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준석 신부
세상의 빛과 소금
미국의 신학자이며 사회학자인 토니 캄폴로 박사가 95세 이상 된 사람 50명에게 “만약 다시 태어난다면 어떻게 살기를 원하는가?”에 대하여 조사를 했다고 합니다.
이 조사에 응한 사람 대부분이 다음과 같은 답을 했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날마다 반성하는 삶”을 살겠다는 것입니다.
이는 아무런 되새김 없이 무심코 흘려보낸 시간들, 그 시간들이 얼마나 아까운가를 새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사실 지나온 하루를 돌아보며 자신을 반성하고 더 나은 내일을 계획하는 삶은 하루하루를 아름답고 가치 있게 만들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용기 있는 삶”을 살겠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눈앞의 이익을 좇아 양심을 버리고 불의와 타협했던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세상을 살면서 진실을 말할 용기가 없어 외면하며 산 날들이 인생의 막바지에 와서 뼈아픈 상처가 되어 돌아온 것입니다.
세 번째는,
“죽은 후에도 무언가 남는 삶”을 살겠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목표를 세우고 꿈을 꾸며 힘들게 달려왔지만 그게 다 물거품처럼 없어지고 마는 허망한 것들 이었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진정 가치 있는 것들을 꿈꾸며 살겠다는 말입니다.
“다시 태어난다면?”, “날마다 반성하는 삶”, “용기있는 삶”, “무언가 남는”, 즉 “참된 가치를 추구”하며 살겠다는 이들의 대답에서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라는 것입니다. 소금은 값싸고 흔한 것이지만 음식에 없어서는 안 되는 절대 필수물이 바로 소금입니다.
아무리 좋은 음식물도 부패를 막고, 맛을 내는 소금이 없으면 모두 다 외면해 버립니다. 세상에서 바로 이 소금의 역할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빛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흔한 것이지만 우리 인간의 삶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 바로 빛입니다.
빛이있어야 어둠 속에서 사물을 볼 수 있고, 빛이 있어야 따뜻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듯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둔 세상을 환히 밝히고 차갑게 얼어붙은 세상을 따뜻이 녹이는 역할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저절로 우리가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어떤 커다란 일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일상에서 무수히 반복되는 평범한 일상을 날마다 반성하고 새로움을 향해 나아간다면,
어려움 가운데서도 기쁨의 씨를 뿌리고 선을 행할 용기를 갖는다면,
그리고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세상의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남을 참된 진리를 추구한다면,
이러한 사람들은 이미 어떠한 말이나 행동이 없더라도 이미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는 것이 아닐까요?
“너희도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서울대교구 고준석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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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 신부
<빛과 소금이 되려면>
어릴 때 선생님들께서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 보시곤 했습니다. 그러면 이순신 장군, 세종대왕, 유관순 누나 등을 말하곤 했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존경할 만한 사람들이 별로 없다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오늘 저는 존경받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았으면 합니다.
존경받는 사람의 조건은 여러 가지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첫째로는 그 사람의 직책이 있습니다. 많은 공부가 필요하고, 그 직책이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며, 그러한 직책이 일정한 부와 명예를 보장해주기도 합니다. 대통령, 장관, 국회의원, 판사, 의사… 등이 있겠습니다.
둘째는 한 분야에서 오랜 정진 끝에 경지에 이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운동 분야에 이런 사람들이 있고, 학문을 연마하는 사람 중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으며, 요즘에는 예술과 컴퓨터 분야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각 분야에서 최선을 다한 사람, 그러면서 일정한 경지에 이른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명예의 전당'에 추대되기도 합니다.
