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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자의 수필세계
- 자족과 안분의 미학, 서정과 통찰의 세계 -
권대근
(수필가, 평론가,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우리 나라 수필문학의 다양한 형식은 조선조의 여류 작품으로 입증된다. 한 궁녀가 일기 형식으로 궁중 비사를 그린 <계축일기>만 보더라도 중세 여류 수필가들의 놀라운 상상력을 만날 수 있다. 근대로 들어서면서 수필은 남성들에 의해 명맥을 유지하였을 뿐, 여류 수필가들의 창작 활동은 활발하지 못했다. 그런데 요즘은 사정이 다르다. 여성 수필가들의 활동이 수필계를 이끌고 있을 정도로 폭발적이다. 정문자 역시 이러한 흐름의 한 축을 형성하여 그 일원이 되고자 열심히 좋은 수필을 쓰고 있는 수필가다.
이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각자 고유의 색깔을 가지고 있다. 정문자 수필이 가지고 있는 색깔을 말하라면 담채색이 아닐까? 화려하지 않으나 윤기가 흐르는 소박한 그런 빛깔이 그의 수필에 어울리지 않나 싶다. 정문자는 누구보다도 수필과 가까운 생활을 하고 있다. 호감을 주는 솔직한 언어, 고상하고 세련된 자태, 여유롭고 다정다감한 모습에서 그녀의 삶은 너무나 수필적이다. 부부 수필가로서 서로의 작품에 좋은 독자와 비평가가 되어 주는 모습을 볼 때마다, 평자는 부러움을 느낀 바 있다.
흔히 수필을 일러 ‘정의 문학’이라고 하지 않던가. 그녀의 심중에는 언제나 맑은 샘물이 고여 있고, 고요한 종소리가 메아리 치고 있다. 이러한 샘물과 종소리는 언제나 아웃풋이 되어 인정으로 드러난다. 그래서 일까. 그녀의 글에도 삶에도 여유 있게 살아가는 작가의 푸근한 마음이 배어 있다. 자연, 가족, 자아라는 삼대 제재로 구축되고 있는 정문자 수필은 일상의 행복 찾기에서 출발한다. 첫째 자연과의 교류로부터, 두 번째는 혈연의 연대를 통해서, 세 번째는 자기 존재의 해명 작업에서 구현된다. 각 범주를 대표하는 작품을 집중 분석하는 접근법으로 정문자의 수필세계를 조명해 보겠다.
I. 자연 친화 - 서정성과 서사성의 조화
그녀의 수필이 갖는 첫 번째 특성은 서정성과 서사성이 조화된 작품 속에 식물성적인 그리움이 용해되어 있다는 것이다. 자연의 서정과 아름다움의 표현을 원형적 주제로 삼고 있다는 의미다. 정문자는 자주 자연 속으로 들어간다. 그녀가 움직이면 거기에는 가족들이 동행이 된다. 대부분의 수필이 가족과의 연대의식에서 쓰여진 것이지만 그 공간적 배경이 되는 것은 향촌과 대자연이다. 작가는 산 속에서 자연의 순리와 섭리에 자신을 관조하며 사랑과 행복의 세레나데를 자연 서정에 실어 나르는 여유를 보여주고 있다. 단순한 자연 예찬이 아니라 자연의 모습에서 삶의 진리를 발견하고, 거기에 인생사를 접목시켜 인간화의 길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 남다른 그녀 수필세계다. 자연을 제재로 한 작품으로 <개울>, <꽃보다 아름다운>, <솔> <단풍>, <계단>, <상여 소리> 말고도 <솔가리>, <지리산이 부른다>, <천이> 등이 있다.
<개울>은 ‘무심히 흐르는 개울처럼 살고 싶다’는 작가의 인생관이 드러난 작품이다. 생태적인 세계관으로 문명을 비판하고 그 위에 자연 사랑이라는 주제의식을 덧씌운다. 개울을 인생살이에 비유해서, ‘상류의 발랄함이 젊음이라면, 하류의 완만함은 노년과 같다’고 노래하면서 순류와 역류를 반복하는 것 또한 인생살이가 이와 뭐가 다르겠냐고 하는 예리한 안목이 빛난다. 결말에 가서, ‘세월은 흘러간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사람의 뒷모습은 아름답다고 하지 않던가’하면서 이형기 시인의 ‘낙화’의 한 구절을 인용하고 있다. 자신의 세계관을 강조하는 마무리, “우리는 오늘도 개울을 찾는다”하는 진술은 ‘보여주기’ 문장의 전형으로써 식물성적인 그리움을 나타낸 것이다.
