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방의 정책과 전쟁지도
1. 쌍방의 정책과 전쟁지도
전쟁이 개시된 이후 춘계공세까지 쌍방은 낙동강에서 압록강까지 밀리고 미는 격전을 통해 어느 일방의 결정적 승리의 쟁취가 불가능하고 거기에는 막대한 인적 물적 손실이 수반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미국으로서는 자유진영 국가들로부터 전재의 조기 종결 압력을 받게 되었음은 물론 무한정한 인적자원을 동원할 수 있는 중공과 이를 지원하는 소련이 존재하는 한 전쟁에서 승리를 확신할 수 없었다.
반면 중공과 공산진영도 5차에 걸쳐 최대 80개 사단을 투입했으나 막강한 화력과 기동력을 앞세운 유엔군을 한반도에서 축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병력보충과 물자지원에도 한계가 있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결국 이러한 경험과 인식이 전쟁 1년 만에 전선이 전쟁전 현상으로 회귀하고, 군사적 수단 대신 정치적 수단으로 해결 방안을 모색하는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가. 유엔군의 정책과 전략
국군과 유엔군은 '51 초, 중공군의 신정공세로 인한 1.4후퇴 위기 상황을 극복하고 1월 말 평택-삼척선에서 재반격으로 3월 15일 서울을 재탈환하였다. 3월 말 38도선으로 진출하여 전쟁전 상황을 회복하였고 4월 초에 38도선을 전술적으로 방어하기 위하여 유리한 지형, 이른바 캔사스선까지 점령하였다.
그후에 중부전선의 방어력을 강화할 목적으로 철의 삼각지의 저변을 연결하는 와이오밍선으로 진격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투르만 정부와 갈등을 이르킨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을 '51. 4. 11일자로 해임하고 리지웨이가 부임하고 제8군 사령관에는 벤플리트 장군이 부임되었다.
그당시에 미 행정부는 대한 정책을 수정하여 적절한 휴전 장치하에 전쟁을 종격하고 전쟁전 상태로 복귀한다는 정책을 모색하였고 휴전협상 제안에 마찰을 빚은 맥아더 원수를 해임한 것이다.
한국은 이승만 대통령의 긴급 담화드을 통하여 이러한 미 행정부의 휴전 정책에 반대하고 북진 통일만이 유일한 대안이라 강조하게 되지만 분위기는 휴전으로 가고 있었다.
적의 춘계공세를 격퇴한 유엔군은 5월 17일 결정된 한반도에서 통일. 독립민주국가의 수립문제는 군사적 수단과는 별도로 정치적 수단에 의 계속 추구한다는 것에 맞는 군사전략을 추구하게 된다.
나. 공산군의 기도와 전략
모택동의 중공군은 한국전쟁에 참전한 이후 '51. 2월 공세까지 4차에 걸친 대귭모 공세를 시도, 서울을 점령하고 최대 37도선까지(평택-제천-삼척)진출했으나 유엔군의 반격에 다시 38도선으로 밀리면서 막대한인적 물적 손실을 가져왔다.
중공군은 다시 유엔군을 한반동에서 축출하기 위해 4월 공세와 5월 공세를 취했지만 유엔군의 막강한 화력과 기동력에 결국 8만 5천여 명의 막대한 손실만 입고 다시 38도 선상으로 후퇴해야 했다.
결국 중공군의 인해전술이 유엔군의 화해전술에 무릎을 꿇고 만 것이다. 그들의 군수지원 능력은 유엔군의 현대화된 화력과 기동성에 7~10일 이상 지속할 수 없었다.
따라서 중조지원군사령부는 지구작전으로 전환하고 유엔군의 휴전제의를 수용하기로 결정되면서 이후의 전쟁은 휴전회담에서 상호 유리헌 조건을 확보하기 위한 고지쟁탈전과 전선의 교착이 장기화 되었다.
2. 전쟁전 현상으로 회귀
가. 피아의 전선 상황
(1). 중공군의 철수
중공군은 '51. 5월 16일 중동부 전선에서 주공으로 2차 춘계공세를 개시하여 현리 일대에서 종심 60km에 달하는 돌파구를 형성하여 하진부리-유촌리까지 진출했으나 20일을 전후 하여 공세활동이 현저히 감소되었다.
중공군과 북한군은 유엔군의 밤낮을 가리지않는 항공폭격과 포병화력에 막대한 인적손실을 입고 후방 보급로의 붕괴와 물자지원 능력의 한계로 결국 5월 21일 후퇴를 결정하게 된다. 이 명령에 적은 화천저수지 북쪽의 북한강을 전투지경선으로 하여 중공군이 서쪽으로, 북한군이 동쪽으로 철수하였다.
(2) 유엔군의 반격
중공군의 5월 공세가 절정에 도달한 5월 18일, 풍암리로 진출한 중공군이 미 제2사단에 압력을 가하고 선두부대들이 국군이 방어 중인 속사리-하진부리 방향으로진출하여 중동부 전선 붕괴 직전에 위기에 몰렸다.
그러나 정보판단에 중서부에 있는 중공군 4개 군이 소규모 양동작전만 펼치고 뚜렸한 공격 징후가 없다는 것을 판단하고 중동부 전선의 공산군 전력을 분산시키기 위해 서부전선에서 철의 삼각지로 이어지는 주요 병참선을 위협할 수 있도록 2개 사단 규모로 철원을 공격하도록 지시하였다.
미 제1, 9군단이 공격계획을 수립하는 동안에 유엔군 사령관 리지웨이는 직접 전선 정찰을 실시하여 중동부 전선에 적의 전선이 과도하게 돌출되어 있음을 간파하고 적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줄 수 있다고 판단하여 제8군사령관에게 공격범위를 전전선에 확대하여 반격을 실시하도록 명령하였다.
미 제8군은 이에따라 제1단계 목표인 토페카선인 문산-가평-춘천을 연하는 선으로 진출한 후에 신속히 제2단계 작전으로 철원방향으로 전환하여 교통의 요지로 "긴 자루"의 목에 해당하는 포천-철원 축선상의 영평 부근과, 김화축선상의 화천 부근을 점령하여 적의 퇴로를 차단한다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 계획에 의거 제1, 9군단과 제10군단의 미 제1해병사단은 적의 주력부대나 예비대가 방어태세를 갖추기 전에 그들을 섬멸하기 위해 5월 20일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리고 중동부 전선의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1군단도 21일을 전후하여 풍암리-하배제-속사리를 연하는 선에서 적의 진출을 저지하고 미 제10군단은 양구-인제를, 국군 제1군다는 양양을 목표로 공격을 개시한다.
나. 캔사스선으로 진출
(1) 임진강-영평 진격전
캔사스선
백학 전곡 한탄강 영평 영평천 연곡
고랑포 관모봉
임진강
장파리 적성 미 제1기병 미 제25사
*감악산 동두천
금곡 *칠봉산 *해룡산 포천 미 제25사 미 제2사
문산 법원리 덕정 토페카선
내화산.외화산
가납리 대보리
*내화산 동거리 문산천
금촌 봉일천 의정부
*명봉산 *앵무봉 신촌
곡릉천 관산리 고양
일산 *고봉산
삼송리 지축 마석
서부전선의 미 제1군단은 5월 20일, 문산-포천을 연하는 토페카 선을 점령한 후 캔사스선상의 영평을 확보할 목적으로 국군 제1사단을 문산 축선에, 미 제21기병사단을 동두천 축선에, 그리고 미 제25사단(터키 여단 배속)을 포천 축선에 투입하여 3개 사단 병진으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국군 제1사단은 좌전방 공격사단으로 동거리-내화산을 목표로 도로의 좌측에 제11연대, 우측에 제12연대로 공격을 개시하여 진출중 제12연대 방향의 관산리 일대의 적이 강력히 저항하여 정찰기지 확보를 하고 있던 제15연대를 작전지역 중앙에 투입하였다. 그러나 봉일천-삼송리 도로의 동쪽 248고지 일대에서 적의 저항을 받기도 했다.
