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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대 대통령선거가 ‘컴퓨터 조작’이라고 밝혔던 정의구현사제단과 평민당, 재판과 국회의 진상조사 결과로는 ‘사실 무근’으로 판명됐지만, 언론에는 단 한 줄도 언급되지 않아 역사에는 ‘컴퓨터 조작’이 사실처럼 각인되는 중이다. 당시 白書를 만든 사람들, KBS 관계자, 選管委, 언론인, 그리고 傳說을 만들어 유포시킨 정의구현사제단 신부들을 모두 만나 보았다. 그들 중 일부는 아직도 믿고 있었다. 아니, 우기고 있었다. 한국병은 물질이 아닌 정신의 빈곤에서 기인하고 있다. 노동자들에게 부끄러워해야 할 비겁한 지식인의 虛像과 좌파 지식인들이 빚은 韓國 知性의 不實工事 ‘컴퓨터 조작설’을 해부한다.
●역사가 잘못 만들어질 뻔한 사건
●모든 자료는 ‘조작설’로만 남아 있다
●與小野大의 국회진상조사 特委는 결론을 내고도 밝히지 않았다
●‘兩是論’족인 言論의 비겁성을 고발한다
●傳說을 만들어낸 정의구현사제단은 진상조사에 참석도 안했다
●KBS를 訉問하던 의원들이 오히려 敬意를 표했던 까닭
●국회 진상조사 결과가 기록된 速記錄을 읽었다는 장본인들은 한 명도 없었다
●안기부를 天才집단으로 美化시키고 유권자를 바보 멍청이로 만들었다
●지금도 믿고 있는 국민들이 많다
●미국에서 만들어 낸 ‘컴퓨터 조작설’ 제2탄
●정의구현사제단의 金勝勳, 咸世雄 신부는 지금 와서 무엇을 말하는가?
傳說이 만들어낸 歷史
-13대 대통령 선거 때 컴퓨터 부정선거가 있었다는 얘기를 기억하십니까.
“그때 그런 소문이 많이 돌았지요.”
-실제 잡지에도 실렸지요. 정의구현사제단에서는 신부님들이 성명서도 발표했고요.
“맞아요. 기억나네요.”
-그게 사실이라고 생각하세요.
“사실이겠지요.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있습니까. 밝혀질 일도 아닐 건데.
-국회에서 진상조사를 하고 KBS와 중앙선거관리위원회도 해명을 했습니다. 당시 選管委에는 컴퓨터 ‘컴’자도 없었다는 겁니다.
“이 양반도 참 무식하시네. 아 컴퓨터 전문가가 프로그램으로 메인에서 조작해 버리면 다 돼요. 그 당시에 부정도 많았어요.”
-다른 부정은 일단 제쳐두고 컴퓨터 부정만 여쭤보는 겁니다. 진짜라고 믿으세요.
“아, 그럼 신부님들이 거짓말을 했다는 겁니까.
-그때 낙선했던 金泳三 후보가 지금은 대통령이니까 만약 사실이라면 밝혀지지 않았을까요.
“허허, 세상 잘 모르시나 본데. 우선 몇 사람이 그 짓을 하고 나면 알 수가 없는 겁니다. 게다가 지금 정부나 그때 정부나 다를 게 뭐 있소?
-그럼 또 다시 컴퓨터 부정선거가 가능하기도 하겠네요.
“우리야 뭐 다시 그런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지요.”
이 대화는 우리가 흔히 만날 수 있는 작은 점포의 주인과 필자와의 대화내용이다. 지금부터 무려 7년이 지나버린 사건. 그러나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살아간다. 필자가 처음 이 主題로 취재를 시작했을 때엔 필자 나름대로 취재의 방향이 서 있었다.
‘컴퓨터 부정선거’가 사실이었다면 청문회와 진상조사단을 통해서 떠들썩하게 밝혀졌을 터이다. 그렇지 않고 만약, 사실무근이었다면 맨 처음 이 소문을 만들어내 사람들을 중심으로 한 관련기사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7년 전부터 현재까지의 신문과 잡지에서 구한 자료들은 필자의 의식을 혼란시켰다. ‘컴퓨터 부정선거였다’는 주장을 소개하는 자료들만 있을 뿐, 그 이후 이 사건의 꼬리는 신기하게도 사라져 버리고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記事 자료를 통해서만 이 시대를 歷史的으로 재구성한다면 제13대 대통령인 盧泰愚 前 대통령은 컴퓨터 造作에 의해 당선된 셈이 된다. 몇 안 되는 論文과 부실하게 조합한 史料만으로도 6.25 南侵이 北侵으로 바뀌어질 수 있는 세상이기에...
그 때 그 상황
지금부터 7년 전인 1987년 12월 16일, 당시 盧泰愚, 金泳三, 金大中, 金種泌 네 후보의 각축전이 벌어졌던 제13대 대통령 선거를 우리는 기억한다. 국민들의 열망을 꺾고 兩金씨가 단독 출마를 선언해서 결국 盧泰愚 후보에게 漁父之利를 가져다 주었다고 회자되는 선거. 온갖 루머와 유언비어가 난립했던 선거. 악몽같은 ‘구로구청 사건’이 연상되는 선거. 그러나 이 선거가 끝나면서 한국 사회는 오랫동안 몸살을 앓아야 했다.
선거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金種泌 후보를 제외한 兩金씨들은 당선에 불복했기 때문이었다. 당선자가 발표된 직후 1987년 12월 18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세 金후보의 한마디’에서 兩金씨의 인터뷰 내용을 살펴보면 그 때 그 상황을 생생하게 느끼게 해 준다. 다음은 金泳三 후보와의 인터뷰 내용이다.
<-이번 선거를 부정 선거라 보는 이유는 무엇인가.
“한국의 여러 여론조사기관이나 세계 언론에서도 15일까지 내가 10% 가량 이긴 것으로 나타났다. 2백만 표 이상이 조작됐으며 특히 서울 釜山 大邱 慶南北에서 부정이 심했다. 내가 지금까지 참고 있었지만 이제는 全斗煥 盧泰愚 정권을 타도하고 말 것이다.”
-선거 무효를 선언했는데 이를 어떻게 국민들에게 납득시킬 것이며 투쟁방법은 어떻게 할 것인가.
“지금 이 자리에서 구체적인 얘기는 할 수 없지만 범 국민적 대회를 준비하겠다. 이 대회는 놀라울 정도의 대회가 될 것이다. 朴正熙 정권을 타도시킨 사람으로서 나는 반드시 全斗煥 盧泰愚 정권을 타도시킬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번 선거의 결과를 후보 단일화 실패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있는데...
“물론 金大中씨가 지지했더라면 압도적으로 이겼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정권이 그것을 빙자해 전적으로 이기는 선거를 조작한 것이다. 나는 과반수 이상으로 당선될 수 있었다.”>
‘조작된 승리를 고발한다’
당시 平民黨과 국민운동본부 등 在野 단체는 선거무효화 공동투쟁위원회 구성방침까지 이미 정해놓고 있었다. 다음은 金大中 후보와의 당시 동아일보 인터뷰 내용이다.
<“국민운동본부의 결의를 나는 전폭 지지한다. 국민의 대응을 주의깊게 주시하겠다. 내가 먼저 ‘이렇게 하자’고 강권하는 태도는 취하지 않겠다. 全공무원과 국영기업체, 심지어는 개인 기업까지 與黨의 선거운동을 했고 與黨의 선거자금을 독점하고 텔레비전 방송을 악용하고 野黨 참관인을 매수하고 부재자 투표에 나한테 온 50만 표를 해먹고... 심지어 2등과 3등의 순위조작까지 하지 않았는가.”
-‘후보단일화가 됐더라면...’하는 아쉬움을 다시 한번 말하는 시민들이 많은데...
“그런 아쉬움을 이해한다. 그러나 딘일화가 됐다면, 또 그런대로 선거조작이 행해졌을 것이다. 71년 선거 때 그랬고, 63년과 67년 선거도 마찬가지였다.”>
선거가 종료된 지 만 한 달이 지난 1988년 1월 16일,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 대표 金勝勳 신부와 천주교 공정선거 감시단 단장 吳泰谆 신부 두 사람은 법원에 ‘대통령 선거 무효소송’을 제기한다(이 소송은 1989년 5월 11일자로 원고 패소 판정을 받았다).
