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조 태조에서 중종까지 왕비 이야기 1. 태조 : 신덕왕후 강씨
부: 강윤성( 충혜왕, 충목왕 : 찬성사) 숙부 : 강윤충, 강윤희(판도사 판서 - 아들 상장군 '휘'는 이성계 백부의 사위 -겹사돈) 경처(京妻) : 이성계와 21살 차이 향처(鄕妻): 신의왕후 한씨 태종은 서모로 인정하고 태종 9년 강씨묘를 사을한의 산기슭에 옮겼다가 다시 한강 남쪽 공현 뒤로 이장했다. 왕비의 제례를 폐하고 서모나 형수 기신재의 예에 따라 3품관으로 대 행하였다. 현종 때 판중추부사 송시열이 정릉 흥천사 기문이 갖추어져 있음을 지적하고 신덕왕후로 종묘에 배향해야 한다고 상소하여 서모로 강등 300여년만에 왕비로 복원됨. 역대 왕후 중 신의 왕후,원경왕후는 태왕후로 추존되었으나 송시열에 의해 왕후로 수정됨.
2. 문종의 정비 첫번째 김씨 : 문종이 무관심으로 인해 해괴한 짓을 하다가 부녀가 자결 두번째 봉씨 : 레즈비언: 궁녀와 썸씽 스페설 봉씨에게 관심을 가지려 할 때 후궁 3명을 들임으로 인해 세자빈과 거리가 멀어짐. 후궁 중 권씨가 딸을 출산하고 첫딸이 죽고 둘째 딸이 나오면서 종4품 양원이 됨(첩) 세자빈으로 승격된 후 책봉때 가례를 올려야 한다는 의견과 무방하다는 의견 속에서 문종이 두 정실부인 이후 세번째 가례에 대한 회피로 생략을 원해서 후에 엄청난 후환의 빌미가 되었다. 24세에 단종을 낳고 죽게되자 세종 후궁 양씨에게 단종을 부탁함. 시호를 현덕빈으로 안산에 매장함. 문종이 왕이 된후 현덕왕후로 추봉하고 소릉이라는 칭함. 1513년 중종 8년에 안산에서 이장하여 문종과 합장하였다.( 현릉 ) 세종말 의정부 사서제를 만들어 육조의 안건을 의정부에서 심의 후 결재하는데 문종이 세자시 (세종24-32; 8년)대리청정을 하였고 세자를 보필하던 집현전 학자들이 정계로 진출하는 것이 활발해 졌으며 문종이 왕위에 오르자 대간으로 진출하는 요직을 차지하였다. * 세종의 고명대신으로는 황보인, 남지, 김종서와 집현전 출신 관료 (집현전은 고려 인종 때 사용)
3. 수양대군의 불만 첫째: 가례도 없이 들어 앉힌 후궁 출신자이며 단종은 절름발이 왕실 출생이다. 문 무예를 보유하고 정실 왕실인 나는 왜 소외되는가? 둘째 : 태종, 세종을 거치면서 적 장손이 왕위를 계승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뛰어난 왕자가 그 지리를 이어 받았는데 왜 유독 나는 안되나? 세조는 의경세자'장'이 죽자(현덕왕후의 보복?) 현덕 왕후는 폐서인이 됐으니 봉릉할 수 없다는 구실로 능을 없애고 서인의 묘로 개장토록 지시했다. 능이 있던 안산에서 능으 파기 며칠 전 부터 권씨의 원한 맺힌 곡성이 들려 왔다고 했다. ' 내집을 파 놓으면 나는 장차 어디에 의지하고 사느냐? ...... 재궁(왕, 왕비의 관)을 들어 내려하자 꼼짝을 안해 제사를 지낸 후 겨우 빼낼 수 있었다고 한다. 