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대성원 전투, 그리고 떨어진 별
칠봉산은 경기도 양주군 회천읍의 동북쪽에 있는 해발 506미터의 산이다. 그리 높은 산은 아니지만 천보 산맥의 흐름 중에 있는 산이라 주변의 어슷비슷한 크기의 산들이 연이어 솟아 있었다.
칠봉산을 등에 이고 회천읍을 코앞에 두고 있는 곳에 대성원(大聖院)은 자리 잡고 있었다.
대성원은 칠봉산의 구릉에서 시작해 1천 평이 넘는 대지 위에 세워진 삼층의 단독 건물로 세워진지 십여 년이 되었다. 백여 평이 넘는 건평에 탑의 형식으로 만들어진 대성원은, 오색찬란한 단청으로 채색된 기와형의 지붕이 층마다 얹혀 있는 건물이었다.
드나드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서 회천읍의 주민도 대성원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 몰랐으나, 불교의 종파 중 한 곳에 속한 선원일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했다. 하지만 인근의 주민에게도 개방을 하지 않는 곳이어서 주민들은 대성원을 사이비 종파라고 믿었고, 십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은 그 소문이 정설로 되어 있었다.
회천읍의 외곽 비포장도로를 무서운 속도로 달려온 검은색 승용차 한 대가 대성원의 높은 담장 뒤편에 나 있는 후문으로 빨려들 듯 사라진 것은 서녘 하늘이 붉은 노을로 젖어들 때였다.
소회주님!
지하 주차장에서 망부석처럼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양화군 일행을 기다리고 있던 윤찬경은 진 영충을 가슴에 안고 내리는 양화군을 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뒤편에 서 있던 각 지부의 지부장들이 허리를 숙여 양화군에게 인사했다.
윤 찬경은 사도평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후 가슴을 졸이며 기다린지 두 시간째였다.
어떤 일이 벌여졌는지 듣기는 했지만 소름이 돋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한국지회에 지원된 본회의 주력이 전멸한 것이다.
진 장로의 상태가 심각하오.
양화군은 준비되어 있던 환자용 이동식 침대에 진 영충을 눕히며 말했다. 침대에 눕혀진 진 영충의 눈초리가 가늘게 경련하다가 눈꺼풀이 조금 위로 올라갔다.
진 영충의 초점이 흐트러진 눈이 자신을 응시하고 있다는 것을 안 양화군은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았다.
수술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장로님. 만족할 만큼의 치료는 어렵겠지만 응급치료를 해야 합니다. 본국에 도착할 때까지만 버텨주십시오. 반드시 장로님을 회복시켜 드리겠습니다.
양화군의 말을 들은 진 영충의 입가가 씰룩거렸다. 그는 웃으려 했지만 근육이 말을 듣지 않는 듯했다.
양화군의 옆에 서 있던 윤 찬경은 고개를 끄덕인 수 의료진에 눈짓을 했다. 침대 옆에 대기하고 있던 의료진이 침대를 밀고 비상계단을 빠져나갔다.
이곳으로 오며 양화군을 진 영충의 내상이 더 이상 진행되지 않도록 응급조치를 취했다. 하지만 외상은 그로서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진 영충의 잘려나간 팔과 함몰된 가슴, 그리고 갈라진 복부는 수술을 해야만 했다.
윤 찬경의 뒤에 시립하고 있던 한국지회의 각 지부장들은 뻣뻣하게 굳은 채 안색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남국현도 주선휘도 예외는 없었다.
일본지회의 오카야마 지회장이 수하를 이끌고 곧 나리타를 출발할 겁니다. 그리고 회주님께서는 지금 비행기를 이용해 한국으로 오시는 중이십니다.
아버님까지.
윤 찬경의 보고를 받은 양화군의 이마에 굵은 주름이 잡혔다. 그는 일본지회의 지원이 진행되고 있다는 보고는 받았지만 양 천종까지 움직이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다른 사람에게 양 천종은 하늘 같은 대한호국회의 회주였고 무성(武聖)이라 추앙받는 사람이었지만 그에게는 연로한 아버지였다. 그는 양 천종이 육십 가까운 나이에 얻은 아들이었다.
