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사야의 성소(聖召) | 2. 이사야의 시대 |
3. 종교와 정치 | 4. 비전(非戰)과 평화 |
5. 예루살렘의 에워싸임 | 6. 이사야의 희망 |
1. 이사야의 성소(聖召)
이사야는 기원 전 제 8 세기 후반에 활동한 유다의 예언자(豫言者)로서, 예레미야보다 훨씬 앞선 120 년쯤 이전의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사무엘 이래 크고 작은 예언자가 알프스의 봉우리처럼 잇달아 나타났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사람은 이사야와 예레미야였습니다. 예레미야에게 매터호를 같은 깊이가 있다고 하면, 이사야에게는 몽블랑 같은 크기가 있었습니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계시를 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이를 국민에게 전하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국민의 장래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도 전했지만, 미래의 사건을 예견하는 것만이 예언자의 사명의 특색이라 할 수는 없지만, 과거, 현재, 미래를 가리지 않고,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의사를 말하는 것이 예언자의 임무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언자”라는 역어(譯語)는 부정확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유럽 말로 prophet(代言者)라는 쪽이, 원어(原語)의 뜻에 가깝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종교 생활의 지도자로서는, 따로 제사(祭司)라는 계급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아론의 후손이 세습적으로 그 지위를 계승한 직업적 종교가이며, 율법에 규정된 방식에 따라 제사와 예배의 행사를 주재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세습적 직업 종교가의 상례(常禮)로, 율법의 문자에 사로잡혀 정신을 잃고, 형식적 종교로 타락하여 신앙의 생명을 잃어버릴 우려가 있었습니다. 그 폐해에 대항하여 일어선 것이 예언자입니다.
예언자는 제사와 같이 그 출신의 집안이 한정되어 있지 않고, 또 세습도 아닙니다. 예레미야와 같이 제사의 아들도 있었으나, 아모스와 같은 농부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신전(神殿)에 빌붙어 생활하는 직업 종교가가 아니라, 혹은 난록가에서, 혹은 밭에서, 하나님의 직접 부르심에 의해서 선출된 하나의 독립한 인간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산 신앙과 야웨에 대한 진실 이외에 아무런 임용의 자격도 조건도 없었습니다. 그들의 권위는 율법이 아니라 영감(靈感)에서 우러나왔습니다. 그들의 활동은 제사-예배에 국한하지 않고, 널리 정치와 국민 도덕의 전반에 걸쳤습니다. 그들의 시야는 이스라엘 민족에 그치지 않고, 당시에 알려진 세계 여러 나라에 미쳤습니다. 정치기와 종교가와 국민 전체에 대하여 자유 독립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代言)하고, 하나님의 정의(正義)를 땅 위에 이루기 위하여 생애를 바친 사람, 이들이 이스라엘의 예언자였습니다. 그리고 이사야는 그 중에서도 최대의 예언자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사야의 아버지 이름은 아모스라고 적혀 있을 뿐, 그 가문도 경력도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다만 이사야의 예언의 내용이 도시 생활에 관한 것이 많고, 예루살렘의 지리에 밝은 점으로 미루어, 그가 대체로 수도 예루살렘의 주민이었으리라 상상됩니다. 또 그의 예언이 상류 계급의 생활에 통하고 있기 때문에 그 자신 귀족계급이거나, 또는 그에 접근할 수 있는 지위에 있었다는 짐작은 무리는 아닙니다.
이사야가 처음 예언자로서 소명(召命)을 받은 것은, 웃시야 왕이 죽은 해, 곧 기원 전 740 년입니다. 그때 그의 나이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20 세 전후로 생각해도 좋을 것입니다. 경건하고 다감 예민한 청년 이사약, 혼자 예루살렘 신전에서 예배를 드리려 머리를 조아리고 있을 때 홀연히 높은 좌석에 야웨가 앉아 계신 환영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낯은 영광에 빛나 우러러 볼 수도 없지만, 그 옷자락은 성전 안에 차고, 스랍(천사의 일종)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들로써 낯을 가리고, 그들로써 발을 가리고, 그들로써 날면서, 서로 호응하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야웨여.
그 영광이 온 땅에 가득차다.
고 하고, 그 부르는 소리는 신전의 문지방의 기초를 흔들고, 신전 안에 연기가 가득 찼습니다. 이 장엄한 광경을 보고, 이사야는 반사적으로 자기의 부정(不淨)을 자각했습니다. 그는 외쳤습니다.
화(禍)로다. 나는 망하리로다!
나는 더러운 입술을 가진 자로서,
더러운 입술을 가진 백성 가운데 살도다.
나의 눈이 만군의 야웨, 왕을 뵈었음이로다.
이렇게 말했을 때, 스랍 중의 하나가 화저로 제단 위에서 숯불을 집어 이사야에게 날아와, 그 입에 대고 말했습니다.
보라, 이 불이 네 입술에 닿았으니, 네 악은 사라지고 네 죄는 지워졌다.
그때 이사야는 야웨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말씀하시기를,
누구를 내가 보내랴,
누가 우리를 위해 갈까.
즉시 그는 대답했습니다.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보내 주소서.
이리하여 이사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예언자로서 국민 앞에 보내어지게 되었습니다.
야웨는 이사야에게 예언자로서의 사명을 자각시킴과 동시에, 국민에게 고할 말을 알려 주셨습니다. 곧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리 고하라.
너희들은 들어라, 그러나 깨닫지 말라. 너는 보아라, 그러나 알지 말라고.
너는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고, 그 귀를 멀게 하고, 그 눈을 감기게 하라.
이는 그들이 그 눈으로 보고, 그 귀로 듣고,
그 마음으로 깨닫고,
회개하여 고쳐지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해서다.
이것은 매우 강한 반어적(反語的)인 표현입니다. “깨닫지 말라”, “알지 말라”, “고쳐지지 말라”고 하는 것은, “깨달아라”, “알아라”, “고쳐지라”는 강렬한 사랑의 격류(激流)가, “깨닫지 않고”, “알지 않고”, “고쳐지려 하지 않는” 완고한 바위에 부딪쳐, 다시 내뻗치는 세찬 물줄기입니다. 그 속에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과, 국민의 완고하고 깨닫지 않는 마음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사야여, 가서 국민에게 구원의 길을 말하라. 그러나, 이 완고한 백성은 쉽게 네 말을 듣지 않으리라. 그들은 맞아도 맞아도, 하나님에 대한 순종을 배우지 않으리라. 드디어,
도읍은 황폐하여 사는 사람이 없고, 집에 사람이 없고, 국토가 황폐해지기까지.