셋째로는 특정한 직책에 있지는 않고, 그렇다고 한 분야에서 입신의 경지에 이르지도 않았지만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대게 이런 사람들은 청렴하며, 희생과 봉사 정신이 뛰어나고, 남에 대한 배려가 크며, 자신의 이익보다는 공공의 이익을 먼저 생각합니다. 이런 분들은 겉으로 눈에 띄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그 향기가 은은하면서도 멀리 퍼지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런 분들 때문에 때로 슬픔 속에서도 웃음을 지을 수 있으며,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어떤 조건에서 존경을 받아야 하는지 생각해 봅니다. 신앙인들이 자신의 직분과 직책 때문에 존경을 받을 수도 있겠습니다. 신앙인들이 자신의 분야에서 경지에 이르러 존경을 받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은 세 번째 이유로 존경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2000년 역사를 지닌 교회는 오늘도 주님의 사랑 안에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고자 합니다. 그 빛과 소금은 엄청나게 많은 돈이 들어간 교회의 건물 때문에 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신문에 자주 오르내리는 몇몇 사람들 때문에 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드러나지는 않지만, 그리스도의 향기를 이웃에게 전하는 그런 분들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 교회가 그 이름값을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새로운 한해를 시작하는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돼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하면 너희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 참으로 아름다운 말입니다. 새로운 한해를 시작하는 우리들에게 주님께서 들려주시는 덕담이라 생각합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주고 있습니다.
'초는 자신의 것을 다 태워서 빛을 비추어 줍니다.
소금은 모든 것을 주고 녹아야 맛을 냅니다.' 빛과 소금처럼 모든 것을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내어주신 그리스도 십자가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어리석어 보이는 십자가의 삶이 바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길이라고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올해에는 지방자치 단체장을 뽑는 선거가 있습니다. 여당과 야당은 선거를 준비하면서 국민들에게 새로운 공약을 준비할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발전과 성장의 그늘에 가려서 소외된 이웃을 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정부는 '의료, 교육, 육아, 주택'과 같은 부분에서 국민들을 위한 복지를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선택적 복지이든 보편적 복지이든 우리 사회가 발전과 성장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 것은 선진 국가를 향한 발걸음을 시작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교회는 더더욱 세상의 빛과 소금이 돼야 합니다. 각 지역에 있는 본당과 교회 시설들은 세상의 등대가 돼야 합니다. 지치고 힘든 이들에게 사랑의 빛을, 희망의 빛을, 믿음의 빛을 밝혀줘야 합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등대지기가 돼야 합니다. 그 삶이 비록 외롭고 고단할지라도 우리는 기꺼이 소금이 되어 모든 것을 내주었던 제2의 이태석 신부가 돼야 합니다.
제2의 마더 데레사가 돼야 합니다. 사랑이 없는 복지, 희생이 없는 복지, 십자가 없는 복지는 포장은 예쁠지라도 알맹이가 없기 마련입니다. 구호는 멋질지라도 공허한 메아리가 되기 마련입니다.
서울대교구 조재형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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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공석 신부
“여러분은 세상의 소금입니다."
“여러분은 세상의 소금입니다. 그러나 소금이 싱거워지면 무엇으로 그것이 짜게 되겠습니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싱거워진다”라는 동사는 원문에 “어리석어진다”라는 단어입니다.
마태오복음서가 “어리석다”고 말할 때는 실천을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도 그대로 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을 것입니다”(마태 7,26)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신앙인을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하는 것은 신앙인의 실천이 세상을 변하게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은 “여러분은 세상의 빛입니다”라고도 말했습니다. 빛은 어둠을 밝힙니다. 초기 신앙인들은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이 세상의 빛이라고 말했습니다.
복음서가 예수님의 제자들을 세상의 빛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들도 그분의 뒤를 따라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실천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보면 소금과 빛, 이 두 개의 단어가 모두 신앙인의 어떤 실천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소금은 자기 스스로를 지키지 않고, 용해되어 음식의 맛을 바꾸어 놓습니다.
빛은 자기 자신을 과시하지 않고, 오히려 스스로를 소모하여 어둠을 쫓아내고, 어둠으로 가려졌던 사물을 볼 수 있게 해줍니다. 신앙인이 소금이고, 빛이라는 말씀은 그리스도인은 스스로를 소모하여, 다른 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실천을 한다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은 마태오복음서의 “행복 선언”(5-12)에 이어 나오는 말씀입니다. 소금과 빛으로 있기 위해 요구되는 구체적 실천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그 행복 선언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 선언은 가난한 사람, 슬퍼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 의로움에 목말라하는 하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하였습니다.
이 선언이 의미하는 바를 실천하는 사람이 세상의 소금이고 빛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선언들은 지켜야 하는 계명도 아니고, 수양해야 하는 덕목도 아닙니다. 예언적 선언이고 권고입니다. 신앙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생명을 우리 삶 안에 실천하는 마음가짐입니다. 하느님은 인간 자유를 무시하고 인간에게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우리 모두가 같은 계명을 지키고 같은 덕목을 수행하면서 획일적으로 살 것을 요구하지도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에 다양함을 만드셨습니다.