그처럼 연로한 아버지를 자신의 무능력으로 먼 길을 오게 만들었다는 것은 죄만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안심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양 천종이 이곳에 도착하는 순간이 임한이 죽는 순간일 것이기 때문이다.
양화군은 그것에 대해 털끝만큼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긴장이 풀어지며 양 화군의 입에서 나직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씁쓸함과 안도감이 뒤섞인 한숨이었다.
그는?
윤 찬경은 양 화군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그는 당연히 임한이다.
보지 못했소. 진 장로의 흔적을 찾기 위해 그 산맥 주변을 헤매고 있겠지.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자입니다. 혹여 흔적이라도 추적해 온다면.
윤 찬경은 자신이 한 말에 자신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어느 사이에 임한은 그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그에게 공포를 안겨주는 존재로 변해 있었다.
이곳으로 오며 차를 여섯 번 갈아탔고, 사방 이 킬로미터 전도를 수시로 확인했소. 그의 추적은 없었소. 설령 그가 나를 추적할 수 있고 또 나를 발견할 수 있다 해도 그것은 일본지회의 지원과 아버님이 도착한 이후가 될 거요.
양 화군의 음성은 얼음 가루가 풀풀 날리는 것처럼 차가웠다. 그가 충격에서 쉽게 헤어나지 못하는 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었다. 상황은 악화일로였다. 그리고 그 악화되는 속도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양화군은 한이 태기산 부근을 헤매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그의 희망 사항에 불과했다.
대성원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칠봉산 중턱의 숲 속에 서 있는 두 사람 중 보통 키의 평범해 보이는 중년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할 생각이냐?
들어가야죠.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간단명료하게 대답하는 사내는 임한이었다. 오 제문은 묵묵히 선이 굵은 한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할 생각이냐?
들어가야죠.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간단명료하게 대답하는 사내는 임한이었다. 오제문은 묵묵히 선이 굵은 한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네 몸도 정상이 아니다. 이곳으로 오는 동안 무상진기로 몸을 수습했다고는 하지만 평소 네 힘의 칠할 정도밖에 회복하지 못했지 않느냐. 나는 저곳에 있는 자들을 너와 나의 힘만으로 상대할 수 있다고 확신할 수가 없구나. 수보기의 아이들을 기다렸다 치는 것이 어떻겠느냐?
오 제문의 말은 충분히 일리가 있었고 그렇게 하는 것이 순리에도 맞았다. 그러나 한은 고개를 저었다.
아저씨의 말대로 저들에게 시간을 준다면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저곳에 있는 자들이 호국회의 모든 힘이 아니란 것을 잘 아시잖습니까! 분명 지원군이 오고 있을 겁니다. 일본이나 중국이나 비행기를 이용한다면 한국으로 오는 데 걸리는 시간은 길게 잡아도 서너 시간 남짓에 불과합니다. 태기산에서의 일이 있고 나서 흐른 시간이 벌써 두 시간이 넘습니다. 조치를 취하긴 했지만 여유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수보기의 사람들이 이곳까지 오는 데는 한 시간 정도가 더 필요합니다. 기다릴 시간이 없어요. 수보기를 기다리는 동안 저들의 지원군이 도착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기회는 다시 오지 않습니다.
오 제문은 한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의 시선이 대성원을 향했다.
오 제문은 한과 늘 함께 움직였던 사람이지만 홍천에서부터 질주하기 시작한 한을 따라잡지는 못했다. 뒤를 따르다가 한을 다시 만난 것은 태기산에서 한과 이 수진 일행이 호국회의 인물들과 전투 중일 때였다.
오 제문은 싸움에 나서려고 하다가 이미 상황이 종료 직전이라는 것을 알고 다시 몸을 숨겼다. 그라는 존재가 있다는 것은 이 수진도 한에게 들어 알고 있었지만 그녀는 그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모습을 이곳저곳에 드러낼 생각을 갖고 있지 않았다. 한을 돕는 이 수진과 수보기라 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양화군이 차를 여러 차례 갈아탔기 때문에 추적에 어려움을 겪기는 했지만 한과 오제문은 양화군을 놓치지 않았다. 오 제문은 평생을 도망 다니며 살다시피 한 인물이어서 도주에 관한 한 세상의 누구보다도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오 제문의 눈을 피해 달아난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에 가까웠는데, 거기다 진 영충의 상처로 인해 차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던 양 화군은 시작부터 치명적인 핸디캡을 안고 있었다. 자동차는 이동의 속도를 빠르게 해주는 이점이 있지만 또 타인의 시선을 피하기에는 덩치가 너무 크다는 단점도 있는 물건이었다.
