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증: 1596. [역경의 열매] 박용배 (1-20) 가정의 달 맞아 모든 가정에 하나님 은혜로 충만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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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죽음 후 삶과 가정 풍비박산
객지 생활 중 한 장로님 부부 양자 돼
그 후 사위 삼아 주시고 목회자로 권면
박용배 목사가 지난 28일 교회 주일예배를 마친 뒤 인천 서구 청라 사랑의교회 본당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가정의 달 5월을 맞이해 필자의 삶과 가정, 목회 현장을 국민일보 독자들과 함께 나누게 하신 하나님께 먼저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청년 시절 극단적 선택을 하려 했던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복음 안에서 치유 받고 언약의 가정과 축복 된 목회를 할 수 있었던 것을 간증함으로써, 위기를 만난 가정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되는 놀라운 축복이 있게 되길 소망한다.
네 살 때 어머니는 산에 두릅을 따러 가셨다가 낭떠러지에서 미끄러져 머리를 심하게 다쳐 돌아가시고 말았다. 그 이후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과 도박에 빠졌고 우리 가정은 풍비박산이 났다. 6형제와 누님 한 분 7남매 중 막내였던 나는 엄마 없이 아버지와 누나 밑에서 자랐다. 매일 술에 취한 아버지는 술병을 들고 길거리에 누워 계셨고 나보다 네 살 위 누나와 나는 옆집 손수레를 빌려 아버지를 태워 오곤 했다.
형님들은 초등학교를 마치고 모두 객지로 떠났고 명절이 돼도 집에는 잘 오지 않았다. 나도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객지인 대구에서 중국집 배달부와 식당 종업원으로 일했다. 22세에 경북 의성군 춘산면사무소 예비군 중대 방위병으로 근무하게 됐다. 제대를 두 달 앞두고 향후 진로를 두고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간구했는데 그 모습을 본 장로님과 전도사님 부부가 나를 양자로 삼아주셨다. 딸 하나만 있는 그분들 가정에 언젠가 주신다는 믿음의 아들이라며 말씀하셨는데, 이제는 사위가 돼야 한다고 하면서 그분들의 딸과 결혼하게 되었다.
그러나 배경 없고 학벌도 없는 내가 싫다는 아내와 매일 다투며 살았다. 너무나 괴로워 자살을 결심하고 있는데 기도하던 장모님이 미리 알아채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보게, 이 갈등은 자네를 목회자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소명으로 인한 것이니 순종해야 하네.” 나는 수줍은 성격에 말도 잘하지 못하고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못한 내가 어떻게 신학을 공부하고 목회자가 될 수 있느냐고, 절대로 할 수 없다며 맞섰다. 그때 하나님은 출애굽기 4장 11절 말씀으로 응답하셨다.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결국 나는 신학 공부를 하게 되었고 1991년 교회를 개척해 33년째 목회해오고 있다.
보잘것없는 천둥벌거숭이를 사위로 삼아주시고 신학을 권면하신 장모님은 88세의 연세에도 경북 안동 대한예수교 장로회 합동 측 경안노회 풍산동신교회에서 현역 전도사로 사역하고 계신다. 나의 사위 김흥환 목사는 송도국제도시에서 송도사랑의교회를 섬기고 있고 아들 요셉 목사는 미국 애틀랜타 주안침례교회 부목사다.
나와 우리 가족을 복음 전하는 목회자 가정으로 세워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공무원 사역과 언론인 사역 그리고 탈북자 사역을 하면서 깨어진 가정의 회복을 돕고 있다. 결혼하지 않고 출산하지 않는 인구절벽 시대에 다자녀 낳기 운동과 자녀를 복음으로 양육하는 일에 교회가 앞장서는 시대의 대안이 되기를 소망한다. 복음 가진 가정과 후대를 통해 이 시대를 회복하실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며 하나님께 무한 영광을 돌려드린다.
약력=1958년 출생, 중·고등학교 과정 검정고시, 대구신학교·총신대 신학대학원 졸업, 1991년 사랑의교회(인천 부개동) 개척, 현재 청라 사랑의교회 담임목사.
* [역경의 열매] 박용배 (1) 가정의 달 맞아 모든 가정에 하나님 은혜로 충만하길…
* [역경의 열매] 박용배 (2) 신유의 은사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평생 복음 서원
* [역경의 열매] 박용배 (3) 어린 시절 내 꿈은 방송인, 가수, 비행기 조종사
* [역경의 열매] 박용배 (4) 새벽기도가 유일한 낙… 일하는 틈틈이 성경 읽고 힘내
* [역경의 열매] 박용배 (5) 고향 폐가에서 돈 한 푼 없이 고달팠던 방위병 생활
* [역경의 열매] 박용배 (6) 부모님 강요로 결혼한 아내, 마음의 준비 안 됐다며…
* [역경의 열매] 박용배 (7) 죽을 결심한 내게 "꼭 목회자 돼야" 장모님 눈물로 회유
* [역경의 열매] 박용배 (8) 날 부르시는 이가 하나님이라 확신, 목회자의 길 순종
* [역경의 열매] 박용배 (9) 서울살이 시작하며 생활고에 공부 틈틈이 아르바이트
* [역경의 열매] 박용배 (10) 빈민촌에 고아 출신 배달부 8명으로 개척교회 시작
* [역경의 열매] 박용배 (11) 구제 선교에서 영혼을 살리는 복음 전도자의 삶으로
* [역경의 열매] 박용배 (12) 과천 정부 청사 예배 인도… 복음 전하며 주님 영접 도와
* [역경의 열매] 박용배 (13) 귀신 들린 청년에 예수님 선포 "주는 그리스도시요…"
* [역경의 열매] 박용배 (14) 교회 부흥하며 상가 교회로 이전 6년 만에 새 성전 건축
* [역경의 열매] 박용배 (15) 영적으로 갈급한 언론인들, 복음으로 하나님 만나다
* [역경의 열매] 박용배 (16) 늘 헌신해 주신 고 장로님에게 하나님의 축복 가득하길
* [역경의 열매] 박용배 (17) 탈북자 예배 인도… 북·중 국경지대 돌며 복음 전파
* [역경의 열매] 박용배 (18) 하나님 자녀로 다시 태어난 17세 북한 소년
* [역경의 열매] 박용배 (19)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으로 북한 주민들 살아나길
* [역경의 열매] 박용배 (20) 북 특무대장과 목숨 건 아찔한 동행… 북으로 끌려갈 뻔
정리=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
***[역경의 열매] 박용배 (2) 신유의 은사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평생 복음 서원
빈민촌 무허가 집에서 교회 개척 시작
빈민 구제와 탈북민 북한선교 사역 병행
구역 예배 중 쓰러진 아내를 위해 기도
지난 28일 주일예배를 드린 뒤 이경희 사모와 함께 교회 앞에서 기념촬영을 한 박용배 목사.
1991년 2월 총신대 신학대학원을 84회로 졸업하면서 인천 부평구 부개동 산 445번지 빈민촌 무허가 집 20평에서 개척교회를 시작했다. 당시 고향 선배 목사님께서 네 사람이 앉을 수 있는 의자 네 개를 제공해 주셨다. 사택은 강대상 뒤 조그마한 공간을 방으로 꾸며서 네 식구가 살았다. 개척하고 6년 동안 산동네에서 전도하다가 교회가 차츰 부흥돼 갈산동 상가로 예배 처소를 옮겼다. 이후 근처 공장 건물을 매입해 예배당을 건축했고 2013년 청라에 교회 건물을 매입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2008년부터 송도국제도시에 상가를 매입해 송도 사랑의교회 지교회를 열었고, 인천 남동구 논현동 탈북민 밀집 지역에 4년 전 상가를 매입, 탈북민 전문교회를 시작했다. 교회는 현재 탈북민 출신 목사님이 맡아 사역을 잘하고 있다. 97년 탈북민 조사기관에서 매주 예배를 인도하게 되면서 북한선교를 시작하게 되었다. 벌써 27년째 북한선교 사역을 병행하고 있다. 또 1997년부터 신문사와 방송국 신우회에서 방송인과 언론인들을 대상으로 예배를 인도하면서 많은 기자와 PD들이 복음을 받아들였고 그들 중엔 장로님과 목사님이 되신 분들도 많다.
개척교회를 시작하면서 산동네 빈민들에게 식량과 연탄을 전달하며 한참 봉사활동을 하고 있을 때였다. 토요일 저녁 맞벌이 부부 집사 집에서 구역예배를 드리는데 아내 이경희 사모가 쓰러졌다. 일으켜보니 입이 돌아가 있었다. 한의원에 데리고 갔더니 영양실조라며 6개월가량 침을 맞으며 치료하면 나을 확률이 절반 정도라고 했다. 주일을 앞두고 사모가 쓰러져 입이 돌아가 있으니 암담했다.
지어온 약을 달여 먹이고 누워있으라고 하니 아내는 나를 붙잡고 기도해달라고 했다. ‘하나님, 내일이 주일인데 사모가 영양실조로 입이 돌아가 누워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눈물로 기도한 다음 나는 아내 대신 밀린 빨래를 하면서 계속 기도했는데 마음속에서 아내가 나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나는 아내 상태를 확인하려고 방문을 열었는데 아내가 눈을 뜨고 입이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아내의 입이 돌아간 지 4시간 만이었다.
그 일 이후 일주일간 금식기도를 하면서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그때 사도행전 3장 6절 말씀 “은과 금을 주지 말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생명의 복음을 주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 그때부터 빈민구제 사역을 내려놓고 복음만 전하기로 서원했다. 또 전도의 문을 열어 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경기도 과천의 정부 2청사와 광화문 정부 1청사의 신우회 예배를 인도해달라는 청함을 받았다. 이후 3년간 각 부서에 들어가 복음을 전했다.
하나님은 조실부모하고 초등학교만 겨우 나와 객지 생활하며 고생하던 나를 그분의 도구로 불러주셨다. 주님의 소명을 받아 성경학교 3년 동안 중·고교 검정고시까지 다 마치고 대구신학교와 총신대학원을 나오게 해주셨다. 전도사 시절부터 올해까지 40년째 교역자를 하고 있고 개척교회는 33년, 목사 안수를 받은 지는 31년이 되었다. 불에 그슬린 부지깽이 같은 나에게 은혜를 주시고 응답하셨던 전능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역경의 열매] 박용배 (3) 어린 시절 내 꿈은 방송인, 가수, 비행기 조종사
파일럿은 안됐지만 목사 된 후 30년간 수없이 비행기 타고 전도와 선교 활동
앨범도 내고 ‘박용배 TV’로 방송까지 내 작은 신음까지 응답해 주신 하나님
박용배(가운데) 목사의 유년 시절 모습으로 1960년대 초반 경북 의성 춘산면 들판에서 형과 누나, 바둑이와 함께했다.