재궁 후 3-4일 방치해 둔 탓에 바닷물에 떠 내려 가고 몇달 후 주변에 살던 노승이 잠자다가 바다에서 나는 여인의 울음 소리를 듣게 되었다. 바닷가에 옻칠을 한 관을 발견하고 봉분을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폐허가 된 구릉에서는 이변이 발생했는데 나무가지를 범하거나 소, 말에게 풀을 먹이면 맑은 날에도 뇌성과 폭풍우가 일어 주변인들이 능역을 잘 보존했다고 한다. 세조의 부인 정희왕후는 11세에 수양 대군과 혼인을 하였다. 이기의 송화 잡설에 의하면 궁중의 감찰 상궁과 보모상궁이 윤씨집안에 왕후의 언니를 만나러 왔는데 어머니 이씨 뒤에 숨어 얘기를 듣다가 눈에 띄어 언니대신 왕실로 시집을 가게 되었다 아버지 윤번은 신천 현감을 재직하다가 혼인으로 인해 군기 판관에서 부정을 거쳐 공조판서에 이르게 된다. 후에 중추원사로 승진했다가 중풍으로 사직한다. 세조는 여자 관계가 단순하여 후궁으로는 근빈 선산박씨(박팽년의 누이)가 있었고 끝까지 세조를 섬김 여인이었다. 자식으로 덕원군 '서'와 창원군 '성'이 있다. * 정희 왕후는 성종(1년) 때에 1차적으로 종친 정리 작업으로 세종의 4남 임영대군의 아들 구성군을 경상도 영해로 귀양 보내고 여기서 죽게되었고 또한 종친들의 관리 등용을 법으로 금지하였다. 구성군은 1466년(세조12년) 무과에 급제하고 이시애 난(적개공신1등)을 평정하였고 병조판서에 이어 영의정으로 특진되었다. 1468년 남이 옥사를 다스리는 공으로 익대공신 2등에 훈봉되었다.궁녀 덕중의 구애편지를 받아 고변을 했으나 이걸 기화로 왕위찬탈 1위 후보로 지목되어 정인지등의 탄핵에 의해 사사하게 됨. 정희 왕후는 평소에 조용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나서는 결단력이 있었다고 한다. 거사를 망설이는 수양에게 갑옷을 입히고 성종의 등극 작업을 하는 등 정치적 감각이 뛰어나 세조도 칭찬했다고 하며 7년간 조선 안정을 도모한 국정 운영을 하였다. 정희 왕후는 글을 몰랐다고 한다. 그래서 대리청정 시 인수대비에게 고난을 많이 겪었다고 하는데 그곁에서 도와준 것이 상궁 조두대라고 한다. 조두대는 궁서체를 만든 장본인이라고 하며 연산군때 왕이 글씨체를 보고 궁안에서 쓰는 글씨라 해서 궁서체라고 했다고 하는데 결국 폐비 윤씨를 몰아내는 인수대비의 '내훈'을 쓴 자로 지목되어 죽고 만다.
4. 예종 첫부인 장순왕후(한명회의 딸) 장순왕후는 인성대군을 낳고 세상을 떠나고 아들도 5세때 사망하였다. 두번째 안순왕후는 예종이 세자때 맞이한 후궁으로(우의정 한백륜의 딸)이었으나 예종이 왕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됨. 제안대군'현'이있었고 25세에 청상과부가 됨. 예종 사후 제안 대군의 나이가 4세로 대리청정이 이루어져야 하나 인수대비는 의경세자 장남이었던 월산대군에게 와위를 물려주지 않고 한명회와의 결탁으로 인해 차남 자산군에게 왕위가 돌아감.