이 무렵 사단의 우인접 미 제1기병사단의 제5연대도 지축리 일대에서 공격이 돈좌 되었다. 이로인해 내화산-명봉산을 연하는 선에서 방어로 전환하였다.
제1사단장 강문봉 준장은 적이 주력부대들이 임진강을 건너는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강력히 저항한은 것으로 판단하고 북한군 제1군단 주력의 임진강 도하를 차단하기 위해서 공격을 결심하고, 제111연대는 보전조 로 신속히 문산을 경유 적성을, 제15연대는 법원리 밑에 있는 금곡을 점령하여 적의 퇴로를 이중으로 차단하고 제12연대가 정면으로 공격하여 지대내 적을 섬멸시킬 계획이었다.
그러나 사단의 공격에 앞서 21일 03:00시에 적 1개 대대 규모가 법원리 남쪽의 외화산에서 제11연대에 선제공격을 하여 진출에 차질을 빗게 되고 제15연대는 적의 공격으로 문산천 도하에 실패하였다.
공격연대들은 폭우와 적의 저항으로 지연된 부진했던 작전을 만회하려 22일 동이 틀 무렵 공격을 재개하여 군단에서 제일 먼저 토페카선을 점령했다.
한편 중앙의 미 제1기병사단과 우전방의 미 제25사단은 적의 저항과 기습적인 역습으로, 의외로 공격이 부진하여 국군 제1삳간보다 하루 늦은 23일 가납리와 신촌부근의 토페카선으로 진출했다.
이때 미 제1군단장은 제2단계 작전 목표인 영평을 공격하기 위해 5월 초순 부산에 도착하여 현지 적응 훈련을 마친 캐나다 제25여단을 미 제25사단에 배속하였다.
그러나 항공정찰과 첩보에 의하면 북한군 제1군단과 중공군 제65군이 미 제1군단의 진출 속도보다 빠르게 후퇴하고 있었다.
군단 선봉에 나선 미 제25사단은 미 제89전차대대, 제27연대 제1대대, 공병 1개 중대로 "돌빈 특수 임무부대"를 편성하여 25일 영평을 점령했으나 적이 먼저 임진강 북쪽으로 철수하여 각 부대들은 27일을 전후하여 미 제1기병사단이 임진강-전곡, 미 제25사단이 전곡-영평의 캔사스선에 진출하였다.
(1-1)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 결과
가. 문산 이천리 용산골 밤나무 숲에 묻혀있는 유해의 국적은?
"16년도 발굴시 지역 주민 제보가 있음에도 명시하지않고 국군으로 처리한 정황('16~17년도에 합100여구 발굴처리)
나. 문산천 파주 덕은리의 유해(7구)
탐사간 차량호 만들어 놓은 법면에서 흔적 발견
지역 주민의 제보 내용은?
다. 고양시 삼송동, 지축동(흥국사)일대 전투 흔적
라. 박달산 영장리 유해는 군인인가 민간인인가('17년 보고서, 2년에 걸쳐 100여구 발굴)
마. 명봉산의 전투흔적(용미리)
(2) 가평-화천 진격전
*광덕산 화천저수지
*두류산 화천 캔사스선
*백운산 사창리 구만리 *병풍산
장암 수밀리 신포리
*국망봉 *석룡산 *화악산 지암리
일동 적목리
*강씨봉 *가덕산
*청계산 토페카선
*운악산 *북배산 춘천
*계관산
신팔리 가평 매봉
현리 북한강 원창고개
*개주산 신점리
청평 *호명산
*174 홍천강 홍천
미 제24사 국제2사 국제6사 미 제7사 미 제1해병사
중서부전선의 미 제9군단도 좌인접 미 제1군단과 같이 5월 20일 가평-춘천을 연하는 토페카선을 점령한 후 화천을 점령할 목적으로 좌로부터 미 제24-국 제2사- 국 제6사- 미 제7사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진출 속도는 느렸다.
미 제8군사령관은 동쪽의 미 제10군단의 전투정면을 축소하기 위해 전투지경선을 조정하여 제9군단이 홍천 부근을 인수함에 따라 미 제1해병사단의 작전지역을 미 제7사단에게 맡도록 하여 홍천-춘천-화천 도로를 다라 진출하여 화천저수지 서쪽 지역을, 국군제6사단은 북한강 서쪽의 계관산-북배산-가덕산-지암리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좌전방으로 진출하는 미 제24사단은 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하여 국군 제2사단의 엄호하에 청평ㅇ-가평 도로를 따라 신속히 가평을 공격하고, 국군 제2사단은 미 제24사단의 가평 진출을 엄호한 다음 대보리로 진출하여 미 제1군단과 연결하도록 하였다. 군단은 이 계획에 의거 5월 24일 07:00시에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다.
당시에 미 제8군사령관, 제9군단장은 적이 빠르게 후퇴하는 것을 포착하여 각 부대는 중대단위 이하의 적은 우회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에 따라 미 제7사단장은 제7수색중대와 전차 1개 소대, 공병 1개 분대로 "하젤 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하여 춘천을 정찰하고 복귀하도록 명령하였다.
정찰임무부대가 공격을 개시하자 중공군 제60군의 1개 연대 규모가 춘천 남쪽 신점리에서 원창고개에 이르는 고지군에 저지진지를 점령하고 완강히 저항하였다. 특수임무부대가 다소 늦게 오후에 춘천에 도달했을 때는 적이 대부분 적이 빠져나간 상황이었고 일부 부대가 아군의 공격에 무력화 되면서 미 제9군단장이 현장을 순시하기 위해 신점리로 이동 중에 16:00시경 중공군 매복부대에 고립되었으나 전차소대의 지원으로 구사일생 구출되었다. 저녁 무렵에 원대복귀하였다.
해가 뜬 뒤 춘천 북방지역을 세밀히 항공 관측결과 약 10,000명의 중공군이 춘천-화천도로와, 부근의 보조 도로에 집결해 있으며 , 또 춘천 서쪽과 북서쪽에도 다수의 중공군이 발견 되었다.
중공군은 24일 하젤 특수임무부대의 춘천 진입을 아군의 주력으로 오인하여 많은 부대들이 신속히 빠져 나가기 위해 집결된 것으로 분석되고 유엔군은 강력한 포병화력과 항공 폭격으로 엄청난 피해를 주었다.
이 기회를 포착하여 미 제7-17연대가 기동화하여 춘천으로 진출함으로서 선도부대가 되었고 좌측의 국 제2사단의 엄호하에 가평으로 진출한 미 제24-21연대도 제17연대와 지암리에서 연결하기 위하여 가평-지암리 도로를 따라 공격을 계속하였다.
한편 국군 제6사단도 좌우인접에서 미 제21연대와 미 제17연대가 지암리에서 화천을 공격하고 있을 때에 북한강 북쪽에서 가평-춘천 사이의 계관산-북배산을 연하는 산악지대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날 항공 관측에 의하면 미 제10군단 지역에서 빠져나온 중공군 1만ㄴ~1만 2천명이 차량과 야포를 이끌고 행군 대형을 유지하여 화천저수지 남쪽을 향하고 있다는 것이 식별되었다.
이에 군단장은 국 제6-19연대는 계속하여 지암리를 서쪽에서 공격하고, 사단 주력은 미 제7사단과 화천저수지를 공격하기 위하여 춘천으로 집결토록 하였다.
