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증을 느낀 오스칼은 침대에서 일어나 앉아 발로 천천히 바닥을 더듬었다.
오스칼은 자신의 오른손을 잡고 있는 앙드레의 손을 놓지 않고 다리를 뻗어 발가락으로 옷가지를 집어올렸다.
퀼로트였다.
블라우스는 반대편으로 떨어졌던가, 오스칼은 오른쪽 무릎에 체중을 싣고 가볍게 자세를 바꿔 앙드레의 몸 위로 올라갔다.
위에서 내려다본 앙드레의 조금은 낯선 얼굴이 묘하게 부끄러워 오스칼은 스치듯 짧은 입맞춤을 한 후 얼른 침대 반대편 가장자리에 걸터 앉았다.
그녀의 등을 쓰다듬는 앙드레의 느릿한 손가락이 무척이나 조심스럽고도 부드러웠다.
간지러움을 못 견딘 오스칼이 움찔하자 앙드레는 가만히, 오스칼의 살짝 구부러진 등을 따라 도드라진 척추뼈에 손바닥을 올려놓았다.
이 사소하지만 친밀한 접촉에, 등에 놓인 손바닥만큼 느껴지는 앙드레의 존재에 오스칼은 저릿한 감각이 심장으로부터 온몸으로 삽시간에 퍼져나감을 느꼈다.
이번에 바닥에서 집어올린 옷은 블라우스가 맞았다.
블라우스 소매에 팔을 끼워넣는 오스칼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앙드레가 물었다.
"어디 가려고...?"
"아, 목이 좀 말라서."
조금씩 멀어지는 블라우스 자락 아래로 길게 뻗은 오스칼의 다리가 어느새 창으로 스며든 달빛을 받아 희끄무레하게 빛나고 있었다.
달빛을 지나쳐 들려오는, 타박타박 바닥을 딛는 오스칼의 맨발 소리가 낯설고도 정겹게 느껴져 앙드레는 눈을 감은 채 그 작은 소리가 주는 울림을 음미했다.
오늘 밤의 모든 순간들을 하나하나 단단히 붙잡아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었다.
방 한켠에 놓인 작은 테이블 위는 물병과 두개의 유리잔에 와인이 한병, 사브레 쿠키와 콩테 치즈가 조금씩 놓인 접시, 그리고 잘 익은 자두가 소담스레 들어앉은 조그마한 바구니로 가득 차 있었다.
물병을 집어 든 오스칼은 물병마저 평소와 다르게 묵직하게 느껴진다고 생각하며 물을 따랐다.
"앙드레, 너도 물 좀 마실래? 그리고 왠지... 먹을 것도 잔뜩이야."
"...? 먹을 게 잔뜩이라니, 무슨 말이야?"
"음... 와인도 있고 사브레랑 콩테, 자두까지 있어."
"그냥 물만 부탁할게, 음식은 너 먹고 싶은 걸로 가져와.
혹시 와인 마실 거면 말하고. 내가 가서 딸게."
"아니, 오늘 밤은 안 마실래. 조금도 취하고 싶지 않거든."
자두 두알에 물이 가득 담긴 유리잔 하나, 쿠키와 치즈가 담긴 접시를 아슬아슬하게 들고서 오스칼은 침대로 돌아왔다.
얼른 물잔과 접시를 받아든 앙드레가 물을 한모금 마시고는 물었다.
"고마워, 오스칼.
그런데 네 방에 늘 이렇게 먹을 게 많이 있었던가?"
"과일 정도는 있었던 것 같기도 한데... 사실 잘 모르겠어, 눈 여겨 본 적이 없으니.
어쨌든 오늘 밤은 마침 좀 배가 고프기도 하니 잘 됐잖아?"
*****
여느 때와 달리 무겁게 가라앉은 자르제 가의 저녁 시중을 들다 말고 적당히 식당을 빠져나온 아멜리는 황급히 오스칼의 방을 정리하는 하녀를 찾았다.
