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 이이는 현실 정치가이면서도 위대한 사상가였다. 자신이 배운 학문을 활용하여 적극적으로 관직에 나가서 민생 안정과 제도 개혁을 위하여 전심으로 노력하였고 은퇴하여서는 후배 양성과 사회 교화에 최선을 다했다.
그는 일찍이 신분 차별의 벽을 해소하려고 애썼으며 남을 공경하는 것을 내 몸 아끼는 것보다 더한 정성으로 대하였다.
처가에서 사준 집을 팔아 가난한 친척을 구휼하였고 얼굴도 알지 못하는 먼 촌수의 여동생이 어려울 때 녹봉을 헐어 도와주었으며 그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상복을 입고 슬퍼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의 착한고 어진 성품은 천성적으로 타고난 것이었으며 감수성이 강하고 순정적인 경향도 있어 어머니 사임당과 외할머니 이씨에 대한 애정은 효성 이상의 것이었다.
이렇듯 극히 인간적인 그였지만 동, 서 파당 대립의 정치 현실에서는 양쪽 모두에게서 의심과 공격을 받는 불행을 당해야만 했다.
지공 무사한 그의 자세가 오해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모호하고 편파적인 것으로 비난받았으며, 일을 끊임없이 찾아서 끝까지 추진하는 그의 업무 수행 태도는 당시의 안일한 조정에서 공연히 없는 일을 만드는 위인으로 비판받기까지 하였다.
그는 이러한 세태 속에서 무엇하나 제대로 되는 일이 없는 것을 항상 한탄하였으며 정치 지도자들이 먼저 바로서야 백성을 제대로 다스릴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백성을 잘 먹인 후에 교육을 시켜야 다스림이 통하는 것이지 배를 주린 후에는 아무 것도 소용이 없다고 하는 민생 치도의 철학을 끊임없이 강조하였다.
일찍이 외적의 침입을 예견하여 10만의 양병을 주장하는 혜안을 보였으나 이 또한 무사안일한 당시 조정의 부족한 인식에 밀려 실현되지 못하였다.
그 후에 전 국토가 외적의 발 아래 짓밟히는 참화를 당한 것을 생각하면 통분을 금치 못할 일이다. 그가 강조한 유비무환의 자세는 비단 당시뿐만 아니라 조선 말에도 해당되었으며 대한민국 건국 초기 미중유의 동족상잔의 비극을 당했던 사실에 비추어서도 국가 지도자들이 항상 귀담아 두어야 할 내용이다.
그는 자기의 생각을 남에게 강요하기보다 스스로 솔선 수범하는 실천 철학자였으며 그 과정을 통하여 세상에 참된 도가 실행되기를 바랐던 민족의 스승이었다.
총명한 어린 시절
율곡 이이는 조선 11대 왕인 중종 31년(1536년) 강릉부 북평촌에서 태어났다. 자는 숙헌이고, 호는 한때 기거하였던 파주 지방의 지명을 따서 율곡이라고 하였다.
지금의 오죽헌이라고 불리는 외갓집에서 태어난 그는 6살 때 본가인 한성 수진방(현 수성동)으로 오기까지 그곳에서 자랐다. 그의 어머니 신사임당이 율곡을 낳던 날 태몽을 꾸었는데 검은 용이 바다에서 날아와 침실쪽 마루 천장에 서리는 것이었다. 잠에서 깨고 얼마 후 그가 태어났다고 해서 어릴 적 이름을 현룡이라고 하였고, 그때의 산실을 지금에 와서도 몽룡실이라고 부른다.
이라는 이름은 율곡이 11살 때 아버지가 큰 병을 앓던 중 꿈을 꾸었는데 백발 노인이 율곡을 가리키며 "이 아이는 동국의 대유이니 이름을 구슬 옥변에 귀 이(珥)자를 붙여 짓도록 하라"고 현몽하여 개명하게 되었다고 한다.
율곡의 본관은 덕수 이씨로서 고려 때 중랑상을 지낸 이돈수를 그 시조로 한다. 율곡의 집안은 조선조에 들어서도 계속 관직에 종사하던 명문가였으나 그의 아버지 이원수는 율곡 출생 당시 아직 벼슬길에 나가지 못했던 평범한 서생이었다.
