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정주영 회장을 말하는 간결한 표현이다. 그는 평소 노동자라고 불리는 것을 좋아했고 또 그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했다. 하계수양대회에서는 신입사원과 씨름 겨루기를 빼놓지 않고 했다. 실패는 없고 시련이 많다보니 그에 대한 일화도 참 많다. 현대건설 초창기 부산에 UN묘지를 수주했는데 한겨울에 준공식을 하는 바람에 잔디가 없었다. 그는 주저않고 보리를 옮겨다가 심었다고 한다.
콘크리트구조물을 중동 현장에서 제작한다면 공기가 엄청 소요되었다. 그는 울산에서 만들어 바지선에 싣고 끌고가 시간을 단축하였다. 정회장을 이끈 참모인 권기태라는 분이 쓴 회고록을 보면 단숨에 왕회장이 느껴진다. 그가 정 회장을 가까이에서 본 것은 1959년 8월, 인천 제1도크 복구공사장에 투입되면서부터였다. 당시로서는 큰 액수인 200만 달러 공사를 현대건설이 단독으로 수주했다. 6·25 때 폭격을 맞은 도크를 보수하는 공사였는데 정 회장은 현장 숙소에 새벽 5시면 나타났다. 출근시간이 6시였는데 그때부터 직원들을 깨웠다.
도로사정이 좋지 않은 시절, 그 시각에 서울에서 왔으니 새벽 3시 전에 일어났을 게 분명하다. 당시 11t짜리 갑문(閘門)이 앞뒤로 두 개 있었다. 이 문을 들어올려서 보수를 하기 위해서는 미 해군이 소유한 60t짜리 해상 크레인을 빌려야 했다. 진해 해군기지에서 해상크레인이 출발할 때부터 공사를 마치고 돌아갈 때까지 경비를 다 지불해야 하니 임대료가 엄청나게 비쌌다.
정 회장이 그 돈을 아까워해 이리저리 궁리를 할 때 그가 “부체(浮體)를 중립 상태로 놓으면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라는 의견을 냈다. 그러자 정 회장은 그 자리에서 부력(浮力)을 이용하여 문을 띄워서 공사를 해 보자고 했다. 좁고 긴 수문(水門)에서 시행하기 힘든 공사였으나 정 회장은 모험심을 발휘해 일을 성사시켰다.그의 예리한 판단력과 과감한 결단이다.
정 회장은 ‘안 되는 것은 되게 하라’는 불도저식 사고를 갖고 있는 만큼 자신의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은 좋아하지 않았다. 왕회장 사전(辭典)에는 불가능이란 없었다. “난(難)공사여서 안 된다”는 말을 들으면 더욱 강하게 밀어붙였다. 1972년 파푸아뉴기니 라무 지하수력발전소 공사는 하상(河床) 및 지하 200m에 지하동굴을 만들고 발전기를 설치, 낙차(落差)를 이용하여 발전하는 일종의 유역변경형 수력발전소이다. 정인영(鄭仁永) 사장은 난공사라며 입찰에 응하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하지만 정 회장은 “난공사이기 때문에 우리가 승산이 있다”며 적극 참가하라고 강하게 명령했다. 정 회장은 “선진국 회사와 같은 기술과 경험이 없으니 몸으로 때울 수 있는 이런 난공사만이 우리를 크게 부각시킬 수 있다”는 논리를 폈다. 정 회장의 적극적인 의지로 입찰에 응했고 결국 성사가 되었다. 대신 공사경험이 없는 우리가 다른 업체의 협력을 받아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우리 식대로 방법을 찾아 공사를 착착 진행하자 착공 4개월 후부터 다른 업체가 개입할 이유가 없어졌다. 1100만 달러의 라무 지하수력발전소 공사에서 현대건설은 이익을 남기고 공기도 6개월 단축하여 준공했다.
