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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 둘째 이야기, 오 필승 코리아!(3)
[정해랑 연재소설] 노동자 신돌석씨의 하루 (144)
[삽화-백소(白笑)]
후반전은 전반전처럼 일방적으로 당하지는 않는 것 같다. 양측이 팽팽하게 일진일퇴를 거듭하였다. 전반처럼 대량 실점을 하면 어떻게 하나 걱정을 했는데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브라질이 전반전에 많이 넣어서 다음 경기인 8강전을 대비해 체력도 비축하고 부상도 방지하기 위해 슬슬 뛰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 측의 거센 공격에 어려움을 겪는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런 가운데 황희찬이 쏜 강슛이 골키퍼의 선방으로 골 밖으로 날아갔고, 손흥민이 패스를 받아 절묘하게 드리블해서 쏜 슛이 골키퍼의 어깨를 맞고 빗나가기도 했다.
지금 이 순간 얼마나 많은 사람이 카타르에 직접 가서, 거리에서, 술집에서, 집에서 이 장면들을 보면서 마음을 졸이는가. 그러면서도 오직 한 마음 기적이 일어나서 우리나라가 이겼으면 하는 마음들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처럼 스포츠가 갖는 통합의 기능은 놀라울 정도이다. 사실 스포츠는 사람들의 불만을 잠재우고 의식을 마비시키는 역할도 하지만, 국민 통합에 기여하고 공동체에 대한 사랑을 일깨워 주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어느 일면으로만 이야기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신돌석씨는 생각한다.
그런데 스포츠는 통합에 기여하기도 하지만 국민 분열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국제 경기야 국민 분열이 생길 여지가 별로 없겠지만, 국내 경기에서는 지역 간 분열이 심하게 나타난다. 특히 1980년대부터 생긴 프로 경기에서 지역 간 경쟁을 넘어서서 상대 지역에 대한 혐오 내지는 증오로까지 발전시키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프로야구가 그런 구실을 많이 했다. 그것은 야구가 갖고 있는 속성이 그래서 그런 것은 아니다. 스페인에서는 바르셀로나에서 레알마드리드의 팬이라고 했다가는 식당에서 식사도 하기 힘들다는 말이 나올 정도라고 한다.
프로야구가 지역 분열과 갈등의 진원지가 되는 것은 지역별로 나뉘어 있어서 그런 모양이다. 축구도 그렇기는 하지만 그것은 대부분 도시별로 나뉘어서 지역 감정이 그리 크게 나타나지는 않는 것 같다. 그런데 프로야구는 일찍부터 영호남과 충청, 서울, 인천 등으로 나뉘어서 대립을 하였다. 그런 가운데 특히 영호남의 대결을 교묘히 이용해서 관중을 끌어모았다. 호남을 대표하는 팀인 해태 타이거즈와 영남을 대표하는 부산 경남의 롯데자이언츠, 대구 경북의 삼성라이온즈의 대결로 프로야구의 흥행을 몰아갔다. 특히 해태와 롯데의 대결이 그랬던 것 같다.
프로야구가 생긴 1982년은 광주항쟁에서 시민들이 흘린 피가 채 마르기도 전이었다. 당연히 프로야구 같은 것은 거부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국민들의 프로야구에 대한 열기를 잠재울 수는 없었다. 그런 가운데 호남 지역 사람들은 연고지 팀인 해태 타이거즈를 응원하면서 울분을 달랬던 것 같다. 신돌석씨가 아는 전라도 출신 친구들 중에서는 그거라도 이기지 않으면 어떻게 사냐고 말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마침 해태 타이거즈가 최강팀이 되어서 우승을 거듭하자 호남 사람들의 프로야구에 대한 애착은 더욱 강해졌던 것 같다.
그것은 부산 경남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의 정치적 불만은 1980년대까지는 굉장했다. 사실 부마항쟁은 김재규에 의한 10. 26 박정희 제거가 아니었으면, 광주항쟁처럼 번졌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었다. 게다가 자신들의 지역이 낳은 정치지도자 김영삼에 대한 박정희, 전두환 정권의 탄압은 이들을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다. 1990년 3당 합당 이후에는 ‘우리가 남이가’로 바뀌었지만, 5공 시절만 해도 중선거구로 여야가 동반당선되던 선거였는데 부산에서는 두 군데에서나 당시 신한민주당이 복수 공천해서 둘 다 될 정도였다.