아저씨는 이곳에 계십시오.
왜, 걱정스러우냐?
한의 말에 오 제문은 부드럽게 웃으며 물었다. 세상 물정 모르던 고등학생 녀석이 벌써 자신을 걱정할 만큼 컸다는 것이 대견스럽기도 하고 일견 재미있기도 했다.
오 제문은 말을 이었다.
나도 간다. 저들을 제거할 수 있다면 천부는 부활의 시간을 벌 수 있다. 내가 빠질 수 없는 자리다.
오 제문의 음성에서 침침한 물기가 묻어났다. 육십 년에 가까운 연륜으로도 제어하지 못하는 살기와 한(恨)이 그의 음성 속에서 불꽃처럼 이글거리고 있었다.
한은 일말의 불안감이 가시지 않았지만 오 제문을 말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말릴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기도 했다.
윤 찬경은 사로잡아야 합니다.
한의 말에 오 제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양화군을 잡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양화군은 평상시의 한에 비해 그리 떨어지지 않을 것으로 추정되는 초강자다. 그런 자를 죽일 수는 있을지 몰라도 사로잡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대성원을 내려다보는 그의 낯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대성원의 이층에 마련된 회의실 중앙 의자에 앉은 양 화군은 회의실 천정에 시선을 주고 있었다. 연한 갈색의 나무 무늬로 장식된 천장은 고급스러우면서도 편안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지금 양화군의 눈에 천장의 무늬가 들어올 리가 없었다.
회의실은 늪에 빠진 듯이 무거운 정적에 덮여 있었다. 분노와 좌절이 회의실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어깨를 짓눌렀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모두 오늘과 같은 실패를 경험해본 적이 없는 터라 자신들이 느끼는 감정을 적절하게 통제하지 못하고 있었다. 표현하지 않고 있을 뿐.
윤 찬경은 지난날 백두대전에 참가하긴 했지만 그가 회에 가입한 이후 본 것은 패퇴하는 천부의 뒷모습이었다. 백두대전에서 반짝 놀라움을 주긴 했지만 천부는 기세를 회복하지 못했고 그 후 회는 거칠 것 없는 확장을 계속해 왔다. 실패를 경험할 기회조차 없었던 세월이었다.
테이블 위에 둔 윤 찬경의 시선은 위로 올라올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양 화군의 얼굴을 보는 것이 두려웠다. 처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었다. 그는 양 화군의 믿음에 보답하지 못했다는 것과 자신이 맡은 한국지회가 불러일으킨 재앙이 회로 번지로 있는 현실이 너무나 두려웠다.
임한이라는 자에 대한 그의 초기 대응은 안이했다. 지나간 일에 만약이라는 가정은 무의미하지만 그가 초기 임한의 중요성을 경각했다면 회는 지금과 같은 국면에까지 몰리지 않았을 것이다. 임한을 경시한 결과는 끔찍할 정도로 컸다. 한국지회가 붕괴 위기에 몰렸을 뿐만 아니라 회의 근간이 뒤흔들리는 타격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윤 찬경은 극도의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이성이 흩어지려는 것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분노와 불안, 슬픔과 회한이 그의 심신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진 장로의 수술은 언제쯤 끝날 것 같습니까?
양 화군의 시선이 윤 찬경을 향하고 있었다.
상황이 급박하기 때문에 최대한 빨리 수술을 끝내 달라고 의료진에게 지시해놓았습니다. 하지만 장로님의 상처가 중하기 때문에 봉합 수술만도 두 시간 정도는 필요하다고 합니다.
여러분도 아시는 것처럼 아버님이 오시는 중이요. 그리고 일본의 오카야마지회장도. 하지만 일본지회의 지원과 아버님이 오시는 것은 만약을 위해서요. 지금은 임한과 싸울 수 없소. 그는 이 나라 공권력을 등에 업은 상황이니까.