내가 살던 고향 마을에서의 어린 시절은 어머니가 안 계셨으므로 교회가 유일한 나의 안식처였다. 네 살 위 누나와 나는 열심히 교회에 다녔다. 매년 5월 첫째 주일은 어린이 주일이라 빨간색 꽃을 만들어 아이들 왼쪽 가슴에 달아주었는데, 나에게는 어머니가 계시지 않는다는 이유로 하얀색 꽃을 달아주었다. 다른 아이들처럼 그냥 빨간 꽃을 달아주면 좋으련만, 굳이 하얀 꽃을 달아주는데 그동안 쌓였던 엄마 없는 서러움이 터져 나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아무리 울음을 참으려 해도 멈추지 않아 서럽게 울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래서 해마다 5월 첫째 주일인 어린이 주일은 나에게는 슬프고 고통스러운 날로 기억된다. 하지만 예수님의 사랑이 더 크게 와 닿은 때부터 그 상처는 치유되었다.
어린이 주일 오후 예배는 야외예배로 드렸고 보물찾기와 여러 가지 재미있는 게임을 했다. 주일학교 부장 선생님이 그때 어린이들에게 장래 희망을 한 사람씩 말해보라고 하셨다. 아이들이 돌아가며 장래 희망을 이야기하는데 내 순서가 되었을 때 나는 세 가지 꿈을 말했다. 당시에는 라디오를 많이 듣던 시대로 밭에서 일할 때 라디오를 즐겨 들었던 터라 나는 방송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다.
두 번째로는 노래하는 가수가 되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세 번째로는 비행기 조종사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소를 몰고 꼴을 먹이러 언덕에 올라갔을 때 머리 위로 날아다니는 비행기를 올려다보곤 했기 때문이다. 당시 우리 집이 너무 가난해 먹을 양식이 없었다. 10리 밖의 초등학교에 다녀온 후에는 이웃 집사님 댁의 소를 몰고 나가 꼴을 먹이고 저녁이 되어 돌아오면 저녁 한 끼를 얻어먹을 수 있었다.
그 집사님은 음식도 주시고 장날에 시장에 가면 내가 입을 옷도 사다 주셨다. 지금까지도 감사한 마음을 잊지 않고 있다. 오후에 소를 몰고 산으로 올라가면 소는 풀을 뜯어 먹으라 두고, 나는 묘터의 잔디밭에 누워서 해가 지기를 기다리노라면 하늘 위 비행기가 떠가는 모습이 보였다. 저 비행기 안에는 누군가 타고 있을 텐데 나도 비행기를 타봤으면 좋겠다. 아니 비행기 조종사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목사가 된 후 오직 전도와 선교만 하겠다고 결단하고 30여년간 전도하러 다니다 보니 비행기를 탈 기회가 많았다. 지금까지 국내는 물론 50개국 이상을 다닌 것 같다. 비행기 조종사는 안 됐지만 비행기를 많이 타고 다니는 사람이 된 것이다. 장모님은 나를 위해 기도하실 때 항상 ‘우리 박 목사 오대양 육대주를 다니면서 복음 전하게 해주세요’ 하셨는데 그 기도대로 된 것이다.
어릴 때 첫 번째 소원이었던 방송인은 되지 못했지만 27년간 방송사 언론인과 연예인들에게 복음을 많이 전했고 방송인들을 제자 삼게 되었다. 직접 쓴 시에 이범희 작곡가가 곡을 붙인 노래로 앨범을 내고 방송에 내 노래가 나가기도 했으니 전업 가수는 아니지만 노래하는 가수가 된 것이다. 요즘은 복음을 전하려고 만든 개인 방송 ‘박용배 TV’를 통해 ‘전도는 쉽고 되어지는 것이다’는 내 책 제목으로 방송을 수년째 지속하는 방송인이 되었다. 어릴 때 우연히 이야기한 나의 장래 희망을 작은 신음까지도 응답하시는 하나님이 기억해주셔서 다 이루어지도록 하신 것이다. 할렐루야!
***[역경의 열매] 박용배 (4) 새벽기도가 유일한 낙… 일하는 틈틈이 성경 읽고 힘내
형편 어려워 초등 졸업 후 중국집 취직
온종일 힘들게 일하다 너무 외로워지자
어릴 때 교회에서의 좋은 기억 그리워져
초등학교 졸업 후 가정 형편이 어려워 중학교도 가지 못하고 도회지로 나가 돈벌이에 나섰다. 경주 불국사 앞 코오롱호텔 나이트클럽 웨이터 보조원으로 일하던 박용배 목사.
나의 고향은 경북 의성군 춘산면 효선리이다. 우리 마을은 춘산면에서도 가장 후미진 골짝 동네였지만 교회는 일찍이 1906년 1월 5일 세워졌다.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투옥되고 고문당하다 순교하신 권중화 전도사님이 효선교회와 주변 6개 교회를 세웠다. 교회가 일찍 세워진 마을이라 초등학교가 들어서 있었고 거기서 수많은 목회자가 배출됐으며 김수한 의원(전 국회의장) 같은 정치인도 나왔다.
지독하게 어려웠던 어린 시절, 하나님은 나를 연단하시고 인도하셨다. 네 살 때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에 도박까지 하면서 논밭과 집까지 다 날렸다. 형님들은 초등학교를 마치고 모두 객지로 나갔고 누나도 객지에 돈을 벌러 가려 하다가도 병든 아버지를 나 몰라라 하고 차마 나갈 수 없어서 집에 남았다. 누나는 살림하고 아버지 병간호를 하면서 남의 집 밭일을 하며 연명했다. 가난한 형편에 나는 늘 배가 고팠다.
초등학교 졸업 후 친구들은 모두 중학교로 진학했지만 나는 고향을 떠나 대구로 나와 중국집 배달부로 일하게 됐다. 체구가 왜소했던 나는 중국집 배달통을 양손에 들고 배달을 다니는데 배달통이 커서 땅에 닿았고 무겁고 힘들었다. 열네 살 때부터 대구 봉덕동 미8군 후문 앞에 있는 중국집에서 배달부로 일했다. 이후에는 대구의 만둣집을 다니며 주방에서 일하다가 동성로에 있는 경양식 식당과 포정동 음악다방에서 커피 뽑는 일을 했다. 향촌동에 있는 맥주 홀에서는 웨이터 보조원으로 잠시 일하다 경주의 불국사 앞에 있는 코오롱호텔이 오픈할 때 나이트클럽 웨이터 보조로 일하기도 했다.
열여섯 살 때는 중국 화교가 운영하는 만둣집 주방에서 일하는데 너무 외로워 교회에 가고 싶었다. 어릴 때부터 교회당 옆집에서 자랐고 교회에서 찬송가를 부르고 예배드리던 것이 너무 그리워 교회에 가게 해달라고 기도했더니 잠을 덜 자고 새벽기도를 나가면 되겠다는 마음에 그때부터 새벽기도를 다니기 시작했다.
종일 힘들게 일하고 새벽에 일어나지 못할까 싶어서 잠들기 전에 물을 많이 마셨다. 이렇게 하면 소변이 마려워 새벽에 깰 거로 생각했다. 나는 일하는 틈틈이 성경을 읽으며 힘을 얻었고 새벽 기도를 유일한 낙으로 삼았다. 새벽예배는 날마다 감격이었고 그때마다 눈물로 기도를 드렸다. “아흔아홉 마리 양보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귀하게 여기시는 예수님, 저를 기억해주세요”라며 기도했다.
열일곱 살에 아버님이 돌아가시자 고향에 갈 일은 없어졌다. 명절이 되면 친구들과 선후배들은 선물 꾸러미를 들고 고향에 갔는데 나는 갈 곳이 없었고 그저 성경을 읽으며 명절을 쓸쓸하게 보내곤 했다. 하지만 어디서 일하든지 항상 새벽기도를 열심히 다니며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하나님! 주일성수 하면서 십일조를 온전히 드릴 수 있고 믿음 생활을 마음껏 할 수 있도록 저의 앞길을 인도해 주옵소서.’ 하나님은 나의 기도를 들으셔서 청소년 시절 타락하지 않게 보호해 주셨고 성경 말씀과 새벽예배로 은혜받게 해주셨다.
***[역경의 열매] 박용배 (5) 고향 폐가에서 돈 한 푼 없이 고달팠던 방위병 생활
방위 근무하면서 돈 벌어볼 생각으로
업소 단골인 한 군인에게 근무지 부탁
일 틀어져 군기 센 전투방위부대 배치
1980년 경북 의성군 춘산면 방위병 시절 빈집에서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이 돌던 폐가에서 자취하던 때의 박용배 목사.
다시 대구로 와 동성로 레스토랑에서 일하는데 방위소집이 됐다. 단골손님이던 육군 대위에게 3주간 훈련 후 동사무소에서 근무할 수 있도록 해줄 수 있냐고 했더니 가능하다며 관계자들 접대비로 30만원을 달라고 했다. 나는 돈을 전달하고 훈련소에서 3주간 교육을 마쳤다. 훈련 중 고향에서 방위병으로 근무할 사람은 미리 고향 주소를 적어내라는 광고가 있었지만 나는 미리 부탁해놓았으므로 적어내지 않았다. 대구에 있으면서 낮에는 동사무소에서 근무하고 밤에는 업소에서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훈련받을 때 조교 말로는 31경비대대와 32경비대대가 사단 바로 옆에 붙어 있어서 거기 배치되는 사람이 많을 거라고. 거기는 전투 방위부대라 현역병보다 훨씬 고돼서 자살하는 병사도 많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이미 돈을 써서 부탁해놓고 왔으니 대구 중구의 어느 동사무소 중대로 배치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동사무소가 아닌 31경비대대로 배치됐다. 복무하는 첫날부터 6시에 퇴근하지 않고 밤 10시까지 기합을 받으며 바짝 군기를 잡는 고달픈 방위병 생활이 이어졌다. 이게 웬 날벼락인가 싶어 알아보니 돈을 받았던 그 대위는 제대해서 자취를 감추었고 연락도 닿지 않았다.
친구에게 부탁해 대구 중구에 있던 주소를 퇴거해 고향인 경북 의성군 춘산면 효산리 본적지로 전입신고를 했다. 그리고 31경비대대를 다닌 지 2개월 만에 기적적으로 고향 면사무소 예비군 중대로 보직 변경됐다. 중대장은 내가 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면서 자신이 살다가 팔리지 않는 빈집에서 자취하며 방위 근무하라고 했다. 그 빈 집에 가보니 그때가 8월 중순이었는데 마당에 풀이 어른 키만큼 자라 있었다. 옆집에서 낫을 빌려다 풀을 다 베고 방 한 칸을 청소하고 거기서 자취하면서 18개월간 방위병 근무를 했다.
