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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최씨(慶州崔氏)
氏族의 연원
시조 최치원(崔致遠)의 자(字)는 고운(孤雲), 또는 해운(海雲)이다. 그는 12살의 나이로 당(唐)나라에 건너가 17세 때 과거에 급제, 승무랑(承武郞) 시어사내공봉(侍御史內供奉)에 이르고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으며, 제도행영병마도통(諸道行營兵馬都統)인 고련(高馬+聯-耳)의 종사관(從事官)을 역임한 뒤 귀국하였다.
신라조에서 시독(侍讀)겸 한림학사(翰林學士) 수병부시랑(守兵部侍郞) 지서서감(知瑞書監)이 된 뒤 대산(大山)ㆍ천령(天嶺)ㆍ부성(富城)ㆍ태수(太守) 등을 지냈다.
그 뒤 시무(時務) 10조(條)를 올려 아찬(阿湌)에 이르렀으나 난세를 비관, 벼슬을 버리고 전국을 유랑한 뒤 말년을 해인사(海印寺)에서 보냈다.
고려 현종 11년 내사령(內史令)에 추증되었고, 13년 문창후(文昌侯)에 추봉되었다.
그는 신라 초에 최(崔)씨로 사성(賜姓)받은 돌산고허촌(實山高墟村)(사량부(沙梁部)의 촌장 소벌도리(蘇伐都利)의 24세 손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선계(先系)가 요원하여 확실한 계대(系代)를 알 수 없어 최치원(崔致遠)을 시조로 하여 득성조(得姓祖)로부터 대대로 경주(慶州)에 세거하였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경주로 삼게 되었다.
본관지 연혁
경주(慶州)는 원래 신라의 옛 수도이나, 고려 태조 18년에 경순왕이 항복하자 나라는 없어지고 다만 경주(慶州)라 칭하였다.
성종 때에 동경유수(東京留守)로 고쳐 영동도(嶺東道)에 예속시켰고, 현종조에는 강등시켜 경주방어사(慶州防禦使)로 하였으며, 신라복귀 반란을 꾀했다 하여 관내의 주(州), 부(府), 군(郡), 현(縣)을 빼앗아 안동, 상주에 나누어 예속시켰다.
조선조 태종 때에 경주(慶州)라는 옛 이름을 다시 썼고 1895년에 군(郡)이 되었으며, 1955년 경주시(慶州市) 설치와 더불어 나머지 지역은 월성군(月城郡)으로 되었다
주요 성씨로는 최(崔)ㆍ김(金)ㆍ노(盧)ㆍ가(李)ㆍ박(朴)ㆍ배(裵)ㆍ설(偰)ㆍ설(薛)ㆍ손(孫)ㆍ온(溫)ㆍ윤(尹)ㆍ전(全)ㆍ정(鄭)ㆍ풍(馮)씨 등이 있었다.
주요 세거지
‘신유보(辛酉譜)’에 의하면, 12세 최첨로(崔添老)의 자손들은 강화(江華)ㆍ순창(淳昌)ㆍ임실(任實)ㆍ전주(全州)ㆍ진안(鎭安)ㆍ하동(河東)ㆍ사천(泗川)ㆍ고양(高陽) 등지에 세거했던 것으로 보인다.
11세 최서운(崔瑞雲)의 자손들 중에서 13세 최유온(崔有溫)의 후계(後系)는 경주(慶州)ㆍ울산(蔚山)ㆍ김해(金海)ㆍ영덕(盈德)ㆍ공주(公州)ㆍ논산(論山)ㆍ홍성(洪城)ㆍ순창(淳昌) 등지에 산거했고, 최유량(崔有良)의 후계(後系)는 포천(抱川)과 시흥(始興)ㆍ대구(大邱)ㆍ대덕(大德)ㆍ김제(金堤)ㆍ청산(靑山)ㆍ남원(南原)ㆍ순창(淳昌) 등지에, 최유공(崔有恭)의 후계(後系)는 안동(安東)ㆍ보령(保寧)ㆍ예천(醴泉)ㆍ홍성(洪城)ㆍ의성(義城)ㆍ제천(堤川) 등지에, 최유검(崔有儉)의 후계(後系)는 파주(坡州)ㆍ달성(達城)ㆍ화성(華城)ㆍ예산(禮山)ㆍ보령(保寧)ㆍ대덕(大德) 등지에 각각 자리잡았던 것 같다.
11세 최청 관가정의 자손들은 고양(高陽)ㆍ보성(寶城)ㆍ인천(仁川)ㆍ김제(金堤)ㆍ금산(錦山)ㆍ남원(南原)ㆍ익산(益山) 등지에 나뉘어 살았고, 10세 최잉(崔阝奐 )의 자손들은 옥구(沃溝)와 영광(靈光)ㆍ정읍(井邑)ㆍ금산(錦山)에 최?(崔阝奐 )의 동생 최주(崔周)의 자손들은 아산(牙山)ㆍ인천(仁川)ㆍ파주(坡州)ㆍ남양주(南楊州) 등지와 괴산(槐山)ㆍ청주(淸州)ㆍ춘성(春城) 등지에 세거했던 것으로 보인다.
9세 최광우(崔光祐)의 자손들은 화성(華城)ㆍ포천(抱川) 등지에서 살았다.
한편 충렬공(忠烈公) 최광위(崔光位)의 자손들은 부안(扶安)에 삼사좌윤공(三司左尹公) 최현진(崔玄進)의 자손들은 남원(南原)에 세거하였고, 어사공(御史公) 최백륜(崔伯倫)의 자손들은 진양(晉陽)에, 광정공(匡靖公) 최단(崔鄲)의 자손들은 사천(泗川)ㆍ고양(高陽)ㆍ진안(鎭安) 등지에 많이 살았다고 믿어진다.
그리하여 1930년경에 이르러 경주최씨(慶州崔氏)는 충남 서산군(瑞山郡) 일원, 경북 익산군(益山郡) 황등면(黃登面), 전남 해남군(海南郡)ㆍ무안군(務安郡) 일원, 경북 달성군(達城郡)ㆍ의성군(義城郡)ㆍ영일군(迎日郡)ㆍ월성군(月城郡)ㆍ경산군(經山郡)ㆍ청도군(淸道郡)ㆍ예천군(醴泉郡), 경남 의령군(宜寧郡)ㆍ울산군(蔚山郡)ㆍ김해군(金海郡)ㆍ남해군(南海郡) 일원, 함북 길주군(吉州郡)ㆍ성진군(城津郡)ㆍ경원군(慶源郡) 일원에 집성촌을 이루었다.
씨족史
경주최씨(慶州崔氏)는 신라 말의 석학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을 시조로 하는 성씨다.
고운(孤雲)은 왕경(王京)(경주) 소량부인(少梁部人)인데, ‘삼국사기’ 열전에는 그의 선대세계(先代世系)를 알 수 없다고 했으나, ‘숭복사비(崇福寺碑)’에 의하면 아버지가 견일(肩逸)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12세에 당(唐)에 유학하여 5년 뒤 급제하였다. 당(唐)에서 선주률수현위를 지내고 승무랑시어사내공봉(承務郞侍御史內供奉)에 올라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그는 뛰어난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다. ‘동문선(東文選)’ 또는 ‘최문창후전집(崔文昌侯全集)’에서 그의 뛰어난 글들을 볼 수 있는데, 그 중에서도 당말(唐末) 황소(黃巢)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지은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은 동양에서 고금의 문장으로 꼽힌다.
29세에 모국 신라에 귀국하여 시독겸한림학사(侍讀兼翰林學士)ㆍ수병부시랑(守兵部侍郞)ㆍ지서서감(知瑞書監)이 되었다. 당시는 신라 말기로서 지방에서는 도적이 일어나는 등 민심이 동요되고, 신라 지배층은 이러한 사회동요를 수습할 능력이 없었다. 그는 선진 당(唐)에서 배운 지식을 토대로 사회모순을 개혁해 보고자 했으나, 자생력을 잃은 신라사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그는 외직을 자원하여 부성군태수(富城郡太守)를 역임하였다.
그 후 지방에 호족이 대두하고 사회가 어지러워지자 가야산 해인사에 들어가 문인(門人)을 기르며 여생을 마쳤다.
그의 문인(門人) 중에 고려조에 들어 관직에 나아간 자가 많다 한다. 그는 고려 현종조에 들어 내사령(內史令)에 추증되었고, 현종 14년(1023)에 문창후(文昌侯)에 추봉되었다. 뒤에 문묘(文廟)에 배향되었고, 고려ㆍ조선조를 통하여 숭상되었다.
그런데 경주최씨(慶州崔氏) 선대세계(先代世系)에 관해서는 화숙공파(和淑公派)와 관가정공파(觀稼亭公派)에서 다른 의견을 갖고 있다. 한다. 한쪽에서는 시조 이후 5대(代) 세계(世系)가 실전(失傳)되었다 하고 다른 쪽에서는 시조 이래 계속 세계(世系)가 이어져 왔다고 한다.
경주최씨(慶州崔氏)의 후손은 시조인 최치원(崔致遠) 한 계통으로만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고운(孤雲)과 비슷한 시기에 당(唐)에 유학하여 고려 초에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던 최언휘(崔彦撝)로 연결되는 계통도 있다. 최언휘(崔彦撝)는 최치원의 종제(從弟)였다. 적어도 두 계통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세계(世系)상으로 나타난 분파는 27개 파를 헤아리는데 그 중 화숙공파(和淑公派)(현우(玄祐))ㆍ관가정공파(觀稼亭公派)(청(淸))ㆍ삼사좌윤공파(三司左尹公派)(현진(玄進))ㆍ어사공파(御史公派)(백륜(伯倫))ㆍ밀성군파(密城君派)(제(堤))ㆍ광정공파(匡靖公派)(단(鄲))ㆍ충렬공파(忠烈公派)(광위(光位))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최언휘(崔彦撝)의 처음 이름은 신지(愼之)였고, 신라 말에 쓰던 이름은 인곤(仁滾)으로 나타난다. 885년 18세로 당(唐)나라에 유학하여 과거에 급제하고, 42세에 귀국하여 집사시랑(執事侍郞)ㆍ서서원학사(瑞書院學士)가 되었다. 935년 신라(新羅)가 망하자 고려(高麗)에 가서 태자사부(太子師傅)가 되고, 문한(文翰)을 위임받았다. 당시의 귀한 인사가 모두 그에게 사사(師事)하였다. 관직이 대상원봉대학사한림원령평장사(大相元鳳大學士翰林院令平章事)에 이르렀다.
그의 둘째 아들 최행귀(崔行歸)가 오월(吳越)에서 비서랑(秘書郞)을 지내고 광종의 행신(倖臣)이 되었다. 셋째 아들 비서(秘書)소감(少監) 최광원(崔光遠)의 아들 최항(崔沆)이 성종조에 내사문하평장사(內史門下平章事)에 올라 크게 현달하였다.
최승우(崔承祐)는 진성여왕(眞聖女王) 4년(890) 당(唐)나라에 건너가 공부하고 3년 뒤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하였다. 당(唐)에서 공부한 학사(學士) 중에 가장 문장에 능하여 유명하였는데, 최치원(崔致遠), 최언휘(崔彦撝), 최승우(崔承祐) 등과 함께 삼최(三崔)라 불리었다. 그는 후삼국시대에 후백제로 견훤(甄萱)을 위하여 격서(檄書)를 쓰기도 했는데, 그 중에서 ‘대견훤기고려주서(代甄萱寄高麗主書)’가 전해지고 있다. 자신의 문집을 '호본집(餬本集)'이라 했고 시(詩) 10수가 전한다.
경주최씨(慶州崔氏)는 고려 초에 가장 가문의 번성을 누렸다. 고려 성종 때의 명신 최승로(崔承老)(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 그의 손자인 최제안(崔齊顔)(문하시중(門下侍中)), 최량(崔亮)(문하시중(門下侍中), 태자사부(太子師傅)), 최항(崔沆)(평장사(平章事)) 등이 연이어 가문의 번성에 터를 다졌다. 고려 후기까지도 명문으로서의 지위는 유지되었다. 충숙왕 때 이제현(李齊賢)과 함께 당대의 문호로 명성을 날린 최해(崔瀣) 등은 가문을 빛냈다.
조선 건국 후 경주최씨(慶州崔氏)의 일문은 내리막길을 걸었다. 시조 최치원(崔致遠)을 정점으로 문명을 떨친 가문이었지만, 조선조에 <경최(慶崔)>가 배출한 문과 급제자는 42명에 그쳤다. 상신(相臣)ㆍ대제학(大提學)은 한 사람도 없었다.
최승로(崔承老)는 신라 말에 원보(元甫)를 지낸 은함(殷含)의 아들이다. 12세에 고려 태조 ?에서 ‘논어(論語)’를 읽었는데 이를 기특하게 여긴 태조가 원봉성학생(元鳳省學生)이 되게 하고 안마(鞍馬)를 하사하였다.
성종조까지 계속 관직에 종사하여 성종 7년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이 되어 청하후(淸河侯)에 봉해졌다. 죽은 뒤 성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성종 1년 정광행선관어사상주국(正匡行選官御事上柱國)으로 있을 때 성종의 구언(求言)에 대해 고려 역대왕의 득실(得失)을 논한 28조(條)를 올렸다. 6조(條)는 전하지 않고 22조(條)만이 전하고 있는데, 그는 거기에서 역대 왕의 치적을 논하면서 군제(軍制)의 개편, 과다한 불교행사(佛敎行事)의 중지, 무역(貿易)의 절제(節制), 관복(官服)의 제정(制定) 등 국가의 전반적인 면에 걸쳐 폐단의 시정과 새로운 제도의 제정을 건의하였다. 그는 고려 전기의 대표적인 정치사상가로 고려 전기의 정치사에 큰 영향을 주었다
최량(崔亮)은 광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공문박사(攻文博士)가 되었다 .