공격 선봉에 나선 미 제24-21연대와 미 제7-17연대는 26일 오전에 지암리에서 합류하였고, 이 무렵 국 제6-19연대도 지암리로 진출하고 있었다.
이로써 3개 연대는 춘천-화천 도로와, 가평-지암리 도로, 그리고 지암리 남쪽의 국군 전선으로 형성된 삼각형 모양의 우리 속에 중공군을 몰아 넣었다.
미 제17연대는 적의 퇴로를 차단할 목적으로 보전조로 화천 진출을 기도했으나 적의 저항에 진척이 없었다.
5월 27일 아침을 전후하여 중공군은 대대규모로 포위망을 탈출하려 했으나 봉쇄하고 있는 아군에 격멸되고 말았다. 이후 조직적으로 탈출하려는 부대는 없었고 2,000명이 포로로 잡혔고 28일에 38,000명이 아군에 투항하여 적의 전의는 완전히 상실되었다. 28일 오후에 구름이 걷히면서 항공 폭격이 진행되고 미 제17연대가 14:00시에 화천에 진입하였다.
당시 상황을 중공군 전사에는 "중공군 제180사단이 화악산 우측 매봉을 전령했으나 아군이 사창리-화천선을 점령하여 포위되었으며 이때 주요 지휘관들이 동요되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분산 돌파를 채택함으로써 심각한 손실을 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중공군 제180사단은 당시 와해 되어 버렸다.
"중국이 본 한국전쟁(당시 부사령관 홍학지 지음, 272~288페이지 참조)"에서 보면 문제의 제180사단은 사단장이 정기귀였다. 이 부대는 중공군 제60군의 서쪽 끝에서 측면 엄호 임무를 맡고 있다가 북한강을 건너 북배산과 가덕산의 샛길로 접어들어 철수 길에 올랐을 때였다. 공교롭게도 미군 대병력이 산속 비탈길을 따라 행군하는 모습을 발견했다. 사단장은 대낮 산길에 미군탱크가 끝없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그만 포위된 것으로 착각을 했다. 그레서 사단장은 서둘러 부대원들에게 산속 깊숙이 몸을 숨기라고 명령을 내렸다. 물론 미군은 1개 사단 병력이 이 산속에 이런 대부대가 숨어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사단장은 노출에 대비하여 암호문을 태우고 무전기를 끄도록 함으로써 상급부대와 소통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 사단장은 전 대원에게 각개약진으로 포위망을 둟얼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본인은 소수의 인원과 귀환할 수 있었으나 대부분 돌아오지 못했다. 중공군이 조선에 들어온 뒤 당한 가장 큰 손실이었다"라고 기술하였다.
또한 중공군 제60군은 철수할 때 예하부대에 "그 자리에서 멈춰 부상병을 옮기는데 엄호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구체적인 방법이 적시되지않은 상태에서 예하 부대에 전달 되었고 마침 제180사단이 철수할 때는 북한강 이남이었는데 그 자리에서 병력이동을 멈춰 시간을 낭비하게 되었다. 방어에 유리한 강북지역으로 들어가 멈춰야 했다는 것이다.
또한 제181사단은 화천까지 철수해 왔는데 상부로 부터 제180사단을 구출하라는 명령을 받고 뒤돌아 가야했다. 이미 병력은 1만 4천여 명이 고작 몇 천 명만 남았고 여기에 미군의 엄청난 포병화력과 항공 폭격에 큰 피해를 입고 있었고 미군 탱크부대를 만나 괴멸될 순간 그래도 무전기와 암호문을 버리거나 태우지 않아 제180사단을 지원하는 포위망을 풀라는 전보를 받아 철수를 할 수 있었다.
이 무렵 국군 제6사단(제19연대 결)은 화천 저수지 남쪽으로 공격을 하여 구만리발전소-병풍산을 연하는 캔사스선으로 진출했다. 당시 사단장 장도영 준장은 "후퇴하는 중공군을 추격하여 길가에 늘어진 중공군을 쓰레기 줍듯이 트럭에 실어 담았으며, 아군 1개 소대가 적 대대병력을 무더기로 생포하는 진풍경이 연출되었다"고 증언했다.
이러한 낭보를 접한 이승만 대통령은 이 작전의 승리를 기리기 위해 화천 저수지를 오랑캐를 대파한 호수라는 뜻으로"파로호"라 부르게 했다.
한편 국군 제2사단은 23일 청평호 북쪽의 174고지에서 중공군과 치열한 격전을 벌이고 여세를 몰아 호명산을 점령하였다. 24일 사단은 전선 조정계획에 따라 미 제24사단의 가평진출을 엄호하고 군단의 좌전방 영 재28여단의 현리-개주산 지역을 인수받았다.
사단은 28일 운악산을 공격하면서 강력한 적의 저항을 받았으나 특공대를 편성하여 수류탄 공격으로 탈환하고 적를 추격하여 청계산, 강씨봉, 적목리, 수밀리를 경유하여 28일 석룡산-백적산으로 진출하였다.
이 과정에서 호명산 남서쪽 하단 174고지를 공격하던 제 2사단 제31연대 제1중대 제2소대는 적 2개 중대를 개활지로 유인하여 격멸시켜 한국군 최초로 미 대통령 부대 표창을 받았다.
이 3일간의 전투에서 미 제9군단은 미 제10군단 지역에서 올라오는 중공군을 완전 포위는 못했지만 총 62,000명을 사살하거나 생포하는 대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군단도 341명 전사, 2911명 부상, 195명이 실종되는 손실을 입었다
(2-1)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 결과
가. 운악산 정상 일대는 서서 걷기도 어질어질 했다
나. 호명산 밑 174고지에서 유인 격멸했다는 중공군의 시신은 어디에?
*참전용사 증언
1)김원길(제2-31연대) : 나는 '51. 1월에 입대하여 화기소대 경기관총 사수로 보직을 받고 풍기.안동.풍산 일대에서 공비토벌 작전을 했다. 이후 부대가 여주를 거쳐 청평으로 이동하여 발전소에 도착해 보니 중공군이 수 없이 있었다. 새벽에 장구와 북, 꽹과리를 치고 나팔을 불며 우리 진지로 물리리듯이 몰려왔으나 경기관총으로 사정없이 갈겼고 다음날 아침에 보니 시체를 남기고 모두 후퇴했다. 나는 오성산에서 부상당해 후송되었다.
2)엄세창(제2-31-1-2중대) : 본인은 '51. 4월말인지 5월말인지 31연대 소속으로 광덕산 전투에 참가했다. 이 전투에서 중대장이 전사했고 상상봉 7부 능선 부근에서 2개 소대가 공격해 5명이 생존햇다. 절벽지형이라 전사자를 수습하기가 곤란했다. 유해들이 계곡에 있을 것이다.
3)박장원(제2-32연대) : '51년도에 가평지구 화악산, 매봉산에서 전투했다. 백둔리의 명지산 전투에서는 50여 명이 폭사하는 장면도 목격했다. '50. 10~11월에는 춘천시내 전투에서 아군이 많이 전사했다.
다. 화악산 일원 그 많은 숯가마터에 가득한 중공군포로 그리고 시신들?
(굶겨서 만드는 중공군 장교와 여군의 비화~!), 제19연대 참전용사 김용철님의 증언
라. 지암리 계곡은 중공군의 무덤이었다.
마. 지암리-신포리 간 도로변에서 불태워지는 군인들~!
바. 북배산, 가덕산 등 그 많은 유해는 헬기장 만들며 모두 훼손되었다.
사. 화천 저수지에는 정말 중공군 유해가 수장 되었나?
