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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3. 님의 침묵
- 한용운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려 갔습니다.
날카로운 첫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시집 님의 침묵, 1926)
* 님의 침묵 : 영원한 진리의 말 없는 말. 초월적인 존재의 음성.
* 정수박이 : ‘정수리’의 뜻. 머리 위에 숨구멍이 있는 자리.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님이 침묵하는 시대’의 ‘님’을 잃은 슬픔과 새로운 신념을 노래한 서정시로서, 시집 <님의 침묵>의 전체 주제를 함축한 표제시(表題詩)로서 서시(序詩)의 역할을 하는 작품이다.
이 시를 이해하기 위해 상상력의 구심점이 되고 있는 ‘님’의 상징 의미를 알아야 하며 또 화자는 어떤 원리를 통해 ‘님’을 잃은 슬픔 속에서 희망을 발견하여 보다 큰 만남을 성취하고 있는가를 파악하도록 해야 한다.
▶ 성격 : 낭만적, 상징적, 의지적
▶ 어조 : 연가풍의 여성적 어조, 영탄적 어조
▶ 특징 : 불교의 윤회설과 공(空) 사상에 바탕을 둠.
▶ 구성 : ① 기 : 님과의 이별(1-4행)
② 승 : 이별 후의 슬픔(5-6행)
③ 전 : 새 희망에의 의지(7-8행)
④ 결 : 불굴의 의지적 사랑(9-10행)
▶ 제재 : 님과의 이별
▶ 주제 : 님에 대한 영원한 사랑.(존재의 회복을 위한 신념과 희구)
<연구 문제>
1. 이 시와 한용운의 다른 작품『알 수 없어요』의 귀결점은 동일하나 출발점은 다르다. 서로 다른 출발점의 차이를 창작 동기와 비교하여 100자 내외로 쓰라.
☞ 『님의 침묵』은 님과의 이별을 인식하고 그 이별이 새로운 만남을 준비하는 것임을 자각하는 데에서 출발하였고,『알 수 없어요』는 아름다운 자연 현상을 통해 님의 존재를 확인하는 데에서 출발하였다.
2. 제1행의 ‘아아’와 제9행의 ‘아아’에 함축되어 있는 시적 화자의 정서를 각각 한 단어로 쓰라.
☞ 제1행의 ‘아아’ : 슬픔
제9행의 ‘아아’ : 기쁨
<해설> 제1행의 ‘아아’는 이별을 자각하고 확인하는 데서 오는 슬픔을, 제9행의 ‘아아’는 헤어짐은 곧 만남이기 때문에 나는 님을 보낸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에 도달한 법열(法悅)을 함축하고 있다.
3. ㉠에 담긴 역설적 의미를 20-30자 내외로 쓰라.
☞ 나는 님에게 절대적으로 귀의하여 님 안에 존재합니다.(또는, 나의 마음은 님 이외의 존재에 관심이 없습니다.)
4. 제9행에서 ‘님은 갔지마는’이 객관적 사실을 말한 것이라면,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는 주관적 의지에 해당된다. 주관적 의지가 드러난 부분의 처음과 마지막 어절을 쓰라.
☞ 그러나 ~ 믿습니다.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님은 갔습니다.’라고 하여 님과의 이별을 확인하는 말로 시작된다. 이어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와 같이 점층적 반복법을 사용하여 이별의 상황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님이 떠나가고 없는 상황을 거듭 확인함으로써 ‘나’는 ‘걷잡을 수 없는 슬픔’에 빠져든다. 그런데 제7행에서 이 슬픔은 ‘희망’으로 전환된다.
이 시의 뛰어난 점은 이와 같이 이별의 슬픔에 절망하지 않고 그것을 새로운 만남의 희망으로 역전시킨 구조에 있다. 그렇다면 슬픔을 희망으로 역전시킬 수 있는 위대한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삶에 있어서의 만남과 헤어짐의 실상(實相)을 깊이 있게 깨닫는 데서 비롯되고 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라는 구절에 나타나 있듯이, 만남은 곧 헤어짐이요, 헤어짐은 곧 만남이라는 것, 다시 말해 헤어짐은 새로운 만남의 전제 조건이라는 역설적 진리를 깨닫는 것이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떠나갔다고 생각하던 ‘님’은 사실은 떠나간 것이 아니라 다만 ‘침묵’하고 있을 뿐임을 알게 되고, 그 침묵하고 있는 님을 위해 ‘스스로도 주체할 길 없는 사랑의 노래’를 부르게 되는 것이다.
