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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원 18시집
없 습 니 다
도서출판 태원
노래하는 시인 권태원
● 약 력․1950년 경남 고성 출생․1975년 부산은행문학상(심사․이형기/조순/김태홍)․1978년 한국해기사협회 詩․小說 당선․1984년 월간<심상> 당선․2014년 <詩와 수필> ‘수필’ 당선․2015년 <詩와 수필> ‘소설’ 당선․2018년 <詩와 수필> ‘동시’ 당선․2005년 한국해양문학상․2010년 동서문학상․2010년 부산국제茶어울림문화제 은상․2011년 부산문학상․2012년 대한민국다문화예술대상 ‘문학대상’․2014년 대한민국다문화예술대상 ‘사진작가대상’․CJ케이블방송 <라디오스타> 부산FM 출연(2015)․국제신문 ‘박창희 大기자의 색깔 있는 인터뷰’(2016.5.23)․국제신문서평 14시집<집 안에 시가 있다>(2015.8.29)․국제신문서평 13시집<그리운 예수, 보고 싶은 부처>(2014.6.21)․부산일보서평 13시집<그리운 예수, 보고 싶은 부처>(2014.6.5)․부산일보서평 9시집<당신 안에 있으면>(2011.1.5)․1971년부터 한국연예예술인협회 가수위원회 정회원․1975년 대한민국사진대전 ‘대통령상’․1975년 MBC-TV전국사진촬영대회 ‘경남도지사상’․1976년 부산사진대전 동상․1978년 부산사진대전 특선․동아일보 동아사진콘테스트․매일신문 매일사진콘테스트․한국스포츠경제 부산․영남 취재본부장․CNN NEWS 발행인․주필● 시 집․<팬지꽃으로>․<그러다가 그러다가 시인이 되어>․<나는 그대의 쓸쓸한 그림자이고 싶습니다>․<하루에 한 번만이라도>․<그리운 예수>․<당신 안에 있으면 1>․<바다, 그리운 첫사랑>․<또 하나의 사랑>․<당신 안에 있으면 2>․<어찌하여 물이 흐를 때 꽃은 피는가>․<봄날은 간다>․<당신이 아니시면>․<그리운 예수, 보고 싶은 부처>․<방 안에 詩가 있다>․<하늘지우개>․<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이슬처럼 별처럼>․18시집<없습니다>
● 저 서
․장편소설<블랙 크리스마스>․에세이집<이슬처럼 별처럼>․동시집<가을소리>․시조집<당신이 아니시면>
● 편집회사 태원․왕영수 신부<신앙의 신비여>․김계춘 신부<행복을 만들어가며>․<한국해양대학교 50년사>․<부산일보 연감>․<국제신문 연감>
● 자격증․힐링치매예방지도사1급․웃음치료사 공인2급․노래지도강사 자격증․건강박수치료사 공인1급․스피치지도사 공인2급․리더십지도자 공인1급․레크리에이션지도자 공인2급․부산간병사협회 자격증․한국음악저작권협회․한국문화예술인총연합회․배호추모가요제․현인가요제․한국역술인협회․한국노래지도강사연합회․한국놀이문화부산광역시협회․대한태권도협회 국기원 공인4단(1975)․대한국술원총본부 공인7단․대한쿵후협회 공인7단․대한택견협회 공인6단․국선도 사범
● 만 행․해인사 쌍계사 옥천사 직지사 백담사 미타암 등 제방선원․대한불교조계종․공동선실천부산종교지도자협의회․세상을 향기롭게․불교중흥실천협의회․백양산 부전선원․화엄선림회․법보신문․국제펜클럽․한국문인협회․한국현대시인협회․부산문인협회․부산시인협회
․부산상고/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경성대 영문학과/부산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화신사이버대학교 사회복지학과/대한예수교장로회 목사/명예목회학 박사
도서출판 태원 010-2624-844048925 부산광역시 중구 샘길 3
ktw7519@daum.net
www.mariasarang.net/kwontw
초대시
새가 되어 오리라
조창용
한평생 마음 가는 데로 가지 못하고
마음으로만 마음으로만
살다가 떠나가겠지 떠날 땐
흐르는 물처럼
바람에 떠가는 구름처럼
그렇게 떠나고 싶다
이 세상 떠났다가
천년이 흐른 후에라도
다시 온다면 그 때는
마음대로 날 수 있는
새가 되어 오리라
* (사)부산시인협회 이사장․(사)부산장애인총연합회 회장․ 국민훈장 석류장과 한국장애인문화예술 대상․국무총리상 등 다수 수상․시집『새가 되어 오리라』외
■7080 라이브 초대가수
인 생 작사·작곡 서 광 식
바람아 불어라 구름아 흘러라
한 줌의 흙이 되는 그날까지
사랑 찾아 헤매이다 인생길은 낙엽지고
안개처럼 깨진 사랑 슬픔에 내가 울 때
애타게 불러봐도 떠난 사람 대답 없네
사랑도 잊었는가 죄 많은 인생길
바람아 불어라 구름아 흘러라
한 줌의 흙이 되는 그날까지
한 많은 꿈을 안고 인생을 사노라면
비에 젖어 한 송이 꽃은 피었건만
애타게 불러봐도 가는 세월 잡을 수 없네
밤도 슬퍼 우는군 여울 속에 지는 인생
빈들에 홀로
나는 너무너무
빠르다
나는 너무너무
무겁다
나는 너무너무
돌아다닌다
잘못 살아 왔다
세상 근심 집안 걱정
잠 못 이루는 사랑일 바엔
차라리 지우고 잊어버리자
외로운 사람들끼리 모여 살자
이 눈물을 팔아서
이 눈물을 팔아서
작은 산을 하나 사고 싶다
이 고통을 팔아서
예쁜 꽃을 하나 사고 싶다
이 슬픔을 팔아서
작은 꽃밭을 사고 싶다
내 작은 사랑을 팔아서
세 평짜리 오두막에서 살고 싶다
꽃들의 아픈 눈물
별들의 긴 고통을
흐르는 강물에 떠나보내고 싶다
산중인山中人
내가 사는 산봉우리마다
깊은 휴식이 있다
오월에 부는
솔바람 소리로 살고 싶다
나이 오십이 되면
산중인山中人이 된다
지금 나는
산으로 갈 수 없다
산이 내게로 오게 할 수밖에
청산이 느릿느릿
찾아오게 할 수밖에
길은 마음에 있다
가만히 눈을 감고 앉으면
풍경소리가 천근만근 마음을 울린다
깨달음은 어디에 있는가
사람이 나서 죽는 것도 인연인가
저 돌에게 물어보라
열쇠는 그대가 가지고 있다
내가 세상을 버렸는지
세상이 나를 버렸는지
잠시 생각한다
산 높고 물 깊은 풍광에
온갖 꽃들이 봄을 다투네
없습니다
하루 종일
아무도 오지 않는
빈 방
빈 잔
지금 나에게는
그리운 예수
보고 싶은 부처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도
미워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詩는
나의 운명입니다
산사에서 부친 편지
그대 안에 바람이 분다
문 안과 밖에 무엇이 보이는가
보름달은 연못에 가득하고
가을 물은 하늘에 닿는다
끝없이 생각하라
마음길이 끊어지면
그대가 닿아야 할 길이 없다
누군가 그대를 건드리기 전에
고요히 마음의 문을 닫아라
찢어진 창문으로
바람이 쏴아 들어온다
지금, 여기
그대는 옷을 벗었는가 입었는가
무엇이 그대의 영혼을 끌고
여기까지 오게 하는가
영안실에서
죽지 마
죽지 마, 제발
삶이 직선으로
뻗어 있는 것이 아니다
저물기 전에
많은 눈이 쏟아진다
조금 더 이대로 있어달라고
아직 내가 다 씻기지 못했다고
얇은 종이의 하얀 뒷면 같은
죽음이 오기 전에
우리 몸은
모래 위의 집이 아닌가
아득하면 되리라
속눈썹이 예쁜 보름달은 자갈치 밤바다 한가운데 위에 떠있다 눈물 글썽이며 홀로 울고 있는 딸애 얼굴을 닮았다 바람이 송도 앞바다에서 불어오다 잠들고 있다 술 취한 남포동 비둘기들도 모두 잠든 뒤 용두산공원 이순신장군도 태종대로 퇴근하고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잠들지 못한 몇 사람의 시인과 소주 반병이 외로운 세상에 눈물방울처럼 남아 있구나 예수는 서른세 살에 죽으면서 십자가만 남기고 무슨 말을 했을까 우리 꿈속에는 아픔도 없을까 전쟁도 없을까 들개처럼 하루 종일 다리나 약간씩 절면서 갈릴리 시골길을 예수처럼 혼자 걸었을 거라고 믿을 수밖에, 믿을 수밖에
가족사진
새가 날면 누가 보는가 복사꽃 피고 복사꽃 떨어지면 무얼 먹는가 가을 겨울이 끝나고 다음 봄까지 기다리라면 기다리겠습니다 갈릴리 시골사람 예수여 이 시대 깨어 있는 자는 어디 있는가 남포동과 해운대에 시인은 어디에 있는가 술 취한 비둘기들은 모두 용두산공원에 살다가 요즘은 TV 화면에서 보이지 않는다고 일곱 살 딸애는 울면서 말했습니다 가령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나도 풀잎 하나를 꺾어서 딸애와 내가 살 수 있는 원룸 하나를 만든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가령 가령 내가 죽어서 하나밖에 없는 딸애 옆에 서 있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또 산이 무너져 바다가 된다면 얼마나 행복한 기적일까 우리 집에 함께 살고 계시는 참 좋으신 하나님, 꽃 한 송이보다는 정말 소중하게 살고 싶어요
자갈치시장
너를 만날 때마다
그만 네가 되어본다
못 견디게 못 견디게
네가 그리워서
비 내리는 자갈치
새벽시장을 걸어본 적이 있느냐
참숯처럼 뜨거워본 적이 있느냐
사람들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흘러가는지
사라져버리는 것들 이제는 보인다
너도 견디고 있구나
나의 기도
홀로 기도하십시오
아침에는 근심 걱정의 열쇠가 되고
저녁에는 인생의 빗장이 된다
너무 바쁘다고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너무 바쁘다고 자신의 건강을
돌보지 않는 사람과 같다
하나님을 구하지 않는 사람들의 눈에는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
절망의 끝에서 시작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을 구하면 반드시
우리들 앞에 나타나신다
반 성
상한 영혼도 흔들리며
희망에게 간다
상한 갈대도 짓밟히며
사랑으로 간다
이 세상 어디서도
등불은 켜져 있다
이 세상 어디서도
들꽃은 피어 있다
능소화 뚝뚝 떨어지는 유월처럼
시인은 아무나 되는 줄 알았다
시집은 푸른 바다처럼
저절로 만들어지는 줄 알았다
풍경 소리
비우고 지우고 내려놓아라
한없이 작아지고 낮아지면서
꽃잎들이 떨어져 내린다
배롱나무 사이로
붉게 타오르는 서녘 노을
바람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지금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나는 한 알의 먼지다
길이 멀다
나는 떠도는 점 하나다
詩나그네
누가 고요를 노래할 수 있는가
비 내리는 날은 물이 되고 싶다
떠도는 편지처럼 홀로 살아도
외로움을 잊고 지낼 수 있다
진실이 없는 외로움은
한 장의 유언이다
詩나그네는 음악이 되어야 한다
인생은 온통 물소리
새소리 바람소리
저문 가을비 내리는 날은
적막한 바다에 흘러가서
외로운 섬으로 떠있고 싶다
반 달
다시는 만나지 말자
다시는 생각하지 말자
두 번 다시는
상처를 만들지 말자
세상과의 고통을 잠재우고
봄을 기다리는
그대 그대여
오늘은
물뱀 한 마리 같은
반달 하나가
깨진 항아리 빛 하늘로
솟아오르고 있다
기 도
어린이의 눈빛으로
냉이꽃만한 소망의 말로
'용서하세요'라는 말을 하게 하소서
무슨 일을 해야 좋을지
봄빛 터지는 소리로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하게 하소서
주여, 당신 은총으로
나를 새롭게 하소서
내가 당신을 따른다는 것은
나와 아낌없는
결별임을 깨닫게 하소서
열매를 위한 꽃처럼
항상 말로만 당신 뜻을 따르고
말로만 순명했던 나를
인생의 절벽에서 사랑하게 하소서
눈물 많은 세상
마음이 가난하기 위해선
꽃이 되고 싶다
꽃들의 눈물 속을
걸어가 보고 싶다
부끄러운 부끄러운
마음의 꽃 한 송이
자기의 生을 조명하는
촛불 하나로 빛나고 싶다
우리가 흐르는 물로
만나는 것들, 헤어지는 것들
꿈으로도 오지 말고
등불만으로 홀로 남아 있어라
잠자는 돌처럼 나도 눕고 싶다
가을의 기도
제가 누구인지 당신이 누구신지
가을에는 깨닫게 하소서
저의 매일매일은
새로운 축제로 출발하고 싶습니다
이제부터는 두레박 없이도
물 긷는 법을 알게 하소서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항상 하늘이 열려 있습니다
사랑은 죽음과 삶을 지켜보는
눈동자라는 걸 느끼게 하소서
시인은 영혼의 십자가
땅 속 깊은 곳으로 가서
투명한 물을 퍼내게 하소서
아 아프고도 아름다운
生의 멍에를 지게 하소서
외딴 집
사랑은 텅 빈 하늘에
나 홀로 섬이 되는 것
사랑은 같은 방향으로 바라보는 것
사랑은 직접 닿지 않아도
나와 같은 빛깔로 물들어버리는 것
풀잎 하나가 져도
온 세상 문이 모두 닫히는 느낌
사랑할 때는 모두가 무엇이 된다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아도
사랑인 줄 아는 것
간절하지 않은데
사랑이라 할 수 있나
외딴 집처럼
침 묵
울지 않기 위하여
혼자 살고 있습니다
가난하지 않기 위하여
꿈에서도 일합니다
쓸쓸하지 않기 위하여
기도를 바칩니다
빈 방에 홀로
상처 위에 등불을 켭니다
우리 사는 세상은
슬픔으로 가득 찬 감옥입니다
그래서 자주 그리고
많이 웃고 싶습니다
기도학교
인생의 비
잠시 그친 뒤
오늘은 기도하라
내일은 한 번 더 기도하라
모레는 끝까지 기도하라
슬픔이 다하는 날 감사하라
고통이 끝나는 날 고마워하라
상처가 아름답다
항상 기도하고 기뻐하라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다
오체투지
용서하자
용서하자
미워하지 말자
미워하지 말자
다시는
상처를 남기지 말자
다시는
흔적을 남기지 말자
칡꽃향기
하루에 한 번만이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
비 오는 저녁에는
외로운 사람을 기다리고 싶다
꽃이 되는 당신을
밤새 지켜보고 싶다
미워하는 사람을 위해
밤을 새워 기도하고 싶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시인이 되었으면 아름다우리라
시인이여, 잠들지 말라
그대가 잠들면 이 세상 사람들의
잠 속을 누가 지나갈 것인가
새벽 숲에서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나서
죽고 싶지 않다
내 영혼의 정원에는
사루비아꽃이 피어 있다
사람은 흙이다
나도 흙으로
돌아가리라
때로는 나도 스님이 되고 싶습니다
그대가 내게로 오는 길은
꽃길입니다
내가 그대에게 가는 길은
꿈길입니다
내가 잠들지 못하는 시간에도
부끄러운 몇 마디의 언어로
내 곁에 있습니다
나는 언제까지라도
당신 곁에서 잠들 것입니다
때로는
나도 스님이 되고 싶습니다
보고 싶은 부처
빈 방에서
너를 기다린다
비둘기처럼 날지는 못해도
아직도
나, 살아 있다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가 꽃자리다
폐허에 폐허 위에
비가 내린다
하루 종일
아무도 오지 않는 빈 방에서
오늘 하루도
오직 그대만을 위해
나는 기도한다
낮에 나온 반달처럼
여 행
외롭다고 생각하면
지금 바로 여행을 떠나라
슬프다고 느껴지면
혼자 여행을 떠나라
나는 늘 서툴다
그래도 괜찮다고
내 안의 나에게 위로해보라
철새는 슬픔의 힘으로
그리움의 힘으로 날아간다
여행은 방에 있는 나를
문 밖으로 불러낸다
나를 비우고
나를 지우고 천천히
그리고 잠시 멈춰서서
떠나가게 하는 것이다
부전선원 가는 길
어제의 하늘같은 그대여
오늘의 꽃 같은 그대여
내가 계곡에 서 있을 때
그대는 물소리가 난다
그대에게 가려고
가지 않으려고
못처럼 나를 구부렸다
아무리 내려가 보아도
그대는 보이지 않았다
길은 바로 내 앞에 있어도
눈이 어두워 보이지 않았다
* 백양산 부전선원 선원장 안국 스님
詩 아닌 詩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꽃이 되고 싶었습니다
함께 있으면 있을수록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한 마디, 한 마디의 말
착한 눈빛, 해맑은 웃음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오래오래 들여다보고 싶습니다
잠들기 전 기도
해와 달,
우리가 언제 만나기나 했을까
바람도 없는데
서로가 서로를 사랑한다고 믿었다
외롭다고 생각할 때일수록
혼자 있고 싶었다
풀잎이 그렇고 풍경이 그러하듯이
이제 제각기 가야할 길로
가야 할 시간이다
사랑은 단 한 번뿐이다
오늘 하루도 나무 아래서