"세실, 너 오늘 아침에 오스칼님 침실 시트랑 이불 갈았니?"
"아니, 오늘은 가는 날 아니라서 그냥 뒀는데? 갑자기 그건 왜?"
"...이런 말 하면 재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혹시나 모르잖아, 오스칼님 내일은 출동이시고...
새 침구 깔아드리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
"네 기분이 정 그렇다면 뭐, 지금이라도 새걸로 갈면 되지."
"고마워, 그런데 우리... 여분 베개는 어디에 보관하고 있지?"
"베개? 그건 또 왜?
오스칼님 침대에 베개 둘 있는데 베갯잇만 갈면 되는 거 아냐?
한사람 자는데 베개가 몇개나 필요한 거야."
세탁실로 발걸음을 옮기던 세실은 아멜리를 향해 장난스럽게 눈을 흘겼다.
종종걸음으로 따라붙은 아멜리는 주변을 둘러본 후 세실에게 바짝 다가와 팔짱을 끼며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이거... 말해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방금 오스칼님이 앙드레한테 나중에 당신 방으로 오라고 하셨거든.
그래서 난... 만일을 대비해서 여분 베개가 있어도 좋지 않을까 하고..."
"...!!! 야, 너 그걸 왜 이제 말하니?!
내가 새시트에 큰 사이즈 이불이랑 여분 베개까지 전부 챙길테니까 넌 지금 당장 부엌 가서 간식이나 좀 챙겨와.
몇시간 내버려둬도 말라버리거나 형태 망가지지 않으면서 손으로 집어먹기 편한 걸로.
물병도 반 말고 다 채워서 가져오고!"
잠시 후 오스칼의 방으로 올라온 두사람은 재빨리 침구를 갈고 네개의 베개를 두개씩 포개어 보기 좋게 정리한 다음 작은 테이블 위를 음식으로 정성껏 채웠다.
세면기 옆의 물병도 더 큰 걸로 바꿔서 물을 넘칠 듯 채워두고 수건도 평소보다 넉넉히 비치한 둘은 내일 아침 앙드레가 쓸 면도칼까지 챙겨 놓을 것이냐 아니냐로 잠시 옥신각신 하다가 결국 면도칼도 하나 가져다 놓았다.
방안의 초까지도 모두 새걸로 갈아치운 세실은 아멜리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럼 침구, 물, 음식 다 넉넉히 준비 된 거지? 또 뭐 필요한 거 있을까?"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아. 저녁도 드셨으니까.
아, 세실! 저택에 불이라도 나지 않는 이상 오스칼님 방에 아무도 들어가지 말아야 할텐데 어떡하지."
"지금쯤 부엌으로 내려가면 아마 다들 모여서 저녁 먹고 있긴 할 거야."
"오스칼님 방 근처에도 못 가게 하려면 뭐라고 해야 좋을까?"
"오스칼님 방만 문제니, 난 또 누가 눈치 없이 앙드레 찾을까봐 그게 더 걱정이야.
내일 아침까진 앙드레도 절대 찾으면 안되는데 딴 사람들한텐 뭐라고 한담.
아멜리, 아까 오스칼님이 앙드레한테 나중에 오라셨을 때 너 말고 또 누가 있었어?"
"음..."
*****
별말 없이 쿠키와 치즈를 한두개 집어먹은 앙드레는 자신이 받치고 앉은 베개와 옆에 앉은 오스칼이 기댄 베개를 만져보더니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오스칼, 네 침대에 원래 베개가 4개나 있었어?"
"...그러고보니 원래는 둘이었던 것 같다."
무심하게 나오는 오스칼의 대답에 앙드레는 잠시 고개를 숙이며 이마를 짚었다.
[앙드레, 나중에 내 방으로...]
몇시간 전, 긴장감이 깔린 저녁 식사 자리에서 대담하게도 오스칼이 앙드레를 자기 방으로 초대했을 때 당연히 식당에는 자신만 있는 게 아니었다.