아무 경험도 없는 나라에서 그의 모험심과 추진력과 판단력이 없었다면 우리는 그렇게 빠른 경제성장을 이루지는 못 했을 것이다. 그를 대표할 여러 작품이 있지만 두 가지만 꼽는다면 나는 경부고속도로와 현대차를 꼽겠다. 65년도 박통은 독일의 아우토반을 달려 본 후 우리도 고속도로를 갖아야 한다는 어느 신념을 갖는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비료공장을 하나 더 짓지 시기상조라고 이구동성으로 떠들어댔다. 그때 정 회장을 만난 박통, 자신 있다는 것이다. 힘을 얻은 박통은 바로 고속도로사업을 추진한다.
건설은 경험이다. 현대건설은 1961년에 4월에 착공한 군산비행장 활주로 포장공사에서 콘크리트 제조설비인 배치 플랜트가 꼭 필요했다. 하지만 어떻게 만드는지조차 몰랐다. 그러던 중 미국 회사가 지금의 미국대사관 건물을 건축 중이었는데 그 안에 배치 플랜트가 설치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높은 담장을 기어 올라가 배치 플랜트를 확인한 후 정문 경비원을 회유해서 경내로 들어가는 데 성공했다. 그렇게 해서 국산 제1호 배치 플랜트를 만들었다. 이후 수원 광주 대구 활주로 포장공사를 미국업체와 같이 수행했다. 다 합쳐서 10km에 불과했다. 정 회장은 이 경험을 바탕으로 태국 고속도로 공사를 수주했다. IBRD 차관공사인 태국의 파타니-나라티왓 공구 수주 경쟁에서 현대건설은 최저가인 520만 달러를 제시했다. 2위는 580만 달러로 60만 달러나 차이가 나자 도로국에서 할 수 있는지 확인했다. 정 회장은 이때 포기하면 현대건설은 해외공사를 영원히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인식하여 계약을 결심했다. 1965년 5월부터 방콕에 터를 잡은 현대 기술진은 인근 독일, 이탈리아, 일본 회사의 현장을 견학하면서 어떤 장비를 사용하는지 살펴보았다. 국내업체 가운데 최초로 해외 진출이라는 기록을 세운 파타니-나라티왓 구간은 1968년 5월에 준공했고, 10년이 지나도 파손된 곳이 없었다. 바로 이 무렵 이명박이 그 현장에 배속된다.
당시 경험이 없다보니 고속도로비용 산출도 중구난방이었다. 박통은 총 건설비 700억 원이 필요하다는 보고를 받고 고심하던 차였다. 현대건설은 330억원을 제시했다. 그 비용은 독일에 파견나간 간호사와 광부 덕으로 독일서 얻은 차관과 월남 파병 대가로 미국으로부터 받는 임금이었기 때문 그야말로 피눈물 나는 돈이었다. 이윽고 1968년 2월 현대건설이 서울-수원 구간을 시범건설하게 되었다. 젊은 공병(工兵)장교들이 이 구간에서 연수를 받아 다음해부터 전 공구(工區)에서 감독을 했다. 하지만 경험이 없는지라 터널공사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옥천 공구 당제터널 공사는 난제 중의 난제였다. 지층이 돌이 아니라 절암토사(節岩土砂)로 된 퇴적층이었기 때문이다. 터널을 뚫고 들어가려면 단단한 돌이 받쳐줘야 하는데 조금만 파면 흙처럼 무너져 내리기 일쑤였다. 그러다가 결국 일이 터졌다. 당제계곡 쪽에서 20m 쯤 파고 들어갔을 때 순식간에 벽이 와르르 무너졌다. 미처 피할 틈도 없이 인부 셋이 죽고 하나가 다쳤다. 그 뒤로도 낙반 사고가 잦았다. 솟구치는 용수(湧水) 때문에 바위를 들어내던 인부들이 10여 미터 씩 나가떨어지기도 했다. 공사 진척이 눈에 띄게 더뎌졌다. 하루에 2m 뚫으면 다행이고, 상황이 나쁜 날은 30cm가 고작이었다.
당제 터널 때문에 공사는 2개월이나 차질이 빚어졌다. 정주영은 입이 바싹 말랐다. 당제터널은 상행선이 590m, 하행선이 530m에 이른다. 그러나 특히 힘들었던 상행선의 경우 겨우 350m를 뚫었을 뿐인데 박정희 대통령과 약속한 준공일은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었다.