너를 기다린다
너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가슴에 가득 찬다
별은 말이 없다
별은 말이 없다
모든 미움을 사랑으로
모든 절망을 희망으로
모든 눈물을 웃음으로 만든다
밤하늘의 별이
말이 없는 것처럼
산 속의 나무도 말이 없다
나무 한 그루 자체가
내가 사랑하는
당신이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는
내 안의 당신이기 때문이다
해 탈
목탁 속에는 하나의 풍경이 있다 산사의 목탁 소리 귀에 익으니 발길 따라 오던 속세의 물결도 억겁 속으로 사라진다 마음의 눈으로 본다면 눈은 감고 있어도 좋으리라 산문 밖으로 나와 지팡이를 휘둘러 본다 지금, 좌선을 하는 중이다 참선이란 앉아있는 것이 아니다 부처는 원래 정해진 모양이 없는 것인가 육신은 영혼을 그리워한다 영혼을 찾아 떠돌고 있는 것이 우리의 인생인가 마음이 곧 부처라면 물을 따라 흘러가고 싶다
수도원
내가 옳고
그대는 그른가
꿈속의 일인가
하늘 아래 일인가
천마산 아래
누가 너이고
누가 나이더냐
종일토록
바위 위에 앉아서
놀고 있다
세상을 버렸다
무엇을 다시 바라리요
아 내
아내에게는 어둠의 그림자가 별로 없다 항상 아내는 유리창처럼 투명하다 나는 장래 정숙한 부인의 성실한 남편이 되고 싶었다 아내는 항상 고요하고 맑고 청정한 호수였다 어머니와 같은 아내, 누이 같은 아내, 친구 같은 아내, 며느리 같은 아내를 내 몸처럼 사랑하고 싶다 종 같은 아내, 원수 같은 아내, 도둑 같은 아내도 해와 달이 지나갈수록 산처럼 물처럼 내 안에 모시고 싶다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지난 시절을 생각해 보면 모두가 내게 고마운 시절인연들이다
사진가 석공 스님
느리게
빠르게
그러나 지나치지 않게
천천히
그리고 또박또박
천천히 책을 읽고
천천히 밥을 먹고
천천히 잠을 자고
하지만
천천히도 지나치지 않게
내가 너라면
순간이다
꽃 피는 것도
꽃 지는 것도
너와 나 사이
詩를 버리고
내가 떠난 후에도
내가 너라면
나에게 남은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다가
손을 한번 쓸쓸히
쥐었다 펴 보는 것이다
나무는
사랑 뒤에 오는 것들
모른다 모른다
이별 뒤에 오는 것들
부질없다 부질없다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여기저기에 내가 있었다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쓸쓸하다
당신은 지금 사랑의 안쪽에 있다
슬픔의 안에 안에 있다
성철 스님
깊은 산 깊은 생각 없는 자로 하여금 한 말씀 듣게 해주십시오 두서없이 어리석은 글로 스님을 괴롭혔습니다 이미 중이 된 사람이 밥 먹고 차 마시는 일 외엔 할 일이 없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 대숲 흔드는 소리, 그대 얼마나 행복한가 높이 날던 새가 떨어지는 소리 인생만사 다 소리 때문에 흥하고 망하니,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여 보시게 당장 큰 바위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천년만년 바람소리에 귀 기울이겠습니다
적멸의 열쇠
지금은
참선 중
문을 두드리지 말라
폭설이 내린 길 위에서
너는 왜 홀로 서 있느냐
사랑은
몸 떨어진 곳에서부터
다시 시작한다
마음공부
무無는
없는 것이 아니다
비워져 있는 것이다
비워져 있는 건
채울 수 있는 것
늘 비워두어라
그래서 얻어지는
마음공부가 무無
고요를 잃으면
자기 얼굴을 볼 수 없다
부처는 어디에 있습니까
만리 푸른 하늘에 붉은 해가 길구나 완전한 자유란 마음과 경계 둘 다를 잇는 것이다 마음을 스스로 비우니 탐욕은 오히려 향기가 되는구나 구름이 걷히고 비가 그쳐 가을바람 소슬이 분다 마음을 써서 다하니 웃으며 남의 입을 막는다 스님, 부처는 어디에 있습니까 네 마음속에 있다 마음 마음이 부처를 이룸에 한 마음이라도 부처의 마음 아닌 것이 없다 인생은 찰나이며 허공이니 마음의 차별을 두지 마라 길을 잃고 헤매는 자 앞에 부처가 있다 뚜렷이 깨달음 널리 비치니 고요함과 없어짐이 둘이 아니다 길은 어디에도 없다 다만 네 마음속에 있을 뿐이다
산중일기
그대 지금은
적막하여 들리지 않습니다
어디에 계십니까
모든 것이 이슬이니
남은 목숨
이슬처럼 살고 싶습니다
낮엔 꾀꼬리
밤엔 두견새 우는 여름 밤
귓가엔 물 흐르는 소리 청아합니다
밤길에는 흰 것을 밟지 마십시오
물이 아니면
돌이기 때문입니다
마음꽃
끊어진 마음길이란 없습니다 어서 떠나십시오 마음에 병이 들면 건강한 몸도 시름시름 병이 듦니다 그대 집 열쇠는 어디에 두었습니까 언제 저에게 머무를 집이 있었습니까 사람에겐 세 개의 동굴이 있습니다 콧구멍 똥구멍 마음구멍, 세월은 물같이 흘러가는데 실로 미리 정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일말의 맑은 바람 외로운 산봉우리에 불어옵니다 모든 것에 통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지나간 과거사 한바탕 꿈입니다 나를 괴롭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과거 현재 미래도 모두 꿈이니 마음꽃이 나오지 않습니다
암자로 가는 길
돈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굴러가는 돌이다 닭은 추우면 나무로 올라가고 오리는 추우면 물로 들어간다 공양은 주린 배를 달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법을 잇기 위한 것이다 글 쓰는 것조차 힘든 겨울추위이다 마음의 소리, 대숲소리, 세상 끓는 소리 모두 고요소리이니 귀를 가만히 닫아라 번뇌란 지우려고 하면 자꾸 찾아오는 법, 가고 오는 세월처럼 내버려두라 시인은 요즘 부처 안에서 기도하며 부처 안에서 살고 있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남을 사랑하는 것과 같다 세상은 머물지 못하는 사람을 객이라 하고 머무른 사람을 주인이라 한다 나는 객인가 주인인가
중화요리 ‘일품향’
나그네 스님은 깊은 산에
천년학은 소나무숲에 깃드는 것
찬 얼음물처럼 마음을 깨쳐라
산이 다하고 물이 다한 사람 없는 곳에
마음 마음 마음 찾기 어렵네
지옥과 천당도 모두 마음의 그림자일뿐
흩어진 마음을 모아라
모인 마음속에 돌부처 하나가 깃들 것이다
스님, 가난한 시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건 굴러가는 돌이고
구름처럼 흘러가는
운수납자雲水衲子이다
* 부산시 연제구 법원북로3번길 7.
버리지 못할 인연
새벽 세 시
문을 두드린다
문이 열리지 않더라도 두드린다
가을산 쌓인 낙엽이 발목에 채인다
마음이 고요해지면 번민이 사라진다
마음이 적막해지면 무욕의 길을 가리라
마음속의 부처인 자기의 본래 모양을 깨쳐라
사람은 자기 안에 부처가 있는 것을 모른다
아직도 잃어버린 소를 찾지 못했는가
아무리 일이 많다고 해도 茶 한 잔 하시구려
무명사
하루 종일 아무도 오지 않는
심산유곡의 암자, 오늘 새벽에는 무명사 지장전에도
하얀 눈이 내립니다 눈길을 더듬어 걷다가
짐승의 발자국을 발견합니다
산토끼의 발자국 같습니다
그 발자국이 너무 곱고 아름다워
나도 모르게 눈물방울을 따라서 흘러갑니다
빈 방에 걸어둔 붓 한 자루
낡은 서책 몇 권만이
한평생 살아온 삶의 무게입니다
마음과 꽃, 둘 아닌 곳에
옛 부처가 마음을 토하네
납골당
울고 싶을 때 울지 않고 동박새는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좋은 옷 입지 않고 좋은 음식 먹지 않는다 맑은 마음 청정향을 부처님께 바친다 너무 길어서 끝이 없고 너무 짧아서 가운데가 없다 정함도 없고 머무름도 없는 마음을 기도한다 꿈과 색이 없는 상이 진실하다 가고 싶으면 가고 놀고 싶으면 놀자 내가 행한 모든 일은 종자의 원인이 되고 제가 받는 모든 일은 열매의 결과이다 행복하려면 제일 먼저 감사하자 감사한 마음 가질 때 행복하게 살게 된다 나쁜 일에 감사할 때 좋은 일은 당연하다 궁색할 때 도와주고 사지에서 살려주자
구덕산
오늘 오후에도 속이 빈 나무처럼 서 있는 꿈을 꾸었다 어제밤에도 뒷걸음치는 참 겁 많은 노루꿈을 꾸었다 눈발은 잠깐 그쳐 있다 산모롱이 한 굽이 돌아 당신을 만나러 간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나와 당신 사이에 희미하고 둥근 눈썹을 가진 낮달을 시나브로 어루만지는 것이다 누군가를 그리워하다는 것은 어두워지는 순간에도 바람이 불고 불어와서 문에 구멍을 내는 외로운 사람의 눈동자를 기억하는 것이다 당신이 얼마나 괴로운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혼자 사는 나에게 고백하지 마세요 나도 힘들게 여기까지 오늘까지 왔다 눈발 그치고 나니 별이 나오네
철야기도
하나님, 제 목숨을 한 달만 더 연장해 주세요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보다는 더 행복하게 살게 해주세요 수선화보다는 더 예쁘게 살아가게 해주세요 돈이 많은 사람보다도 더 기죽지 않고 풀꽃처럼 일어서게 해주세요 욕 안 얻어먹고 나이 먹은 사람답게 밥값이라도 내고 지내게 해주세요 천년을 하루 같이, 하루를 천년 같이 기도하면서 살아가게 해주세요 오늘 하루를 뜨거운 감사와 찬양으로 아름답게 살아가게 하소서 하나님, 가난한 시인으로 살아가다가 평생동안 詩만 쓰는, 행복한 시인으로 고요히 눈을 감게 해주세요
조선제 요가명상
인생은 고통의 여행
명상은 그것의 멈춤이다
생각을 조금이라도 내려놓을 수 있다면
삶은 더 쉽고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명상의 차분한 기운을 만나면
고요하게 가라앉는다
'참나 찾기'는 고요한 명상
명상은 비움의 미학이다
집 보는 햇살
차라리 내가 시들고
너는 피어나기를
차라리 내가 고통 받고
너는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차라리 내가 울고
너는 웃기를
물은 물대로
산은 산대로
서로 서로 사랑만 하면서
집 보는 햇살처럼 살고 싶다
부산역에서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다가 죽어버리자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다가 죽어버리자
사랑과 믿음의 어둠은 깊어간다
흔들리며 흔들리며 어디로 가는가
내 사랑 어두운 나의 사랑아
그리움과 기다림의 씨를 뿌려라
날마다 해 뜨는 곳에
나는 가난한 너의 이름을 부른다
내가 마지막으로 너를 사랑했을 때
너는 이미 눈을 감고 있었다
죽음이 없으면 삶도 없구나
좋은 사람
사랑하는 사람에게
안개꽃 한 다발을 받은 것보다
더 행복했습니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을 때
마술사 같은
좋은 사람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쓰고 싶었습니다
함께 있으면 언제나
더 소중한 나의 사람아
물방울 목탁
죽어 있는 모든 것도 노래가 되고
살아 있는 모든 것도 꽃잎이 되는 시절
그대가 다 시들어 말라 비틀어져도
내 눈에는 아름다운 그대가 된다
하루를 살더라도
그대와 하나가 되고 싶다
깨닫기 전에 굶어 죽더라도
그대의 섬에 가고 싶다
떠났더라도 시들기 전에
다시 돌아가고 싶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 상처보다 그대 상처가
언제나 아프고 커 보인다
제비꽃
그대 이름 한 번씩 부를 때마다
텅 빈 들판에는 꽃들이 피어난다
그대 얼굴 한 번씩 생각할 때마다
텅 빈 방에는 햇살이 비친다
그대 가시가 있어도
굳게 끌어안고 싶다
그대 상처가 있어도
와락 안기고 싶다
한 음절의 그대 그대여
보라색 제비꽃으로 피어나고 싶다
동백부처
얼마나 더 기도해야
기도인 줄 아시나요
얼마나 오래 기다려야
사랑인 줄 아시나요
사랑은 서로의 눈높이를 맞추는 것
행복을 느끼는 건
가슴이다 마음이다
대수롭지 않은 안부 한 마디에도
가슴 뭉클해지는 것이 사랑이다
이 세상의 모든 노래가
그대에게 다 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랑이
그대에게 다 있다
성지순례
행복이 오기를 기다리는 사람보다
희망으로 가는 길을
직접 만드는 사람이 행복하다
아픔도 없고 슬픔도 없는
인생을 바라지 말자
그대가 근심 걱정하는 동안에도
지구는 열심히 돌고 있다
사랑할 때는
모든 풀잎들이 음표가 된다
기도할 때는
밤하늘의 모든 별들이 노래가 된다
욕심을 줄이는 것이 수행이다
걱정을 줄이는 것이 기도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가까이 있어도 가슴이 뛰고
멀리 있어도 가슴이 쿵쾅쿵쾅 뛴다
수목장
우리 서로 사랑만 하며 살자
갈대처럼 쓰러질 때마다
우리 서로 일어서자
당신의 가슴에 사랑의 씨를 심자
우리 둘의 사랑에는
물음표가 있다
사랑의 느낌표가 있다
그대의 등 뒤에서
나는 꽃으로
피어 흔들리고 싶다
가시가 있어도
사랑은 아름다운 별이다
행 복
헌 사랑이 가면
새 사랑이 온다
사랑의 시기는
그대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다시 태어나는 일이 중요하다
누가 진실로 나를 사랑할 수 있을까
희망은 자신이 만들어가는 것
당신이 멈추면
사랑의 시간도 멈춘다
진리는 아름답다
아름다운 사랑을 만든다
우리들의 봄이 올 때까지
그대여, 안녕
화엄경
스님,
큰스님 되려고 하지 말고
향기 나는 스님이 되세요
스님, 기도하세요
나와 그가 행복해지길
그대와 그녀가 사랑해지길
나와 친구가 평화로워지길
계속 기도하다 보면
진짜로 부처님 말씀대로 삽니다
편하고 좋은 것을 버리고
세상에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을 찾으세요
죽기 전에
마음 없이
사랑하고 싶다
물소리처럼
마음 없이 흐르고 싶다
그녀가 올 때마다
그녀가 갈 때마다
그녀의 구멍에는
못 하나가 박혀 있다
사람은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이 사랑하는 것이다
마음 비우고 마음 지우고
마음 없이 노래하고 싶다
멈추면 보인다
빛보다 먼저
언어보다 먼저
상처보다 더 먼저
사랑은 목소리도 없이
폭포처럼 끊임없이
내 앞에 먼저 와 있었다
바보처럼
벙어리처럼
사랑은
예수처럼
부처처럼
내 곁에 먼저 와 있었다
마지막 눈이 내릴 때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자꾸만 너에게 가고 있다
쓰러지고 일어서는 갈대처럼
나의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진다
사랑하는 이여
나는 너를 바라볼 수 없다
나 말고 누가
그대의 눈을 만들었을까
너의 머리 위로 등나무 가지가
휘어져 가는 것을 보았다
삭 발
별과
별 사이에서
태어나
섬과
섬 사이로
사라지고 싶다
부처님
지금
어디 계시나요
다대포
사랑은 남고 나는 떠난다
아무런 추억도 없이 헤어진다
기다리는 사람은 있어도
돌아오는 사람은 없다
다시 헤어진다
비가 와도 우리들의 사랑은
비에 젖지 않는다
저 별들은 얼마나 고요한가
술잔 속에 내리는 빗소리를 듣는다
너는 희망을 말하지만
나는 사랑의 소리를 듣는다
부르신 교회
사랑하는 일보다
용서하는 일이 더 어렵다
사랑이 깊으면 미움도 깊어진다
아프다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이제부터는 사랑하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소서
지금부터는 용서하는 일을
피하지 않게 하소서
미안하다 우리의 사랑은
언제나 거짓 증오 앞에 서 있다
내가 첫사랑에 절망한 이유는 무엇인가
내가 詩나그네가 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 부산시 중구 용두산길 10.
