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하신 두 사람은 각각 대만과 중국의 고고학자 서량지(徐亮之)와 엄문명(嚴文明)입니다. 서량지는《중국 선사시대사 이야기(中國史前史話)》라는 책을
1956년에 대만에서 발표했으며, 엄문명은 현재 북경대학의 고고문박학원(考古文博學院) 교수로서 최근에 활동하는 학자인데 대표적인
저서로는《앙소문화연구(仰韶文化研究)》(文物出版社,1989年),《선사시대 고고학논집(史前考古论集)》(科学出版社,1998年),《21세기의 고고학을
향하여(走向21世纪的考古学)》(三秦出版社,1997年),《농업발생과 문명기원(農業發生與文明起源)》(科學出版社, 2000)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인터넷에서 어떤 말이 떠돌고 있길래 질문을 하셨을까 궁금해서 저도 네이버를 찾아보았습니다. 현재 네티즌 사이에서 돌고 있는 서량지와 엄문명의 발언은
“중국고대사와 은나라의 역사는 동이족의 역사임을 인정했다”는 것인데, 실제 몇몇 필자들이 직접 들었다고 하는 내용을 몇 가지만
소개를 해봅니다.
필자가 작년 北京에 갔을 때, 북경대학 교수였던 엄문명(嚴文明) 고고학 주임교수와 대담을 한 일이 있는데, 대담
중에도, 그의 저서와 논문에도 분명히 중국은 동이문화(東夷文化)라고 밝히고 있다. 그것이 바로 앙소문화(仰韶文化)이다. 앙소문화란 아름다운
문화를 바라본다는 뜻이다.
한글재단 이사장인 한갑수 박사가 미국 공군지휘참모대학에 입교했을 당시 같은 입학생인 중국 학자 서량지(徐亮之)가
한박사를 찾아와 말하기를 "귀국 한민족은 우리 중국보다 더 오래된 역사를 가진 위대한 민족인데 우리 중국인이 한민족의 역사가 기록된
포박자(抱朴子)를 감추고 중국역사를 조작하는 큰 잘못을 저질렀으므로 본인(서량지)이 학자적 양심으로 중국인으로서 사죄하는 의미로 절을 하겠으니
받아달라며 큰 절을 올렸다.
본인이 직접 들었다고 하는 내용이기에 그대로 믿을 수밖에 없지만, 서량지와 엄문명 교수의 진술을 가지고 “중국의 학자들이 은나라와 중국 고대사는 한국의 역사라고 인정했다”라는 식으로
확대 해석한다면, 이것은 상당한 “아전인수(我田引水)”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그동안의 고고학적인 연구 성과를 모를 리가 없는 엄문명 교수가 현재 중국 고고학계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다중심(多中心) 발전론”
내지 “중국문명의 다(多)기원설”을 부정하고, “중국은 동이문화”라는 편협한 시각을 술회했다는 것 자체도 믿을 수 없습니다. 실제 “다중심 발전론”을 주창한 것은 바로 엄문명 교수
자신이었기 때문입니다. (嚴文明, <중국 선사시대 문화의 통일성과
다양성(中國史前文化的統一性與多樣性)>,《文物》1987-3)
만일 엄문명 교수가 “동이족이 중국문화의 형성에 참여했다”고 말했다면 그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데, 주의할 것은 그가 말하는 “동이문화”는 “韓민족의 문화”가 결코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엄문명 교수는 1989년 《文物》지에 게재된 논문 <동이문화의 탐색(東夷文化的探索)>에서《후한서》의
저자인 범엽을 비판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범엽이 중국문명의 형성에 기여한 동이(저는 편의상 이것을 동이Ⅰ이라고 하겠습니다)와 한대 이후 부여, 읍루, 고구려, 옥저, 예, 삼한, 왜
등을 지칭하는 동이(동이Ⅱ)를 《후한서》<동이전>에서 함께 기술함으로써 마치 동이Ⅰ과 동이Ⅱ가 직접적인 계승 관계가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즉, 엄문명
교수는 동이Ⅰ과 동이Ⅱ의 종족적인 친연성을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더군다나 엄문명 교수는 현재 삼황오제의
신화시대를 역사로 편입시키려는 "중국고대문명탐원공정"의 거두(巨頭)입니다.)