성종이 즉위 전에 사우(師友)관계에 있었으므로 성종이 즉위하자 발탁되어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ㆍ참지정사겸사위경(參知政事兼司衛卿)에 올랐다.
병으로 사직했다가 곧 복직되어 서희(徐熙) 등과 함께 북계(北界)에서 거란(契丹)을 방어해고, 뒤에 문하시랑(門下侍郞)을 거쳐 내사시랑겸민관어사동내사문하평장사감수국사(內史侍郞兼民官御事同內史門下平章事監修國史)에 이르렀다. 성종 14년에 생애를 마친 이후 태자사부(太子師傅)에 추증되었고 뒤에 성종묘정에 배향되었다.
최량(崔亮)에게는 원신(元信), 원좌(元佐) 등 일곱 아들이 있었는데, 큰 아들 최원신(崔元信)은 과거에 급제하고 호부시랑(戶部侍郞)을 거쳐 예빈경(禮賓卿)에 이르렀다.
최항(崔沆)은 성종조에 20세로 갑과(甲科)에 올랐는데, 성종이 그 재주를 가상히 여겨 우습유(右拾遺)ㆍ지제고(知制誥)에 임명하였다. 목종 12년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ㆍ한림학사로서 사부(師傅)가 되었고, 다음 해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서 30년간 폐지되었던 팔관회(八關會)를 부활케 했다. 1012년(현종 3년) 이부상서(吏部尙書)ㆍ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고, 1016년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가 되었으며, 1020년 추충진절위사공신(推忠盡節衛社功臣)의 호(號)를 받았다. 다음 해 검교태부(檢校太傅)ㆍ수문하시랑동내사문하평장사(守門下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ㆍ청하현개국후(淸河縣開國侯)가 되고, 수정공신(守正功臣)의 호(號)가 더해졌다. 매우 청렴결백해서 평생동안 다른 사람의 물건을 취한 적이 없었고, 유언으로 관에서 주는 부물(賻物)을 받지 않게 했다. 그리고 불교(佛敎)를 깊이 신봉했다. 현종묘ㅏ?배향되었다.
그의 아들 최유부(崔有孚)는 사재경(司宰卿), 서경부유수(西京副留守), 내사문하(內史門下)를 역임하였다.
최제안(崔齊顔)은 현(顯)ㆍ덕(德)ㆍ정(靖)ㆍ문종(文宗)의 4조를 섬겼으며, 관직은 호부상서(戶部尙書), 참지정사(參知政事) 등을 역임하고 태사문하시중(太師門下侍中)에 이르렀다. 뒤에 문종묘정에 배향되었다.
학자였던 최호(崔灝)는 정종 8년 동경부유수(東京副留守)로 왕명에 의해 윤렴(尹廉), 정공간(鄭公幹) 등과 함께 ‘전한서(前漢書)’, ‘후한서(後漢書)’, ‘당서(唐書)’를 새로 발간했다. 이것은 불교서적(佛敎書籍) 이외의 전적(典籍)으로는 최초로 간행된 것이다. 그 공(功)으로 포상(褒賞)되었으며 3년 뒤 ‘예기정의(禮記正義)’ 80권과 ‘모시정의(毛詩正義)’ 40권도 간행하였다.
졸옹(拙翁) 최해(崔瀣)는 민부의랑(民部議郞)을 지내고 원(元)으로부터 고려왕경유학교수(高麗王京儒學敎授)에 임명된 최백륜(崔伯倫)의 아들이며, 문창후(文昌侯)의 후손이다.
과거에 오른 뒤 성균학관(成均學官), 예문춘추관주부(藝文春秋館主簿)를 거쳐 충숙왕 7년 장흥고사(長興庫使)로서 원(元)나라에 파견되어 다음 해 원(元)나라 제과(制科)에 급제했다. 이어 요양로개주판관(遼陽路蓋州判官)으로 부임했으나. 곧 병을 핑계로 귀국하여 검교성균대사성(檢校成均大司成)에 이르렀다. 만년(晩年)에는 농사를 지었으며, 저술에 힘썼고, 고려(高麗) 명현(名賢)의 시문(詩文)을 뽑아 ‘동인지문(東人之門)’25권을 편수했다. 당대의 문호(文豪)로 이제현(李齊賢)과 함께 외국에까지 문명(文名)을 떨쳤다.
광정공(匡靖公) 최단(崔鄲)은 고려말 무장으로 이름 있던 인물이다.
우왕 14년 요동정벌(遼東征伐) 때 안동원수(安東元帥)로서 이성계(李成桂) 휘하로 출정,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하고 3등공신에 책록되었다. 이 해 창왕 즉위 후 경상도도순문사(慶尙道都巡問使) 박위(朴葳)와 함께 상주에서 왜구를 격파하고 활과 말을 하사받았다. 공양왕 2년 한양윤(漢陽尹)에 이어 판자혜부사(判慈惠府事)가 되고 1392년 조선 개국을 도와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이 됐다.
최경지(崔敬止)는 세조 6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고 그 6년 뒤 지평(持平)으로 발영시(拔英試)에 2등으로 급제했다. 1469년 (예종 1년) 행예문관부응교(行藝文館副應敎)ㆍ지제교시독관(知製敎侍讀官)으로 춘추관편수관(春秋館編修官)이 되어 ‘세조실록(世祖實錄)’과 1470년 (성종 1년) ‘예종실록(睿宗實錄)’ 편찬에 각각 참여했다.
1476년 봉상사정(奉常寺正)으로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을과(乙科)로 급제하고, 1479년 직제학(直提學)을 거쳐, 그 후 부제학(副提學)에 이르렀으며 시명(詩名)이 높았다.
조선 전기에 현달한 인물로는 문정공(文貞公) 최숙생(崔淑生)이 있다.
성종 23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연산군 2년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나서 수찬(修撰), 지평(持平), 헌납(獻納) 등을 역임했다. 중종 3년 문신정시(文臣庭試)에 장원한 뒤 대사간(大司諫),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1518년 우찬성(右贊成)에 올랐다.
임진왜란 때 최동보(崔東輔), 최봉천(崔奉天), 최계(崔誡)는 의병을 모아 왜적과 싸웠고, 최호(崔湖), 최진립(崔震立)은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로 공을 세웠다.
최호(崔湖)는 일찍이 무과(武科)에 급제했는데, 1576년 무과중시(武科重試)에 다시 장원했다. 여러 벼슬을 거쳐 1594년 함경도병마절도사(咸鏡道兵馬節度使)가 되었다. 1596년 충청도수군절도사(忠淸道水軍節度使)도서, 이몽학(李夢鶴)의 난(亂)을 평정시켜 공을 세웠고,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칠천량해전(漆川梁海戰)에서 원균(元均) 등과 함께 전사(戰死)했다. 앞서 이몽학(李夢鶴)의 난(亂) 때의 공으로 청난공신2등(淸難功臣二等)에 추록(追錄)되고, 계성군(鷄城君)에 봉(封)해졌다.
최진립(崔震立)은 1592년 임진왜란 때 동생 계종(繼宗)과 함께 종군하여 공(功)을 세우고, 1594년 무과에 급제했다.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자 결사대를 이끌고 서생포(西生浦)의 왜군(倭軍)을 공격하고, 이어 권율(權慄)을 도와 전공을 세웠다. 1607년 오위도총부도사(五衛都摠府都事)에 이르렀다.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공주영장(公州營將)으로 군사를 이끌고 용인에서 적을 맞아 싸우다가 전사했다. 청백리(淸白吏)에 뽑혔다.
최상익(崔商翼)은 현종 1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고 주서(注書), 지평(持平), 정언(正言), 장령(掌令) 등을 역임하였다. 숙종 10년 외직으로 안변부사(安邊府使)에 임명되자 사퇴했다. 숙종조의 당쟁 가운데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자 송추(松湫)에 은거했는데, 뒤에 다시 기용되어 승지(承旨)를 거쳐 충청도 관찰사에 이르렀다. 조선조 말의 인물로는 동학(東學)을 창시한 최제우(崔濟愚)와 최시형(崔時亨), 도끼 상소로 유명한 최익현(崔益鉉)이 있다.
수운(水? 최제우(崔濟愚)의 본명은 복술(福述)이었다. <어리석은 세상 사람을 구제한다>는 신념으로 제우(濟愚)라고 고쳤다 한다.
일찍부터 경사(經史)를 익혀 학문의 연구에 전심하다가 1844년부터 전국 각지를 유람하며 구도행각(求道行脚)에 나섰다. 10년 후 고향에 돌아와 도(道)를 닦던 중 금강산(金剛山) 유점사(楡岾寺)에 있다는 승려에게서 얻은 ‘을묘천서(乙卯天書)’로 도(道)를 깨달았다. 1859년 경주(慶州)에 돌아가 용담정(龍潭亭)에서 한국안민(韓國安民)의 대도(大道)를 깨우치기 위한 수도(修道)를 시작하여 시천주(侍天主)의 사상을 핵심으로 한 인내천(人乃天)의 교리를 완성하고 동학(東學)을 창시하여 포교(布敎)를 시작하였다.
당시 중국에서는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반란과 영ㆍ불 연합군의 북경침입이 있었고, 우리나라에 대한 열강의 침투가 시작되어 민족적인 위기감을 조성하고 있었다. 특히 서학(西學)(천주교)의 전래는 사상ㆍ풍속 면에서 사회적으로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수운(水雲)은 서학(西學)에 대응하는 민족 고유의 신앙으로 새 종교를 창설, 동학(東學)이라 이름하게 되었다.
동학(東學)은 제병장생(濟病長生)을 토대로 하여 동양적인 유(儒)ㆍ불(佛)ㆍ선(仙) 사상을 참작, ‘인내천(人乃天)’, ‘천심즉인심(天心卽人心)’을 기본사상으로 하여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하고 지상천국의 현실적인 이상을 추구했다.
동학(東學)은 구미ㆍ일본의 침략과 지배층들의 압제, 폭정으로 농민들 사이에 급속히 교세를 확장하였다. 이에 동학(東學)교단에서는 각 지방(地方)에 접소(接所)를 설치하고 접주(接主)를 두어 교도를 관장하였다.
1863년 수운(水雲)은 최시형(崔時亨)을 북접대도주(北接大道主)로 삼은 뒤 도통(道統)을 계승시켜 교주(敎主)로 삼았다. 이 해에 정부에서는 동학(東學)을 사교(邪敎)로 규정하고, 이듬해 그를 체포하여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죄목으로 대구장대(大邱將臺)에서 사형하였다. 그 뒤 동학도(東學徒)들의 꾸준한 신원(伸寃)운동 결과 1907년(융희(隆熙) 1년)에 신원(伸寃)되었다. 이보다 앞서 1892년 그의 신원(伸寃)을 목적으로 수천 명의 동학도(東學徒)가 참례(參禮)에 모여 집회를 열었고, 이 집회가 갑오년 농민전쟁의 한 계기로 작용하였다.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은 1861년 동학교도(東學敎徒)가 되었고 1863년 최제우(崔濟愚)의 후임으로 제 2대 교주(敎主)가 되었다. 1864년 정부의 탄압으로 최제우(崔濟愚)가 처형되자 태백산에 은신했다가, 그 후 관헌(官憲)의 눈을 피해 각 지방을 전전하며 포교(布敎)에 힘썼다. 그 후 ‘동경대전(東京大典)’을 간행했고, 이어 ‘용담유사(龍潭遺詞)’를 발간하는 등 경전(經典)을 완성했다.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으로 정국이 소란하여 동학(東學)에 대한 정부의 탄압이 완화되자 조직강화에 힘써 육임제(六任制)를 확립하고 전국에 육임소(六任所)를 설치하여 종교(宗敎)로서의 면목을 일신했다.
이어 각도(各道)의 동학대표자(東學代表者)들을 집합하여 탐관오리 숙청ㆍ종교(宗敎)의 자유(自由)ㆍ교주(敎主)의 신원(伸寃) 등을 주장하며, 왕에게 직접 상소를 올렸으나 시행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대대적인 시위를 감행하려 했다. 이에 당황한 조정(朝廷)으로부터 파견된 선무사(宣撫使) 어윤중(魚允中)과 면담하여 선처를 약속받고, 우선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 조병식(趙秉式) 등의 탐관이 면직되자 자진 해산했다. 그는 모든 운동에서 일체의 폭력 사용을 엄금하도록 시달했으나, 1894년 고부접주(高阜接主) 최진준(崔瑧準)이 농민(農民)과 동학도(東學徒)들을 지휘하여 동학혁명(東學革命)을 일으키자 교주로서 그 조정을 위해 각지의 접주(接主)들에게 총궐기를 명령하여 10여만의 병력을 인솔하고 관군(官軍)ㆍ일본군(日本軍)ㆍ와 공주(公州)ㆍ장수(長水) 등지에서 싸웠으나 계속 참패하고 청주(淸州)로 피신해 있다가 1898년 원주에서 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사형당했다. 1907년 수운(水雲)과 함께 신원(伸寃)되었다.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은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의 고제(高弟)로서 조선 말기의 거유(巨儒)였고 문도(門徒)가 수천을 헤아렸다. 대원군의 서원(書院) 철폐, 경복궁(景福宮) 중수(重修), 당백전(當百錢)의 발행 등의 정책을 강경한 논조로 탄핵하여 군부(君父)를 논박했다는 죄목으로 제주도(濟州道)에 위리안치(衛籬安置)되었다가 1875년 풀려 나왔다.