율곡이 태어난 외가는 마당에 검은 대나무가 무성하게 자라나는 대갓집으로서 세종 때 이조참판을 지낸 최치운이 건축한 것이었다. 그의 아들 최응현대에 화서 사위인 이사온에게 물려주었는데, 이사온도 사위인 신명화에게 상속하였고, 신명화도 아들이 없자 맏사위인 권화에게 물려주었다. 권화대에 와서 아들인 권처균에게 상속하였고, 그에 의해 당호가 오늘날 전해지는 대로 오죽헌이라 명명되었다.
신명화가 율곡의 외조부이고 권화가 이모부이며 권처균이 이종 사촌이다. 외조부 신명화는 율곡의 양친이 결혼하던 해에 세상을 하직하여 그는 외조모 이씨의 사랑 속에 어린 시절을 보냈다.
율곡의 어머니 형제들은 아들이 없고 딸만 다섯이었는데 그 부모들은 총명한 둘째 딸 사임당을 특히 사랑했고, 이에 따라 율곡에 대한 애정도 남달랐다. 천성적으로 효성이 지극하였던 어머니를 닮아 율곡도 이 외할머니에 대한 효심이 깊어 이조좌랑 시절에는 할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는 사직하고 강릉으로 달려갈 정도였다.
율곡의 총명함 또한 어려서부터 남다른 데가 있었다. 3살 때 외조모 이씨가 석류 열매를 보이며 "무엇 같으냐?"고 묻자 옛 시를 인용하여 "부서진 빨간 구슬을 껍질이 싸고 있네(石榴皮囊碎紅珠)"라고 대답하여 감탄케 하였다. 겨우 말할 나이에 이미 글까지 깨우쳤던 것이다.
4살 때는 사략의 첫 권을 배우면서 스승이 구두점을 잘못 붙인 것을 찾아낼 정도로 영특하였다.
7살 때는 이웃에 사는 인물을 평하는 진복창전을 지었는데, 그를 소인으로 치부하면서 장차 큰 화를 일으킬 사람으로 지목하였다. 과연 진복창은 을사사화 때 갖은 악행을 저질렀다. 율곡의 예언이 그대로 적중된 셈이니 어릴 때부터 그의 뛰어난 안목은 가히 놀랍다고 할 뿐이다.
8살 때는 파주의 임진강변에 있는 화석정을 두고 시를 지었는데 그 형식이나 내용에 있어서 훌륭하기 그지없었고 10살 때 지은 경포대부는 마치 인생을 달관한 사람의 작품으로 생각될 정도였다.
13살인 명종 3년(1548년)에는 소과인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어린 나이에도 과거만을 위하여 학문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이 생각은 그의 일생에 걸친 신조이기도 하였다.
구도(求道)의 금강산行
16살 되던 해 여름에 가장 존경하던 어머니 사임당이 별세하자 그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그때 조운 업무를 담당하던 아버지가 관서지방으로 출장을 가게 되자 세상의 견문도 넓힐 겸해서 12살 손위인 맏형 선과 함께 따라갔는데, 그들이 돌아오는 도중에 사임당은 기다리지 못하고 48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다. 사임당이 마지막 숨을 멈추던 그 시각에 율곡 일행은 서강 나루에 와 있었다 하니 지척에 있으면서 사랑하는 어머니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한 그의 한스러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파주 선산에 어머니를 묻고 3년 동안의 시묘살이를 마친 후에도 율곡은 인생의 허무함을 지울 수가 없었다. 생과 사를 포함하여 인생의 모든 일이 부질없는 듯했고 아무리 생각하여도 뜬구름 같은 삶의 의미를 찾을 길 없었던 젊은 율곡은 어느 날 봉은사에서 불교 서적을 읽다가 돈오의 구절에서 섬광 같은 깨우침을 얻게 되었다.
돈오법은 참선을 통해 진리를 한순간에 깨닫게 된다는 불교 사상으로 이것이 그 동안 고민해 왔던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궁극적인 방법으로 느껴졌다.