이를 악문 양 화군의 두 볼이 작은 경련을 일으켰다.
뼈아픈 일이지만 지금은 훗날을 기약할 수밖에 없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 같소. 진 장로의 응급 수술이 끝나는 대로 이곳을 뜨겠소. 윤 지회장님, 떠날 준비를 하시오.
알겠습니다.
대답하는 윤 찬경도 그 대답을 듣는 지부장들도 침통한 안색이었다.
양화군의 지시는 한국지회를 포기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언젠가는 돌아올 테지만 그날이 언제가 될지는 누구도 기약하지 못했다. 그들이 지금까지 십수 년간 이 땅에서 이룩한 모든 것은 무(無)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회의실은 정적에 뒤덮였다.
양화군은 굳게 입을 닫고 있었고, 윤 찬경은 시선을 테이블 위에 떨구고 있을 뿐이었다. 지부장들은 숨 막힐 듯한 긴장 속에 감히 입을 열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들에게 할 말이 있을 리도 없었다.
설마!
그의 눈동자는 거칠게 요동치고 있었다.
쿠당당!
경악한 표정으로 그가 벌떡 일어서자 그가 앉아 있던 의자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뒤로 넘어졌다. 윤찬경과 지회장들은 갑작스런 양화군의 태도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떨리는 양화군의 시선이 출입문을 향했다. 무슨 일인지 몰라 어리둥절했던 윤찬경과 지회장의 시선이 양화군을 따라 움직였다.
그때였다.
쿠킁!
둔중한 폭발음과 함께 영남지부장 주선회가 앉아 있던 오른쪽 벽면이 터져나갔다.
돌조각이 이리저리 날고 부연 석회 가루가 회의실 안을 뒤덮었다.
임한!
양화군은 안개와 같은 석회 가루가 회의실 안으로 번개처럼 뛰어드는 그림자를 향해 소리치며 몸을 날렸다. 그의 수려한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윤 찬경과 지부장들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차렸다.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자가 찾아온 것이다.
양화군은 이미 테이블 위에서 침입자, 한과 부딪치고 있었다. 무시무시한 청자색(靑瓷色)섬광이 그들이 부딪치고 있는 테이블 위의 공간을 난자했다.
지부장들은 자일에서 일어나 정신없이 뒤로 물러섰다. 뼈를 깎는 듯한 살기가 회의실을 뒤덮었고, 테이블 위를 덮고 있던 흰색의 두터운 천이 양화군과 한이 뿜어내는 기세에 휘말려 갈기갈기 찢긴 채 깃털처럼 날아올랐다.
양화군의 뒤를 사도평과 윤 찬경이 따르려 했지만 그것은 불가능했다. 그들을 상대할 사람이 한의 뒤를 이어 부서진 벽면을 통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오제문이었다.
너희 상대는 나다.
오 제문은 차가운 시선으로 윤 찬경과 사도평을 응시하며 말했다.
그의 시선은 두 사람 이외의 자에게는 옮겨가지 않았다.
그는 순간적으로 일어난 사태에 미처 정신을 수습하지 못하고 있는 다른 지부장들은 자신을 위협할만한 무예를 익히지 못했음을 대번에 눈치 챌 수 있었다.
자라 새끼 같은 놈, 끈질기구나!
늘 차갑게 안정되어 있던 윤찬경의 입에서 상스런 욕설이 흘러나왔다. 평소의 그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의 인내심도 바닥이 난 것이다.
한 나라의 지부를 맡고 있는 자치고는 입이 걸군. 네가 윤찬경이냐? 이를 갈며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윤 찬경은 사도평과 눈짓을 교환하고는 오 제문을 향해 몸을 날렸다. 오 제문의 눈에 언뜻 긴장이 스쳐갔다.
윤 찬경은 백두대전에 참가했던 호국무단의 단원일 뿐만 아니라 다음 대의 장로 자리가 예약되어 있는 고수다. 게다가 사도평 또한 호국회의 소회주를 그림자처럼 보좌하던 인물.