이러한 불만과 분노가 1987년에도 엄청난 폭발력을 보여주었다. 어떤 사람들은 전두환과 노태우가 6.29로 항복을 하게 된 것은 부산 때문이라고 보기도 하였다. 그만큼 6월 민주항쟁에서 부산지역의 시위 규모는 엄청났었다. 부산이 낳은 최고 야구 스타인 최동원이 6월 민주항쟁 때 가두시위에 참여했었다는 증언은 이제 널리 알려진 일이다. 이러한 열기가 프로야구를 통해 롯데자이언츠를 응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하여 전라도의 해태 타이거즈, 부산 경남의 롯데 자이언츠에 대한 응원 열기는 다른 지역이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엄청났었다.
[삽화-백소(白笑)]
그런데 이러한 열기가 두 지역의 연고팀이 경기를 할 때는 지역 갈등으로 나타나는 폐해가 있었다. 양쪽 팬들이 충돌하는 일부 불미스러운 사건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이러한 충돌에는 대구 경북 연고팀인 삼성라이온즈의 팬들이 적지 않게 가세하였다. 하지만 영국을 비롯한 유럽지역의 훌리건들이 하는 행태에 비하면 점잖은 편이었다. 그래도 구단주인 대기업에까지 영향을 미칠 정도로 지역의 일반 사람들까지 갈등이 심했는데 그것을 우려한 롯데 측이 야구 연고팀이 되기를 꺼렸다는 설이 있고, 실제로 롯데와 해태 모두 상대 연고지역에서 매출이 급감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프로야구가 생긴 지 40년이 된 지금 이러한 지역 갈등도 옛 이야기가 되었다. 물론 지역 갈등은 여전하고, 선거가 있을 때마다 그것은 격화되어서 나타난다. 하지만 프로야구에서는 다르다. 최근 몇 해 동안 프로야구는 거의 수도권팀들이 완전히 휩쓸고 있다. 가을야구를 하는 다섯 팀 중 수도권 이외의 팀은 거의 없다. 우승도 연고지가 경남인 신생팀 엔씨 이외에는 줄곧 수도권팀이 독차지하고 있다. 올해도 4위까지 모두 수도권 팀이었다. 그러므로 이제 프로야구의 지역 갈등은 영호남 대립이 아니라, 수도권 집중이라는 모순의 민낯을 드러내는 것이 되었다.
지금 60대 이상인 사람들은 알겠지만 지역 갈등을 이용해 스포츠 흥행을 한 것은 프로야구보다 먼저 고교야구였다. 고교야구의 대표적인 대회인 청룡기가 초기부터 경남중과 광주서중이 대결했고, 그것이 엄청난 인기를 모았다고 한다. 경남중의 3연패를 저지한 광주서중의 경기는, 당시 최고 투수인 장태영과 김양중의 대결이었다는 것을 신돌석씨는 나중에 신문기사를 통해 알았다. 그런데 이후에는 호남지역에서는 이렇다 할 성적을 낳는 팀이 나오지 않고, 당연히 뛰어난 선수가 없다. 무엇 때문인지 신돌석씨는 자세히 알지 못한다.
최근에는 기아타이거즈와 같은 호남 연고팀만이 아니라 다른 지역 출신 선수들 중에서도 호남 출신 선수가 상당히 많다. 정확한 것은 모르겠지만 거의 압도적이라고 봐도 될 것 같다. 그것을 두고 신돌석씨가 잘 아는 호남 출신 친구는 광주에 야구 정기가 있는가 보다고 말해서 신돌석씨가 이전에는 안 그렇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사실 1980-1990년대까지만 해도 프로야구 감독 중 내로라 하는 사람들은 재일동포 출신 아니면 경상도 출신들이었다. 김영덕, 김성근이 재일동포 출신이라면, 김응룡, 강병철, 박영길, 우용득 등이 경상도 출신이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야구를 잘하는 학교는 거의 경상도 아니면 서울과 인천에 있었다. 서울의 선린상고, 중앙고, 성남고, 인천의 동산고, 인천고, 대구의 경북고, 대구상고, 부산의 경남고, 부산상고 등이 야구 명문이었다. 신돌석씨가 야구를 보기 시작한 뒤에 한 해를 싹쓸이한 팀들이 나왔는데 그게 바로 경북고와 선린상고였다. 선린상고가 한 해를 석권했다면 몇 해를 완전히 휩쓴 팀이 경북고였다. 신돌석씨는 당시에 경북고 팬이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경북고가 계속 우승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야구를 봤었다. 초등학교 6학년, 중학교 1학년 시절이었다.