다음으로는 서량지 교수의 발언에 대해서 몇 가지만 언급하겠습니다.
(1) 서량지 교수는 우리 민족의 역사가 담겨 있는 《포박자(抱朴子)》를 중국인들이 감췄다고 합니다. 이것이 정말 서량지 교수가 한
말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포박자의 내편과 외편은 각각 신선․단약․양생, 그리고 사회 풍속에 대한 비판과 인간의 윤리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는 종교서 내지는 윤리서인데, 여기에 우리 민족의 역사가 끼어들 수 있는 여지도 없거니와 제가 직접 훑어보아도 도대체 《포박자》의
어느 부분에 우리 민족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는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2) 서량지 교수의 《중국사전사화》에서 동이와 관련한 주장들은 몇 가지로 추려볼 수 있습니다. 1. 소호금천씨는 동이 부족 최초의
맹주였다. 2. 중국의 역법은 동이에서 창시되었다. 3. 하족과 동이족의 세력 각축에서 화족이 동이를 이겼고, 동이는 하족의 서쪽, 지금의 섬서
지역으로 유입되었다. 4. 소호씨는 황제족(=화하족)이 아니며, 그 자손들은 동이 지역에 흩어져 살았다. 5. 전욱고양씨는 동이화된 황제족이다.
6. 고구려는 제곡고신씨의 후예이다. 7. 전욱과 제곡은 이하를 평화적으로 통일한 위대한 인물이었다. 이상과 같은 견해들은 네티즌들이
“중국문명의 원조는 우리 민족이다”라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근거로 이용하고 있지만, 신석기 문화에 대한 서량지의 기본적인 인식, 그리고
동이문화에 대한 다음과 같은 결론을 상기하면 이것은 “단장취의”(斷章取義)라는 비난을 면치는 못할 것 같습니다.
중국 선사시대 사회는 신석기 시대로 진입하여 더욱 번성하였다. 중국의 정통문화는 각종의 단원문화(單元文化)가
용주(鎔鑄)되어 형성된 것이다. 이러한 융합과정은 전체 신석기 시대를 관통하고 있으며, 금석(金石) 병용의 시대 혹은 청동기 시대에 이르러서
이미 기본적으로 완성되었다. 중국의 신석기 시대에는 다음과 같은 8종의 중요한 단원문화가 있었다. (중략) 더욱이 대서특필한 만한 것은
정치상으로 토템 연합에서 부족 연맹의 중앙기구가 성립되었다는 것인데, 이것은 역사시대 중국이 찬양하였던 “대일통주의(大一統主義)”를 설명하는 것이며,
신석기시대에 이미 대일통주의가 완성되었던 것이다. 중국 신석기 시대 말기의 정치적 이하일체(夷夏一體), 문화적 동서교류는
오늘날 중국민족을 조성하는 골간(骨幹)이었으며, 중국 정통문화가 생육하게된 원인이었다. 동시에 동이족의 화평활발(和平活潑)함과 화하족의
관인강의(寬忍剛毅)함, 그리고 양대 부족이
선사시대에 혼합하여 이룩한 “정성스러운 단결”은 오늘날 대국(大國)의 기백을 가진 중국의 국민성을 조성하는 기본 요소였다.
(徐亮之, <중국 신석기시대의 기본인식(中國新石器時代的基本認識)>,
《中國史前史話》pp.161-162.)