오 제문이 수십 년 동안 천부의 무예를 절차탁마했다고는 하나 그들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는 한과는 다른 사람이다. 천부의 가장 강력한 무예들을 완벽하게 익히지 못한 상태인 것이다. 세 가지를 제외하고는.
그 세 가지 중의 하나가 수레바퀴와 같은 륜(輪)의 형상을 이루며 달려드는 윤 찬경의 전면을 무시무시한 기세로 후려쳤다. 은은한 금광(金光)을 발하는 주먹, 무상금강권(無上金剛券)의 절초 금강회륜(金剛回輪)이었다.
윤 찬경은 입술을 물며 비스듬히 몸을 돌렸다. 상대의 주먹에 실린 힘은 그대로 부딪치기엔 너무 강했다.
오 제문의 주먹을 사선으로 비끼던 윤 찬경의 주먹이 빠르게 허공을 나타하기 시작했다. 윤 찬경이 평생을 수련한 것은 육합섬전수(六合閃電手)다. 육합(六合)은 천지(天地)를 의미하니, 천지를 휘어감을 정도로 손을 빠르게 쓰는 수법이란 뜻이다. 그 명칭처럼 금강회륜을 막아가는 윤 찬경의 두 손은 육안으로는 확인이 불가능할 정도로 빨랐다.
윤 찬경의 육합섬전수가 오 제문의 무상금강권을 주춤하게 할 때 사도평이 뛰어들었다.
그의 손에서 뱀처럼 구불거리는 무엇인가가 오 제문의 목을 휘감아왔다. 아홉 마디로 나눠진 그것은 은은한 검은 빛을 띠고 있었다. 사도평의 독문병기인 삭혼구절편(削魂九折鞭)이었다.
오 제문과 윤 찬경, 사도평의 싸움이 격렬하게 이루어지고 있을 때 한과 양화군의 싸움은 이미 막바지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강기를 사용할 수 있는 초강고수, 싸움이 오래갈 리가 없는 것이다.
그들은 손을 뻗으면 닿을 정도의 거리를 유지한 채 찰나지간 무수한 공수(攻守)를 교환하고 있었다. 한순간의 실수는 바로 죽음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기에 그들은 거의 무아경에 가까운 절대적 집중 상태였다.
양화군의 양손에는 사십오 센티미터 길이의 끝이 뾰족한 칼이 한자루씩 들려 있었다. 전체가 찬연한 자색(姿色) 광채를 발하는 그것은 자전참마도(紫電斬摩刀)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것으로 호국회의 삼대신병(三大神兵)중 하나였다.
양화군의 부릅뜬 눈에서는 강렬한 살기가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그와 한의 병기는 십여 초가 지나는 동안 한 번도 부딪치지 않고 있었다. 부딪치기 전에 이미 초식이 변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상대의 초식을 읽고 있었다.
상대가 사용하는 것이 최고의 무공이라 할지라도 초고수의 반열에 오를 자라면 어느 정도 흐름을 읽어낼 수 있다. 그것은 어떤 무공이든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필연적인 결과였다.
한과 양화군은 강기를 사용하지 못했다. 그들의 거리가 너무 가까웠고 강기를 사용하기에는 초식의 변화가 너무 빨랐다. 양화군의 대응은 강우림보다 훨씬 민첩했다. 하지만 그것은 양화군이 강우림보다 고수였기 때문이 아니었다. 한이 벽을 부수고 뛰어들었기 때문에 발생한 찰나의 지체가 양화군에게 대응할 시간을 주었던 것이다.
한이 벽을 부순 이유는 간단했다. 강우림이 있던 방에는 그 이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이곳은 달랐다. 출입문에서부터 양화군에 이르는 사이에 각 지부장들이 앉아 있는 것이다. 만약 그들 중 누군가가 양화군에게 도달하기 전의 그를 막아설 수 있다면 이번 싸움은 위험해질 수 있었다.
한은 천단무상검도의 뇌전일격세를 응용한 변초로 양화군을 상대하고 있엇다. 그의 무정도는 푸른 섬광을 흘리며 양화군의 전신을 금방이라도 난자할 것처럼 무서운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양화군의 지천참마도 또한 무정도에 뒤지지 않았다.
무정도가 변화하는 틈 사이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자전도의 도첨(刀尖)은 한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게 할 정도로 살벌한 기세를 품고 있었다.