(3) 양구-인제 진격전
제8군사령관은 22일 중동부전선의 미 제10군단이 공산군의 5월 공세를 저지하고전황이 호전될 기미를 보이자 군단의 방어 정면을 축소 조정 후, 공세작전으로 전환하게 된다. 그리고 신속히 소양강 선으로 진출하여 적의 퇴로를 차단하고 지대내 적을 포위 격멸함과 동시에 적의 증원을 저지하도록 명령하였다.
미 제10군단장 알몬드 중장은 2개 사단으로 적의 주보급로인 홍천-인제-간성 도로 상의 요지인 인제를 점령하여 적의 퇴로를 차단하고, 1개 사단으로 도로 남쪽의 포위된 적을 격멸하도록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를 위해 미 제1해병사단(국군 제1해병연대 배속)은 한계-인제 도로 서쪽으로 진출하여 양구를, 미 제2사단(미 제187공수연대, 국군 제7-3,5연대 배속)은 한계-간성 도로 동쪽으로 진출하여 인제를, 미 제3사단(국군 제8, 9사단 배속)은 운두령 점령에 이어 속사리-현리 도로와, 하배제-양양 도로의 교차점 부근인 창촌을 각각 점령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예비인 국군 제5사단은 하안홍리, 제7사단(2개 연대 결)은 유동에서 계속 정비토록 하였다.
공격준비를 완료한 부대들은 5월 23일 08:00시에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지형이 험하고 적의 저항으로 진출이 부진하게 되자 미 제8군사령관의 독촉을 받은 군단장은 미 제2사단에 전차 2개 중대를 중심으로 특수 임무부대를 편성하여 소양강변 음양리의 교량을 조기에 점령하도록 명령하였다.
제2사단장은 한계-인제 도로로 진출중인 미 제187공수연대에 증원된 제72전차대대와 사단에 배속된 제64전차전차대대의 각 1개 중대와 제187공수연대 제2대대로 "제르하르트 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하여 신속히 공격하도록 하였으나 적이 설치한 도로상의 중공군이 설치한 장애물로 진출이 지연되었다.
이에 공중에서 헬리곱터로 이 상황을 지켜본 군단장은 선두인 뉴맨 소령에게 전차만으로 전속력으로 기동을 하도록 명하여 뉴맨 부대가 북쪽으로 진출함으로써 음양리 남쪽에서 아군의 공중공격을 받고 무질서하게 후퇴하던 중공군 4,000여 명이 퇴로가 차단되어 엄청난 병력손실과 장비를 유기한 채로 소양강을 건너 분산 도주하였다.
당시 상황을 중공군 전사에는 "24일 아군이 소양강 도하장인 부평리, 구만리를 장악하고 퇴로를 차단하여 중공 제9병단 제27군은 홍천-인제 간의 도로 양측의 고지에서 고립되어 최초 계획한 소양강을 이용한 적을 저지하려던 임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때부터 적을 추격한 미 제2사단은 25일 제23연대가 소양강 교두보를 확보했으나 제38연대는 북한군의 저하으로 진출이 지연되어 현리까지 진출하였다. 제187공수연대는 동해안의 간성을 점령하기 위해 음양리 남쪽에 집결하여 예비가 되었다.
이 무렵 미 제2사단의 좌측에서 양구로 진출중인 미 제1해병사단은 지형이 험하고 적의 저항이 강하여 겨우 자은리 일대로 진출했고, 우인접의 미 제3사단은 하진부리-속사리에서 창촌을 목표로 공격 중에 있었다.
미 제10군단장은 계속하여 양구를 해병에게 점령토록 독려하고 미 제2사단은 인제를 점령한 후 "베이커 부대"를 편성하여 신속히 간성을 점령하도록 강조하였다. 그리고 미 제3사단은 국군 제1군단의 정면의 적을 포위 섬멸하기 위해 "찰리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하여 하배제에서 양양에 이르는 도로를 다라 공격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현리 북근의 북한군 제13사단 제19연대의 저항과, 화천저수지-인제 간에 주저항선을 구축하고 철수부대를 엄호하기 위해 북한군 제2, 5군단을 재배치하기 시작하여 군단의 공격이 더욱 어렵게 되었다.
27일 베이커부대는 적의 저항으로 진출이 지연되어 14:00시경 인제로 진입하고 바로 간성으로 진출하려 했으나 이미 국군 제1군단이 간성에 진입함으로서 취소되었다. 결과적ㅇ르로 미 제10군단의 재반격은 공산군 주요부대에 심한 손상을 주었지만, 철수로상의 요지인 양구-인제 지역의 확보가 지연되어 포위망 구축에 실퍃면서 적의 탈출을 허용하였다.
(3-1)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 결과
(4) 양양-간성 진격전
제13연대
건봉령
팔음 송죽리
제26연 간성
*1079
*향로봉
신평 *504
원봉 삼포리
제1기갑
칠절봉 수도사
신선봉 용포리
천도리 용대리 미시령 속초
제1연 제20연
당정곡 제9연 하도문
마등령
제5사 캔사스선
원통 설악산 11사
가리산 한계령 마산 가라피 양양
제18연
인제
현리 서림리 인구리
하월천
매복산 가진리 주문진
*복용산
*만월봉
연곡천
11사
오대산 수도사
창동 진고개
하배제
동해안의 국군 제1군단은 중서부와 중동부전선의 미 군단들이 캔사스선 진출 작전을 펼치고 이쑈을 무렵 5월 25일까지 하진부리로 진출한 중공군의 일부와 대관령에서 격전을 벌여 적을 격퇴했다. 이로써 군단도 반격작전에 동참하게 되었다.
군단은 1단계로 매복산-가잔리-인구리를 연하는 선을 목표로 좌전방 산악지역에 수도사단, 우전방 동해안에 제11사단으로 병진공격을 실시하고 해체된 국군 제3군단에서 배속된 국군 제3사단은 송계리에서 군단예비로 부대정비를 하도록 하였다.
군단은 26일 06:00시에 경강국도 변에서 공격을 개시하였고, 이때 중공군 제9병단 제27군과 북한군 제12사단이 대관령 일대에서 타격을 입고 좌인접 미 제10군단에 의한 포위를 우려하여 서둘러 철수하고 있었다.
사기가 오른 수도사-26연대와 제1연대는 27일 매복산, 복룡산으로 진출했다. 또한 수도사단의 우인접 제11사단도 26일 주문진 남쪽 연곡천변의 도로에서 공격을 개시하여 27일 오후에 캔사스선의 동족 끝 지점인 양양을 무혈 입성하였다. 그러나 작전지역의 중앙인 하월천리에서는 제13연대가 28일 02:00시까지 치열한 격전을 펼쳐 격퇴하였다.
한편 제8군사령관은 좌측의 미 제10군단의 인제, 양구 진출이 지연되자 국군 제1군단으로 간성선까지 진출을 명하였다.
국군 제1군단(군단장 백선엽 소장)은 항공관측과 수색정찰 결과로 북한군 제2군단 예하 적 제13사단이 한계리-원통 선에, 군단 직힐의 1개 연대 규모가 마등령-미시령 선에 배치되어 철수하는 전방부대들을 엄호하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에 군단은 제11사단으로 설악산 일대를, 수도사단은 강력한 적의 저항이 예상되는 동해안의 간성을, 그리고 재편성을 완료한 제3사단 제18연대는 설악산 남쪽의 가라피-마산리 일대를 공격하도록 했다.
29일 동이 틀 무렵 수도사단의 제1연대는 간성 서북족 504고기를, 우전방 제1기갑연대는 간성을, 제11사단의 제20연대는 신선봉을, 그리고 제3-18연대는 가라피를 목표로 공격을 개시하여 4시간도 못된 09:30분 경에 간성을 점령하였다.