다시 한 달이 지난 88년 2월 16일, 두 神父는 명동성당에서 ‘12.16 선거 컴퓨터 조작 증거포착’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 무렵부터 야당의 기관지나 선전물에 실리던 자잘한 선거부정의 사례들을 일거에 무력하게 만들 만큼 두 사제의 발표는 ‘획기적’이었다.
“대통령 선거의 결과는 사전계획된 지역별 후보별 득표별 조작에 맞춘 텔레비전 방영을 통해 만들어졌으며, 선거 관리위원회의 집계는 시차(時差)를 두고 텔레비전 집계에는 근접시켜 결과에 합법성을 부여하려 했다는 의혹을 씻을 수 없다”고 주장하고, “부정선거를 자행한 盧泰愚씨 등 책임자의 퇴진을 촉구한다”고 밝혔다.
司祭團 자료를 보면 선거절차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백이면 백 모두 믿어버릴 만했다. 득표수와 시간이 나타난 텔레비전 화면사진과 그 아래 제시된 選管委의 개표록과는 분명한 차이가 나타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화면 증거자료는 특정후보의 득표수가 시간에 따라 감소하기도 하고, 또 어떤 화면자료는 갑자기 치솟기도 했다. 같은 시간대에 기록된 選管委의 개표록과는 당연히 불일치를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選管委의 최종 집계와 텔레비전 방송의 최종집계는 딱 맞아 떨어지고 있었다.
司祭團 주장에 설득당한 言論
이 성명서와 증거자료라고 제시된 내용에 설득당한 최초의 언론은 ‘말’誌였다. ‘말’誌는 1988년에 나온 제21호에 全文을 실었다. 그러나 어떤 토도 달지 않은 채, 긍정도 부정도 없이 ‘자료’로만 분류해서 싣고 있었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한 후속기사는 지금까지 다뤄지지 않고 있다.
그 다음에 가장 합리적인 사람들, 특히 선거에 참여해서 선거절차를 잘 아는 사람들도 흥분했고 설득당했다. 당시 평화민주당의 부정선거 자료집을 만들던 사람들이 그들이었다. 평민당에서는 먼저 제작 배포된 부정선거 白書 ‘조작된 승리를 고발한다’의 부록을 급히 증편했다.
평민당에서는 제2판을 찍으며 ‘제13대 대통령 선거개표 상황은 컴퓨터 사전입력 조작을 통한 허위발표였다’라는 다소 긴 문장을 부록의 제목으로 만들었다. 1백6쪽에 달하는 부록에 실린 증거자료는 무려 1백4개에 달하고 있었다.
이 무렵 유일하게 KBS측 대응에 관한 신문기사는 88년 2월 24일자 12면에 짤막하게 나와 있다.
KBS가 자체조사한 결과 ‘개표 당시 컴퓨터 방송에서 실수가 많았으며 送稿와 入力 착오로 추후 수정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기사에도 이상한 토가 달려 있었다. “‘조작설’의 진위와는 별도로 총선에서의 ‘공정집계’와 관련해 주목을 끌고 있다”는 대목이 그것이다. 이 기사를 반박 기사로 인식할 국민은 거의 없을 것 같은 기사였다. 이로써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對국민적 충격은 그들의 의도대로 ‘구현’되어 가는 듯 했다.
한편 국민의 여론이 의혹으로 증폭되어가는 듯하자 개표 당시 主방송사였던 KBS측과 컴퓨터조작설에 관한 증거를 제시했던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측은 1988년 3월 18일에 ‘대통령 선거관련 컴퓨터 조작설에 관한 공청회’를 열기로 했다. 그러나 무산되었다. 이유는 司祭團측의 일방적인 불참 때문이었다.
공청회를 불참한 정의구현사제단
당시 司祭團은 金勝勳 신부의 이름으로 ‘소위 컴퓨터 조작설 공청회에 대한 성명’을 발표, “KBS 측이 자료를 사전에 교부하지 않은 점을 볼 때 이날 모임은 일반적인 주장만으로 집계 프로그램에 하자가 없는 것인양 선전하고 또 다른 은폐를 기도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고 불참 이유를 밝혔다.
그러나 KBS 측은 “개표 방송시스템에 관한 충분한 설명 없이 컴퓨터 내 자료만을 제공할 경우 오해와 함께 컴퓨터 조작설을 부추기는 데 이용될 수 있다”고 자료제공 거부 이유를 들었다.
이런 와중에 제13대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졌다. 兩金씨의 분열로 盧泰愚 후보가 漁父之利를 얻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처럼 국회의원 의석수는 與小野大가 되었다. 혹은 ‘컴퓨터 부정선거를 자행한 野黨’이란 인식이 야당에 표를 몰아주었는지도 모른다. 하여간 이제 국민들은 ‘컴퓨터 부정선거’가 속시원히 밝혀지고 국민을 우롱했던 당사자들을 처벌해 주길 기대했을 것이다.
이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이 여소야대인 제13대 국회는 1988년 7월 8일 ‘兩大선거 부정조사 특별위원회’를 발족시킨다. 특위가 구성되던 이 무렵 月刊中央 8월호는 ‘대통령 선거 “컴퓨터 조작설” 攻防’이란 기사를 실었다.
이 기사에서 月刊中央은 ‘국민의 관심과 사안의 중대성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에 관해 진지한 접근을 꺼려왔던 언론에 국민여론의 분열을 촉진한 1차적인 책임이 있음’을 밝혀 언론의 무책임에 대해 시인을 하고 있었다.
月刊中央은 ‘이 기사가 나간 후에 새로운 사실과 그것과 결부된 국민들의 새로운 요구가 있을 경우 이와 관련된 지상 공청회 등을 개최할 예정’임을 <편집자 註>에 명시하고 있다.
이어서 “컴퓨터 사전조작 확실하다”는 천주교 司祭團 측의 주장과 성명서를, 그리고 “개표방송 컴퓨터 조작 있을 수 없다”는 한국방송공사 측의 반박문을 실었다. 그러나 이후 月刊中央 측은 지상공청회도 열지 않았고 후속기사를 다루지도 않았다.
한편, 선거부정조사 특위를 구성한 국회는 2년이 지난 1990년 7월 14일에야 조사결과 보고서를 채택하게 된다. 물론 이 기간 내에 컴퓨터 부정선거에 관련한 조사도 진행됐다.
그러나 이 당시 일간신문 어디에서도 국회특위의 조사결과는 실리지 않았다. 거의 모든 언론이 침묵을 넘어 아예 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1993년 月刊 ‘인사이드 더 월드’ 5월호는 이 사건을 한층 더 흥미진진하게 다루고 있었다.
이 기사는 ‘컴퓨터 부정선거’와 관련한 언론 자료 중에서 가장 최근의 것이란 점에서, 국회의 조사가 이미 끝난 시점에서, 그리고 좀 더 황당한 說을 그럴 듯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주목을 끌 만한 것인지도 모른다.
‘인사이드 더 월드’의 ‘폭로기사’
잠시 이 기사의 편집자 註를 살펴 보자.
<한국의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 후보는 컴퓨터 조작으로 당선됐다는 충격적인 보고서가 미국 워싱턴에 있는 한 연구소에서 발표되어 ‘한국민주주의에 대한 경종’이라는 책으로 만들어져 판매되고 있다.
이 연구 보고서는 지난 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 당시 미국의 월스트리트저널 신문의 서울 특파원으로 근무하면서 대통령 선거원을 취재 보도했던 조셉 P 맹구노(Joseph P. Manguno) 특파원이 미국으로 돌아가 언론인 생활을 떠나 워싱턴에 있는 미국 아시아 민주주의 연구소(The Institute For Asian Democracy) 연구원으로 옮겨가 3년여 동안 컴퓨터 조작을 한 기술자들과 관계자들을 추적, 연구한 결과 보고서이다.