이를 것이다. 그러나 그 때문에 너는 절망(絶望)해선 안 된다. 소수(少數)의 거룩한 자손이 국민 가운데 남아, 이 남은 자의 신앙으로부터 나라는 부흥(復興)할 것이다. --이거시 이사야를 예언자로 보내면서, 야웨가 그에게 고하신 것입니다.
예언자는 그 소명의 초기부터 슬픔의 사람으로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국민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너무나 가앟고, 그에 대해 국민의 마음은 너무나 완고하기 때문입니다. 이 두 사실 틈에 끼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국민에게 고하는 예언자는 슬픔의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토록 강하지 않으면, 그는 국민의 죄를 적당한 원에서 내버려 둘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 국민의 마음이 그토록 완고(頑固)하지 않다면, 하나님의 노여움을 적당히 달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철저히 사랑하기 때문에 철저히 구하려 하고, 철저히 구하기 윟서는 철저히 심판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예언자의 길에 타협은 없습니다. 안이한 낙관을 속삭여 국민의 비위를 맞추고, 또는 국민의 응석을 받는 것은 예언자의 길이 아닙니다. 예언자의 길은 진실의 길이고 따라서 슬픔의 길, 고독의 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예언자의 길이 희망이 없는 길은 아닙니다. 사람 쪽의 상황을 보면 볼수록 실망할 수밖에 없어도, 구원이 원래 하나님의 뜻에서 나오는 이상, 절망이란 없는 것입니다. 예언자는 신앙의 사람이기 때문에, 또한 희망의 사람입니다. 밤이 다하여 새벽이 다가오듯이 예언자는 현실의 어둠 속에서 구원의 빛을 발견합니다. 우리들의 이사야가 어떻게 큰 희망의 사람이 되었는가를 뒤에 보게 될 것입니다.
2. 이사야의 시대
이사야의 소명(召命)이 웃시야 왕이 죽은 해에 있었다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은 아닙니다. 웃시야는 명치 천황과 같이 16 세에 왕위(王位)에 올라 52 년 동안 세상을 다스린 유명한 왕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두텁고, 목축 및 농업 곧 유다의 국내 산업을 진흥시켰습니다. 그는 또 30 만 7 천 5 백 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예루살렘의 성벽을 증축 강화하고, 블레섿 인, 아라비아 인, 메우니 인, 암몬 인 등 주변의 여러 민족을 쳐서 영토를 확대하고, 특히 홍해(紅海)가에 위치한 에라테 항을 획득하여 중계 상업(中繼商業)의 국가 이익을 거두었습니다. 이와 같이 그는 부국 강병의 실적을 올려, 그 이름은 멀리 이집트 국경에까지 퍼졌습니다.
그러나 반면에, 유다국 멸망의 위험도 그 속에 깃들어 있었습니다.
첫째로, 여러 외국과 교통 접촉이 왕성했던 결과, 여러 형태의 우상 예배가 국내에 수입되는 발단이 된 것.
둘째로, 사치의 기풍을 조장시켜, 도의가 퇴폐하기 시작한 것.
셋째로, 빈부의 격차가 크게 벌어져, 정치와 재판의 공정을 잃게 된 것.
넷째로, 군사비(軍事費)의 부담이 증대하여, 서민의 원인이 된 것.
다섯째로, 정치적-군사적 지도자 계급의 세력이 강대하게 되어 횡포의 폐단을 들어낸 것.
이상과 같은 사실 또는 경향은 부국강병책에 뒤따르는 통폐로서, 웃시야 왕, 치세(治世)에는 아직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았을지라도, 생각하는 사람은 이미 나라의 장래를 걱정할 원인이 싹트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웃시야 왕 자신의 일신상에 일어난 하나의 사실에 의하여 강하게 상징되었습니다. 사가(史家)는 기록하기를,
그러나 그가 강성하게 되자, 그 마음이 교만하여, 악한 일을 행하였다. 곧 그는 그 하나님, 야웨에게 죄를 범하여 야웨의 전에 들어가서 향단(香壇) 위에 향을 피우려 하였다.(역대하 26:16)
향단 위에 향을 피우는 것은 제사의 임무고, 제사 이외의 사람은, 설령 왕이라 해도, 여기에 접근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율법의 규정입니다. 그런데 웃시야 왕은 높아가는 자기 성세(聲勢)를 믿고 마음이 교만해져 율법의 규정을 어기고 스스로 향을 피우려 한 것입니다. 그 때문에 그는 야웨에게 맞아서 이마에 나병(癩病)이 생겨 죽을 때까지 별궁(別宮)에서 살았습니다. 이것은 교만한 나라는 멸망된다는 예표(豫表)였습니다.
웃시야 왕이 죽은 것입니다. 청년 이사야는 영군(英君) 웃시야의 죽음을 애도하고 국운(國運)의 장래를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국민 상하의 신앙 및 도덕 부패의 징조를 보고 야웨의 노여움을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특히 웃시야 왕이 나병에 걸린 것을 생각하고 야웨의 “거룩”을 통절히 느꼈을 것입니다. 그런 사념(思念)으로 젊은 마음에 번민하면서, 경건하게 신전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을 때, 그는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야웨”라고 부르는 스랍의 소리를 들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야웨의 거룩을 널리 전하기 위해 그는 교만한 국왕과 국민 앞에 나가도록 명령된 것입니다.
웃시야의 아들 요담도 또 좋은 군주였습니다. 그는 나라 안의 방비를 튼튼히 하고, 또 암몬인과 싸워 승리를 얻고, 적지 않은 조공을 바치게 했습니다. 요담이 죽고, 그 아들 아하스가 왕위를 이었습니다. 그는 야웨에 대하여 경건한 마음이 없고 우상 예배를 성행하게 하여, 종교의 순결을 해쳤습니다. 이전 여러 대 및 앞대의 부강을 물려받고, 그 속에 깃들었던 폐해가 그의 대에 이르러 온나라에 돋아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웃시야 왕이 죽은 뒤, 국내 정세도 크게 바뀌었습니다. 북방의 강국 앗시리아의 군사력은 해가 갈수록 증대(增大)하고, 그 압박은 시리아 및 에브라임까지 미쳤으므로, 이 두 나라는 유대를 끌어들여 반앗시리아 동맹을 맺으려 했으나, 유대가 이에 응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아하스 왕 때 유대에 침입하여, 여러 읍들을 약탈하고, 많은 국민을 죽였으며, 또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특히 중요 항구 에라테가 시리아의 손에 들어가 유대인이 그곳에서 쫓겨난 것은 유대에게 큰 타격이었습니다. 이밖에 에돔 인, 블레셋 인도 또 유대를 공격하여, 혹은 백성을 포로로 하고, 혹은 고을을 점령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이런 정세 속에서 아하스 왕은 앗시리아 왕 디글랏 빌레셀과 수교(修交)를 도모하고, 공물을 보내어 그 보호를 요청했습니다. 이에 따라 디글랏 빌레셀은 대군을 보내어 시리아, 에브라임 두 나라를 잇달아 침입하고, 드디어 앗시리아의 병력은 유대에 도달했습니다. 그것은 유대에게는 구원이 아니라, 오히려 절대적 위협이 되었습니다. 이런 국난의 때를 당하고도, 아하스 왕의 마음은 겸손하게 낮추어져 야웨에 돌아서지 않고 오히려 수리아의 신들에게 희생을 바라고 더욱더 야웨에게 죄를 범하였습니다.