당시 이한림 건설부 장관은 일주일에 한 번, 건설부 도로국장은 사흘에 한번 씩 현장에 나타나 정주영에게 눈치를 주었다. 박대통령의 독촉과 성화는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경부고속도로의 준공이 이 공사에 달려 있었다. 이 상태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고 판단한 정주영은 비상체제를 가동했다. 흑자를 포기하고 현대건설의 명예를 선택하는 결정을 내렸다. 적자를 보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 현대건설 때문에 단군 이래 최대 토목 사업이 차질을 빚었다는 말만은 죽기보다 듣기 싫었다.
정주영은 먼저 단양 시멘트 공장에 보통 시멘트보다 스무 배나 빨리 굳는 조강(早强) 시멘트 생산에 전력투구할 것을 지시했다. 하루라도 공기를 단축하려면 그 수밖에는 달리 묘안이 없었다. 단양 공장에서 당제터널 공사 현장까지는 약 200km에 이르는 먼 거리다. 조강 시멘트를 수송하는 데만도 큰 돈이 들었지만 이미 적자를 각오한 터였다. 작업조도 2개조에서 6개조로 늘렸다. 500여명의 인부들이 개미처럼 달라붙어 굴을 파들어 갔다. 조강 시멘트는 단단한 버팀목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한마디로 장비와 인원을 집중 투입해서 한달음에 일을 끝마치는 돌관(突貫) 작업이었다. 이렇게 해서 3개월 걸릴 일을 25일 만에 마쳤다. 두 달 밀렸던 공기를 가까스로 원래 일정에 맞추는 데 성공했다.
1970년 6월 27일 밤 11시, 당제터널 남쪽에서 ‘만세’ 소리가 터졌다. 이로써 경부고속도로 마지막 공사이자 최대 난제였던 당제터널 상행선이 뚫렸다. 하행선은 이미 한 달 전에 뚫린 상태였다. 1969년 9월 11일 터널 공사에 착공한 지 꼭 290일 만이었다. 전국을 일일생활권으로 묶는 전장 428km의 경부고속도로는 박정희 대통령, 육영수 여사, 정주영 등이 참석한 가운데 1970년 7월 7일 역사적인 개통식을 갖는다. 1968년 2월 1일 착공했으니 2년 5개월 만에 전 구간 왕복 4차선의 국가 대동맥이 완성된 셈이다. 다른 나라에서는 선례를 찾을 수 없는 초스피드 공사였다. 우리 돈으로, 우리 기술만으로 완공했다는 의미도 크다. 경부고속도로 개통을 기념하는 추풍령 기념탑에는 이런 글귀가 써있다. “우리나라 재원과 우리나라 기술과 우리나라 사람의 힘으로 세계 고속도로 건설사상 가장 짧은 시간에 위루어진 길.”2년 반이라는 짧은 기간에 420km의 4차선 고속도로를 건설한 예는 세계 어디에도 없었다. 들어간 총 공사비는 440억원. 당시 금강휴게소는 현대가 소유하였는데 그런 연유와 연관이 있지 싶다. 중동건설은 바로 경부고속도로의 경험에서 얻은 자신감이었다.
이후 왕회장은 자기가 건설한 경부고속도로인 만큼 그 위에 차도 우리가 만들어야 한다는 또 어느 신념이 작용했던 것 같다. 마침 미국 포드사는 중국과 한국등 아시아를 겨냥해 한국진출을 도모한다. 조립생산 기지를 구축하려는 것이었다. 기술을 가르치고 작업자를 양성하는 데 현대와 손을 잡는다. 당초 예상보다 빠른 1970년 코티나를 생산해내자 포드는 반색을 했다. 자신을 얻은 왕회장은 독자개발을 하기로 마음을 먹고 포드를 설득하려들지만 포드는 무리한 지급보증을 내세워 거부를 하였다. 왕회장은 그렇다면 하고 이탈리아와 손을 잡고 자동차 독자개발을 서두른다. 그것이 바로 포니 자동차다.