출동 전날 저녁 자리에서 나온 오스칼의 말을 신호로 삼아 황급히 이 방으로 음식을 가져다 나르고 베개를 추가로 놓고 침구를 정리하느라 분명 자르제 가의 동료들 몇명은 매우 분주한 시간을 보냈을 것이며, 거기 동참하지 않은 다른 사람들 역시 이야기꽃을 피우느라 몹시도 바쁜 밤이 되었으리라.
내일 아침 마주칠 사람들의 얼굴을 생각하니 앙드레는 목까지 후끈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왜 그래, 뭐 문제 있어?"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저도 모르게 마른 세수를 한 앙드레는 피식피식 새어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유리잔을 침대 옆 협탁 한켠에 내려놓았다.
팔뚝에 닿아 있는 얇은 여름 블라우스 아래로 느껴지는 오스칼의 체온과 자두향이 묻은 그녀의 숨결이 만져질 듯 또렷한 물성을 가지고 그의 옆에 존재하고 있었다.
앙드레의 곁에 나란히 앉아 자두를 베어 먹는 오스칼이, 그 단순명료한 살아 있음이 속절없이 다가오는 새벽에 대한 두려움과 짧은 여름밤에 대한 설움을 지워내고 있었다.
"다 먹었어?"
접시를 내려놓는 오스칼의 기척에 앙드레는 천천히 몸을 돌려 오스칼을 마주했다.
오스칼의 어깨에 올라간 앙드레의 손이 소매를 따라 팔꿈치로 내려가 옷밖으로 드러난 손목을 지나서 늘어진 옷자락을 파고 들었다.
자신의 흉곽을 감싼 채 미끄러져 올라오는 앙드레의 손길에 따라 오스칼은 저항 없이 팔을 들어 올렸다.
끌어당긴 옷자락이 스치고 간 눈앞으로 앙드레의 익숙한 얼굴과 고요한 눈동자가 다가왔다.
절실하되 불안하지 않은, 견고한 간절함이 서로를 끌어 당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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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시절 귀족가문의 하인들 눈치 백단일텐데 자르제 가 하인들 사이에선 오스칼이 언제 앙드레한테 고백할 것인가, 두사람 거사는 언제 치를 것인가가 일종의 관전 포인트 아니었을까요. 거기에 한둘쯤은 저같은 OA 처돌이가 있었다고 믿어 보았습니다.
+ 좀 가볍게, 같이 침대에서 간식도 먹고 꽁냥꽁냥하는 OA를 그려보고 싶었는데 쉽지가 않군요.
1789.7.12.은 음력으로 5.20. 윤달이고, 2009.7.12.도 음력5.20. 윤달이길래 그날 파리의 월출 시각을 찾아봤는데(18세기 것까진 조회가 안됨ㅋㅋ) 이 날은 오후 11시 47분에 달이 떴다고 합니다. 밝기는 보름달 대비 80.9% 라고.
(지나가세요, 과몰입 오타쿠입니다)
첫댓글 출동전야만 생각하면 너무 애절하죠ᆢ
주변인들이 OA를 축복하는 요정들 같은 픽이네요. 잘 읽었슴다^^
출동전야 생각할 때 좀 덜 흑흑이 되고 싶어서 썼는데 별 도움은 안되는 것 같네요ㅠㅠㅋㅋ
아....ㅋㅋㅋㅋㅋ 그러고 보면... 오스칼 같은 본투비 대귀족은 크게 남을 신경 쓰지 않고(?)
앙드레 한테 자기 방으로 오라고 했을 것 같기도 하네요.
이 집 하녀들은 다음날 아침에 시트 정리하면서 할 얘기들이 많았겠어요ㅋㅋ
대귀족들 진짜 사람 병풍 취급하는 데 너무나 익숙해져 있겠죸ㅋㅋㅋㅋㅋ 그리고 앙드레야 오스칼 방 수시로 불려 갔을테니 평소 같으면 다른 사람들도 크게 신경 안 썼을 것 같긴 합니다. 근데 원작 오스칼이 뭘 잘 숨길 타입도 아니고 자르제 가 하인들 오앙 관계 다 알고 있었을 듯요.