사실 율곡은 그의 아버지가 불경을 좋아해서 어려서부터 자연히 불경을 많이 접했는데 특히 어렵다는 능엄경을 가장 좋아했다 한다. 어려서부터 불교를 접할 수 있는 환경에서 자라온 데다가 어머니를 잃은 허무한 마음을 달래려고 절을 자주 찾았는데, 죽은 자의 영혼을 천복할 수 있다는 가르침에서 불교에 더욱 마음이 끌렸던 것 같다. 그리하여 율곡은 19살이 되던 해 봄에 뜻을 세우고 금강산에 들어가서 불교의 진리를 구하는 길에 매달려 보기로 작정하였다.
익히 알다시피 조선은 억불정책에 의하여 선비라도 한번 불교에 귀의하면 관직으로는 영영 길이 막혀 버리던 사회였다. 따라서 웬만한 결단이 아니고는 엄두도 내지 못할 행동을 율곡은 실행하였던 셈이다.
주위의 놀라움과 만류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명리에는 이미 관심이 없었던 율곡은 오로지 참된 진리를 찾아 끝내 금강산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금강산의 마하연에 있는 참선 도장을 찾아간 그는 일체의 세속적인 관심을 끊고 진리 탐구에만 정진하였다. 사실 이 금강산행은 불교에 완전히 귀의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떠나기 전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타고난 기를 잘 길러서 도리를 깨우치고 다만 우매하고 광망스럽게 되지 않기 위함"이라고 하면서 "공자께서 슬기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고 하여서 기를 기르기 위해 산수를 찾아가는 것일 뿐"이라고 적은 것을 보면 불교에 완전히 귀의하기 위해 금강산행을 단행한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로서는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인생의 허무함으로 인한 답답하고 괴로운 심정을 털어 버리고 대자연의 웅혼한 기상을 받아들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한 그의 심정은 입산하면서 지은 '동문을 나서면서' 라는 시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불교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를 가지고 호연지기를 기르기 위해 찾았던 금강산이지만 불교에서 가르치는 방법으로는 도무지 진리를 깨우칠 수 없다고 판단되자 1년만에 모든 것을 정리하고 하산하였다.
불교에 회의를 가진 이유에 대해 율곡이 훗날 술회하기를 "돈오법에 이끌려 모든 것이 하나로 돌아간다라는 불교의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 것을 말하는가라는 문제에 집착하여 생각을 거듭해 보았으나 아무 성과가 없었다. 따라서 그러한 것을 수행의 방법으로 하는 불교도 허망할 뿐이다."라고 하였다.
또 "불교에서 생각을 더하지도 덜하지도 말라고 경계함은 무슨 까닭일까에 대하여도 침식을 잊고 깊이 사색해 보았지만 곧 별다른 기묘한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다만 마음이 함부로 달려나가는 것을 차단시킴으로써 정신을 한 곳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여 극도로 허명한 경지를 만들고자 함에 그 까닭이 있을 뿐이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고 털어놓았다.
또한 "일부러 문제를 제기한 화두라는 것에 가탁시켜 마음의 연마를 하게 하는데 사람들이 이런 방편을 쓰는 것임을 알게 되면 노력을 게을리하여 아무런 소득도 없겠으므로 일종의 속임수를 쓰는 것이라는 생각에 미치자 불교를 버렸다"고 설명하였다.
불교를 신앙으로 삼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렇게 생각될 여지도 있겠지만 문제는 그것보다는 율곡 자신이 근본적으로 유학자이지 불가의 사람이 아니었다는 데에 있었다. 또한 진정한 불교 진리의 탐구를 위해 더 노력해 보려고 하지 않고 1년 만에 하산한 것은 애초부터 율곡의 사고 체계의 저류에 흐르는 기본 정신과 불교 사상은 맞지 않았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아무리 율곡이 천재라고 하더라도 진리를 깨우치는 데 1년이라는 시간은 부족하지 않겠는가?
아무튼 율곡은 불교에 대한 회의가 들자 다시금 유교 서적을 복습하여 "그 깊이의 참됨을 알게 되었다"고 고백하였다. 이 또한 이때에야 비로소 깨달은 바라기보다는 그의 내면적 구조 자체가 이미 유학자일 수밖에 없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율곡으로서는 젊은 날 방황의 시기에 불교의 길로 잠깐 외도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율곡의 성품에 대한 한 단면을 읽을 수 있다. 그가 나중에 성현의 경지에 이르기는 하였지만 이 시기에는 결단성이 빠른 반면 천재들에게 공통적으로 보이는 자기 확신에 기인한 경박함의 일단을 볼 수 있다.