<꽃보다 아름다운> 작품 역시 안분과 자족의 생활을 실천하면서 삶에다가 자연의 순리를 따르는 자신의 세계관을 잘 접맥시킨 작품이다. 별빛 하나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손전등 하나에 의지해서 내려오는 투지와 모험심은 젊은이 못지 않다. 아무런 불평 없이 푸른 삶을 조용히 살아가는 어린 풀들을 보며 작가는 세상의 꽃보다 아름다운 것을 발견해 낸다. 지리산 수십 개의 봉우리를 오르내리면서 만나게 되는 가파른 고개며 평지며 내리막을 인생길에 대비시켜 삶의 교훈을 얻어내는 작가의 성찰적 자세와 무욕의 심지는 ‘무박 이일의 고난 끝에 찾은 민박집 따뜻한 아랫목을 꽃보다 아름답다’고 느끼는 데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솔>은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애정이 깊은 작가가 ‘소나무’를 그 대상의 하나로 설정하고 있다. 여기에는 작가의 고향에 대한 서정과 문명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이 드러나 있다. 자연적인 삶과 문명적인 삶을 두루 경험한 지금의 실버 세대 사람들의 기억 속엔 향수가 살아 있다. 그리움의 텃밭은 언제나 지나간 시간 속에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 기억의 시간에 대한 반추를 통해 애틋한 애정, 원시의 순수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정문자에게 ‘소나무’는 바로 그러한 존재다. 정문자 부부가 산을 찾고, 산을 향해 발길을 옮기고 있는 것은 그 원시성에 대한 흠모 때문이다. 정문자의 산행 과정이 수필이 되는 것은 산의 소나무를 통해 발견의 기쁨을 느끼려 하기 때문이다.
쓸모 없다고 생각한 솔가지도 밥을 짓고, 군불을 때며 할 일이 있다. 한 줌의 재로 변해서는 화로에 담겨 어제와 오늘, 내일을 잇는 생명줄이 된다. 인물 좋은 놋쇠 화로에 불을 담는 것이 일과 중의 하나다. 화롯불에는 어머니의 인두를 묻어 바느질을 하고, 찰떡이나 떡가래, 밤을 굽는다. 가끔 아버지가 달걀밥도 해 주신다. 솔의 몸통은 물론이고 손가락 같은 작은 가지 하나도 자기 존재를 남기지 않으며 사람에게 도움을 준 것은, 오늘날 사람이 죽어서 장기 기증으로 새 생명을 얻게 하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소나무는 버리면 얻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
- <솔>, 결말 부분 -
수필은 인간으로서의 향기를 극대화하기 위한 노력의 한 방편으로 모색된 수단이다. 좋은 수필에는 사람의 냄새, 인간이 향기가 진하게 배어있기 마련이다. 정문자의 수필이 근본적으로 뿌리박고 있는 곳은 유년의 고향이다. 그는 어린 시절 그와 함께 존재했던 일상의 일들을 통해 자신을 발견하고, 삶의 의미를 추출하고 있다. ‘몸통은 물론이고 손가락 같은 작은 가지 하나도 자기 존재를 남기지 않으며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솔의 희생정신을 오늘날의 ‘장기 기증’으로 연결시킴으로써 작가는 주제의식을 상상화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편협한 사고가 낳은 일방적인 매도가 아니면, 비판도 문학의 주요 기능 중 하나다. 이 수필은 연례 행사의 하나인 지리산 종주를 통해서 경험하게 되는 것을 작품화한 것으로, 갑자기 많이 생겨난 '계단'을 소재로 쓴 일종의 문명 비판적인 수필이다. 동화적 심성으로 정을 흘리고 살면서도 깨어있는 눈으로 세상의 모순을 예리하게 응시하는 작가의 모습을 보면서 필자는 '반영과 변형'이라는 문학의 본질을 생각하게 된다.
장터목에서 중산리로 내려간다. 굴절계단이라서 오르는 길 못지 않게 힘들다. 바위를 정비하여 길을 만든 곳이라 돌계단이 많다. 그들은 새파란 잎의 산죽과 하얀 눈, 파란 하늘과 함께 한담을 나눈다. 사람의 힘으로 길을 정비하지 않은 자연 계단이 눈에 익숙하다. 자연 계단의 재료는 흙이나 모래 돌, 바위로 외부에서 가져 온 것이 없어서 서로 친하다. 걷는 사람의 능력에 따라 너비는 정해진다. 온몸으로 한 계단을 내려야 하는 곳도 있고, 한 걸음이면 족한 곳도 있어 계단의 높이는 본인이 정한다. 자연 계단은 꾸밈이 없어 좋다.