@침엽수 ㅋㅋㅋ 저도 늘 잘 불렀으니 크게 이상해보이진 않았을 거 같아요.전에도 쓴 적 있는데 궁정에는 낮에도 밤에도 함께하는 사이로 알려져있고 집 하인들 사이에서는 수십년째 '의외로 밤시중은 안 든다...앙드레 사리 만드는 중' 이라고들 하지 않았을까 해요 ㅋㅋㅋ 밤이 너무 짧아서 진짜 아쉽네요 옛날에는 지금보다 취침시간이 빨랐겠지만 저 나라는 해도 무쟈게 늦게 지는데 ㅠ
@alexis 밤시중ㅋㅋㅋㅋㅋㅋ 아 저 육성으로 웃고 있습니닼ㅋㅋㅋㅋㅋ
@alexis ㅋㅎㅎ 오스칼이 결혼할 입장도 아니고 엄연히 작위를 가진 상속자이니 저렇게 밤시중(?)드는 하인 하나 끼고 사는 그림(둘은 진지한 연인이지만 호사가들 눈엔 그렇게 보였을 듯)도 나름 자연스러웠을 것 같아요.
글고보면 오-앙 둘다 너무 순진해요?
(혁명에 가담한 후긴 했지만) 오스칼은 기어이 정식으로 청혼을 하고,
앙드레야말로 머리 아프게 이루어질 수 있네 없네 고민할 게 아니라 그냥 살살 꼬셨으면 넘어왔을텐데, 그 밀착되고 폐쇄적인 관계를 이용할 생각은 못하고...ㅡㅡ
둘다 적당히 연애나 할 생각은 못하는 종자들이라...으구ㅠㅋㅋㅋ
저 시녀들 수다에 끼고 싶네옄ㅋㅋㅋㅋ 진짜 언제 거사 치르나 고구마 백 개 먹어가며 응원했을 듯ㅋㅋㅋㅋㅋㅋ
뭐랄까 막 자기들끼리 내기도 하고 그랬을 것 같은 느낌적 느낌ㅋㅋㅋㅋ 근데 오스칼이고 앙드레고 둘다 이상하게 고지식하고 꽉 막혀서 적당히 연애나 할 생각을 못하고 거사가 늦어졌단 거 웃프면서 좋네요.
@침엽수 당시 귀족들 애인 두고 사는 게 뭐 큰 흉도 아닌데. 더군다나 오는 유부녀도 아니고 처녀성을 목숨같이 지켜야 하는 처지도 아니었건만....마-페를 바로 옆에서 보면서도 배우는 게 없더냐..ㅉㅉㅋ
오스칼은 애써 숨기려 하지는 않았을 거 같긴 해요.
하지만 비밀연애 하는 망상도 해보고
공개연애 하는 망상도 해보고
본인들은 비밀연애라고 생각하지만 주변에선 다 아는 망상도 해보고
앙드레는 숨기는데 오스칼은 티내고 이런 망상도 해보고
하녀들이 저 둘 언제 자는지 돈걸고 내기하는 망상도 하고
둘은.아직 사랑고백 하지도 않았는데 자르제부인은 피임은 하고 있나 고민하는 망상도 하고
각종망상을 다 해봅니다.
피임은 하고 있낰ㅋㅋㅋㅋㅋ 아 이 생각은 안 해봤는데 참신하네요. 근데 자르제 부부 오앙의 관계가 걱정이 되기는 했을까요? 걱정이 됐다면 1789년 6월 23일 밤 이후에 앙드레를 오스칼 옆에 두면 안되는 거 아니었을까요.
@침엽수 부부가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인정했을 것 같아요. 나이도 먹을만큼 먹었고, 둘이 좋다는데 어쩌겠어~ 정도? 만약 둘이 출동하지 않고 계속 자르제가에 머물렀다면 사위로 인정할 때까진 시간이 많이 걸렸을 테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