문고리
낮에는 찾는 이 없고
밤에도 산국화뿐이다
어두워지는 순간
매화나무도 쓸쓸하고
나도 외롭다
무릎 꿇고 그대에게 절한다
오늘도 그대를
가슴에 품고 산다
무엇하러
여기까지 왔는가
아주 가까운 곳에서
누군가 죽었다
반야심경
살아 있는 것만이 눈이 부시다
사랑을 생각하듯 별을 보리라
안개비가 내린다
꽃잎이 시나브로 지고 있다
이루지 못한 인간의
꿈이 너무 슬프다
그리운 친구 오는 날
폭설로 내리고 싶다
깻잎을 묶으면서
첫 연애, 첫 결혼
첫날 밤, 첫 약속
터질 듯한 적막
나는 정말
나를 잘 알고 있는가
가을 빗방울은
가문 내 마음을 적신다
내가 이 세상에 온 이유를
나는 정말 알 수 있는가
사랑도 죽음마저도
가을 엽서
가을에는 나무들이
우수수 엽서를 날린다
아무도 없는 빈 뜨락에
나무들이 보내는
가을의 노래를 듣는다
잎이 떨어지고 있다
가슴에 고인 詩를
당신에게 보낸다
한 때는 당신을 사랑하였다고
한 때는 당신을 미워하였다고
원고지처럼 가을 하늘이
한 칸씩 비어가고 있다
9월의 크리스마스
부산의 예수 마을에는
9월에 밤새도록
첫눈이 내린다
거북이처럼 걸어서
달팽이처럼 기어서
시나브로 내린다
부산의 예수는
한 여자의 돌 속에 묻혀 있다
해와 달처럼 나도 돌 속에 들어간다
영원한 고통이 없는 것처럼
영원한 사랑의 눈물은 없다
시인 신옥진
울지 말자
다시 한 번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밤새워 기도하자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죽기 살기로 기다리자
그대에게 가을편지를 쓰자
그대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천둥 몇 개
태풍 몇 개로 살아가자
* 해운대구 <부산공간화랑> 대표
고향의 봄
주일 하루만 살아계시는 하나님처럼 당뇨 고혈압 합병증으로 죽든 지쳐서 죽든 벌써 죽을 때가 지났는데, 무능한 아빠 가난한 아빠는 아직 살아 있다고 하나밖에 없는 딸아 하늘나라에 있는 엄마에게 새벽편지를 써다오 일곱 살 딸애는 아직도 나의 절망과 고통을 눈치채지 못하고, 나 혼자 조심스럽게 나를 절망할 뿐이다 이 풍진 세상 제일 밑바닥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요즘 나처럼 자주 잠이 오지 않을까 아직도 세상에 남아 있는 슬픔이란 슬픔은 모두 내 것이 되어버리는, 부질없는 부질없는 헛되고 헛된 꿈이라도 한 번 꾸고 싶구나 영양실조로 날마다 눈이 멀어져 가는 딸애는 잠 못 드는 밤이면 울면서 '고향의 봄'을 목이 터져라 부르고 부르다가 두 손을 움켜쥐고 잠이 들어버렸구나
아름다운 사람
당신만 생각하면
그냥 눈물이 난다
고맙다 아직 살아 있구나
맨발로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당신이여
나도 아직 살아 있다
일찍 꽃피려고 다투지 말자
더 많이 피려고 기도하지도 마라
바닷가에 왔더니
자꾸만 당신이 생각난다
바다와 같이 당신을
사랑하면서 살고 싶구나
詩非詩시비시
詩가 돈이 된다면
다시는 詩를 쓰지 않으리라
흰 도화지를 둥글게 오려
동양화 벽지에 붙인다
내가 안 보여서
종이에 쓴 詩를
하루 한번 들여다본다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詩 하나를 찾기 위해
눈 속 깊은 곳으로 내려간다
내가 울지 않고 쓰는 詩는
詩가 아니다
꽃이 없는 빈 병의
詩가 더 아름답다
첫눈이 되고 싶다
너를 만나야 한다
언젠가 내게도
뿌리내리고 싶은 곳이 있었다
내 고통은 내 안에서
샘물처럼 올라온다
당신 속에는 또 하나의
당신이 들어 있다
너에게 가려고
가지 않으려고
가만히 손을 내밀었다
바람 속으로 가야 한다
누군가 다녀갔듯이
희끈희끈 날리는
너의 첫눈이 되고 싶다
우리 꿈속에는
해와 달이 지나갈수록
그대 안에서
물고기처럼 헤엄치고 싶다
비가 온다
상처가 아름답다
못처럼 나를 구부리고
너에게 가고 싶다
인생의 비 그치고
나뭇잎처럼 흔들린다
흔들리면 안 돼,
나무들은 말한다
너는 내 안에 없고
내 안에 있다
벙어리 예수
첫사랑은
간밤에 몰래 내린 첫눈처럼
소리 없이 내 곁에 왔다
그대가 돌아올 때마다
그대가 돌아갈 때마다
사랑은 사랑이 있는 곳에서
가장 많이 모자란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첫사랑은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부질없다
모두 폐허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 속에 있지 않았다
상 처
해가 지지 않는 쟁기질처럼
기도할 시간이 많지 않다
사랑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언젠가는
미워하게 될 것이라 생각하고
그 여자를 사랑하라
언젠가는
사랑하게 될 것이라 생각하며
그 남자를 미워하라
은하수
바닷가에서
흰 조약돌을 주웠다
내 안에 빛이 있으면
스스로 빛나는 별이 된다
내가 잃었던 시간을
모두 합하면 얼마나 될까
슬픔은 버릴 것이 아니다
상처가 많은 발은 아름답다
벙어리 가족
생각하면 가난하고 집 없는 우리들만 거리에 남아 있는데 비 내리어 마음마저 외롭고 쓸쓸하고 무겁구나 그리움의 가시 몇 개로 박혀오는 것들, 잠든 아이들, 그 깊고 어두운 눈물의 꿈 바다에 별똥별이 되어 떨어진다 사랑하는 딸아, 사랑하는 나의 기도제목아 세상의 어둠 속에서 혼자 일어나 아빠에게 걸어 오너라 사랑하는 우리 집의 하나님, 더 이상 딸애와 떨어져 살지 않게 하소서 홀로 떨어져 더 이상 잊히지 않게 하소서 이름 모를 산새 몇 마리도 삭월세방 우리 집 지붕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게 하소서 해 돋기 전 아무도 오지 않을 때 세상 어느 구석에 풀꽃 몇 송이로 피게 하소서
마지막 인사
지금 내가 살아 있다면
사라질
사라지고 있는 사람을
마지막으로 사랑하고 싶다
만일 당신이
아직 살아 있다면
전기불이 나간 어두운 방안에서
어둠과 빛 사이에서
당신의 얼굴을 마주보고 싶다
백목련
점과 점이
만나면
선을 만든다
마음과 마음이
통하면
사랑이 이루어진다
너와 나의 사랑은
비 갠 날의 맑음처럼
햇살처럼
무지개
내 마음 빈 하늘에
천둥소리만 가득하다
사랑이라는 낱말에 밑줄을 그으며
유성처럼 사라지고 싶다
빈들에 홀로 저녁 바람 분다
손자들 몽당연필이나 깎아 주면서
한 세상을 살다갈 수만 있다면
눈이 부시다
살아 있는 것만이 눈이 부시다
아 내
너를 다시 만난다 한들
만난다 한들
무엇을 버릴 수 있고
무엇을 사랑할 수 있으랴
우리가 처음 만나던 날
몸은 섞지 말자고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만 나누어 듣자
어느 어느 맑은 가을날
나를 버리고
너의 바다에 이르고 싶었다
소리 없이
너의 하늘에 흐르고 싶었다
꿈속에서
하나님이 키우시던 새들보다 언제나 나는 외롭고 무겁다 하나님이 키우시던 수선화보다 나는 못생겨도 그냥 해와 달처럼 하루하루 살아갈 뿐이다 무지개는 딸애 속눈썹 같은 것이고, 무지개는 바로 달셋방을 비추고 있다 무지개는 네 머리카락 같은 것이야 무남독녀 딸애의 눈에서 흐르던 눈물방울은 내 유년의 부서진 꿈이 되었다 딸애와 나는 서로 자기가 만난 무지개가 진짜라고 다투다가 그만 울어버리다가 잠이 들어버렸다 딸애와 나는 다 누워도 반 평이면 충분하다 늘 가구같이 하나님은 방 한가운데에 서 계시리라 믿는다 내일은 방세를 낼 것이라 믿는다 내일은 쌀을 사 올 것이라 믿으며, 딸애의 기도는 참 나를 행복하게 만든다 내 생명을 하루만 더 연장할 수는 없을까
새
사랑하기 위해서
너를 만난 건 아니다
내가 울고 싶을 때
왜 너는 내 곁에 없는가
오늘은 비를 맞으며
너의 얼굴
너의 이름을
혼자 불러본다
알고 있는 깊이만큼
사랑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물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본다
너의 눈동자 입술은
아직도 내 가슴에 있다
새벽편지
가슴 가슴 저려오는
나의 사랑을
편지를 쓰게 해다오
그립다 그립다
말하지 못하는 절대고독을
그냥 갈까 그래도 다시
더 한 번 돌아보는 외로움을
눈물로 편지를 이어가게 해다오
오다가다 길에서 만날 거라고
자다 깨다 꿈에서 만날 거라고
십리 포구 산 너머로
차라리 편지를 쓰게 해다오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술병에 별이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자가수의 노래를 들으며
마지막 겨울편지를 쓰게 해다오
행 복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조각조각 부서진 이름이었다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었다
설령 이것이 마지막 사랑이 될지라도
한 송이의 꽃을 피우고 싶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아직도 나에게 희망이 있다는 거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아직도 너를 기다리고 있다는 거다
날마다 날마다 너를 사랑하다가
죽어버리게 하소서
수선화
해가 기울고
그대가 왔다
너와 나의 별은
아직도 뜨지 않았다
산새도 날아와 우짖지 않았다
인적 끊인 곳
너와 나 사이에는
구름도 흐르지 않았다
나의 작은 애인아
나의 가슴을
너에게 전하는
비가 온다
다정한 손님같이
산다화
나의 詩에도
봄이 오면 날 불러다오
그대를 처음 보았을 때처럼
나의 詩에도
별이 뜨면 날 불러다오
그대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돌담에 속삭이는 햇살같이
풀 아래 미소 짓는 옹달샘같이
나도 별과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가슴에 사랑하는 이름을 갖고 싶다
인 생
사람은
흙이다
나는 흙이다
나도 흙으로
돌아가리라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헤아리고 있다
오늘은
마음을 다해 기도하였다
영혼을 다해 사랑하였다고
목련꽃 그늘 아래서
고백하고 싶었다
아, 나는 남몰래
혼자서 사랑을 가졌다
소중한 사랑은
부서시고 불에 타면서 왔다
버려지고 피 흘리면서 왔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사랑하는 당신에게
반달로 만나서
실컷 울고 싶었다
좋은 사람
너도
나처럼
잘 견디고 있다
외로움이야말로
산에 오르면 잘 보인다
사라져버리는 것들
나 너만을
그렇게 사랑하고 싶다
함께 있으면 있을수록
더 좋은 나의 사람아
바느질
그날 밤 나는
사랑을 잃고
끝끝내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조개들이 입 앙다물고
말 않는 까닭도
개들이 제자리 지키지 않고
하릴없이 왔다 갔다 하는
이유를 알았다
심야뉴스
가을에는 자주 잠이 오지 않는다 외로운 세상에 남아 있는 고통이란 고통은 모두 다 내 것이 되어버린다 요새는 자주자주 잠이 오지 않는다 무남독녀 한 살짜리 딸애는 아빠의 이름도 모르고 돈 안 되는 대한민국 시인인지도 아직 모른다 무능한 아빠의 詩가 밤마다 네 꿈길을 여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배가 고파도 울지 마라 내 딸아, 울지 말고 내 손을 꼭 잡고 함께 기도하자구나 아빠는 언제나 네 곁에 있을 것이다 아프지 않고 내 곁에 살아서 남아 있을 것이다 더러는 너의 그림자가 되어 더러는 희미한 밤바다의 등대가 되어 더 열심히 살아가면서 우리 서로서로 사랑하는 꿈도 꾸리라
이제는
당신을 사랑하기 위하여
죄를 짓지 않습니다
외롭지 않기 위하여
늘 깨어 있습니다
더 이상 방황하지 않기 위하여
밥도 많이 먹습니다
당신을 사랑하기에는
너무 늦었습니다
울지는 못합니다
홀로 상처 위에
등불을 켜고 싶습니다
주막에서
하루 종일
아무도 없는
아무도 오지 않는
빈 집에 돌아와도
내 첫사랑은 없다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도
고향의 개울물 소리도
메마른 입술에 흐르지 않는다
소를 때려야 하는가
수레를 때려야 하는가
복병산에서
비 내리는 날
팬지꽃이 피었습니다
그대 떠나던 날처럼
첫눈 내리는 날
제비꽃이 피었습니다
그대 처음 만나던 날처럼
말을 아껴야지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도록
부산 송도에서
촛불은 심지까지
타버리고 나서야 촛불이다
기다려라,
더욱 오래오래
그리고 많이 생각날 때마다
사랑스런 사람이 되고 싶다
외롭다고 생각할 때마다
혼자 있고 싶다
울고 싶은 생각이 깊을수록
키 큰 미루나무 옆으로 가고 싶다
오늘은 바람도 없는데
보일 듯 말 듯
섬 하나가 보인다
미타선원
산으로
가야지
산에 가
살아야지
산이 좋아
산에 살아
산을 닮은
당신이 좋습니다
* 부산시 중구 광복로 77번길 5.
‘웃음건강박수 대통령’ 조영춘 교수
이렇게 살고 있다고
나도 그대에게 전화를 걸고 싶다
당신은 자면서도
내 전화를 받고 있을까
사랑하는 까닭이
반드시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거다
오랜만에 참으로 오랜만에
잠자는 당신의 손을 잡았다
내일이면 헤어질 사람이라면
내일이면 잊혀질 사람이라면
사랑은 끓는 물
사랑은 천 가지 마음
중화요리 ‘용문’
꽃 한 송이 피었습니다
마음속에 詩 한편을 썼습니다
오랜만에 마당을 쓸었습니다
마음그릇이 깨끗해졌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세상의 전부란 것을 알았습니다
나도 지금 당신을 사랑합니다
가보지 못한 섬들을
그리워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서 살고 있습니다
* 중구 <용문> 김상재 김문숙 부부.