대구에서 근무지로 급히 이사 오는 바람에 친구에게 전세방이 나가면 보증금을 받아달라고 했는데 친구는 그 돈을 가지고 사라졌다. 그래서 돈이 한 푼도 없는 가운데 힘들고 어려운 생활이 시작됐다. 석유곤로에 냄비 하나와 숟가락으로 보리쌀로 밥을 짓고 멸치를 고추장에 찍어 먹으면서 방위병 근무를 했다. 내 보직은 전령이었다. 의성읍에 있는 찰파 부대에 매일 보고서를 가지고 가서 전통문을 다시 받아오는 일이었다.
군부대 일이 끝나면 다른 방위병들이 항상 붙잡아 퇴근을 못하게 했고 식당의 온갖 궂은일을 하다가 해 질 녘이 되어서야 보내주곤 했다. 면 소재지 중대의 박찬석 중대장이 예천의 연대장을 만나 나의 딱한 사정을 얘기해주고 전령에서 무기고 야간 경비병으로 보직 변경을 해줬다. 무기고 경비는 이틀에 한 번씩 밤 근무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리고 낮에는 춘산 지서(파출소)에서 급사로 일하도록 배려해 주었다. 지서에서 근무하니 월급이 나왔다. 그래서 월급을 받으면서 방위병 생활을 했다.
춘산 교회에 출석하면서 주일학교 교사와 성가대원으로 봉사하고 새벽기도도 빠지지 않았다. 제대하면 주일성수와 십일조 생활을 잘 할 수 있는 곳으로 인도해 달라고 간구했는데 방위 제대 2개월을 앞둔 어느 날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길이 열렸다.
***[역경의 열매] 박용배 (6) 부모님 강요로 결혼한 아내, 마음의 준비 안 됐다며…
교회 장로님 양자 된 지 6개월 만에
아내 동의 없이 서둘러 혼인 올려
신혼여행 떠나선 말도 걸지 말고
접근하지 말라며 화내고 할퀴기도
1981년 3월 25일 국회의원 선거날 경북 의성군 금성면 탑리 현대 예식장에서 이경희 사모와 결혼식을 올리고 기념 촬영을 하는 박용배 목사.
수요예배 후 성가대 연습을 마치고 나니 김 집사님이 잠시 대화를 하자고 했다. 우리 교회 앞에 사는 이재훈 장로님과 김쌍금 전도사님 댁에 무남독녀 딸이 있고 그 딸 이경희양은 영주기독병원에 간호조무사로 근무하고 있는데 전도사님이 기도하다가 ‘박 선생을 아들로 양자 삼으라’는 성령님의 감동이 있었다며, 한 달 후 제대하면 장로님 댁에 양자로 들어와 줄 수 있겠냐는 것이다.
상상도 하지 않던 일이라 나는 기도해 보겠다고 말하고 집중적으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제대 후 대구에서 취직해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양자가 되라고 하니 당황스러웠다. 기도하며 하나님께 답을 구하고 있는데 한 달이 지나 전도사님이 가부를 알려달라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네가 10년 가까이 객지 생활하면서 번 돈이 남았느냐. 조금 있던 돈은 내가 불어 버렸느니라’ 하고 말씀하신다는 마음이 들면서 지금은 순종하라는 감동이 왔다. 그래서 제대 한 달을 앞두고 자취하던 집에서 전도사님 댁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때부터 장로님과 전도사님은 나를 양자로 입적시키려고 여기저기 알아보셨다. 장로님의 형님이 경북도청에서 국장님으로 근무하셨는데 알아보니 동성동본이 아니면 양자로 입적이 안 된다는 연락을 받으셨고 크게 실망하는 눈치였다.
그렇게 6개월가량 시간이 흐른 뒤 전도사님은 “너는 결혼 상대자를 놓고 어떤 기도를 하고 있느냐”고 물으셨다. 나는 초등학교 출신이지만 자녀교육을 위해 상대 여성이 고등학교를 나왔으면 좋겠고 피아노를 치면서 찬양할 수 있는 자매를 놓고 기도하고 있다고 말씀드렸다. 전도사님은 알겠다고 하시더니 영주기독병원으로 가서 딸을 사표 내게 하고 짐을 싸 들고 집으로 데리고 오셨다.
다음 날 새벽기도를 마치고 오니 아버님 어머님 그리고 딸 세 사람이 함께 흐느껴 울고 있었다. 딸이 사귀는 사람이 없다고 하고 엄마가 기도하는 중에 아들과 네가 결혼하는 환상을 보여 주시면서 하나님이 둘을 결혼시키고 아들이 아닌 사위가 되게 하라고 하신다는 이야기를 했다. 딸은 앞으로 음대에 진학해 성악가에게 시집가고 싶었는데 왜 저런 초등학교 밖에 못 나온 사람과 결혼해야 하느냐면서 울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양자로 들어간 지 6개월 만인 1981년 3월 25일 결혼하게 되었다. 춘산교회 목사님이 주례하셨고 삼촌과 숙모님이 신랑 측 혼주석에 앉으셨다. 첫째와 둘째 형님은 지난밤에 얼마나 술을 많이 마셨는지 퉁퉁 부은 얼굴에 한눈에 알코올 중독자들로 보였다. 함께 방위 생활을 하던 동료들과 고향 친구들 몇 명이 참석해 주었다.
예식이 끝난 후 부산으로 신혼여행을 떠났는데 버스 안에서 아내는 한마디 말도 하고 싶지 않다며 고개를 돌렸다. 부산에 도착해 터미널 근처 여관에 방을 잡아놓고 식사하러 가자고 하니 아내는 싫다고 했다. 부모님의 강요로 어쩔 수 없이 결혼은 했으나 아직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안 되었다며 접근하지도, 말을 걸지도 말라며 내가 조금만 가까이 가면 화를 내고 할퀴려고 했다.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내가 싫으면 아예 결혼하지 말 것이지 예식까지 다 치르고 나서 저러는 것이 내가 못 배우고 부모님도 없다고 무시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역경의 열매] 박용배 (7) 죽을 결심한 내게 “꼭 목회자 돼야” 장모님 눈물로 회유
결혼 후에도 계속 아내에게 무시당해
농약 가져다 유서까지 쓰고 자살 준비
1981년 박용배(왼쪽) 목사의 장인 이재훈(오른쪽) 장로, 장모 김쌍금(왼쪽 두 번째) 전도사, 아내 이경희 사모와 함께 처가집 과수원에서 사과를 수확하는 모습.
1981년 3월 25일은 국회의원 선거날이었다. 그날 나는 결혼식을 올리고 부산으로 3박 4일 예정으로 신혼여행을 갔지만 신부는 나를 심하게 거부했다. 참담한 심정으로 혼자 밖으로 나와 길을 걷다가 공원 벤치에 앉아 하염없이 울었다. 일찍 떠나신 부모님이 원망스러웠다. 하나님께도 원망스러운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저렇게 나를 무시하면서 싫다는 사람과 왜 결혼하게 하셨습니까. 저는 이 결혼 인정하지 못합니다. 결혼식 올린 것도 취소하겠습니다.’
나는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다음 날 아침 집으로 가자고 말했고 고속버스를 타고 동대구 터미널까지 오게 되었다. 주례 목사님께 드릴 선물을 준비하자고 했더니 신부는 자기에게 말 시키지 말라고 했는데 왜 말을 하느냐고 화를 막 내었다.
‘그래, 그렇다면 다시는 말 시키지 않겠다.’ 이렇게 결심한 나는 홀로 버스를 타고 부곡 온천으로 가 어느 여관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사흘간 금식하면서 나는 이 결혼을 취소해 달라고 기도했다. 그리고 장모님께 전화를 걸어 집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했다. 장모님은 일단 집에 왔다가 가라고 하셨다. 나는 우선 집에 갔다가 짐을 챙겨서 대구로 취직해 나오리라 마음먹고 처가에 도착했다.
집에 들어가 보니 장인어른과 장모님은 딸을 앉혀놓고 야단치고 있었다. 사위에게 잘못했다고 빌라고 윽박질렀고 아내는 부모님 앞에서 잘못했다고 했지만 방에만 들어가면 똑같은 반응이었다. 자신은 준비가 안 되었으니 가까이 오지 말라는 것이다. 그렇게 한 달이 넘도록 말다툼을 했다. 아내는 내가 소름 끼친다고 멀리했고 나는 살고 싶지 않았다.
처가 집은 과수원을 하고 있었다. 나는 창고에서 농약을 가져다 놓고 유서를 썼다. 장인 장모님께 죄송하다고 쓰고 울산에 있는 누나에게 ‘미안하다. 동생은 먼저 간다’는 내용으로 유서를 썼다. 밤새 고민하면서 날이 새면 죽으리라 마음먹고 있었는데, 장모님이 교회에서 기도드리다가 새벽 2시쯤 오셨다. 당신이 기도해 보니 내가 죽으려고 하는데 죽으면 안 된다. 하나님께서 자네를 신학교에 보내 주의 종으로 준비시키려고 하시는데 왜 죽으려 하느냐며 나를 붙잡고 우셨다.
장모님은 죽으려고 결심한 나에게 신학교에 가서 목회자가 돼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장모님은 처음에 나를 양자로 들어오라 하실 때부터 신학교에 가서 목회자가 되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때마다 완강하게 거부했다. 초등학교밖에 안 나왔고 내성적인 성격에 말도 잘못하는 내가 어떻게 목회자를 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단 0.1%도 해본 적이 없었다.
장모님도 결혼하실 때 성경에 손을 얹고 죽음 외에는 절대로 헤어지지 않겠다고 서약을 했기에, 당신은 23년간 살면서 고난이 많았어도 참고 살아왔는데 왜 나는 두 달도 못 견디고 죽으려 하느냐며 우셨다. 그래서 나는 할 수 없이 자살하려던 것을 일주일 후로 연기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금식기도를 할 테니 정말 내가 신학교에 가서 목회자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장모님을 통해서가 아니라 나에게 직접 확실한 증거를 보여달라고, 그러면 순종하겠노라고 말했다.
***[역경의 열매] 박용배 (8) 날 부르시는 이가 하나님이라 확신, 목회자의 길 순종
말 잘 못해서 목회자 될 수 없다 했지만
기도 중 “내가 너와 함께하니 순종하라”
하나님 음성 듣고 신학 공부하기로 결심
박용배(왼쪽) 목사가 1985년 의성교회 전도사 시절 교회학교에서 인형극을 준비하는 모습.