신돌석씨 아버지는 경상북도 출신이다. 하지만 고향에 가는 적이 없고, 고향 이야기를 하지 않아서, 신돌석씨도 아버지 고향이 경북이라는 사실을 생각하고 산 적이 없다. 아마도 경북고를 응원한 것은 잘하는 팀을 좋아하게 되는 심리의 발동이 아닐까 나중에 생각했다. 그때만 해도 경북고가 원래 잘하는 학교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경북고는 그때 야구팀이 창단된 지 얼만 안 된 학교였다. 박정희가 엄청나게 밀어주어서 고교야구의 최강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들었을 때 어린 시절의 어리석음에 헛웃음이 나오기도 하였다.
그러던 경북고가 깨지기 시작한 것은 신돌석씨가 중학교 2학년 때 있었던 청룡기에서였다. 상대는 서울의 중앙고였다. 신돌석씨는 그 경기를 친구와 함께 가서 봤다. 지금은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이 된 동대문운동장이었다. 그때는 서울운동장이라고 불렀다. 물론 당시에는 잠실야구장은 없었다. 그때 경북고는 초교급 투수가 둘씩이나 있었다. 나중에 국가대표도 하는 황규봉, 이선희였다. 중앙고에는 투수이면서 4번 타자였던 윤몽룡이 있었다. 그 전해부터 모든 대회를 제패해 온 경북고가 그 해 대통령배를 우승한 뒤 이 대회에서는 중앙고에 패했다. 아마 4 : 1이었던 것 같다.
그 뒤 한 동안 경북고는 우승을 못했다. 그해 가을에 기가 막힌 경기가 있었다. 황금사자기 결승전에서 부산고에 9회까지 1 : 4로 되지던 경기를 5 : 4로 뒤집은 역전극이었다. 주인공은 호남의 군산상고였다. 이때부터 군산상고는 역전의 명수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그때는 신돌석씨는 야구장에 가지 못했고, 라디오로 중계를 들었는데 9회말 투아웃까지 완전히 부산고가 우승하는 줄 알았는데 기가 막힌 역전극을 펼친 것이었다. 이때부터 호남 야구가 사람들의 관심 속으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이때 우승의 주역들이 이후 해태타이거즈 전성기의 주역들이 된다.
[삽화-백소(白笑)]
이후 몇 년 뒤인 1975년, 신돌석씨가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광주일고가 대통령배에서 우승을 하였다. 상대는 경북고였다. 광주일고 4번 타자 김윤환이 고교 야구 사상 처음으로 3연타석 홈런을 쳤다. 신돌석씨는 이때 수학여행을 가서 해운대에서 이 경기 중계를 들었는데 기가 막힌 경기였다. 친구들과 내기를 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신돌석씨는 경북고를 응원했으므로 경북고에 걸었다. 게다가 준결승에서 경북고가 군산상고를 물리치고 올라왔다.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지만 아마도 홈런으로 역전승했던 것 같다. 역전의 명수를 역전으로 이긴 것이었다.