(전략) 그 정치이상은 채도문화, 대석문화의 서방 부족과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동서의 “이하일통”(夷夏一統) “이하일가”(夷夏一家)의 원대한
이상은 중국 신석기시대에 이미 실현되었다. (후략) (같은 책, <회도문화와 동이(灰陶文化與東夷)>의 맺음말 부분,
p.267)
즉, 서량지는 시종일관 신석기 시대
중국문화의 “대일통주의”를 주장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주장은 이 책이 출판된 시기(1956)를 포함하는
1950-60년대 대만의 대륙정책, 즉 “반공복국(反共復國)”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추측됩니다만, 어쨌든 이것은 신석기 시대 이래 현재 중국의
영토내에서 활동한 여러 민족 집단을 사실상 하나의 “자재적 민족(自在的民族, 원래부터 있었던 중국 민족)”으로 간주하는 대륙학자들의 주장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오늘날
중국 영토내의 모든 민족은 과거에도 기본적으로 중국민족이며, 그들이 역사적으로 현재 중국의 영토내에서 거주하였던 이상 현재의 중국영토는 과거에도
중국의 영토였다는 주장까지 도출될 수 있습니다. (白壽彛, <중국민족관계상의 몇 가지 문제에
대하여(關于中國民族關係上的幾個問題>,《中國民族關係史硏究》(中國社會科學出版社, 1984) 范文蘭, <중국역사상의 민족투쟁과
융합(中國歷史上的民族鬪爭與融合>, 《歷史硏究》1980-1 등)
이쯤되면 중국고대사는 韓 민족(=동이족?)의 것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서량지와 엄문명 교수의 발언을 이용한 사람들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근거를 대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있을 겁니다. 이것은 한 마디로 대의(大義)를 파악하지 못한 채 자기 입맛에 맞는 말만 골라서 취한
전형적인 왜곡의 사례입니다.
환빠들이 서량지만 보면 하악하악거린다는 말을 듣고
과연 어떤 사람일까 궁금하여 그의 저서를 들춰보았소.
다음 글을 읽고도 과연
서량지가 환빠들의 우방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지???
중국 선사시대 사회는 신석기 시대로 진입하여 더욱 번성하였다. 중국의 정통문화는 각종의 단원문화(單元文化)가
용주(鎔鑄)되어 형성된 것이다. 이러한 융합과정은 전체 신석기 시대를 관통하고 있으며, 금석(金石) 병용의 시대 혹은 청동기 시대에 이르러서
이미 기본적으로 완성되었다. 중국의 신석기 시대에는 다음과 같은 8종의 중요한 단원문화가 있었다. (중략) 더욱이 대서특필한 만한 것은
정치상으로 토템 연합에서 부족 연맹의 중앙기구가 성립되었다는 것인데, 이것은 역사시대 중국이 찬양하였던 “대일통주의(大一統主義)”를 설명하는 것이며, 신석기시대에 이미 대일통주의가 완성되었던 것이다.
중국 신석기 시대 말기의 정치적 이하일체(夷夏一體), 문화적 동서교류는 오늘날 중국민족을 조성하는 골간(骨幹)이었으며, 중국 정통문화가
생육하게된 원인이었다. 동시에 동이족의 화평활발(和平活潑)함과 화하족의 관인강의(寬忍剛毅)함, 그리고 양대 부족이 선사시대에 혼합하여 이룩한 “정성스러운 단결”은 오늘날 대국(大國)의
기백을 가진 중국의 국민성을 조성하는 기본 요소였다. (徐亮之, <중국 신석기시대의
기본인식(中國新石器時代的基本認識)>, 《中國史前史話》pp.161-162.)
(전략) 그 정치이상은 채도문화, 대석문화의 서방 부족과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동서의 “이하일통”(夷夏一統) “이하일가”(夷夏一家)의 원대한 이상은 중국
신석기시대에 이미 실현되었다. (후략) (같은 책, <회도문화와 동이(灰陶文化與東夷)>의 맺음말 부분,
p.267)
결국 환빠들은 위대한 중화문명에 스스로 흡수되기를 자청하는 꼴이 되겠구려. 껄껄껄.