이런 혼란과 혼미의 한가운데에서 오직 혼자 조용한 신앙을 가지고 야웨의 의(義)를 유지한 사람은 이사야입니다. 시리아 왕 르신과 에브라임 왕 페카의 연합군이 침입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아하스 왕의 마음과 유대 백성의 마음은 숲의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듯 동요했지만, 이사야는 예루살렘 교외(郊外) “세탁자의 밭” 가도(街道)의 가인 위 연못의 수도(水道)가에서 아하스 앞에 나타나 왕에게 고하였습니다.
당신은 삼가 조용히 하고 두려워하지 마시오. 마음을 약하게 하지 마시오. 르신 르말리야의 아들(페카)이 심하게 노할지라도, 그들은 두 개의 타다 남은 연기나는 나무 조각과 같은 것이오. --만일 당신들이 믿지 않으면, 일어설 수 없습니다.
이것은 “믿는다”라는 말이 성서에 기록된 가장 오랜 곳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그것은 세계의 문헌에서 가장 오랜 것인지 모릅니다. 처음으로 이 위대한 말을 기록에 남긴 것만으로도, 이사야의 이름은 영구히 기억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에 의하여 나라는 선다, 신앙에 의하지 않으면 나라는 서지 않는다. 이것이 이사야의 주장입니다. 참으로 위대한 주장입니다. 나라가 서는 것은 무력(武力)에 의해서도, 책략에 의해서도 아니다, 시편의 작자가, “야웨가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이의 근로가 헛되고, 야웨가 성을 지켜 주지 아니하시면 위병(衛兵)이 깨어 있음이 헛 것이라”고 노래한 대로입니다. 참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잃으면, 나라는 그 밑바탕에서 무너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비유를 들면 그것은 흰개미에게 갉아먹히는 기둥과 같이, 겉보기에는 군사력, 경제력의 강대함을 자랑해도,국민의 마음 속은 썩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국난을 당하여 아하스 왕이 맨 먼저 반성한 것은, 자신의 불신앙이 아니어서는 안 되었던 것입니다. 곧 우상 숭배를 버리고, 바른 신앙으로 돌아서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야웨를 의지하면 나라의 독립은 유지된다. 르신 페카를 두려워할 것 없고, 디글랏 빌레셀도 의지할 것 없습니다. 용기의 상실, 판단의 착오, 이 모두가 불신앙의 결과입니다. 디글랏 빌레셀의 원조를 구한 것은, 아하스 왕의 외교적 승리같이 생각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역사가의 기록처럼.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은 그에게 왔으나, 그에게 힘이 되어 주기는커녕, 오히려 그를 괴롭혔다.(역대하 28:20)
아하스 왕의 정책은, 세 가지 점에서 유대국에 재해를 남겼습니다.
첫째는, 많은 조공을 앗시리아에게 보내어, 나라를 가난하게 한 일입니다.
둘째는, 앗수르 왕을 회견(會見)하기 위해, 아하스 왕이 친히 다메섹에 가서 그곳에서 본 우상 숭배를 예루살렘으로 수입한 것입니다.
셋째는, 앗수르 군이 유다를 침입할 길을 연 것입니다.
이사야는 온 힘을 다해 이 위험을 아하스 왕에게 경고했습니다.그 날에는 야웨께서 파리와 벌을 부르시리라.앗수르의 군세는 파리나 벌처럼 무리져 와서, 유다 나라의 온 땅에 머무르리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무리져 와서 멈추리라,
험한 골짜기, 벼랑의 갈라진 틈에
모든 가시덤불, 모든 목장(牧場)에,그날 주는 미실 것입니다.“강 밖에서 세내어 온 면도”란 앗수르군을 가리킵니다. 유프라테스 강 저 쪽에서 앗수르 군을 불러들여 아랍-에브라임 연합군을 막으려 한 것이 어찌 뜻하였으리오. 유대 자신의 장식인 머리카락도 이 면도로 삭발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하스는 이 경고를 듣지 않고, 자기의 교만만 믿어 망국(亡國)의 길을 재촉한 것입니다.
강 밖에서 세내어 온 면도칼로써,
머리와 발의 털을
또 수염도 깎으실 것이다.
3. 종교와 정치
1
아하스 왕은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의 도움을 구한 점에서 외교 정책의 첫걸음을 그르쳤습니다. 그것은 마치 히틀러와 결탁한 일본의 정치가와 같은 오류였습니다. 이 오류는 아하스 왕의 불신앙에서 나와, 오류에 빠지면 빠질수록, 그 불신앙은 커갔습니다. 아하스 왕 혼자만이 아닙니다. 그 유사(有司)도, 그 민중도 바른 신관(神觀)을 떠나 마찬가지로 유상 숭배의 죄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빈번히 신전에 참배하여 희생을 바치고, 기원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정치는 무고한 사람의 피를 흘리고, 약자의 권리를 훔치는 것이었습니다. 정치의 정의와 재판의 공평을 문란케 하고 신사 참배가 다 뭐냐. 하나님은 그들의 기원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이사야는 외쳤습니다.야웨께서 말씀하신다--바른 정치와 공평한 재판이야말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로서, 그 없이는 자극 있는 종교 의식도 기름기 흐르는 천 마리 수소의 제물도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이다. 한편, 정치의 악을 행하면서 동시에 신전 예배를 성대히 하는 허위는 하나님이 견디실 수 없는 일이다. 너희가 손을 내밀어 기도할 때 나는 외면하고 있다고 야웨는 말씀하신다--이 통렬한 이사야의 예언은, 기만의 종교와 포학(暴虐)한 정치를 한데 몰아치는 것이며, 정치가와 종교가의 가중한 위선을 사정없이 규탄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옛날에 사무엘이, “야웨는 그 말씀을 따르는 것을 기뻐하시듯이 번제와 희생을 기뻐하실 것인가. 순종은 희생보다 낫고, 청종은 수양의 지방보다 낫다”고 한 예언의 정통(正統)을 이어받은 것이며, 종교 비판의 대원칙을 설파(說破)한 것입니다.