그들 삼형제는 용감했다. 왕회장 진두하에 정인영은 현대양행에 자동차 부품을 정세영은 자동차를 맡아 추진했다. 디자인한 모양을 일본 차 란세를 뜯어 거기에 대어놓고 맞추어나가는 식으로 차를 꾸몄다. 1974년 토리노 모터쇼에 처음 선을 보이고 1977년도던가 생산에 본격 돌입하여 세계 16번째 자동차 생산국이 되었다. 세계5위인 물론 지금의 상황은 말해 무엇하리.
성공한 사람들은 나름의 성공법칙이 있다. 왕회장은 그 성공사례를 총 모은 것과도 같다. 그는 조직운영의 귀재(鬼才)였다. ‘조직의 효율은 긴장에서 온다’는 것이 정 회장의 첫 번째 성공법칙이다. 정 회장은 ‘조직의 긴장은 곧 능률이고 정신통일’이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언제나 무리 중 한 사람은 희생양이 되었다. 그렇게 되면 조직 전체가 늘 긴장 속에 놓이게 된다. 이와 같은 일은 현장뿐 아니라 본사 회의 때도 마찬가지였다. 정 회장이 주재하는 회의는 긴장 속에서 진행된다. 정 회장은 언제나 정보를 많이 갖고 있었고, 그 정보가 틀린 적이 없었다.
정 회장의 두 번째 성공법칙은 ‘탁월한 위기관리 능력’에 있다. 건설현장의 일은 동일한 사안도 때에 따라 기후조건, 사회환경에 따라 달라지므로 반복이 없다. 날마다 크고 작은 일들이 돌발적으로 생기는 곳이 현장이다.
위기가 발생했을 때는 탁월한 지도자가 필요하다. 위에서 해결방법을 찾아 신속하게 아래에 전해 다 같이 그 일을 헤쳐 나가야 돌파할 수 있다. 현대건설이 여러 가지 어려움을 극복하고 세계적인 회사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결국 정 회장의 위기관리 능력에서 비롯되었다. 능력 있는 믿음직한 리더가 있었기에 부하직원들이 마음 놓고 기량을 발휘할 수 있었다. 정 회장의 위기관리 능력은 언제나 현장의 사기와 능률을 향상시키는 지표가 되었다.
셋째, 정주영 회장은 전문가를 넘어서는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토목을 전공하지 않았지만 현장의 그 누구보다도 해박했다. 이는 정 회장이 토목건설에 남다른 애정을 갖고 끊임없이 노력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떤 공사를 입찰할 때나 시공계획을 확정할 때 반드시 사전에 결재를 받아야 한다. 단순한 보고가 아니라 심문하는 과정이었다. 질문에 충분한 설명을 못하는 자는 내용을 완전히 소화하지 못한 걸로 간주하고 재검토 후에 결재를 받아야 했다. 이 과정에서 정 회장은 뛰어난 기억력으로 전문기술을 완전히 습득해 다음 공사에 활용했다. 기술을 사실지식과 과정지식으로 분류한다면 정 회장은 풍부한 과정지식의 소유자였다. 부족한 사실지식을 결재과정에서 습득하여 최상의 의사결정을 내려 사업에 성공한 것이다.
넷째, 치밀한 현장확인이 정 회장의 성공요인이다. 정 회장은 지나칠 정도로 현장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앉아서 보고받는 일에 익숙한 사람들과 달랐다. 정 회장은 부지런히 현장을 달렸다. 정 회장은 어떤 공정을 언제까지 완료하라고 명령한 뒤 매일 전화로 확인했다. 회장이 언제 현장에 출동해 점검과 질문을 할지 모르니 모두들 긴장 속에서 최선을 다했다.