나는 말할 줄 모르니 목회자가 될 수 없다고 기도하는데 ‘누가 입을 지었느냐? 내가 지은 것이 아니냐! 내가 너와 함께하니 순종하라’는 응답이 있었다. 당시 내 몸무게는 43㎏ 정도로 바짝 마른 상태였고 빈혈이 심해 갑자기 일어나면 쓰러질 정도였다. 10여년 동안 객지에서 혼자 살면서 제때 식사하지 못했더니 위장이 약해져 조금만 매운 음식을 먹어도 배가 아팠다.
일주일간 금식기도를 하고 마지막 날 새벽에 비몽사몽 가운데 출애굽기 3장과 4장을 읽으라는 음성이 들려왔다. 나는 불을 켜고 성경을 찾아 읽었다. 거기에는 모세가 하나님께 소명 받는 장면이 나와 있었다. 모세가 하나님께 자신은 입이 뻣뻣하고 말할 줄 몰라 애굽에 갈 수 없다고 했다. 하나님께서는 누가 입을 지었느냐 내가 지은 것이 아니냐 너는 바로 앞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고 하는 말씀이 나와 있었다.
나는 말을 잘할 줄을 모른다는 것과 학력이 모자라 신학교를 갈 수 없다고 핑계를 댔는데 그 말씀을 보고 나서는 더이상 핑계를 댈 수 없었다. 나를 부르시는 이가 여호와 하나님이 맞다는 확신이 오니 더이상 못 한다고 할 수 없었다. 춘산교회 목사님을 찾아뵙고 의성에 있는 성경학교에 갈 수 있는 방법을 문의했다. 성경학교가 3월 첫 주에 개강해 이미 5월 중순이 되어 있었는데 목사님은 자신이 성경학교 교장이니 시간이 지났지만 당장 따라가서 성경학교 기숙사에 있으면서 다른 사람들의 노트를 보고 옮겨쓰면서 성경 공부를 하라고 했다. 그다음 날 목사님을 따라 성경학교에 갔더니 학생들이 30여명 있었고 신학교 학생 20여명이 다른 교실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성경학교 교실에서 수업을 들으며 앉아있는데 하염없이 눈물이 나왔다. 과연 나 같은 사람이 성경학교를 졸업하고 신학교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인가. 중학교와 고등학교 과정은 검정고시를 봐야 하는데 내가 합격할 수 있을까. 나 같은 죄인이 신학대학원에 들어가 졸업해 목사가 될 수 있을까. 나는 과연 주의 종이라고 하는 목사로서 자격이 있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아닌 것 같은데 왜 하나님께서는 나 같은 죄인을 부르셔서 목회자로 사용하시려는 것일까. 자신도 없고 확신도 안 오고 그저 소리 없이 눈물만 계속 흘리면서 공부했다. 자신이 없으니 새벽마다 의성교회에서 엎드려 기도했다. 하나님! 저는 못 합니다. ‘하나님이 저를 부르셨으니 하나님께서 알아서 해주세요’ 라고 하면서 밤낮으로 부르짖고 기도했다.
초등학교 밖에 못 나왔던 내가 성경학교 3년 동안 성경공부를 하면서 검정고시로 중·고등 과정을 다 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대구 계명전문대를 나오게 되었고 경산에 있는 대구신학교를 나오게 되었다. 의성교회 전도사로 교회 일을 했고 초등부와 중등부를 맡아 교회학교 사역을 하면서 총신대학원에 들어갈 준비를 하게 됐다.
그렇게 1987년 총신대 신학대학원에 시험을 보고 합격했는데 등록금만 내고 한 해 휴학을 한 후 1988년 복학했다. 서울 면목동에 전세방 한 칸을 얻어 그동안 처가에 있던 아내와 아들 요셉과 딸 한나를 데려와 네 식구의 서울 생활이 시작됐다.
***[역경의 열매] 박용배 (9) 서울살이 시작하며 생활고에 공부 틈틈이 아르바이트
총신대 신대원에 들어가며 서울 이사
고물 수집, 공사장 일, 교회 사역 등
가족 부양과 학비 벌기 위해 고군분투
아내도 여성복 장식 삯바느질로 도와
박용배 목사를 사위 삼고 신학교에 보내고 목회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돕고 있는 장모 김쌍금(왼쪽) 전도사는 현재 88세의 나이에도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다.
1981년 3월 결혼하고 처음 두 달간은 몹시 갈등했지만 목회자의 소명에 순종하고 성경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니 그때부터 아내는 고분고분해졌다. 하나님의 부르심 과정에 아내가 쓰임을 받은 것이다. 나는 오로지 공부와 교회 전도사 사역에 몰두했다. 처음에는 오기로 시작했지만 그 모든 갈등과 어려움도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임을 깨닫게 됐다.
총신대 신대원에 들어가면서 가족이 모두 서울로 이사 왔다. 서울 면목동 동서울중앙교회 이기만 목사님과 장인이 친척이어서 교육전도사로 사역하게 된 것이다. 처가댁에서 750만원을 전세자금으로 도와주셨다. 8월 한창 무더운 폭염 가운데 이사 왔는데 1만원짜리 중고 냉장고를 들여놓았더니, 냉장고 문이 닫히질 않아 고무줄로 둘러놓고 사용했다.
아내는 여성복 앞부분에 반짝이는 장식을 바느질하는 일을 하면서 할부로 전화기 한 대를 들여놓았다. 나는 학교에 가지 않는 날에는 공사장에서 일하면서 생활비를 벌었다. 아들 요셉은 다섯 살, 딸 한나는 세 살이라 교회 선교원에 다녔다. 시골 촌사람인 신학생이 가족과 함께 서울 생활하면서 제일 어려운 문제는 경제적인 것이다.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교회 사역과 공부 틈틈이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교회 전도사였던 선배가 면목5동에 개척교회를 시작했는데 40일 금식기도 후 건강이 회복되지 않아 기도원에 머물고 있었고, 그의 가족과 친인척 15명 정도가 모이고 있었다. 목사님이 언제 회복될지 모르니 나에게 당분간 전도사로 시무해달라고 했다. 나는 교회를 섬기면서 경기도 양지 총신대 신대원에서 공부했다. 주중 나흘은 양지에서 공부하고 토요일과 주일에는 교회 사역을 했다. 월요일에는 고물상 손수레를 빌려 강냉이 몇 자루를 싣고 고물을 거두러 다녔다. 종일 빈 박스와 빈 병을 줍고 골목을 돌아다니며 고물을 수집해 학비를 모았다.
방학 때는 중곡동 신축건물 공사장에서 막노동 일을 하며 생활비를 벌었다. 성도들이 10명 정도 모이는 교회이다 보니 생활비를 제대로 받을 수 없었고 아들 요셉은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그렇게 1년간 교회를 섬겼는데 목사님의 건강이 조금 회복돼 다시 시무하겠다 해서 교회를 나오게 됐다.
총신대학원 2학년인 1989년 여름 동창 전도사님의 소개로 인천 주안동의 석바위 시장 2층 상가에 30평쯤 되는 하나로교회로 오게 됐다. 인천은 연고가 없는 낯선 곳으로 한 번도 와보지 않았던 곳이다. 동창 전도사가 서울 청계천 로얄빌딩 12층에 하나로교회를 개척하면서 처가댁이 있는 인천 주안동에 지교회를 세우고 전도사 한 명을 보냈는데 석 달 만에 그만뒀다며 나에게 가달라고 한 것이다. 성도들은 20여명 정도였다.
인천에서 양지까지 통학버스를 타고 다니는데 차가 너무 막히고 힘들었다. 학교에서 공부하고 숙제로 받은 과제물은 너무 많았고 힘겨운 학창 시절이었다. 오후 예배 후 교회 주변에서 전도지를 돌리며 전도하자고 했더니 전도사님의 처형 집사 부부가 서울 전도사님께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여기서는 계속 사역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학교를 졸업하면 교회를 개척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역경의 열매] 박용배 (10) 빈민촌에 고아 출신 배달부 8명으로 개척교회 시작
처가댁에서 과수원 판 3000만원과
전세금 1000만원까지 다 쏟아부어
무허가 집 개조해 첫 개척교회 완성
강대상 뒤 작은 방 만들어 사택 사용
인천 부개동 산동네 빈민촌에 개척한 교회 뒤쪽으로는 공동묘지가 자리하고 있었다. 아들 요셉(앞줄 가운데)과 딸 한나(앞줄 왼쪽)와 함께한 당시 교회 출석 청소년들.
총신대 신대원에 다닐 때 국민일보에서 아르바이트생을 모집한다는 광고가 나와 국민일보를 찾았다. 내가 인천에 산다고 하니 국민일보 부평 지국장을 소개해 주면서 지국장 안내를 받아 국민일보 구독자 신청을 받아오면 신청 수를 확인해 아르바이트 비용을 준다고 했다. 지국장을 만나니 그 지역 아파트에 누가 교회 다니는 신자이고 직분이 뭔지 알려주면서 그들을 권면해 구독 신청을 받아오라 했다. 나는 학교에 가지 않는 날 시간이 날 때마다 그렇게 아르바이트를 시작했고 국민일보 확장 요원으로 2년간 일했다.
아내는 부평 지국장 집에 세 들어 살면서 신문 배달하는 고아 출신 아이들 10여명과 지국 직원들 그리고 우리 가족 등 총 20명의 밥을 해내느라 무척 고생했다. 내가 개척교회를 하겠다고 하니 지국장님은 고아 출신 배달부 8명의 청소년을 데리고 개척하라고 해서 그 아이들의 식사를 아내가 책임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처가댁에서 과수원을 팔아 개척교회 자금 3000만원을 보내 주셨다. 지국장님은 부개동 빈민촌이 개발될 때를 기대하면서 무허가 집을 사두었는데 2500만원에 그 집을 사고 500만원으로는 교회 수리를 하라면서 수리와 건축은 집사님이 도와준다고 했다.
1991년 2월 신대원을 졸업하고 바로 부개동 빈민촌의 방 세 칸짜리 무허가 집을 수리하기 시작했다. 나는 집을 개조하는 척하면서 교회당으로 변모시켜 나갔다. 옆집 아주머니는 교회가 들어오면 시끄러워 안 된다며 수리하는 내내 소리를 지르며 방해했다. 도중에 돈이 부족해 수리가 중단되기도 했는데 전세 살던 방 한 칸짜리 전세금 1000만원을 다 쏟아부어 마침내 교회당이 완성됐다. 예배는 절대 못 드린다고 큰소리치던 윗집에는 절대 소리 나지 않게 기도만 하겠다며 선물을 계속 갖다 주고 달랬더니 화가 누그러졌다. 당시 수리할 때 힘써주신 국민일보 부평 지국장님께 이 지면으로나마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무허가 집에서 시작된 개척교회에서 고아들은 잠시 교회에 나오는가 싶더니 다 떠나가 버렸고 고향 선배 목사님으로 인천 계양구 임학동에서 목회하시는 김영진 목사님이 네 사람이 앉을 수 있는 장의자 네 개를 보내주셨다. 그리하여 1991년 5월 13일 부개동 빈민촌에서 드디어 개척교회를 시작하게 됐다. 아직 전도사 신분으로서 신대원 졸업한 지 4개월 만에 한마음교회라는 이름으로 시작했다. 개척 예배 설교는 의성 철파교회 정원수 목사님이 해주셨고 동서울중앙교회 이기만 목사님도 오셔서 축복기도를 해주셨다.