조셉 맹구노씨는 이 보고서를 통해 ‘상당수 미국인들은 87년 선거 당시 한국 KBS-TV 선거개표 프로그램이 조작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밝히고 있다.
노태우 정권은 이미 끝났지만 이 보고서를 읽은 한국 국민들은 큰 충격을 받고 있다. 그러나 시실은 야당 후보였던 김대중씨와 천주교 공정선거감시단 등은 노태우 후보의 당선에 컴퓨터 조작에 의한 선거부정이 있었다고 주장, 선거 무효소송을 제기했으나 한국 언론들이 묵살, 흐지부지됐던 것이다. 그러다가 조셉 맹구노씨의 충격 보고서를 정암문화사(대표 조승혁 목사)가 입수, 번역해 책으로 펴냈다>
‘충격 리포트’라는 부제가 달린 이 글의 제목은 ‘노태우는 컴퓨터 프로그램 조작으로 당선됐다!!’였다. 그러나 원고지 50매 정도의 내용은 ‘美 공화당 정치전략가 위슬린의 임무가 盧泰愚 후보의 약점과 강점을 정확하게 꼬집어 내는 고도로 정교한 인구통계학적 컴퓨터 모델ㅇ르 개발하는 것’이란 이야기를 깔고 있다.
이 글의 말미는 이러했다.
‘TV에 방영된 선거결과를 조작하기 위해 컴퓨터의 교묘하고 비상한 능력을 이용하였다는 것은 고도의 기술에 의한 선거부정이 가능할 수 있다는 최초의 성공적 테스트 케이스가 되었고, 1987년 성공적이고 민주적인 권력승계를 했다는 한국의 주장을 조롱거리로 만들었다’
이미 승부가 난 국회의 速記錄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고 있을까? 與小野大였던 국회특위는 ‘컴퓨터 부정선거’의 진상조사에서 무슨 결과를 얻었고, 그것은 왜 일반인들을 납득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국회 速記錄을 살펴봐야 했다.
필자가 살펴본 第1백44회 選擧不正調査 제6차 국회 速記錄(1989년 1월 16일)에서 자세한 내막을 알 수 있었다. 여기서는 KBS 측에서 나온 4명의 실무 책임자와 16명의 특별위원(국회의원)들이 세간에 거론되거나 회자되던 모든 이야기들을 상세하게 다루고 있었다.
87년 12월 16일 밤 10시부터 12월 17일 오후 3시 10분까지 3천4백명의 개표방송 참여인원은 17시간 넘게 계속 근무를 했음이 밝혀졌다. 이 과정에서 현장에서의 송고, 수신, 입력과정은 전부 사람이 하는 관계로 실수가 나타났으며 총 7천5백74건의 송고 상황 중에서 1백96건의 사소한 실수가 있었다. 확률로 따지면 2.6%의 실수로 선진국에서도 2.7%의 오차를 감안하는 것에 비하면 아주 좋은 결과라는 것이다.
개표과정에서 텔레비전 화면에 나타난 득표수가 選管委의 개표상황보다 차이가 나는 것은 속보경쟁으로 인해 정확히 검산되지 않은 票數를 먼저 송고하여 화면으로 출력한 때문으로 이것은 수정되는 즉시 해명과 함께 방송이 됐다.
또한 日本 民防의 경우는 5% 개표가 진행되면 벌써 예측 보도를 낼 수 있을 정도지만, 한국의 경우는 변수가 많아 30% 이상 개표가 됐을 때에야 비로소 당선자를 예측할 수 있었고 이 예측치는 1% 미만의 오차를 가질 수 있다고 한다.
서울신문이 당시에 가장 빨리 호외를 만들어 예측표수를 득표수처럼 표기해 물의를 빚은 것은 서울신문 기자의 순발력에 편집부의 과감성이 빚어낸 해프닝이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 과정에서 일부 국회의원들은 오히려 KBS 측의 노력과 능력에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10차 국회 ‘兩大選擧不正 조사결과 보고서 채택의 건’(1990년 7월 14일)이란 항목을 보면 결론을 명시하지 않고 어물쩡하게 넘어가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물론 어느 일간지도 국회특위의 조사결과를 다루지 않았다.
그러니까 조사는 조사대로 진행되어 매듭이 지어졌지만 국민들에게 알려진 ‘컴퓨터 조작설’은 그대로 남겨져 곰팡이처럼 은밀한 곳에서 세포분열을 계속하고 있었다. 아무도 책임지고 나서서 치우려고 하질 않았기 때문이다.
엉뚱한 역사가 만들어졌다
이로써 이 시대에 기록된 자료들만 추려보면 영락없이 ‘컴퓨터 조작으로 당선된 盧泰愚 대통령’이란 ‘엉터리 歷史’가 버젓이 나타난다. 지식사회의 날림공사다. ‘엉터리 다리’를 만들어 놓고서, 믿고 건너라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필자는 이 문제를 기사화하다가 그만 둔 언론사를 먼저 찾아 나섰다.
우선 ‘말’誌의 경우는 “당시 담당자가 없다”는 대답이었다. 그리고 후속기사를 다루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뚜렷한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月刊中央의 경우, 담당자는 아니지만 당시에 아주 관심을 많이 가졌던 기자와 통화를 할 수 있었다.
-후속기사가 다뤄지거나 공청회가 열린 적이 없는데 이유가 뭡니까.
“그 당시에 야당에서 크게 문제제기만 했지 국회 특위가 열리고 조사해 보더니 없었던 걸로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로서야 다룰 가치도 없는 일이 된 것이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는데요.
“글세... 말이 안 되는 얘기던데...”
이번에는 ‘인사이드 더 월드’ 편집장과의 통화.
-‘盧泰愚는 컴퓨터 프로그램조작으로 당선됐다’는 기사가 93년 5월호에 실렸더군요. 이 기사를 싣게 된 동기가 있습니까?
“일단은 미국에서도 많이 믿고 있고, 천주교와 야당 백서에도 나오질 않았습니까? 아직도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사건이니까요.”
-13대 국회에서 특위가 구성되어 조사를 했었거든요. 국회 속기록을 보셨거나 그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아니요, 잘 모르겠는데요.”
이번에 필자는 당시 平民黨에서 부정선거 白書를 제작했던 사람들을 찾아갔다. N의원의 보좌관으로 있는 모씨를 의원회관 3층에서 만났다. 그도 87년 선거 직후 白書작업에 참여했던 사람이었다. 녹음기를 꺼내자 그는 익명을 요구했다.
-‘컴퓨터 부정선거’에 대해 취재하는 중입니다. ‘국회 속기록’을 봤더니 조사과정에서는 완전히 결론이 나 있었는데, 어째서 채택한 결과 보고서에는 결론이 나오질 않는 겁니까? 아무리 뒤져봐도 결과보고서인데 결과는 없습니다. 제가 잘못 찾은 겁니까.
“아닙니다. 거의 모든 국정조사가 그렇습니다. 결론을 낸 국정조사가 별로 없다고 보면 정확할 겁니다.”
-그건 ‘국민의 알 권리’를 무시하는 처사가 아닙니까.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를 들어 한 사안에 대해 강하게 주장했던 한 政黨이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조사 결과 잘못된 것이라면 그 政黨의 입지가 상당히 곤란해 질 수도 있거든요. 치명적일 경우는 서로 양보해서 결론을 내지 않으려 한다고 보면 될 겁니다.”
-그런 법도 있습니까.
“그게 政治 아닙니까?”
백서를 만든 사람들
이 話頭 같은 이야기는 필자의 귓가에 오랫동안 맴돌았다. 세력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상대방의 치명적인 약점을 건드리지 않고 겉으로만 아웅다웅하는 관계인가. 그렇다면 오판한 정치가의 煽動에 의해 희생되는 국민들은 무엇이 되는 건가. 이 兩者의 관계를 필자의 작은 수첩에 기록하는 순간 ‘無知하면 권력에 의해 희생된다’는 움베르토 에코의 말이 떠올랐다.
-당시 평민당에서 白書를 작업하면서 ‘컴퓨터 부정선거’에 대해서도 다루었다는데 어떤 일을 맡았습니까.