- <계단> 중에서 -
돌계단에 대한 언급은 여기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자연이 훼손되지 않았다는 측면에서 돌계단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진다. 돌계단은 '새파란 잎의 산죽과 하얀 눈, 파란 하늘과 함께 한담을 나눈다'는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것들은 주변의 생물과 어울리며 화합하는 자연의 일부가 된다. 인생이 오르내리는 일일진대, 계단을 생각한다는 것은 늘 인생을 생각한다는 증거가 아닐까. 무엇을 만나서 그것을 가슴 속에 각인한다는 것은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하나의 느낌을 심는 일이다. 자연의 일부를 통해서 삶을 성찰할 수 있다는 것은 수필 장르가 주는 최대의 선물이다.
가족애를 그린 수필 <상여 노래>에서도 한가한 자연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녀의 글을 따라 가면 자연이 평화롭게 수놓아져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다툼도 시기도 질투도 없다. 그녀가 품어 안는 자연은 연산홍이 반기고, 백일홍이 미소를 보내는 곳이다. 갖가지 화초들과 수목들이 빽빽하고, 나무가 없는 중심자리에는 잔디가 예쁘게 단정되어 있다. 가묘가 놓인 자리는 명당이다. 앞이 툭 틔어 동네가 보이고, 저 멀리 바다도 보인다. 죽음의 그늘이 드리워진 산 능선에 작가가 위치하고 있지만, 작가의 모습은 참 편안하다. 자연과 동화된 모습이 선연하게 보인다.
세 사람은 묵묵히 가묘가 있는 곳으로 오른다. 무심히 보아오던 바위 하나 풀잎까지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온다. 연분홍 연산홍이 방긋이 반기고, 남천은 하얀 꽃을 달고 그 속에 숨어 있다. 옆에는 산토끼가 새 싹을 뜯어먹는다고 바쁘게 움직인다. 검은 비닐로 씌었던 조그마하던 동백이 번들거리며 제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대견스럽다. 조금 있으면 백일홍이 여기저기서 인사를 할 것이다. 초봄부터 개나리, 진달래, 장미, 연산홍, 석류, 수국, 무궁화가 차례로 꽃을 피울 것이다. 집을 지키는 양옆에 선 노송나무를 비롯하여 향나무, 단풍나무, 느티나무, 은행나무를 보면 선산은 마치 수목원 같다. 얼마 전 어머니가 잡초를 뽑아 잔디는 말갛게 세수를 한 느낌을 준다. 잔디 귀퉁이 솔바람 그늘에 앉으니 앞이 툭 틔어 동네가 한 눈에 보이고 저 멀리 바다도 보인다.
- <상여 노래>, 전개부분 -
산은 늘 말이 없지만 그는 언제나 우리들의 든든한 지주이고 기둥이다. 그 안에는 무한한 아름다움이 서려 있고, 싱그러움이 자리하고 있으며, 안온함이 드리워져 있다. 정문자의 수필적 특성은 대상을 묘사하고 생각을 드러내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 데 있다. 작가는 다가오는 물상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다. 산꼭대기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곱게 물을 들이지 못한 이파리를 보고 안타까워하기도 하고, 바위 틈에 뿌리를 내린 나무들의 강한 생명력에 놀라기도 한다. 정문자 수필의 특색은 감정의 절제와 억제가 두드러진다는 점이다. 쉽게 자신의 감정을 노출하지 않으려는 것은 품격성을 잃지 않으려는 의도도 있지만, 상상력을 자극하기 위한 조치로도 보인다.
II. 인륜 의식 - 가족애와 인간애의 응축
정문자의 문학이 갖고 있는 또 하나의 특징은 전통적인 인륜의식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작품에는 체온이 살아 있고, 그 체온의 뿌리는 언제나 인륜이라는 것과 맞닿아 있다. 그녀의 글은 일차적으로 ‘나’에 대한 애정과, 이를 근원으로 한 끈끈한 가족애에서 비롯되고 있다. 모든 것이 흐트러져 제 모습을 잃어가고 있는 시대다. 그녀는 올곧은 정신으로 전통을 껴안는다. 어찌 작품에서만 느낄 수 있겠는가. 애틋한 가족 사랑은 생활 속에서도 보여진다. 인간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혈육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일상 속의 사실들이다. <동행>이라는 작품은 남편을 글 쓰기에 끌려들여서라도 언제 어디서고 동행이 되어주려는 작가의 애틋한 부부애가 읽히는 글이다.
