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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辰倭亂을극복한 백암(栢巖) 김륵(金玏) 先生
김태환 / 영주향토사연구소장
문절공(文節公) 김담(金淡)의 후예로 태어나다
백암(栢巖) 김륵(金玏, 1540~1616)의 본관은 예안<(禮安 혹은, 선성(宣城)> 이고 자는 희옥(希玉), 호는 백암(栢巖)으로 영천(榮川) 백암리(栢巖里)에서 태어 났다.
김륵이 속한 예안김씨 집안은 고려시대 호장(戶長)을 지낸 김상(金尙)을 시조로 하여 대대로 안동의 예안에서 살아왔다. 고려 말에 이르러 현령 김소량(金小良)이 영천으로 터를 옮긴 뒤 명문가로 성장한 예안김씨는 김소량의 아들 문절공(文節公) 김담(金淡)에 이르러 영천을 대표하는 집안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는 문과에 급제한 뒤 세종·문종 연간 집현전 학사(學士)로 재직하며 『칠정산외편(七政算外篇)』의 편찬에 참여하는 등 역학(曆學)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던 인물이었는데, 김륵에게는 고조부가 된다.
이후 증조부 김만칭(金萬秤), 조부 김우(金佑)에 이르기까지 관직에 오르지 못했고, 생부 김사명(金士明)은 성균 생원(成均生員), 양부 김사문(金士文)은 형조좌랑(刑曹佐郞)을 지냈다. 김사명은 창원황씨와의 사이에서 김욱(金勖)과 김륵 두 아들을 두었는데, 백형(伯兄) 김사문이 자식을 갖지 못하자 김륵을 그의 후사로 입양시켰다.
김륵의 부인은 사옹원주부(司饔院主簿)를 지낸 인동장씨 장순희(張順禧)의 딸로 2남 4녀를 두었다. 장남 김기선(金幾善)은 찰방을 지냈고, 2남 김지선(金止善)은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에 올랐다. 4명의 딸은 권래(權來)·이백명(李伯明)·이유도(李有道)·김시정(金是楨)과 결혼하였다.
박승임과 황준량의 문하에 들다
김륵의 학문에 관해서는 그 기록이 소략하여 자세한 사실을 확인하기 어렵다. 그는 7세가 되던 해부터 아버지로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공부의 시기를 놓칠 것을 염려한 어머니의 배려 아래 집안에 작은 서재를 꾸미고 학업에 열중하였다고 한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 하였으며 몸가짐이 의젓하였다. 이에, 숙부는 일찍이 "이 아이는 반드시 우리 가문을 크게 하 리라"고 예언하며 선대의 묘갈(墓碣)을 세움에 글자를 새기지 않고 백비(白碑)를 세웠다. 13세에는 소 고(嘯皐) 박승임(朴承任)·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의 밑에서 수학하며 끼니를 잊어가며 글읽기에 매진하였으며, 18세에는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사서(四書)를 배우고 물러와 산사(평은면 진월사)에 서 밤을 꼬박 밝히며 공부함에 산사의 스님이 공의 건강을 염려하여 등불을 꺼주기까지 하였다. 명종 (明宗) 19년(1564년)에 생원시에 2등으로 급제하였다. 이 과거에 율곡(栗谷) 이이(李珥)·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 등 당대의 명류들이 함께 급제하여 세상 사람들은 용호방 (龍虎榜)이라 했다. 공은 20대에 이미 학문과 인격으로 사림에 추중되었고, 34세에는 이산서원장(伊山書院長)에 추대 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학문탐구를 늦추지 않고 흑석사·소수서원 등지에서 한결같이 학문탐구에 열중 했다. 공은 실천도학에 정진하려 하였으나 부모의 뜻을 받들어 과거공부에 열중하게 되었고,
김륵은 13세가 되던 1552년(명종 7)부터 당시 영천을 대표하던 학자인 소고(嘯皐) 박승임(朴承任)과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의 문하에 나아가 본격적인 학문을 시작하게 되었다. 박승임과 황준량은 모두 퇴계 이황의 직전 제자로 뛰어난 학식을 갖춘 인물들이었는데, 그 가운데 황준량은 처음 김륵을 보고서, “빼어난 기운은 세상의 더러움을 초월하였고, 젊은 나이이지만 학문이 이미 노성하였다.”는 글을 지어 그의 학문적 재능을 높이 평가하였다.