새로운 출발
그가 하산하자 우선 문제가 되었던 것은 그가 산사에 있을 때 과연 석가의 제자를 자처하여 머리를 깎고 중 행색을 하였느냐 하는 점이었다. 당시로서는 삭발을 하였다면 이미 선비로서 자격을 상실한 것으로 치부하여 배척하던 사회였기 때문에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그런데 그는 구도 수행 시절 동안 머리를 전혀 깎지 않고 지냈음이 하산 즉시 만난 많은 인사들에 의해 확인되었다.
그러나 한때 불교에 탐닉했던 그의 태도는 오랫동안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에게서 좋은 공격거리로 활용되었다. 금강산에서 내려온 율곡은 인생의 목표를 정하고 그것을 실천해 나갈 구체적인 방안으로 자경문을 지었는데 일종의 좌우명이었던 자경문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1. 뜻을 크게 가지자. 2. 마음을 안정시키자. 3. 혼자 있는 것을 삼가자. 4. 언제나 할 일을 먼저 생각하자. 5. 일에 닥쳐서는 성의를 다하여야 한다. 6. 옳지 않은 일은 절대 금하자. 7. 자세를 항상 바르게 하자. 8. 방심하거나 서두르지 말자.
자경문의 전체적 내용은 성현을 목표로 뜻을 크게 세운다는 것이 근본이었다. 그는 사람이 인생을 설계하는 데 무엇보다도 입지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였는데 실로 이 입지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 그의 사상이 두드러진 특색이었다.
40살에 지은 성학집요의 제일 앞머리에 입지장이 있고, 42살 때 지은 격몽요결의 첫머리에도 입지장을 두었으며, 47살에 지은 학교모범에서도 16조의 규범 첫 조에서 입지를 강조했다.
율곡은 입지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유를 "뜻이 서지 않으면 만사가 성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으며, 뜻을 세우는 방편에 대해서는 "참되면 뜻이 저절로 서는 법이고 그 뜻을 항상 공경하는 태도를 지녀야 뜻이 사라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하산 후 강릉 외가에서 새로이 학문에 정진한 지 1년이 되던 명종 11년(1556년) 21살의 나이로 한성시에서 장원한 후 그 이듬해 9월에 성주 목사 노경린의 큰딸과 결혼하였다.
이 노씨 부인은 건강하지 못해 율곡과의 사이에 딸 하나를 두었지만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죽었다. 그리고 그 후 끝내 소생이 없었다. 노씨 부인은 현숙한 품성의 여인으로서 살림이 어려운 가운데도 대가족을 소리 없이 이끌어갔다. 그녀는 율곡보다 8년을 더 살았지만 천명을 다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임진왜란 때 주위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피난도 가지 않고 파주 선산에서 평생을 존경하던 남편 율곡의 신주를 끌어안고 버티다가 왜군에게 참혹한 죽임을 당하였기 때문이다.
율곡은 결혼한 이듬해에 그 동안 머물고 있던 성주 처가에서 강릉 외가로 가는 도중에 예안의 계당에 거처하며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던 퇴계 이황을 방문하였다. 58살의 노대가와 23살의 홍안 청년이 2박 3일 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처음 만났으나 이 만남으로 두 천재는 서로를 높이 평가하게 되었다.
그 후 여러 차례 서신 왕래를 통해 학문 토론을 벌이기도 하였고 퇴계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자 율곡은 멀리서나마 스승에 대한 예를 갖추어 슬퍼했다고 한다.
율곡은 그 해 겨울에 한성 별시문과에 참가하여 천도책이라는 글로써 장원 급제하였다. 이 글은 음양이라는 기의 작용으로 천지 조화를 설명한 것으로 율곡의 자연 철학에 대한 근본 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
당시 시험관이었던 정사룡과 양응정은 율곡의 답안을 채점하면서 자기들은 시험 문제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도 여러 날을 고심했건만 이 젊은이는 짧은 시간 내에 이토록 놀라운 내용의 글을 지었다면서 실로 천재의 출현이라고 감탄했다 한다.