호국회의 수호삼절기(守護三絶伎)중 하나인 자전도법(紫電刀法)으로 한을 상대하던 양화군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한의 무표정한 얼굴이 파리하게 변해가고 있는 것을 본 것이다.
한이 태기산에서 입었던 상처가 도지고 있는 것이지만 양화군은 그것까지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한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까지 모를 정도는 아니었다.
양화군의 두 눈이 무섭게 빛났다. 자전도의 움직임이 느려지며 도신(刀身)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가 배가 되었다. 느려졌다고는 하나 방금 전보다 상대적으로 느려졌다는 것이지 자전도의 움직임이 육안으로 보일 정도로 느려진 것은 아니었다.
양화군의 허리를 베어가던 한은 무정도가 엄청난 힘에 눌려 느려지는 것을 느끼고는 이를 악물었다. 그는 양화군의 뜻이 무엇인지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기(技)로는 우세를 점할 수 없다는 것을 느낀 양화군이 내공에 의한 싸움으로 전환한 것이다.
양화군이 승부를 걸어오고 있었다.
한은 천단무상진기를 극성으로 끌어올렸다. 임시방편으로 막아놓았던 양팔의 상처가 터지며 그의 양 옆으로 피 무지개가 생겨났다.
무정도의 푸른 도신이 자전도의 압력을 뿌리치기 위해 미친 듯이 꿈틀거렸다.
한순간의 방심도 허용할 수 없는 순간이었다.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기회를 잡는 순간 그가 잡고 있는 도신에서는 강기의 날이 솟아오를 것이고, 이 정도 거리라면 강기가 솟아오르는 그때가 두 사람 중 한 명이 죽는 때였다. 피할 틈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합!
무서운 눈으로 한의 두 눈을 응시하던 양화군의 입에서 외마디 기합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양화군의 도에서 찬란한 보라색의 광채가 솟아올랐다.
으헉!
비명과 함께 테이블 위를 휘몰아치던 자색과 청색의 폭풍이 사라졌다. 이리저리 허공을 떠돌던 천 조각들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소회주님!
한과 양화군의 싸움을 지켜보던 남 국현을 비롯한 지부장들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온 것은 섬광이 사라짐과 동시였다.
왼쪽 어깨의 살점이 흩어져 뼈가 드러나고 태기산에서 입은 상처에서도 다시 피가 흘러 전신이 피에 절어 있는 한의 모습은 무참했다. 그에 비해 한과 네 걸음 떨어진 곳에 서있는 양화군의 모습은 멀쩡한 편에 속했다. 하지만 양화군을 바라보는 지부장들의 시선은 경악과 분노 그리고 비탄에 잠겨 있었다.
쿨럭!
낮게 기침을 하는 그의 입가를 타고 한 줄기 선홍색의 핏물이 흘러내렸다.
그의 심장 부위에는 이 센티미터 정도를 남기고 무정도의 도신이 부러진 채 꽂혀 있었다.
이것은?
양화군은 시선을 들어 한을 보며 물었다.
단혼참(斷魂斬), 절검(切劍), 검신(劍身)이나 도신(刀身)을 부러뜨린 후 그것으로 상대를 공격하는 비검술(飛劍術)의 일종의 수법이지.
한은 무심한 표정으로 도신의 중간 부분이 도끼로 내리친 것처럼 부러져 절반 정도만 남은 무정도를 들어 보이며 대답했다.
양화군의 자전참마도에서 강기가 솟아오르는 순간 한은 그것을 왼쪽 어깨로 받으며, 무정도를 무상진결 수집편에 기록되어 있던 절검(切劍)의 수법으로 양화군의 심장을 향해 날린 것이다.
그의 대답을 들은 양화군의 얼굴에 어이없다는 기색이 떠올랐다.
황당하군. 하지만 훌륭한 응변이었다.
그것이 양화군이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눈을 부릅뜬 채로 그의 신형은 고목이 넘어가듯 뒤로 넘어갔다.
쿵!
소회주님!