“너무 오래 돼놔서...”
-지금도 믿고 있습니까? 믿고 있다면 뭐가 의심스러운 겁니까.
“지금도 그럴 수 있다고 믿습니다. 시간별로 특정후보의 수치가 選管委의 수치와 비례해서 증가하는 것이 가장 큰 예가 되겠지요. 다른 후보들은 표가 감소하는 경향도 있었고 말입니다.”
-그런 부분은 국회 특위에서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습니까.
“모르겠습니다. 국회 속기록이나 당시 특위활동에 대해서는 내가 보질 않아서 모르겠습니다.”
결국 특위 따로, 주장 따로 존재하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白書를 통해 국민의 주된 관심사를 만든 장본인인데도 그 사안이 어떻게 매듭 지어졌는지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다.
-끝까지 추적했어야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그 결과가 만약 아니라면 아닌대로 국민에게 알렸어야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긴 한데... 나는 당시에 백서를 작업하다가 다른 부서로 옮겼습니다. 그 이후에 대해서는...”
-그렇다면 사실은 兩金씨가 단독후보를 내지 못해 선거 결과가 국민의 실망으로 나타나자 국민의 분노를 부정선거 쪽으로 몰고간 것이 아닌가요.
“金泳三 후보는 컴퓨터 부정선거에 대해 이렇다 할 말을 안 했을 텐데요?”
-兩金씨 모두가 부정선거라고 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서는 컴퓨터가 없었는데...
“맞습니다. 그건 인정합니다. 그런데 표가 텔레비전에서 감소하는 경우가 있던 겁니다. 특히 兩金씨의 경우가 특히 심했습니다. 그래서 의심을 한 겁니다.”
-의심을 했다. 그렇다면 의심해서 출발한 假說인데, 검증을 거치지 않은 假說이 아닙니까.
“그 말이 맞습니다. 假說 단계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리고 검증을 했었지요. 검증 방법은 텔레비전과 選管委 것과의 최종집계를 비교해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딱 맞아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이게 한계라면 한계였습니다.”
天動說을 주장하던 사람들이 하늘의 별이 움직이는 것을 합리화시키려 노력하다 보니 하늘을 상당히 복잡하게 그려갔다. 모든 별들은 투명한 球에 달려있고 이 球가 돌아간다고 했다.
제대로 檢證도 하지 않은 假說
이때는 하나의 球만 있으면 설명이 된다. 그러나 별의 주기가 달라지는 것이 발견될 때마다 당시 천문학자들은 球를 하나씩 추가시켰다. 결국 地動說이 인정되기까지 수십개의 유리球가 하늘을 돌고 있어야 했다.
假說과 檢證. 이것은 自然科學 뿐만 아니고 人文科學에서도 똑같이 적용되는 방법이자, 태도이다. 檢證되지 않은 假說은 그것이 아무리 훌륭하다손치더라도 科學의 범주에 들지 못한다. 단지 迷信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우리는 아직도 迷信이 필요한 시대인가?
-당시 2백45개의 개표소가 공개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는데, 개표과정에 참여해서 부정을 저지를 사람들이 최소한 2백45명이나 있어야 한다는 얘깁니다. 이게 현실적으로 가능할까요.
“물론 이 얘기는 신빙성이 그리 많은 얘기는 아닙니다. 그냥 그런 說도 있다는 겁니다.”
친절하게 인터뷰에 응해 준 사실은 고마운데 나라를 발칵 뒤집어질 정도의 白書를 만든 당사자 치고는 그 책임에 대해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었다.
필자는 白書를 만든 또 한 사람을 찾아갔다. 당시 평민당에 소속되어 부정선거 白書 작업에 참여했고, 선거관리위원회와 자주 충돌했다는 周泰文씨(33. 현 민주당 조사부장)를 만나보았다.
-당시 작업에 참여한 동기는 무엇인가.
“그때는 우리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부정선거라는 데 동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컴퓨터 부정선거’를 제외하고는 여당이건 야당이건 서로 반칙플레이를 한 것은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다. 여당은 총알(자금)이 많았으니까 많이 할 수 있었고, 야당은 총알이 작아서 작게 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컴퓨터 부정선거’를 가장 먼저 주장한 것은 정의구현사제단인가.
“글세... 평민당 측에서도 그런 말이 오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먼저 제의한 것은 司祭團이다.”
-백서가 발간된 날짜는 1988년 1월 30일이고 ‘司祭團’에서 성명서를 채택한 것은 2월 16일인데...
“제1편이 그때 나온 것이고, 司祭團 성명이 나온 다음에 즉시 부록을 보강해서 제2편을 만들었다. 그때 맨하탄호텔 지하에서 두 달 가량 합숙하며 작업했었다.”
-아직도 믿고 있나.
“나는 아직도 믿는다. 충분한 가능성이 있고, 그러나 우리는 컴퓨터 전문가가 아니잖은가.”
사실이 아니라면 사과해야 한다
-국회에서 特委가 구성되어 조사를 했는데도 말인가? 국회속기록은 보았는가.
“아, 나는 그 이후 다른 부서로 옮겨서 계속 관심을 두질 못했다. 국회속기록도 아직 못봤다. 너무 바쁘기도 하고...”
-무책임한 것은 아닌가.
“...인정한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참 쉽지가 않다. 결혼도 하고... 생활에 쫓기다 보니까 내가 마음먹은 대로 일을 할 수가 없게 된다. 부끄럽기도 하고...”
-만약, ‘컴퓨터 부정선거’가 사실이 아니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실이라고 믿는다.”
-속기록을 안 보았다니까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만약 사실이 아니라면 그 당시 ‘컴퓨터 부정선거’를 주장했던 사람들은 무슨 책임을 져야 하는 게 아닌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그렇다.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어떤 책임 말인가.
“일단은 對국민 사과를 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신뢰를 얻을 수 있을 테니까.”
필자보다 두 살이 어린 젊은 政客 周泰文씨. 그는 깊은 생각에 잠긴 모습을 그대로 필자에게 보여주었다. 거기서 결단의 모습도 보여주었다. 녹음기를 틀어놓고 취재를 했지만 그는 담대했다. 진솔하고 용기있는 젊은 사람이 政界에 있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필자는 그에게 국회 속기록을 꼭 한 번 보라는 이야기를 하고 헤어졌다.
이번에는 그 당시 이 문제를 깊숙이 다루었던 前 평민당 전문위원을 찾았다. 이 분은 현재도 전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바쁜 관계로 전화인터뷰만이 성사됐다. 이 분도 익명처리를 부탁했다.
-국회 속기록을 봤더니 결과보고서에는 결론이 없습니다. 어떻게 된 겁니까.
“국회진상조사가 사실은 성과가 없었지요. 아직도 믿고 있는 국회의원도 꽤 됩니다. 그러니까 당시 회기내 조사위가 별 성과없이 끝났다는 것이지요. KBS도 방문했지만...”
-국회의원 중 아직도 믿는 분들이 있습니까? 믿기 어려운데요.
“그런데 당시 민주당에서 민자당으로 합류한 의원들 가운데서도 ‘말도 안된다’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대체 이 ‘유언비어’의 시작은 어딥니까? 選管委는 당시에도 컴퓨터가 없는 상태로 手作業을 했는데 말이죠.
“글세,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았는데 이런 말이 나온 것은 司祭團이 제일 먼저 시작한 일인 줄 압니다.”
-가능한 일이라고 보십니까.
“이런 가정이 사실이라면 가능하다고 봅니다. 즉, ‘외국에서 컴퓨터에 조예있는 사람이 왔다. 그 사람이 당시 13代 大選 때 사용할 프로그램을 가져왔고, 투개표가 그것대로 됐다’고 한다면 사실일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그것을 위해서는 選管委 직원 전체와 여당, 야당까지 모두 이 시나리오에 참여해야 합니다. 말이 안 되는 거죠. 그들이 모두 놀아났단 말입니까? 더구나 투개표에서 컴퓨터가 사용된 적이 없었는데도 말입니다.“
-위원님께서는 진상조사에 참여하시면서 어떤 결론을 내렸습니까.