이듬해 일본과의 통상(通商)이 논의되자 도끼를 들고 대궐문 앞에 엎드려 5조(條)로 된 격렬한 척사소(斥邪疏)를 올려 조약(條約)체결의 불가(不可)함을 역설하다가 다시 흑산도(黑山島)에 위리안치(衛籬安置)되었다. 1879년 풀려나와 1894년 갑오경장(甲午更張)으로 단발령(斷髮令)이 내리자 이를 극력 반대했고, 1898년(광무(光武) 2년) 궁내부특진관(宮內府特進官)이 되었다.
그 후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ㆍ의정부찬정(議政府贊政)ㆍ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 등의 발령을 모두 사퇴했고, 국내의 대소사건(大小事件)이 있을 때마다 죽음을 무릅쓰고 상소하여 배일(排日)과 매국역신(賣國逆臣)의 토멸을 강력히 주장하여 여러 차례 체포ㆍ구금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제자인 임병찬(林秉贊) 등 80여 명과 함께 의병을 모집, 전라도 순창에서 약4백명의 의병을 이끌고 관군(官軍)ㆍ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웠으나, 패전한 뒤 체포되어 대마도(對馬島)에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지급되는 음식물을 “내 늙은 몸으로 어이 원수의 밥을 먹고 더 살겠느냐”며 거절하고 단식 끝에 죽었다. 1962년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大韓民國建國功勞勳章) 중장(重章)이 수여되었다.
씨족史
경주최씨(慶州崔氏)는 신라 말의 석학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을 시조로 하는 성씨다.
고운(孤雲)은 왕경(王京)(경주) 소량부인(少梁部人)인데, ‘삼국사기’ 열전에는 그의 선대세계(先代世系)를 알 수 없다고 했으나, ‘숭복사비(崇福寺碑)’에 의하면 아버지가 견일(肩逸)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12세에 당(唐)에 유학하여 5년 뒤 급제하였다. 당(唐)에서 선주률수현위를 지내고 승무랑시어사내공봉(承務郞侍御史內供奉)에 올라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그는 뛰어난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다. ‘동문선(東文選)’ 또는 ‘최문창후전집(崔文昌侯全集)’에서 그의 뛰어난 글들을 볼 수 있는데, 그 중에서도 당말(唐末) 황소(黃巢)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지은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은 동양에서 고금의 문장으로 꼽힌다.
29세에 모국 신라에 귀국하여 시독겸한림학사(侍讀兼翰林學士)ㆍ수병부시랑(守兵部侍郞)ㆍ지서서감(知瑞書監)이 되었다. 당시는 신라 말기로서 지방에서는 도적이 일어나는 등 민심이 동요되고, 신라 지배층은 이러한 사회동요를 수습할 능력이 없었다. 그는 선진 당(唐)에서 배운 지식을 토대로 사회모순을 개혁해 보고자 했으나, 자생력을 잃은 신라사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그는 외직을 자원하여 부성군태수(富城郡太守)를 역임하였다.
그 후 지방에 호족이 대두하고 사회가 어지러워지자 가야산 해인사에 들어가 문인(門人)을 기르며 여생을 마쳤다.
그의 문인(門人) 중에 고려조에 들어 관직에 나아간 자가 많다 한다. 그는 고려 현종조에 들어 내사령(內史令)에 추증되었고, 현종 14년(1023)에 문창후(文昌侯)에 추봉되었다. 뒤에 문묘(文廟)에 배향되었고, 고려ㆍ조선조를 통하여 숭상되었다.
그런데 경주최씨(慶州崔氏) 선대세계(先代世系)에 관해서는 화숙공파(和淑公派)와 관가정공파(觀稼亭公派)에서 다른 의견을 갖고 있다. 한다. 한쪽에서는 시조 이후 5대(代) 세계(世系)가 실전(失傳)되었다 하고 다른 쪽에서는 시조 이래 계속 세계(世系)가 이어져 왔다고 한다.
경주최씨(慶州崔氏)의 후손은 시조인 최치원(崔致遠) 한 계통으로만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고운(孤雲)과 비슷한 시기에 당(唐)에 유학하여 고려 초에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던 최언휘(崔彦撝)로 연결되는 계통도 있다. 최언휘(崔彦撝)는 최치원의 종제(從弟)였다. 적어도 두 계통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세계(世系)상으로 나타난 분파는 27개 파를 헤아리는데 그 중 화숙공파(和淑公派)(현우(玄祐))ㆍ관가정공파(觀稼亭公派)(청(淸))ㆍ삼사좌윤공파(三司左尹公派)(현진(玄進))ㆍ어사공파(御史公派)(백륜(伯倫))ㆍ밀성군파(密城君派)(제(堤))ㆍ광정공파(匡靖公派)(단(鄲))ㆍ충렬공파(忠烈公派)(광위(光位))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최언휘(崔彦撝)의 처음 이름은 신지(愼之)였고, 신라 말에 쓰던 이름은 인곤(仁滾)으로 나타난다. 885년 18세로 당(唐)나라에 유학하여 과거에 급제하고, 42세에 귀국하여 집사시랑(執事侍郞)ㆍ서서원학사(瑞書院學士)가 되었다. 935년 신라(新羅)가 망하자 고려(高麗)에 가서 태자사부(太子師傅)가 되고, 문한(文翰)을 위임받았다. 당시의 귀한 인사가 모두 그에게 사사(師事)하였다. 관직이 대상원봉대학사한림원령평장사(大相元鳳大學士翰林院令平章事)에 이르렀다.
그의 둘째 아들 최행귀(崔行歸)가 오월(吳越)에서 비서랑(秘書郞)을 지내고 광종의 행신(倖臣)이 되었다. 셋째 아들 비서(秘書)소감(少監) 최광원(崔光遠)의 아들 최항(崔沆)이 성종조에 내사문하평장사(內史門下平章事)에 올라 크게 현달하였다.
최승우(崔承祐)는 진성여왕(眞聖女王) 4년(890) 당(唐)나라에 건너가 공부하고 3년 뒤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하였다. 당(唐)에서 공부한 학사(學士) 중에 가장 문장에 능하여 유명하였는데, 최치원(崔致遠), 최언휘(崔彦撝), 최승우(崔承祐) 등과 함께 삼최(三崔)라 불리었다. 그는 후삼국시대에 후백제로 견훤(甄萱)을 위하여 격서(檄書)를 쓰기도 했는데, 그 중에서 ‘대견훤기고려주서(代甄萱寄高麗主書)’가 전해지고 있다. 자신의 문집을 '호본집(餬本集)'이라 했고 시(詩) 10수가 전한다.
경주최씨(慶州崔氏)는 고려 초에 가장 가문의 번성을 누렸다. 고려 성종 때의 명신 최승로(崔承老)(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 그의 손자인 최제안(崔齊顔)(문하시중(門下侍中)), 최량(崔亮)(문하시중(門下侍中), 태자사부(太子師傅)), 최항(崔沆)(평장사(平章事)) 등이 연이어 가문의 번성에 터를 다졌다. 고려 후기까지도 명문으로서의 지위는 유지되었다. 충숙왕 때 이제현(李齊賢)과 함께 당대의 문호로 명성을 날린 최해(崔瀣) 등은 가문을 빛냈다.
조선 건국 후 경주최씨(慶州崔氏)의 일문은 내리막길을 걸었다. 시조 최치원(崔致遠)을 정점으로 문명을 떨친 가문이었지만, 조선조에 <경최(慶崔)>가 배출한 문과 급제자는 42명에 그쳤다. 상신(相臣)ㆍ대제학(大提學)은 한 사람도 없었다.
최승로(崔承老)는 신라 말에 원보(元甫)를 지낸 은함(殷含)의 아들이다. 12세에 고려 태조 ?에서 ‘논어(論語)’를 읽었는데 이를 기특하게 여긴 태조가 원봉성학생(元鳳省學生)이 되게 하고 안마(鞍馬)를 하사하였다.
성종조까지 계속 관직에 종사하여 성종 7년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이 되어 청하후(淸河侯)에 봉해졌다. 죽은 뒤 성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성종 1년 정광행선관어사상주국(正匡行選官御事上柱國)으로 있을 때 성종의 구언(求言)에 대해 고려 역대왕의 득실(得失)을 논한 28조(條)를 올렸다. 6조(條)는 전하지 않고 22조(條)만이 전하고 있는데, 그는 거기에서 역대 왕의 치적을 논하면서 군제(軍制)의 개편, 과다한 불교행사(佛敎行事)의 중지, 무역(貿易)의 절제(節制), 관복(官服)의 제정(制定) 등 국가의 전반적인 면에 걸쳐 폐단의 시정과 새로운 제도의 제정을 건의하였다. 그는 고려 전기의 대표적인 정치사상가로 고려 전기의 정치사에 큰 영향을 주었다
최량(崔亮)은 광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공문박사(攻文博士)가 되었다 .
성종이 즉위 전에 사우(師友)관계에 있었으므로 성종이 즉위하자 발탁되어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ㆍ참지정사겸사위경(參知政事兼司衛卿)에 올랐다.
병으로 사직했다가 곧 복직되어 서희(徐熙) 등과 함께 북계(北界)에서 거란(契丹)을 방어해고, 뒤에 문하시랑(門下侍郞)을 거쳐 내사시랑겸민관어사동내사문하평장사감수국사(內史侍郞兼民官御事同內史門下平章事監修國史)에 이르렀다. 성종 14년에 생애를 마친 이후 태자사부(太子師傅)에 추증되었고 뒤에 성종묘정에 배향되었다.
최량(崔亮)에게는 원신(元信), 원좌(元佐) 등 일곱 아들이 있었는데, 큰 아들 최원신(崔元信)은 과거에 급제하고 호부시랑(戶部侍郞)을 거쳐 예빈경(禮賓卿)에 이르렀다.
최항(崔沆)은 성종조에 20세로 갑과(甲科)에 올랐는데, 성종이 그 재주를 가상히 여겨 우습유(右拾遺)ㆍ지제고(知制誥)에 임명하였다. 목종 12년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ㆍ한림학사로서 사부(師傅)가 되었고, 다음 해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서 30년간 폐지되었던 팔관회(八關會)를 부활케 했다. 1012년(현종 3년) 이부상서(吏部尙書)ㆍ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고, 1016년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가 되었으며, 1020년 추충진절위사공신(推忠盡節衛社功臣)의 호(號)를 받았다. 다음 해 검교태부(檢校太傅)ㆍ수문하시랑동내사문하평장사(守門下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ㆍ청하현개국후(淸河縣開國侯)가 되고, 수정공신(守正功臣)의 호(號)가 더해졌다. 매우 청렴결백해서 평생동안 다른 사람의 물건을 취한 적이 없었고, 유언으로 관에서 주는 부물(賻物)을 받지 않게 했다. 그리고 불교(佛敎)를 깊이 신봉했다. 현종묘ㅏ?배향되었다.
그의 아들 최유부(崔有孚)는 사재경(司宰卿), 서경부유수(西京副留守), 내사문하(內史門下)를 역임하였다.
최제안(崔齊顔)은 현(顯)ㆍ덕(德)ㆍ정(靖)ㆍ문종(文宗)의 4조를 섬겼으며, 관직은 호부상서(戶部尙書), 참지정사(參知政事) 등을 역임하고 태사문하시중(太師門下侍中)에 이르렀다. 뒤에 문종묘정에 배향되었다.
학자였던 최호(崔灝)는 정종 8년 동경부유수(東京副留守)로 왕명에 의해 윤렴(尹廉), 정공간(鄭公幹) 등과 함께 ‘전한서(前漢書)’, ‘후한서(後漢書)’, ‘당서(唐書)’를 새로 발간했다. 이것은 불교서적(佛敎書籍) 이외의 전적(典籍)으로는 최초로 간행된 것이다. 그 공(功)으로 포상(褒賞)되었으며 3년 뒤 ‘예기정의(禮記正義)’ 80권과 ‘모시정의(毛詩正義)’ 40권도 간행하였다.
졸옹(拙翁) 최해(崔瀣)는 민부의랑(民部議郞)을 지내고 원(元)으로부터 고려왕경유학교수(高麗王京儒學敎授)에 임명된 최백륜(崔伯倫)의 아들이며, 문창후(文昌侯)의 후손이다.
과거에 오른 뒤 성균학관(成均學官), 예문춘추관주부(藝文春秋館主簿)를 거쳐 충숙왕 7년 장흥고사(長興庫使)로서 원(元)나라에 파견되어 다음 해 원(元)나라 제과(制科)에 급제했다. 이어 요양로개주판관(遼陽路蓋州判官)으로 부임했으나. 곧 병을 핑계로 귀국하여 검교성균대사성(檢校成均大司成)에 이르렀다. 만년(晩年)에는 농사를 지었으며, 저술에 힘썼고, 고려(高麗) 명현(名賢)의 시문(詩文)을 뽑아 ‘동인지문(東人之門)’25권을 편수했다. 당대의 문호(文豪)로 이제현(李齊賢)과 함께 외국에까지 문명(文名)을 떨쳤다.
광정공(匡靖公) 최단(崔鄲)은 고려말 무장으로 이름 있던 인물이다.
우왕 14년 요동정벌(遼東征伐) 때 안동원수(安東元帥)로서 이성계(李成桂) 휘하로 출정,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하고 3등공신에 책록되었다. 이 해 창왕 즉위 후 경상도도순문사(慶尙道都巡問使) 박위(朴葳)와 함께 상주에서 왜구를 격파하고 활과 말을 하사받았다. 공양왕 2년 한양윤(漢陽尹)에 이어 판자혜부사(判慈惠府事)가 되고 1392년 조선 개국을 도와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이 됐다.