주일예배에는 우리 부부와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 요셉과 딸 한나, 가족 네 사람이 예배를 드렸다. 강대상 뒤에 문을 내고 전기 패널 한 장 반을 깔아놓고 그곳을 사택으로 사용했다. 여름에는 비가 새고 곰팡이가 피어 옷도 책도 다 못쓰게 되었다. 빈민촌 집마다 전도지를 돌리면서 교회에 나오시라 권면했지만 사람들은 마음 문을 열지 않았다. 내가 개척한 교회에서 산 쪽으로 100m 위에 감리교회가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동네 집들 사이에 묘지가 여러 개 있었고 산 능선을 넘으면 인천의 화장장과 공동묘지가 있는 곳이었다.
***[역경의 열매] 박용배 (11) 구제 선교에서 영혼을 살리는 복음 전도자의 삶으로
빈민 구제하느라 가족 아픔 몰라 자책
금식기도 끝에 복음 전도 길 열어주셔
구원의 확신 없던 자들 복음으로 구원
1991년 5월 13일 인천 부평구 부개동 산동네에 개척한 교회는 한마음교회라는 이름으로 시작했다.
개척교회를 시작하니 통장이라는 분이 찾아와 이 동네 사람들은 목소리가 크고 욕 잘하는 사람이 이기는 동네라고 했다. 그러면서 전도사님도 그들처럼 욕할 수는 없을 테니 상대방이 거칠게 나오더라도 아무 말 하지 말라고 알려줬다. 게다가 저녁마다 동네에서는 굿하는 소리가 들렸다. 오갈 데 없이 혼자 사시는 외로운 할머니 몇 분이 주일날 교회에 나오시는데 사정을 들어보니 너무 딱했다. 그래서 새벽 부평깡시장에 나가 손수레로 물건 실어주는 일을 했고, 서울 가락시장에 가서는 밤새 총각무 하역 작업을 하며 돈을 벌었다. 일을 마치면 얼굴과 온몸은 흙투성이가 됐고 입에서도 흙이 씹혔다. 그렇게 새벽과 밤에 번 돈으로 빈민들에게 식량과 연탄 등을 전달해 드렸다. 그러다가 1992년 11월 하순 아내가 영양실조로 쓰러져 입이 돌아갔다가 4시간 만에 기적적으로 회복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교회 옆집에는 연세 많으신 할머니가 손자, 손녀와 함께 사셨는데 그 집 방 한 칸에 세 들어 사는 여집사가 감리교회를 다니다가 우리 교회에 나왔다. 아내는 그 집의 새로 산 냉장고 가격을 물어본 적이 있었는데 그 집사는 교회 사모가 옆집 냉장고에 욕심을 내니 하나님께서 입이 돌아가게 하셨다며 말하고 다녔다. 나는 가족의 아픔을 뒤로하고 어려운 성도들을 위해 헌신 봉사하고 있었는데 그런 말을 들으니 마음이 아팠다. 빈민선교를 한다면서 정작 내 가족은 돌볼 줄 몰랐던 자신에게 자책이 되면서 후회가 밀려왔다. 이 일은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어려운 이웃을 구제하는 빈민선교는 이제 그만하겠으니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달라고 기도했다. 그렇게 금식기도를 했는데 7일째 되는 날 응답이 왔다. 은과 금을 주지 말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하라는 말씀이었다. ‘아! 그렇구나. 내가 왜 복음은 희미하게 전하고 구제품만 전달하고 있었나.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확실하게 전하자.’ 이렇게 마음을 정하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주님, 어디든지 전도의 문을 열어 주시면 제가 가서 예배를 인도하고 예수를 전하겠습니다. 왜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지 믿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확실하게 전하기를 원합니다. 문을 열어 주옵소서’라고 간절히 기도드렸다. 그때부터 여기저기서 전도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부평공고, 롯데백화점(부평)신우회, 부평 한국전력신우회, 여의도 KBS 성우신우회, 북인천 세무서 등 여러 기관에서 매주 신우회 예배를 인도하면서 복음을 전하게 됐고 구원의 확신이 없던 자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구원을 받게 되었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낙심하고 교회를 다니지 않고 쉬던 사람들이 신우회 동료의 초청을 받고 참석했다가 은혜받고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음 생활을 다시 시작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빈민들에게 구제품이나 연탄, 식량을 전달하며 아르바이트로 지쳐있던 내가 여러 곳 직장 신우회에 달려가 예배를 인도하면서 복음을 전하니, 먼저는 나 자신부터 힘을 얻고 영적으로 살아나게 됐다. 아내의 입이 돌아갔다가 회복되는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나의 목회 사역을 구제 운동과 아르바이트에서 영혼을 살리는 복음 전도자의 삶으로 완전히 전환하도록 해주셨다.
***[역경의 열매] 박용배 (12) 과천 정부 청사 예배 인도… 복음 전하며 주님 영접 도와
화요일 재경부, 금요일 농림부서 시작
공정거래, 과기부 등 예배 인도 쇄도
주님 영접하고 구원 확신 얻도록 인도
박용배 목사는 1994년부터 경기도 과천의 정부 제2청사에서 신우회 예배를 부서별로 인도하기 시작해 서울 광화문 1청사까지 신우회 예배를 드리게 됐다. 사진은 정부 과천 청사 모습.
나는 과천 정부 청사 신우회 예배를 인도하게 됐다. 매주 화요일 정오에 당시 재경부, 금요일 농림부 신우회에서 예배를 인도했다. 그랬더니 과기부에서는 목요일, 공정거래 신우회에서는 수요일에 예배를 드려달라고 했다. 게다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아침 기도회도 인도해 달라고 요청이 들어와 매일 7시30분 기도회를 인도했다. 부개동 빈민촌 교회에서 새벽기도를 마친 뒤 과천 2청사에 도착해 아침 기도회를 인도하고 정오 신우회 예배를 기다리며 말씀을 읽고 기도했다. ‘주여! 대한민국을 축복하시어 제사장 나라로 사용하여 주소서!’
과기부 신우회장님은 서울 강남의 장로교회 안수집사인데 교회에서 내 얘기를 했다고 한다. 그러자 조달청과 특허청 신우회장인 안수집사들이 예배를 인도해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혼자 감당할 수 없어 선후배 목사님들을 연결해드렸다. 신우회 예배에는 천주교 성당을 다니는 신우회원도 참석했는데 복음을 전하니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구원의 확신을 얻기도 했다.
직원 중에는 믿다가 낙심한 분들이 다시 복음으로 세워지고 신앙생활을 회복하는 경우들도 여럿 있었다. 하루는 농림부 신우회장님 소개로 증권회사 부사장의 고3 아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갔다. 아들은 공부하면서 잠을 못 자고 스트레스를 받으면 물건을 집어 던지고 난동을 부려 정신병원 진료를 받으며 약을 먹고 있었다. 그 학생에게 복음을 전하니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런데 부사장님 내외는 천주교 신자였다. 그는 아들에게 영접시켜주신 것까지만 받겠다고 했다. 그는 궁궐 같은 집에서 부유하게 살고 있었지만 복음은 잘 모른 채 종교 생활만 하는 것 같았다. 흑암의 세력에 둘러싸인 그 가정의 모습이 안타까웠다.
1994년부터 1996년까지 매주 농림부 신우회를 인도했다. 어느 날 과로로 순직하신 고 김정룡 차관보의 1주기 추도예배 부탁을 받게 됐다. 나는 알겠다고는 답했지만 너무 긴장되고 걱정돼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 아버지! 그날 고인의 행정고시 동료들과 정관계 고위직 인사들이 많이 참석한다는데 그 중요한 자리에 유명한 목사님을 보내시지, 왜 저 같은 목사를 보내십니까. 떨려서 어떻게 예배를 인도합니까’ 하고 계속 기도했다. 그랬더니 주님은 내 마음에 이런 감동을 주셨다. ‘너를 보내는 이유가 있다. 그날 불신자들과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정확한 복음을 전달하라!’
96년 1월 18일 드디어 그날이 됐다. 국립묘지 유공자 묘역에 갔다. 몹시 추운 날이었는데 유가족과 고위직 공무원들은 의자에 앉아 있고 더 많은 분들은 서 있었다. 고인은 국가관이 투철하고 사명에 불타는 가슴으로 휴일에도 근무하다가 과로로 쓰러지셨고, 장기기증으로 6명에게 새 생명을 전하고 지금은 천국에서 쉼을 얻고 계시니 그 축복을 유가족과 후손들이 두고두고 받으시리라 믿는다며 충분한 위로를 드렸다. 그런 다음 사람이 어디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 복음으로 설명했다.
운명이나 사주팔자가 무엇이며 예수를 믿으면 어떻게 되고 안 믿으면 어떻게 되는지를 충분히 알렸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서 예수님을 영접하면 구원을 받게 된다고 복음 초청을 했다. 놀랍게도 적지 않은 참석자들이 영접 기도를 따라 했다. 국립묘지를 둘러싼 산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였다. 할렐루야!
***[역경의 열매] 박용배 (13) 귀신 들린 청년에 예수님 선포 “주는 그리스도시요…”
마태복음 16장 16절 말씀 선포한 후
한 시간 동안 기도드리며 청년과 씨름
결국 입에 거품 내뱉고 귀신 떠나가
산동네 빈민촌에서 가정집을 개조해 설립한 개척교회는 비좁았지만 전도의 기적은 끊이지 않았다. 교회 강대상을 배경으로 사모, 두 남매와 함께한 박용배 목사.
산동네 빈민촌에서 개척교회를 하면서 정부종합청사 신우회에서 매일 예배를 인도하던 시절이다. 그날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분주한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는데 교회로 빨리 오라는 연락이 왔다. 교회 나온 지 한 달 정도 된 청년이 귀신이 들려서 교회에서 소리를 지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급하게 교회에 도착해보니 권 형제라는 청년이 눈동자가 돌아가 있었고 혓바닥을 길게 내밀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마태복음 16장 16절 말씀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지금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똑같은 고백을 세 번 반복하니 청년은 양쪽 귀에 두 손가락을 집어넣고 귀를 틀어막으며 “제발 제발 다 좋으니 그리스도라는 말만 하지 마세요!”라고 소리치며 무릎을 꿇고 엉덩이를 쳐들고 엎드렸다.