“단적으로 말해서 공정선거는 안된 것이 사실이었죠. 그리고 부분적인 부정도 있었고. 그러나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부정은 없었고 대세에 영향을 미칠 만한 부정도 없었다는 게 결론이라면 결론이었습니다.”
불씨는 남아 있다
-국민들에게도 의혹이 완전히 씻겨진 것이라고 보십니까.
“13대 대선이 끝난 후 국회는 與小野大가 됐습니다. 이 상태에서 조사를 시작했지만 결과는 유야무야 됐죠. 사실 양측 모두 불만인 상태로 끝났습니다. 아직도 그 불씨는 남아 있다고 봅니다.”
-책임을 묻는다면 누구에게 물어야 합니까.
“답답한 것은 조사에 참여도 하지 않고, 선거 과정에도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이 무책임하게 주장한 한 겁니다. 선거의 진행과정을 아는 사람이라면 사소한 부정은 있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이런 황당한 ‘컴퓨터 부정선거’라는 발상은 나올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따져야 할 겁니다.”
-정보기관이 개입됐다는 說은 어떻게 보십니까.
“만약 안기부가 했다면 정보기관이 대대적으로 부정을 할 만큼 그렇게 능력이 있다는 소리도 됩니다. 그런데, 안기부에 들어가 일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의 보통 사람들 아닙니까? 친척 가운데 몇 다리 건너보면 한 두 사람 쯤 안기부 직원이 있는 세상입니다. 그 사람들이 선거 당시에 洪思德 의원에 대해 전단을 몰래 뿌리면서 흑색선전을 하다 적발되기도 했는데, 보통 그런 식의 아주 수준 낮은 공작을 할 수 있는 정도라고 봅니다.”
-그렇다면 참 답답합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고, 정작 당사자들은 꼼짝도 안 하고, 게다가 언론에 실린 기사로만 보면 영락없이 ‘컴퓨터 부정선거’는 사실인데요.
“나도 답답합니다. 이 일은 金日成이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를 정도의 정보 능력을 갖춘 安企部를 졸지에 天才 집단으로 美化시켰고, 모든 유권자를 일거에 바보 멍청이로 만들었습니다.
그 당시에 평민당의 한 중진의원이 내게 이렇게 물었지요. ‘우리 당에 컴퓨터 부정을 믿는 사람이 얼마나 되나’ 하길래 ‘우리 당의 상당수가 사실이라고 믿는다’고 대답했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분이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한마디로 웃기는 얘기다. 당시 KBS의 총체적인 지휘자가 야당성향의 인사였다. 말이 안 된다. 만약 컴퓨터 부정선거가 가능했다면 12대 대선 때도 사용했고 13대 總選 때도 꼭 같은 컴퓨터로 사용했는데 어떻게 輿小野大가 됐을까’라는 말을 들은 게 기억압니다.“
이제 필자는 KBS를 찾아가 당시 증인으로 채택되어 국회의원들 앞에서 해명을 해야 했던 사람들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네 사람 중 국내에 남아 있는 사람은 李戊基씨(당시 KBS 기획보도실장, 현 KBS 심의실장, 해설위원) 한 사람뿐이었다. 필자는 이 분의 소재를 알아내 전화인터뷰를 했다.
KBS 실무책임자의 마음고생
-‘컴퓨터 부정선거’ 시비와 관련해서 몇 말씀 여쭙고자 합니다.
“다 지난 일인데... 국회에서 모든 걸 다 말했어요. 우리야 할 만큼 다 했지. 더 이상 뭐 할 게 있을까요.”
-그런데 언론의 기록이 남아 있질 않습니다. 당시 국회에서 결론이 났습니까.
“그럼요. 4백90명 명단도 다 갖다주고, 아르바이트 학생들 명단까지 모두 갖다 주었지요. 당시 떠돌던 소문을 다 밝혔고 국회의원들도 이해했었고... 결론났지요.”
-국회에서는 아직도 믿고 있는 국회의원들도 있다는데요.
“허... 참... 그 당시에 정치부장하고 보도부장이던 김병호씨와 김진기씨가 그 당시 야당총재를 직접 찾아가서 그런 얘기 다 했지요. 다 끝난 일인 줄 알고 있는데...”
-국회 속기록을 찾아봤습니다. 내용은 결론이 난 것 같은데 결과 보고서에서는 빠져 있더라고요. 後世가 볼 때는 뭔가 이상하다고 볼 게 틀림없습니다.
“그것 참...”
-그런데 KBS측에서는 왜 해명기사를 다루지 않았습니까? 더구나 국회특위가 끝나고서도 어느 정도 다루었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솔직히 우리들로서야 一考의 가치도 없는 루머였어요. 그게 그렇게 크게 번져서 국회에서까지 문제삼을지 알 수도 없었지요. 선거 절차만 아는 사람들이라면 웃고 넘길 일이었으니까요.”
-당시 KBS측으로부터 무슨 불이익을 당하거나 하지는 않았습니까? 증인으로 나가셨던 분들 중에 세 분이 모두 안 계시길래...
“불이익이나 뭐나 그런 일은 없었지요. 다만 당시에 나는 실무총책이어서 心的 고통이 많았습니다. 국회특위에서는 얘길 꺼낸 측에서도 설명을 듣고 난 다음엔 무척 쑥스러워했지요.”
-이런 문제가 발생된 원인을 살펴보면 기자단에서 選管委보다 먼저 報道해서 생긴 것은 아닙니까.
“합동 중계 때는 문제가 없었어요. 합동 중계시간이 있고, 自社 시간이 있는데, 뉴스시간이 서로 다르고, 민방인 경우는 CM 시간이 필요하니까 서로 방영시간이 달라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방송사 간의 속보경쟁을 피할 수 없게 된 점도 있고... KBS가 정확성을 중시한다고 選管委 발표만 기다리고 있다 보면 MBC가 먼저 발표하니까 시청률을 모두 뺏기는 거죠. 그런 점에서 언론도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인사이드 더 월드’ 93년 5월호에는 미국인이 쓴 컴퓨터 조작설이 실렸습니다. 거기엔 미국인 대다수가 13代 盧泰愚 대통령이 컴퓨터 부정으로 당선됐다고 믿는다는데요.
“답답합니다. 참, 이거 무슨 시대에 살고 있는건지... 미국 선거는 OMR 카드를 써요. 그러니까 투개표와 집계, 계산 모두를 컴퓨터가 하지요. 그러나 우리는 집계과정을 다 손으로 하잖습니까...”
李戊基씨를 비롯한 당시 관계자들은 국회에 증인으로 출석하여 지난 84년 총선에서 사용한 프로그램을 좀 더 보기 좋게 해서 87년 大選 때 사용했음을 밝혔다. 또한 개표가 30% 정도 진행됐을 때 당선자를 예측하는 일도 이미 84년부터 시작했으며 당시에도 시청자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고 있었다. 95% 이상 적중했다는 것에 대해 국회 특위 조사단 중 몇몇 의원은 회의 중에 공개적인 敬意까지 표했다.
공정성이 생명인 選管委
중앙선거관리위원회를 빼 놓고 취재할 수는 없었다. 필자는 우선 서초구청 選管委 사무실에 들러 몇 가지 참고 자료를 부탁했다. 하지만 당시 선거업무에 참여했던 분들은 거의 없었다. 게다가 ‘컴퓨터 부정선거’를 취재한다고 말하자 고개부터 내저었다. ‘넌더리가 난다’는 표정, 그것이었다.
楊澖信씨(35)는 88년 이후에 選管委 업무를 맡아왔지만 당시 ‘컴퓨터 부정선거’를 주장하던 사람들과 많은 대화를 나눴던 분이다.
-그때 설득이 어느 정도 됐습니까.
“컴퓨터를 모르는 사람이 컴퓨터 관계설을 주장하니 말이 안 통합니다. 컴퓨터를 설명해 주며너 자기는 컴퓨터를 모르니 설명하지 말라고 하고, 그러면서 컴퓨터 조작이라 하고... 미치는 겁니다. 우리는 컴퓨터도 없었단 말입니다.”