‘내일 다시 해는 뜬다’ 가수 김홍
아직 살아 있는 시간만이라도
그대 곁에 함께 있게 해다오
바람 부는 등성이에
두고 온 햇살을 잊지 않게 해다오
어찌하여 우리는 헤어지고 나서야
생각나는 사람들인가요
살다 보면 눈물날 일도 많고 많아요
사랑하는 마음 내게 있어도
외롭고 슬픈 마음 내게 있어도
세상에서 그대를 만난 건
내게 얼마나 큰 행복이었을까
나도 당신 발에 밟히면서
새로워지는 풀잎이고 싶다
생 일
오늘은 더 말을 아껴야지
그대 떠난 자리에
나 혼자 남고 싶다
다른 날보다 오늘은
더 예쁘게 살고 싶다
아름다운 나라의
그림이 되고 싶다
당신, 내게는
참 좋은 사람이었다
여보야, 부르면
가슴이 따뜻해진다
당신 앞에서는
나도 꽃 피우는
나무가 되고 싶다
행 복
오래오래
보고 싶었다
너무 오래
만나지 못했다
하루 종일
집 보는 햇살
혼자 왔다
혼자 돌아간다
너도 그렇다
달빛 음악회
그대 떠난 자리에
나 혼자
남아서 울고 있다
가을이다, 제발 아프지 마라
내가 모르는 곳에
다시 한 번 고요한 새벽이 온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미워할 것을 미워하지 않고
내 마음이 저 나무
저 흰 구름에 스러질 때까지
떠나야 할 때를 안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
잊어야 할 사람을 잊지 못하는 것은
너무너무 안타까운 일이다
별 위에 쓴다
그대는 꽃이고
나는 꽃의 눈물이다
내가 많이 아플 때
참 많이 생각났다
금방 헤어졌는데도
네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네가 예쁘다는 걸
헤어지고 나서 알았다
네가 참 좋은 사람인 걸
멀리 떨어지고 나서
비로소 깨달았다
이 세상에 와서
가장 고운 말을
너에게 속삭이고 싶었다
새벽기도
네가 너무 보고 싶다고
물 위에 편지를 띄운다
네가 너무 그립다고
별 위에 그림을 그린다
가지 말라고 해도
정말 가고 싶었다
만나지 말라고 해도
정말 만나보고 싶었다
너와 나 손잡고
눈 감고 왔던 인생길
지금은 내 곁에
네가 없으니
나 혼자 울고만 있다
너에게
꽃이 되고
향기가 되고
너의 노래가 되고 싶었다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무릎을 꿇고 속삭이고 싶었다
너를 향한 나의 기도는
나의 눈물이었다
해와 달
별과 그대에게까지
가는 거리 말인가
바람 부는 날
첫눈이 내리는 날은
너에게 정말 가고 싶었다
별을 보듯 너를 사랑한다
별을 보듯
너를 사랑한다
사는 일이 힘들고
외로울수록
더 사랑하고 싶다
사랑한다는 말을
가슴에 아껴두고 싶다
참 많이 보고 싶었다
참 많이 생각이 났다
사랑하고 싶다
너를 사랑하는 날부터
세상의 모든 것이 변하고
세상의 모든 것이 흔들렸다
만일에 너가 없다면 세상은 쓸쓸하고
늘 끝없이 외로울 것이다
내 마음은 아무도 모른다
오직 너만이 알고 있다
아직도 나는 살아 있기에
너를 사랑하고 싶고
때론 큰 소리를 질러보고 싶다
내 삶에 너가 없다면
살아도, 살아보아도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살아갈 이유를 알기에
너를 사랑하고 싶다
별
큰물은 깊어서 소리가 나지 않는다
겨울나무는 아름답다
슬픔 속에 고요하다
능선이 험할수록 산은 아름답다
절벽 끝에서도 희망은 있다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것이 있다
고요히 흐르는 강물 같은
애인 하나 있었으면
노래가 되어 물에 가득 번지는
친구 하나 있었으면
먼 그대
살아 있는 동안은
흔들리지 않고 피어날 수 있을까
만나고 헤어지는 일들도
사람들이 착하게 사는지
별들이 많이 빛나고 있다
젖은 몸 그리움에 다시 젖는 강기슭
살아 있는 동안은
눈물 같은 별이 몇 개
함께 먼 길 가자던 그리운 사람
이 세상 그 어떤 꽃들도
다 젖으며 흔들리며 피었으리
단 풍
혼자서 바라보는
하늘은 외롭지 않다
혼자서 끝없이 걸어가는
길은 슬프지 않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아름답다
요즘 나 혼자 말없이 늙어간다
가장 고요해지는 사람이 깊은 사랑이다
순수하지 않으면 진짜 사랑이 아니다
마음 하나 버리지 못할 때
희망의 바깥은 없다
햇살 좋은 날
사랑하는 사람이
미워지는 밤에는
꽃이 필 때도
못 깨달았습니다
꽃 지고 세월 지면
또 무엇이 남으리
비 내리고 바람 부는 밤에는
마음 기댈 곳이 없습니다
혼자 있을 때보다
숲이 되어 있을 때
더 아름다운 산벚나무가
되고 싶었습니다
강
길이 보이지 않는다고
울지 않았습니다
길이 보이기 시작한다고
웃지도 않았습니다
하루 종일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내가 나를 먼저 포기하지 않는다면
가지 않을 수 없던 길을 가리라
나는 다시 강으로 가야겠습니다
가수 잭키 정
이럴 줄 알았으면
너의 얼굴 늘 바라볼 걸
끝끝내 이럴 줄 알았으면
너의 목소리 늘 듣고 있을 걸
해 뜨는 것이
내가 살아 있는 것
해 지는 것이
내가 쉬고 있는 것
오래오래 살면서
부디 나 잊지 말아다오
이럴 줄 알았으면
끝끝내 이럴 줄 알았으면
* 히트곡 <행복한 인생길>, <부산사나이>, <모조리>
부산 대각사
새가 날았다
산이 쩌르릉 울었다
산이 끝나는 곳에 그대가 있었다
그대가 끝나는 곳에 내가 있었다
눈물 속에 절 하나 지었다가 부순다
바람 부는 날이면 눈물로 만든
보리밥을 먼저 떠올려라
내 천 개의 눈이
그대를 위해 눈물을 흘린다
아프다 사랑할 때는 사랑을 모른다
다른 사람에게는 눈물을 보이지 마라
나의 사랑아
풍경소리
비워있는 사람은 아름답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은 없습니다
안에서 절망을 끌어안고
나 혼자 뒹굴고 싶습니다
눈 내리고 내려 쌓이고 있습니다
꽃 같은 그대 그리움
이제는 저무는 일만 남았습니다
오늘 또 가지 않을 수 없던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오늘도 별이 뜨듯
아직도 나는 외롭게 살아있습니다
강나루
산이 나를 서있게 한다
강이 나를 돌아가게 한다
해가 맑은 마음으로 보라 한다
달이 밝은 마음으로 말하라 한다
내가 가고 싶은 곳을 구름이 가르킨다
내가 떠나고 싶은 곳을 나무가 눈짓한다
그때 나는 강나루 뱃사공이
되고 싶어 운 적이 있었다
허물벗기
화가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시인이 되리라
내 생명의 불꽃을 완전히 불태우리라
외로운 지구별이 되리라
내게 주어진 시간을
다시는 허비하지는 않으리라
시인이 되기보다는
차라리 가수가 되리라
단순하게 살고 싶다
비 내리는 창가에 앉아 책을 읽고 싶다
천천히 일어나고 싶다
무한하게, 경계 없이
급하게 달려갈 곳도 없다
파도소리를 들으며
새벽하늘을 향해 묵상하고 싶다
유 서
새는 날아가면서
결코 뒤돌아보지 않는다
내가 묻고 삶이 답한다
나는 너다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
가난한 시인에게
따뜻한 편지를 쓰고 싶다
만약 내가 시인이라면
지구별 편지
시인이 될 수 없다면
시처럼 살고 싶다
시인처럼 노래하고 싶다
오직 시 하나로
꽃을 피울 수 없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으리라
내가 누구이며 지금 어디쯤
서 있는지 알기 위해 시를 읽는다
삶은 무의미한 바다
그 비밀을 해독하기 위해
인생의 바닷가에서
오늘도 시를 줍는다
시인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오 늘
사랑했다고 말하지 않아도
그대가 얼마나 나를 사랑했었는지
오늘도 나는 알고 있습니다
그대는 나에게는
정말 특별한 사람입니다
사랑은 누군가를 향해
나를 버리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던 나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대답해 주십시오
가을엔 물이 되고 싶어요
눈을 감아도 보고 싶어요
당신이 별이라면
바보처럼
바보처럼 실컷 울고 싶어요
당신이 달이라면
하루 종일 당신 품에 안기어
이름 없이 행복한 당신의
내가 되고 싶어요
고맙습니다, 당신이여
감사합니다, 당신이여
낙엽 타는 밤마다
가을엔 당신에게
참회의 편지를 쓰고 싶어요
떠난 벗에게
아침 바다에서
하루 종일 너만 생각했다
어떻게 잊어야 할까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내 혼에 촛불을 켜고
속으로 피흘리는 나의 아픔은
오직 나만이 안다
오직 나만이 해결해야 한다
살아서도 죽어가는 이 세상 텅 빈 자리
내 마음을 누가 알까
내 슬픔을 누가 알까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당신은 물입니다
당신은 당신은 바람입니다
해처럼 달처럼
햇살에 눈뜨는 나팔꽃처럼
파도여 당신은 바람의 집입니다
누워서도 잠 못 드는
커다란 기다림입니다
누군가를 위해
우산이 되고 싶습니다
별을 보기 위하여
나를 보기 위하여
나는 또 당신의 이름에선
분꽃 향기가 납니다
나의 오늘은 당신 당신 안에
소복히 담겨 있습니다
주 일
지울 수 없는 고통도
당신 앞엔 축복입니다
오늘은 너를 위해
잎새에 부는 바람에도
나는 풀잎처럼 흔들렸습니다
오직 하나인 당신을 위해
물방울 같은 기도를
하늘에 바칩니다
해와 달이 지나갈수록
당신 모습은 밤낮으로
여울지는 끝없는 강물입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잡히지 않습니다
내가 가장 착해질 때
몽당연필을 깎아
새벽기도를 마치고
시를 씁니다
몇 번이고
지우고
또 지우며
다시 쓰는
나의 하루는
우물 속의 두레박처럼
참으로 행복합니다
살아 있는 동안은
당신의 살아 있는
갈색 연필이 되고 싶습니다
소나무
오늘 날씨
진짜 진짜 좋다
꼭 너 같다
정말정말
네 생각만 하고 싶다
너는 어떻게 보면
진짜 예쁘다
넌 어떻게 보면 되게 예쁘다
살아갈수록 자꾸만
그리워지는 그대 그대는
이제는 누구도 만날 수 없다
다시는 그런
사랑을 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때의 너는 떠나갔다
지금의 나는 변했고
정
밤이 깊어가면
마음도 깊어간다
끝끝내 돌아가기 싫은
너와의 시절이지만
돌아가고 싶은 너와의
시절을 위로하고 싶다
이별이야말로
괴로움을 피해서
외로움을 찾는 것이다
당신은 믿지 않아도
밉지 않았다
있지 않아도 정말 잊지 않았다
사랑이여
나를 떠났던 사람도
내가 떠났던 사람도
모두모두
행복한 밤이길 기도하고 싶다
먼 훗날
내 곁에 남은 것이
너이기를 꿈꾸고 싶다
우리의 만남을 후회하지 않듯이
우리가 이별을
후회하지 않기를 원하고 싶다
나를 성장시킨 건 8할이 이별이었다
함께 했던 시간이었다
사랑이여 사랑이여
산사에서
아직도 그리운 건
그대이지
그때가 아니다
내가 다시 내게 오길
해와 달이 지나갈수록
점점 더 그리워진다
예전의 내가 아닌
예전의 나로
하루하루
바뀌어가고 있다
강나루
산이 나를 서있게 한다
강이 나를 돌아가게 한다
해가 맑은 마음으로 보라 한다
달이 밝은 마음으로 말하라 한다
내가 가고 싶은 곳을 구름이 가르킨다
내가 떠나고 싶은 곳을 나무가 눈짓한다
그때 나는 강나루 뱃사공이
되고 싶어 운 적이 있었다
눈사람
너 자신을 사랑하라
그 다음엔
그걸 잊으라
그 다음엔
세상을 사랑하고
그 다음엔
가난한 시인을 사랑하라
자신을 사랑하면
자신에게 진실해진다
인생이라는 배를 항해하게 된다
하단 약사암
살아야 한다 살아야만 한다
바람은 불어오고 있는데
진정으로 살아남아야만 한다
우리도 별을 하나 얻어서
눈 밝히고
마음 밝히고 가야만 한다
잡힐 듯 잡힐 듯
날아가 버리는 우리 인생
잊어야만 한다
진정 잊어야만 한다
이 적막강산에 살고 싶다
지금 있는 그대로 살아가고 싶다
그리운 바다, 권명준
사랑하는 그대, 그대여
떠나가려면 터지고 설레도록
내 마음 안에서 붉디붉은 노을로 물들어라
삶이란 지나고 보면
지금, 이 순간의 갈등과
분노도 다 지나간다
그대를 떠나보내고 말았는데
사랑도 돈도 물질도
당신 안에 있으면
어디나 다 감옥이다
꽃 피는 봄과 찬란했던 가을에도
우리는 서로서로 사랑했다 기도했다
* ‘부산을 가꾸는 모임’ 이사장. ‘서구를 가꾸는 모임’ 상임부회장
萬和堂 朱益生
당신에게 벗어나면
모든 것은 어디나 감옥이다
세상의 모든 것이 변하고
세상의 모든 것이 떠나가도
내가 사랑할 수 있는 건 그대뿐이다
미칠 듯이 외로운 날도
잠이 오지 않는 밤에도
당신의 손을 꼭 잡고
끝까지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대를 사랑한다는 것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더 멋지게 살고 싶어진다
* 부산교육대학교 앞 전통다원 <만화당> 대표
MBC ‘별이 빛나는 밤에’ DJ 최인락
혼자 사랑하게 하소서
혼자 기도하게 하소서
슬픈 사랑아
내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동굴을 지나온 사람은 하늘의 마음을 안다
사람은 죽으면
자기가 좋아하는 꽃으로 피어난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사랑이 없는 곳
아픔이 없는 곳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
KBS2 드라마 ‘파도야 파도야’
돌아보면 지금, 여기
나에게 남은 것은
방 안에 걸어둔
붓 한 자루
낡은 시집 몇 권
내 영혼을 아름답게 하는
흰나비 환상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가
육신의 전부일 뿐
한평생 살아온
삶의 무게가 오직 그것뿐입니다
* 동구 초량2동 1207-12 ‘김창수 음치교실’
침 묵
침묵의 날
말을 하지 않습니다
밥도 먹지 않고
기도만 합니다
대침묵의 날
찬양도 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나서 죽는 것도
제 스스로 하지 못하듯이
가야 할 길을 제 스스로
청하지 못하는 것도
시절인연 탓인가 봅니다
낙엽이 지면
내 마음도 흔들립니다
* 전 국제신문 사진부장 김탁돈
흙
삶은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늘 죽음을
삶의 한 자리로 초대하여
함께 살아가야 한다
삶은 진리가 아니라
진실 속에서 살다 가는 것이다
진실을 살다 가는 것이 진리를 찾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인생의 의미이다
우리를 위해 내가 따로
기도할 일은 없다 모든 것이
흙 한 줌에서부터 나온다
흙이란 참으로 신비하다
* 중구 창선동 2가 22-1번지 부산약국 대표 이은호
삶
삶은 茶 한 잔 마시고
빈손으로 가는 것인가
지난 삶의 마당에
찻잔이 놓여 있다
얼마 남지 않은 찻물이
햇살에 반짝이고
한 점의 눈부신 빛을 반사한다
함께 늙어 가면서
우리는 같은 무늬로 동화되어간다
서서히 세상의
공기 속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조용히 세상과 함께 늙어가는 것이다
* 동아중학교 영어교사 정현기 시인. 수필가
■ 축 사
시집 <없습니다> 발간을 축하하면서!
장혁표(전 부산대학교 총장)
나는 시를 쓸 줄도 감상할 줄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그러나 시집을 찬찬히 읽고 마음 깊이 울림이 있어 출간을 축하하며 몇 자 적는다.
권태원 시인은 시집 18권을 펴냈다. 그가 보통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그의 이력에서 찾을 수가 있다.
한결같이 사랑을 노래했고 이번에는 이것도 저것도 없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허무주의자가 아니다. 어쩌면 현실에 대한 역설인지 모른다.
『좋은 사람』,『죽기 전에』시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을 보고 싶어 하는 간절함이 사무치게 느껴진다
안개꽃 한 다발을 받은 것보다
더 행복했습니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을 때
마술사 같은
좋은 사람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쓰고 싶었습니다
함께 있으면 언제나
더 소중한 나의 사람아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음 없이
사랑하고 싶다
물소리처럼
마음 없이 흐르고 싶다
그녀가 올 때마다
그녀가 갈 때마다
그녀의 구멍에는
못 하나가 박혀 있다
사람은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이 사랑하는 것이다
마음 비우고가 아니라
마음 지우고가 아니라
마음 없이 노래하고 싶다
『죽기 전에』
시집『없습니다』에서는 시로써 애절한 바램을 승화하여 없다고 했다. 태어나고 성장하여 결실을 이루고 되돌아가는 것이 하늘의 법칙乾元亨利貞이라 했다. 권 시인은 태어나서 무엇을 이루지 못하였는가?