너희들이 바치는 많은 희생은
sor 무슨 유익이 있느냐?
나는 수양의 번제(燔祭)와
살찐 짐승의 지방(脂肪)에 질렸다.
나는 수소 또는 숫산양의 피를 좋아 않는다.
너희는 나를 보려고 오지만
누가 내 마당을 와서 짓밟으라더냐.
너희들은, 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말라.
희생의 연기는 내가 싫어하는 것이다.
신월(新月), 안식일(安息日) 또 회중(會衆)을 불러 모으는 것--
나는 불의와 성회(聖會)를 견딜 수 없다.
너희들의 단식가 규정된 절기는
내 마음 속으로 싫어하는 것.
그것은 내게 무거운 짐이 되고,
나는 그것을 짊어지기에 지쳤다.
너희들이 손을 내밀 때에,
나는 눈을 가려 너희를 보지 않는다.
너희들이 많은 기도를 할 때
나는 듣지 않는다.
너희들은 몸을 씻어 깨끗이 하라.
내 눈 앞에서
너희들의 나쁜 행위를 버리라.
악을 행하기를 그치고,
선을 행하기를 배우며,
공평을 추구하고,
학대하는 자를 징계하고,
고아의 권리를 확보하고,
과부의 호소를 변호하라.2
이사야의 정치 비판의 예언은, 여섯 개의 “화(禍) 있을진저”로 편집되어 있습니다.화 있을진저, 그들은 집에 집을 이어짓고,부(富)의 집중과 부동산(不動産)의 투기입니다.
논밭에 논밭을 증가하여,
남은 땅을 남기지 않고 자기 혼자,
나라 안에서 살려고 한다.화 있을진저, 그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지배 계급의 방자한 향락의 생활입니다.
독한 술을 찾아
밤이 새도록 줄곧 마셔서
술에 그 몸을 달군다.화 있을진저,허위와 죄악을 도처에 끌고가는 정치가의 죄입니다.
그들은 허위(虛僞)의 새끼줄로 악을 끌어당기고
수레의 줄로 하듯 죄를 끌어당긴다.화 있을진저, 그들은 악을 선이라 부르고,권력에 의해 도덕적 가치 판단을 왜곡하는 자오, 여기에 영합하는 어용 학자, 종교가에 대한 말입니다.
선을 불러 악이라 하고,
어둠을 빛으로 하고,
빛을 어둠으로 하고,
쓴 것을 달다고 하고,
단 것을 쓰다고 한다.화 있을진저, 그들은 자기를 보고 지혜롭다 하고,교만하고 독선적인 지도자상입니다.
스스로 돌아보아 현명하다고 한다.화 있을진저, 포도주를 마시는데 장사고,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회(宴會)를 여어 정치를 거래하고, 재판을 굽히는 관료, 군인, 사법관들!
독한 술을 섞는데 용사인 자.
그들은 뇌물을 받고 악한 자를 놓아 주고,
의인에서 그 의를 빼앗는다.
이런 정치의 부패에 대하여, 하나님의 노여움은 폭발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사야는 이어 말합니다.이러므로 야웨 그 백성을 향하여국민 특히 지도자 계급의 죄를 벌하기 위해, 야웨는 먼 땅에서 앗수르 군을 불러오실 것입니다.
진노를 발하고 손을 펴, 그들을 치신다.
산은 흔들려 움직이고, 그들의 주검은
거리에 먼지처럼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웨의 노
여움은 멈추지 않고, 더욱 그 거룩한 손을 펴신다.그가 기를 들어 멀리에서 한 국민을 불러강적이 와서 국토를 짓밟고, 사납게 으르렁대며 먹이를 잡아, 나꿔채어 가지만 구하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땅 끝에서 그들을 부르신다.
보라, 그들은 속히 달려온다.
그 속에는 피곤한 자도, 넘어지는 자도 없고,
조는 자도 잠든 자도 없다.
그 허리띠는 풀지 않고,
그 신의 끈은 끊어지지 않았다.
그 화살은 날카롭고,
그 활은 모두 팽팽하고,
그 말발굽은 차돌같고,
그 수레 바퀴는 질풍(疾風)과 같다.이 백성의 지도자는 이를 오도(誤導)하고,자칭 지도자(Fuehler)는 오도자(誤導者, Fehlfuehler)다. 그러므로 국민은 혼란하고 장정은 죽고, 고아 과부도 또한 재화를 모면할 수 없다. 이 이사야의 예언을 읽고, 오늘의 독일인 또는 일본인은 이것을 단지 먼 옛날의 남의 나라 일로 생각할 수 있습니까? 현대의 일본에서 이사야의 말을 인용하여 나라의 위험을 경고한 사람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경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오히려 그를 박해하였던 것입니다.
그 인도를 받는 자는 혼란했다.
그러므로 주는 그 장년을 아끼지 않고,
그 고아와 과부를 동정하지 않는다.
이는 그들이 모두 사악(邪惡)하여,
각기 입들로 어리석음을 말하기 때문이다.그러나 야웨의 노여움은 멈추지 않고,
더욱 그 손을 펴신다.이제라도 죄를 뉘우쳐서 정의에 돌아가, 찌꺼기를 거르고 납을 제하여, 정치를 바르게 하고 재판(裁判)을 공평하게 하지 않으면, 일본 국민에 대한 야웨의 심판은 패전으로 끝나지 않고 패전에서 시작할 것입니다.
4. 비전(非戰)과 평화
1
아하스 왕 대, 아람과 에브라임 두 나라의 연합군이 유다에 침입한다는 정보가 도달하여, 왕의 마음과 민심이 흉흉할 때에, “삼가고 조용하라, 무서워 말라, 마음을 약하게 먹지 말라, 만일 너희가 믿지 않으면 결코 설 수가 없으리라“고 고한 이사야의 예언은, 앞에서 이미 말했습니다. 조용히 야웨를 믿지 않고, 허둥대며 책략을 쓰고 수리아의 원조를 기대어, 무력 투쟁을 도모하는 것은 망국의 시초라고 그는 경고하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처음 아하스 왕 앞에 섰을 때, 스얄야숩이라는 자기 아들을 데리고 갔습니다. ”스얄야숩“이란 ”남은 이는 돌아오리라“는 뜻입니다. 아하스 왕은 주전 정책(主戰政策)의 결과는 나라를 멸망시키게 되지만, 그러나 소수의 의로운 사람이 하나님께 돌아가, 유다 부흥의 중핵(中核)이 될 것이라는 뜻을 이 아이의 이름에 붙였던 것입니다.