5. 단경왕후 신씨 중종의 조강지처? 신수근의 딸이다. 신수근은 연산군과 매부지간이다. 중종 반정 전에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은 신수근에게 먼저 의견을 물었던 것이다. 왜냐면 중종(진성대군)의 부인이 딸이기 때문에 처남 매부간, 딸과의 관계에서 택일 할 것을 물은 것이다. 결국은 신수근의 거부로 모두 비참한 상황으로 뀌게되고 왕후 7일만에 물러나게 된다고 해서 드라마도 나왔으며 중종을 그리며 인왕산 바위에 붉은 치마를 놓아 그리움을 표현했다는 얘기도 있으나 궁궐에서는 그 붉은 치마 바위가 안보였다고 한다. 영조 때 복원되어 '단경왕후'로 추대 되었다. 중종은 제2 계비 정현왕후와 함께 정릉에 묻혀있다.(성종의 선릉과 중종의 정릉 : 강남 선릉역), 단경왕후는 1557년 71세로 세상을 떠나 양주군 장흥면 일영리에(온릉: : 정자각에 잡상이 유일하게 없다)묻혔고 2020년초 최근 개방되어 일반인들도 갈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단경왕후 신씨가 궁에서 쫒겨나자 후궁을 들이는 쪽으로 해서 무관 윤임이 소개했는데 윤여필의 딸이 간택됐다가 왕비로 책봉되었다. 윤여필의 부인은 박주선의 딸로 박원종과 남매지간이므로 장경왕후 윤씨는 박원종이가 외삼촌이었다. 월산대군의 두번째 부인이 박원종의 누이였으며 연산군이 겁탈하여 자결하자 박원종은 반정을 결단하였다. 신씨의 복위 운동은 장경왕후가 인종을 낳고 죽자 순창군수 김정, 담양부사 박상이 상소 했으나 김안로의양시론에 의해 귀양으로 끝나고 현종 13년 이조참의 이단하가 '신주'만이라도 위로하자고 했고 숙종 24년에 신규의 상소가 있었으나 영조 15년 유학자 김태남으로 상소로 복원되었다. *** 중종 후궁 경빈 박씨는 부친이 박수림이며 사족출신으로 (士族出身) 군인이다. 채청녀사 선발에 의해 연산군 11년에 궁궐에 온지 며칠 후 중종 반정이 발발했고 박원종은 궁궐 내에 자신 세력을 확보하기 위해 이 아이를 양녀로 삼고 후궁으로 간택되어 경빈이 됨. 중종과 관계가 원만하여 1남 2녀를 낳았으며 새 왕비로 들일 생각을 안했는데 그 원인은 경빈의 출신이 미천하여 간택 조건에서 미달되었던 것이다. 왕비 공석 3년 후 중종이 30세때 왕비 간택령이 내려져 문정왕후(윤지임의 딸)가 간택되었는데 윤임이가 지원했으나 후에 원수지간이 됨. 중종은 임금으로서 처음 친영례( 신랑이 신부를 맞이하여 자기 집에서 혼인식을 하는 것: 종전은 여자 집에서 혼례를 올렸다) . 이게 전례가 되어 임금이 가례를 올릴 때 어의동 본궁 또는 태평관에서 친영례를 올림. 문정 왕후는 중종이 처소를 찾아 오지 않는 날에는 사기, 여장부전, 선덕과 진덕여왕전을 읽으면서 소일하였다. (부녀자 덕목 보다는 정사 얘기에 관심이 많았다. (중종을 공처가로 만듬) 중종은 반정으로 왕이 되어 반정 3대신들이 조회 후 문 밖에 나갈 때까지 계속 서 있었다고 한다. 이런 왕 공처가로 만든 문정왕후는 1차적으로 제일 큰 난적인 경빈을 작서의 안을 기화로 경빈을 제거한다(왕비의 자작극이라는 얘기도 있다) . 2차는 김안로를 제거한다. 3차는 윤임(소윤)을 제거하면서 완전한 기반을 잡게 되었다. 인종이 석고 대죄를 한 후 (5월) 몸이 아파 누워 6월에 이질 증세를 보였다. 문정왕후는 이 병의 상극인 닭죽을 계속 가져다 먹이도록 하였다고 하는데 일설에는 문정왕후의 떡을 먹고 앓다 죽었다 한다. 문정왕후는 숭불 정책의 결과로 임진 왜란 때 의병을 일으키는 기반을 형성했으며 휴정, 사명대사 등 승려를 나오게 하였으며 행주산성 5000명 중 2500명이 승려였으며 제일 험한 지역에서 방어했다고 하며 충무공 해전, 육지 전투 등에서도 많은 공로가 있었다. 문정왕후의 아들인 명종은 부인 심씨 사이에서 아들 순회세자를 낳았으나 13세때 요절함( 일설에는 순회세자가 색을 밝혀 시뻘건 피를 흘린지 3일만에 죽었다고 한다. 명종은 30이 넘어서도 자식이 없자 초초해져 중종의 9째 아들 덕흥군의 셋째 하성군을 양자 삼으라고 했으나 거절하고 아들을 광적으로 요구했지만 후궁에서도 아이가 없었다. 신분이 천한 여자가 무수리 '정'씨가 선택되었으나 아이가 없자 태몽을 꾸었다고 꼬셨으나 너무 지나쳐서? 명종은 고명을 남기지도 못하고 그날밤 유명을 달리하였다. 그후 선조가 유일하게 방계가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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