가족간의 애틋한 우정과 사랑이 담긴 작품으로는 <감나무>가 있다. 이 작품은 감나무를 소재로 하고 있지만, 작품 속에는 고향집, 작은 집, 큰집, 재당숙 아주머니 댁이 공간적 배경으로 나타나고, 남편 사촌들, 사촌까지 합해서 열 명이나 되는 시누이, 넷이나 되는 시동생, 할머니, 시아버지, 시어머니가 다양한 인물로 등장한다. ‘감나무는 우리 집의 수호신이다’라는 마지막 문장으로 가족간의 유대를 의미화한 주제화 전략이 좋았다. ‘어른이 심어 놓은 감나무를 어른이 안 계신다고 소홀하게 대접했던 자신을 나무라며, 자신을 반성대 위에 세운 것도 독자와의 교감을 생명으로 하겠다는 차원에서 바람직했다. <동행1>, <동행2>, <땅따먹기>, <망향비>, <묘사 가는 날>, <백 열 둘>, <상여 노래>, <신호등>, <아버지와 선생님>, <어라연에서 있었던 일>, <장승>, <짧은 편지>, <추석>, <‘팽’이로구나>, <시래기> 등의 작품은 하나 같이 가족애를 수놓고 있는 글이다.
남편은 본인이 하는 일에는 함께 해야 한다. 시골에서 집 도랑에 풀을 뽑으면 잠자는 시동생을 불러내고, 집에서는 못을 하나 박아도, 내가 못통을 들고 따라 다닌다. 집 짓다 쌓아둔 흙을 치우자고 하면 세숫대야가 바람에 날아가도, 캄캄한 새벽에 나가야 한다. 일요일이라도 새벽부터 청소기를 덜덜거리면 나는 눈을 감고 자동으로 걸레를 잡는다. 산에 가자고 하면, 내가 피곤하다느니 머리가 아프다느니 핑계를 대도 가면 낫는다고 억지로 끌고 간다. 억지로 가도 돌아올 때는 번번이 기분이 좋으니 부창부수라서 그럴까.
- <동행> 중에서 -
이 작품은 부부가 서로에게 동행이 되어주고 있다는 부부애의 가치를 강조한 글이지만, 문학으로서의 맛을 주는 것은 결말에 놓인 주제의식의 의미화 부분이다. “바위산을 오르면 줄이 필요한데, 꼭 필요하기도 하지만 당장 쓸모가 없어도 옆에 차고 가면 든든하다고 하지 않던가. 우리의 동행이 서로에게 쓸모 있는 줄이 되고 있다면 좋으려만”하고 기원하는 부분이 감상의 백미다. 두 사람이 걸어가는 생의 지향점을 ‘바위산’으로 설정하고, 서로를 서로에게 필요한 ‘끈’으로 비유해서 중심사상을 표현한 것이 좋았다.
부모님에 대한 애틋한 정과 그리움을 담은 <방향비>란 수필은 그녀의 최근작이다. 이 작품은 망향비를 제재로 해서 절대적 존재에 대한 애정을 가시화하고 있는 점에서 기억될 만한 가치를 지닌다. 정문자의 글이 지니고 있는 대표적인 특징은 무엇보다도 향수와 그리움의 서정에 피어나는 잔잔한 미소다. 어느 한 부분 유별나게 뛰어오르고, 내리쏟는 부분도 없이 물 흘러가듯 잔잔하게 진행되는 매끄러운 문체가, 그만의 분위기를 창조하고 있다.