이윽고 그에게 둘째 아이가 태어나자, 이번에는 ”마헬 살랄 하스 바스“라는 긴 이름을 지었습니다. 이것은 ”빼앗음은 빠르게, 약탈은 신속히“라는 뜻입니다. 적의 침입에 의한 국토의 약탈은 절박하고 있다는 의미를 함축시켰던 것입니다. 같은 무렵 그는 또 한 장의 커다란 나무조각을 구하여 그 위에 평민(平民)의 글자로 ”마헬 살랄 하스 바스“라고 크게 써 붙였습니다. 아하스 왕의 ”비상 대책“으로 나라가 멸망의 벼랑길로 내리 달리고 있는 것을 이사야는 구경만 하고 있을 수 없어, 어느 때는 연설로 또는 이름을 지어서, 또는 표어를 만들어, 수단 방법을 다하여 경고하였던 것입니다.2
아하스 왕이 죽고 그 아들 히스기야가 왕이 되었지만, 그는 앗수르에 예속한데서 생긴 군사적-재정적인 부담을 견디지 못하여, 남쪽의 강국 이집트의 원조를 구하여 앗수르의 구속을 벗어나려는 정책으로 전환했습니다. 이 협정은 비밀리에 체결되었습니다. 아직도 야웨를 믿는 신앙에 의하지 않고, 헛된 사람의 힘을 의지하여 국운(國運)의 회복을 도모하려 한 것입니다. 이것을 안 이사야는 외쳤습니다.야웨 말씀하신다.
화 있을진저 반역의 아들들,
그들은 계율을 세우지만 나에 의해서가 아니다.
그들은 술을 따르지만, 내 영에 의해서가 아니다.
죄 위에 죄를 쌓아올린다.
그들은 내 말을 구하지 않고,
이집트에 내려가 바로의 피소(被所 )로 피하고
이집트의 그늘에 숨으려 한다.
그러나 바로의 보호(保護)는 오히려 너희들의 수치가 되고,
이집트의 그늘에 숨는 것도 너희들의 수치가 될 것이다.또 말하였습니다.
화로다. 그들은 도움을 구하여 이집트로 내려가,
군마(軍馬)를 의지하고,
전차(戰車) 많은 것을 의지하고,
기병(騎兵) 강한 것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의 성자(聖者)를 우러르지 않고,
야웨를 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야웨도 지혜 있어 화를 내리시고,
그의 말씀을 뒤집지 아니하셔서,
일어나 악을 행하는 자의 집을 치시고,
불의를 행하는 자의 도움을 치신다.이집트의 도움을 의지하여 앗수르를 대항하려는 것은, 앗수르의 도움을 의지하여 수아람 및 에브라임을 대항하려 한 것과 마찬가지의 오류다. 그와 동시에 야웨를 믿지 않고 헛된 것을 의지하는 불신앙이다. 그 결과는 국난(國難)의 가속도적 증가 외에 없을 것입니다.
이사야가 아하스 왕 및 히스기야 왕의 주전 정책에 반대한 것은, 그것이 야웨를 믿지 않는 불신앙의 죄였기 때문이며, 그 죄를 민중에 대한 착취라는 사실에 가장 단적으로 나타났습니다.야웨 이르러 내 백성의 장로와
제후(諸侯)를 심판하신다.
너희는 내 포도원을 교란하고
가난한 사람에게서 빼앗은 것이 너희 집에 있다.
어찌하여 너희는 내 백성을 짓밟고,
가난한 사람의 낯을 으깨느냐.국민은 야웨의 포도원이고, 가난한 사람은 야웨의 백성입니다. 그들을 교란시키고 약탈하는 지도자 계급의 죄를 이사야는 여기에 책망하는 것입니다.
잇달은 주전 정책에 의하여 국가의 군사비는 증대하고, 끊임없는 군사적 자극에 의하여, 국민은 정신적으로 피곤하고 경제적으로 침체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피곤한 사람에게 휴식을 주라“는 것이, 이사야의 주장이었습니다. 그의 유명한 비젼의 예언이 있습니다.주 하나님, 이스라엘의 성자(聖者),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들이 돌이켜, 침착하면 구원되며,
잠잠하고 신뢰하면 힘을 얻는다’고
그러나 너희들은 이 일을 좋아하지 않고,
대답하여 말했다.
‘아니, 우리는 말을 타고 달려가리라’고.
그러므로 너희들은 도망갈 것이다.
‘우리들은 빠른 말을 타자’면서.
그러므로 너희들의 추격자는 빠를 것이다.
한 사람의 위협으로 천 명이 도망가서,
남는 자는 겨우
산꼭대기 위의 깃대와 같이 외롭고,
언덕 위의 기와 같이 될 것이다."돌아서서”란 전쟁을 피하는 것, “침착”이란 쉰다는 뜻으로 군민에게 휴양을 주는 것입니다. 조용히 하나님을 신뢰하고, 주전적 책동을 그쳐 국민에게 휴식을 주는 것이 나라가 서는 길이라는 것을, 이사야는 여러 차례 횟수를 거듭하여 외쳤지만, 그들은 그 말을 좋지 않게 여겨 군마(軍馬)를 타고 달리는 정책을 완고히 계속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달리고 달리지마 적에게 등을 돌려 도주하기 위해 달린다. 그들은 빨리 달리지만, 그들을 추격하는 자는 더 빠르리라. 부사천으로 도망갔지만 강성한 군세로 한 사람이 위협을 하면 천 명이 도주하고, 남는 자는 산 꼭대기의 깃대처럼 고립(孤立)한 소수일 것이다.--
이렇게 예언하는 이사야를 지도자 계급은 조소하고, 또한 탄압했습니다. 그들은 술주정꾼의 혀로 이사야를 조롱하여 말했습니다.그것은 교훈에 교훈, 교훈에 교훈,
규칙에 규칙, 규칙에 규칙.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가르친다.이것은 이사야의 경고를 귀찮게 여겨 비웃은 말입니다.
그들은 보는 사람에게 말한다.
‘너희들 보지 말라’고.
계시(啓示)하는 사람에게 말한다.
‘진실을 계시하지 말라.