최경지(崔敬止)는 세조 6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고 그 6년 뒤 지평(持平)으로 발영시(拔英試)에 2등으로 급제했다. 1469년 (예종 1년) 행예문관부응교(行藝文館副應敎)ㆍ지제교시독관(知製敎侍讀官)으로 춘추관편수관(春秋館編修官)이 되어 ‘세조실록(世祖實錄)’과 1470년 (성종 1년) ‘예종실록(睿宗實錄)’ 편찬에 각각 참여했다.
1476년 봉상사정(奉常寺正)으로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을과(乙科)로 급제하고, 1479년 직제학(直提學)을 거쳐, 그 후 부제학(副提學)에 이르렀으며 시명(詩名)이 높았다.
조선 전기에 현달한 인물로는 문정공(文貞公) 최숙생(崔淑生)이 있다.
성종 23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연산군 2년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나서 수찬(修撰), 지평(持平), 헌납(獻納) 등을 역임했다. 중종 3년 문신정시(文臣庭試)에 장원한 뒤 대사간(大司諫),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1518년 우찬성(右贊成)에 올랐다.
임진왜란 때 최동보(崔東輔), 최봉천(崔奉天), 최계(崔誡)는 의병을 모아 왜적과 싸웠고, 최호(崔湖), 최진립(崔震立)은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로 공을 세웠다.
최호(崔湖)는 일찍이 무과(武科)에 급제했는데, 1576년 무과중시(武科重試)에 다시 장원했다. 여러 벼슬을 거쳐 1594년 함경도병마절도사(咸鏡道兵馬節度使)가 되었다. 1596년 충청도수군절도사(忠淸道水軍節度使)도서, 이몽학(李夢鶴)의 난(亂)을 평정시켜 공을 세웠고,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칠천량해전(漆川梁海戰)에서 원균(元均) 등과 함께 전사(戰死)했다. 앞서 이몽학(李夢鶴)의 난(亂) 때의 공으로 청난공신2등(淸難功臣二等)에 추록(追錄)되고, 계성군(鷄城君)에 봉(封)해졌다.
최진립(崔震立)은 1592년 임진왜란 때 동생 계종(繼宗)과 함께 종군하여 공(功)을 세우고, 1594년 무과에 급제했다.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자 결사대를 이끌고 서생포(西生浦)의 왜군(倭軍)을 공격하고, 이어 권율(權慄)을 도와 전공을 세웠다. 1607년 오위도총부도사(五衛都摠府都事)에 이르렀다.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공주영장(公州營將)으로 군사를 이끌고 용인에서 적을 맞아 싸우다가 전사했다. 청백리(淸白吏)에 뽑혔다.
최상익(崔商翼)은 현종 1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고 주서(注書), 지평(持平), 정언(正言), 장령(掌令) 등을 역임하였다. 숙종 10년 외직으로 안변부사(安邊府使)에 임명되자 사퇴했다. 숙종조의 당쟁 가운데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자 송추(松湫)에 은거했는데, 뒤에 다시 기용되어 승지(承旨)를 거쳐 충청도 관찰사에 이르렀다. 조선조 말의 인물로는 동학(東學)을 창시한 최제우(崔濟愚)와 최시형(崔時亨), 도끼 상소로 유명한 최익현(崔益鉉)이 있다.
수운(水? 최제우(崔濟愚)의 본명은 복술(福述)이었다. <어리석은 세상 사람을 구제한다>는 신념으로 제우(濟愚)라고 고쳤다 한다.
일찍부터 경사(經史)를 익혀 학문의 연구에 전심하다가 1844년부터 전국 각지를 유람하며 구도행각(求道行脚)에 나섰다. 10년 후 고향에 돌아와 도(道)를 닦던 중 금강산(金剛山) 유점사(楡岾寺)에 있다는 승려에게서 얻은 ‘을묘천서(乙卯天書)’로 도(道)를 깨달았다. 1859년 경주(慶州)에 돌아가 용담정(龍潭亭)에서 한국안민(韓國安民)의 대도(大道)를 깨우치기 위한 수도(修道)를 시작하여 시천주(侍天主)의 사상을 핵심으로 한 인내천(人乃天)의 교리를 완성하고 동학(東學)을 창시하여 포교(布敎)를 시작하였다.
당시 중국에서는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반란과 영ㆍ불 연합군의 북경침입이 있었고, 우리나라에 대한 열강의 침투가 시작되어 민족적인 위기감을 조성하고 있었다. 특히 서학(西學)(천주교)의 전래는 사상ㆍ풍속 면에서 사회적으로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수운(水雲)은 서학(西學)에 대응하는 민족 고유의 신앙으로 새 종교를 창설, 동학(東學)이라 이름하게 되었다.
동학(東學)은 제병장생(濟病長生)을 토대로 하여 동양적인 유(儒)ㆍ불(佛)ㆍ선(仙) 사상을 참작, ‘인내천(人乃天)’, ‘천심즉인심(天心卽人心)’을 기본사상으로 하여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하고 지상천국의 현실적인 이상을 추구했다.
동학(東學)은 구미ㆍ일본의 침략과 지배층들의 압제, 폭정으로 농민들 사이에 급속히 교세를 확장하였다. 이에 동학(東學)교단에서는 각 지방(地方)에 접소(接所)를 설치하고 접주(接主)를 두어 교도를 관장하였다.
1863년 수운(水雲)은 최시형(崔時亨)을 북접대도주(北接大道主)로 삼은 뒤 도통(道統)을 계승시켜 교주(敎主)로 삼았다. 이 해에 정부에서는 동학(東學)을 사교(邪敎)로 규정하고, 이듬해 그를 체포하여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죄목으로 대구장대(大邱將臺)에서 사형하였다. 그 뒤 동학도(東學徒)들의 꾸준한 신원(伸寃)운동 결과 1907년(융희(隆熙) 1년)에 신원(伸寃)되었다. 이보다 앞서 1892년 그의 신원(伸寃)을 목적으로 수천 명의 동학도(東學徒)가 참례(參禮)에 모여 집회를 열었고, 이 집회가 갑오년 농민전쟁의 한 계기로 작용하였다.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은 1861년 동학교도(東學敎徒)가 되었고 1863년 최제우(崔濟愚)의 후임으로 제 2대 교주(敎主)가 되었다. 1864년 정부의 탄압으로 최제우(崔濟愚)가 처형되자 태백산에 은신했다가, 그 후 관헌(官憲)의 눈을 피해 각 지방을 전전하며 포교(布敎)에 힘썼다. 그 후 ‘동경대전(東京大典)’을 간행했고, 이어 ‘용담유사(龍潭遺詞)’를 발간하는 등 경전(經典)을 완성했다.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으로 정국이 소란하여 동학(東學)에 대한 정부의 탄압이 완화되자 조직강화에 힘써 육임제(六任制)를 확립하고 전국에 육임소(六任所)를 설치하여 종교(宗敎)로서의 면목을 일신했다.
이어 각도(各道)의 동학대표자(東學代表者)들을 집합하여 탐관오리 숙청ㆍ종교(宗敎)의 자유(自由)ㆍ교주(敎主)의 신원(伸寃) 등을 주장하며, 왕에게 직접 상소를 올렸으나 시행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대대적인 시위를 감행하려 했다. 이에 당황한 조정(朝廷)으로부터 파견된 선무사(宣撫使) 어윤중(魚允中)과 면담하여 선처를 약속받고, 우선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 조병식(趙秉式) 등의 탐관이 면직되자 자진 해산했다. 그는 모든 운동에서 일체의 폭력 사용을 엄금하도록 시달했으나, 1894년 고부접주(高阜接主) 최진준(崔瑧準)이 농민(農民)과 동학도(東學徒)들을 지휘하여 동학혁명(東學革命)을 일으키자 교주로서 그 조정을 위해 각지의 접주(接主)들에게 총궐기를 명령하여 10여만의 병력을 인솔하고 관군(官軍)ㆍ일본군(日本軍)ㆍ와 공주(公州)ㆍ장수(長水) 등지에서 싸웠으나 계속 참패하고 청주(淸州)로 피신해 있다가 1898년 원주에서 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사형당했다. 1907년 수운(水雲)과 함께 신원(伸寃)되었다.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은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의 고제(高弟)로서 조선 말기의 거유(巨儒)였고 문도(門徒)가 수천을 헤아렸다. 대원군의 서원(書院) 철폐, 경복궁(景福宮) 중수(重修), 당백전(當百錢)의 발행 등의 정책을 강경한 논조로 탄핵하여 군부(君父)를 논박했다는 죄목으로 제주도(濟州道)에 위리안치(衛籬安置)되었다가 1875년 풀려 나왔다.
이듬해 일본과의 통상(通商)이 논의되자 도끼를 들고 대궐문 앞에 엎드려 5조(條)로 된 격렬한 척사소(斥邪疏)를 올려 조약(條約)체결의 불가(不可)함을 역설하다가 다시 흑산도(黑山島)에 위리안치(衛籬安置)되었다. 1879년 풀려나와 1894년 갑오경장(甲午更張)으로 단발령(斷髮令)이 내리자 이를 극력 반대했고, 1898년(광무(光武) 2년) 궁내부특진관(宮內府特進官)이 되었다.
그 후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ㆍ의정부찬정(議政府贊政)ㆍ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 등의 발령을 모두 사퇴했고, 국내의 대소사건(大小事件)이 있을 때마다 죽음을 무릅쓰고 상소하여 배일(排日)과 매국역신(賣國逆臣)의 토멸을 강력히 주장하여 여러 차례 체포ㆍ구금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제자인 임병찬(林秉贊) 등 80여 명과 함께 의병을 모집, 전라도 순창에서 약4백명의 의병을 이끌고 관군(官軍)ㆍ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웠으나, 패전한 뒤 체포되어 대마도(對馬島)에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지급되는 음식물을 “내 늙은 몸으로 어이 원수의 밥을 먹고 더 살겠느냐”며 거절하고 단식 끝에 죽었다. 1962년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大韓民國建國功勞勳章) 중장(重章)이 수여되었다.
씨족史
경주최씨(慶州崔氏)는 신라 말의 석학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을 시조로 하는 성씨다.
고운(孤雲)은 왕경(王京)(경주) 소량부인(少梁部人)인데, ‘삼국사기’ 열전에는 그의 선대세계(先代世系)를 알 수 없다고 했으나, ‘숭복사비(崇福寺碑)’에 의하면 아버지가 견일(肩逸)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12세에 당(唐)에 유학하여 5년 뒤 급제하였다. 당(唐)에서 선주률수현위를 지내고 승무랑시어사내공봉(承務郞侍御史內供奉)에 올라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그는 뛰어난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다. ‘동문선(東文選)’ 또는 ‘최문창후전집(崔文昌侯全集)’에서 그의 뛰어난 글들을 볼 수 있는데, 그 중에서도 당말(唐末) 황소(黃巢)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지은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은 동양에서 고금의 문장으로 꼽힌다.
29세에 모국 신라에 귀국하여 시독겸한림학사(侍讀兼翰林學士)ㆍ수병부시랑(守兵部侍郞)ㆍ지서서감(知瑞書監)이 되었다. 당시는 신라 말기로서 지방에서는 도적이 일어나는 등 민심이 동요되고, 신라 지배층은 이러한 사회동요를 수습할 능력이 없었다. 그는 선진 당(唐)에서 배운 지식을 토대로 사회모순을 개혁해 보고자 했으나, 자생력을 잃은 신라사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그는 외직을 자원하여 부성군태수(富城郡太守)를 역임하였다.
그 후 지방에 호족이 대두하고 사회가 어지러워지자 가야산 해인사에 들어가 문인(門人)을 기르며 여생을 마쳤다.
그의 문인(門人) 중에 고려조에 들어 관직에 나아간 자가 많다 한다. 그는 고려 현종조에 들어 내사령(內史令)에 추증되었고, 현종 14년(1023)에 문창후(文昌侯)에 추봉되었다. 뒤에 문묘(文廟)에 배향되었고, 고려ㆍ조선조를 통하여 숭상되었다.
그런데 경주최씨(慶州崔氏) 선대세계(先代世系)에 관해서는 화숙공파(和淑公派)와 관가정공파(觀稼亭公派)에서 다른 의견을 갖고 있다. 한다. 한쪽에서는 시조 이후 5대(代) 세계(世系)가 실전(失傳)되었다 하고 다른 쪽에서는 시조 이래 계속 세계(世系)가 이어져 왔다고 한다.
경주최씨(慶州崔氏)의 후손은 시조인 최치원(崔致遠) 한 계통으로만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고운(孤雲)과 비슷한 시기에 당(唐)에 유학하여 고려 초에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던 최언휘(崔彦撝)로 연결되는 계통도 있다. 최언휘(崔彦撝)는 최치원의 종제(從弟)였다. 적어도 두 계통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세계(世系)상으로 나타난 분파는 27개 파를 헤아리는데 그 중 화숙공파(和淑公派)(현우(玄祐))ㆍ관가정공파(觀稼亭公派)(청(淸))ㆍ삼사좌윤공파(三司左尹公派)(현진(玄進))ㆍ어사공파(御史公派)(백륜(伯倫))ㆍ밀성군파(密城君派)(제(堤))ㆍ광정공파(匡靖公派)(단(鄲))ㆍ충렬공파(忠烈公派)(광위(光位))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최언휘(崔彦撝)의 처음 이름은 신지(愼之)였고, 신라 말에 쓰던 이름은 인곤(仁滾)으로 나타난다. 885년 18세로 당(唐)나라에 유학하여 과거에 급제하고, 42세에 귀국하여 집사시랑(執事侍郞)ㆍ서서원학사(瑞書院學士)가 되었다. 935년 신라(新羅)가 망하자 고려(高麗)에 가서 태자사부(太子師傅)가 되고, 문한(文翰)을 위임받았다. 당시의 귀한 인사가 모두 그에게 사사(師事)하였다. 관직이 대상원봉대학사한림원령평장사(大相元鳳大學士翰林院令平章事)에 이르렀다.