퇴계의 학문을 이어받다
김륵은 18세가 되던 1557년(명종 12) 이황을 찾아가 사서(四書)를 비롯한 성리학의 기본 경서들을 배우며 퇴계학의 정맥을 직접 이어받게 되었다. 그리고 산사로 물러나 은거하며 배운 것을 밤새워 반복하며 학습하였는데, 그가 병들까 염려한 승려들이 몰래 불을 꺼버렸지만 글 읽기를 멈추지 않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김륵이 남긴 저술들 가운데에는 그의 학문 세계를 구체적으로 엿볼 수 있는 경학(經學)과 성리설(性理說) 관련 자료가 거의 없다. 이는 그가 평소에 저술하기를 좋아하지 않았던 성향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그가 생애의 대부분을 관직에 종사하며 퇴계의 문묘종사를 청원하고, 영남 출신 관료들의 모임을 조직하는 등 중앙 정계에서 활발히 활동하며, 퇴계 학파의 정치적·사상적 위상을 제고하고 확립하는데 중점을 두었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역임하다
1540년(중종 35) 영천(榮川) 백암리에서 태어난 김륵은 16세에 안동의 명문 출신인 인동장씨(仁同張氏)와 혼인하고, 25세가 되던 1564년(명종 19)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이 때 함께 합격한 사람 중에는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 등 당대의 뛰어난 인재들이 두루 포함되어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이들을 묶어 용호방(龍虎榜)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사마시 합격 이후 생부 김사명(金士明)과 스승인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상사를 당하여 고향에 머물던 김륵은 퇴계의 위패를 이산서원(伊山書院)에 봉안하는 일을 주도하며 영천 지역 사림의 중심인물로 부상하였고, 흑석사(黑石寺)와 소수서원(紹修書院) 등지에서 학업에 열중하며 과거를 준비하였다.
37세가 되던 1576년(선조 9)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로 관직 생활을 시작한 김륵은 벼슬길에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다시 가주서(假注書)를 거쳐 이듬해 5월 호송관 (護送官)으로써 왜상(倭商)을 대마도에 호송했고, 선조 11년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봉교(奉敎)·성 균전적(成均典籍)을 거쳐 예조좌랑(禮曹佐郞)에 재직했다. 선조 13년(1580년)에는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거쳐 고산찰방(高山察訪)이 되었으나 늙은 부모를 모시기 위하여 사임하였다가 다시 전적(典籍)을 거쳐 서학교수(西學敎授)에 옮겼고, 이듬해 병조 좌랑(兵曹佐郞)·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을 거쳐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의 자리에 올랐다. 선조 15년(1582년)에는 '군주의 덕에 있어서의 어긋남과 정사가 그릇되고 있음'을 상소하였다. 이에 선조가 그를 불러들여 힐책하는 자리에서도 백암은 굴하지 않고 직간하였다. 1583년 스스로 사임한 이후 사축서사축(司畜署司畜)·지평·종묘서령(宗廟署令)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584년 지 평·전적을 거쳐 늙은 어버이를 봉양하고자 외직(外職)을 청하여 7월에 영월군수(寧越郡守)에 부임하였다. 당시 영월고을에는 군수가 부임해오면 갑자기 죽어버리는 괴변이 일어나고 있어서 영월은 사지 (死地)라 불리고 있었다. 백암이 부임하였을 때는 이미 7명의 군수가 죽은 뒤였다. 그은 영월군수에 부임하자, 노산릉(魯山陵: 端宗陵)에 제문을 지어 제사지내고, 단종의 유해를 거두어 장사지낸 사람의 후손을 찾아 호역(戶役)을 면제하며 능을 지키게 했으며, 단종의 사당을 세워 위패를 봉안하고 왕비 송씨를 배향하였다. 또한, 제청(祭廳)과 제실(齊室)·주사(廚舍)를 능 옆에 세우고, 철마다 제사를 친히 받들었다. 이에 그 이후에는 영월에 괴변이 사라졌다. 영월은 준령(峻嶺)의 틈바구니에 끼여있어 주민은 적으나 각종 조 세는 많아 백성들의 살림이 어려웠다. 이에 그는 영월의 폐단 10가지를 들어 상소하여 민생을 위협 하는 고질적인 폐단을 말끔히 바로잡아 부임 수 년만에 영월의 생기를 회복시키고 보리이삭이 갈라지 는 상서로움을 나타내게 되어 선조는 칭찬하는 교서와 함께 옷 한 벌을 하사했다. 1589년 7월 백암이 임기가 다하여 홍문관교리로 부임해감에 영월의 백성들이 어버이를 잃은 듯 슬퍼 하였고, 비석을 세워 그 덕을 기렸다고 한다. 선조는 백암을 불러 '그대가 선정을 베풀어 그 고을이 밝아졌으니 못내 가상하고 기쁜 일이다. 후임 수령들도 그대를 본받아야 할텐데…'라며 칭찬하고 술을 하사하였다.