전화로 질문을 받을 때도 만전을 기해야 했다. 예를 들어 “토사운반 덤프트럭을 몇 대 가동하고 있는가”라는 물음에 “15t 덤프트럭 10대”라고 보고하면 “무슨 트럭이냐”고 또 묻는다. “현대차 5대, 대우차 5대”라고 대답하면 “적재함 뒤 문짝이 없는 차는 몇 대냐”는 질문이 날아온다. 아무리 철저한 확인을 해도 차 뒤쪽 문짝까지 확인하기는 힘들다. 그때 대답을 못하면 가차 없이 꾸중이 날아온다. 정 회장이 현장 사람을 괴롭히기 위해서 뒷문짝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다. 굴착, 상차, 운반에 다 비용이 드는데 뒷문짝이 없으면 흙을 흘리게 되고, 그러면 손실이 발생하기 때문에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이다. 다섯째, 정 회장은 원가(原價)의식에 철저했다. 근검절약은 곧 원가의식이다. 정 회장의 근검절약 사상은 설명이 필요 없을 정로도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정 회장은 원가에 대한 암산능력이 탁월하였다. 참모들이 호주머니에 슬라이드 룰러(slide ruler)를 갖고 다니며 정 회장의 암산을 확인하곤 했는데 틀린 적이 없었다.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는 그의 말대로 성공의 과정에서 우리 베이비부머들의 고귀한 희생이 있었다. 지금 대한민국이 선진국 문턱에나마 들어서게 된 데는 우리가 흘린 피와 땀이 밑거름이 됐음은 물론이다. 박통과 정주영이 조국 근대화의 기치를 들고 앞장을 섰다면 우리는 그 뒤를 따르는 충직한 산업전사였다. 나는 왕회장이 소를 몰고 북한을 간 것이라든지 정치에 뛰어든 때보다는 시련을 겪던 그 시절이 더 보람찼다싶고 기억에 남는다. 올해는 왕회장의 탄생 100주년이다. 정주영 회장은 1915년 11월25일 강원도 통천군에서 태어나 2001년 3월21일 타계했다.
정 명예회장은 경제계 뿐만 아니라 한국 현대사에도 한 획을 그은 인물인 만큼 탄생 100주년 기념행사가 어떻게 치러질지 관심이 간다. 현대와 삼성, 우리나라 경제의 양 기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현대의 정주영회장과 삼성의 이병철회장, 삼성그룹은 고 이병철 회장의 탄생 100주년이던 2010년 2월 고인의 인간적인 면모와 경영성과를 강조하는 대규모 행사를 열었다. 참 두 분 수고 많이 했다. 베이비부머의 한 사람으로서 말한다. 덕분에 열심히 살았고 힘은 들었지만 즐거웠고 보람이 있었다. 정말 고맙다. 부디 잘 가시라. 나는 그 시대 인물들의 걸출한 행태를 또 다른 이념의 잣대로 재단하는 것은 그들의 훌륭한 리더십과 숭고한 업적과 희생정신을 훼손하는 어리석은 짓이라고 여긴다. 한 시대의 인물은 그가 처한 그 시대를 배경으로 평가하여야 한다. 당시 현대차 생산을 극구 말린 미국의 스나이더 대사, 왕회장은 건설로 번 돈을 다 잃어 망한다하여도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누군가는 배운 만큼 올라선 위치에서 또 이끌고 갈 것이라고 당당히 말했다고 한다. 아마 미국 말을 들었더라면 우리는 미국의 자동차 한낱 조립공장으로서 종속적인 역할에 만족하였을 것이다.
흔히 재벌이라고 하지만 그에 앞서 결단과 판단으로 가난한 그 시절을 이끈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경험이 없기는 누구나 마찬가지인데 그들은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문득 떠오르는 국제시장이란 영화 맨마지막에 윤덕수 할배(황정민 분)가 흥남 부두에서 헤어진 아버지의 마고자를 꺼내 부여잡고 울면서 하는 대사.
'아버지, 저 이만하면 잘 살은거죠. 아버지 말씀대로 가장으로 할 만큼 한거죠....''그런데 정말 여기까지 오는 데 너무 힘들었어요....'주인공의 독백이기도 하고 그말은 그 두 거두의 말이기도 하고 이 나라가 오늘까지 살아온 이야기이기도 하다.그 시절 우리는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