매끄러운 것을 말하고,
허위(虛僞)를 계시하라’고."보는 사람“, ”계시하는 사람“은 모두 예언자입니다. 지도자들은 보는 사람을 향하여 ”보지 말라“, 계시하는 사람을 향하여 ”진실을 계시하지 말라“고 말하고, 오히려 듣기 좋게 영합하는 말만 하고, 허위를 계시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리하여 얼마나 많은 거짓 예언자, 학자, 평론가가 그들의 요구에 응하여 매끄러운 말을 말하고, 허위를 계시했던가. 그러므로 이사야는 외쳤습니다.이에 이스라엘의 성자는 말하신다--
너희들이 말을 무시하고,
폭학과 비도(非道)를 믿고,
이를 의지하였다.
그러므로 이 불의(不義)는 너희들에게,
내밀어 무너지려는 높은 돌벽이
쏟아지는 것 같고 갈라지는 것 같아
그 무너짐은 갑자기 순식간에 올 것이다."무너짐은 갑자기, 순식간에 올 것이다.” 그것은 참으로 하나님을 배반하고, 예언자를 무시하고 박해해 온 국민이 그 포학과 비도(非道)의 결과를 자기 위에 거두어 드리는 날의 모습입니다.
5. 예루살렘의 에워싸임
1
유대왕 히스기야가, 이집트의 군사 원조를 구하여 앗수르를 배반하였기 때문에, 앗수르 왕 산헤립은 대군을 보내어 유대를 침입하고, 방비(防備)를 두룬 46 고을을 공략하여, 드디어 수도 예루살렘을 에워쌌습니다. 앗수르 군의 사령관은 야웨를 모독하는 폭언(暴言)을 하면서 성문을 열라고 호통을 치고, 이것을 들은 성 안의 민중은 쥐죽은 듯 숨을 죽이고 있었습니다. 이때 히스기야는 옷을 찢고, 거친 베를 둘러 죄를 회개하며 야웨의 신전에 올라가 기도하고, 동시에 정부의 고관(高官)을 이사야에게 파견하여, 그에게 구국(救國)의 기도를 간청했습니다. 이에 응하여 이사야는 왕에게 하나님을 신뢰할 것을 권고하고 예루살렘이 구원되기를 하나님께 빌었습니다.
어느 날 아침 예루살렘의 민중은 돌담 위에서 앗수르 군의 진영(陣營)을 바라보고, 그곳에 이변(異變)이 일어났음을 발견했습니다. 한 사람의 병사도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성문을 열고 나가 보니 그 날 밤 동안 야웨의 사자(使者)가 앗수르 군을 쳐서, 시체가 즐비하였습니다. 죽은 사람의 수를 세니 18 만 5 천 명에 달하였습니다. 여기 “야웨의 사자”라고 기록된 것은 아마 악성 전염병이었을 것입니다. 이 사건을 기록(記錄)한 이집트의 기록에는, 쥐가 앗수르 군을 쓸어 버렸다고 쓰여 있다 합니다. 쥐는 흔히 역병(疫病)의 상징이고, 또 매개체이기도 합니다.
예루살렘은 야웨의 힘에 의하여, 싸우지 않고 구원되었습니다. 시민은 광희(狂喜)하여 지붕에 올라가고, 거리에 넘쳐, 승리를 축하하는 분위기가 온 도시에 넘쳤습니다. 예언자 이사야! 그야말로 이 축승(祝勝)의 중심 인물이 되어야만 할 사람입니다. 때는 기원 전 701 년, 이사야가 처음 예언자로서의 성소(聖召)를 받은 지 대략 40 년이 경과하였습니다. 소명을 받을 때의 나이가 20 세였다고 하면, 그는 이제 60 세의 노년(老年)입니다. 40 년의 신고(辛苦)를 겪고, 드디어 이사야의 신앙이 승리하고, 이사야의 예언이 존경되고, 이사야는 국민적 감사의 대상이 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만족을 느꼈을까요? 아니 이 승전 축하의 소동 속에서, 그는 여전히 슬픔의 사람이었습니다. 이제야말로 국민이 참으로 회개하여 야웨의 하나님께 돌아가 정의와 공도(公道)를 일상 생활에 실현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포위가 풀린 것에 신명나서 기뻐할 뿐 아무런 엄숙한 도덕적 반성도, 신앙적 회개도 없이, 안이하고 향락적인 유물주의의 생활에 탐닉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태로는 하나님의 심판은 더한층 철저하게 내려 나라는 마침내 멸망을 헤어나기 어려우리라, 이것이 이사야의 깊은 우려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축승 기분으로 법석을 떨고 있는 거리의 군중을 향하여 눈물로 고하였습니다.이러므로 내가 말한다. 나를 보지 말라.
나는 심히 울리라,
나를 위로하여 몰려오지 말라,
나의 백성의 딸은 멸망했다.또 말했습니다.
주 만군의 야웨, 너희들에게 울 것고,
슬퍼하고, 머리를 깎고, 거친 베옷을 입도록 명하였다.
그런데 보라, 이 무슨 기쁜과 즐거움,
소를 잡고, 양을 죽이고,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신다.
‘자 먹고 마시자’
내일은 우리가 죽을 테니까!
이러므로 만군(萬軍)의 야웨 내 귀에 계시하신다.
‘참으로 너희들의 이 악은 죽을 때까지 벗을 수 없으리라.’
이는 주 만군의 야웨의 거룩한 말씀이다.참으로 이사야는 사태의 본질을 깊이 본 사람이었습니다.
2
앗수르 군이 퇴각(退却)하고 얼마 안 있어, 히스기야 왕은 병이 걸려 죽을 사명을 헤매었지만 심히 울어 야웨께 기도했기 때문에, 그 병을 회복하고 15 년의 수명이 연장되었습니다. 그 병 완쾌의 축하로, 바빌론 왕 멜므로닥 발라단은 사절을 그에게 보내왔습니다. 당시 바빌론은 북부 여러 나라의 반 앗수르 연맹의 맹주였으므로, 이 사절의 내방은 히스기야 왕의 병의 쾌유 축하를 기회로, 공동 전선을 강화하려는 정치적 목적도 포함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히스기야는 이 사절을 환영하여, 왕실의 창고 및 무기고를 모조리 열람시키고, 국내를 고루 안내하여 안 보여 준 것 없이 모두 보여 주었습니다. 이것은 히스기야 왕이 너무나도 경솔하게 취한 행동이었습니다.