한편, 이 시는 상상력의 구심점이 되고 있는 ‘님’이 누구이냐에 따라 시의 내용과 주제가 달라질 수 있다. ‘님’을 ‘조국’, ‘불타(佛陀)’, 또는 ‘조국과 불타가 일체가 된 존재’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들은 ‘님’이 지니는 전체 의미를 드러내지 못하고 일부로써 한정시켜 버릴 우려가 있다. 시집 <님의 침묵>의 서문『군말』에서 시인은 “님만이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 말대로 ‘님’은 위의 해석들을 포괄하는 ‘그리워하는 모든 존재’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맥락 읽기>
1. 애기하는 이는? ☞ 나
2. 지금 내게 어떤 일이 생겼나?
☞ 사랑하는 님이 떠났다. 이별하게 됐다.
3. 어떤 심정인가? ☞ 슬픔에 빠져있다.(6행)
4. 계속 이별의 슬픔 때문에 절망감에 빠져 있는가?
☞ 아니다.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 붓는다.(7행)
5. 감정이 바뀌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 계속 슬프기만 하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는 행동이라는 것을 깨달았으므로(7행)
☞ 님은 떠났지만 반드시 만날 것이라고 확신하므로(8행)
☞ 님을 다시 만날 것을 확신하므로 화자는 슬픔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거구나.
6. 님을 다시 만날 거라는 확신, 님에 대한 사랑이 강하게 드러난 곳은?
☞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 하얐습니다.(9행)
7. 이런 확신을 가진 나는, 님이 오는 그날까지 어떻게 기다리는가? (어떻게 해야 님이 빨리 올 수 있는가?)
8. 그런 자세가 나타난 부분은?
☞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한용운論 1
역설의 미학으로 광복을 노래한 한용운
만해 한용운(1879-1944)은 진보적인 개혁승으로서, 혁혁한 독립 투사로서, 또한 시집 「님의 침묵」(1926)의 시인으로서 입체적인 성격을 지닌다. 만해는 한국 근대사가 내포하고 있던 모순과 문제점을 첨예하게 파악하고 실천적으로 극복하려고 노력한 민족적 선구자인 동시에 전통의 창조적 계승을 성취함으로써 문학사의 전환을 보여 준 신문학사 최대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만해의 불교사적 공적은 그가 「조선 불교 유신론」(1910), 「불교대전」(1913) 등을 통해 이 땅의 침체됐던 불교를 개혁하여 근대화하고자 노력한 데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불교 개혁 운동 또는 불교 근대화 운동으로 요약할 수 있는 그의 불교 운동은 그것이 민중 불교, 생활 불교 운동의 성격을 지닌다는 점에서 중요성을 지니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 소중한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만해는 민족 운동사에 있어서도 3·1운동의 주도적 참여는 물론 「조선 독립에 대한 감상의 대요(세칭 「조선 독립의 서」)를 통해 자유 사상·평등 사상·민족 사상· 민중 사상· 진보 사상, 그리고 사랑과 평화의 철학을 기미 독립 운동의 사상적 기저로서 체계화한 데서 큰 의미를 지닌다. 또한 일제 패망 직전 극도의 궁핍 속에서 심우장 냉돌 위에서 순국하기까지 보여 준 정신의 일관성과 지절은 참으로 귀한 민족적 사표가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도 만해의 의미는 문학사의 측면에서 드러난다. 시집 「님의 침묵」이 지니는 전통성과 현대성이 이 땅의 전통 문학사와 현대 문학사를 이어 주는 매개 고리로서 작용하는 것과 함께 순수 문학과 참여 문학이라는 문학의 근본 모순을 탁월하게 꿰뚫어 냄으로써 작게는 문학사의 이원론 극복의 가능성을, 그리고 크게는 식민 사관 극복의 실마리를 실천적으로 열어 준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일제 시대를 침묵과 모순의 시대로 보고 역설의 정신과 희망의 시로 극복 시도해
「님의 침묵」의 내용 구조는 전체서 88편이 ‘떠남→떠남 후의 고통· 슬픔→희망으로의 전이→만남’이라는 기· 승· 전· 결 구조로 짜여져 있으며, 정신적인 면에서 그것은 ‘소멸→갈등→생성(이별→슬픔→재회)’이라고 하는 변증법적 구조를 지닌다. 말하자면 이별의 시가 아니라 생성(만남)의 시이며, 절망의 시가 아니라 희망의 시, 기다림의 시로서의 성격을 지닌다는 뜻이다. 임을 이별한 시대는 바로 상실의 시대, 침묵의 시대인 것이며 그러기에 언젠가 맞이하게 되는 만남의 시간이란 바로 낙원 회복의 시대, 광복의 시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시집 「님의 침묵」은 사적(私的)인 면에서는 연애시로서의 성격을 지니지만 공적(公的)인 면에서는 저항시, 민족시의 차원으로 확대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이별→이별 후의 고통· 슬픔→만남’의 모습은 ‘국권 상실→상실 후의 고통· 슬픔→국권 회복’으로 상승됨으로써 「님의 침묵」을 희망의 시, 기다림의 시로서 불멸의 위치에 놓여지게끔 했다는 뜻이다. 「님의 침묵」은 시대 정신과도 정합성을 이루는 동시에 영원 정신과도 상동성을 지님으로써 사상성과 예술성, 현실성과 영원성이 조화를 이룬 한 전범(典範)으로서 의미를 지닌다.