그의 둘째 아들 최행귀(崔行歸)가 오월(吳越)에서 비서랑(秘書郞)을 지내고 광종의 행신(倖臣)이 되었다. 셋째 아들 비서(秘書)소감(少監) 최광원(崔光遠)의 아들 최항(崔沆)이 성종조에 내사문하평장사(內史門下平章事)에 올라 크게 현달하였다.
최승우(崔承祐)는 진성여왕(眞聖女王) 4년(890) 당(唐)나라에 건너가 공부하고 3년 뒤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하였다. 당(唐)에서 공부한 학사(學士) 중에 가장 문장에 능하여 유명하였는데, 최치원(崔致遠), 최언휘(崔彦撝), 최승우(崔承祐) 등과 함께 삼최(三崔)라 불리었다. 그는 후삼국시대에 후백제로 견훤(甄萱)을 위하여 격서(檄書)를 쓰기도 했는데, 그 중에서 ‘대견훤기고려주서(代甄萱寄高麗主書)’가 전해지고 있다. 자신의 문집을 '호본집(餬本集)'이라 했고 시(詩) 10수가 전한다.
경주최씨(慶州崔氏)는 고려 초에 가장 가문의 번성을 누렸다. 고려 성종 때의 명신 최승로(崔承老)(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 그의 손자인 최제안(崔齊顔)(문하시중(門下侍中)), 최량(崔亮)(문하시중(門下侍中), 태자사부(太子師傅)), 최항(崔沆)(평장사(平章事)) 등이 연이어 가문의 번성에 터를 다졌다. 고려 후기까지도 명문으로서의 지위는 유지되었다. 충숙왕 때 이제현(李齊賢)과 함께 당대의 문호로 명성을 날린 최해(崔瀣) 등은 가문을 빛냈다.
조선 건국 후 경주최씨(慶州崔氏)의 일문은 내리막길을 걸었다. 시조 최치원(崔致遠)을 정점으로 문명을 떨친 가문이었지만, 조선조에 <경최(慶崔)>가 배출한 문과 급제자는 42명에 그쳤다. 상신(相臣)ㆍ대제학(大提學)은 한 사람도 없었다.
최승로(崔承老)는 신라 말에 원보(元甫)를 지낸 은함(殷含)의 아들이다. 12세에 고려 태조 ?에서 ‘논어(論語)’를 읽었는데 이를 기특하게 여긴 태조가 원봉성학생(元鳳省學生)이 되게 하고 안마(鞍馬)를 하사하였다.
성종조까지 계속 관직에 종사하여 성종 7년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이 되어 청하후(淸河侯)에 봉해졌다. 죽은 뒤 성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성종 1년 정광행선관어사상주국(正匡行選官御事上柱國)으로 있을 때 성종의 구언(求言)에 대해 고려 역대왕의 득실(得失)을 논한 28조(條)를 올렸다. 6조(條)는 전하지 않고 22조(條)만이 전하고 있는데, 그는 거기에서 역대 왕의 치적을 논하면서 군제(軍制)의 개편, 과다한 불교행사(佛敎行事)의 중지, 무역(貿易)의 절제(節制), 관복(官服)의 제정(制定) 등 국가의 전반적인 면에 걸쳐 폐단의 시정과 새로운 제도의 제정을 건의하였다. 그는 고려 전기의 대표적인 정치사상가로 고려 전기의 정치사에 큰 영향을 주었다
최량(崔亮)은 광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공문박사(攻文博士)가 되었다 .
성종이 즉위 전에 사우(師友)관계에 있었으므로 성종이 즉위하자 발탁되어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ㆍ참지정사겸사위경(參知政事兼司衛卿)에 올랐다.
병으로 사직했다가 곧 복직되어 서희(徐熙) 등과 함께 북계(北界)에서 거란(契丹)을 방어해고, 뒤에 문하시랑(門下侍郞)을 거쳐 내사시랑겸민관어사동내사문하평장사감수국사(內史侍郞兼民官御事同內史門下平章事監修國史)에 이르렀다. 성종 14년에 생애를 마친 이후 태자사부(太子師傅)에 추증되었고 뒤에 성종묘정에 배향되었다.
최량(崔亮)에게는 원신(元信), 원좌(元佐) 등 일곱 아들이 있었는데, 큰 아들 최원신(崔元信)은 과거에 급제하고 호부시랑(戶部侍郞)을 거쳐 예빈경(禮賓卿)에 이르렀다.
최항(崔沆)은 성종조에 20세로 갑과(甲科)에 올랐는데, 성종이 그 재주를 가상히 여겨 우습유(右拾遺)ㆍ지제고(知制誥)에 임명하였다. 목종 12년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ㆍ한림학사로서 사부(師傅)가 되었고, 다음 해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서 30년간 폐지되었던 팔관회(八關會)를 부활케 했다. 1012년(현종 3년) 이부상서(吏部尙書)ㆍ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고, 1016년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가 되었으며, 1020년 추충진절위사공신(推忠盡節衛社功臣)의 호(號)를 받았다. 다음 해 검교태부(檢校太傅)ㆍ수문하시랑동내사문하평장사(守門下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ㆍ청하현개국후(淸河縣開國侯)가 되고, 수정공신(守正功臣)의 호(號)가 더해졌다. 매우 청렴결백해서 평생동안 다른 사람의 물건을 취한 적이 없었고, 유언으로 관에서 주는 부물(賻物)을 받지 않게 했다. 그리고 불교(佛敎)를 깊이 신봉했다. 현종묘ㅏ?배향되었다.
그의 아들 최유부(崔有孚)는 사재경(司宰卿), 서경부유수(西京副留守), 내사문하(內史門下)를 역임하였다.
최제안(崔齊顔)은 현(顯)ㆍ덕(德)ㆍ정(靖)ㆍ문종(文宗)의 4조를 섬겼으며, 관직은 호부상서(戶部尙書), 참지정사(參知政事) 등을 역임하고 태사문하시중(太師門下侍中)에 이르렀다. 뒤에 문종묘정에 배향되었다.
학자였던 최호(崔灝)는 정종 8년 동경부유수(東京副留守)로 왕명에 의해 윤렴(尹廉), 정공간(鄭公幹) 등과 함께 ‘전한서(前漢書)’, ‘후한서(後漢書)’, ‘당서(唐書)’를 새로 발간했다. 이것은 불교서적(佛敎書籍) 이외의 전적(典籍)으로는 최초로 간행된 것이다. 그 공(功)으로 포상(褒賞)되었으며 3년 뒤 ‘예기정의(禮記正義)’ 80권과 ‘모시정의(毛詩正義)’ 40권도 간행하였다.
졸옹(拙翁) 최해(崔瀣)는 민부의랑(民部議郞)을 지내고 원(元)으로부터 고려왕경유학교수(高麗王京儒學敎授)에 임명된 최백륜(崔伯倫)의 아들이며, 문창후(文昌侯)의 후손이다.
과거에 오른 뒤 성균학관(成均學官), 예문춘추관주부(藝文春秋館主簿)를 거쳐 충숙왕 7년 장흥고사(長興庫使)로서 원(元)나라에 파견되어 다음 해 원(元)나라 제과(制科)에 급제했다. 이어 요양로개주판관(遼陽路蓋州判官)으로 부임했으나. 곧 병을 핑계로 귀국하여 검교성균대사성(檢校成均大司成)에 이르렀다. 만년(晩年)에는 농사를 지었으며, 저술에 힘썼고, 고려(高麗) 명현(名賢)의 시문(詩文)을 뽑아 ‘동인지문(東人之門)’25권을 편수했다. 당대의 문호(文豪)로 이제현(李齊賢)과 함께 외국에까지 문명(文名)을 떨쳤다.
광정공(匡靖公) 최단(崔鄲)은 고려말 무장으로 이름 있던 인물이다.
우왕 14년 요동정벌(遼東征伐) 때 안동원수(安東元帥)로서 이성계(李成桂) 휘하로 출정,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하고 3등공신에 책록되었다. 이 해 창왕 즉위 후 경상도도순문사(慶尙道都巡問使) 박위(朴葳)와 함께 상주에서 왜구를 격파하고 활과 말을 하사받았다. 공양왕 2년 한양윤(漢陽尹)에 이어 판자혜부사(判慈惠府事)가 되고 1392년 조선 개국을 도와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이 됐다.
최경지(崔敬止)는 세조 6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고 그 6년 뒤 지평(持平)으로 발영시(拔英試)에 2등으로 급제했다. 1469년 (예종 1년) 행예문관부응교(行藝文館副應敎)ㆍ지제교시독관(知製敎侍讀官)으로 춘추관편수관(春秋館編修官)이 되어 ‘세조실록(世祖實錄)’과 1470년 (성종 1년) ‘예종실록(睿宗實錄)’ 편찬에 각각 참여했다.
1476년 봉상사정(奉常寺正)으로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을과(乙科)로 급제하고, 1479년 직제학(直提學)을 거쳐, 그 후 부제학(副提學)에 이르렀으며 시명(詩名)이 높았다.
조선 전기에 현달한 인물로는 문정공(文貞公) 최숙생(崔淑生)이 있다.
성종 23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연산군 2년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나서 수찬(修撰), 지평(持平), 헌납(獻納) 등을 역임했다. 중종 3년 문신정시(文臣庭試)에 장원한 뒤 대사간(大司諫),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1518년 우찬성(右贊成)에 올랐다.
임진왜란 때 최동보(崔東輔), 최봉천(崔奉天), 최계(崔誡)는 의병을 모아 왜적과 싸웠고, 최호(崔湖), 최진립(崔震立)은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로 공을 세웠다.
최호(崔湖)는 일찍이 무과(武科)에 급제했는데, 1576년 무과중시(武科重試)에 다시 장원했다. 여러 벼슬을 거쳐 1594년 함경도병마절도사(咸鏡道兵馬節度使)가 되었다. 1596년 충청도수군절도사(忠淸道水軍節度使)도서, 이몽학(李夢鶴)의 난(亂)을 평정시켜 공을 세웠고,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칠천량해전(漆川梁海戰)에서 원균(元均) 등과 함께 전사(戰死)했다. 앞서 이몽학(李夢鶴)의 난(亂) 때의 공으로 청난공신2등(淸難功臣二等)에 추록(追錄)되고, 계성군(鷄城君)에 봉(封)해졌다.
최진립(崔震立)은 1592년 임진왜란 때 동생 계종(繼宗)과 함께 종군하여 공(功)을 세우고, 1594년 무과에 급제했다.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자 결사대를 이끌고 서생포(西生浦)의 왜군(倭軍)을 공격하고, 이어 권율(權慄)을 도와 전공을 세웠다. 1607년 오위도총부도사(五衛都摠府都事)에 이르렀다.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공주영장(公州營將)으로 군사를 이끌고 용인에서 적을 맞아 싸우다가 전사했다. 청백리(淸白吏)에 뽑혔다.
최상익(崔商翼)은 현종 1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고 주서(注書), 지평(持平), 정언(正言), 장령(掌令) 등을 역임하였다. 숙종 10년 외직으로 안변부사(安邊府使)에 임명되자 사퇴했다. 숙종조의 당쟁 가운데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자 송추(松湫)에 은거했는데, 뒤에 다시 기용되어 승지(承旨)를 거쳐 충청도 관찰사에 이르렀다. 조선조 말의 인물로는 동학(東學)을 창시한 최제우(崔濟愚)와 최시형(崔時亨), 도끼 상소로 유명한 최익현(崔益鉉)이 있다.
수운(水? 최제우(崔濟愚)의 본명은 복술(福述)이었다. <어리석은 세상 사람을 구제한다>는 신념으로 제우(濟愚)라고 고쳤다 한다.
일찍부터 경사(經史)를 익혀 학문의 연구에 전심하다가 1844년부터 전국 각지를 유람하며 구도행각(求道行脚)에 나섰다. 10년 후 고향에 돌아와 도(道)를 닦던 중 금강산(金剛山) 유점사(楡岾寺)에 있다는 승려에게서 얻은 ‘을묘천서(乙卯天書)’로 도(道)를 깨달았다. 1859년 경주(慶州)에 돌아가 용담정(龍潭亭)에서 한국안민(韓國安民)의 대도(大道)를 깨우치기 위한 수도(修道)를 시작하여 시천주(侍天主)의 사상을 핵심으로 한 인내천(人乃天)의 교리를 완성하고 동학(東學)을 창시하여 포교(布敎)를 시작하였다.
당시 중국에서는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반란과 영ㆍ불 연합군의 북경침입이 있었고, 우리나라에 대한 열강의 침투가 시작되어 민족적인 위기감을 조성하고 있었다. 특히 서학(西學)(천주교)의 전래는 사상ㆍ풍속 면에서 사회적으로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수운(水雲)은 서학(西學)에 대응하는 민족 고유의 신앙으로 새 종교를 창설, 동학(東學)이라 이름하게 되었다.
동학(東學)은 제병장생(濟病長生)을 토대로 하여 동양적인 유(儒)ㆍ불(佛)ㆍ선(仙) 사상을 참작, ‘인내천(人乃天)’, ‘천심즉인심(天心卽人心)’을 기본사상으로 하여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하고 지상천국의 현실적인 이상을 추구했다.
