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철답지 못하게 비가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지인과 의기투합하여 답사를 결정할 때만 하더라도 내일은 분명 비온다는 예보가 없었는데 정신을 못차리게 연신 우르르 쾅 거리는 천둥소리와 우수관을 따라 내려오는 물소리는 까만밤을 지새우게 했다. 새벽녁이 되어 잠이 들었던가 아이의 등교와 남편의 출근시간이 조급해졌다.
수원역에서 지인을 만나 전철을 타고 전철역 한성대역까지 갔다. 미리 답사할 곳을 검색하지 못함을 먼저 이실직고를 하자 지인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가면서 검색하지 뭐"하면서 다양한 튀김을 판매하는 포장마차로 이끌었다. 방금 나온 고추 튀김과 오징어 튀김은 바삭하고 아주 고소했다. 얼마만에 길거리에 서서 먹어보는 것인지 그동안 이런 재미에 너무 적조하였다. 길고 짧음을 가리지 않고 여행에서 먹는 재미란 빼놓을수 없는 것인데 같은 이상을 갖는 동행과 먹는 즐거움은 더욱 컸다.
한 평생 내것에 설레고 홀렸던 혜곡 최순우
성북동! 드라마에서 있는 집 마나님이 넓은 거실에서 그리고 우아하게 "성북동입니다"라고 전화 받던 장면을 흉내내면서 키득거렸다. 하지만 오늘은 걸어서 성북동 완전정복이다. 혜곡 최순우 옛집은 걸어서 십 여분을 가 주택가 골목안으로 들어가니 외로이 한옥을 지키고 있었다. '최순우 옛집'이라는 푯말이 있어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최순우 옛집은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이자 사학자였던 혜곡 최순우 선생이 말년을 보냈던 곳이다. 선생의 대표적인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를 집필한 곳이기도 하다. 지금은 '혜곡 최순우 기념관'으로 운영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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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곡 최순우 선생
대문을 들어서니 앞 마당에 잘 생긴 소나무와 향나무가 운치있게 서 있고, 그 아래로 작은 꽃밭이 있다. 정원수가 아닌 우리가 흔희 들에서 볼 수 있는 모란. 해당화 수국. 수련. 개미취 같은 화초도 마당 곳곳에 자리 잡았다. 또 우물도 있다. 우물 옆에 향나무가 있으면 물을 맑게 해 준다는 이야기를 어른들께 들었는데 그래서였을까 뚜껑이 단정하게 덮힌 우물 옆에 수도도 서 있다.
ㄱ자와 ㄴ자가 합쳐진 모양의 가옥은 행랑채에는 선생의 유품이 전시 되어 있으며 들어서면서 왼쪽 방은 관리사무실로 쓰고 있다. ㄱ자 방의 안채에는 '두문즉시심산(문을 닫으면 깊은 산속)'이란 선생이 직접 쓴 현판이 있다. 쪽마루에 앉아 잠시 쉬어보니 왜 그런 현판을 쓰셨는지 금방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번잡스런 도시와는 단절 된 깊은 산중에 있는 것 처럼 고요하고 마음까지 차분해졌다.
뒷뜰로 가는 골목에 아기가 엄마 다리 옆에서 절구통처럼 생긴 웅덩이에 고인 물로 장난치고 있다. 그 모습이 귀여워 잠시 한눈을 팔았다. 뒤 뜰로 접어서는 기둥에 손을 얹고 정원을 바라보았다. 키가 큰 상수리 나무, 반쯤 나무로 가려진 조각상들 , 윤이 반짝잔빡 나는 항아리 무리 그리고 단정한 원탁의 돌 테이블 세트. 그 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어린날 어머니의 장독대를 닮은 뒷마당이 비움이라면 앞마당은 채움의 미였을것이다. 그 느낌을 체험하고 싶었다. 생전에 박완서님은 그 기둥에 손은 얹고 뒷마당을 바라보면 그리 마음이 푸근 할 수가 없었다고 유고집에 밝힌바있다고 한다. 그래서 아는 이들은 '박완서 기둥'이라고 한단다.