일제의 강점으로 인한 식민지 상황하에서는 정상적인 논리가 통하지 않는다. 이러한 모순과 불합리의 시대를 침묵의 시대, 임이 부재하는 시대로 파악하며 부정적인 시대 인식과 역설의 정신으로 극복하고자 노력함으로써 참된 문학적 저항의 전범을 보여 준 것이다.
특히 형이상학적인 깊고 높은 깨달음을 다양하게 드러냄으로써 철학성의 깊이를 보여 주는 것과 함께 그것을 필부 필부(匹夫匹婦)의 대중적 정감으로 형상화함으로써 인간적인 보편성을 확보하려 한 것은 귀중한 노력이 아닐 수 없다. 전통 문학사에서 지식인 문학으로서의 한문학(漢文學)과 서민 문학으로서의 구비 문학적인 것의 변증법적 합일을 지향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시집에 충청 지방의 방언과 토속적인 정감이 지속적으로 활용되어 민족어의 완성이 지역어의 총화로 이루어진다는 점을 실천적으로 보여 준 것도 의미를 지닌다. 세속적인 정감의 진솔성이 불러일으키는 인간적 설득력과 함께 방언 및 토속어가 환기하는 향토적인 친근함의 정서는 만해 시가 민중 정신 또는 민족 정신에 뿌리내리고 있음을 증명해 주는 실질 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또한 「님의 침묵」에는 여성적인 정조가 관류하는 바, 이것은 정감적인 호소력을 유발하기 위한 표현 방법일 뿐 그 내면에는 모순에 대한 저항과 현실 극복의 정신이 잠재해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여성적인 부드러움과 애처로움은 실상 남성적 지배 폭력에 대한 대응, 또는 현실적인 난관을 극복하기 위한 정신적 응전 방법일 뿐 그 내면에는 선비 정신으로서 저항 정신 및 극복 정신이 깔려 있다는 뜻이다.
아울러 만해 시에는 ‘타고르’ 등 외래시의 영향도 지적할 수 있다. 그러나 만해는,
그의 무덤을 황금의 노래로 그물치지 마셔요. 무덤에 피묻은 깃대를 세우셔요.
그러나 죽은 대지가 시인의 노래를 거쳐서 움직이는 것을 봄바람은 말합니다.
― 「타고르의 시 가르테니스토를 읽고」의 일부
에서 보듯이 타고르에게서 부족한 능동적인 역사 의식 또는 저항 의식을 강조함으로써 타고르 시를 비판적· 창조적으로 극복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향가, 고려가요, 한시(漢詩), 시조 등 전통 문학을 현대적으로 계승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외래 문학을 비판적· 주체적으로 수용해 바람직한 의미에서 전통의 창조적 계승을 성취하고 있는 데서 그의 문학사적 의미가 드러난다고 하겠다.
일제 패망 직전 심우장 냉돌 위에서 순국, 저항 시집 「님의 침묵」 남겨
무엇보다도 한국 근대시를 논하는 데 있어 만해와 그의 문학은 반드시 뛰어넘어야 할 거봉의 하나라고 할 수 있음이 분명하다. 그것은 단지 그의 문학이 지닌 예술적 형상서의 우수성 때문만은 아니다. 또한 그의 문학이 지닌 문학사적 위치 때문만도 아니다. 그와 그의 문학은 험난한 역사를 살아가는 예지와 용기를 일깨워 주며, 현실적인 생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신념과 희망을 불러일으켜 준다는 점에서 참된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끊임없는 실천과 행동,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신념과 사상의 일관성이야말로 만해 정신의 위대한 덕목이 아닐 수 없다.
어느 국민, 국가에 있어서나 그 나라 겨레들이 애송하고 추앙해 마지않는 국민 시인이 있을 수 있고, 또 있어야만 한다. 이렇게 본다면 종교와 투쟁, 그리고 문학 예술이 함께 하면서도 실천과 사상, 그리고 일관성이 더불어 빛나는 만해야말로 이러한 국민 시인으로 사랑 받고 존경받아 마땅하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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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김재홍 / 1947년생, 경희대 국문과 교수, 계간지 「시와 시학」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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