친정집 안방에 걸린 아버지 안동포 바지와 모시 저고리를 보니, 목구멍이 뜨거워진다. 내년에도 저 한복을 입고 공원에 산보를 가실 수 있을지 괜한 걱정이 된다. 아버지 목소리에 힘이 빠지고, 어머니 키가 자꾸 작아지는 것을 보면서도 두 분이 영원히 계실 것만 같은 것이 자식들이다. 자식이 부모를 그리는 마음은 부모가 자식을 그리는 마음에 비할 상대가 되지 못한다고 하지 않던가. 친구들처럼 나도 망향비 앞에서 부모님을 그리워할 날이 다가오고 있는 것일까
- <망향비> 중에서 -
시대가 지닌 특성은 그 시대를 사는 모든 사람들의 삶을 주관한다. 이는 심각한 결과로 이어지는 것이어서 인간의 가슴에 밝은 빛을 드리우기도 하고, 전혀 반대의 경우로 그늘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작가는 삶의 한 쪽 벽을 배경으로 하여, 그 위에 부모님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다. 따스한 애정의 체온이 그 위에 서려 번지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정제된 정신을 통해 그 안에서 많은 것을 만나고 있다. 상상력의 발원처가 고향이고 부모라는 것에 대한 단서를 이 작품은 보여준다. 귀소본능의 텃밭에 발아한 작가의 효심이 ‘목구멍의 뜨거움’이란 감각적 이미지로 형상화된다.
밥상보를 받는다. 한 눈에 들어오는 조각이 너무 많아 마루에 펴놓고 세기 시작한다. 나 혼자는 세지 못할 것이니 집에 가서 조 서방과 같이 세어 보라고 하시지만 그 정도는 셀 수가 있어서 단숨에 센다. 밸 열두 조각이다. 그 중 넓은 것이 아기 손바닥만 한 것 서너 개고, 나머지는 손톱만 한 것, 엄지손가락 만 한 것, 연필만한 조각도 있어서 놀란다. 내 솜씨로는 자로 재어서 종이에 그대로 그리라고 해도 정사각형을 만들 수 없을 것인데 조각을 이어서 만든 어머니의 작품은 보기도 아깝다. ‘쪼가리가 많아야 예쁘다’고 하신다. 비뚤어지지 않게 잇기 위해서는 올을 뽑아야 한다는데 손에 잡히지도 않는 작은 조각에 올은 어떻게 빼며, 재봉틀로 어떻게 이으실까. 잇는 것도 안팎 솔기를 곱솔로 박는 깨끼로 한다. 백 열두 마디를 곱게 처리한 솜씨는 어머니 삶의 고비를 지혜롭게 넘긴 흔적과 같은 것일까.
- <백 열둘> 중에서 -
위의 인용에서 보듯 작가는 천 조각으로 만든 밥상보를 선물 받으며 어머니의 정성을 생각한다. 이 작품이 주는 문학적인 맛은 어머니가 자식들에게 주는 작품이 조각 이불, 베개, 치마, 상보 등 덮는 것이라는 데 착안하여, 이는 자식들의 부족한 점을 덮어주기 위함일 것으로 이해하는 아름다운 마음씨에서 나온다. 작가는 이 대목에서 우리들의 일상이 실낱 같은 애정의 끈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말해 준다. 형제들이 화목하게 살아가는 그 자체의 삶이 갖는 의미가 크지 않을 수 없다.
생명을 가진 모든 물상의 공통된 특징 중의 하나는 연륜을 자기의 몸 어디엔가에 뚜렷한 흔적으로 남겨 운명처럼 살아간다는 사실이다. 자기 스스로 자신을 감싸 안으려는 애틋한 열정만큼 소중한 것은 없다. 어머니가 주신 선물은 장식용으로 쓸 것이라는 다짐에서 우리는 어머니의 정성을 영원히 간직하려는 작가의 효성에 경외심을 갖게 된다. 정문자에게 모성의 귀감은 전통적 어머니상이다. 그러나 그녀는 이 같은 고전적 모성상과는 대척적인 신세대 어머니를 작품 <단풍>에서 자처한다.
시월 둘째 일요일은 며느리 생일이다. 팔월 초 강원도 평창에 있는 아들집에서 휴가를 보냈고, 아이들이 추석에 다녀간 지 한 달도 되지 않았다. 생일을 축하하고, 손녀도 만나며, 단풍도 볼 겸 길을 나선다. 아들네를 만난다는 기대에 여섯 시간이나 걸리는 먼 거리를 여유 있게 간다. 추석까지 손녀 녀석이 낯을 가리더니, 이번에는 덥석 안겨 우리 내외에게 함박 웃음을 선사한다. 애비는 할아버지 할머니 이야기를 많이 해준 결과라며 말귀를 알아듣는다고 하니, 아이 키우는 사람은 하루에 거짓말 석 섬 한다는 옛 말이 틀리지 않는다.