이 가옥은 근대한옥의 북향이지만 뒷마당을 넓게하여 용자 창살로 들어오는 빛이 많아 남향집 보다 더 운치있는 풍경을 만들었다. 평상시에 방에 들어가지 못하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운수좋은 사람은 그냥가도 차 대접을 받는다. 과연 방에서 보는 풍경이 정말 한 폭의 산수화 같이 아름다웠다. 양쪽 문을 열고 여름날 누우면 저절로 낮잠에 빠져들것 같이 시원한 바람이 열어 논 문으로 통하여 뒤뜰에서 안뜰로 통하였다. 역시 '오수방' 낮잠자기 최적의 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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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우 옛집 뒷마당에서 본 전경
운수 좋은 사람은 어딜 가도 환영 받는다고 마침 그날 '혜곡 최순우. 한국미의 순례자'의 저자인 이충렬님과 작가와의 만남이 있는 날이었다. "한 평생을 내것에 설레고 사무치고, 새것이 아닌 옛것에 홀리고 미치고 취했다"고 이충렬님은 선생을 그리 표현했다. 선생은 일본을 시작으로 미국, 유렵을 순회전시를 통해 오천년 역사와 훌륭한 전통 문화유산을 세계에 알리고 국격을 높이게 된 것에 크게 기여하였다. 암울한 시기에도 우리 문화재에 대한 사랑과 자부심이 수많은 선생의 글이 탄생되었고 우리것의 아름다움을 알리는 또한 전도사이기도 했다.
유홍준선생.간송 전형필 선생 등 비하인드 스토리를 많이 들을 수 있었던 귀한 시간이었다. 더불어 출판한지 한 달도 되지 않는 따끈따끈한 책에 작가의 서명까지 받아왔으니 이만하면 마음만은 부러울게 없는 풍성한 날이다.
최순우 옛집에서 만난 일산에서 온 독서토론 모임 회원들과 손국수 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성북동 맛집으로 등록 된 이 곳은 맛과 가격이 화성박물관 옆에 있는 대왕칼국수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마침 화성 탐방 계획도 있다해서 수원에 대한 자랑을 늘어 놓았더니 그 때 길잡이를 부탁한단다. 쾌히 승낙을 하고 다음 목적지인 심우당으로 발길을 옮겼다.
님은 갔지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만해 한용운
성곽을 왼쪽으로 끼고 또 십 여분 오르니 잘 정비 된 나무계단으로 심우장 입구가 보인다. 심우장을 가는 길 입구는 나무계단으로 잘 정비가 되어 있었지만 주택가 올라가는 경사진 길은 빗물에 패인 바닥이 울퉁불퉁 골이 파여 있었다. 겨울에는 연탄재가 없으면 절대로 왕래를 할 수 없을 만큼 가파른 길을 끝없이 올라갔다. 좁은 길가에 마을과 어울리지 않은 오래 된 소나무가 보인다. 심울장이라고 쓰여진 철문이 보인다. 성북동 여행코스인지 관리인은 보이지 않고 스탬프는 알아서 찍어가라는 메모가 적혀있다. 대문은 닫혀있고 옆에 작은 문으로 들어가니 문 앞에 허름한 양옥이 떡 버티고 서 있다. 예전 한용운 선생의 따님이 심우장을 관리하면서 기거하던 곳이라고 한다. 한용운 선생이 기거하던 심우장은 들어가면서 왼쪽에 있는 근대 한옥이었다. 조선총독부가 눈 앞에 보이는 것이 싫어 북향으로 집을 지었다는 일화가 있기도 하다.
만해 한용운 선생은 1919년 3.1운동 때 독립선언 준비과정에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으며 3년간 옥고를 치르면서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과 개요'를 집필, 그의 독립사상을 표현했었다. 그리고 1926년 시집 '님의 침묵'을 간행하여 그 사상적 깊이와 예술적 차원의 높이로 한국 현대시상 가장 빛나는 시인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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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한용운 옛집 -심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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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우장의 살림살이는 단출했다 쪽마루을 두고 중앙에 있는 방에는 선생의 유품과 글이 전시 되어 있다. '마저절위' 끊임 없이 정진하라는 선생의 친필 액자도 있다. 선생의 영정이 있는 방에 앉아 밖을 보니 가깝게는 선생이 직접 심었다는 향나무가 하늘 높이 서 있는 것이 보이고, 멀리 잘 정비 된 성북동 주택가가 시원스럽게 한 눈에 들오온다. 선생은 이곳에서 1933년부터 중풍으로 돌아가실 때 1944년까지 기거했다고 전해진다.