-이 사건으로 選管委가 피해를 보았다면 어떤 점이 있습니까?
“가장 공정하다고 믿어야 하는 選管委가 항상 官權 개입설에 얽히게 되는 겁니다. 선관위 업무야말로 公正性이 생명인데... 앞으로 선거가 많아질 수밖에 없는데 정말 컴퓨터 투개표가 필요한 시대가 오는 겁니다. 그런데 컴퓨터 투개표를 실시해야 한다는 건의를 올렸지만 국회에서 거부됐지요. 말도 못꺼내게 하는 겁니다.”
-컴퓨터 투개표라면...
“지금 내무부에서 의료보험, 운전면허, 주민등록증 등의 역할을 다 하는 카드를 만들 계획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투표 역시 이 카드를 이용해서 할 수 있을 겁니다. 현재 선거구가 총 308개입니다.
지금 방식대로 한다면 1개 선거구에 최소한 1백명이 달라 붙어야 작업이 가능하지요. 거기다 언론, 경찰 등등을 합치면 못해도 전국적으로 십만명이 매달려야 하는 겁니다. 선거철만 되면 국력의 낭비를 피할 수 없게 됩니다. 안타깝지요.“
-내년에 지방자치선거가 시작되죠.
“시장, 구청장, 시의회, 구의회, 네 개 선거가 동시에 치러집니다. 이번 선거만 임기가 3년입니다. 그리고 5년에 한 번 大選, 국회의원 선거가 4년마다. 그리고 2년마다 지방자치제 선거... 유서 써놓고 일하기로 작정했습니다.”
언제나 늦게 퇴근하는 공무원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지도과장 金弧烈씨(48). 마침 사무실을 찾아간 날은 법원으로 출장을 가버린 오후였다. 수위실에 들러 이 분의 집 전화번호를 부탁했다.
“그 분은 항상 늦게 퇴근하십니다.”
이 말 속에 존경의 느낌이 배어 있었다는 건 필자의 오해였을까. 하지만 저녁 8시 넘어 집으로 전화를 걸었을 때 역시 “그 양반은 항상 늦으세요. 사무실로 전화해 보세요.” 하는 음성이 들려왔다. 선거철도 아닌데...
내가 살아가는 국가의 공무원이 이웃나라 일본의 공무원 못지 않게 열정적이면서 성실하다는 걸 발견했을 때, 미안한 감정과 고마운 감정이 뒤섞였다.
밤 9시 반, 사무실에 들렀을 땐 金弧烈 과장 말고도 다섯명의 직원들이 더 있었다. 金과장은 87년 大選 당시 직접적인 업무를 맡고 있었던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필자는 그때부터 무려 3시간에 걸쳐 선거절차에 관한 상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표를 바꿔치기하거나 투표함을 바꿔치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필자는 누구에게도 듣지 못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구수한 湖南 사투리의 金과장이 말하는 기막힌 사연을 들어보자.
“제가 金勝勳 신부를 참 좋아합니다. 朴種哲군 사건이 있었을 때 얼마나 훌륭한 일을 하셨습니까? 그런데 이 분이 ‘컴퓨터 부정선거’라고 발표하셨잖아요? 제가 존경하는 분인데... 이 분은 순진하셔서 그럴 수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진실을 알려드려야지 하고 그 당시에 저 혼자 찾아갔었지요.”
-그때가 언제였습니까? 성명서는 88년 2월 16일에 발표됩니다만.
“그때가 선거 직후입니다.”
-그럼 가셔서 설득하는 데 실패하신 셈이군요. 그 후에 더 강경한 성명서를 채택했으니 말입니다.
“그때 단 한번만이라도 선거관리위원회에게 물어보기라도 했으면 우리가 자세히 말씀을 드렸을 겁니다. 그런데 공정선거감시단 얘기만 듣고 공식기관에서 발표한 얘기는 하나도 안 듣는단 말입니다.
그 당시 정의구현사제단에서 일하던 간사가 있었습니다. 젊고 유능하고 아주 순진한 사람입니다. 서울대학 정치학과를 나왔지요. 그런데 이 친구도 迷妄에 빠져 있었어요. 나중에 서경원 사건으로 구속되었는데... 저는 참 마음이 안타까웠어요.
저는 그 당시에 누가 가라고도 하지 않았는데 혼자 갔었지요. 大選 직후입니다. 내가 사실대로 이야기를 하면 그 사람들이 믿을 것 아니냐 하는 생각을 했지요.
그런데 거기 있는 학생들이 ‘뭐하러 왔냐, 컴퓨터 조작이나 해 가지고... 뒈져라 뒈져’하는 겁니다. 그 학생들을 붙잡고 ‘얘기 좀 하자’고 하니까 아주 매정하게 탁 뿌리치는 거에요.
‘너희같은 놈들하고 무슨 얘기를 하냐’는 거지요. 거기서 할 수 없이 내가 金勝勳 신부를 만나러 왔다고 하니까 소개를 시켜 줍디다.“
두 神父와의 면담
-金勝勳 신부께서는 뭐라고 하셨습니까.
“갑자기 화를 버럭 내면서 ‘당신 내일 모레면 구속될 건데 뭐하러 왔어?’ 하는 겁니다. 저도 큰 소리로 ‘얘길 합시다, 얘기’했지요. 그 당시에 정의구현사제단 신부들이 한 2백명 됐답니다.
저는 거기서 정의구현사제단 신부 2백여명과 모두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해 보자고 했지요. 서로가 오해할 수도 있는 것이지만, 오해를 풀어가야 정의가 구현되는 것이 아니냐는 말을 했어요. 하지만 결코 설득되질 않았습니다.“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겠군요.
“아닙니다. 그 다음에 다시 한번 갔었지요. 당시 선거국장이셨던 분하고 함께 간 겁니다.”
-선거국장님은 어떤 분이었습니까.
“제가 그냥 돌아와서는 선거국장님께 ‘사실은 혼자서 이러저러한 마음에 갔다가 허탈하게 돌아왔습니다’고 했지요. 저희 총장님은 독실한 천주교 신자십니다. 그때는 국장이셨고 지금은 사무총장으로 계시는 金奉圭씨는 지금도 매일 아침 8시경에 출근하시면 30분 동안 성경을 펴놓고 읽고 계시는 분입니다.”
이야기는 재미있게 진행되기 시작했다. 그 당시 司祭團과 選管委는 서로 상반된 입장이어서 감정이 상하기 십상인 관계인데 공교롭게도 같은 종교를 갖고 있다. 한쪽은 존경받는 神父요, 다른 한 쪽은 평소에 상대방을 존경하던 信者이다. 서로 존경하고 아끼는 관계에서 업무적인 대결로 勝負가 진행되고 있다. 과연 公正하게 勝負가 진행됐을까?
“국장님은 ‘내가 가야겠다. 선거국장의 자격이 아닌 일개 信者의 자격으로 내가 평소에 좋아하는 그 신부님에게 가서, 진실로 그 분에게 내가 이 사실을 전해 줄 의무가 있다’고 했습니다. 信者로서 神父에게 이야기를 하면 믿어 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지요. 그래서 저와 함께 다시 갔습니다.”
-성공적이었습니까.
“우리 이야기를 듣긴 들었어요. 한시간이 넘도록 選管委의 업무부터 선거 절차는 이렇고 저렇다. 그리고 우리는 컴퓨터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런 설명을 쭉 드렸지요. 그런데... 다 듣더니 ‘아이고, 쯧쯧, 그렇게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하느라고 욕 보고, 또 그렇게 변명하고 다니느라고 욕봐요’ 하는 겁니다. 허망하더라고요.
아직 끝난 게 아닙니다. 더 기막힌 얘기도 있어요. 국장님과 저는 그래서 다시 咸世雄 신부를 만났습니다. 처음엔 무척 반가워해요.“
-살명을 다 드렸습니까.
“그랬지요. 차근차근 아주 자세하게 그리고 친절하게 선거 절차에 관해 설명을 드렸습니다. 아, 그랬는데 이 분이 갑자기 화를 막 내는 겁니다.”