첫째로, 그것은 바빌론과의 동맹에 의지하고, 또 자기 나라의 경제력 및 무력(武力)의 준비를 믿어 앗수르와 싸우려는 불신앙의 정책이었습니다.
둘째로, 바빌론의 사절에 자국(自國)의 국력과 국토를 숨김없이 보인 것은, 바빌론 군에게 유대 침입의 길을 안내한 것이나 다름없는 처사였습니다.
요컨대 바빌론을 의지하고, 야웨를 의지하지 않으며 자기 힘을 의지하고 신앙에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이 불신앙과 교만이 나라를 멸망시키는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는 히스기야에게 고하였습니다.만군의 야웨의 말을 들으라. 보라, 날이 이를 것이다. 그리고 너희 집에 있는 모든 것과, 너희 조상들이 오늘까지 쌓아 둔 거이 바빌론으로 운반되는 날이 올 것이며 아무 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또한 너희 몸에서 나온 너희 자녀들도 끌려가, 바빌론 왕의 궁전(宮殿)에서 환관(宦官)이 될 것이다.뒷날, 유대는 바빌론 군의 침략을 받아, 국토는 약탈되고, 국왕과 국민은 포로가 되어 바빌론에 끌려가, 바빌론의 노예가 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이 바빌론 유폐의 예언은 백 십여 년 뒤, 말 그대로 실현되었습니다. 뒷날 그 망국의 소용돌이 속에 예언의 소리를 높인 이가 예레미야입니다.
이사야는 위의 예언을 최후로 그 자취를 감춥니다. 그의 만년에 대해서는 아무 기록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히스기야 왕의 아들 므낫세는 우상 숭배를 부흥시킨 불신앙의 왕이었습니다. 늙은 예언자 이사야는 므낫세 왕에 의해 순교 당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곧 큰 나무를 둘로 쪼개어, 그 사이에 이사야를 끼우고, 나무째 큰 톱으로 쓸어 죽였다고 합니다. 물론 이 전설에 확실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폭군 아래에서 이사야의 만년이 행복하지는 않았으리라고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6. 이사야의 희망
1
이사야는 슬픔의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은 국민에 대한 그의 사랑이 너무나 진실했기 때문입니다. 국민의죄는 진홍과 같고 주홍같이 붉다. 그것이 눈과 같이 희게 되고, 양털같이 순백하게 될 것을, 이사야는 요구하였던 것입니다. 아니 그것은 야웨의 신 자신이, 그 선민인 이스라엘에 대해서 지니신 강한 요구였습니다. 이사야는 야웨와 이스라엘의 관계를 이렇게 예언하여 말했습니다.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 기울이라.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아들을 나는 양육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나를 배반하였다.
소는 그 주인을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내 백성은 깨닫지 못한다.
어떤 때 그는 이스라엘을 포도밭에 비유하고, 야웨를 나의 애인이라 부르며, “야웨의 포도밭의 사랑의 노래”를 불렀습니다.나의 애인은 포도밭을 가졌다.
기름진 땅 언덕 위에,
그는 흙을 파헤치고, 돌을 치워,
거기 좋은 포도를 심고
그 가운데 망대(望臺)를 세우고,
도 그 안에 술 저장통을 파서,
좋은 포도가 달리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맺힌 것은 들포도였다.
야웨는 이스라엘에 좋은 국ㅌ와 우수한 민족을 주고, 좋은 교사와 예언자를 보내고, 오랜 역사를 통하여 “좋은 포도”가 맺히기를 기다렸지만, 맺은 것을 보면, 들포도였던 것입니다.그는 공평(公平)을 기대하셨거늘, 보라 유혈(流血)!
정의를 기대하셨거늘, 보라 울부짖음!
하나님은 이 나라에 공평과 정의를 기대하시는데, 거기 보이는 것은 죄없는 사람이 피와 학대받는 사람의 울부짖음이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 포도밭에 대해 무엇을 하시겠습니까?그러면 내가 이제 너희들에게 고하리라,
내가 내 포도밭에 하려고 하는 일을.
나는 그 울타리를 제거하여 마구 먹혀 버리게 하고,
그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하겠다.
심판입니다. 철저한 심판입니다. 하나님의 진실과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국민의 불신과 불의를 철저히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는 복종이 있을 뿐입니다.만일 너의들이 온전히 순종하면
땅의 좋은 산물(産物)로 먹이리라.
만일 너희들이 거역하고 배반하면,
칼이 너희들을 삼키리라.
곧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신종(信從)에 따라서, 국민의 흥망이 결정되는 것입니다.2
이사야는 슬픔의 사람이었지만, 비관(悲觀)의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희망의 사람이지, 절망의 사람은 아닙니다. 사랑은 절망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진실이시니까, 그 선택하신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폐할 수 없습니다. 그 죄에 대하여 하나님의 노여움이 타오르고, 하나님의 심판이 치열하게 진행되는 중에라도,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진실은 변하지 않고 사랑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노여움이 되어 타고, 하나님의 진실이 심판이 되어 작열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사야에게 계시된 것은 “남은 자”의 사상입니다.그 날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의 도피한 사람은 다시 나를 치는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성실로써 이스라엘의 성자(聖者) 야웨를 의지하리라. 그 남은 사람 야곱의 남은 사람은 대능(大能)의 하나님께 돌아갈 것이다.
"남은 사람은 돌아 갈 것이다“라는 것은 이사야 특애(特愛)의 사상으로, 그가 그 의미를 내포시켜 자기 아들을 스얄야숩이라고 이름을 지은 것은 앞에서 말한 대로입니다. 이 남은 사람 위에 의(義로운 이스라엘은 부흥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그릇으로써 강 저편의 삭도(削刀)인 앗수르 군을 사용합니다. 앗수르는 야웨의 진노의 지팡이, 분노의 채찍입니다. 야웨가 그들을 명하여 사악한 나라를 그 죄 때문에 거리의 흙처럼 짓밟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모르고 자기의 힘과 정의로 남의 나라를 멸망시켰다고 으스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는 예언했습니다.그러므로 주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 하시려는 일을 다 수행하신 뒤, 그는 앗수르 왕의 교만한 마음과 그 눈을 뽐냄을 벌하시리라.