이 천도책은 중국에까지 널리 알려져서 율곡이 47살 때 원접사로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게 되었을 때 명사 황홍헌과 왕경민 등의 일행은 율곡에게 선생님이라는 존칭으로 예를 다하였다. 25살 때에는 지야서화를 지어 또 한번 지난날을 반성하고 새로운 각오를 다짐하면서 학문에 계속 정진하였고, 26살 되던 해 5월에는 부친상을 당하여 형제 모두가 함께 파주 선산인 자운산에서 3년간의 시묘살이를 하며 보냈다.
상복을 벗은 이듬해인 명종 19년 7월과 8월에 29살이 된 율곡은 소과와 대과에 연속으로 장원 급제하였다.
율곡이 전후 9차례의 과거에서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하여 당시 장안에서는 구도 장원공이라며 칭송이 대단했다. 그러나 비교적 늦은 나이로 과거에 최종 합격한 셈인데 이는 금강산 구도행각을 전후하여 방황의 시간이 있었던 데다가 부모의 죽음으로 6,7년의 공백기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초기 관직 생활
29살에 승문원 권지로 관직 생활을 시작한 율곡은 호조와 예조의 좌랑을 거쳐 30살에는 언관인 사간원의 정언이 되었다. 사간원에 근무하면서 이듬해 5월에 윤원형과 요승보우의 폐정을 개혁하기 위해 간원진시사소를 왕에게 제출하기도 하였다.
31살에 관리 임용을 주관하는 이조좌랑이 되었다가 선조 원년(1568년)에 33살로 사헌부 지평이 되었다. 그 전해에는 명종이 후사 없이 죽자 왕의 생전에 총애를 받던 하성군(중종의 일곱째 아들인 덕흥군의 셋째 아들)이 보위를 이어받아 16살의 소년왕으로 선조가 등극했다.
그 해 4월에는 장인 노경린이 맏사위인 율곡에게 뒤처리를 의탁하고 죽자 처가 재산을 저서와 남녀의 구별 없이 동등하게 분배하여 신분에 구애받지 않는 진취적 사고의 일단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또 그 해에 명나라 황태자의 생일을 축하하는 천추사의 서장관으로 중국에 다녀왔고, 귀국 후에는 홍문관 부교리 지제교 겸 경영관으로 임명되었다가 이듬해 6월에 홍문관 교리를 제수받았다.
이 시기에 정치의 나아갈 바를 논한 동호문답을 지어 왕에게 봉헌하였지만 조정의 개혁 의지가 부족함에 회의를 느끼고 있던 중에 외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사직을 하고 강릉으로 내려갔다.
35살에 다시 홍문관 교리를 제수받았으나 그 해 10월에 건강이 나빠져서 다시 사직하고 처가인 해주에서 한동안 요양하다가 이듬해 1월에 파주 율곡리로 거주지를 옮겼다. 이 시기에 그는 제대로 되는 것 없는 관직 생활에 심한 회의를 느껴서 그 심정을 서신으로 퇴계와 친구들에게 토로한 적도 있었다.
해주에서 칩거하던 해 12월에는 퇴계의 부음을 접하고 거처하던 내실에 위를 차려놓고 제문을 지어 바친 후에 자신은 소대를 걸치고 외실에서 거처하며 스승에 대한 예를 갖추기도 했었다.
자대의 경향이 강해서 여간해서 남을 대단하게 보지 않던 율곡이었지만 퇴계에게만은 유일하게 존경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36살 때인 선조 4년(1571년) 6월에는 청주 목사로 임명되어 첫 외직에 나가자, 여기에서 서원향약을 만들어 시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건강이 다시 나빠지자 청주 목사 자리도 10여 개월만에 사직하고 율곡리에 돌아와 요양하던 37,38살 어간에도 계속 관직이 제수되었으나 모두 병으로 취임하지 못하다가 38살 7월에 홍문관 직제학으로 다시 관직에 복귀하였다. 이때도 세 차례에 걸쳐 사양하였으나 선조가 끝내 윤허하지 않았으므로 할 수 없이 관직에 돌아오게 된 것이다.