-<단풍>, 서두 부분 -
이 수필의 첫 시작은 "시월 둘째 일요일은 며느리 생일이다"는 말로 시작한다. 단풍을 제재로 한 글로 볼 때, 예상을 깬 시도다. 서두의 기능이 호기심을 불러일으켜 독자들을 유인하는 데 있다고 볼 때, 이는 매우 바람직하다. 시어머니가 며느리 생일을 기억해서 챙겨준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란 판단이다. 고부간 갈등의 문제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닌 우리나라 상황에서 이는 생소한 일로만 여겨진다. 그것도 창작의 일성에 "며느리 생일"을 언급한 것은 어쨌거나 눈길을 잡아당기는 일이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며느리 생일'을 서두에 언급한 것은 단순하게 여겨 넘어갈 사안이 아는 듯싶다. 수필은 갈등을 해소하고, 화해를 도모해야 할 사명을 지닌 글이기 때문이다. 정문자의 글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이런 역동성은 신선한 충격을 준다. 생일 같은 것은 응당 며느리에게 받아먹어야 하는 것쯤으로 여기는 게 범부의 속 좁은 생각이다. 그러나 작가는 글의 어디를 봐도 받는 쪽보다는 항상 주는 쪽이다. 권위를 내세우는 일은 없다. 권위를 허물고 먼저 아름다운 인간 관계를 실천하려 한다는 것이다.
III. 삶의 성찰 - 존재 해명과 구도의 향기
수필은 삶의 문학이다. 삶을 통한 선택된 체험을 상상력으로 재창조하고 재구성하는 일련의 문학적 경로를 통해 예술로 승화시키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차원에서 문학의 삶의 기록이고, 인생의 그림자다. 자기 자신에 대한 존재 해명은 물론 직장 생활 속에서 연을 맺어 알게 된 사람, 문학을 하게 되면서 알게 된 사람, 고향 친구들에 얽힌 추억담이 시원스런 문체에 선연한 그림으로 구체화된다. 사회 생활 속에서 자신의 그림자 형상을 찾아나가면서 삶의 성찰을 담고 있는 작품으로 <그믐달>, <남녀소소>,<말 한마디>, <모자>, <색깔 있는 여자>, <악역>, <연극 같은 인생>, <요즘 아이들>, <제자>, <폭탄주>, <푼수끼가 좋아요>, <한 바탕 웃음으로> 등을 들 수 있다.
수필은 자기를 찾아 나서는 여행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에 대한 관심을 버리지 않고 산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자기를 위한 소도구로 알고 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우에 수필은 나름의 사명을 다 할 수 있는 터전으로서 좋은 도구가 될 수 있다. 때로는 위안이 되기도 하고, 불안한 항해를 밝게 하는 불빛이 되기도 한다. 자기의 존재 해명 없이 글을 쓸 수 없다. 사람들은 자신에 대한 관심 때문에 글을 쓰기도 하고, 그림을 그린다. 어떤 형태로든 표현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수필은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신의 역할에 대한 부정적 인식 때문에 적지 않게 실망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러한 고정 관념이 깨지고 자신의 역할이 이 세상을 밝게 한다는 믿음이 있을 때는 악역이라도 당당히 해야 한다. 진정한 스승의 길을 걷기 위해 악역도 마다 않는 작가의 교육애에 우리는 존경을 더하게 된다. 최고 경영자라는 자기 존재에 대한 확고한 인식이 작가를 아름다운 존재로 만든다. 이 글은 ‘악역’을 제재로 해서 주제의식을 비유를 통해 구체화하려 했다는 점에서 문학성을 느끼게 하는 글이다.
수필문학에 실린 월평을 읽으며 평자의 고충이 짐작된다. 비평은 사람을 보고 행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을 보고한다는 것과 한 편의 글을 쓰기 위해서 고뇌를 해야 한다는 대목에 공감이 간다. 수필을 사랑하기 때문에 쓴 소리를 하는 평자와 아이들을 사랑하기에 악역을 하는 내 입장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 <악역> 중에서 -
수필의 맛은 고뇌와 진통, 불안과 갈등을 화해로 해결하는 데 있다. 이 글 역시 이런 측면에 있어서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다. 이 작품은 교장으로서 정문자의 교육관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수필이다. 교육자는 치유의 사명을 받은 사람이다. 그녀는 언제나 정도를 걷고자 한다. 이 수필은 ‘악역’의 불가피성을 평론하는 일에 견주어 봄으로써 주제의식을 설득적으로 전개하려 한 점이 돋보인다. 자기 주장을 예화를 들어 설명하는 데 그쳤다면 수필이 맛이 나지 않을 것이다. 비유적으로 중심사상을 나타내려한 기법이 신선하게 느껴진다. 악역과 비평의 절묘한 비유에 수필의 묘미가 있다.