남국현은 피를 토하듯 소리쳤다. 그들은 속수무책이었다. 대성원으로 모이며 경찰의 불심 검문을 폐기시키고 온 그들이었다. 그들 중 초인들의 전투에 끼어들 능력을 가진 자는 없었다. 총도 없긴 했지만 상황은 지부장들이 움직일 틈도 주지 않았다. 갑자기 그들의 귀에 연속적인 비명 소리가 들렸던 것이다.
으악!
끄윽!
비명 소리의 뒤를 이은 것은 놀람에 찬 숨 막히는 소리.
헉!
그리고 침묵이었다.
한의 눈빛은 초점이 풀려 흔들리고 있었다. 그의 눈앞에 벌어진 일은 그의 부동심을 여지없이 무너뜨렸다.
그는 테이블 위에서 내려와 오 제문이 윤찬경 등과 싸우던 자리에 와 있었다. 그의 발밑에는 오 제문이 바닥에 엎드린 채 쓰러져 있었다.
오 제문의 등 뒤에 손잡이만 남은 채 흔들거리며 꽂혀 있는 비수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에게 알려주었다.
바닥은 피바다였다.
윤찬경은 얼굴이 부서진 채 즉사해 있었고, 사도평은 심장이 부서져 있었다. 물론 즉사였다. 그리고 한 구의 시체가 더 있었다.
한의 손에 쥐어져 있어야 할 무정도를 손잡이만 남긴 채 이마에 꽂고 있는 사내.
그것은 수술 중이어야 할 진영충의 시체였다. 아니 그가 수술 중이라는 것을 한은 모르고 있었지만, 적어도 움직이지는 못하고 있어야 할 진영충의 시체였다.
벌거벗은 상체의 곳곳에 붉은빛의 소독약이 발라져 있는 모습은 그가 수술대 위에서 뛰쳐나왔음을 짐작할 수 있게 했다.
한이 양화군을 쓰러뜨리는 순간 윤찬경과 사도평은 집중력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놀람과 공포로 평정을 잃은 그들을 오 제문이 쓰러뜨렸을 때, 부서진 벽을 통해 뛰어 들어온 진영충이 오 제문을 등 뒤에서 비수로 찔렀고, 오 제문을 도우려고 몸을 날리던 한이 그것을 보고 무정도를 날려 진 영충을 죽인 것이다.
진 영충은 수술대에 누워 마취 주사를 맞으려는 순간 회의실의 벽면이 터지는 소리를 들었다. 비몽사몽간이던 그의 정신이 강렬한 위기감으로 깨어났다. 양화군이 있는 지금 이곳에서 저처럼 큰소리를 낼 간 큰 사람이 있을 수는 없었다.
그는 죽음을 무릅쓰고 수술대에서 내려왔다. 누가 찾아왔는지 눈치 챘기 때문이었다. 그의 예상이 맞는다면 양화군의 생존은 누구도 장담하지 못했다.
이곳에 있는 자들 중 그가 아끼지 않는 자는 없었지만 모두가 죽더라도 양화군만은 살려야 했다. 방문자가 심어준 공포는 원로원의 장로인 그에게도 너무나 두려운 것이었다. 그는 사력을 다해 움직였지만 양화군을 살리려는 노력은 성공하지 못했다.
죽은 진영충의 시선은 탁자를 향해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슨 양화군의 시신이 있었다.
한은 이번 일에 위험이 따르리라 예상하긴 했지만, 오제문을 이처럼 어이없이 잃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는 천천히 무릎을 꿇으며 오 제문의 몸을 돌려 가슴에 안았다.
오 제문의 숨은 경각에 달려 있었다. 등 뒤로부터 그의 심장을 관통한 비수에는 진영충이 이끌어낸 혼신의 기력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비수에 담겨 있던 막강한 경력은 오 제문의 심장 주변 경락들을 가닥가닥 끊어뜨린 후였다.
오 제문이 천단무상진기를 수련하지 않았다면 이미 시체가 되었을 상황이지만 절세의 천단무상진기도 그의 죽음을 잠시 미룰 수 있을 뿐 막을 수는 없었다.
사형!
흐려지는 눈을 들어 한의 모습을 보려 애쓰던 오제문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그 미소 사이로 한줄기 핏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오 제문은 그의 가슴에 올려진 한의 손을 잡았다. 마지막 힘을 담은 그의 손길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원이 없다.