공동체적 삶을 노래했던 비둘기 시인 김광섭
심우장을 나와서 다시 좀 더 경사지고 좁은 길을 따라 올라갔다. 어느 블로그에서 근사하게 보았던 비둘기 공원이 생각이 나서 올라갔던 것인데 막다른 곳까지 올라갔는데 공원은 없고 가로 지르는 도로 벽에 칠이 벗겨지는 비둘기 그림만 있다. 다시 되짚어 내려갔다. 굴다리를 지나 옆으로 시민들의 쉼터라고 볼 수 없이 노후하고 휴식처로서 기능은 오래 전에 다한 것 같은 작은 공원이 나타났다. 김광섭 선생이 노래했던 '성북동 비둘기'는 벽에 있는 조형물만 남아 있었다. '성북동 비둘기'는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로 자연 생태계와 인간의 순박성이 점차 상실되어 가고 있는 세태에 대해 경종을 울려 주는 작품이다. 순박한 인간성, 평화의 사상까지 파괴되었을 때 우리의 삶은 어떠할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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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둘기 공원의 벽에 있는 비둘기 조형물
만해 한용운 선생의 명성에 많이 못미치는 미흡한 관리가 안타까웠던 심우장과 김광섭 선생이 노래했던 성북동 비둘기는 그 때 모두 떠나고 이젠 흔적도 찾기 조차 힘들었다. 주변 환경도 오래 되어 맞은편에 보이는 성북동 고급 주택들과는 판이하게 달라 "성북동에 이런 곳이..."고정관념을 깨는 곳이었다.
수연산방에서 이태준 선생의 문심을 훔치다
숨이 차게 올라왔던 좁은 길을 다시 내려갔다. 오늘의 마지막 목적지인 수연산방이다. 수연산방은 상허 이태준 선생의 옛집이다. '운문에 정지용. 산문에 이태준'이라고 할 정도로 최고의 문장가였던 선생은 이곳에서 '무서록','왕자호동', '달밤' 등을 집필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외종손녀가 전통찻집으로 운영하고 있단다. 가옥이라기 보다 예쁜 별장 같은 느낌이 첫인상이었다. 내가 이곳을 알게 된 것은 선생의 '성'이란 짧은 수필을 접하면서 꼭 와 봐야겠다고 생각했었다. 선생은 매일 아침 칫솔질을 하다 바라보게 되는 성곽에 대하여 빤히 들여다 보면 이를 닦는 것인지 성곽을 닦는지 착각에 빠진다고 하였다. 하지만 조광보다 역시 저녁 해지는 석양이 더 아름답다고 하였다. 누마루가 있는 전망 좋은 곳에서 차를 마실 수 있다는 기대로 갔지만 이미 와 있는 손님들이 많아서 대청마루에서 선생이 느꼈을 문심을 느껴보았다. 성곽은 앞 건물과 나무에 가려서 보이지 않았지만 그 어디쯤엔가 매일 선생이 보았을 성곽을 느낄 수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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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허 이태준 옛집-수연산방
문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처음으로 가게 되는 곳이 이곳 성북동이 아닌가 한다. 오늘은 가지 못했지만 잘 생긴 백석 선생과 김자야 선생의 아름다운 사랑이 녹아있는 대원각. 김영현(=김자야)선생과 법정 스님의 크고 큰 베품을 배울 수 있는 길상사.
하루 동안 다니기에는 조금 벅찬 성북동 문학 기행이었지만 유년시절 문학소녀의 마음을 다시 점검 할 수 있는 뜻 깊은 날이었다. 어느 날엔가 나도 이 한 페이지를 장식한 날을 기대한다.
첫댓글 용기를 정말 많이 내서 올렸습니다. 이런걸 이렇게 겁 없이 창작공간에 올려도 되는지 .
자격이 안되면 바로 내리겠습니다. 꾸--벅
수연산방, 만해 옛집, 길상사등 성북동 문화 탐방을 우리 반디 6기 스터디 팀원들과 작년에 다녀왔습니다. 학우님의 글을 보니 그 때의 재미있고 유익했던 추억이 떠오르며 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잘 쓰셨어요. ㅎ
학우님들과 함께 가면 참 좋을 곳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잠시라도 추억을 열어보는 시간이 되셨다니 다행입니다. 꾸벅
후배님의 용기에 박수를 보냅니다...
글을 무척 잘쓰시는 분이네요..
제가 갔다온 것처럼..기분이 즐겁습니다...
다음번에는 같이 가고 싶어요...
선배님께서 불러만 주신다면 앞장서서 길잡이 하겠습니다. 꾸벅
심춘자 학우님은 e수원뉴스에서도 잘 알려진 시민기자님이십니다. 역시, 글은 갈고 닦아야 빛나는 것인가 봅니다. 나는 주로 한 가지에만 꽂히는 편인데, 심춘자 학우님은 다양한 얘기거리를 보는 눈을 가지셨군요..부럽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정말인줄 압니다. 그냥 소소한 일상 ... 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