공격을 계속한 수도-제1기갑연대는 30일 간성 서북족 토기점리-화진포로, 제1연댄즌 간성 서남쪽 어천리-신평리로, 사단 수색중대는 고성으로, 제111사단 제20연대는 신선봉 일대에, 제9연대는 마등령 일대에, 그리고 제3-18연대는 가라피를 경유 마산리로 각각 진출하였다.
군단의 작전이 종료될 무렵 미 제8군사령관은 미 제10군단의 전투지경선을 서족으로 10km를 이동시켜 1098고지-매봉산-당정곡-안산-가리봉을 연하는 선으로 조정하고 당정곡에서 각 군단이 만나도록 하였다. 또한 주보급로인 인제-간성 도로의 확보에 필수적인 전방의 향로봉-1079-건봉령을 연하는 향로봉 산맥을 점령하도록 하였다.
제1군단장은 부대배치를 조정하여 수도사다니 제11사단 제13연대를 배속받아 당정곡-향로봉-거진을 연하는 전방지역을 방어하고, 제11사단은 군단의 측후방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이에따라 수도사단장 송요찬 준장은 배속된 제13연대를 접적이 경미한 간성 서북쪽의 제1기갑연대 진지를 인수하게 하고, 예비인 제26연대는 제1연대를 초월하여 향로봉 산맥을, 제1연대는 당정곡-매봉산-칠절봉을, 제1기갑연대는 작전지역을 인계 후에 칠절봉-1166-원봉을 점령하도록 하였다.
한편 제11사단(사단장 오덕준 준장, 이 이전은 최덕신 준장)은 산악지형임을 고려하여 중대별로 기동하도록 하고 제20연대는 용대리-미시령 도로의 남쪽 고지에, 제9연대는 설악산 서쪽의 능선에 , 제3사단 제18연대는 마산리-가라피 도로 남쪽의 감제고지에 배치되었다.
군단은 이와같이 6일간의 전투에서 캔사스선을 확보하고 북으로 약 40km를 진출하여 좌측의 미 제10군단 우전방인 국군 제5사단과 사이에부채꼴 모양이 생겼다.
(4-1)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 결과
가. 향로봉 산맥 지표면에 남아 있는 유해
*참전용사의 증언('01년도)
1) 이종록 (수도사-제1연대 2대대장 역임) : 둥글봉에서 산머리곡산에 이르는 능선에서 주전투가 있었고 현장에서 당시 대대장이다. 산머리곡산에 피아 많이 전사상자가 발생했고 사체수습이 안되어 부패되기전에 유품은 후송하고 현지 가매장이 이루어졌다. 구후에 노무자들이 사체를 진부리로 이동시키는데 힘이들다보니 계곡에 방치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들었다.
2)고재일(수도사-1연대 2중대장 역임, 전 건설부장관?) : 산머리곡산에서 8차례 전투가 있었고, 우리가 주도권을 확보하고 있어 부상자와 영현처리는 비교적 잘 되었다고 알고 있다. 산머리곡산은 상부지세에 의거 2일간 철수하였는데 미 제B-29폭격기가 융단폭격을 하여 어림잡아 약 5M는 낮아졌다.
3)조기환(수도가-1연대) : 사체부패가 심한 아군 전사자는 진부리 마을 인근밭에서 화목을채취하여 화장을 하는데 직접 참여하였으며 유골함은 봉송하였다고 알고 있음
4) 김병훈(노무자로 참석) : 당시 미군통제하 노무단에 편성(울진 포항지역주민이 90%, 지역주민 10%)하여 탄약통으로 식량(주먹밥), 탄약운반(진부리-삼봉-향로봉) 및 환자 후송하였다. 일방적으로 승리한 전투라 영현처리 여건이 좋았고 북한군은 별도 매장하지 않고 가매장 되었다
나. 신선봉, 상봉 바위무덤에 흩어져 있는 유해들(동해안 함포와 보급대원)
다. 마등령의 고량주병
라. 저항령, 황철봉의 무더운 여름
다. 와이오밍선 확보
국군과 유엔군은 38도선을 전술적으로 방어하기에 용이한 캔사스선으로 진출했으나, 이 선의 요새화와 방어종심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북쪽의 방어에 유리한 감제고지를 확보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유엔군사령부와 미 제8군은 5월 말 이 조치의 일환으로 중공군 춘계공세 이전에 확보하려다 뜻을 이루지 못한 전곡-철원-김화-화천을 연결하는 와이오밍선을 확보하여 이중의 방어선을 형성하기로 했다.
이에따라 미 제1군단과 제9군단이 철의 삼각지에서 화천저수지와 춘천으로 향한은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해 와이오밍선으로 제한ㄷ된 공격작전을 전개하도록 하였다. 이 작전의 명칭은"말뚝을 박듯이 전선을 튼튼이 한다"는 의미로 "파일드리이브"라고 명명했다.
적도 이 무렵 유엔군이 제한된 공격으로 전환하였음을 간파하고 캔사스선 북족에서 저항하기 시작함으로서 철의 삼각지대를 두고 다시 한번 혈전이 펼쳐지게 되었다.
(1) 철원- 김화 진격전('51. 6.5~6. 13)
와이오밍선
시변리 평강 평강 금성
철원 *584 김화
미 제25사
동막 와수리 화천
미 제3사 토성리
임진강 천광 *고대산
*638 국 제9사 신술리
*402 신흥동
*지장봉
구하리 *향로봉
*가치항
연천
운천 광덕산
미 제1기병 국 제9사 미 제25사
누대 미 제3사 캔사스선 도평리
전곡 영평 *국망봉
미 제1기병
동두천 양문리
영29여
포천 일동
제8군사령관은 이번 작전의 중점을 미 제1군단의 책임지역인 철원과 김화지구 봉쇄에 두고, 미 제10군단에 배속된 국군 제9사단과 미 제3사단을 5월 29일부로 미 제1군단으로 배속 전환하였다.
이에 따라 미 제1군단은 국군 제1사단을 임진강 남쪽에, 미 제1기병사단(영 28여 배속)을 전곡 남족에, 국군 제9사단을 영평 북쪽의 누대리에, 미 제3사단은 운천 남쪽에, 그리고 미 제25사단(터키여단 배속)을 도평리에 배치하였다.
국군 제1사단이 임진강 북쪽에 강력한 정찰활동으로 군단의 좌익을 엄호하는 가운데 6월 3일, 좌전방 미 제1기병사단이 전곡-연천 도로를 따라 북서쪽의 임진강을, 중앙의 국군 제9사단이 향로봉-지장봉을 따라 고대산을로, 미 제3사단이 운천-평강도로를 다라 철원을, 그리고 좌전방 미 제25사단이 도평-금성도로를 다라 김화를 각각 공격하였다.
그러나 적의 강력한 저항과 때마침 폭우로 도로상태가 엉망이고 포병 및 항공 화력을 활용하는데 기상이 변덕을 부려 6월 5일가지 부진하였다.
반면 적은 이 틈을 이용하여 방어진지를 보강하고 에비대를 투입하여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이대 국군 제9사단이 공격하게된 험준한 지형은 가치항-지장보-고대산 일대는 중공군 제656군 예하의 1개 사단규모가 주력의 철수를 엄호하고 후방의 주저항선 구축을하는데 필요한 시간을 획득할 목적으로 축차진지를 점령하면서 지연전을 시도하였다.
사단장 최석 준장은 먼저 1개 연대로 향로봉을 점령하고 바로 2개 연대로 병진 공격을 하기로 계획을 수립하고 제28연대가 6월 5일 한탄천 변에서 공격을 개시하여 가치항에서 적의 강력한 저항을 극복하고 향로봉을 점령하면서 6일에는 좌측에 제30연대를 투입하여 지장봉 일대의 적의 저항을 극복하며 7일에 제28연대가 지장봉을 점령하였다.