나는 그 형제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때는 12월 말이었다. 추운 날씨에 내 손은 얼음장 같았는데 청년은 내 손이 뜨겁다며 치워달라 소리를 질렀다. 나는 계속 그의 머리에 손을 얹고 예수님을 선포하다가 그에게 질문했다. “너 누구냐.” 그러자 “나는 이춘식이다”라고 답했다. “언제 들어왔냐.” “군대에 있을 때 들어왔다.” “뭐 할 때 들어왔냐.” “굿할 때 들어왔다.” “너 안 나가면 못 버텨, 어서 나가라!” 하고 명령했다. 그러자 “안 가, 못 가, 갈 곳이 없어” 라고 했다. “더러운 귀신아! 저 언덕 공동묘지로 가라!” 하자, “거기는 귀신이 너무 많아 못 가” 하고 말했다. 나는 “예수 이름 앞에 너는 안 가고 못 견뎌. 오늘 밤새도록 붙어보자” 했다.
그렇게 귀신 들린 청년과 씨름하느라 내 옷은 땀으로 젖었다. 나는 셔츠 소매를 걷어붙이고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를 고백하며 계속 기도했다. 한 시간쯤 지나자 청년은 입에 거품을 내뱉었고 귀신은 떠났다. 끓는 물에 배추를 넣으면 배추가 흐물거리듯, 권 형제는 코를 골며 잠을 자기 시작했다.
30분 후 청년을 깨웠는데 눈동자는 정상이었다. 그에게 “이춘식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어떻게 그 이름을 아느냐며 놀랐다. 귀신 들려 발작하던 순간은 기억나지 않는 듯했다. 그들은 단짝 친구로 한탄강 근처 전방에서 함께 군 복무를 했는데 어느 여름밤 갑자기 많은 비가 내려 야영 나온 민간인을 구조하러 갔다고 한다. 그때 두 사람은 급류에 휩쓸러 떠내려가다 권 형제는 나무를 붙잡아 살았고 춘식이는 죽었다고 한다.
이후 춘식이 어머니가 무당을 데리고 와 장례식에서 굿을 하는데 친한 친구가 대나무를 잡아야 한다고 해서 권 형제가 굿판 대나무를 잡았고, 그때부터 춘식이 음성이 자신에게서 나오고 잠을 못 자게 되었다고 한다. 군대 의무실에 약을 타러 가니 위험한 존재라며 의가사제대를 시켜 인천 남동공단에서 일하다 우리 교회 강도사님의 전도로 교회에 나오게 되었다.
그는 교회에 올 때도 귀신이 따라오다가 예배를 마치고 나가면 형사가 범죄자를 데리고 가는 것처럼 귀신이 자신의 팔짱을 끼고 간다고 했다. 무속인을 찾아가면 죽은 춘식이가 귀신으로 들어왔다며 신내림을 받고 박수무당이 되라고 했단다. 나는 춘식이 귀신이 아니라 춘식이를 가장한 귀신의 속임수라고 알려줬다. 예수 이름 앞에 귀신이 떠나가고 권 형제가 온전해진 것을 보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역경의 열매] 박용배 (14) 교회 부흥하며 상가 교회로 이전 6년 만에 새 성전 건축
신우회 예배 인도 많이 늘어나며
산동네 빈민촌 교회도 함께 부흥
성도 늘어나 상가 건물 모두 사용
부개동 산동네 개척교회가 부흥해 갈산역 근처 상가로 교회를 이전해 예배를 드리는 모습. 이후 상가 교회도 비좁아져 새 예배당을 건축하게 됐다.
과천 정부 2청사에서 말씀을 전하고 광화문 1청사에 들러 로비에서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나님! 여기는 총리실도 있는데 이곳 신우회에서도 복음을 전하게 해주세요.” 수개월 동안 이렇게 매일 로비에 앉아 기도를 드리던 어느 날 교육부에서 전화가 왔다. 목사님께서 과천 2청사 신우회에서 늘 예배를 인도하신다고 들었는데, 1청사 교육부 신우회에서도 말씀을 전해달라는 부탁의 전화였다.
예배 후 순복음교회에 다니는 한 집사님이 “목사님 저는 교육부에 17년째 근무하고 있는데 목사님처럼 매주 교육부에 오셔서 예배를 인도해 주실 분을 보내 달라고 기도하고 있었어요. 오늘 목사님을 만남으로 그 응답을 받은 것 같으니 매주 들어와 주실 수 있으세요?” 하며 말했다.
그 후 월요일 점심시간마다 교육부 신우회 예배를 인도했다. 그랬더니 교육부, 총리실, 행자부 직원 중 신실한 신자들 중심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과천 2청사와 광화문 1청사 두 곳에서 꼬박 3년간 신우회 예배를 통해 말씀을 전했다. 나는 매일 공무원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이 사역이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것이 맞으면, 산동네 빈민촌에 있는 우리 교회를 부흥하게 해달라고 기도드렸는데 놀랍게도 교회는 부흥되기 시작했다.
그 무렵 교회 이름을 한마음교회에서 사랑의교회로 변경했는데 비좁은 교회당에 100여명 성도들이 모이니 다 앉지 못하고 교회 문밖까지 서서 예배드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집사님들이 예배 처소를 산동네가 아닌 다른 지역으로 이전했으면 좋겠다고 하면서 바쁜 목사님을 대신해 옮길 만한 장소를 찾아보겠다고 했다.
그리하여 산동네에서 교회를 개척한 지 6년 만에 갈산 지하철역 앞 상가로 교회를 이전하게 됐다. 상가 3층을 임대했는데 강대상 양옆으로 칸막이를 쳐서 작은 사무실을 내고, 뒤쪽에는 접이식 칸막이 안에 부엌 공간을 마련했다. 예배드리는 중에 맛있는 밥 냄새가 교회 안에 가득했고 예배가 끝나면 청년들이 큰 널빤지를 이고 나와 장의자 두 개에 걸쳐서 식탁이 되니 예배당이 식당으로 변신했다.
유아실이 없어서 아이들이 예배 중에 뛰어다니기도 했다. 건물 지하까지 임대해 식당과 주일학교 공간으로 사용했는데 그마저도 부족하게 되었다. 교회 바로 아래층이 당구장이었는데 교회를 오르내리며 기도했더니 어느 날 당구장 여사장님이 “목사님이 기도했냐”며 장사가 안돼서 내놓았으니 교회 공간으로 쓰라고 했다. 그래서 상가건물 3개 층을 모두 교회로 사용했는데 그마저도 곧 비좁게 되어 예배당 건축의 비전을 성도들에게 기도제목으로 내놓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교회 집사님들은 성전 건축할 땅을 알아보면서 팔려고 내놓은 교회 건물을 보러 다녔는데 적당한 곳을 찾지 못했다. 그러던 중 상가교회 바로 뒤편 공장이 건물을 팔려고 내놓은 지 한참 되었는데 팔리지 않고 있다고 했다. 마침 새로 교회에 나오기 시작한 건설업 사장님이 이를 보더니, 공장 건물은 증축해 수리하고 공장 마당은 주차장으로 사용하면 적당하겠다고 해서 성전건축이 시작됐다. 그렇게 상가 교회로 이전한 지 6년 만에 새 성전으로 입당하게 되었고, 다시 10년 후 지금의 청라 성전으로 이사 오게 됐다. 전도 현장으로 돌아다니느라 교회를 돌볼 시간이 부족했는데 하나님이 교회를 부흥시키신 것이다.
***[역경의 열매] 박용배 (15) 영적으로 갈급한 언론인들, 복음으로 하나님 만나다
신문사와 방송국 신우회서 예배 인도
복음 전하고 신앙생활 잘하도록 권면
신병으로 고통받고 있던 방송국 기자
영접 후 목회자로 쓰임 받는 역사도
박용배 목사가 KBS에서 한국기독언론인연합회(CJCK) 월례회 예배를 인도하고 있다.
공무원 사역을 한창 하고 있을 때 연합통신(현 연합뉴스) 기자 한 분을 소개받았다. 그는 영적으로 갈급한 언론인들이 많으니 복음을 전해달라고 호소했다. 그래서 나는 3년 동안 공무원 사역은 선배 목사님에게 맡기고 언론사 사역을 시작했다. 이후 연합통신을 비롯해 매일경제 CBS 내외경제(현 헤럴드경제)서울신문사 KBS MBC 신우회에 계속 문이 열렸다.
신문사와 방송국 기자, 그리고 PD들의 모임에서 복음을 전했다. 또 예비 된 언론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신앙생활을 잘하도록 권면했다. 당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언론인들이 힘을 합해 명동 코리아헤럴드 12층에 사무실을 얻어 월세를 내주면서 사무실 겸 언론인교회로 사용하게 해줬다. 나는 그곳에서 본격적으로 언론 사역을 전개하면서 매주 2회씩 언론인을 위한 예배를 드렸고 갈급한 언론인들을 만나 복음을 전하게 됐다.
한번은 KBS 보도국 PD 소개로 영적 문제로 힘들어하는 기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됐다. 만나서 악수하면서 보니 낯이 익었는데 KBS 경제부 기자로 TV에 나오는 분이었다. 그는 밤마다 가위눌림과 악몽으로 시달리는데 잠만 자면 귀신이 목을 졸라 아내가 옆에서 1시간 간격으로 깨워서 숨을 쉬게 해준다고 호소했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약봉지를 꺼내 보여 줬는데 신경정신과 약을 먹어도 낫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종갓집 장손은 아니지만 모친이 무속인이어서 자신에게도 신병이 왔다며 신내림을 권유받고 있다고 했다.
나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에게 말씀을 전했다. 사람은 육신과 영혼으로 이루어졌는데 육신은 부모를 통해 이 땅에 태어나지만 영혼을 지으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우리의 선조 아담과 하와가 마귀에게 속아서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했으며 그 후손으로 태어나는 모든 인간은 원죄를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운명 사주팔자와 마귀의 저주, 지옥 권세에서 빠져나오는 길이 없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왜 예수님을 그리스도(메시아)라고 하는지 그 이름의 뜻을 풀어주면서 예수님을 영접하라고 권면했다. 그 자리에 함께 있던 10명 넘는 PD들은 이미 다 예수를 믿는 분들이었는데 같이 복음을 듣고 기도했다. 귀신에게 시달리던 그 기자도 복음을 다 듣고 무릎을 꿇고 진지하게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영접했는데 감격과 기쁨으로 온 얼굴이 눈물범벅이었다. 다음 날 그는 전화했다. 약도 먹지 않았는데 몇 년 만에 처음으로 잠을 푹 잘 수 있었다며 목조름이나 가위눌림, 악몽도 없었다고 기뻐했다.