동학(東學)은 구미ㆍ일본의 침략과 지배층들의 압제, 폭정으로 농민들 사이에 급속히 교세를 확장하였다. 이에 동학(東學)교단에서는 각 지방(地方)에 접소(接所)를 설치하고 접주(接主)를 두어 교도를 관장하였다.
1863년 수운(水雲)은 최시형(崔時亨)을 북접대도주(北接大道主)로 삼은 뒤 도통(道統)을 계승시켜 교주(敎主)로 삼았다. 이 해에 정부에서는 동학(東學)을 사교(邪敎)로 규정하고, 이듬해 그를 체포하여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죄목으로 대구장대(大邱將臺)에서 사형하였다. 그 뒤 동학도(東學徒)들의 꾸준한 신원(伸寃)운동 결과 1907년(융희(隆熙) 1년)에 신원(伸寃)되었다. 이보다 앞서 1892년 그의 신원(伸寃)을 목적으로 수천 명의 동학도(東學徒)가 참례(參禮)에 모여 집회를 열었고, 이 집회가 갑오년 농민전쟁의 한 계기로 작용하였다.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은 1861년 동학교도(東學敎徒)가 되었고 1863년 최제우(崔濟愚)의 후임으로 제 2대 교주(敎主)가 되었다. 1864년 정부의 탄압으로 최제우(崔濟愚)가 처형되자 태백산에 은신했다가, 그 후 관헌(官憲)의 눈을 피해 각 지방을 전전하며 포교(布敎)에 힘썼다. 그 후 ‘동경대전(東京大典)’을 간행했고, 이어 ‘용담유사(龍潭遺詞)’를 발간하는 등 경전(經典)을 완성했다.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으로 정국이 소란하여 동학(東學)에 대한 정부의 탄압이 완화되자 조직강화에 힘써 육임제(六任制)를 확립하고 전국에 육임소(六任所)를 설치하여 종교(宗敎)로서의 면목을 일신했다.
이어 각도(各道)의 동학대표자(東學代表者)들을 집합하여 탐관오리 숙청ㆍ종교(宗敎)의 자유(自由)ㆍ교주(敎主)의 신원(伸寃) 등을 주장하며, 왕에게 직접 상소를 올렸으나 시행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대대적인 시위를 감행하려 했다. 이에 당황한 조정(朝廷)으로부터 파견된 선무사(宣撫使) 어윤중(魚允中)과 면담하여 선처를 약속받고, 우선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 조병식(趙秉式) 등의 탐관이 면직되자 자진 해산했다. 그는 모든 운동에서 일체의 폭력 사용을 엄금하도록 시달했으나, 1894년 고부접주(高阜接主) 최진준(崔瑧準)이 농민(農民)과 동학도(東學徒)들을 지휘하여 동학혁명(東學革命)을 일으키자 교주로서 그 조정을 위해 각지의 접주(接主)들에게 총궐기를 명령하여 10여만의 병력을 인솔하고 관군(官軍)ㆍ일본군(日本軍)ㆍ와 공주(公州)ㆍ장수(長水) 등지에서 싸웠으나 계속 참패하고 청주(淸州)로 피신해 있다가 1898년 원주에서 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사형당했다. 1907년 수운(水雲)과 함께 신원(伸寃)되었다.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은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의 고제(高弟)로서 조선 말기의 거유(巨儒)였고 문도(門徒)가 수천을 헤아렸다. 대원군의 서원(書院) 철폐, 경복궁(景福宮) 중수(重修), 당백전(當百錢)의 발행 등의 정책을 강경한 논조로 탄핵하여 군부(君父)를 논박했다는 죄목으로 제주도(濟州道)에 위리안치(衛籬安置)되었다가 1875년 풀려 나왔다.
이듬해 일본과의 통상(通商)이 논의되자 도끼를 들고 대궐문 앞에 엎드려 5조(條)로 된 격렬한 척사소(斥邪疏)를 올려 조약(條約)체결의 불가(不可)함을 역설하다가 다시 흑산도(黑山島)에 위리안치(衛籬安置)되었다. 1879년 풀려나와 1894년 갑오경장(甲午更張)으로 단발령(斷髮令)이 내리자 이를 극력 반대했고, 1898년(광무(光武) 2년) 궁내부특진관(宮內府特進官)이 되었다.
그 후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ㆍ의정부찬정(議政府贊政)ㆍ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 등의 발령을 모두 사퇴했고, 국내의 대소사건(大小事件)이 있을 때마다 죽음을 무릅쓰고 상소하여 배일(排日)과 매국역신(賣國逆臣)의 토멸을 강력히 주장하여 여러 차례 체포ㆍ구금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제자인 임병찬(林秉贊) 등 80여 명과 함께 의병을 모집, 전라도 순창에서 약4백명의 의병을 이끌고 관군(官軍)ㆍ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웠으나, 패전한 뒤 체포되어 대마도(對馬島)에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지급되는 음식물을 “내 늙은 몸으로 어이 원수의 밥을 먹고 더 살겠느냐”며 거절하고 단식 끝에 죽었다. 1962년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大韓民國建國功勞勳章) 중장(重章)이 수여되었다.
역대 주요 인물
▲신라조
최인곤(崔仁滾)(학자(學者))
최언휘(崔彦撝)(시호(諡號):문영(文英)ㆍ평장사(平章事))
최은함(崔殷含)(원보(元甫))
최승우(崔承祐)(학자(學者))
▲고려조
최승로(崔承老)(시호(諡號):문정(文貞)ㆍ문하시중(門下侍中))
최량(崔亮)(시호(諡號):광빈(匡彬)ㆍ평장사(平章事))
최숙(崔肅)(문하시중(門下侍中))
최항(崔沆)(자(字):내융(內融)ㆍ시호(諡號):절의(節義)ㆍ평장사(平章事))
최원신(崔元信)(호부시랑(戶部侍郞))
최제안(崔齊顔)(시호(諡號):순공(順恭)ㆍ문하시중(門下侍中))
최방언(崔邦彦)(자(字):성언(誠彦)ㆍ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최림(崔琳)(보문각학사(寶文閣學士))
최제(崔堤)(시호(諡號):문밀(文密)ㆍ밀성군(密城君))
최호(崔灝)(학자(學者))
최계훈(崔繼勳)(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최문훈(崔文勳)(문하시중(門下侍中))
최상훈(崔尙勳)(문하시중(門下侍中))
최여해(崔汝諧)(시호(諡號):문정(文貞)
최애(崔藹)(판도판서(版圖判書))
최백륜(崔伯倫)(민부의랑(民部議郞))
최광위(崔光位)(시호(諡號):충렬(忠烈)ㆍ상장군(上將軍))
최현우(崔玄祐)(호(號):화숙(和淑)ㆍ문하시중(門下侍中))
최해(崔瀣)(호(號):언명공(彦明公)ㆍ號:졸옹(拙翁)ㆍ대사성(大司成))
최유경(崔有慶)(문하시중(門下侍中))
최강(崔江)(호(號):초은(樵隱)ㆍ판사(判事))
최첨로(崔添老)(호(號):석계(石溪)ㆍ내시령(內侍令))
최이(崔邇)(감무(監務))
최습(崔隰)(찬성사(贊成事))
최?(崔阝奐 )(형부상서(刑部尙書))
최주(崔周)(판전의사사(判典儀寺事))
최계운(崔繼雲)(전교서령(典校書令))
최서운(崔瑞雲)(판위사사(判衛寺事))
최경운(崔慶雲)(삼사좌윤(三司左尹))
최청(崔淸)(자(字):직재(直哉)ㆍ호(號):관가정(觀稼亭)ㆍ감무(監務))
▲조선조
최청(崔淸)(호(號):관가정(觀稼亭)ㆍ검교정승(檢校政丞))
최단(崔鄲)(병조판서(兵曹判書))
최예(崔汭)(사성(司成))
최유?(崔有忄崇 )(정언(正言))
최효손(崔孝孫)(대사간(大司諫))
최중제(崔仲濟)(사인(舍人))
최문손(崔文孫)(대사간(大司諫))
최한경(崔漢卿)(자(字):언보(彦輔)ㆍ이조판서(吏曹判書))
최정(崔釘)(정자(正字))
최진(崔鎭)(감찰(監察))
최아(崔涐)(전적(典籍))
최경지(崔敬止)(자(字):화보(和甫)ㆍ부제학(副提學))
최관(崔灌)(자(字):관지(灌之)ㆍ관찰사(觀察使))
최향한(崔享漢)(학자(學者))
최숙생(崔淑生)(자(字)자진(子眞)ㆍ호(號):충재(盅齋)ㆍ시호(諡號):문정(文貞)ㆍ우찬성(右贊成))
최한홍(崔漢洪)(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최운(崔雲)(자(字):자룡(子龍)ㆍ사도사정(司導寺正))
최경홍(崔景弘)(자(字):의옹(毅翁)ㆍ승문정자(承文殺?)
최한희(崔漢禧)(군수(郡守))
최송년(崔松年)(자(字):자교(子喬)ㆍ현감(縣監))
최호(崔湖)(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최응허(崔應虛)(자(字):공진(拱辰)ㆍ형조참의(刑曹參議))
최중복(崔仲福)(자(字):겸오(兼五)ㆍ공신(功臣))
최동보(崔東輔)(자(子):자익(子翼)ㆍ호(號):우락재(憂樂齋)ㆍ의병장(義兵將))
최봉천(崔奉天)(의병장(義兵將))
최계(崔誡)(자(字):사훈(士訓)ㆍ호(號):태동(苔洞)ㆍ의병장(義兵將))
최진립(崔震立)(자(字):사건(士建)ㆍ호(號):잠와(潛窩)ㆍ시호(諡號):정무(貞武)ㆍ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최인(崔認)(의병장(義兵將))
최헌상(崔獻祥)(선전관(宣傳官))
최몽량(崔夢亮)(자(字):계명(啓明)ㆍ시호(諡號):충의(忠毅)ㆍ판관(判官))
최동집(崔東山集 )(대군사부(大君師傅))
최시환(崔時煥)(자(字):문약(文若)ㆍ찰방(察訪))
최시우(崔時遇)(향숙(享叔)ㆍ부사(府使))
최진남(崔鎭南)(자(字):자중(子重)ㆍ목사(牧使))
최준이(崔峻履)(오위장(五衛將))
최상익(崔尙翼)(자(字):성백(成伯)ㆍ관찰사(觀察使))
최중태(崔重泰)(자(字):중여(重如)ㆍ승지(承旨))
최경식(崔慶湜)(자(字):여선(汝善)ㆍ부사(府使))
최명상(崔命相)(자(字):자량(子良)ㆍ부사(府使))
최남두(崔南斗)(학자(學者))
최경로(崔慶老)(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최진하(崔鎭夏)(지평(持平))
최유태(崔裕泰)(군수(郡守))
최흥원(崔興遠)(자(字):태초(太初)ㆍ호(號):칠계(漆溪)ㆍ학자(學者))
최림(崔琳)(자(字):찬부(贊夫)ㆍ호(號):외와집(畏窩集))
최진(崔鎭)(한성판윤(漢城判尹))
최유윤(崔惟允)(학자(學者))
최제우(崔濟愚)(수운(水雲)ㆍ동학창시자(東學創始者)
최시형(崔時亨)(호(號):해월(海月)ㆍ동학2세교주(東學二世敎主)
최익현(崔益鉉)(자(字):찬겸(贊謙)ㆍ호(號):면암(勉庵)ㆍ학자(學者))