아버지가 내 이름을 지었다고 가정하면 흥미롭다. 동생들처럼 멋진 이름이 생각나셨을까. 아니면 나 때문에 그들에게 더 정성을 쏟으셨을까. 이제는 예쁘고, 아름다운 이름이 욕심나지 않는다. 새로 작명한다면 '문'자는 꼭 넣고싶으면서 남자 이름이 떠오른다. 어머니는 내가 아들이 되었으면 하는 미련을 아직도 버리지 못하시기에 항렬 따라 문근이가 좋겠다. 조금 여성스럽게 하려면, 문영이도 괜찮다. 여러 가지 이름을 떠올려도 지금 달고 있는 이름표가 기중 낫다. 알고 보니 내 이름표가 인생 행로의 나침반이다. 많은 사촌, 오촌 중에서 '문'자가 들어가는 이름은 큰아버지의 귀여운 첫 손녀와 나 둘 뿐인 것도 은근히 자랑이다.
- <이름표>, 결구 부분 -
수필은 한마디의 문학이다. 작품 속의 중심 사상을 의미화하는 한마디 문장이 생명적이다. '알고 보니 내 이름표가 인생 항로의 나침반이다'는 진술은 이 수필의 전모를 한 줄로 일반화시킨 대목이다. 또 하나 이 수필이 주는 멋은 새로운 인식이다. 처음에는 이름을 통째로 접근하여 '문자' 자체에 의미를 두고 이름을 보다가, 어느 순간부터 부분적으로 접근하여 그 이름을 새롭게 가치화한다는 것이다. 이름에 있는 '자'로 인해 내 이름을 쉽게 지었을 것이란 추측에서 온 '내 이름은 다른 이름보다 안 좋다'라는 인식을 그 앞에 놓인 '문'자로부터 뒤바꾸는 것이 의미롭다는 것이다. 작가와 '글월 문'의 절묘한 조화가 문학 수필의 멋을 전해준다고 하겠다. 수필을 쓰게 된 배경과 관련하여 자신의 이름 중간에 있는 '글월 문'자와 연관시켜 해석해내는 재치도 돋보인다.
수필의 본래 모습은 새로운 세계를 보다 진지하고 참신하게 소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먼저 가 보거나 경험한 사람이, 하나 더 알고 있는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을 향해 절실히 느끼고 오랫동안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스스로 자신도 잊지 않기 위해 쓰는 글이 수필이다. 수필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향내를 보다 향기롭게 할 때, 그 존재적 가치가 확고해진다. 이 글은 단순한 가족간의 오붓한 여행담을 소개하는 그런 글이 아니다. 검사가 된 진주사범 친구의 폭탄주 만들기를 인간적으로 투시하는 대담한 우정에 여걸다운 기개가 넘친다. 확실히 정문자의 글에는 남성적인 힘이 넘쳐난다.
폭탄주는 그를 나타내는 마음일까. 그는 어떤 판단을 내리기 전에 분명 인간의 본질을 먼저 생각할 것이다. 그가 세상을 재단하는 인식의 저울대 위에는 양주와 맥주 같은 황금비율의 조화가 있지 않겠는가. 폭탄주에는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 독한 양주 맛이 있고, 갈증의 마음을 풀어주는 부드러운 맥주 맛이 있다. 친구가 만드는 폭탄주는 사람의 정신을 어지럽히는 독주가 아니라 갈증을 풀어주는 생명수라는 믿음을 가져 본다.
- <폭탄주> 중에서 -
위 작품은 검사가 된 진주사범 동기생을 제재로 한 수필이다. 작가와 동기의 인연을 맺은 친구에 대한 두터운 우정을 아름답게 그려낸 수작이다. 친구는 교직에 몸담고 있는 친구들을 거짓말도 못하는 순수한 사람들로 여긴다. 작가는 이런 순진한 검사 친구를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가 검사의 지위에 있어서가 아니라 교육계를 바라보는 시선이 고와서다. 검사지만 사물을 보는 시선은 산나물 같아서 더욱 정이 간다는 것이다. 우러러보는 벼슬도 친구라는 이름 앞에서는 온데간데없다는 친구 예찬론이 설득력을 준다.