적은 지장봉 북쪽의 402고지와 638고지 일대에 강력한 저지진지를 구축하고 저항하여 9일 제30연대는 백병전을 방불케하는 격전을 치르며 도로를 통제할 수 있는 천광에 진출하였으나 우전방 제28연대는 우인접 미 제3사단의 진출이 지연되어 일시 방어로 전환하였다.
이때 우측의 미제3사단은 11일이 되어서야 신흥동에서 제28연대와 연결하고 최종 목표인 고대산을 점령함으로써 와이오밍선에 도달하였다.
국군 제9사단은 이 전투로 지난 현리에서의 쓰라린 패배를 설욕하고 장병들의 사기도 충천하였다.
한편 사단의 우인접에서 기동한 미 제3사단과 미 제25사단은 6월 8일까지 기상악화로 아군의 항공 및 포병지원이 어려워 고전하다 9일부터 기상이 호전되어 적을 밀어내고 철원-김화를 연결하는 와이오밍선의 우반부를 점령하였다.
(1-1)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 결과
가. 고대산에서 사라진 국군 제9사단 전몰 장병(9사단 참전용사 전우회 회장의 증언, 고대산에서 만난 참전용사의 증언)
*고수방어 진지를 구축하면서 대부분 흔적도 없이 사라짐
나. 담터계곡의 바람소리
주변에 돌무덤이 모두 시신을 거둬 묻은 곳인데 이제 흔적도 사라지고 있다.(지역 주민의 제보와 참전용사 증언)
다. 구름처럼 몰려서 담터계곡을 지나 북으로 가는 피난민?
상노리 지역주민의 생생한 제보
(2) 대성산-취봉 진격전
평강 금성 북한강
김화 와이오밍선 *적근산 백암산
철원
와수리 육단리 마현리 *수리봉 미 제9군단 미 제10군단
국2사 *대성산 미 제7사 *취봉 당거리
국6사
미 제1군단 미 제9군단 *북주산 사방거리 *997
*887
*643 *재안산
*해산(일산)
신술리 다목리 신읍리
*853
*복주산 화천 화천저수지
광덕산 두류산
백운산 캔사스선
미 제9군단은 최초 백운산-사창리-화천저수지를 연하는 캔사스선에 국군 제2사, 미 제24사, 미 제7사, 국군 제6사를 배치, 주저항선을 형성하였다.
군단은 와이오밍선 진출작전에 3개 사단을 투입하고 1개 사단은 예비로 확보하기로 하고 좌전방 국군 제2사는 김화 동쪽의 도로를, 중앙 미 제7사는 적근산 남쪽을 통제할 수 있는 감제고지를, 우전방 국군 제6사는 화천저수지 북쪽에서 주변 도로를 통제할 수 있는 취봉을 공격하고 미 제24사단은 사창리에서 예비로 집결하였다.
좌전방 국군 제2사-31연대는 사창리-다목리-김화에 이르는 계곡 통로 좌측의 가파르고 험한 산악 능선을, 제17연대는 미 제24사단 제19연대의 두류산 부근 진지를 인수 받아 통로 우측 능선을 공격하였다. 우전방 제17연대는 처음 적의 저항이 경미하였으나, 좌전방 제31연대는 6일 복주산 일대에서 중공군과 7회에 걸친 공방전을 펼쳐 적을 격퇴하고 그 북쪽의 853고지를 기습공격하여 중공군 113명을 사살하고 20명을 포로로 잡았다.
이대 사단장 함병선 준장은 제31연대를 예비인 제32연대로 교체하여 투입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우측의 제17연대가 대성산 바로 밑의 1041고지에서 적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서 2개 중대의 돌격으로 극복하고 1041고지를 점령한다.
제2사단이 복주산과 1041고지를 점령하자 적은 물러나기 시작하여 10일 육단리 부근의 와이오밍선을 확보하고 제17연대도 대성산을 확보하여 김화-화천도로로 진출하여 와이오밍선을 확보하였다
중앙의 미 제7사단은 우전방 제31연대의 작전지역을 국군 제6사단 제7연대에 인계하고 화천-김화 도로를 따라 공격하였다. 그러나 7일 03:00시경 신읍리 북쪽에서 2개 대대규모의 기습공격을 받아 부대가 와해되는 위기에서 예비인 제32연대를 투입하여 구축하고, 다시 9일 다목리 동쪽 고지에서 적 1개 대대규모를 격퇴하면서 10일 와이오밍선인 마현리-사방거리를 연하는 도로변으로 진출하였다.
군단의 공격제대 중에 가장 치열한 격전은 우전방 국군 제6사단지역에서 벌어졌다. 사단은 산악작전임을 고려하여 좌전방은 제7연대가 미 제7사단으로부터 작전지역을 인수하여 백암산(1179)으로부터 뻗어내린 취봉-992-887-643고지로 연결되는 종격실 능선을 공격하고, 우전방 제19연대는 화천저수지 북쪽의 일산(1190)과 재안산(1034)을 점령하여 제7연대의 우측방을 엄호하도록 하였다.
이때 사단 정면의 적은 중공군 제20군이 취봉(989) 일대에 3개 연대를 투입하여 축차적인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있었고 우측방 재안산과 일산지역에는 적정이 경미하였다.
국6-7연대장 양중호 대령은 미 제17연대장으로부터 643고지를 3일간 공격했으나 실패했다는 사실을 듣고 6일 13:00시에 양측방으로 포위공격을 감행하여 탈환하고 취봉방향으로 철수하는 적을 추격했다. 적은 종격실 능선을 이용하여 완강히 저항하였으나 우측의 제19연대가 당거리로 진출하여 연대의 공격을 엄호하게 되면서 공격 5일째인 9일에 취봉일대를 결국 탈환하게 되었다. 결국 적은 치명적인 손실을 입고 5~7km 후방의 백암산으로 철수를 하였고 와이오밍선을 확보하였다.
(3-1)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 결과
가. 신읍 643고지의 중요성과 전투 흔적(지금 반유개호 공사로 흔적이 대부분 사라짐)
나. 제2사단의 백운산에서 광덕산-상해봉-육단리-천불산으로 이어지는 전투전사가 없다
(많은 참전용사님들이 광덕산과 상해봉 일대에서 전투손실이 대량 발생했다고 증언)
공격방향이 사창리에서 올라 하오고개-복주산-복계산-수피형-대성산 방향으로
공격방향이 가평 운악산에서 시작하여 국망봉-백운산-광더산-상해봉에서 한방향은 동쪽으로 하오고게-복주산~
한방향은 상해봉-종격실 능선을 따라 계속 북으로 진출하여 육단리- 천불산- 저격능선, 734고지 등으로 진출
참전용사의 증언
엄세창(제2-31-11-2중대) : 광덕산 전투에서 우리 중대장이 전사했고 상해봉 7부능선 공격간 2개 소대가 고격하여 5명만 생존했다. 우리는 시신을 수습하려 노력했지만 상당수의 유해를 찾지 못했다.
박장원(제2-32연대) : 가평지구 화악산, 매봉산 전투에 투입되었고 명지산에서도 치열한 전투를 했ㅎ으며 50여 명이 한순간ㅇ에 폭삭하는 장면도 목격했다.
다. 중공군 병력의 조선족, 그들이 만든 방망이 수류탄은 터지지 않는다
*제2사단 참전용사의 증언(이곳 잠곡리에서 소년병, 이후에 정식 제2사단 입대)
라. 대성산 1041고지의 전투사실?
