지 않았으며 한사코 나에게 가장 멀고 외지며 가장 황량한, 어느 깊은 산속에 있는 노류원(老榴園)으로 보내 달라고 하는 것이었소. 그 노류원으로 말하면 내가 일시 기분에 못 이겨서 아무렇게 사들이게 된 한 곳의 과수원이었는데 근본적으로 전혀 쓸모가 없는 곳이었소. 그런데도 그가 굳이 가겠다고 나서는 것이었소. 그러나 내가 또 어찌 그와 같은 훌륭한 인재를 그곳에다가 묻어 둘 수가 있겠소?』
군유명은 금미를 한 번 바라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 때 마침 공교롭게도 이 비밀 피난처를 준비하게 되었는데 내가 거듭 생각을 한 끝에서야 가까스로 그를 이곳으로 보내 주관하도록 결정을 내렸소. 나는 특별히 그에게 이곳의 중요성과 은밀성을 알려주고 신신당부를 했는데 그 역시 퍽이나 이해를 하는 듯했으며 이곳에 온 후에 줄곧 어떤 과오를 저지른 적이 없었소. 그리고 매년 그는 철위부로 돌아와 나를 한 번씩 만나보곤 했는데 다른 사람들에게 대해서 나는 그가 어느 까마득하니 멀고 먼 외진 곳에서 흑도(黑道)의 장사를 하고 있다고만 했소. 그런데 흑도의 장사를 한다는 것은 철위부와 같이 엄청난 업체를 경영하는 마당에 결코 이상하게 들리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주의도 받지 않을 뿐더러 실제에 있어서 그 누구도 그와 같이 자질구레한 일에 관심을 갖지도 않았소. 그리하여 오랜 세월이 흐르게 되자 염룡 방청곡의 이름은 점차적으로 남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게 되고 들을 수가 없게 된 것이오.』
금미는 깊이 생각을 해 보더니 입을 열었다.
『어쩌면 동가는 그와 같은 일을 주의했을지도 몰라요. 그가 방청곡이 한때 당신의 밑에 있는 한 명의 심복 고수였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군유명은 평온한 어조로 말했다.
『그 점에 대해서 나도 고려한 바가 있소. 문제는 동가가 어디로 가서 그를 해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오. 평소에 나는 간혹 방청곡이 먼 곳으로 파견되어 갔다고 말했소. 그러니까 그를 장안에 남겨두었다가 옛 애인을 만나게 된다면 옛일이 새로워져 더 서글퍼지기 때문에 먼 곳으로 보냈다고 했을 뿐, 그곳이 어디인지 설명한 적은 없었소. 그렇기 때문에 동강이 그를 찾아볼 마음이 있다고 해도 아마 어떻게 손을 써야 할지 모를 것이오.』
금미는 그제서야 마음이 놓인다는 듯 말했다.
『음, 그렇다면 별다른 문제가 없겠군요.』
군유명은 먼저 반죽(斑竹)들이 서 있는 아래쪽에 서서 바로 지척지간에 서 있는 그 푸른 벽돌로 쌓은 담장을 붙들고 다시 그 한 짝의 꼭 닫혀져 있는 뒷문을 관찰했다.
그는 잠시 후에야 나직하고도 무거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별다른 문제가 없기를 바라오만 당신이 조금 전에 말한 것처럼 역시 조심을 기하는 것이 좋겠지.』
금미는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오며 나직한 음성으로 물었다.
『담장을 뛰어넘어 들어갈 건가요?』
군유명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오. 우리들은 연락하는 암호가 있소.』
그는 나직이 생각해 보더니 다시 말했다.
『금미, 당신은 이곳에서 몸을 숨기고 동정을 살피며 돌연한 변고에 대비하시오. 나는 암호를 보내보겠소.』
그는 금미가 대답할 사이도 주지 않고 성큼성큼 그 한 짝의 검은 칠은 한 뒷문 앞에 이르렀다.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손을 뻗쳐서 문짝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탕, 탕, 탕, 탕탕탕!』
세 번은 느리고 세 번은 급했다.
문짝이 흔들리는 소리 또한 맑고 또한 공허하게 즉시 울려 퍼지는 것이었다.
문을 두드린 이후 군유명은 조용히 기다렸다.
한참을 기다려도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군유명은 이제 정신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그는 다시 한 번 더 문짝을을 힘주어 두드렸다.
이번에도 세 번은 느리고 세 번은 빠른 것이었다.
그가 두 번째의 마지막 문짝을 두드리는 소리가 탕, 하니 울려 퍼지게 되고 그 여운이 아직도 허공에서 하느적거릴 적에 그 한 짝의 흑색 칠을 한 나무문이 갑자기 열어젖혀졌다.
그러나 군유명을 맞은 것은 한 사람이 얼굴이 아니라 바로 두 자루의 예리하게 번쩍이는 박도(朴刀)였다.
동시에 담장 위에서 비조처럼 세 명의 대한이 뛰어내렸고 담장 뒷쪽의 대나무가 서 있는 아래쪽에서는 벼락같이 금미의 간드러진 호통소리가 들려왔다.
문 한쪽에서 두 자루의 박도가 번쩍하고 뻗쳐오게 되었을 적에 군유명이 움직이는 것을 볼 사이도 없이 그저 그가 약간 몸을 미미하게 기울이는 것 같다고 느꼈을 뿐인데 칼을 뻗치던 두 장정은 어느덧 어이쿠, 하는 소리를 일제히 불어내지르며 저쪽으로 내동댕이쳐지게 되었다.
동시에 벼락같이 몸을 돌리며 군유명은 곧이어 담장 위에서 뛰어내린 세 명의 장정을 처치하려고 했다.
그가 막 그와 같은 생각을 굴리게 되었을 적에 세 명의 대한들은 이미 그를 볼 수가 있었다.
그 찰나, 세 개의 얼굴은 어떤 모양이라고 꼬집을 수는 없었지만 놀람과 고통, 그리고 경악의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