오 제문의 손이 힘을 잃고 스르르 떨어졌다. 하지만 그의 입가에 떠올랐던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한이 그를 불렀던 호칭은 천외천부가 후계자를 찾았다는 것을 의미했던 것이다.
오제문의 손이 빠져나간 손아귀는 허전했다. 한은 그 허전함을 메우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주먹을 움켜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으로 파고들어 핏방울이 맺혔지만 그는 고통을 인식하지 못했다. 슬픔이 강물처럼 그의 가슴을 적시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슬픔은 오래갈 수 없었다.
쿵, 쿵, 쿵!
무엇인가가 쓰러지는 소리가 적막에 잠겼던 회의실 안을 연속적으로 울렸기
때문이다.
흠칫한 한이 오제문의 시신을 바닥에 뉘이고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돌렸다. 회의실 안에 벌어진 광경을 본 그의 어깨가 늘어졌다.
회의실 안에 서 있는 사람은 그뿐이었다. 남국현을 비롯해서 지부장들은 모두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쓰러진 그들의 입가로 검은 핏물이 흐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가 잠시 오제문에게 집중해 있는 동안 그들은 치아에 박아놓았던 캡슐로 된 독약을 깨뜨려 삼킨 것이다.
천부가 건재하던 시절 호국회의 인물들에게 조직의 비밀을 지키기 위한 자결은 익숙한 것이었다. 하지만 한은 이들이 이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자살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오 제문의 죽음을 보며 그는 천부의 대를 이을 것을 약속했지만 아직도 그는 비림 결사의 후인이라기보다는 경찰 그것도 형사에 가까이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한은 오 제문의 손에 쓰러진 윤찬경과 가장 가까이에 있던 자의 옆으로 걸어갔다.
국정원에서 파악한 자료에 있던 얼굴, 서울지부장 남국현이었다.
남 국현은 눈을 뜨고 있었다. 아직 그의 숨은 끊어지지 않았다.
너도 곧 내뒤를 따라 오게 될 것이다.
그의 입가에 강한 자신감이 실린 미소가 피어올랐다.
한은 남국현의 몸에서 생기가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는 호국회의 인물들이 혀를 내두른 독종이었지만 호국회의 인물들도 그에 못지않게 지독한 자들이었다. 처절할 정도로.
한은 허탈했다.
한국 내에 있던 대한호국회의 인물들은 전멸했다. 그리고 그들의 저력도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아직 호국회의 본회, 중국 내의 조직에 대해 아는 것이 전무한 상황이었다.
윤 찬경을 잡으면 섭혼대법을 사용해서라도 중국 내의 호국회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려던 그의 계획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한은 허리춤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그의 보고를 기다리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 상황은 수습해야 했다.
자살한 자들은 설명이 쉬웠지만 양화군이나 윤 찬경 그리고 사도평의 시신은 설명하기 어려웠다. 경찰이나 검찰은 이런 일처리에 익숙하지도 않고, 할 수도 없다. 그가 전화할 수 있는 곳은 정해져 있었다.
날세, 어떻게 되었나?
핸드폰을 받은 사람은 남기호였다.
찾아냈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습니다.
무슨?
살아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한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핸드폰을 들고 있는 오른팔이 자꾸 아래로 처졌다. 혈을 눌러 지혈을 했지만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정신이 몽롱했고, 뼈가 드러나 있는 왼팔은 긴장이 풀어지자 들어올리기도 힘에 겨웠다.
윤찬경은 죽었습니다. 다른 생존자를 확보하는 것도 실패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보고는?
부장님이 최초입니다.
한의 말을 들은 남기호의 음성이 빨라졌다.
괜찮나?
견딜만합니다.
그곳이 어딘가?
한은 대성원의 위치를 남기호에게 알려준 후 핸드폰을 끊었다.
남기호는 한에게 여러 가지를 묻지 않았다. 한이 언급한 몇 마디만으로도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고,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깨달았던 것이다. 남기호는 이런 일에 대한 경험이 풍부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처럼 빨리 상황을 판단하지 못했을 것이다.
한은 오 제문의 시신을 안았다. 떠나야 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