아! 금강물이여 너는 어이 혼자만 유정하여
밤낮에 흘러흘러 서울로 달리느냐
네가는 거기 우리님 계시거니
백발외로운 신하의 애뜻한 마음
아 뿌리치고 너를 따라갈까나
(영월 군수시절 지은 시 )
백암은 그 이후에도 사복시정(司僕侍正)겸 교서관교리(校書館敎理)·홍문관수찬·광국원종훈 (光國原從勳)에 책록되고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라 우부승지(右副承旨) 등의 관직을 지냈다. 백암의 활약은 임진왜란 9년에 더욱 빛낮다. 선조 25년(1592년)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공은 영남안집사(嶺南安集使)의 중책을 맡아 뛰어난 활약 을 펼쳤다. 이어 승정원도승지(承政院都承旨)겸 예문관직제학(藝文館直提學) 상서원정(尙書院正)·한 성부우윤(漢城府右尹)·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 등의 관직을 지냈 다. 1595년 사헌부대사헌에 재임했을 때에 16조의 상소를 올렸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성학 (聖學)에 힘쓸 것 2) 세자(世子)를 가르칠 것 3) 대신을 중히 여길 것 4) 체찰사를 보낼 것 5) 장수들 을 가르칠 것 6) 수령을 택할 것 7) 군량을 비축할 것 8) 군병을 훈련할 것 9) 어진 인재를 구할 것 10) 언로를 개방할 것 11) 인심을 기쁘게 할 것 12) 형정(刑政)을 엄정히 할 것 13) 상기(喪紀)를 삼가 할 것 14) 지세를 살필 것 15) 마정(馬政)을 닦을 것 16) 화의(和議)를 끊을 것 등이었는데 당시 국정 에 당면한 기본적인 과제를 직시한 내용으로 장문의 상소를 통해 나라를 근심하는 정성이 구절마다 넘치고 있었다. 이에 선조가 깊이 감탄하여 비답을 내렸다. 1599년 정월 형조참판에 임명되었다가 예조참판에 옮겼 고 3월에는 충청관찰사겸 병마수군절도사·순찰사가 되었다. 이때 아산(牙山)에 있는 이순신 장군의 집이 가난하여 조세를 부담하기 어려운 지경이므로 이에, 장군의 충훈을 기려 나라에 장계를 올려 조 세를 면제하도록 하였으며, 도내의 전사한 사람들을 포상하기도 하였다. 1600년 병으로 사직하고 돌아와 있다가 6월에 다시 형조참판, 선조 34년(1601년) 호조참판에 이어 충좌위부사과(忠佐衛副司果)에 임명되었다. 1602년 8월 동지상사(冬至上使)로 명을 받고 9월 1일 압록강을 건너 11월 4일 북경에 당도했다. 11일 하례를 행하고 이튿날 병부(兵部)의 질문에 대하여 백암이 조목마다 석연히 해명하여 대답함에 상서(尙書) 이하가 모두 칭찬하였다. 칙지(勅旨)를 받고 27일에 하직인사를 함에 신종 (神宗)황제는 특별히 금장(金章) 1속을 내렸다. 1604년 8월 안동대도호부사에 부임하였다. 이듬해 7월 큰비로 낙동강둑과 반변천둑이 함께 무너져 안동부성이 송두리째 물속에 잠기고 일대가 온통 매몰·유실되는 처참한 수해를 입었다. 이에 백암은 감영(監營)에 상신하여 관찰사 유영신이 경상좌도 14고을의 민정을 동원하여 제방을 튼튼히 복구했다. 