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 공비의 준동
조 흥 제
1948년 대한민국 건국 직전에 일어났던 여수-순천 바란 사건, 4·3 제주 폭동 등 좌파들이 무력 폭동을 일으켜 대한민국 건국을 못하게 하였다. 반란이 진압되자 그들은 산으로 들어가 산사람이 되었다.
6·25 사변 발발이후 북한군이 낙동강까지 갔다가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하여 서울을 탈환하자 낙동강 전선에서 싸우던 북한군은 앞뒤에서 공격을 받게 되자 후퇴했다. 하지만 미군은 차를 타고 진격하고 북한군은 걸어서 후퇴해야하니 산으로 붙었다. 미처 주력부대를 따라 가지 못한 병사들은 지리산으로 들어가 기존에 있던 산 사람들과 합쳐 2만 여명이라는 큰 무장 세력으로 불어났다. 그들을 공비(共匪)라고 했다. 공비들은 시설물 파괴, 물품 강탈, 요인 납치 등을 행하여 대한민국에 많은 피해를 주었다.
내가 피란살이 하던 옥천에서도 10여 ㎞ 밖에 서대산이라는 큰 산이 있는데 거기가 공비들이 다니는 길이고, 공비들의 기지(基地)도 있다고 했다. 그들이 밤에 민가에 내려와 양식을 빼앗아 가고 젊은이들을 붙잡아 가는 일이 많아지자 경찰관들이 공비를 토벌하러 갔지만 오히려 당하는 형편이었다.
우리 마을에서도 청년들이 주위 3개 경찰서(대전-옥천-영동) 경찰관들과 함께 서대산으로 공비 토벌을 나갔다. 토벌대가 산을 오르자 사람은 안 보이는데 총알만 뿅뿅 날아와 접근할 수가 없었으며 한 사람이 나무를 붙잡고 올라가자 나무가 뽑히면서 그 밑에 구덩이를 파고 공비가 숨어 있었다. 그런데서 총을 쏘니 경찰은 목표물을 못 찾아 더 오를 수가 없었다. 그 때 산 위에서 여자들이 북과 꽹과리를 두들기면서 함성을 질러 토벌대는 기가 죽어 싸워 보지도 못하고 물러났다면서 도저히 경찰력으로는 그들을 제압할 수가 없었다는 청년들의 말이었다.
이태씨가 쓴 ‘남부군’에 의하면 저들은 태백산맥, 소백산맥, 노령산맥을 오르내리면서, 차량 파괴, 기차, 경찰지서 등을 습격하고, 민가에 들어가 양식을 빼앗는 한편 양민을 납치-살해하였다고 되어 있다. 총 지휘관은 모스크바 대학을 나온 이현상이었다. 김일성과 권력다툼에서 밀려나 남한으로 와서 빨지산 총 대장이 된 것이다.
이태씨는 서울의 모 신문사 기자로 근무하다가 전쟁 때 호남지방으로 피란 가다 자기도 모르게 산사람들에게 휩쓸려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그가 국군들이 공비 토벌할 때 전향하여 공비들의 생활상을 쓴 책이 ‘남부군’으로 세상에 선을 보이자 지리산 공비들의 실상이 들어났다.
내가 상도동에 살 때 뒷산인 국사봉에 산책 나갔다가 우연히 말을 걸은 사람이 있었다. 건너다보이는 김영삼 민주당 총재의 집을 가리키면서 지리산에도 김총재 일행과 같이 갔었다고 하여 산을 좋아했던 나와 대화가 된 것이다. 그는 국회의원도 지내고 소설도 썼다고 하여 무슨 책을 썼느냐고 물었더니 ‘남부군’이라고 했다. 그럼 이태씨가 아니냐고 했더니 그렇다고 했다. 그때 신문에선 이태씨가 쓴 남부군이 화제에 올랐었기 때문이었다. 당장 교보문고로 뛰어 가 남부군 1-2권을 샀다.
휴전 임시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을 때 유엔군 사령관 벤 프리트 대장은 군단장이었던 백선엽 장군을 불러 공비를 토벌하라고 하면서 병력이 얼마면 되겠느냐고 했다. 2개 사단을 달라고 했다. 벤 프리트는 4개 사단을 예상하였는데 훨씬 적게 달라고 하여 놀랐다. 토벌대는 밤에만 이동하여 지리산을 뺑 둘러쌌다. 공비들은 전혀 눈치를 못 챘다.
이태씨 일행은 토벌군에게 쫓겨 다니느라 잠도 못자고, 먹지도 못하고 눈길에 다니다 쓰러져 죽는 사람도 많았다. 국군은 3년 여 동안 비행기까지 동원하여 여러 차례의 토벌 끝에 공비들을 완전 소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