-신부님이 화를 냈다고요.
“글세, 자기는 처음에 선거국장이 온다고 하길래 양심선언을 하러 온 줄 알았대요. 그러면서 ‘가라고, 당신네 같은 사람들은 필요없다’고 하는 겁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는 金弧烈 과장은 “그래도 그 양반들은 순진하셔서 그렇다”고 했다. “착하셔서 그렇다”고도 했다.
司祭團 측의 반응
이제 필자가 마지막으로 찾아가야 할 곳이 남았다. 폭력에 의해 희생된 朴種哲군의 拷問 치사 ‘은폐조작’을 폭로한 천주교 사제들의 모임터. 천주교회의 젊은 신자들로부터는 보통 신부님 이상으로 추앙받는 분들이 활동하는 단체.
그리고 ‘13代 대통령 선거는 컴퓨터 조작’이었다는 傳說의 故鄕. 正義 구현을 위해 전국의 사제들이 모인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 사무실을 찾아 나섰다.
필자가 전화를 걸고 찾아간 곳은 동숭동 샘터 건물 뒷길 끝에 있는 라이브 극장 5층이었다.
필자를 소개한 다음 月刊朝鮮에 실릴 글이라고 하자 30代로 보이는 직원이 대뜸 아무 할 말이 없으니 나가달라고 '정중한 門前薄待‘를 했다. 그렇다면 司祭團에 대한 자료만이라도 부탁한다고 하자, “제대로 실을 것도 아니면서 왜 달라고 하느냐 나가달라“고 했다.
일단 녹음기를 꺼내 틀어놓은 뒤 계속 늘어붙어야 했다.
-제가 이렇게 온 것은 당시 ‘컴퓨터 부정선거’라는 부분에 관해서 좀 더 자세한 걸 알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그러니까 1988년 2월 16일 성명발표할 당시에도 계셨습니까.
“예, 그 부분이면 근거를 다 제시했고 법정까지 간 것 아닙니까. 그런데 무슨 再개표 주장을 하지 않았냐고 하는데 말이 안 되죠. 선거부정인데 再개표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런데 소송 결과가 어떻게 됐습니까?
“증거도 제대로 검토하지 않고, 제시한 증거도 제대로 채택하지 않고 그러면서 일년이 지났어요. 쉽게 말해서 일 년여 질질 끌다가 말았어요. 그런데 그 녹음기 끄시고...”
-컴퓨터 조작설이 사실이라면 끝까지 투쟁을 해서라도 밝혀주셔야 하고, 사실이 아니라면 국민들에게 솔직하게 밝혀주어야 하질 않습니까.
“밝혔는데, 그 때 朝鮮에서 취재를 했어요? 안했잖아요. 그런 식으로 하지 말라는 얘깁니다.”
-그럼 그 당시엔 다른 언론에서는 취재를 했습니까.
“했지요. 그러니까 싸우고 싶지 않으니까 나가주세요.”
-어느 언론입니까? 저는 ‘말’誌를 빼놓고는 찾지를 못했거든요.
“글세 있어요(음성이 점점 높아지면서) 나가주세요.”
-이건 밝혀주셔야 합니다. 사회에 대한 책임입니다.
“아, 왜 여기 와서 자꾸 이러는 거요. 月刊朝鮮을 설득력 있는 언론매체로 보질 않으니까 나가주세요.”
“우리는 사실로 믿는다”
-그렇다면 개인의 입장으로 여쭙겠습니다. 그 당시 ‘컴퓨터 조작’이 진실이라면 왜 끝까지 밝히질 않습니까.
“일년 동안 싸우지 않았습니까.”
-그 당시 KBS도 밝혔었고, 與小野大였던 국회 특위에서도 이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었습니다. 그때 왜 침묵을 지켰습니까.
“이미 그 당시에는 일정기간이 지나버려서 이 자체가 무의미하게 되어버린 겁니다. 우리 나름대로 이런 문제를 밝히는 데에는 힘이 미약하다고 느꼈습니다.”
-外壓이 있었습니까.
“아니, 전혀. 우리는 당당하게 했어요.”
-그렇습니다. 아주 당당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지금와서 이러는 거요.”
-그것이 시작은 있는데 끝이 없는 겁니다. 이제 매듭을 져야 될 것 같습니다.
“그들 나름대로 매듭졌잖아요.”
-그럼 그 당시에 왜 항소를 하지 않았습니까.
“재판기록 봤어요?”
-네, 봤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렇게 얘길하고 있는 거요, 지금?”
-재핀기록을 보면 증거가 모두 근거가 없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KBS측의 답변도 논리적이고 합리적입니다. 당시 選管委는 컴퓨터도 없었고요.
“아니 도대체 취재 목적이 뭐요? 뭘 하겠다는 거요?”
-첫째는 그 당시 ‘컴퓨터 조작설’이 司祭團의 성명서에서 시작됐습니다. 이것이 평민당의 白書에 인용되고 재야단체로부터 큰 호응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것 때문에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이 사건을 진실로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국회 특위가 구성되어 진상조사를 했지만 결과는 아니었습니다. 또 한쪽에서는 선거무효소송을 냈는데도 기각됐습니다. 문제는 기존 언론도 침묵하거나 잊어버리고 있기 때문에 後世가 역사를 잘못 판단할 우려가 있는 겁니다.
“알려진 진실들이 모두 공개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에... 우리 힘이 미약해서 그렇고, 언젠가는 다 밝혀지리라 믿어요.”
-司祭團 측도 그렇고 국회나 KBS 또는 다른 단체들도 서로 민주화를 위해 노력해왔던 것 아닙니까? 그 과정에서 잘못이나 오해가 있을 수도 있는 것이겠지요. 만약 그것이 오해였다면 오해라고 국민들 앞에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正義를 구현하는 것 아닙니까.
“기본적으로 우리는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사실이라고 믿고 있어요.”
“취재에 응하지 않겠다”
-신앙처럼 믿는 겁니까.
“지금 그런 건 거론할 게 아닌 것 같고, 月刊朝鮮에 우리가 진실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그대로 실릴 것 같지도 않으니까. 그렇게 알아주세요. 가서 ‘정의구현사제단에 갔더니 취재에 응해주지 않더라’ 그렇게 말하세요.”
-그럼 대다수 국민들이 당시 司祭團의 성명 때문에 그 영향을 지금도 받고 있을 텐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언젠가는 밝혀져요. 그러니까 후세 史家들이 진실한 기록들을 접할 수 있을 때 그때 가서야 밝혀질 겁니다.”
-그 당시 선거관리위원회에서는 컴퓨터를 전혀 쓰지 않았다고 하는데 거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글세 취재에 응하지 않겠다고 하니까 그냥 돌아가세요.”
-혹시 국회 속기록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아니, 왜 자꾸 그래요?”
-국민들에게 알려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저야 프리랜서지만 言論人이기도 하지요. 그렇죠? 이것이 어떻게 된 것이란 걸 제대로 기록해 주어야 제대로 된 역사를 전해줄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아무 대답없이 교정원고만을 넘긴다. 이때부터 시선이 일치된 적이 거의 없는 채로 인터뷰를 해야 했다.)
-그 당시 평민당에서 白書를 만든 분을 만났습니다. 그 분은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그동안 다른 업무 때문에 국회속기록을 못 봤다. 그런데 만약 ‘컴퓨터 조작’이 사실이 아니라면 솔직하게 국민들 앞에서 사과를 해야 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얘기하는 분도 만나 뵈었습니다.
“국회 조사라고 해도 뭐 정확한 근거와 자료를 갖추지 못했을 수도 있고 하니까, 뭐 더 후에... 밝혀질 것이라고 봐요. 법적으로 항소를 안 한 것도 그렇고 우리가 밝힐 수 없는 부분도 있고 그러니까 그렇게 아시고 가세요.”
그러나 아직도 남은 사람들이 있다. 그 당시 성명서를 발표한 분들. 金勝勳 신부와 吳泰谆 신부. 그리고 咸世雄 신부. 필자는 이 분들 중에서 맨 나중에 시도한 吳泰谆 신부만을 제외하곤 모두 전화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咸世雄 신부... “검찰도 언론도 확신범이야”
먼저 현재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咸世雄 신부와의 통화 내용.