이때 퇴계선생을 제사지내는 여강서원(廬江書院)도 수해를 입어 옛터에서 백여 보쯤 옮겨 다시 세우고, 자신의 봉록으로 노비와 기구를 넉넉히 장만했으니 존현흥학(尊賢興學)을 위한 그의 정성 이었다. 1608년 2월 선조가 승하하고 광해군(光海君)이 즉위하자 다시 성균관 대사성이 되고 1610년 한성부좌윤을 거쳐 대사헌이 되었다. 1610년 5월에는 조선조 5현(김광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을 문묘에 배향하였는데, 이는 백암이 여러 차례 배향의 계청(啓請)을 상소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그의 유도(儒道)에 이바지한 바가 크다 하겠다. 6월에는 봉사전(奉祀殿) 의절(儀節)문제로 직언하다가 광해군이 노하여 강릉부사로 좌천되었다. 백암이 강릉으로 길을 떠남에 원로대신들이 모두 시(詩)를 주며 이별을 아쉬워했고, 강연(姜挻: 榮川郡守) 은 '김공(金公)은 벽립천인(壁立千人)이라 이를만 하다'며 그 굳은 지조에 탄복했다. 1612년 4월 삭탈관직되 었다. 당시, 김직재가 역모로 무함된 옥사사건이 있어 영남의 영수 가운데 공빈 김씨의 추숭을 반대 한 인물들이 그 무옥(誣獄)사건에 관련된 혐의를 받게 되었고, 백암도 의금부에 잡혀갔다. 이 자리에서 그는 국문을 당함에 '추숭의전은 신이 입경하기 전의 일이므로 신이 논급할 바가 아닙니다. 의식 절차에 관해서는 종묘와의 차등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사실입니다'고 대답하여 곧 불칙한 화단이 떨어질 판이었는데, 이항복·이덕형·심희수 등 대신들이 극력 구원하여 삭탈관직되고 시골로 추방되었다. 직첩을 빼앗기고 향리인 이곳 영주에 돌아온 백암은 자연에 뜻을 두고 고요자적하면서 귀학정(현재 소방서 뒤 통일교 자리에 있다가 생가인 봉화군 문단 1리 사암에 옮겼다.)은 성안이 가까워서 조용히 지내기에 마땅치 못하다하여 작은 아들이 있는 천운정(天雲亭, 지금의 이산면 석포리)에서 만년을 지냈다. 1614년에 이항복이 광해군에게 '군주된 이의 위엄으로 사람을 죽이기는 쉬우나 사람의 입을 막기는 어려우니, 청컨데 김륵의 직첩을 환수하소서'라고 청해 공의 직첩이 환수되었다. 1616년 11월 15일 병을 얻어 이튿날 서거하니 향년 77세였다. 1620년 사림에서 귀성에 귀강서원(龜江書院)을 지어 백암과 문절공 (文節公) 김담과 소고 박승임(朴承任)을 함께 봉안하여 제사지냈으며, 1624년(인조 2년)에는 나라에서 정랑(正郞) 김영조(金榮祖)를 예관(禮官)으로 삼아 사제(賜祭)했다. 1653년(효종 4년)에 이 조판서겸 의금부·춘추관·성균관사·홍문관·예문관·대제학·세자좌빈객에 증직되었다. 1794년(정조 19년) 에 민절(敏節)의 시호가 내려졌다. 갈암(葛菴) 이현일(李玄逸)이 행장(行狀)을, 대사헌 권해와 풍원부 원군 조현명(趙顯命)이 신도비명을, 눌은(訥隱) 이광정(李光庭)이 묘지명을 각각 지었다. 저서로는 《백암집(栢巖集)》五冊이 있다.
영남안집사로 임진왜란을 극복하다
1592년(선조 25)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경상도 안집사(慶尙道安集使)에 임명된 백암은 초모문(招募文)을 집필하여 도내의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고 의병을 모아 왜적을 토벌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그리고 집경전(集慶殿)에 봉안되어 있던 임금의 초상을 청량산에 임시로 봉안하게 하고, 의성·예안·안동 등지에서 왜적을 격파하는 등 공로를 세워 이듬해 안동 부사(安東府使)에 제수되었다.