하루 종일
아무도 오지 않는
빈 방
빈 잔
지금 나에게는
그리운 예수
보고 싶은 부처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도
미워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詩는
나의 운명입니다
『없습니다』
이 세상은 어차피 잠시 머무는 나그네가 여관에 머무는 것이니 그는 여관에 대한 집착이 그리움으로 끝남을 노래하고 있다.
남 보기에 어떻다가 아니고 나는 한 길을 바라보고 즐겁게 살고 있음을 시를 통해 보여준다.
『내가 없는 것이 아니라 있습니다.』
우리시대의 마지막 기인시인. 타고난 시인, 탁월한 시인 권태원의 18번째 시집 발간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 축 사
가장 따뜻한 시인의 등불
曉天 신진식(시인. 사하문인협회 회장)
이른 새벽부터 권태원 시인은 해외여행을 떠나는 사람처럼 배낭 속에 무거운 책들을 가득 담아 바쁜 걸음으로 걸어간다. 특별히 누구와 예약된 만남도 아니다.
국제시장 남포동 광복동 동광동 영주동을 거쳐 자갈치시장에도 들른다. 아마 수많은 민초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모양이다.
권태원 시인을 보면 중국 중·당기의 가장 존경받던 시인 백거이白居易가 생각난다. 당대의 유명 시인으로 명성을 떨쳤으면서도 詩를 한 수 짓고서는 시장 할머니 또는 농부들을 찾아다니며 읽어주고 잘못된 점을 지적 해달라고 했다고 한다.
그렇다. 詩가 무엇이냐 문학이 무엇이냐 독자들이 쉽게 공감하고 느끼고 감동하고 흐느끼고 웃을 수 있는 작품이라야 문학적 가치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권태원 시인의 외침은 아마 ‘소통’일거라고 생각한다. 지금 세상은 마치 자기주장(에고이스트)이 마치 세상을 바꿀 것 같은 옹고집들로 꼭꼭 막혀 있지 않은가.
소통을 주장하면서도 소통이 되지 않는 불확실성의 시대가 바로 지금의 시대가 아닐까. 그는 시장 바닥에서 부딪치며 소통하고 삶의 가치를 터득하고 문학적인 소재를 발굴한다.
그의 詩 한 편 속에는 애닯음과 한과 서러움이 곳곳에 묻어 있다. 그러면서도 그의 가슴속에서 호소하고 싶은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과 평화’가 함께 하기를 염원하며 하늘 멀리 기도한다.
공허한 심장 속에는 하느님이, 부처님이, 성모 마리아가 공허한 자리를 감싸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피어도 내 사랑
시들어도 내 사랑
내 살을 녹여
어둠을 물리쳐주는
촛불이 되고 싶다
같은 속도로 흔들리자
누가 진실로
나를 사랑할 수 있겠는가
골목길 가로등이 아무리 밝아도
보름달은 시기하지 않는다
얼마나 더 간절해야
내게로 올까요
얼마다 더 기도해야
나에게 속삭일까요
시 ‘해바라기’
'골목길 가로등이 아무리 밝아도/ 보름달은 시기하지 않는다'
권 시인은 걸어 다니는 만큼 세상을 많이 보았을 것이다. 수억 만 배 밝은 보름달이 가로등을 측은하게 여길 것이다.
미워하고 시기하고 험담하고 질투하는 이런 세상에 이기적이긴 하지만 해바라기는 오직 밝고 맑고 깨끗한 햇님만 보려고 한다.
끝없이 방황하는 것 같은 타고난, 탁월한 권태원 시인이 세상을 밝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은 얼마나 남았을까.
■ 해 설
운명, 생명의 뜨락에서 내리붓는
그 차갑고 쓸쓸한 빗줄기에 대하여
정 훈(문학평론가)
권태원 시인의 열여덟 번 째 시집에 실린 시편들을 훑으면서 뜬금없이 ‘운명’이란 말을 떠올렸다. 피해갈 수 없으니 운명이겠지만, 어쩌면 피하려는 포즈 또한 운명의 여신이 내미는 차가운 손아귀에 놀아난 춤사위가 아니겠는가. 삶을 노래하는 시인들이 부지기수지만 권태원 시인만큼 삶을 온몸으로 부딪치고 맞아들이면서 한바탕 신나게 어우러지는 약동의 시인도 드물 것이다.
그에게 인생은 거리낌 없이 울다 웃다 노니는 놀이터요 연극 무대다. 이번 시집은 현재 그가 인생의 무대에서 절로 쏟아져나온 언어들의 풍경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관심을 끌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삶과 인간이 맺는 끈적한 운명의 사슬에서 토해낸 한 실존의 육성을 만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사실에서 시인의 정신적 근황마저 엿보는 자리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자리에 들어서면 우선 섬뜩한 고독을 감수해야만 한다. 메마른 땅에서 휘몰아치는 비바람처럼 정신적 건기乾期를 일순 적시지만 이내 황폐해져버리는 비극 같은 공간에 쓸쓸히 들앉은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시인의 언어에 축축하게 스며든 존재의 쓸쓸함이 전하는 시공간적 현실에 발을 디디는 일은, 곧 시인의 고독에 동참하고 동행하는 일이다. 독서가 좋든 싫든 작가적 삶과 가치관에 관여하는 일종의 인식적 실천행위라면 우리는 시집『없습니다』를 읽으며 시인이 그리고 지향하는 세계에 눈을 맞출 의지를 필요로 한다.
하루 종일
아무도 오지 않는
빈 방
빈 잔
지금 나에게는
그리운 예수
보고 싶은 부처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도
미워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詩는
나의 운명입니다
『없습니다』
“없습니다”로 표상되는 절대 공허와 고독에서 시인의 시는 출발한다. 그곳에는 사랑도 미움도 없고, 절대자의 현존마저 상상할 수 없다. 오로지 운명처럼 시가 놓일 뿐인데, 이 ‘詩’가 적막강산의 우주에서 시인이 살아가는 유일한 이유이자 동기가 된다. 절대 무無는 사실 인식론적 차원이나 존재론적 차원에서 의미심장한 지평을 제시하는 개념이다.
시「없습니다」가 표면적으로는 존재론적․물리적 차원의 결여에서 자각한 시업詩業의 운명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그보다 의미심장한 의미 영역까지 독자의 인식지평을 확장하는 듯하다. 아무도, 아무것도 없다는 자각에서 비로소 하나를 채울 수가 있다. 시인에게 그 하나는 ‘시’다.
아무도 없는 자리에서 출발하는 운명의 예감을 준 것이 시다. 시가 시인의 운명이라는 선언적 명제에서 시집『없습니다』의 좌표를 가늠할 수 있다. 필자는 권태원 시인이 작품에서 사랑과 그리움과 온갖 허망한 인간적 감정에 자신의 마음을 실어 보낼 때조차 어쩌면 그의 견고한 고독의 부피는 더욱 커져가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
이는 대개 세상과 쉽사리 화해하지 못하고 부표처럼 나그네처럼 이 세상을 떠도는 존재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운명처럼 태어나 운명처럼 시를 만난 시인에게 이 세계는 환영이요 헛것일 뿐이다.
다시는 만나지 말자
다시는 생각하지 말자
두 번 다시는
상처를 만들지 말자
세상과의 고통을 잠재우고
이제는 봄을 기다리는
그대 그대여
오늘은 물뱀 한 마리 같은
낮달 하나가
깨진 항아리 빛 하늘로
솟아오르고 있다
-「반달」전문
시인은 그동안 믿고 의지했던 사람들 사이의 부서지기 쉬운 관계 또한 허망한 세계의 일부로 여기는 듯하다. 다짐처럼 인연의 고리를 끊으려 하는 위 시의 표면적 언술과 “물뱀 한 마리 같은/ 낮달 하나”의 형상이 어우러져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세상에 만연한 고통과 상처의 깊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아물어지고 잊히지만 그때 찢긴 마음의 흉터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선명해지기도 한다.
반달이 자연의 순환 과정에서 이지러지고 타오르는 형상의 상징이라면 언젠가 다시 돌아오고 다시 만나게 되는 인간사의 비유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과 자연의 상동성이 서정적 풍경을 통해 시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시집『없습니다』곳곳에 흩뿌려진 고독의 그림자는 시인으로서 느끼는 삶의 절박함과 인간사의 덧없음이 융합한 곳에서 만들어진다. 상처와 절망뿐인 세상에서 시만을 읊고 시만을 운명 삼아 주어진 길을 걸어가는 시인이 스스로 만들어낸 고독의 성채를 보며 만약 그럴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떤 미래적 지평과 전망을 끄집어낼 수 있을까. 그러나 이는 독자의 온순한 바람일 수 있다.
시 세계는 마치 별자리들처럼 제각각 운행을 하다가도 조화로운 형상을 만드는 중에 드넓은 망망의 대해를 향해 흘러들어가는 것이다. 권태원의 시적 고독은 존재적 한계와 절망에서 비롯한 면도 있지만 절대 진리를 향한 실존적 목마름에서 생겨난 것일 수도 있다. 그의 시집에서 간간히 종교적 분위기를 띄는 시들이나 경건하고 맑은 어조로 최상의 윤리적 가치를 소망하는 시들에서 이를 유추할 수 있다.
잠시 일손을 멈추고
어린이의 눈빛으로
냉이꽃만한 소망의 말로
‘용서하세요’라는 말을 하게 하소서
어디 가야 좋을지
무슨 일을 해야 좋을지
봄빛 터지는 소리로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하게 하소서
주여, 당신 은총으로
나를 새롭게 하소서
내가 당신을 따른다는 것은
나와 아낌없는
결별임을 깨닫게 하소서
열매를 위한 꽃처럼
항상 말로만 당신 뜻을 따르고
말로만 순명했던 나를
인생의 절벽에서 사랑하게 하소서
-「기도」전문
고요한 자리에서 고요한 마음으로 절대 존재에게 갈구하는 어조로 이루어져 있는 시다. 본디 기도가 인간과 절대자가 신비로운 상태에서 공존하면서 서로 대화를 나누는 의미가 들어 있듯이, 유한한 존재로서 인간이 평화롭고 행복한 마음을 지속하면서 절대의 영역에 언어적 노크를 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기도의 형식은 신에게 말을 건네면서 자신을 비우는 행위로 귀결한다.
또한 겸허와 충만한 사랑의 마음이 안에 자리 잡아야 한다.「기도」에서 시인이 용서와 사랑의 말을 하게 해달라고 요청할 때, 그 숨은 뜻에는 위 시의 후반부에도 진술한 대로 현실적이고 인간적인 자아와 결별하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주여, 당신 은총으로/ 나를 새롭게 하소서/ 내가 당신을 따른다는 것은/ 나와 아낌없는/ 결별임을 깨닫게 하소서”처럼, 지금까지 보여준 자신의 모습을 떠나보내고 새롭게 거듭나려는 소망이다.
이것이 기도의 형식으로 나타난 것이다. 인간이 자의식과 현실적 욕망만으로 살면서 자신의 근원과 본질을 망각하는 경우가 많다. 종교는 그런 세속적인 집착과 욕망이 부질없고 허망하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위 시에서 시인이 염원하는 사랑에는 이해타산이나 조건적인 바람이 들어가 있지 않은, 말 그대로의 완전하고 무조건적인 마음이 들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아가페적인 사랑이 시인으로서 고독과 절망을 밀어내고 삶의 원숙한 태도를 지니게 하는 사실은 다음의 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제가 누구인지
당신이 누구신지
가을에는 깨닫게 하소서
저의 매일매일은
새로운 축제로 출발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두레박 없이도
물 긷는 법을 기도하게 하소서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항상 하늘이 열려 있습니다
사랑은 죽음과 삶을 지켜보는
눈동자라는 걸 알게 하소서
시인은 구원의 십자가입니다
땅 속 깊은 곳으로 가서
투명한 물을 퍼 내게 하소서
아 아프고도 아름다운
생의 멍에를 지게 하소서
-「가을의 기도」전문
「가을의 기도」가 앞서 인용한 시「기도」와 변별점이 있다면 윤리적이고 실천적인 측면보다는 좀 더 존재론적인 측면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존재 의의를 살펴보는 점이다. 그래서 더욱 신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심오한 물음을 던지는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가을의 기도」또한 기도 형식을 취한 점에서「기도」가 보여준 절대자에 대한 간구와 요청이 들어있을 수밖에 없다.
“제가 누구인지/ 당신이 누구신지/ 가을에는 깨닫게 하소서”라 정중하고 진실되게 기도하는 대목에서 맹목적인 믿음과 기도 행위에 깔려있는 본질적인 존재 확인을 간청한다. 기도에 대한 반성의식과 근원적인 회의를 보여주지만, 이는 사실 더욱 신앙의 확실성과 절대 존재에 대한 의심 없는 믿음 위에서만 가능하다. 날마다 새롭게 태어나는 자신에 대한 기쁨과 환희, 그리고 그러한 깨달음에 이은 ‘시인’ 존재의 의미 부여를 통한 삶의 본질적인 선택지를 스스로 부여한다.
“시인은 구원의 십자가입니다/ 땅 속 깊은 곳으로 가서/ 투명한 물을 퍼 내게 하소서/ 아 아프고도 아름다운/ 생의 멍에를 지게 하소서” 기도하는 모습에서 구원의 십자가를 짊어진 시인의 운명을 예감하기도 한다. 메시아의 인간적인 측면을 시인과 동일시하는 이유는 시인 또한 어떤 면에서 구원과 해방을 기획하고 염원하는 존재지만 실상은 그 옛날 예수가 그러했던 ‘십자가’라는 “아프고도 아름다운/ 생의 멍에를” 질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초월적인 속성으로서 절대자와 시인의 혼은 이 세계의 인간화된 조건에서 그 한계를 절감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다. 아프지만 아름다운 삶의 멍에가 시인에게는 운명처럼 받아들여야 하는 것으로 인식한다. 기도를 통해 현실의 자신을 정화하면서 절대 시공간에 수렴될 뿐인 상대 세계의 생명의 길을 고통스럽게 인지하는 시인에게 이 세상은 어떤 의미를 띠는가.
비우고 지우고 내려놓아라
한없이 작아지고 작아지면서
꽃잎들이 떨어져 내린다
배롱나무 사이로 붉게
타오르는 서녘 노을
바람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나는 한 알의 먼지다
길이 멀다
나는 떠도는 점 하나다
-「풍경 소리」전문
기독교적 세계관을 보여주는 기도 시편들이 삶의 윤리적이고 존재론적인 물음과 실천 의지로 이어진다면「풍경 소리」처럼 불교 소재의 시에서는 존재가 지닌 허무함이 전경화된다. “나는 한 알의 먼지다”, “나는 떠도는 점 하나다”란 역설적인 자기 존재 정의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무상無常의 존재이기에 아무런 지향성이나 목적성을 찾아볼 수 없다.
그저 바람처럼 구름처럼 떠돌 뿐이다. 그렇기에 삶의 행장도 한없이 가벼울 수밖에 없다. “비우고 지우고 내려놓아라” 명령하듯 자신에게 주문하는 시인의 목소리를 듣는다. 이 세계는 시인에 따르면 속절없이 다가왔다 흘러가는 환영이다. 거짓이고 허망한 시공간이기에 집착할 까닭이 없다. 이러한 상대 세계에서 인간은 의미조차 헤아릴 길이 막막한, 거의 무無나 다름없는 존재다.
그런데 시인은 “길이 멀다”라 말함으로써 한없이 미약한 존재지만, 인간이 이 세상에서 구하고 찾아야 하는 참된 길의 존재를 부인하지 않는다. 이 길이 구도의 길이요 절대를 향한 좁은 방향의 오솔길이다.
권태원의 시적 여정은 고독과 절망의 숲으로 뒤덮여 있지만 한 줄기 희망의 빛을 의지하며 정신적 승화를 이루려는 고투의 과정이다. 몹쓸 사랑과 그리움의 계곡을 지나 은총과 사무사思無邪의 소로小路를 향해 나아가는 시적 모색에서 시인 특유의 역설적 형상화가 두드러진다.