등과(登科)ㆍ음사(蔭仕) 인명(人名)
▲고려조
문과(文科)
최량(崔亮)(광종조)
최항(崔沆)(성종조)
최원택(崔元宅)(성종조)
최유부(崔有孚)(성종조)
최함일(崔咸一)(충렬왕조)
최백륜(崔伯倫)(충렬왕조)
최식(崔寔)(공민왕조)
최식(崔湜)(우왕조)
▲조선조
문과(文科)
최예(崔汭)(사성(司成)) 최맹제(崔孟濟)(대간(大諫))
최중준(崔仲濬)(사인(舍人)) 최계제(崔季濟)(감사(監司)
최홍재(崔弘宰)(대사헌(大司憲)) 최연지(崔淵止)(군수(郡守))
최성한(崔星漢)(목사(牧使)) 최유?(崔有忄崇 )(필선(弼善))
최문손(崔文孫)(사간(司諫)) 최효손(崔孝孫)(사간(司諫))
최한경(崔漢卿)(감사(監司)) 최진(崔鎭)(감찰(監察))
최정(崔釘)(병좌(兵佐)) 최경손(崔敬孫)(사간(司諫))
최관(崔灌)(전백(全伯)) 최융(崔瀜)(현령(縣令))
최형한(崔亨漢)(장령(掌令) 최숙생(崔淑生)(찬성(贊成))
최경홍(崔景弘)(승지(承旨)) 최송년(崔松年)(현감(縣監))
최덕중(崔德重)(판관(判官)) 최응허(崔應虛)(형판(刑判))
최몽량(崔夢亮)(병좌(兵佐)) 최시환(崔時煥)(찰방(察訪))
최시우(崔時遇)(부사(府使)) 최진남(崔鎭南)(목사(牧使))
최남익(崔南翼)(충백(忠伯)) 최중태(崔重泰)(강백(江伯))
최경식(崔慶湜)(장령(掌令)) 최명상(崔命相)(참의(參議))
최진하(崔鎭夏)(도정(都正)) 최벽(崔璧) 최계운(崔啓運)
최인간(崔仁簡) 최도빈(崔道彬) 최정진(崔廷鎭)
최문회(崔文會)(군수(郡守)) 최학승(崔鶴昇)(지평(持平))
최덕명(崔德明)(지평(持平)) 최익현(崔益鉉)(판서(判書))
최익서(崔翼瑞)(장령(掌令)) 최응각(崔應珏)(지평(持平))
최용삼(崔龍三)(지평(持平)) 최인휴(崔麟休)(지평(持平))
무과(武科)
최광윤(崔光胤)(현감(縣監)) 최윤옥(崔潤玉)(부사(府使))
최인석(崔寅錫)(경력(經歷)) 최종수(崔宗秀(봉사(奉事))
최종필(崔宗泌)(우후(虞侯)) 최성준(崔成峻)(목사(牧使))
최유태(崔裕泰)(군수(郡守)) 최성묵(崔成黙)(부사정(副司正))
최홍립(崔弘立)(직장(直長)) 최의립(崔懿立)(첨정(僉正))
최두빈(崔斗彬)(직장(直長)) 최명수(崔命守)(선전(宣傳))
최순일(崔舜逸)(주부(主簿)) 최한정(崔漢禎)(형조판서겸지의금부사(刑曹判書兼知義禁府使))
최란(崔鸞)(절형장군(折衡將軍)) 최봉직(崔奉直)(통정대부춘추편수관(通政大夫春秋編修官))
최항석(崔項石)(절형장군첨지중추부사(折衡將軍僉知中樞府事))
음사인명(蔭仕人名)
최치원(崔致遠)(당건부원년갑오등과(唐乾符元年甲午登科)ㆍ시호(諡號):문창(文昌))
최광위(崔光位)(첨의정승(僉議政丞)ㆍ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ㆍ시호(諡號):충렬(忠烈))
최종포(崔宗浦)(판삼사(判三事)ㆍ월성군(月城君)) 최일(崔逸)(정승판선부사(政丞判選府事))
최재연(崔再延)(비서감(秘書監)) 최석기(崔石琪)(봉선대부(奉善大夫))
최영열(崔英烈)(봉선대부(奉善大夫)) 최안립(崔安立)(낭장(郎將))
최로(崔潞)(수의교위중령낭장(修義校尉中領郎將)ㆍ고려절의(高麗節義))
최맹제(崔孟濟)(현문(見文)) 최영함(崔永涵)(주부(主簿))
최성한(崔星漢)(현문(見文)) 최언성(崔彦聖)(진사(進士))
최경윤(崔慶胤)(목사(牧使)) 최숙정(崔淑貞)(선교랑(宣敎郞))
최빈(崔贇)(집의(執義)) 최해(崔海)(훈도(訓導))
최천수(崔天授)(봉사(奉事)) 최홍석(崔洪錫)(무선전(武宣傳))
최중제(崔仲濟)(현문(見文)) 최영원(崔永源)(생원(生員))
최운한(崔雲漢)(생원(生員)) 최군설(崔君氵悉 )(생원(生員))
최대윤(崔大胤)(현령(縣令)) 최종수(崔宗秀)(현무(見武))
최종직(崔宗直)(사직(司直)) 최석창(崔碩昌)(통정(通政))
최도징(崔道徵)(동추(同樞)) 최혼(崔混)(병참(兵站))
최종복(崔宗復)(도정(都正)) 최안순(崔安淳)(가선(嘉善))
최창순(崔昶淳)(증참의(贈參議)) 최상돈(崔相暾)(참봉(參奉))
최상우(崔相祐)(도사(都事)) 최상권(崔相權)(통정(通政))
최경환(崔璟煥)(병참(兵站)) 최기남(崔基南)(교관(敎官))
최언?(崔彦氵悉 )(생원(生員)) 최창윤(崔昌胤)(교위(校尉))
최경윤(崔景胤)(교위(校尉)) 최경윤(崔景胤)(생원(生員))
최광윤(崔光胤)(현무(見武)) 최종호(崔宗灝)(주부(主簿))
최홍립(崔弘立)(현무(見武)) 최급(崔岌)(가선(嘉善))
최언후(崔彦垕)(생원(生員)) 최의립(崔懿立)(현무(見武))
최업(崔嶪)(진사(進士)) 최효원(崔孝源)(통정(通政))
최후영(崔厚永)(판관(判官)) 최두빈(崔斗彬)(현무(見武))
최희수(崔禧守)(부장(部將)) 최양수(崔養守)(진사(進士))
최명수(崔命守)(현무(見武)) 최청한(崔淸漢)(생원(生員))
최당(崔溏)(사용(司勇)) 최종연(崔宗演)(증가선(贈嘉善))
최익효(崔益孝)(증참의(贈參議)) 최호상(崔好相)(증승지(贈承旨))
최규두(崔奎斗)(증호참(贈戶參)) 최행문(崔行文)(증참판(贈參判))
최형한(崔亨漢)(현문(見文)) 최언충(崔彦漴)(증가선(贈嘉善))
최송년(崔松年)(현문(見文)) 최승길(崔升吉)(판관(判官))
최석효(崔錫孝)(증복정(贈僕正)) 최원징(崔遠徵)(증참찬관(贈參贊官))
최숙(崔潚)(생원(生員)) 최옥(崔沃)(생원(生員))
최락(崔洛)(생원(生員)) 최종창(崔宗昌)(수동추(壽同樞))
최익(崔瀷)(진사(進士)) 최진하(崔鎭夏)(현문(見文))
최명순(崔明淳)(부호군(副護軍)) 최윤한(崔允澣)(가선(嘉善))
최찬지(崔瓚之)(통정(通政)) 최종악(崔宗岳)(증군자감(贈軍資監))
최창지(崔昌之)(증호의(贈戶議)) 최우순(崔隅淳)(증좌윤(贈左尹))
최익문(崔益汶)(도정(都正)) 최봉환(崔鳳煥)(감찰(監察))
최한준(崔翰俊)(첨사(僉使)) 최상정(崔相貞)(증공판(贈工判))
최종운(崔宗運)(증군자정(贈軍資正)) 최망지(崔望之)(증참의(贈參議))
최정순(崔廷淳)(증좌윤(贈左尹)) 최익홍(崔益鴻)(증동지(贈同知))
최은환(崔殷煥)(주부(主簿)) 최종영(崔宗永)(증좌윤(贈左尹))
최혁지(崔赫之)(중추사(中樞事)) 최유환(崔有煥)(감찰(監察))
최언홍(崔彦泓)(진사(進士)) 최백년(崔栢年)(부장(部將))
최춘년(崔椿年)(교관(敎官)) 최운익(崔雲翼)(진도(進都))
최효기(崔孝起)(동중추(同中樞)) 최운연(崔雲連)(참봉(參奉))
최종인(崔宗仁)(부호군(副護軍)) 최종태(崔宗泰)(공참(工參))
최일지(崔日之)(부호군(副護軍)) 최채지(崔采之)(증승지(贈承旨))
최근(崔根)(도정(都正)) 최성환(崔成煥)(감찰(監察))
최기림(崔基林)(교관(敎官)) 최해(崔海)(집의(執義))
최원매(崔遠梅)(봉사(奉事)) 최순동(崔舜東)(진사(進士))
최선길(崔善吉)(참판(參判)) 최대립(崔大立)(교관(敎官))
최정명(崔政命)(통례(通例)) 최중길(崔仲吉)(참봉(參奉))
최천립(崔天立)(부호군(副護軍)) 최석원(崔碩元)(진사(進士))
최창빈(崔昌彬)(증참판(贈參判)) 최연순(崔鍊淳)(참찬(參贊))
최주(崔柱)(증비승(贈秘丞)) 최공환(崔公煥)(비서승(秘書丞))
최기홍(崔基烘)(의관(議官)) 최재숙(崔在淑)(참봉(參奉))
최재림(崔在琳)(주사(主事)) 최기종(崔基宗)(의관(議官))
최언충(崔彦冲)(진사(進士)) 최응기(崔應期)(참봉(參奉))
최우길(崔禹吉)(군자정(軍資正)) 최석단(崔碩玬)(판사(判事))
최순재(崔舜載)(부호군(副護軍)) 최진(崔溱)(중추사(中樞使))
최종주(崔宗周)(장사랑(將仕郞)) 최순일(崔舜逸)(현무(見武))
최종정(崔宗廷)(가선(嘉善)) 최덕지(崔德之)(동추(同樞))
최이환(崔二煥)(참봉(參奉)) 최경우(崔慶祐)(증승지(贈承旨))
최홍률(崔弘律)(증참의(贈參議)) 최함상(崔咸祥)(증참판(贈參判))
최유필(崔有弼)(동추(同樞)) 최심경(崔審慶)(군수(郡守))
최문회(崔文會)(현문(見文)) 최석돈(崔碩崸)(통정(通政))
최애(崔藹)(판도판서(版圖判書))
최현우(崔玄祐)(시중(侍中)ㆍ시호(諡號):화숙(和肅))
최현(崔顯)(문하찬성(門下贊成)) 최계운(崔繼雲)(전교서(典校書))
최서운(崔瑞雲)(판서(判書)) 최이(崔邇)(지중(知中))
최유온(崔有溫)(이참(吏參)) 최윤옥(崔潤玉)(현무(見武))
최관(崔灌)(현문(見文)) 최수준(崔秀俊)(군수(郡守))
최언박(崔彦博)(직장(直長)) 최언국(崔彦國)(주부(主簿))
최원(崔山宛 )(증이판(贈吏判)) 최응허(崔應虛)(현문(見文))
최경한(崔慶漢)(직장(直長)) 최인석(崔寅錫)(현무(見武))
최유태(崔裕泰)(현무(見武)) 최성묵(崔成黙)(현무(見武))
최광조(崔光肇)(증비서승(贈秘書丞)) 최극명(崔克明)(사마(司馬))
최극경(崔克敬)(증참찬(贈參贊)) 최대(崔岱)(증참정(贈參政))
최익현(崔益鉉)(현문(見文)) 최영조(崔永祚)(참봉(參奉))
최영설(崔永卨)(사마(司馬)) 최유공(崔有恭)(참판(參判))
최형손(崔亨孫)(월은군(月恩君)) 최한홍(崔漢洪)(계림군(鷄林君))
최칙(崔淔)(사직(司直)) 최재영(崔在榮)(참판(參判))
최지선(崔志善)(도사(都事)) 최상인(崔相仁)(군수(郡守))
최규안(崔奎安)(현감(縣監)) 최탁(崔濯)(통덕랑(通德郞))
최연립(崔連立)(가선(嘉善)) 최시남(崔時南)(통정(通政))
최유철(崔有喆)(통정(通政)) 최전수(崔典洙)(감찰(監察))
최상신(崔相臣)(증승지(贈承旨)) 최병한(崔炳翰)(증참판(贈參判))
최형기(崔逈基)(참봉(參奉)) 최탁기(崔鐸基)(참봉(參奉))
최한경(崔漢卿)(현문(見文)) 최명중(崔明重)(참봉(參奉))
최현진(崔玄進)(좌윤(左尹)) 최탁(崔倬)(계림군(鷄林君))
최송무(崔松茂)(문과(文科)) 최수안(崔守安)(사록(司錄))
최윤겸(崔允謙)(참군(參軍)) 최봉룡(崔鳳龍)(평장사(平章事))
최협(崔浹)(평장사(平章事)) 최파(崔坡)(참봉(參奉))
최협(崔浹)(판관(判官)) 최세보(崔世寶)(진사(進士))
최열(崔烈)(판관(判官)) 최홍준(崔弘峻)(첨정(僉正))
최경호(崔敬浩)(참판(參判)) 최택원(최澤元)(증주부(贈主簿))
최계두(崔啓斗)(증참의(贈參議)) 최의호(崔義浩)(증참판(贈參判))
최상권(崔祥權)(대호군(大護軍)) 최택주(崔澤柱)(증감찰(贈監察))
최영두(崔永斗)(증승지(贈承旨)) 최대호(崔大浩)(증참판(贈參判))
최맹권(崔孟權)(동중추(同中樞)) 최백권(崔百權)(참판(參判))
최경갑(崔敬甲)(증참의(贈參議)) 최택달(崔宅達)(증승지(贈承旨))
최명두(崔明斗)(증참판(贈參判)) 최영호(崔永浩)(동중추(同中樞))
최천보(崔天寶)(현감(縣監)) 최현대(崔顯大)(진사(進士))