그런데 결승전에서는 3연타석 홈런을 맞고 경북고가 패했다. 이때부터 호남 야구가 본격적으로 강자의 반열에 오르기 시작했고, 프로야구가 생기면서는 호남이 야구의 고장으로 이야기되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어린 친구들이 야구를 선호하게 되고, 그것이 프로야구 선수 중에서 호남 출신이 많게 된 결과이다. 정기 어쩌구 하는 것은 그냥 듣기 좋아서 한 말이 될 수는 있어도 터무니없는 것이다. 모든 사회현상은 역사적, 사회적으로 보아야 한다. 신돌석씨는 이것도 예외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는데 후반전 30분에 백승호가 중거리슛으로 골을 넣었다. 백승호는 후반전 20분에 교체 투입되었다. 기가 막힌 슛이었다. 본인의 월드컵 출전 첫 번째 골을 기가 막히게 차 넣었다. 한 골이라도 넣었으니 정말 다행이다. 이제는 역전이라는 기대는 사라졌다. 하지만 이 골이 열심히 뛴 선수들과 잠 설치면서 응원한 국민들에게 커다란 위안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상대가 세계 최강이라고 하지만 한 골도 넣지 못한 채 영패를 하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월드컵을 보고 난 뒤에 항상 생각하는 것이지만 이제는 K리그에도 관심을 기울여야겠다. 신돌석씨가 사는 도시에도 축구팀이 있다. 그런데 한번도 축구장에 가본 적이 없다. 뿐만 아니라 중계로도 보지 않았다. 아마도 신돌석씨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할 것이다. 하지만 월드컵이 끝나면 축구에 대한 관심은 멀어진다. 사실 국내 축구에 대한 관심은 만들어진 것이든 아니든 박정희 때가 훨썬 컸던 것 같다. 이제는 잘하는 선수 해외 리그에 나가서 뛰고 그 선수들이 대표로 월드컵에 나간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
우리는 너무 엘리트 스포츠에 젖어 있다. 유소년 스포츠나 중고등학교 스포츠가 허약한 상태에서 국가대표팀이 잘하기를 바라는 것은 자식들이 벼락치기로 우수한 성적을 받기를 바라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일본 고교축구팀은 4천 개가 넘는다고 한다. 결승전을 할 때면 4만여 명이 모일 정도라고 한다. 그에 반해 우리나라 고교축구팀은 겨우 140여 개이다. 결승전에 오는 관중은 3천여 명이 고작이다. 이건 축구만이 아니라 야구 등에서도 그렇다. 육상 등은 말할 것도 없다.
일본 고교는 90%가 축구팀을 갖고 있다고 한다. 신돌석씨가 중학교 다닐 때는 정식 축구부 말고도 축구팀이 있어서 그 팀들끼리 전국대회를 하기도 했다. 말하자면 중고교 아마추어라고 할까? 신돌석씨가 다니던 중학교에는 축구부가 없었는데, 축구 잘 하는 학생들을 선발해서 그런 팀을 꾸려 대회에 나갔었다. 정부 시책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축구 저변을 넓히기 위한 노력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것이 없다. 그리고 잘하는 선수들을 어떻게 하면 해외에 진출시켜서 엘리트로 육성할까 하는 생각만 한다. 이러니 일본에 뒤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이다.
백승호가 한 골을 넣자 그렇지 않아도 다닥다닥 집들이 붙어 있는 동네에서 ‘대한민국’을 외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지금 이 순간에 대한민국 국민은 한마음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것을 섣불리 자기 이상에 맞추어서 부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신돌석씨의 생각이다. 그러나 그 통합이 엉뚱하게 이용될 수도 있고, 분열의 도구로 변질될 수도 있다. 그래서 신돌석씨는 ‘대한민국’하고 외치는 것보다는 윤도현이 부른 ‘오 필승 코리아’를 더 좋아했다. 여기서 코리아는 남과 북을 모두 의미하는 것이다. 남과 북 모두 인정하는 이름이고, 해외에서도 우리를 그렇게 부른다.
이 경기가 끝나고 이제 선수들이 입국하면 윤석열과 김건희는 틀림없이 선수들을 부르고, 마치 자기 치적이나 된 양 한껏 폼을 잡을 것이다. 김건희가 요란을 떨면서 나댈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이명박이 대통령 때 동계 올림픽에서 좋은 성적을 낸 쇼트트랙선수들을 불러서 폼을 잡고, 언론에서 떠들어댔던 기억이 있다. 그때 선수들까지 미워하는 마음이 생겼다.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을 것이다. 선수들이야 부르면 가야지 어찌하랴? 국민의 바람과 동떨어진 일을 자행하는 대통령의 초청에 불응한다고 하는, 멋있는 스포츠인, 예술인이 나오면 좋겠다만 그건 시기상조이겠지.
이제 사우스, 노스 라는 것은 떼고 코리아로 하나로 불리는 날이 와야 하리라. 그 날이 올 때까지 스포츠가 국민통합에 기여하고, 민족통일을 위한 힘으로 작용했으면 좋겠다. 굳이 이겨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정정당당하게 경기하고, 세계 인류 평화에도 기여하는 스포츠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세계 속에 자신감 있게 서는 하나의 코리아가 되어야 한다. 그 날이 오기 위해 우리는 어디서든 무엇을 하든 열심히 살아야 한다. 신돌석씨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오 필승 코리아’를 새벽이라는 것도 잊고 큰 목소리로 불렀다.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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