이러한 패러독스에서 시인이 느끼는 생의 아이러니와 모순을 엿보게 된다. 그는 인간이 처한 가련한 존재성에 아파하면서도,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유한성에서 비롯하는 부정적 현실을 넘겨버리지 않는다. 덧붙여서, 모든 문제는 ‘나’로부터 발생한다는 시각과 관점에서 세계를 바라보기에 주체와 세계가 길항하는 복잡 미묘한 관계를 무시하지도 않는다.
그의 시는 이런 점에서 볼 때 삶의 총체적이고 포괄적인 인식과 형상화를 통한 시적 전망으로 나아간다. 그의 시에서 중심은 인간이되, 인간의 숙명적인 감정과 정서가 끝내 건드릴 수밖에 없는 존재의 철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경계에 다가선 인간이다. 그 존재를 시적 화자로 등치해도 별 무리는 없을 것이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다가 죽어버리자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다가 죽어버리자
사랑과 믿음의 어둠은 깊어간다
흔들리며 흔들리며 어디로 가는가
내 사랑 어두운 나의 사랑아
그리움과 기다림의 씨를 뿌려라
날마다 해 뜨는 곳에
나는 가난한 너의 이름을 부른다
내가 마지막으로 너를 사랑했을 때
너는 이미 눈을 감고 있었다
죽음이 없으면 삶도 없구나
-「부산역에서」전문
애달픈 삶의 여정에서 만나는 수많은 얼굴들 속에서 믿고 의지하고 사랑하게 되는 이들뿐만 아니라 모든 인연들에게 바치는 연가처럼 위 시는 노래하는 듯하다. 대상이 특정되지 않아도 시의 화자가 말하는 상대는 사랑과 용서를 받아야 하는 대상이다. 개별적 대상일 수도 있지만 보편적인 대상이기도 하다. 시인은 행복하거나 기쁨에 겨운 상태에서 연가를 부르지 않고, 어둡고 비탄에 가득한 마음으로 사랑의 엘레지를 부른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다가 죽어버리자”는 단순한 어조에는 이미 사랑의 깊고 참된 의미를 실천하려는 의지가 들어 있다. 용서도 마찬가지다. 시제에 나오는 ‘부산역’이 상징하는 다양한 의미들을 생각할 때 「부산역에서」에 시인이 애절하게 읊조리는 노래는 삶과 죽음, 그리고 사랑과 이별이 던지는 착잡하면서도 묵직한 슬픔의 공기에 휩싸여 왠지 숭고함마저 자아낸다.
사랑의 불꽃이 사그라지면서 다가오는 어두운 죽음의 그림자와 맞선 존재를 떠올린다. 우리 모두는 속절없이 사랑하고 그리워하다 스러질 것이 분명한 존재다. 시인 또한 “죽음이 없으면 삶도 없구나” 탄식한다. 구체적인 대상에 대한 감정이 보편적이면서 형이상학적인 성찰로 확장되는 위 시에서 인생의 참뜻을 헤아리게 된다.
마음이 가난하기 위해선
꽃이 되고 싶다
걸어가 보고 싶다
부끄러운 부끄러운
마음의 꽃 한 송이
자기의 생을 조명하는
촛불 하나로 빛나고 싶다
우리가 흐르는 물로
만나는 것들, 헤어지는 것들
오늘밤에는 꿈으로도 오지 말고
등불만으로 홀로 남아 있어라
잠자는 돌처럼 나도 눕고 싶다
-「눈물 많은 세상」전문
삶의 존재론적 사유와 반성에서 시인이 지향하는 인생의 참된 길은 여러 시편들에서도 드러났듯이 사랑과 행복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방향으로 수렴된다. 현실적인 언행으로나 종교적 실천의 면에서나 시인은 그러한 정신적 가치를 추구한다. 그런데 현실에 적극적인 관심과 애정을 쏟는 시인에게서조차 감성의 밑바닥에는 눈물이 바다처럼 고여 있음을 보게 된다.
권태원의 시가 고독과 비애의 정조로 단단히 붙박여 있는 점은, 애초 그의 시의 출발이 실존적인 고독과 슬픔이라는 사실을 반증한다.「눈물 많은 세상」을 가득 메운 정조도 비극적인 실존의 슬픔이다. 꽃이 되어 꽃들이 흘리는 눈물 속을 거닐고 싶어하는 화자의 심리에는 이 세상 모든 존재들이 껴안고 있는 슬픔과 애환에 눈을 돌리지 않고 이를 보듬겠다는 의지가 담겨져 있다.
그리고 시인 또한 극한의 고독에서 비롯한 우뚝한 존재적 정립을 염원한다. “우리가 흐르는 물로/ 만나는 것들, 헤어지는 것들/ 오늘밤에는 꿈으로도 오지 말고/ 등불만으로 홀로 남아 있어라”에서 결연한 고독의 의지를 감지한다. 시인에게 이 세계가 그리는 눈물과 애환의 표정은 시인으로 하여금 “잠자는 돌처럼”, “눕고 싶”어 하는 갈망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단독자로서 시인이 겪었던 수많은 만남들 속에서, 시인은 인간이 결국 홀로 이 세계에 놓여있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홀로 남아 홀로 고해의 바다를 표류하는 존재자들의 진실을 바라보며 시인은 메말라버린 눈시울을 훔치는 것이다.
차라리 내가 시들고
너는 피어나기를
차라리 내가 고통 받고
너는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차라리 내가 울고
너는 웃기를
물은 물대로
산은 산대로
서로 사랑만 하면서
집 보는 햇살처럼 살고 싶다
-「집 보는 햇살」전문
「집 보는 햇살」에서도 보듯이 시인은 고통과 눈물을 홀로 떠안고자 한다. “차라리 내가 울고/ 너는 웃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극적 실존의식을 보게 된다. 모든 생명체들이 서로 사랑하며 살기를 바라면서도 실상 시인에게 모든 불행과 고통이 집중되고 모아지기를 희구하는 마음을 헤아리기란 쉽지 않다. 단순히 이타적 의식의 발로라 하기에는 그 비극성의 질감이 만만치가 않아 보인다.
스스로를 세상과 유폐하면서 제3자의 시각으로 세상이 사랑과 평화로 가득찬 유토피아가 되기를 기원하는 심리를 들여다보는 일은 바로 권태원 시인의 시적 지향점을 매만지는 행위에 직결한다. 본질적인 고독 속에 자신을 가두는 포즈에서 세계와 불화하면서 쓸쓸한 존재로 놓이고 싶어 하는 무의식적 욕망이 보인다.
사실 불온하고 부조리한 세계에서 평화를 갈망하는 시인의 의식 또한 불가해한 존재성에 균열이 갈 수밖에 없다. 사랑과 그리움의 언어가 무성한 속에 웅크리고 있는, 시인의 운명 같은 고독감은 그의 시를 황폐한 세계 한복판에 내던져진 비명처럼 보이게끔 한다. 다만 그 비명이 눈물과 그리움으로 변주될 뿐이다. 축축한 서정에 드리운 뼈아픈 절망과 비애가 권태원의 시를 수놓는 것이다.
시집『없습니다』를 색칠하고 있는 정감이란 그렇다. 홀로 우는 시인의 목소리에 집중하다 보면 세상과 시인이 겨루는 지난한 싸움을 볼 수 있다. 사랑을 앗아버리는 매몰찬 세속적 풍경을 바라다보는 시인은 마치 “집 보는 햇살처럼 살고 싶다” 말함으로써, 세계에 훈풍을 주는 존재이고자 한다.
동시에 불온한 세상과 일정한 거리를 두려는 마음의 이중의식을 간접적으로 내보인다. 이러한 모순된 마음의 포즈가 권태원의 시를 지배하는 시적 최종 심급이다. 이중구속double bind의 심연에 홀로 고투하는 시인의 모습에서 ‘시인’이 감당해야 하는 고뇌의 질량을 가늠할 수 있다.
누가 고요를 노래할 수 있는가
비가 내리는 날은 물이 되고 싶다
떠도는 편지처럼 홀로 있어도
외로움을 잊고 지낼 수 있다
진실이 없는 외로움은 한 장의 유언이다
시 나그네는 음악이 되어야 한다
인생은 온통 물소리 새소리 바람소리이다
저문 가을비가 내리는 날은
적막한 바다에 흘러가서
외로운 작은 섬으로 떠있고 싶다
-「詩 나그네」전문
시집『없습니다』를 읽으며 마음이 스산한 가운데 시인이 처한 고독의 깊이를 저울질한다.「詩 나그네」는 권태원 시인이 느끼는 세상에 대한 잠언 같은 발언이 축약되어 있다. 그는 “비가 내리는 날은 물이 되고 싶”어 한다. 빗물에 젖어 비와 완전히 한 몸이 되어 세상을 떠다니고 싶어한다.
“詩 나그네”는 이러한 시인의 마음을 상징하는 단어일 것이다. 그것은 “음악”이고 “온통 물소리 새소리 바람소리”다. 세상에 수런거리는 소리들과 어우러져 “저문 가을비가 내리는 날은/ 적막한 바다에 흘러가서/ 외로운 작은 섬으로 떠있고 싶”은 심정에서 세상과 함께 하되 홀로 고독의 세계에 정주하려는 심사 또한 또렷하다.
고통과 절망뿐이라 생각하기 쉬운 세상살이지만 외따로 존재하는 속에서도 은은한 기쁨이 샘솟는 게 인생이다. 그러나 그런 의식이 생기기까지 견뎠을 생명의 한탄과 절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고해의 공간에 표표히 떠다니는 나그네 같은 인생임을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한다면, 세상사 일희일비하는 광대노릇 밖에는 존재 의미가 없을 것이다.
시인은, 우리가 외면하려 하지만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삶의 진실을 나그네의 비유로 시화詩化한다. 나그네는 시와 시인이 겪을 운명의 징표처럼 저 수평선에 걸쳐 있다. 외롭고 쓸쓸한 가을 저물녘 찬비가 내리는 곳에서 삶의 운명과, 도무지 머릿속에 맴돌면서 떠날 줄 모르는 고독한 사유 하나를 골몰하는 때 음악처럼 나그네처럼 시인이 지나갈 것이다. 시집 『없습니다』는 그 서늘한 징후다.
■ 시인에게 부치는 편지
그에게 시가 없다면, 혹은 시인이 아니라면
김문홍(극작가. 2018 부산시문화상)
1.
권태원 시인은 나를 볼 때마다 ‘교수’라 부른다. 나이차라 해봤자 내가 대여섯 많은 정도밖에 안 되는데 자꾸 그렇게 부른다. 그럴 때마다 민망하기 그지없다. 그런 호칭을 들을 만큼 내가 인품이 갖춰진 것도 아닌데, 그렇다고 정식 교수도 아닌데 교수 취급을 하니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그렇다고 딱히 그런 호칭을 쓰지 말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십 수 년 전에 내가 시간강사 신분으로 모 대학 문예창작학과에서 희곡 창작론을 강의할 때, 그를 학생의 신분으로 만났던 인연 때문에 날 그렇게 부르는 모양이다.
결국은 그 호칭을 우리 두 사람만의 묵계 하에 용인한 셈이다. 그렇게 부르지 말라 한다고 해서 이미 입에 익은 것을 그가 바꿀 리가 없다. 그저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한 번의 인연을 끝까지 지키고 싶어 하는데 애써 막는다고 해서 따를 그이지 않는가.
나로서는 예의를 갖춰서 그러고 싶은데 그 진정성을 야박하게 뿌리칠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다른 이들 같으면 그의 의도를 의심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의 그런 순정한 마음을 믿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다른 이들은 알량하게 치부할지 몰라도 나는 그의 진정성을 믿고 싶기 때문이다. 그가 벌이는 기상천외하고 엉뚱한 해프닝을 다른 이들은 한낱 기행으로 받아들일지 몰라도, 나는 그를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은 까닭인지도 모른다.
2.
한두 해 전인가 싶다. 권태원 시인으로부터 느닷없이 시집의 발문을 하나 써 달라는 부탁을 받은 적이 있었다. 곤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온통 해당 시인의 시편들에 대해 칭찬 일색인 발문의 성격이 달갑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나 자신이 시 창작에 종사하거나 시평을 전문으로 하지 않아서이다. 산문을 쓰는 내가 비유가 어떻고, 상징과 은유가 어떻고, 공감각적 이미지가 어떻고 시평 용어들을 남발할 때 다른 이들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겠는가 하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뒤가 켕기고 귀가 근질거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은 그의 청을 받아들여 발문 아닌 발문을 써 주었다. 이름난 이에게 원고를 청탁하려면 고료가 솔찮게 들어갈 터인데 그에게 무슨 돈이 있겠는가. 어떤 이는 그 보답으로 사례를 한다고 해도 좋지 않은 후일담에 시달릴까봐 점잖게 거절했을 것이 뻔하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그의 진정성을 믿기로 했다.
다른 이들보다 내가 조금 격이 없는 사람으로 보였을지도, 아니면 이 사람만큼은 전문가는 아니더라도 자신의 시를 순정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겠거니 하고 생각했을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상대방의 순정한 마음을 왜곡해서 수용한다는 것은 큰 실례가 아닌가. 그래서 발문 아닌 발문을 써 주기로 했다. 얼치기 글이라도 써 주고 나니 누군가에게 보시한 것처럼 마음이 푸근하고 따스해져왔다. 그것이 곧 그의 순정한 마음에 대한 사례가 아니었을까?
3.
그런데 그가 이번 시집의 발문을 또 부탁해 오는 것이 아닌가. 이런 핑계 저런 핑계를 둘러대며 차일피일 미루어 왔다. 그에게서 날아오는 메시지의 문자 내용에 날이 갈수록 서운한 기색이 엿보였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애초에 그것을 거절하지 못한 내 잘못이 아닌가. 결국 써 주지 않으면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할 것이 분명하다. 그렇게 되면 결국 단순하고 순박한 시인 한 사람을 잃는 꼴이 된다.
집에 일찍 들어오는 날이면 그의 시편들을 꺼내놓고 뒤적뒤적 읽어 보았다. 거기서 얻은 결론은 내가 발문을 쓰지 않는 게 오히려 권태원 시인에게 도움이 되리라는 것이었다. 그래도 약속을 했으니 뭔가 기척이라도 보여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자꾸 내 뒷덜미를 나꿔채는 게 아닌가. 그래서 시평은 아니지만 그의 인간 됨됨이에 대한 나의 단상이라도 적어주는 게 도리일 것 같았다.
너덧 번 부탁해도 기척이 없으면 포기할 만도 한데 이렇게 끈덕지게 물고 늘어지는 것은, 이렇게라도 해서 그가 나와의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 하는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한 번 맺은 인연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인간사 예의가 아닌가. 그리고 한 번 인연 그렇게 헌신짝 버리듯 해서도 안 되는 일이 아닌가.
내가 보는 그의 진솔한 모습을 얘기하는 것도, 곁에서 조곤조곤 들어본 그의 얘기를 가감 없이 들려주는 것도 하나의 온정이리라 생각했다. 그렇게라도 해서 그에 대한 세간의 오해를 풀어주는 것도 발문 이상의 도움이 아니겠는가 하고 생각하니 다소 안심이 되었다.
사람이 그렇지 않은가. 그 사람을 정확하게 알지도 못하고, 그의 내면의 풍경을 돌아보지도 않은 채 그 사람에 대해 함부로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눈에 보이는 그 사람의 겉모습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 뒤에 가려진 마음을 보아야 그 사람을 정확하게 이해한 것이 아니겠는가.
권태원 시인에 대한 세간의 현상적인 평은 이럴 수도 있으리라. 기인이다, 일부러 그런다, 언행이 모두 하나의 쇼이다, 종잡을 수 없다는 것이 그에 대한 현상적인 단상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조금이라도 느긋하게 그와 마주앉아 얘기하다 보면 세간의 그에 대한 단평이 오해이거나 왜곡되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멀리서 보이는 그의 차림새나 행동거지는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격식 없이 진득하게 그와 얘기를 한번 나누다 보면 그런 오해가 눈 녹듯 사라지게 됨을 알게 될 것이다. 그래서 한두 번 본 피상적인 것을, 소문만 들은 것으로 그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지 말라고 하지 않던가.
4.
우리 집사람은 이따금 내게 느닷없이 권태원 시인의 근황을 물을 때가 더러 있다. 그러면서 “참 불쌍한 사람이재라우?” 하고 그 특유의 호남 방언으로 말끝을 정리하곤 한다. 그러면서 그에 대한 근황을 요모조모 묻는다. 요즘도 행색이 보통 사람과 다른가, 어디 먹고 잘 데는 있는가, 문화예술 행사나 잔치엔 안 빠지고 얼굴 내미는가, 뭘 어떻게 해서 호구지책을 면하고 있는가 등등 안쓰러운 질문을 해댄다.