그는 예수님을 영접한 이후 자신의 영적 문제가 해결됐다며 여러 기자를 소개하고 연결해주었다. 그의 소개로 만난 어떤 기자는 매주 언론인교회에 나와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더니 나중에는 기자신우회의 예배 인도자가 되기도 했다. 그는 기자 생활을 하면서 야간 신학대학원을 마치고 목사님이 되었고 지금은 유튜버로 많은 구독자를 가진 언론인이자 목사님으로 쓰임 받고 있다. 그는 우리 교회에 와서 간증 집회도 했었는데 스승 목사님 교회에 와서 예배를 인도하게 되어 너무 감사하고 감격스럽다고 했다. 그 목사님과 사역에 응원을 보내며 영적 문제로 고통받던 언론인을 목회자로 세우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역경의 열매] 박용배 (16) 늘 헌신해 주신 고 장로님에게 하나님의 축복 가득하길
현재 제약회사 경영하는 고진업 장로
산동네 어려울 때부터 선교비 지원과
탈북민 교회와 공부방 세우는데 헌신
주변 어려운 목회자와 선교사들 도와
박용배(왼쪽) 목사가 서울 종로구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에서 열린 도약선교회 예배 후 고진업 장로와 부인 이성숙 권사와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정부종합청사 신우회에서 매일 예배를 인도하고 있을 때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자신은 어느 교회 여전도사인데 며칠 후 동부이촌동 한 아파트에서 대한항공 기장 등 10여명이 모여 복음을 들으려고 하니 와서 전해달라는 것이었다. 약속한 날 찾아갔더니 전직 기장 출신 어르신 한 분과 여자 집사님 몇 분이 모여 있었다. 말씀을 전하고 나오는데 한 분이 바로 옆 자신의 집에 저녁 식사를 준비해 놓았다며 나를 안내했다.
그 집사님(현 이성숙 권사)의 남편은 의약품 도매업을 하시는 고진업 장로님이었다. 그때부터 장로님은 자신의 회사인 리드팜 주식회사 사무실에 와서 일주일에 한 번씩 예배를 인도해달라고 했고 MBC 방송 뉴스를 진행하는 신우회 소속 앵커를 소개해 신우회 예배 인도자로도 연결됐다. 당시 신우회를 통해 앵커와 기자들이 복음을 들었고 주께 많이 돌아왔다.
고 장로님은 현재 ㈜테라젠 이텍스를 경영하는 제약회사 회장님이다. 고 장로 부탁으로 도매약품업자 기독교인들의 모임인 도약선교회 예배를 인도하게 됐다. 종로 5가의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에서 월례회 예배 설교를 맡았는데 제약회사 회장님들과 직원들 200여명이 참석했고 윤형주 장로님이 특송을 해주었다. 설교 주제는 ‘복음이란 무엇인가’였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이고 인생 근본 문제 세 가지 해결이라는 내용이었다.
인간의 근본 문제는 인류의 시조 아담과 하와가 마귀에게 속아서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을 떠나면서 시작됐고 그때부터 사탄 마귀의 영향을 받으며 허무의 종에게 굴복하게 된다. 죄를 지은 사람이 죽으면 지옥으로 가는데, 참 선지자이자 죄와 운명에서 인간을 해방하는 참 제사장, 사탄 마귀를 꺾으시는 왕 중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면 죄와 지옥에서 해방된다는 내용이었다.
이렇게 설교하고 예배를 마치자 이런 복음 메시지를 매주 듣고 싶다는 요청이 들어왔다. 나는 명동의 언론인교회 겸 내 사무실로 오라고 했다. 그래서 매주 목요일 오후 3시 명동 사무실에서는 수십 명의 중직자들과 성경공부를 하게 되었다. 하루는 다른 제약회사 회장님이 정보사령부 대령님을 모시고 나왔는데 예배 후 은혜를 받았다며 탈북자들이 처음 귀순해오면 조사하는 기관이 있는데 그곳에서 매주 수요일 저녁에 예배를 인도해달라고 요청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지난 1997년부터 현재까지 28년째 북한선교 사역을 하게 되었다.
고 장로님은 우리 교회가 산동네에 있을 때부터 10년 넘게 공무원과 언론인, 북한선교를 하도록 매월 선교비를 지원해주셨고 인천 논현동 탈북자 밀집 지역에 탈북민 전문 교회와 자녀 공부방을 세우는 데도 헌신해주셨다. 고 장로님이 소개한 대일제약 대표님도 같이 헌신해주셔서 탈북민 지교회가 세워졌고 지금도 수많은 탈북민이 모여서 예배드리고 있다. 고 장로님으로 인해 언론사와 북한 사역으로 연결됐고 오랜 시간 북한선교를 위해 헌신해주셨다.
사도 바울이 3차 선교여행 때 동행했던 마게도냐인 가이오처럼 고 장로님은 십일조가 아닌 십의 오조 이상을 헌금하며 헌신하셨다. 목회 사역을 하는 동안 고 장로님만큼 말없이 헌신하고 봉사하는 분을 본 적이 없다. 주변 여러 어려운 목회자와 선교사들을 돕고 있는 고 장로님 가정과 회사에 하나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기를 기도드린다.
***[역경의 열매] 박용배 (17) 탈북자 예배 인도… 북·중 국경지대 돌며 복음 전파
북 고위직 출신 탈북자 주님 믿고 구원
탈북해 중국에 숨어있는 탈북자들에겐
복음 전하고 선교비·옷·의약품 등 전달
박용배(오른쪽) 목사가 중국과 북한의 접경 지역 산속 움막에 숨어 생활하는 탈북민에게 구호물자와 성경책을 전달하고 함께 예배드리고 있다.
북한의 고위직에 있다가 탈북한 사람이 언론사 기자와 함께 나를 찾아왔다. 두 분은 의형제를 맺은 사이라고 했다. 탈북해서 중국에서 바로 미국으로 가려 했으나 우리 정부에서 한국에 먼저 오면 미국으로 가게 해주겠다고 해서 한국에 왔다 한다. 그런데 정부가 미국으로 보내주지 않아 자살을 계획하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죽을 때 죽더라도 목사님을 한번 만나보자고 해서 데리고 왔다는 것이다.
그는 나를 만나자마자 이렇게 말했다 “목사님! 하나님이 존재합니까. 그러면 한번 보여줘 보세요” 하며 따졌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안 보이는데 어떻게 믿느냐”고 했다. 나는 그분에게 말했다. “공기가 안 보인다고 공기가 없습니까. 영혼이 안 보이지만 우리 몸에서 빠져나가면 우리는 당장 시체가 됩니다.” 나는 그에게 복음을 자세히 알려줬다. 한 시간 동안 내 말을 가만히 듣던 그는 복음이 이해되고 믿어진다면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많이 흐느껴 울었다.
언론인 교회에 출석하는 정보사 대령님과 성경 공부를 하면서 탈북자 한 분이 여기서 따지다가 주님을 영접하고 갔다고 했다. 그랬더니 대령님은 여기서 목사님을 통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다니 너무나 감사한 일이라고 했다. 탈북자가 한국에 오면 가장 먼저 합동 신문소에 들른다. 대령님은 자신이 그 기관을 주관하고 있으니 목사님이 그곳에 와서 탈북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예배를 인도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때부터 매주 수요일마다 탈북자 예배를 인도하며 복음을 전했다. 그 대령님은 매주 성경 공부를 하면서 은혜를 많이 받았다. 그러더니 기적적으로 승진해 별을 달고 장군이 됐다. 탈북자 조사기관에서 예배를 인도하며 만났던 형제들이 퇴소해 우리 교회로 왔다.
지금 탈북 작가로 활동하는 림일 작가는 집사님이 되었고 또 한 명이 강철호 목사님이다. 그는 과천 은파감리교회가 건축 중에 들판 비닐하우스에서 임시로 예배드릴 때 나에게 집회를 요청한 적이 있었다. 김광덕 목사님이 탈북 청년 한 사람을 보내주면 북한을 복음화할 전도자로 후원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당시 강철호 형제를 은파감리교회로 보내 신학교에 갈 준비를 하라고 했다. 강 목사님은 감리교단에서 탈북자 1호 목사님이 됐고 현재 북한 복음화를 위해 많은 일을 하고 계신다.
1998년 KBS PD 신우회 예배 후 처음 온 프리랜서 감독에게 복음을 전하니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다. 그리고 내가 탈북자 조사기관에서 예배를 인도한다고 들었다면서 거기 말고 자신을 따라 중국으로 들어가 탈북자들을 만나자고 했다. 감독님은 1년 중 10개월을 압록강과 두만강 주변에서 탈북자를 취재하면서 중국에 사는 수십 가정의 탈북민을 돕고 있는데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주면 좋겠다고 했다.
나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인도하시는구나’ 생각하고 북한 전문 프리랜서 감독님과 함께 98년부터 매달 중국과 북한의 국경지대로 들어가게 됐다. 옌길 공항에 내리면 꽃제비라 부르는 수많은 탈북 아이들이 도와달라며 따라다녔다. 나는 감독님과 함께 국경지대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북한을 탈출해 숨어있는 탈북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선교비를 전달하고 옷을 입혀주었다. 또 병든 자에게는 의약품을 전달하며 지원했다. 그렇게 해서 지금까지 북한선교를 하게 된 것이다.
***[역경의 열매] 박용배 (18) 하나님 자녀로 다시 태어난 17세 북한 소년
굶주림·질병으로 어려운 상황에 놓여
약과 식량 구하러 온 북한 소년에게
복음 전하고 기도하는 방법도 알려줘
북한 접경지대에는 강폭이 좁은 곳이 있어 북녘땅이 가깝게 보인다. 북한 지역 쪽으로 ‘21세기의 태양 김정일 장군’이라는 선전 문구가 보인다.
하루는 북한 국경지대 전문 취재 프리랜서 감독님이 17살 된 북한 소년을 옌길의 숙소로 데리고 왔다. 소년의 어머니는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었고 병든 아버지마저 굶주림에 죽어가고 있어 약과 식량을 구하러 왔다고 했다. 소년과 함께 지내면서 북한의 힘든 상황과 비참한 실태를 듣게 되었다. 집마다 병든 사람들이 병원에 가보지도 못하고 죽어 가는데 굶어 죽는 사람들도 많다는 것이다.
나는 사흘간 소년과 숙소에 머물며 복음을 전했고 소년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소년은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야 했다. 나는 그에게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하나님께 기도드리면 하나님이 도와주시고 기도하고 끝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라고 하면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으신다고 알려줬다.