첫댓글 서량지와 엄문명 두 교수를 왜곡에 반대하는 양심있는 교수라고 본다면 첫째 의문이 해소되는 것이고, 동이1과 동이2가 다르다는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 단지 다를수있다는 추측이기에 이건 비전문가의 개인적소견에 불과하고, 포박자에 우리민족의 예기가 들어갈 이유가 없다는 것도 그리 명철한 접근은 아닌 추측일뿐이고(한족과 우리민족은 항시 거의 맞대고 있기에 다루지 않아도 상관없으니 다룰 이유가 없다고 단언하는건 사실전황에 비추어볼때 말이안맞죠. 다루어도 이상할게 없는게 이치상 맞죠. 공자마저 동이를 언급했는데 말입니다. 이는 지리적 밀접함과 함께 사상적으로도 영향을 주고받음이 있었단것이죠.)... 이정도만 합니다.
부정을 위한 부정이라는 함정에 빠지기 이전에 하나하나 명철하게 따져보는것 부터 우선하면 좋을듯싶습니다.
뒤에 이제 동이+화하족이 한족을 형성했고, 현재의 중국이 되었다는 논리를 폄으로써 동북공정의 기반을 만들었는데, 이것은 앞에서 역사적 사실관계들을 열거한 이후에, 뒤에 자신들의 입맛대로 정리를 한 것으로, 그렇게 우리가 이해하고 대처하면 되는것입니다. 뒤에 병맛으로 정리했다고 앞서 주장한 것이 거짓이라는건 아니지요. 뭐 그 하나하나는 우리도 검증하겠지만요. 이런 중국의 역사정리 입장은 심히 경계해야하는 거지만, 그 핵심을 알면 쉽게 간파가 되는(왜냐하면 억지 짜집기이기에) 거라고 생각됩니다.
중국은 동이를 언급하면서 우리의 존재를 애써 숨기고 있습니다. 동이의 후예가 현재의 우리 대한민국과 북한을 위시한 북방계 민족이라고 한다면, 중국의 주장은 완파되기에 충분하죠. 중국은 동이+화한족이라고 했지만 동이가 버젓이 다른 국가로 정통을 이어받아 존재하고 있다는걸 그들의 주장과 합하면, 자연스레 그들의 논리는 무너지죠! 쉽게말해 동이족의 정통후손은 대한민국과 몽골등이고, 옛날 동이족의 일부가 중국의 형성에 도움을 주었다고 정리하면, 역사적으로도 완벽하게 들어맞고 한치의 곡해도 없는 해석이 되는거지요. 이렇듯 동북공정은 허술하기 짝이없는 중화주의의 찌끄러기일뿐입니다. 겁낼거 없다고 봅니다
우리들이 우리들의 역사를 제대로 알고 단단히 결속하고있기만 한다면... 그렇지 않기에 두려울뿐. 알고 제대로 대처하면 그들이 만들어낸 것들 속에서 우리가 쓸것만 뽑아먹고 이용해먹고 굴려먹기에 안성맞춤이지요. 모르니 그들의 주장을 두고 어찌해야하는지 뭐가 맞는지 틀린지 헤매기만 하다가 당하게 되는겁니다. 우선은 모든 전방위의 자료를을 다각도로 점토하고 점증해야 할 판국에 그렇게해도 희미한 흔적을 볼까말까 할 처지인데, 위서라고 딱 목밖은 책들만 여러권... 그리곤 도저히 더이상 조각이라곤 찾을수 없는 사서 몇권이나 되넘겨보면서 유물 또 뭐나오나 기다리고만 있고... 그러다 동북공정이 성공리에 완수되어 버리는게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퍼즐을 맞출때 모든 조각들을 펼쳐놓고 맞추지. 200조각짜리 퍼즐을 맞출때 10조각만 이리보고 저리보고 하면서 맞추려고 애쓴다고 수가 보이겠습니까? 답답할뿐이고...
저런 학자들의 글이 무슨 절대적인 의미를 갖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