그는 안동에 머물며 가난한 백성의 구제 대책을 마련하고 군량을 수송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여 경상우도 관찰사에 올랐다가 곧이어 조정으로 돌아가 승정원 도승지·사간원 대사간·성균관 대사성에 연이에 임명되었다. 전쟁이 한창이던 1594년(선조 27)에는 사헌부 대사헌·이조 참판·홍문관 부제학 등 요직을 역임했으며, 1595년(선조 28) 부체찰사(副體察使)에 올라 수원·전주·남원·거창·진주·대구·창녕 등지를 순시하며 군졸들을 위무하고 전황을 살폈다. 이때 한산도(閑山島)와 거제도(巨濟島)에 들러 이순신(李舜臣)을 비롯한 수군의 활약상을 조정에 보고하고 이들의 전공을 치하하였다.
1598년(선조 31) 다시 대사간과 홍문관 부제학에 임명된 그는 선조의 경연(經筵)에 참석하여 학문을 강론하고 시세(時勢)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진달하였지만, 영의정으로 있던 유성룡의 무고함을 변호하다가 파직되어 고향으로 잠시 물러나기도 하였다. 1599년(선조 32)에는 형조 참판과 예조 참판을 거쳐 충청도 관찰사로 나가게 되었는데, 이때 이순신의 공로를 조정에 아뢰며 그 집안의 조세 부담을 감면해 줄 것을 청하였다.
광해군의 정치에 반대한 후 고향에서 생을 마치다
전쟁이 끝난 뒤 1600년(선조 33) 병을 이유로 고향인 영천(榮川)으로 물러난 뒤 백암은 월천(月川) 조목(趙穆)을 찾아뵙고, 오운(吳澐)·배응경(裵應褧) 등 벗들과 이산서원에 모여 강학에 몰두하였다. 이후 형조 참의에 제수되어 다시 조정에 나아가게 되어 호조 참판 및 주역 교정청(周易校正廳)의 관직을 맡게 되었고, 동지사(冬至使)에 임명되어 명나라에 건너가 전란 후유증의 수습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이후 안동도호 부사를 거쳐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되었고, 안동에 머물며 유성룡과 더불어 정몽주(鄭夢周)의 문집인 『포은집(圃隱集)』의 교정에 간여하였다.
1608년(선조 41) 대사성에 임명되어 서울로 올라간 그는 1610년(광해군 2)에는 대사헌에 올라 기축옥사(己丑獄事)에 연루된 동인(東人)의 억울함을 신원해줄 것을 청하였고, 이황과 이언적을 비롯한 5현의 문묘종사(文廟從祀) 논의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생모 공빈김씨(恭嬪金氏)를 왕후로 추존하려는 광해군의 뜻을 비판하다가 노여움을 입어 강릉 부사(江陵府使)로 좌천되었고, 이듬해 고향으로 물러났다. 그리고 1612년(광해군 4)에는 대북(大北) 세력이 꾸며낸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에 연루되어 심문을 받은 뒤 삭탈관직(削奪官職)되었다가 1616년(광해군 8)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백암선생문집』이 편찬되다
김륵의 생애와 사상을 담고 있는 유일한 저술인 『백암선생문집』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50여 년 만인 1772년(영조 48) 6대손 갈수헌 김위(金㙔)의 주도 아래 편찬·간행되었다.
김륵은 생전에 적지 않은 분량의 저술을 남겼는데, 임진왜란과 집안의 화재를 거치면서 상당 부분이 분실되었다고 한다. 이에 김위가 조카 김약련(金若鍊)과 김세련(金世鍊)의 도움을 받아 집안에 남아 있던 유고(遺稿)를 수습하여 6권으로 편집하였다. 김륵의 외손 김휴(金烋)와 종손(從孫) 김선(金鍌)이 편찬하였던 연보 및 부록 등을 덧붙여 4책으로 정리하고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의 교정을 거쳐 목판으로 간행한 것이다.
본집 6권과 보유(補遺)·연보(年譜)·부록(附錄) 등 도합 4책으로 이루어진 『백암선생문집』의 체제를 살펴보면, 우선 앞머리에는 당시 퇴계 학파의 거장이던 이상정이 본서의 편찬 경위에 대하여 약술한 서문 및 본서의 내용을 정리한 목록이 수록되어 있다.