정문자의 <제자>는 자신의 문학적 스승에 대한 존경심을 수필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스승에 대한 존경과 이해는 수필문학에 대한 경외와 사랑을 의미한다. 작가는 주제의식을 구현하기 위해 서두에 선생님의 고마움에 관한 갖가지 사연들을 소개한다. 화제의 제시다. 모든 문학이 그렇듯 수필에는 인간의 진실이 스며 있어야 하고, 그 진실이 폭넓은 공감의 장을 마련할 수 있어야 한다. <기>에서 화제를 이어받은 작가는 <승>에서 제재의 질서화를 통해 공감의 확대를 꾀한다.
나는 좋은 선생 못지 않게 좋은 제자가 되는 것이 희망이다. 내 입장에서는 글을 잘 써야 뜻이 이루어진다. 글을 잘 쓰고 쉽다고 쉽게 되는 것은 아니다. 부지런히 배워서 하나씩 터득해 가는 것이 빠른 길이라는 것을 <고도원의 아침편지>에서 깨닫는다. “즉흥곡은 없습니다. 깊은 영감, 오랜 기간 잘 길러진 감성이 어느 한 순간 화산처럼 분출하는 것이 즉흥곡입니다. 기적도 없습니다. 분명한 목표 의식과 부단한 노력, 그 다음에야 기적은 일어납니다”라는 내용이다. 다작 속에 수작이 나온다는 선생님의 생각과 통한다. 저산 선생님과의 인연은 내 생에 굵직한 매듭 중의 하나다.
- <제자> 중에서 -
고도원의 편지를 인용하여 주제의식을 구체화하고, 주제인 인연의 소중함을 ‘생의 굵직한 매듭’으로 의미화하는 수법이 돋보인다. 이 수필의 가치는 짜임새 있는 서술의 논리 구조에 있다. 작가는 전개부에 조선 후기 유학자였던 자신의 월고 할아버지와 남명 조식 선생의 비교를 통해 제자의 역할을 강조하고는, '부지런히 배워서 수필의 틀을 터득하는 길이 좋은 수필을 쓸 수 있는 지름길이라 본다. 훌륭한 제자가 되는 힘든 과제를 안고 있다.'는 말로 논리의 질서화를 이루어 주제의식을 상상화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수필은 자기 문제의 고백만으로 구성될 수 없다. 인간이 운명처럼 지니고 살아가는 근원적인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만 문학은 형상과 인식의 복합체라는 개념에 부합할 수 있다. 처음보다 마지막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성숙한 사람이다. 이 수필집이 주는 또 하나의 메시지는 '유종의 미'다. 정문자의 작품은 작가의 가치관이 '자족과 안분'의 미학을 지향하는 만큼 비상할 수 없는 '주어진 분수'의 삶이 그려져 있다. 자연적 질서와 운행이 인간의 생존 이치와 합당한가를 이야기하는 정문자의 수필은 그녀의 동화적 심성이 잔잔한 사유의 삶을 곱게 물들이고 있기에 감동적으로 읽힐 수밖에 없다. 조응과 교감의 세계를 속삭이듯 잔잔하게 펼쳐내고 있는 정문자의 문학 세계는 한마디로 사물을 대하는 인간적 온기로 표백한 안분과 자족의 미학으로 볼 수 있다.
수필가가 해야 될 일 중에서 가장 시급한 것이 인간의 진실을 발견하는 일이다. 그 진실을 삶에 반영하여 스스로의 정화 수단으로 삼으며, 창출된 미적 가치를 승화하는 것이 문학의 존재 가치를 확대하는 길이다. 정문자의 이러한 면모는 여러 작품 속에 잘 나타나 있다. 평범한 현상 속에서 삶의 질서를 발견하려는 작가의 의식이 투영된 그녀의 수필이 주는 매력은 완벽한 리얼리즘 기법에 있다. 시적이라기보다 지극히 산문적이다. 그녀는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방식을 써서 수필 문장을 느끼게 한다. 한국 문단 내에서 부부 수필가라는 에피세트는 쉽게 만날 수 있는 형용구가 아니다. 부부가 동시에 수필을 쓴다는 것과 합동 수필집을 내었다는 사실은 한국 수필계의 경사라 아니 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즈음에서 정문자의 수필이 한국 수필의 선도적 역할을 담당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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