나 역시 집사람의 속내를 알고 있다. 권태원 시인의 근황에 대해 관심을 보인다는 것은 그의 안위가 걱정된다는 정서가 깔려 있음이다. 생각 밖으로 밀려난 사람이면 뭣 하러 쓸데없이 묻거나 관심을 보이겠는가. 그러면서 집사람은 그에 대한 인간적인 면을 몇 마디 얘기한다.
사람은 참 좋은 사람인 것 같다, 그래도 시를 쓰는 것을 보니 참 용하다, 행색은 그래도 잘 차려 입으면 괜찮을 것도 같다, 그렇게 다른 사람에게 큰 해를 끼칠 사람은 아닌 것 같다는 등등 자신의 인상적인 단평을 주저리주저리 엮어낸다. 극히 주관적인 평가이긴 하지만 그를 그렇게 악하거나 나쁜 사람으로 평가하지 않은 걸 보니 제대로 그를 보고 판단하고 있는 것도 같아 안심이 된다.
권태원 시인은 나와 가깝게 지내는 이성규 연극연출가와도 몇 번 만나 얘기한 적이 있다. 그는 이성규 연출가의 고등학교 후배이기도 하다. 그 역시 권태원 시인의 기행을 알고 있지만 경계심을 갖고 대하지 않는 것 같다. 행색이나 언행이 보통 사람과 달라도 그의 순정한 마음을 조금은 발견했던 모양이다. 세상과 인간에 대한 나름대로의 철학적 인식의 깊이를 가지고 있는 연극연출가의 눈에 그가 그렇게 비친다는 것은 그에 대한 평가나 판단이 어느 정도 바르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 역시 그의 전화를 받거나 만날 때는 경계심을 갖지 않는다. 그의 행색이나 언행이 비상식적인 기행일지라도 그의 순정한 내면적 풍경을 어느 정도는 안다고 자부하기 때문이다. 그를 만난다고 해서 뭐가 그리 큰 손해를 보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배고파 보이면 상 위에 수저 하나 더 놓고 된장찌개 한 그릇 사주면 될 일이고, 담배 없으면 한 갑 사주면 될 일이고, 차비 없다면 오천 원짜리 지폐 한 장 쥐어주면 되기 때문이다. 그와 마주앉아 세상사 인간사 이런저런 얘기 나누다 보면 그 이상의 것을 얻을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그를 만나 얘기하다 보면 많은 정보를 얻기도 한다. 문단 돌아가는 형세나 시인 작가들의 근황을 그가 꿰고 있기 때문이다. 나도 가끔 한 번씩 그에게 일침을 놓기도 한다. 그렇게 자신의 잘못을 고깝게 듣지 않고 곧바로 인정하는 단순함이 그에게는 있다.
5.
가끔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권태원 시인에게 시가 없었더라면 어떠했을까, 그가 시인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가정을 해본다. 그 생각 끝의 결론은 끔찍하다. 만약 그에게 시가 없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가 이상한 행색으로 길거리를 걸아가면, 그가 길 가다 걸음을 멈추고 이상한 언행을 하면 지나치는 사람들이 그를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불을 보듯 뻔하다. 기인 취급, 시쳇말로 ‘미친 놈’ 취급을 할 것이다. 식당에 앉아 주인장에게 이상한 말을 몇 마디 주고받다가도 그가 가방 속에서 자신의 시집을 꺼내 보이면, 조금 전까지 갸웃거리던 주인장의 그를 보는 눈빛이 다른 것을 한두 번 목격한 일이 있다.
만약 그에게 시가 없었다면 그는 어떠했을까. 시라도 있었기에 남들이 이상한 눈초리를 보내와도 그것을 방어하고 견딜 심리적 기제라도 갖추게 될 것이 아닌가. 무엇보다 시가 없는 이 험한 세상을 그가 어떻게 헤쳐 나갈 수 있을까 생각하면 진저리를 치지 않을 수 없다. 세상 같지 않은 세상, 인간 같지 않은 인간이 득실거리는 이 황량한 사막을 그가 어떻게 걸어갈 수 있을까 아찔한 생각이 든다.
시라도 있었기에, 그가 장삼이사가 아닌 명징한 시인이었기에 이 물신주의의 세상에서 살아남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길거리에 퍼질러 앉아서도 그에게 시가 있었기에, 그가 시인이었기에 멸시와 혐오의 눈초리를 막아낼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또 매일 매일 생각은 어떠했겠는가. 욕설이 횡행하고 불신이 난무하고, 앞서고 앞 다투는 경쟁 판을, 내면보다는 현상적인 것만을 우선하는 이 세기말적 병적 징후를 그가 어떻게 참아낼 수 있었겠는가 말이다.
아, 그가 시를 써서 권태원이 시인이어서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다. 시도 모르고 시인이 아니었더라면 매일같이 터지는 내출혈을 어떻게 견딜 수 있겠는가 말이다. 시 쪽에서 가만히 손을 내밀었기에 예수가 그에게 다가오고(「그리운 예수」), 마음이 가난해서 꽃들의 눈물 속을 걸어가고(「눈물 많은 세상」), 꽃 한 송이 피어 마음속에 시 한 편을 쓸 수(「그리움」) 있게 된 것이다. 시를 쓰지 않는, 시인이 아닌 그가 우리 곁으로 다가와 이상한 짓거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어떤 기분이 들겠는지 상상해 보라. 끔찍하다. 그가 시를 쓰고 있기에, 그가 시인이기에 그 모든 비상식적인 언행에 대한 경계심을 무장해제하고 실없는 웃음이라도 웃을 수 있는 여유가 생기는 것이 아닌가 말이다.
6.
시인 권태원 앞에서 나는 격식을 차리지 않는다. 그 앞에서 나는 깎듯이 예의를 차리지 않는다. 말의 어미에 억지로 존칭을 치장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앞에서는 서로의 나이를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칠순을 눈앞에 두고 있다거나, 내가 곧 칠십 중반이 된다는 현실적인 계산을 따지지 않는다. 아직도 우리 두 사람은 서로가 50대 초중반의 과거 속에서 행세한다.
그가 미명 무렵에 내가 살던 연립주택의 담을 뛰어넘어와 집사람을 깨워 라면을 끓이게 했거나, 마파람 게 눈 감추듯 먹어치우고 차비 3천원을 받아가던 그 무례한 기억 속에서 아직도 행복해 하고 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무렵 그만한 일탈과 기행의 기억은 그리운 향수처럼 아련하게 가슴을 뜨겁게 적신다.
나는 길거리를 걷다가도 그를 발견하게 되면 일부러 피하지 않는다. 어떤 행사장이나 잔치판에서도 그를 만나면 스스럼없이 대한다. 왜냐하면 그와 알게 된지 40년이 다 되어가지만 그의 기행이나 언행 때문에 한 번도 피해를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가 배고파하면 함께 밥 한 끼 하면 되고, 차비 모자라면 그저 보시하듯 지폐 한 장 건네면 되는 일이 아닌가. 그 대신 내가 그에게서 얻는 게 얼마나 많은데. 그의 경험에서, 그의 기억에서 희곡의 소재나 주제를 건네받은 게 더러 있지 않은가 말이다.
지금도 잠자리에 드는 경우에 가끔 시인 권태원의 안부를 떠올릴 때가 있다. 이 추운 날씨에 따뜻한 잠자리라도 제대로 마련했는가, 끼니는 안 굶고 잘 지내고 있는가, 어디 아픈 데는 없는가 하고 그의 안위를 걱정한다. 그래도 곧 그런 걱정을 접는다.
넉살 좋으니까 그는 밥을 안 굶을 것이다, 얼굴 철판 깐 지 오래니까 그는 잠자리를 잘 얻어낼 것이다, 담배 없으면 아무에게나 어슬렁 걸어가 빡빡 깎은 머리라도 내밀면 한 개피 쯤이야 얻어 피울 넉살이 그에게는 있다.
길을 가다가도 문득 그를 떠올린다. 그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더러는 헌옷이라도 반듯하게 차려 입으면 좀 좋을까, 한 번쯤은 다른 이들에게 정색을 하고 윤리도덕에 가까운 정상적인 말이라도 걸었으면 좋겠구나 하고 빌고 바라기도 한다. 그러면 오히려 그들이 더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그러다가도 그런 노파심에 예전의 그를 그대로 유지하는 게 오히려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바꾸기도 한다.
7.
시인 권태원.
지금까지 그가 낸 시집만 해도 18권이다. 이제는 발간 터울 수가 조금 멀어져도 좋으니까 빛나는 시편을 빚었으면 참 좋겠다. 그도 이제는 칠순이 다 되어 가니 이제는 조금 점잖아졌으면 좋을 것도 같다.
무엇보다도 그가 아프지 말고 오래 오래 건강하게 살았으면 참 좋겠다. 그리고 모든 이들이 시인 권태원의 진면목을 좀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그가 한 푼이라도 더 벌어 지금까지 얻어먹었던 사람들에게 과자 하나라도 사줄 수 있는 여유라도 제발 있었으면 참 좋겠다.
그가 시를 쓰지 않는다면, 그리고 권태원이 시인이 아니라는 가정은 끔찍하기 짝이 없다.
이 시집의 발간을 계기로 그의 시세계가 더 깊고 넓어졌으면 좋겠다. 끝으로 그가 아프지 않고 오래 오래 살았으면 참말로 참말로 나는 좋겠다.
2019년 창작공간 ‘수문재’에서
■별이 빛나는 밤에
빗물에 씻겨간 시인의 절망
김한규(문학평론가)
1
시인은 시를 어떻게 만드는가?
이 의문은 시를 쓰지 않는 사람들은 물론 시에 전 생애를 바치고 사는 사람들에게도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 있는 사항이다.
시를 눈으로 만드는 경우와 귀로 만드는 경우와 입으로 만드는 경우와 가슴으로 만드는 경우와 머리로 만드는 경우와, 그리고 그런 것들을 모두 뭉뚱그려서 만드는 경우들에 있어서도 이 의문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숙제다.
그래서 시를 쓰는 사람과 시를 읽는 사람은 둘 다 똑같이 시에 대한 완전한 이해를 구하지 못한 상태에서 고뇌해야 하고, 그것만큼의 거리감으로 시와 대면해야 하는 불가사의를 경험한다.
좋은 시를 가려내어 그 시를 쓴 사람에게 시인이라는 별칭을 붙여주는 행위에 대한 회의와 불만도 결국 그런 맥락에서 출범되는 건 아닐까.
도대체 누가 감히 시를 심사할 수 있으며, 도대체 누가 감히 시인이라는 칭호를 붙여 줄 자격을 가졌단 말인가. 그리고 굳이 그런 과정을 밟은 뒤 스스로 시인임을 자랑하며 떠벌이처럼 날뛰는 같잖은 사람들은 또 무엇인가.
시인은 자기 감정대로 시를 쓰는 일 외에 사회적으로 얼마나 필요한 존재이며 인간적으로는 또 얼마나 쓸모있는 존재인가.
시인은 자신이 쓴 시에 대해 얼마나 진솔한 자세로 책임을 질 수 있으며, 그 시가 최소한 낙서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는 단언을 스스로 내뱉을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소유하고 있는가.
이 끝없이 꼬리를 물고 나타나는 의문과 의심을 향해 질타하듯 명쾌한 대답을 할 수 있는 시인은 몇이나 되며 그처럼 참된 시편은 얼마나 되는가.
권태원 시인에게도 나는 똑같은 질문을 던진다. 물론 그 대답은 말이 아닌 시로 되돌아 와야 한다는 걸 전제로 하면서…
이 땅의 수많은 시인들, 그 잡다한 부류 가운데서 권태원이라는 시인이 서 있는 위치쯤이야 아무래도 상관없다.
누구에게나 특별한 사정들은 있는 일이고, 그런 것들이 시인의 편력으로 소개되는 것이 그럴싸한 모양이 된다고 해서 시보다는 사람의 모습을 더 부각시키려드는 어리석음은 반드시 배제돼야 한다. 가끔은 그 시의 배경이나 시적 모티브 따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서 또는, 해석상의 쓸데없는 오해를 극복하게 하기 위해서 약간의 단편적 지식이 제공되는 것은 무방한 일일지도 모른다.
2
하루하루 눈물방울로 꽃을 피우는 삭월셋방 우리집이 얼음덩이 속에 사는 에스키모보다는 더 행복할 거라고 딸애는 잠 못드는 밤이면 울면서 기도하였어요
때로는 거지옷 입은 개그맨과 신데렐라 공주가 함께 출연하는 흑백TV에 나온 적도 없는 아빠는 ‘바본가 본다, 바본가 보다’며 까르르 놀려대더니 딸애는 풍선을 불며 뒷산으로 가 버렸어요
세모꼴 다섯모꼴의 찌그러진 별들과, 나뭇잎과 흙, 볏짚으로 쏘아올린 꿈속의 우리 집, 그리고 몇 년째 돌아오지 않는 엄마의 얼굴과, 또 그런 것들이 이 꽃바구니에 가득 그려진 풍선을 하나 들고 심심한 아홉 살 딸애가 떠나버린 자리에는 딸애 얼굴 같은 팬지꽃 한 송이가 저 혼자 피어 있었어요 그것도 목이 쉬어 피어 있었습니다
이 시는 권태원의 <팬지꽃으로> 전문이다. 이 시가 완성되던 시기의 그의 삶은 어떤 모습이었으며, 그의 정신적 허탈감은 어느 정도였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작품이다. 굳이 시적 미학이나 문학적 승화를 따져볼 필요도 없이 그가 경험하고 있는 현실적 삶의 정황들이 한 폭 정물화처럼 그려져 있는 것만으로도 족한 느낌이다.
몇 년째 돌아오지 않는 엄마와 심심한 아홉살 딸애 사이에서 갈등과 좌절을 겪으며 먼지 쌓인 재능만 애타게 썩이다 절망처럼 분노처럼 증오처럼 기도하고 노래하고, 그러다가 그러다가 시인이 된 권태원의 삶이 한 분기점을 파악케 하는 작품으로서 이 시의 의미가 정립될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이다.
쉽사리 속단키는 어려우나 그는 꽤 많은 재능을 가진 사람이다. 그것이 유독 문학적인 분야만 국한된 것이 아닌 이유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따금 이채로운 인상을 심어 줄 때도 있다.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다가 카메라를 메고 거리의 구석구석을 헤매거나 어느 날 갑자기 모습을 감춘 뒤 건설회사 경리부사장이 되어 열심히 출퇴근을 하거나 하는 일들이 모두 그렇다. 스스로 목적을 둔 일에 혼신으로 몰두하는 모습에 이르러서는 차라리 기이함을 느끼기도 하는 사람이다.
늘 취중인 듯 다분스러운 모습은 그가 어떤 허무주의자가 되어 보임으로써 자신의 갈등과 좌절에 대한 앙갚음을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갖게도 한다. 그렇다면 그가 경험하고 있는 갈등과 좌절은 구체적으로 과연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안경 너머로 섬뜩하리만치 차갑게 쏘아대는 눈빛을 보면서, 또 때로는 그것이 안타깝도록 외롭고 쓸쓸한 빛을 띠고 있는 걸 보면서 그가 미친 듯이 마셔대는 술, 그가 신들린 듯이 지껄여대는 객담, 그가 죽을 듯이 부려대는 엄살까지도 모두가 빈껍데기이며 허접쓰레기며 군더더기라는 걸 느낄 때가 있다.
정신이 황폐한 사람에게서 시가 만들어질 수는 없다. 감정이 메마른 사람에게서 노래가 불려질 수가 없다. 시력이 상실된 사람에게서 사진이 찍혀질 수는 없다(1975년 대한민국사진대전 대통령상 수상). 그리고 나름대로 싹싹한 예절과 규칙적인 생활과 공정한 분별력을 지닌 사람이 부정적인 인간관계를 가질 까닭 또한 없다.
권태원은 그래서 나이와 지위의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꽤 폭넓은 교우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이다. 또한 가까이 해야 할 일과 멀리 해야 할 일도 스스로 잘 가려서 처신할 줄 알며, 가장으로서의 역할에도 대단히 충실한 사람이다.
그러면서도 그가 좋아서 버리지 못하는 시와 음악과 사진, 조각 그리고 사랑 속에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할 줄도 아는 아름다운 풀잎같기도 한 사람이기도 하다.