라. 신캔사스선으로 진출
미 제10군단은 적의 저항이 완강하고 지형이 험준하여 중서부전선의 부대들이 와이오밍선 공격을 준비하고 이쑈을 무렵인 5월 말경 화천저수지-양구-인제를 연하는 캔사스선으로 진출했다. 이 무렵 배속 중인 국군 제9사단과 미 제3사단이 미 제1군단으로 배속 전환됨에 따라 군단의 좌전방인 화천저수지 남쪽에 군단 예비인 국군 제7사단을 , 양구 일대는 미 해병 제1사단이, 소양강 동쪽은 국군 제5사단이 미 제2사단의 인제-원통 일대 진지를 인수하였다.
군단의 전선 정비가 완료되자 제8군사령관은 간성으로 진출한 국군 제1군단과 전선의 균형을 유지함은 물론 중동부 및 동부전선의 부대들이 24번도로(홍천-인제-간성)를 주보급로로 사용할 수 있도록 캔사스선을 이 도로의 북쪽 화천저수지-펀치볼 남쪽-향로봉-거진 선으로 조정 "신캔사스선"으로 명명 하고 "파일 드라이브 작전"의 일환으로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1군단이 이 선을 확보토록 하였다.
이 방침에 따라 국군 제7사단은 화천저수지 북쪽 군량현을, 미 제1해병사단은 배속된 국군 제1해병연대와 양구 북쪽의 해안분지를, 그리고 국군 제5사단은 원통 북방의 서화리 일대를 공격하게 한다. 이렇게 하여 북한군과의 치열한 전투가 시작되었다.
(1) 군량현 전투
국군 제7사단은 중공군 5월 공세시 소양강 남쪽의 음양리 부근에서 집중 공격을 받아 많은 피해를 입고 군단 에비가 되어 하안홍리 일대에서 재편성에 주력하고 있다 군단의 캔사스선 공격명령에 의거 5월 31일 화천저수지 남쪽의 미 제1해병사단 작전지역을 인수하고 군단의 좌전방 사단으로 전선에 복귀하였다.
금강 노전평
해안분지(펀치볼)
*백석산 비아리 *대우산
*917 도솔산
국7사 미 제1해병
*731 *757 대암산
간평 원당리 *1121 *1175
수입천 *504
군량현
마석봉 가아리
*수리봉 함춘리 광치동
양구 인제
*사명산 가장촌 원동지곡(남면 청리 : 원동지골)
이 무렵 양구는 적의 시체가 도처에 참혹하개 널려 있고, 장티푸스 등 전염병이 만연되어 미처 피난가지 못한 다수의 이재민들이 병마에 시달리고 있었다.
사단은 화천 저수지 남쪽에 캔사스선을 점령하면서 일부 부대를 북쪽ㅇ르로 파견하여 정찰 활동에 주력하던 중에, 6일 군단으로부터 신 캔사스선상의 마석봉-504-757고지를 점령하고, 백석산 남쪽의 731고지와 931고지에 강력한 정찰거점을 설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사단은 작전지역이 협소하고 산악지형인 점을 고려하여 제5연대로 먼저 공격을 하고 이어서 제3연대를 투입하여 목표를 점령하기로 하였다.
이 계획에 의거 제5연대는 오전 내평리에서 공격대기지점인 양구 남쪽의 가장촌으로 이동, 공격준비에 주력하였다. 이 기간에 연대장 김상봉 중령은 양구 북쪽 함춘리에서 적진을 관측하던 중에 적의 포격으로 부상을 입고 후송되게 되고 김용배 중령이 부임하게 된다.
'51. 6. 8일 사단은 제5연대가 마석봉과 757고기를 공격하지만 적의 저항으로 탈환하지 못하거나 적의 야간 기습으로 물러나고 말았다. 결국 마석봉은 확보하였으나 757고지는 확보하지 못하자 사단은 제3연대로 제5연대를 초월 공격하고 제8연대가 예비로 소양강 남쪽 진지를 인수하도록 조치했다.
51. 6. 10일 주공이 된 제5\3연대가 757고지로, 조공이 된 5연대는 마석봉에서 성곡령을 목표로 공격하였으나 북한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탈환하지 못하다 자저이 다 될 무렵에 근접전투로 결국 탈환하였다.
사단은 12일 공격을 재개하여 제3연대가 백석산(1142)으로 연결되는 능선의 발판인 917고지로 진출하고 제5연대도 731고지로 진출하였다.
(1-1)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 결과
가. 마석봉(숫돌봉)~성곡령 일대의 전투흔적과 유배발굴
나. 북한강-수입천을 따라 노젓는 배로 병력과 보급품이 방산에 왔다
다. 성곡령, 고대리 일대에 묻힌 유해, 그리고 야전 화장터의 대포소리
(2) 도솔산 전투
국군 제7사단이 군량현 전투를 개시할 때 우인접 미 제1해병사단(국군 제1해병연대 배속)도 양구 북방의 대암산을 공격하고 있었고 국군 해병연대는 원동지곡에서 부대정비 중에 있었다.
이 무렵 부대 재배치 계획에 의거 해병사단의 작전지역이 소양강 서쪽까지 확대되자, 사단은 대암산-도솔산-대우산으로 연결되는 산악지형을 공격 중 막대한 피해를 입은 제5해병연대를 소양강 서쪽으로 이동시키고 국군 제1해병연대를 투입하였다.
국군 제1해병연대가 공격할 광치동에서 대암산에 이르는 산악능선에는 북한군 제12사단이 유리한 지형을 이용 주요 고지마다 항공폭격이나 포병화력에 견딜 수 있는 엄체호를 구축하고 능선 통로상에 무수한 지뢰를 매설하여 강력한 거점을 편성하고 있었다.
연대는 6월 4일 항공 및 포병화력의 지원하에 2개 대대 병진으로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6일 동안 적의 저항으로 1121-1175고지를 돌파하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연대장 김대식 대령은 6월 11일 02:00시 적이 예상치 못한 야간공격으로 3시간만에 돌파하고 여세를 몰아 대암산까지 진출하여(신캔사스선) 우인접 제5연대와 연결 하였다.
이후 연대는 신병을 보충받아 부대정비를 하던 주에 14일 도솔산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고 15일부터 공격을 개시하여 종으로 된 협소한 공격통로에서 두더지처럼 개인호를 구축하며 19일 결국 야간공격으로 도솔산을 점령하였다. 좌인접에는 미 제7연대가 진출하고 있었으며 이 작전간 연대는 사살 2,263명, 생포 42명 등 다수의 무기를 노획하였고 아군도 전사 123명, 부상 582며의 손실을 입었다.
(2-1)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 결과
가. 1121~1175고지 능선에 굴토되어 있는 북한군 진지
나. 대암산~선점중대 지역의 유해는 5.16이후 붙잡혀 온 인원들이 진지공사간 대부분 유실 되어버렸다
다. 용늪에 잠긴 용사들
라. 도솔산 전투는 그렇게 백병전을 할 수 없는 종격실 칼날 능선이었다. 포병과 항공기, 함포로 초토화!
(3) 서화리 전투
소양강 고성 건봉령
제1기갑 간성
*1079
노전평 고성리 *향로봉 신평리
가전리
*원봉 제26연
*산두곡산 진부리
해안분지 *916 상배양 *981
*840
동개동 대곡 *칠절봉
서화리 *811
*1112
미 제1해병 국5사 *매봉산 제1연
천도리 *851ㅁ *1242 용대리 속초
대암산
피양동 당정곡 황철봉
명당산 백담사
국군 제5사 수도사
양구 *안산
원통
국군 제5사단은 미 제2사단과 함게 캔사스선으로 진출 중 원통 부근에서 군단의 부대 재배치 계획에 의거 미 제2사단의 작전지역을 인수한 후, 미 제10군단의 우전방으로 후덕리-981-산두곡산(1019)을 연하는 신 캔사스선을 목표로 공격작전을 펼치게 되었다.