권1에는 「차귀거래사(次歸去來辭)」 등 사(辭) 1편, 「지수부(止水賦)」 등 부(賦) 1편과 「와룡암행(臥龍菴行)」 등 시(詩) 98제가 저작 연대순으로 편차되어 있으며, 권2에는 「차황경명황강류운(次黃景明黃江留韻)」을 비롯한 94제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이들 시 가운데에는 1577년(선조 10) 조정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내려오던 길에 단양(丹陽)을 유람하며 지은 「서정록(西征錄)」, 같은 해 대마도(對馬島) 왜상(倭商)의 호송관(護送官)으로 동래(東萊)에 다녀올 때 남긴 「남정록(南征錄)」, 1579년(선조 12) 단양과 청풍(淸風) 일대를 유람하며 남긴 「서정록(西征錄)」, 이듬해 휴가를 얻어 성묘를 다녀오던 길에 남긴 남「환록(南還錄)」, 1602년(선조 35) 동지사로 사행하였을 때 지은 「조천록(朝天錄)」, 북한산을 둘러보고 남긴 「화산록(華山錄)」, 강릉 부사로 좌천되었을 때 지은 「임영록(臨瀛錄)」 등 기행시가 많은 점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문집의 권3에는 지제교(知製敎)로 재직하며 임금을 대신하여 지은 교서(敎書) 2편과 시국(時局)에 대한 진단을 담은 소(疏) 8편 및 차(箚) 5편, 그리고 권4에는 차(箚) 4편과 계사(啓辭) 3편, 권5에는 장계(狀啓) 10편과 정문(呈文) 7편 등, 김륵이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 관직에 나아가 나라를 이끌어가는 방향에 관한 의견을 개진하였던 글들이 실려 있다.
그 가운데 영월 군수 시절 거듭된 천재지변으로 고초를 겪는 백성들을 구제할 구체적 방도에 대하여 아뢴 「영월군진폐소(寧越郡陳弊疏)」, 1583년(선조 16) 동서분당(東西分黨)에 대한 시비를 명확히 할 것을 청한 「옥당청명변시비차(玉堂請明辨是非箚)」, 임진왜란의 와중에 화의(和議)를 배격하고 의리와 기강의 확립을 강조한 「사헌부진시무차(司憲府陳時務箚)」, 1610년(광해군 2)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彥迪)·이황(李滉) 등 5현의 문묘종사를 청원한 「청본조오현종사문묘계(請本朝五賢從祀文廟啓)」, 임진왜란 당시 경상 도안집사로 재직하며 전황(戰況)에 대한 의견을 보고한 「조진경상도군정적세장계(條陳慶尙道軍情賊勢狀啓)」, 중국에 갔을 때 왜란의 경과에 대한 명나라 병부 상서(兵部尙書) 소대형(蕭大亨)의 질문에 답하였던 「답병부문목(答兵部問目)」 등은 16세기 중반 조정의 동향 및 국제 정세에 대한 김륵의 인식을 담고 있는 자료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권6에는 김륵의 개인적인 저술들, 즉 지인들과 주고받은 서(書) 10편을 비롯하여, 임진왜란 발발 당시 지은 초모문(招募文)과 서(序)·전(箋)·상량문(上梁文)·제문(祭文) 등 총 19편의 잡저(雜著)가 있다. 그리고 그 뒤에 수록된 보유(補遺) 중에는 시 4제·서(書) 1편이 실려 있다.
후인들이 김륵의 생애를 정리하고 그가 남긴 공적을 기린 글들을 모아 편찬한 부록은 김휴 등이 편찬한 연보 및 부록 상·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부록 상편에는 1624년(인조 2) 국왕이 내린 사제문(賜祭文)을 비롯하여, 여러 서원의 유생과 문인들이 그의 죽음을 추모한 제문 6편, 정구(鄭逑)·이호민(李好閔)·이항복(李恒福) 등이 찬술한 만사(輓詞) 33편, 김영조(金榮祖)가 지은 향현사(鄕賢祠)의 봉안문(奉安文)과 상향축문(常享祝文) 등 42편의 글이 수록되어 있다.
부록 하편에는 권해(權瑎)와 조현명(趙顯命)이 지은 신도비명(神道碑銘) 2편, 권두인(權斗寅)과 이광정(李光庭)이 지은 묘지명 2편, 김륵의 생애와 관련된 일화들을 모아 놓은 기문록(記聞錄), 「도내유생소(道內儒生疏)」, 「증행편(贈行篇)」, 「의김모사제강릉부사전(擬金某謝除江陵府使箋)」 등 벗들이 그에게 지어준 3편의 글 등이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권말(卷末)에는 1772년 김위가 본서의 편찬이 이루어지기까지의 경과에 대하여 서술한 발문(跋文)이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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