3
바람이 불고
나는 죽는다
박수도 없이
빈 방 비우고
어디로 가랴 어디로 가랴
문 열어도
날아들지 않는
나의 비둘기
다시 비가 내리고
모래가 흘러간다
별빛이 잘게 부서지고
우울한 사내 하나
소리없이 울고 있다
시 <자화상>을 통해서 들여다보이는 그의 모습은 처절함, 바로 그것이다. 숱한 갈망 뒤의 처절한 절망이 빗물에 씻겨 흘러가는 모래처럼 잘게 부서져 마침내 그 자긍심마저도 깡그리 해체시킬 듯한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편협한 주관적 시각과 통속적 시각만으로 그를 바라보는 사람 중에는 그를 기인 시인으로만 치부하려는 경우도 없지도 않다. 꼭 기인이라는 말의 뜻이 어떻다고 해서가 아니라 권태원 시인에게는 맞지 않는 표현이어서 어색한 느낌을 준다는 말이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의 삶에 매우 충실하고자 몸부림을 쳐 왔다. 그런 한편으로는 차갑게 가슴을 저며드는 칼날같은 온갖 아픔에도 차라리 동심처럼 맑은 감성과 서정으로서 자신의 시정신을 가다듬어 왔다.
아름다운 것을 보고 감탄할 줄 알며 의롭지 못한 것을 보고 분노할 줄 알며 슬픈 것을 보고 눈물 흘릴 줄 아는 보편적 감정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보편적 소시민일 뿐, 그를 필요없이 포장해서 표현하거나 평가하는 것은 온당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4
아내는 상큼한 희망처럼 내 가슴의 바다를 날아 오릅니다 내가 춥고, 내가 피곤할 때마다 깨끗한 소주 한 잔이 되어 내 언 몸을 적셔주기도 합니다 언제부터인가 아내는 내 시의 쓸쓸한 섬이 되어, 푸른 갈매기의 눈빛이 되어, 내 지나온 날들의 상처를 비 온 뒤의 천마산처럼 푸르게 푸르게 물보라를 일으키기도 합니다 열 예닐곱 수녀의 장미빛 첫사랑 나의 아내는, 시골 성당의 새벽 종소리로 내 마음 하늘을 펼쳐 보이는 오 오 나의 섬, 나의 별
시 <아내는>은 조금씩 자신을 갖고 현실과 맞서고 있는 그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서로 깊이 사랑하며 살아가는 참된 부부의 모습만을 본다는 것이 너무도 운명적이다. 그들 부부의 숙명적 만남이 구도자적인 숭고한 정신에서 비롯되었다는 선입견 따위도 이 경우에는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짐이 된다.
그는 오직 아내를 사랑하고 또한 그 사랑을 미치도록 사랑한 나머지 정작 그 자신은 아무런 찌꺼기도 없이 맑디 맑게 정화되고 있는 과정만 아가페적인 사랑을 다음의 시에서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사랑합니다 슬픔의 힘으로 눈물의 힘으로 당신을 당신만을 사랑합니다 가까이 혹은 멀리서 아직도 내 핏자욱 자욱 속에 꿈틀거리는 마지막 남은 뜨거운 그리움 하나로 당신을 당신만을 사랑합니다 어쩌다 어쩌다가 거울에 비친 내 모습보다는 깨끗한 티슈 한 장과 같은 당신의 삶 속에서, 촉촉히 적셔오는 가을비 작설차 향기 속에서 나는 늘 그대의 쓸쓸한 그림자이고 싶습니다 쓸쓸한 그림자이고 싶습니다
시 <나는 그대의 쓸쓸한 그림자이고 싶습니다>는 이제 그가 마지막 남은 사랑의 불씨 하나마저도 아낌없이 태워버리는 눈부신 개안의 경지에 이르러 있음을 보여 준 작품이다.
초기의 관념적 정서의 시편들에 비해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깔끔하게 정리된 그 자신의 서정과 쉽게 만날 수 있다는 건 얼마나 반가운 일인가.
이러한 자세로 사랑에 몰두하고 시에 몰두하고 삶에 몰두하는 시인 권태원이 우리 곁에 있는 한 우리는 언제까지나 그를 아끼고 그의 시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흑백 TV에 나온 적이 없는 아빠가 바보라고 생각하던 심심한 딸애도 이제는 슬프도록 가녀린 한 송이 팬지꽃이길 거부하며 저 자신의 일에 열중하고 있다.
시 <딸애의 어항>을 보면서 우리는 이제 바야흐로 뭔가가 그에게서 제대로 자리를 잡아가는 듯한 흐뭇한 예감 같은 걸 느끼게 된다.
시내나 연못에서 사는 생물을 채집하여 어항을 꾸밉니다 일년 내내 햇빛 한 번 안 들어오는 곰팡이 방에 사는 딸애는 햇빛이 모여 사는 <새희망유치원> 창가에 어항을 둡니다 어쩌다 햇빛이 강할 때에는 정치 사회면이 찢겨져 나간 땅바닥의 신문지로 어항 위를 가려 줍니다 물벼룩, 실지렁이, 깻묵가루 같은 것을 먹고 남지 않을 정도로 넣어 주지만, 물 속 생물들은 라면 부스러기를 딸애처럼 하루에 한 번씩만 먹었습니다
시 ‘딸애의 어항’이다. 이런 정도의 평화로도 그가 이제 그 자신과의 차분한 대면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걸 확인한 이상 우리는 그에게 다시 새로운 기대를 걸게 된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한 사람의 시인이 그가 속한 사회에 대한 책무와 자신의 삶과 시에 대한 책임을 어떤 방식으로 짊어지느냐, 그 책임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등등에 관해 그 나름의 대답을 우리는 기다린다.
물론 그 대답은 말이 아닌 시로 되돌아 와야 한다는 걸 다시 한 번 전제로 하면서…
■ 발문
九天을 제 집처럼 드나드는 기인 詩人
우종익(건축가)
오동나무는 천년을 늙어도 가락을 품고 있고 매화는 일평생 추운데 살지만 향기는 팔지 않는다. 달은 천 번을 으스러져도 그 본질은 여전하고 버드나무는 일백 번 꺾여도 또 새로운 가지가 올라온다는 조선조 4대 문장가이신 상촌 신흠 선생의 글귀가 오늘따라 가슴에 와 닿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사람은 누구나 그 나름대로 다 독특한 향기를 갖고 있었다. 어떤 사람에게는 찔레꽃처럼 오래 동안 지워지지 않는 향기를 품고 있었고 어떤 사람에게는 겉은 화려했지만 다가가면 갈수록 전혀 향기를 맡을 수 없는 사람도 있었다.
권태원 시인의 詩를 읽고 있노라면 그만의 독특한 향기가 있었다. 詩 ‘수류화개’ ‘봉쇄수도원’이 그랬다. 詩 ‘완월동’에 닿으면 그 향기는 마치 니체가 쓴 ‘고독’이라는 시구를 읽는 것 같은 깊은 적막 속으로 사람을 내몰았다.
권태원 시인의 향기는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책장 한 구석에 우두커니 앉아있는 시인의 시집들이 오늘따라 자주 눈에 밟히는 것은 그에 대한 미움 때문일까. 사랑 때문일까. 연민의 정 때문일까. 그나마 얼굴이라도 볼 수 있는 날은 다행이었지만 한동안 소식이 없으면 죽었는지 살았는지 참 많이 궁금했다.
시인의 18번째 시집 <없습니다>라는 시집 제목이 어떻습니까 하고 술잔을 들다말고 느닷없이 물었다. 어쩌면 그답다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어떤 면에선 참 생경하다라는 느낌이 더 머리를 복잡하게 했다. 대부분의 그의 시들은 서정적이었다. 그런데도 <없습니다>라는 말은 무엇을 함축하려는 의미일까. 설마 그새 도를 통한 건 아닐테고 그도 이제 이순을 넘겼으니 세상이 조금씩 보인다는 말일까.
그런데 시집 제목이 <없습니다>라니? 이미 무아의 경지를 넘어 해탈에 이르렀다는 신호인가, 아니면 법정 스님처럼 모든 걸 다 내려놓고 남은 세월이나마 유유자적하며 살다가겠다는 손짓일까. 아무튼 그의 시에는 그의 의도와는 달리 참 많은 사람들이 등장했다.
특이한 것은 전생에 지은 죄가 뭐가 그리도 많은지 그의 시에는 늘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리움과 외로움이 실타래처럼 이리 엉키고 저리 엉켜있었다. 미안하다/ 그립다/ 외롭다/ 눈물이 난다/ 용서하라/ 또 한 발 늦었구나 하는 참회의 낱말들이 사람의 마음을 자주 짠하게 했다.
그래도 그의 詩를 읽고 나면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깊은 울림이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었다. 종종 사람들은 그를 기인이라고 불렀고 천재시인이라고도 했다. 언필칭 사람들은 죽어서 구천을 떠돌아다닌다는데 권태원 시인은 특이하게도 살아서 미리 구천을 떠도는 그런 시인이 아닌가할 정도로 엄청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어느 날은 느닷없이 산사에서 나온 스님처럼 새벽부터 승복을 입고 나타났고 어느 날은 성모 마리아 상 앞에 꿇어앉아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또 다른 날은 조선갓을 쓰고 유유히 광복동을 내 집처럼 휘저으며 돌아다녔다. 권태원 시인은 해마다 예수님 생일과 부처님 생일을 자기 생일보다 더 잘 챙겼다.
국제신문 박창희 大기자가 ‘기인이라 불러도 詩는 나의 운명’이라며 그를 조명했을 때는 다 이유가 있기 때문에 그랬겠지만 아무튼 그는 우리 시대 가장 독특하고 재미있는 시인임에는 틀림없었다. 간혹 그와 술잔을 나누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듣고 있으면 도대체 어디까지가 넌픽션이고 어디까지가 픽션인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을 때가 허다했다. 그럴 때 마다 나는 중광 스님 이래 가장 기인다운 기인시인이라고 말했다.
원래 명리학 하고 나와는 전혀 인연이 없었지만 권태원 시인의 두상 하나만은 정말 일품이었다. 어디를 가든지 굶어 죽을 팔자는 아니다. 실제로 권태원 시인은 두상만 잘 생긴 게 아니라 머리도 상당히 명석했다. 부산상고를 수석졸업 했다는데 계산 하나만은 굉장히 빨랐다. 하지만 머리가 좋다고 돈도 잘 버는 건 아니었다.
그의 주머니는 언제나 비어 있었고 참 많이 가난했다. 김삿갓처럼 동가숙 서가식했다. 간간히 돈 푼깨나 들어있으면 형님, 하면서 술도 샀고 안주도 시켰다. 그리고 주모에게 팁도 주었다. 그러나 돈이 없으면 아예 염치불구하고 자기가 주인공인양 여기 저기 끼어들어 특유의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좌중을 웃기곤 했다.
권 시인과 나와의 인연은 참 끈질겼다. 35여 년이 되었다. 그는 마음이 따뜻하고 정이 많고 눈물이 많은 사람이었다. 워낙 재주가 많다보니 사진도 노래(1971년부터 한국연예예술인총연합회 가수분과 정회원)도 경력도 화려했지만 난 아직까지 그의 노래를 단 한 곡도 제대로 들어 본 기억이 없었다.
기인이기 이전에 그도 사람임에는 틀림없었다. 자주 배가 고팠다. 김치에 밥 한 공기를 주면 그렇게 밥을 맛있게 먹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남을 즐겁게 하는 데에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밥 한 공기 얻어먹으면서도 “이렇게 맛있는 밥은 난생 처음입니다” 하고 눈물마저 글썽거렸다. 아무튼 그는 남을 울렸다 웃기는 데는 남다른 재주가 있었다.
권태원 시인을 잘 아는 사람일수록 호불호가 극명하게 달랐다. 놀라운 것은 유명인사일수록 그를 좋아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 부산국제영화제 영화의 전당 개관 행사 첫 초대작품으로 선정된 <창수의 전성시대>를 감독한 김사겸 원로 영화감독님. 아동문학가 강기홍 선생님. <피라미선생>, <어리벙>으로 유명한 부산일보, 국제신문 시사만화가 안기태 화백님이 그랬다.
국제신문 사진부장 출신이며 동아대학교 영상미디어학과 김탁돈 교수,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강동석 판화가, 추송웅 이래 <빨간 피터의 고백>을 가장 리얼하게 연기를 잘한다는 박병철 마임이스트 또한 권태원 시인을 무척 아끼고 좋아하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한평생 그리 험한 일을 해보지 않아서 그런지 몰라도 때로는 그를 높이 평가했다. 60대 중반임에도 그 엄동설한에 새벽 1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임시직도 마다하지 않고 장림쓰레기 하치장에서 하루 종일 일하느라 손마디 마디가 다 아프다 하면서 고통을 하소연 할 땐 나 같으면 저렇게 할 수 있을까하는 자괴감마저 들 때도 있었다. 아무튼 그의 시는 그러한 인고의 세월을 묵묵히 견뎌낸 영혼의 깊은 상처일지도 모른다.
기인이라고 하든지 천재시인이라고 하든지 그는 성실하게 시를 썼다. 시는 그의 운명이었고 버팀목이었고 반려자였다. 오늘은 또 어느 집에다 윗도리와 카메라 가방을 내팽개치고 아무도 없는 텅 빈 집으로 갔을까, 아니면 길 없는 길 위에 수도원 하나 붙잡고 밤새 혼자 기도하면서 울고 있을까.
많은 사람들은 詩를 가리켜 언어예술이라고 칭했다. 하지만 좀 더 세밀히 들여다보면 詩는 언어로 빚는 조형예술이었다. 조형예술의 가장 큰 특징은 이전에 전혀 보지 못했던 색다른 충격 때문이었다. 그것은 그 작가만이 갖고 있는 독특한 미의식과 문화와 조형언어를 접하는 사람들이 갖는 엄청난 도전과 감동이었다.
그러한 도전과 충격과 감동은 오래도록 사람들의 뇌리 속에 남았고 후대까지 이어졌다. 미켈란젤로, 베토벤, 프랑크 라이트 로이드, 게리, 장폴 샤르트르가 그랬다. 뿐만 아니라 마리아 릴케와 워즈워드, 윤동주와 이상이 그랬다. 권태원 시인의 18번째 시집 詩 ‘풍경소리’에서 나는 비로소 점 하나로 떠돌아다니는 시인을 만났다.
비우고 지우고 내려 놓아라
한없이 작아지고 작아지면서
꽃잎들이 떨어져 내린다
배롱나무 사이로 붉게
타오르는 서녁 노을
바람은 어디로 왔다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나는 한 알의 먼지다
길이 멀다
나는 떠도는 점이다
- 풍경소리
시인은 점점 작아지기로 결심을 했나보다. 떨어지는 꽃잎이었다가 붉게 타오르는 서녘 노을이었다가 어디로 왔다가 어디로 가는 바람인지도 모른 체 마침내 허공을 떠돌아다니는 먼지였다가 점이 되었다. 어쩌면 그는 큰 스님의 다비식에 갔다 온 지도 모른다. 사람은 외로울수록 곁에 있는 사람들이 더 소중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안개꽃 한 다발 받는 것보다
더 행복했습니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을 때
마술사 같은
좋은 사람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쓰고 싶었습니다
함께 있으면 언제나
더 소중한 사람
- 좋은 사람
뒤돌아보면 다 아름다운 것인데 우리는 아직도 사랑에 목말라하는 미숙아인가 보다. 내 것 아닌 내 것을 향해 왜 그리도 다들 바쁜지. 시인의 말마따나 눈물이 난다. 참말로 눈물만 난다.
빛보다 먼저
언어보다 먼저
사랑은 목소리도 없이
폭포처럼 끊김도 없이
내 숲에 먼저 와 있습니다
바보처럼
벙어리처럼
사랑은
예수처럼
부처처럼
내 곁에 먼저 와 있습니다
- 멈추면 보인다
이제 손을 내려놓아야 하나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더 많이 떠나기 전에, 좋아했던 사람들이 더 멀리 가버리기 전에 가을전어라도 한 접시 나누면서 권태원 시인의 詩를 감상하며 깊어가는 가을밤 귀뚜라미 우는 소리 들으며 언제 소주라도 한 잔 하시죠.
권태원 18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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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쇄 2019년 2월 20일
발 행 2019년 2월 25일
지 은 이 권 태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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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태원, 2019, Printed in Busan, Korea
값 30,000원
ISBN 978-89-90765-72-7 03800
* 이 책의 판권은 지은이와 연문씨앤피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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