6월 4일, 좌전방 제27연대는 서화리-인제 간의 도로 우측 명당산-피양동-서화리-987고지로, 제36연대늕 향로봉 산맥 서쪽의 1242-1122-산두곡산으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능선 접근로를 공격한 제36연대는 의외로 별 저항없이 1242고지를 점령하여 공격발판은 확보하였으나, 소양강 계곡 통로의 우측 종격실 능선을 따라 진격한 제27연대는 당산 일대에서 적 1개 대대규모의 강력한 저항으로 공격이 돈좌 되었다.
대대는 수류탄만을 휴대한 특공조를 투입하여 결국 5시간의 치열한 근접전투로 136명을 사살하고 명당산을 확보하였다. 이때 사단장 민기식 준장은 좌인접 미 해병5연대를 저지하고 있는 적의 일부가 북한군 제2-4연대를 증원하고 있음을 확인하여 제36연대로 하여금 적진 후방의 서화리를 공격하도록 했다
서화리를 제36연대가 공격하고 있는 동안 제27연대는 계속하여 적의 역습을 격퇴하며 북쪽으로 연결된 752 및 851고지를 연하는 능선에서 진출이 지연되었다.
이에 사단장은 제35연대를 천도리로 투입하여 적의 퇴로와 증원을 차단하도록 하였다. 이 무렵 제10군단장은 신 캔사스선으로 진출한 좌우인접 부대와의 전선 균형을 위해 신속한 돌파를 강조하였지만 6월 10일 현재 사단은 천도리, 851, 1122고지에서 격전이 계속되었으며 중앙의 제27연대가 공격 4일 만에 851고지의 특화점을 "원계희 이등병(미 은성무공훈장)"이 수류탄 12발을 휴대하고 포복으로 접근하여 3개소를 폭파하면서 고지를 탈취하게 된다.
이후 사단은 11일 공격을 재개하여 서화리와 1122고지를 공격하여 강력한 적의 저항을 극복하고 14일 점령하여 신캔사스선 진출을 목전에 두게 되었다.
작전의 주도권을 장악한 제5사단은 최종목표인 제35연대의 840고지와 제36연대의 981고지를 15일부터 공격하였으나 목표 탈취에 실패하였다. 사단은 다시 17일 치열한 격전을 통해 목표를 점령하여 14일간의 격전을 끝내고 신캔사스선으로 진출하여 소라지-송노평-이현리를 연하는 선에서 위력수색을 실시하여 주저항선의 방어진지를 보강하였다.
미 제10군단의 작전지역은 중동부 산악지대로 지형이 험준하고 기동로가 제한되며 특히 도로는 지뢰가 매설되어 기동에 어려움이 많았고 특히 기간 중에 많은 비로 산사태 등이 발생하였고 적이 고기를 선점하여 방어벽을 구축하여 저항함으로써 진출에 지장을 초래하였다.
이러한 악조건을 물리치고 군단은 마석봉-성곡령-757-도솔산-916-981고지를 연하는 신캔사스선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3-1)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 결과
가. 명당의 유해는 머리가 없었다
나. 두개골만 낫으로 잘라 가마니에 넣어 지게에 지고 밤새 날랐다(실제 당사자 참전용사님이 증언)
다. 천도리 피양동 고지에 남겨진 국군 유해
라. 칠성고개- 봉화산에 남겨진 혼령(서울 내과 병원장의 제보, 전쟁직후 군의관으로 근무)
(4) 향로봉 방어 전투
제13연대
건봉령
팔음 송죽리
제26연 간성
*1079
*향로봉
신평 *504
원봉 삼포리
제1기갑
칠절봉 수도사
신선봉 용포리
천도리 용대리 미시령 속초
제1연 제20연
당정곡 제9연 하도문
마등령
제5사 캔사스선
원통 설악산 11사
가리산 한계령 마산 가라피 양양
제18연
5월 말 향로봉 산맥으로 진출한 국군 제1군단의 수도사단은 제1연대를 당정곡-칠절봉에, 제1기갑연대를 원봉 정면에, 제26연대를 향로봉-건봉령에 배치ㅐ한 후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전방지역에 위력수색을 실시하였다. 좌인접에는 미 제10군 예하의 국군 제5사단이 인제-원통 선에서 신캔사스선 진출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때 전방의 북한군은 제13사단 제19연대로써 서화리-산두곡산 일대에 강력한 진지를 편성하고 중동부에서 후퇴하는 중공군과 북한군의 철수를 엄호하고 있었다.
6월 3일 15:00시에 적 1개 중대규모가 선제 기습공격으로 제1연대의 칠절봉 부근 주저항선에 돌파를 기도하였으나 격퇴되었다. 그러나 다음날 짙은 안개로 관측이 불가한 틈을 이용하여 제1기갑연대의 전초기지인 산두곡산과 원봉 전방의 1209고지, 제1연대의 칠절봉으로 공격을 재개하였다.
한편 군단장은 좌인접 국군 제5사단의 공격을 지원하기 위해 수도사단의 일부 병력으로 서화리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이에 사단은 제1기갑연대 제3대대와 칠절봉 부근에 배치된 제1연대 제1대대를 6일 06:00시에 칠절봉-대곡리-평촌을 연하는 계곡을 따라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적의 반격으로 실패하고 복귀하였다.
이 무렵 군단 후방지역에서 공산군 패잔병들의 활동은 경미한 반면에 전방의 적 활동이 점차적으로 증강되자 군단장은 주저항선 방어태세를 보강하기 위하여 부대 배치를 조정하였다.
이 계획에 따라 군단의 계획애 의거 대승령 일대에서 측후방을 방어하던 제11-9연대는 간성 북쪽에 배치하고, 용대리-미시령을 방어하던 제20연대는 수도사단에 배속되어 제1연대의 당정곡-매봉산 지역을 인수하게 하였다. 이로써 군단은 당정곡-향로봉-건봉령-거진을 연하는 신 캔사스선에 좌로부터 제20, 제1, 제ㅔ1기갑, 제26, 제13, 제9연대를 배치하여 주저항선 방어를 강화하였다.
수도사단이 방어진짖 보강에 주력하고 있을 무렵 8일 09:30분 경에 향로봉과 그 북쪽의 1079고지로 적 1개 대대 규모가 침투하여 한때 주저항선이 돌파되었으나 곧 격퇴되었다.
결국 적은 이 전투에서 주력부대를 상실하고 고성리 방향으로 철수하게 되고, 국군과 유엔군은 중서부전선의 와이오밍선과 중동부 전선의 신캔사스선을 확보함으로써 한강하류-문산-전곡-연천-철원-김화-산양리-펀치볼-서화-거진 선까지 진출하였다. 이때 전곡 동쪽의 부대들은 캔사스선 보다 16~48km 북쪽으로 추진 배치되었다.
이 재반격작전에 의거 지난 춘계공사 이후 궁지에 몰린 공산군은 궁여지책으로 휴전협상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때부터 공산군은 협상을 미끼로 전세를 만회하기 위한 전력 증강에 혈안이 되었다.
(4-1)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 결과
가. 지금 생각하니 향로봉 산맥 능선에는 발로 밟고 다닌 유해가 많았다.
나. 산머리곡산 일대는 유해의 집단 묘지였다.
다. 서커스하듯이 절벽을 오르는 북한군(이종록 수도사단 참전용사 증언)
라. 칠절봉에 불시착한 사령관 헬기(인제 병원장 증언 : 당시 위생병으로 응급처치 장본인)
마. 얼마나 전사했는지 모른다. 밤에 병력이 보충되고 아침이면 몇 안남았는데 누가 누굴 알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