최제(崔堤)(합문지후(閤門祗候)ㆍ밀성군(密城君)ㆍ시호(諡號):문밀(文密))
최함대(崔咸大)(사성(司成)) 최홍기(崔弘起)(병판(兵判))
최종식(崔宗式)(직장(直長)) 최학령(崔學齡)(생원(生員))
최항렬(崔恒烈)(부사(府使)) 최각(崔珏)(통덕랑(通德郞))
최경(崔競)(수사(水使)) 최급(崔岌)(정랑(正郞))
최가헌(崔可巘)(진사(進士)) 최흥의(崔興義)(영중추(領中樞))
최중복(崔仲福)(첨정(僉正)) 최기륜(崔起崙)(통덕랑(通德郞))
최계남(崔戒男)(부사(府使)) 최세한(崔世翰)(증참의(贈參議))
최후경(崔侯慶)(증감찰(贈監察)) 최봉의(崔鳳儀)(참판(參判))
최영섭(崔榮涉)(참봉(參奉)) 최현륜(崔玄崙)(직장(直長))
최응상(崔應相)(통덕랑(通德郞)) 최진구(崔進龜)(감정(監正))
최만길(崔萬吉)(참의(參議)) 최태륜(崔泰倫)(좌윤(左尹))
최한적(崔漢迪)(동중추(同中樞)) 최창성(崔昌聖)(동지(同知))
최명영(崔溟榮)(첨중추(僉中樞)) 최덕효(崔德孝)(통훈(通訓))
최재홍(崔在泓)(증승지(贈承旨)) 최봉현(崔鳳鉉)(증공의(贈工議))
최종현(崔宗鉉)(증승지(贈承旨)) 최순각(崔淳恪)(증호판(贈戶判))
최휘동(崔暉東)(참봉(參奉)) 최정길(崔正吉)(증통훈(贈通訓))
최승륜(崔承倫)(증통정(贈通政)) 최양한(崔良漢)(증호참(贈戶參))
최창기(崔昌基)(동중추(同中樞)) 최현기(崔鉉起)(가선(嘉善))
최진적(崔震迪)(가선(嘉善)) 최종갑(崔宗甲)(정랑(正郞))
최운영(崔運英)(증승지(贈承旨)) 최인후(崔仁厚)(증좌윤(贈左尹))
최신모(崔信模)(가선(嘉善)) 최운묵(崔運黙)(참봉(參奉))
최윤후(崔允厚)(교관(敎官)) 최산(崔山)(정랑(正郞))
최가정(崔可鼎)(참의(參議)) 최귀만(崔貴萬)(참봉(參奉))
최연억(崔連億)(통정(通政)) 최득명(崔得命)(주부(主簿))
최응륜(崔應倫)(사직(司直)) 최운악(崔運嶽)(통덕랑(通德郞))
최호(崔浩)(통사랑(通仕郞)) 최춘준(崔春俊)(참봉(參奉))
최대봉(崔大峰)(가선(嘉善)) 최두흥(崔斗興)(판관(判官))
최두성(崔斗星)(가선(嘉善)) 최순수(崔順守)(참판(參判))
최대서(崔大瑞)(부호군(副護軍)) 최응휘(崔應輝)(가선(嘉善))
최세국(崔世國)(가선(嘉善)) 최종권(崔鍾權)(동추(同樞))
최인수(崔仁洙)(동추(同樞)) 최의수(崔義洙)(참봉(參奉))
최상길(据堂?(감찰(監察)) 최옥환(崔玉煥)(가선(嘉善))
최진환(崔珍煥)(첨추(僉樞)) 최중수(崔重守)(첨추(僉樞))
최길서(崔吉瑞)(통정(通政)) 최식휘(崔寔輝)(참봉(參奉))
최세춘(崔世春)(동추(同樞)) 최종행(崔鍾行)(정헌(正憲))
최학수(崔學洙)(참봉(參奉)) 최양휘(崔揚輝)(가선(嘉善))
최세현(崔世賢)(가선(嘉善)) 최종의(崔鍾義)(동추(同樞))
최화수(崔華洙)(동지(同知)) 최세진(崔世進)(감찰(監察))
최종국(崔鍾局(동지(同知)) 최익수(崔益洙)(참봉(參奉))
최세치(崔世治)(통훈창(通訓昌)) 최응기(崔應淇)(동추(同樞))
최순효(崔舜孝)(통정(通政)) 최세영(崔世榮)(사과(司果))
최처대(崔處大)(가선(嘉善)) 최치장(崔治章)(증참판(贈參判))
최계익(崔啓翼)(증승지(贈承旨)) 최시택(崔時宅)(증승지(贈承旨))
최병규(崔秉圭)(증참판(贈參判)) 최진석(崔鎭錫)(통정(通政))
최효언(崔孝彦)(가선(嘉善)) 최성남(崔聖南)(통훈(通訓))
최기생(崔奇生)(증공의(贈工議)) 최봉천(崔鳳天)(증좌윤(贈左尹))
최대호(崔大浩)(동지(同知)) 최관두(崔觀斗)(절형(折衡))
최관일(崔觀一)(통정(通政)) 최희룡(崔喜龍)(참봉(參奉))
최유도(崔有道)(통훈(通訓)) 최병채(崔柄彩)(참봉(參奉))
최현량(崔現良)(절형(折衡)) 최언환(崔彦煥)(오위장(五衛將))
최일환(崔日煥)(무과(武科)) 최기동(崔基東)(증참판(贈參判))
최재진(崔在鎭)(참봉(參奉)) 최식(崔湜)(진사(進士))
최종악(崔宗岳)(감정(監正)) 최종록(崔宗琭)(호군(護軍))
최언지(崔彦之)(증판결(贈判決)) 최원순(崔元淳)(증좌윤(贈左尹))
최동(崔東)(동지(同知)) 최병환(崔丙煥)(도사(都事))
최기봉(崔基鳳)(교관(敎官)) 최진화(崔鎭華)(복정(僕正))
최찬지(崔燦之)(증호의(贈戶議)) 최백승(崔栢承)(증참판(贈參判))
최상곤(崔相坤)(동지(同知)) 최태우(崔泰佑)(가선(嘉善))
최춘기(崔春基)(통정(通政)) 최석룡(崔錫龍)(참봉(參奉))
최한신(崔漢信)(증복정(贈僕正)) 최상종(崔相鍾)(증승지(贈承旨))
최병치(崔炳致)(증호참(贈戶參)) 최남기(崔南基)(오위장(五衛將))
최광순(崔光淳)(증가선(贈嘉善)) 최세환(崔世煥)(참봉(參奉))
최기조(崔基祚)(참봉(參奉)) 최윤순(崔允順 )(계림수(鷄林守))
최선지(崔善之)(도량서사(都梁署史)) 최사직(崔斯直)(중랑장(中郞將))
최종빈(崔宗斌)(추밀사(樞密使)) 최근(崔謹)(증첨의(贈僉議))
최광대(崔光袋)(판서(判書)) 최적(崔勣)(판서(判書))
최백륜(崔伯倫)(의랑(議郞)) 최해(崔瀣)(대사성(大司成))
최지(崔智)(규정(糾正)) 최응로(崔應露)(진사(進士))
최칠수(崔漆修)(현감(縣監)) 최충고(崔忠高)(참봉(參奉))
최반(崔盤)(도사(都事)) 최윤지(崔潤地)(진사(進士))
최계전(崔繼田)(도사(都事) 최한손(崔漢孫)(첨정(僉正))
최대성(崔大晟)(증참의(贈參議)) 최언립(崔彦立)(직장(直長))
최명립(崔名立)(통덕랑(通德郞)) 최후립(崔厚立)(찰방(察訪))
최곤(崔崑)(판관(判官)) 최경달(崔慶達)(통덕랑(通德郞))
최일봉(崔鎰鳳)(동추(同樞)) 최순학(崔順鶴)(감찰(監察))
최한강(崔瀚江)(가선(嘉善)) 최세영(崔世榮)(통례(通禮))
최성영(崔聖榮)(증통훈(贈通訓)) 최창익(崔昌益)(증승지(贈承旨))
최흥필(崔興弼)(증호참(贈戶參)) 최진복(崔鎭福)(동추(同樞))
최창봉(崔昌奉)(증참의(贈參議)) 최사필(崔士弼)(증참판(贈參判))
최진성(崔鎭性)(동추(同樞)) 최진안(崔鎭安)(통정(通政))
최해달(崔海達) 최시도(崔時道)(찰방(察訪))
최진종(崔鎭宗)(감찰(監察)) 최인달(崔仁達)(찰방(察訪))
최여흥(崔麗興)(가선(嘉善)) 최지영(崔之英)(동지(同知))
최계섭(崔啓燮)(참봉(參奉)) 최진학(崔鎭鶴)(참봉(參奉))
최승달(崔昇達)(절형(折衡)) 최성극(崔成剋)(통훈(通訓))
최만웅(崔萬雄)(증비승(贈秘丞)) 최진량(崔鎭亮)(증참판(贈參判))
최도숙(崔度淑)(비승(飛昇)) 최상기(崔相基)(감찰(監察))
최윤희(崔潤喜)(참봉(參奉))
조선조 급제자 정록
예(汭)(태조(太祖) 2년ㆍ춘시(春試)ㆍ진사(進士))
유종(有忄崇 )(태종(太宗) 14년ㆍ친시(親試)ㆍ을과1(乙科一))
효손(孝孫)(태종(太宗) 4년ㆍ친시(親試)ㆍ을과2(乙科二))
문손(文孫)(태종(太宗) 4년ㆍ친시(親試)ㆍ을과3(乙科三))
한경(漢卿)(세종(世宗) 26년ㆍ식년시(式年試)ㆍ병과(丙科))
정(釘)(세종(世宗) 29년ㆍ친시(親試)ㆍ병과(丙科))
경지(敬止)(세조(世祖) 6년ㆍ별시(別試)ㆍ을과1(乙科一))
아(涐)(세조(世祖) 6년ㆍ평양별시(平壤別試)ㆍ을과3(乙科三))
관(灌)(성종(成宗) 5년ㆍ식년시(式年試)ㆍ갑과(甲科))
융(瀜)(성종(成宗) 6년ㆍ친시(親試)ㆍ을과(乙科))
경지(敬止)(성종(成宗) 7년ㆍ중시(重試)ㆍ을과(乙科))
숙생(淑生)(성종(成宗) 24년ㆍ식년시(式年試)ㆍ을과(乙科))
운(雲)(중종(中宗) 16년ㆍ별시(別試)ㆍ병과(丙科))
경홍(景弘)(중종(中宗) 23년ㆍ식년시(式年試)ㆍ병과(丙科))
송년(松年)(명종(明宗) 4년ㆍ식년시(式年試)ㆍ병과(丙科))
응허(應虛)(선조(宣祖) 36년ㆍ식년시(式年試)ㆍ을과(乙科))
몽량(夢亮)(광해(光海) 9년ㆍ알성시(謁聖試)ㆍ병과(丙科))
시환(時煥)(인조(仁祖) 2년ㆍ알성시(謁聖試)ㆍ병과(丙科))
시우(時遇)(인조(仁祖) 8년ㆍ식년시(式年試)ㆍ병과(丙科))
진남(鎭南)(효종(孝宗) 5년ㆍ식년시(式年試)ㆍ병과(丙科))
상익(商翼)(현종(顯宗) 1년ㆍ증광시(增廣試)ㆍ병과(丙科))
중태(重泰)(숙종(肅宗) 12년ㆍ별시(別試)ㆍ병과(丙科))
경식(慶湜)(숙종(肅宗) 25년ㆍ식년시(式年試)ㆍ을과(乙科))
명상(命相)(경종(景宗) 2년ㆍ알성시(謁聖試)ㆍ병과(丙科))
진하(鎭夏)(영조(英祖) 50년ㆍ식년시(式年試)ㆍ병과(丙科))
기겸(起謙)(정조(正祖) 7년ㆍ증광시(增廣試)ㆍ병과(丙科))
벽(璧)(정조(正祖) 7년ㆍ식년시(式年試)ㆍ갑과(甲科))
치익(致翼)(정조(正祖) 14년ㆍ알성시(謁聖試)ㆍ병과(丙科))
계운(啓運)(정조(正祖) 16년ㆍ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인간(仁簡)(정조(正祖) 19년ㆍ식년시(式年試)ㆍ병과(丙科))
정진(廷鎭)(순조(純祖) 3년ㆍ별시(別試)ㆍ병과(丙科))
도빈(道彬)(순조(純祖) 28년ㆍ식년시(式年試)ㆍ병과(丙科))
두석(斗錫)(헌종(憲宗) 3년ㆍ식년시(式年試)ㆍ병과(丙科))
학승(鶴昇)(철종(哲宗) 2년ㆍ정시(庭試)ㆍ을과(乙科))
익현(益鉉)(철종(哲宗) 6년ㆍ정시(庭試)ㆍ병과(丙科))
응각(應珏)(고종(高宗) 3년ㆍ평안도시(平安道試)ㆍ을과(乙科))
덕명(德明)(고종(高宗) 3년ㆍ평안도시(平安道試)ㆍ병과(丙科))
용삼(龍三)(고종(高宗) 19년ㆍ증광시(增廣試)ㆍ병과(丙科))
익서(翼瑞)(고종(高宗) 24년ㆍ정시(庭試)ㆍ병과(丙科))
현필(鉉弼)(고종(高宗) 28년ㆍ정시(庭試)ㆍ병과(丙科))
벌열(閥閱)
공신(功臣) : 최윤(崔潤)(단종조ㆍ계유정난3등공신(癸酉靖難三等功臣))
최한홍(崔漢洪)(중종조ㆍ중종반정2등공신(中宗反正二等功臣))
최연(崔演)(명종조ㆍ위사3등공신(衛社三等功臣))
최언순(崔彦恂)(선조조ㆍ호성3등공신(扈聖三等功臣))
최세준(崔世俊)(선조조ㆍ호성3등공신(扈聖三等功臣))
최응수(崔應水)(인조조ㆍ이괄난토평3등공신(李适亂討平三等功臣))
최산휘(崔山輝)(인조조ㆍ유효립모반적발삼등공신(柳孝立謀叛摘發三等功臣))
호당(湖堂) : 최숙생(崔淑生)(성종조)
청백리(淸白吏) : 최진립(崔震立)(인조조ㆍ공참(工參))
명륜(明倫) : (효행(孝行)) 최동식(崔東植)(고종조ㆍ증교관(贈敎官)ㆍ정려(旌閭)), 최성모(崔聖模)(증좌승지(贈左承旨)), 최겸(崔謙)(명종조ㆍ증부제학(贈副提學)ㆍ정려(旌閭)), 최진규(崔進圭)(증한성좌윤(贈漢城左尹)), 최호주(崔鎬周)(증호조비서승(贈戶曹秘書丞))
(열녀(烈女)) 최씨(崔氏)(김윤세(金允世)의 처ㆍ봉숙부인(封淑夫人)ㆍ정려(旌閭))
출처 중앙일보 성씨의 고향
[출처] 경주최씨(慶州崔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