-‘컴퓨터 조작설’에 관해 여쭙고자 합니다.
“그건 내가 안 했어. 金勝勳 신부에게 물어보라구. 난 잘 모르는 일이야.”
-선구무효소송을 제기하셨지요? 그리고 敗訴하셨는데...
“난 검찰이 아주 고생하는 줄 알았어. 마지 못해 그놈들(위정자인 듯) 말을 듣고 살아가는 줄 알았지. 그런데 그게 아니야. 그 놈들도 똑같아. 얼마 전 언론자유실천선언 20주년 기념식 때 가서 이런 얘길 했었지. 첫째는 검찰도 확신범이라는 것. 둘째는 언론도 확신범이라는 것. 그리고 셋째는 기존 언론으로는 다 지나갔다는 거야.”
-서강대 朴弘 神父님의 말씀은 왜 잘못됐다고 보십니까.
“朴신부는 흰 것을 검은 것이라고 하고, 검은 것을 흰 것이라고 하잖아. 자꾸 묻지 말아요. 바쁘니까.”
전화는 거기서 끊어지고 말았다. 필자는 金勝勳 신부에게 찾아갔다. 그러나 月刊朝鮮은 거기서도 외면당했다. 늦가을 밤비를 맞으며 할 수 없이 돌아와서는 전화를 계속 해 보았다. 늦은 밤에 통화를 할 수 있었다.
-‘컴퓨터 조작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직접 발표도 하셨지요.
“사실이라고 믿어.”
-그 당시에 왜 계속해서 맞대응하지 않으셨습니까.
“힘에 부쳐서 그만둔 것이지, 뭐.”
-아, 그렇군요. 그런데 제가 자료조사를 해 보니까 KBS와 국회 특위에서도 조사를 했던데요. 결과는 신부님과 아주 다르게 나왔습니다만...
“KBS, 국회, 거 자기들 주장을 맞추려고 한 거지.”
-그런데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서는 당시에 컴퓨터도 없었고, 방송국하고는 전혀 관계없이 일을 했다던데요.
“中選委라는 것이 그 다 정부에서 시키는 대로 하는 곳이야. 미안해요. 말을 놔서.”
일차 통화는 여기서 끝이 났다. 며칠 후 필자는 다시 전화를 걸었다.
-컴퓨터 조작說이 사실이 아니라면 책임을 져야 하는 문제가 있는데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실로 믿고 있거든요.”
“자료 갖고 조사했다면 그대로 써요. 그러면 될 것 아녜요.”
-사실이라면 왜 밝혀지질 않는 겁니까.
“우리는 컴퓨터 전문가가 아녜요. 그리고 아주 오랜 시간이 흘러야 밝혀질 거요. 세월이 흘러야 돼요. 역사가 밝혀줄 거요.”
-국회에서도...
“국회 그 사람들 믿을 수가 있나. 우리는 컴퓨터 전문가가 아니라서 잘 몰라요.”
-정의구현 司祭團에 컴퓨터 전문가가 한 사람도 없습니까.
“그래요. 지금은 컴퓨터 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어요.”
吳泰谆 신부는 좀처럼 전화를 받질 않았다. 그러다가 記事 마감 직전에 수녀님과 가까스로 할 수 있었다.
-吳泰谆 신부님과 통화를 하고 싶습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계시면 좀 부탁드립니다. 글을 쓰는 사람인데요.
“지금 옆에 대화중이시거든요.
-‘컴퓨터 조작설’에 관한 간단한 질문이 있어요. 5분이면 됩니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잠시 후 수녀님은 ‘통화 거절’ 소식을 들려주었다. 이유인 즉, 요즘 ‘한마음운동본부’와 ‘농촌살리기 운동’ 때문에 너무 바쁘시고, 당시 이야기를 잘 하지 않으려 하신다는 것이다.
司祭團의 獨善
‘컴퓨터 조작설’의 전도사인 신부님들과의 대화는 7년 전 選管委의 金弧烈 과장이 겪었을 때와 거의 흡사했다.
전문가가 아니어서 모르지만 그러나 믿는다고 내세우는 부분. 전문가들이 ‘조작은 불가능’이라고 판단하면 그들을 ‘못믿는 사람들’이라고 치부하는 부분. 검찰과 국회가 자신들에게 불리한 판결을 내리면 그들도 한통속이라고 비난하는 부분. 컴퓨터를 신비화하고 두려워하는 부분.
무려 7년이 지날 동안 컴퓨터를 공부했으면 전문가가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분들은 그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이 분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증명해줄 전문가를 기다려 왔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종교가 아닌 과학의 세계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마술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엄밀하게 이 사건을 분석해 보면 自然科學의 영역에서 볼 사안이 아니라는 것이다.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라 업무처리 과정이 한쪽면만 부각되어 나타난 오해였을 뿐이었다. 이것을 두고 있지도 않은 ‘神秘의 프로그램’ 식의 이야기를 사회의 지도층 인사들이 나서서 외친다는 것은 이 사회를 자꾸 비참하게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이 분들은 솔직한 용기도 없었다. 틀렸으면 틀린 대로 시인하는 용기가 없다면 진실로 바라는 正義는 구현될 수 없을 것이다. ‘편협한 極端의 正義는 極端의 不正’라고 테렌티우스가 오래 전에 설파했다.
이 분들은 일반적인 지식인 집단이 끌어안고 가는 ‘신념’과는 궤가 다르다. 이 분들의 ‘믿음’은 하나의 ‘신앙’이었다. 문제는 이로써 많은 선량한 국민들이 誤導된다는 데 있다.
우리가 진실로 존경할 사람은 찾는다면 스스로의 실수를 인정하는, 그래서 결점도 때로는 보이는 그런 인물일 것이다. 스스로 완전무결한 神이 아님을 인정하는 분. 수많은 추앙자로 인해 하늘높이 떠 받쳐진 권위의 제단에서 스스로 낮은 곳으로 용기 있게 걸어내려와 우리와 같은 평범한 범인들과 함께 어우리지면서 마음을 열게 하고 가르침을 주는 이. 그가 바로 이 시대의 메시아, 예수의 삶을 실천하는 이가 아닐까.
지식인들의 날림공사
물질의 풍요를 위해 노동자와 기업인들이 합심해서 노력해 성공한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그러나 정신은 아직도 빈곤해 있다 못해 오히려 병들어 있다. 지식인들이 노동자들에게 부끄러워해야 할 ‘知性의 빈곤’은 ‘컴퓨터 조작설’과 같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키워왔다.
‘컴퓨터 부정선거’라는 루머를 다른 言論들이 후속기사를 쓰지 않은 이유는 ‘가치’가 없어서였다. 여기서의 가치란 난해한 의미가 아니라 단지 상업적, 정치적 가치가 없다는 의미다.
그들이 진정한 言論이었다면 공익적 가치를 먼저 떠올렸어야 했다. 偏頗的이지도, 黨派的이지도 않아야 言論이란 소릴 들을 수 있다. 편파적이고 당파적인 언론은 선동매체로 전락한다. 이 사건에 관한 言論은 선동매체라는 소릴 들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또한 ‘白書’를 만들어 사회에 유포시킨 사람들도 책임을 져야 한다. 사회나 정당을 비판하기 위해 글을 썼다면, 그 글에 대한 책임도 지지도 않으면서 대중 앞에 ‘민주주의’를 말하는 스스로에게 부끄러움을 느껴야 한다. 이런 정치인들이 많으면 사회는 한쪽으로 급속히 기울어져 급기야는 붕괴되고 만다.
그러나 무엇보다 ‘컴퓨터 조작설’을 유포시킨 당사자들은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선거절차도 모른다. 컴퓨터도 모른다. 그러나 조작이다”라는 식의 발언을 아무렇게나 내 던져두고는 “역사가 판단할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명백한 知的 暴力이요, 종교인의 ‘거짓 예언’이다.
‘正義는 독점될 때에는 獨善이 됩니다.’(池學淳, ‘다만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라’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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