야웨는 이스라엘뿐 아니라, 세계 만방을 심판하십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순서에 따라 진행하십니다. 앗수르는 앗수르 자신의 가치가 유다보다 낫기 때문에, 유다를 치게 하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눈앞에는 앗수르도 유다도 똑같이 교만하고 불의(不義)해서, 함께 심판의 대상입니다. 다만 하나님은 우선 앗수르를 써서 유다를 심판하고, 사태가 끝난 뒤 앗수르를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단지 유대와 앗수르뿐 아니라, 블레섿도 모압도, 아람도 에브라임도 구스도 이집트도, 바벨론도 에돔도 아라비아도 두로도 시돈도, 실로 세계 만방이 모두 야웨의 경륜 속에 있고, 야웨의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이사야의 시야는 당시 알려진 전세계 여러 나라에 널리 미쳤으며, 이들 여러 나라에 대한 그의 예언은 날카로운 안광으로 기록한 세계사며, 투철한 식견을 갖는 역사 철학이었습니다.
더우기 이사야의 예언은, 이들 개개 나라의 운명에 관해서뿐 아니라, 세계를 전체로 보고, 전체적인 세계 심판을 통해서, 야웨의 정의와 평화가 넘치는 세계 국가의 완성을 바라고 있습니다. 실로 이사야의 가슴에는 신도(神都)를 중심으로 하는 만국 평화의 장대(壯大)한 시(詩)가 있습니다.말일(末日)에 이런 일이 일어난다.
주(主)의 집의 산이,
여러 산의 머리로 우뚝 서고,
여러 봉우리보다 높이 솟는다.
모든 국민이 물밀듯이 몰려오고,
많은 백성이 와서 서로 말한다.
‘자, 우리들 주의 산에 오르고,
야곱의 하나님의 집에 가자.
하나님은 그의 집을 우리에게 가르치신다.
우리 그의 길을 걷자’고.
이는 가르침이 시온에서 오고,
주의 말씀은 예루살렘에서 오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나라 사이에서 심판을 행하고,
많은 백성을 위해 중재하신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 칼을 쳐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 낫을 만든다.
나라는 나라를 거슬려 칼을 들지 않고,
더 이상 전투의 일을 배우지 않는다.
만국 공법(萬國公法)은 하나가 되고, 제국간의 섭외 사건(涉外事件)은 야웨의 중재 재판에 복종하고, 무장은 완전히 해제되어, 다시 군사 훈련의 필요가 없게 됩니다. 곧 절대적인 평화 국가의 출현입니다.그 날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앗수르와 함께 삼자(三者) 연합하여, 땅의 한가운데서 축복이 될 것이다. 만군의 야웨 축복하여 말씀하신다. ‘복 있을진저 나의 백성 이집트, 내 손의 솜씨 앗수르, 그리고 나의 대물림 이스라엘!’ 하고.
이집트도, 앗수르도, 이스라엘도, 나라란 나라, 민족이란 민족은 모두 구원받고, 모두 그 존재의 의미가 인정되고, 모두 축복받아 그 모든 가치를 발휘한다. 그것이 야웨의 경륜의 목적이며, 심판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실로 웅대한 세계관이었습니다.
이런 평화 국가, 평화 세계의 건설은, 재래 지도자 계급의 아류들이 도저히 할 수 없는 바입니다. 그를 위해서는 전혀 새로운 지배자의 출현을 필요로 합니다.한 어린 아기가 우리를 위해 태어났다.
한 남자 아이가 우리에게 주어졌다.
정치(政治)가 그 어깨에 있고,
그 이름은 이렇게 불리운다--
‘경이(驚異)의 지자(智者),
신위(神威)의 용사,
영원한 아버지,
평화의 임금.’
그의 권능은 크시고,
그의 평화는 다함이 없다.
다윗의 왕위(王位)와
그 왕국 위에
공평과 정의로써
이를 세우고 굳게 하시리라.
이제부터로 영원히--
만군의 야웨의 열심함으로써.
메시야의 출생에 의해 정의와 평화의 국가는 확립된다. 그것은 만군의 야웨의 열심에 의해 반드시 성취된다. 이 메시야가 확립하는 정의와 평화는 단지 한 나라 안에, 도 나라와 날 사이에 행해질 뿐 아니라 자연계에까지 미치는 것입니다.늑대는 새끼 양과 함께 머물고,
표범은 새끼 염소와 함께 쉰다.
송아지와 숫사자는 함께 풀을 뜯고,
어린아이에게 이끌린다.
황야(黃野)와 마른 땅은 즐기고,
사막은 기뻐서 꽃핀다.
사프란같이 일제히 꽃이 피고,
기뻐 즐거워하며, 또 노래한다.
더우기 하나님 나라가 땅 위에 실현될 때는, 모든 학대와 불행의 원인이 제거되고, 죽음조차도 사라질 것입니다. 곧 개인의 구원(救援)도 또한 완성될 것입니다.그리하여 그는 이 산에서,
모든 국민이 쓰는 베일과
모든 나라가 입는 겉옷을 떨쳐 버리고,
영원까지 죽음을 멸망하셨다.
만군(萬君)의 주 야웨는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고,
온 땅에서 그 백성의 치욕을 제하실 것이다.
야웨가 이것을 말씀하셨다.
국가의 부흥이 있고, 세계의 평화가 있고, 자연의 완성이 있고, 개인의 구원이 있어, 이사야는 과연 희망의 예언자고 환희의 예언자였습니다. 마지막 날에는 황야에 물이 솟아나오, 사막에 시내가 흐르고, 그곳에 큰 길이 나 “거룩한 길”이라 불리고,구속(救贖)된 사람만이 그 곳을 걷는다.
주께 구속된 사람은 돌아와,
그 머리에 영원한 기쁨을 이고,
노래하며, 시온에 온다.
그들은 즐거움과 기쁨을 얻고,
슬픔과 탄식은 도망쳐 간다.
이사야는 투철한 진실의 눈으로써 나라와 세계의 현실을 보았기 때문에, 슬픔의 예언자일 수밖에 없었으나, 동시에 믿음의 눈으로써 야웨의 진실을 의지하였으므로 이렇듯 커다란 희망의 예언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슬픔의 사람이면서 신앙의 사람, 애국의 사람이면서 희망의 사람, 그에 의하여 국가의 이상은 분명히 되고 정의와 평화는 세계의 지도 원리로 높이 들려졌습니다. 그에 의하여 국난의 이상은 분명히 되고, 국가 부흥의 길이 제시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나라가 전쟁에 의한 국난 국욕(國辱)을 당한 의미를 알고, 이 가운데서 새로운 나라로서 부흥하는 길은, 이사야의 예언 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우리들도 또한 그의 예언의 정통(正統)을 이어받는 신앙의 예언자, 애국의 예언자, 희망의 예언자를 절대 필요로 합니다. 설령 그 사람은 슬픔의 생애를 보낼지라도, 국가 부흥의 희망은 순전히 이런 예언자의 신앙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