많은 피조물이 있고 다양한 생명들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동일하게 보는 획일적 강요는 생명을 위축시킵니다. 그리고 그 획일성의 강요는 인간의 창의력도 말살합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억압하는 군주(君主)가 아니십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자유롭게 살 것을 원하셔서 창조에서 이 세상 안에 다양함을 뿌리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군림하지 않고 숨어 계십니다. 하느님은 우리 각자가 자유로운 실천으로 소금과 빛이 되어 세상에 살 것을 원하십니다.
예수님도 자유롭게 사신 분이었습니다. 그분은 주어진 계획대로 살지 않으셨습니다. 유대교가 요구하던 계명에 얽매여 살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일을 당신의 창의력을 동원하여 자유롭게 또 다양하게 실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병든 이를 만나면 그 병고를 덜어주고, 죄인으로 낙인찍힌 이를 만나면 죄의 용서를 선포하셨습니다.
율법을 못 지켜서, 직업이 세리라서 소외당하는 이들을 만나면 그들과 어울리셨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은 사람들에게 기쁨이고 해방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 당부하신 말씀도 기쁜 소식을 전하고 병을 고쳐 주며 죄를 용서해 주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실천하신 바를 제자들도 실천하여 사람들을 변하게 하는 소금이 되고, 사람들이 진실을 보게 하는 빛이 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복음서는 먼저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가난한 사람은 재물을 자기 삶의 보람으로 생각하지 못 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재물은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 필요합니다. 많이 가지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필요할 때 쓰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많이 가지겠다는 욕심으로 그것을 목적으로 삼아버립니다. 복음은 그런 욕심에서 해방될 것을 권합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은 가진 것을 하느님의 선물로 보고 그것을 이웃과 나눕니다.
복음서는 슬퍼하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했습니다. 신앙인은 이 세상에 고통과 슬픔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입니다. 그런 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겪는 아픔을 함께 겪으면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빕니다. 복음서는 또한 온유한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했습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이 함께 계시기에 무슨 일에도 자기를 기준으로 최종적 판단을 하지 않습니다. 이웃의 생각을 알아듣기 위해 온유하게 경청하고, 이웃과 더불어 하느님의 자녀로 살기 위해 노력합니다.
복음서는 의로움에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도 행복하다고 말했습니다. 하느님이 베푸셔서 우리가 있기에 신앙인은 자기 자신도 이웃에게 베푸는 노력을 합니다.
성서가 말하는 의로움은 하느님이 베푸셨기에 우리도 베푸는 데에 있습니다. 복음서는 마음이 깨끗한 사람과 평화를 이룩하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했습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욕심 없는 사람입니다. 평화를 이룩하는 사람은 자기를 기준으로 사람들에게 강요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기에 자기를 기준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먹고 살 수 있고, 품위를 유지할 재물이 있어서 사람답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내 한 몸이 편하게 살 수 있어서 사람의 도리를 다 하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이웃보다 강하고 높아서 성공한 것도 아닙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이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자기의 삶 안에 받아들여 실천합니다.
신앙인은 소금과 같이 자신을 용해시키면서, 하느님이 함께 계시면 어떤 섬김이 발생하는 지를 세상이 맛보게 합니다. 빛과 같이 자기 자신을 소모하여, 주변에 있는 욕심의 어둠을 사라지게 하고, 세상이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자유로운 마음을 보게 합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하느님께 빌어서 자기 욕심을 채우는 길이 아닙니다. 신앙은 삶을 변하게 합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자유를 누리며 삽니다. 신앙인은 지키고 바치는 일에 전전긍긍하지 않습니다. 신앙은 예수님에게서 배운 실천을 하게 합니다.
우리의 실천은 우리 주변 사람들의 실천에도 영향을 줍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세상의 소금입니다”는 오늘 복음의 말씀이 있습니다.
욕심의 어둠이 사라지면 함께 계시는 하느님, 불쌍히 여기고 가련히 여기시는 하느님의 일이 우리의 실천 안에 드러납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세상의 빛입니다”는 오늘 복음의 말씀이 있습니다.
부산교구 서공석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