나와 감독님은 약과 식량을 구해 주었고 헤어져야 하는 오후 시간에 중국 돈 500위안을 주었다. 한국 돈으로는 약 9만원 정도 되는 돈이었는데, 소년은 돈을 담배 말듯 똘똘 말아 비닐에 싸더니 라이터 불로 밀봉해 캡슐같이 만들었다. 그리고는 입에 넣고 물로 삼켜버렸다. 나는 왜 돈을 먹냐고 물었는데 국경을 넘다가 수비대에 붙잡히면 주머니에 있는 것을 다 빼앗기기 때문에 삼킨 뒤 집에 도착해 변을 봐서 돈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택시를 타고 국경지대까지 가서 산속에 몸을 숨기고 어두워지기를 기다렸다. 드디어 해가 지고 어두워져 잘 안 보이는 시간이 됐을 때 소년과 이별하면서 그의 손을 잡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해 주고 안아주었다. 그리고 북한에서도 꼭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라고 당부했고 언젠가 또 만날 수 있기를 기도했다. 소년은 옷과 신발을 다 벗어서 비닐봉지에 담아 두만강을 건너갔다. 3월 초인데도 강물에 아직 얼음도 있고 차가운 물이 가슴까지 차올랐다. 소년은 옷과 구해 준 생필품이 든 비닐봉지를 머리에 이고 강을 건너갔다. 소년은 다 건너가더니 옷을 다시 입고 땅에 엎드려 이쪽을 향해 몇 번씩 절을 하더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날 밤 나는 울며 기도했다. ‘주님, 이렇게 북한 동포를 돕는 것이 넓은 바다에 돌 하나 던지는 것 같습니다. 이게 무슨 힘이 되겠습니까’ 하며 기도하고 있는데 마음속에서 성령님의 음성이 울려왔다. ‘너 혼자 이런 일을 하는 게 아니란다. 너처럼 북한 복음화를 위해 사역하는 일꾼들, 7000명이 지금 여기저기서 은밀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확신을 주셨다. ‘아 그렇네요. 주님, 아멘 할렐루야!’ 나는 다시 힘을 얻었다.
지난 27년간 북한선교를 하면서 코로나 기간에는 중국에 들어가지 못했다. 대신 한 달에 두 주 정도를 국경지대에서 탈북자를 만나 복음을 전했다. 또 탈북 사명자를 중국 내 신학교에 보내 목사 두 사람을 세웠다. 그 두 명의 탈북자 목사님은 인신매매로 팔려와 중국 한족과 사는 자매들을 복음으로 영접시키고 곳곳에 모이게 해서 성경 공부를 시키는 일을 계속했다.
북한선교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너무 힘들어 울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7000명이 있음을 엘리야에게 알려 주셨듯, 지금도 주님은 7000의 제자를 움직이신다.
***[역경의 열매] 박용배 (19)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으로 북한 주민들 살아나길
북한 실체 본 후 북한 복음화할
인재와 후대 키워나가기로 결심
북한 3만 8천여 우상 무너지고
복음으로 교회당 세워지길 기도
2007년 11월 평양 순안공항에서의 박용배 목사. 주체사상이 우상이 된 북한 주민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답임을 확인하고 왔다.
KBS PD인 권혁만 장로님이 늦가을에 볍씨를 심고 봄에 모내기하지 않는 농사 기술인 직파농법을 북한에 전파한 한국 전문가를 취재하려고 평양을 방문하는데 동행하게 되었다. 권 장로님은 일정상 먼저 들어가고 나는 북한 방문단 84명과 합류해 통일부에서 미리 교육을 받고 중국 선양에서 고려 민항기로 갈아타고 평양에 들어갔다. 대동강 호텔에 머물렀는데 11월인데도 눈이 펑펑 쏟아졌다. 김일성 동상 앞에 밤 10시쯤 도착해 보니 황금빛 동상이 거대하게 서 있었고 추운 밤인데도 북한 주민들은 조화 한 송이를 가져와 절하고 어떤 사람들은 빗자루로 광장을 쓸고 있었다.
우리는 참배하지 않기로 미리 약속하고 갔으므로 참배는 하지 않았다. 평양 밤거리는 어두웠고 가까이에서 보니 아파트에서 희미하게 불빛이 새어 나왔다. 거리 곳곳의 건물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 원수님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글씨들이 쓰여 있었다. 호텔에서 TV를 켜니 북한 조선중앙TV에서는 김일성 김정일에 대한 찬양과 선전 내용으로 가득했다. 간혹 남한의 실정을 보여 준다는 방송이 나왔는데 격렬하게 데모하거나 화염병으로 불이 붙는, 무섭고 비참한 내용만 골라 보여 주었다. 그런 방송을 계속 보면 남한이 정말 사람 살 곳이 못 되는 지옥 같은 곳이라는 착각이 들 것 같았다. 북한이 미디어를 통해 체제 선전과 더불어 남한을 동경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 사람들은 여러 경로를 통해 대한민국이 얼마나 잘살고 있는지 많이 알고 있다고 한다. 실제로 북한에서 의사로 일했던 어떤 분은 한류를 접하고 탈북을 결심하게 되었고 탈북에 필요한 경비를 중국 돈으로 준비하고 남아있는 가족들이 피해를 보지 않도록 알리바이를 만드는 등 철저하게 준비해 한국으로 들어왔다. 그는 다시 의사가 되기 위한 공부를 하던 중 나를 만나 복음을 들었고 예수님을 영접하고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는 의사고시에 합격한 후 의사가 되었고 같은 탈북자 출신 여의사와 결혼해 살면서 큰 병원에서 근무하고 있다.
평양에 체류하는 동안 만수대 같은 김일성 관련 유적과 평양 병원 견학, 음악회와 연극을 관람하고 을밀대 등을 관광하고 협동 농장을 둘러보았다. 사진 촬영도 그들이 찍으라는 곳에서만 가능했다. 평양은 한 번은 가봐도 여러 번 갈 곳은 못 되는 것 같았고 속히 북한의 흑암이 꺾이고 복음통일, 평화통일이 이루어지길 기도했다. 북한의 3만8000여개의 우상이 무너지고 그 자리에 교회당이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북한 주민들이 살아나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들이 여호와의 군대로 일어났듯이, 세계 복음화 십자가의 군사로 회복될 날을 간절히 기도했다.
우리 일행은 김일성이 어릴 때 다녔다는 칠골 교회당에서 예배를 드리며 헌금을 했는데 칠골교회 담임목사라는 사람이 헌금을 당 간부에게 전달하는 것을 보고 북한에서 헌금하면 공산당에게 들어간다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보았다. 그렇게 평양을 방문해 3박 4일간 머물며 북한의 실상을 보았고 주체사상으로 세뇌된 북한 주민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니면 절대로 답이 없다는 것을 절감했다. 그렇게 북한을 복음화할 인재와 후대를 반드시 키워야 한다는 결론을 얻고 돌아왔다.
***[역경의 열매] 박용배 (20) 북 특무대장과 목숨 건 아찔한 동행… 북으로 끌려갈 뻔
복음 통해 선교사 된 줄 알았던 박왕길
알고 보니 탈북민 잡으러 나온 특무대장
북 복음화 위해 생사고락 함께했는데…
국경지대의 탈북자들을 돕기 위하여 구호물자를 등에 메고 또 양손 가득히 들고 가는 박용배 목사.
지난 2007년 국민일보에 ‘전도는 죽음으로 하는 기야’라는 책이 소개됐다. 책 주인공이 북한으로 끌려가 고문당하면서 왼쪽 손가락 3개가 잘려나갔다고 했는데, 탈북민인 그는 중국에서 선교사님을 통해 복음을 알게 되었고 이후 탈북민들을 모아 전도하는 소중한 전도자가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이 사람을 만나 제자 삼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그를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러던 중 선교 차 장춘공항에 내렸는데 나를 마중 나온 조선족 전도사의 여동생 집사와 같이 온 사람이 있었다. 북한에서 온 분이라고 했다. 같이 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보니 그의 왼쪽 손가락 세 개가 없었다. 나는 당신이 그 책의 주인공이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했다.
그는 여러 가명을 사용하고 있었다. 김일성 앞에서 사격대회 1등을 해서 김일성에게 상도 받고 악수를 했는데 그가 김일성의 친구 안길 이를 닮았다고 해서 그때부터 안길이가 되었다고 했다. 또 다른 이름은 박왕길이라고 했다. 그가 신분증이 필요하다고 해서 신분증을 만들어주고 노트북이 필요하다고 하면 노트북을 마련해주고 탈북민들이 지금 넘어왔는데 방이 필요하다고 해서 얻어주기도 했다.
나는 그와 국경지대에서 밤새 북한 복음화를 위해 많은 이야기를 하였고, 중국의 신학교에 보내줘 신학 공부도 하게 했다. 그 신학교에서는 탈북민 세 명도 이미 공부하고 있었고 학비를 지원해 주는 조선족 전도사 네 사람이 같이 공부하고 있었다. 그런데 조선족 전도사들이 박왕길과 대화하더니, “목사님 저 사람은 탈북민이 아닙니다. 탈북민을 잡으러 온 특무대장입니다”라고 한결같이 이야기했다.
국정원 국장님이 일주일에 한 번씩 나와 성경 공부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국장님이 탈북민 사역을 하는 내가 걱정된다며 질문했다. “목사님은 국경 지대에서 탈북자들 돕는 일을 하신다는데 혹시 중국 공안에 갇혀 갇히거나 북한으로 끌려갈 경우를 대비해 교단에서 나서서 협상하고 석방할 안전장치와 목사님을 도울 비상 연락망을 만들어 놓고 사역하고 있습니까.” 나는 그런 장치 없이 그저 믿음으로 하고 있다고 했다. 그랬더니 국장님은 그러면 안 된다고 하면서 국정원 북한 담당자를 소개해 줄 테니 비상 연락망을 만들고 일하라고 조언했다.
그렇게 만난 북한 담당자는 나에게 북한 탈북민 사진을 가지고 오라 했다. 그래서 100여장의 사진을 가지고 나갔더니 단숨에 박왕길 사진을 집으면서 이 친구를 언제부터 만났냐고 물었다. 자세히 말하니 이 친구는 탈북민을 잡으러 나온 특무대장이라고 했다. 나는 순간 아찔했다. 무려 7년 반 동안 그와 함께 다녔는데 어떻게 나를 북한으로 납치해가지 않았을까. 하나님의 은혜였다.
나는 바로 탈북민들의 전화번호를 다 바꾸게 하고 이사도 시키고 신변을 조심하라 당부했다. 또 박왕길과는 연락을 끊었다. 나는 기도했다. “하나님, 지금까지 지켜주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박왕길이 복음을 이용하고 탈북자들을 도와주는 척하면서 북송시키는 앞잡이라고 하니 주님이 그를 손봐주시고 우리 탈북 사명자들을 지켜주세요.” 그런데 나중에 국민일보에 탈북민 사역을 하던 박왕길이 술을 마시고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기사가 나왔다. 중국에 확인해봤더니 사실이었다.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