관직에 복귀하고 2개월 후에 승정원 동부승지로 임명되어 왕명의 출납을 맡게 되었으며, 그 이듬해 정월에 우부승지로 승진하여 만언봉사라는 시무와 임금으로서 취할 태도를 밝히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 조정이나 선조는 개혁에 대한 논의만 분분한 채 구체적인 조치도 제대로 실현하지 못하는 우유부단함만을 보여주고 있었다.
율곡 자신도 건강이 좋지 않아 업무가 번잡한 승정원 근무가 힘들어지자 한직에 나가기를 원하여 무임소인 첨지중추부사로 임명되었다가 병조참지를 제수받았다.
그러나 선조는 율곡을 한직에 놔두지 않고 얼마 지나지 않은 그 해 3월에 대사간이라는 중책을 다시 맡겼으나 임명된 다음달에 병으로 사임하고 파주 율곡리로 돌아오고 말았다. 사직하고도 몇 차례 관직을 제수받았지만 모두 사양하자 선조는 율곡의 처가가 있는 황해도 관찰사로 임명하여 외직이라도 관직에 그를 붙잡아 두려고 하였다.
결국 사직한 지 6개월만인 그 해 10월에 방백의 지위로 관직에 다시 나갔으나 병약한 몸으로 지방관의 격무를 견디지 못하여 채 6개월도 임기를 못 채우고 다음해 3월에 또다시 사직할 수밖에 없었다.
선조는 파주로 돌아와 쉬고 있던 율곡에게 다시 부제학을 제수하여 중앙 정계로 들어가서 근무하던 중, 그 해(선조 8년) 9월에는 2년 전부터 집필하였던 성학집요를 탈고하여 왕에게 올렸다.
이 책은 군왕의 도를 체계적으로 상술한 것으로서 후에 경연의 교본으로 쓰였고 성리학에 바판적이던 실학자들에 의해서도 높이 평가된 서책으로써 율곡의 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
그런데 그 시기에 심의겸과 김효원의 대립으로 동, 서 붕당의 조짐이 완연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율곡은 중립적인 입장에서 이를 해소시키려고 노력하였으나 평소 심의겸과 친분이 깊고 심의겸을 지지하는 정철과 윤두수, 윤근수 형제와 가깝게 지내는 사이였으므로 김효원의 동인 계열에서는 그를 서인으로 지목하고 경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율곡은 양쪽을 화해시켜 조정이 갈라지는 것을 막고 나라의 장래를 안정시키려는 일념뿐이었는데 서인 쪽에서도 이를 환영하지 않았다. 확실하게 자기들 편을 들어주지 않는 율곡을 야속하게 생각하였던 것이다.
동, 서 파당의 대립에 대한 율곡의 자세는 양시양비론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에 대해 비판론자들은 "세상일에 양쪽 다 옳기도 하고 그르기도 한 일은 있을 수 없다."며 율곡의 시비는 정확하게 가리지 않고 무조건 원만하게만 하려고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율곡은 백이숙제의 고사를 들어 해명하면서 "양쪽이 모두 선비들이니 화해시키는 것이 옳은 일이지 어느 한쪽만이 맞다 한다면 그 분쟁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이렇듯 정쟁이 심화되는 와중에 율곡은 다시 건강이 나빠지기도 하였고 변덕스러운 선조가 율곡에게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자 마침내 은퇴를 결심하고 41살 되는 해(선조 9년) 2월에 파주로 돌아갔다.
당시 25살이 되었던 청년왕 선조는 자존자대하는 의식이 강하여 직언하는 신하들의 말을 잘 들으려고 하지 않았고, 총명하기는 하였지만 민생의 정치보다는 제왕의 위신을 높이려고만 하는 경향이 많았다. 따라서 강직하고 뜻이 높은 장년층보다 나이 많고 원만한 사람들을 좋아하였다. 왕의 이 같은 자세는 유달리 뜻이 높고 자기 주장이 강한 율곡과 잘 맞지 않았던 것이다.
율곡은 마침내 그 해 10월에 사직을 하고 오래 전부터 마음에 두었던 해주 석담에 청계당을 비롯하여 새 터전을 짓기 시작하였다. 선대의 유적이 있는 파주 율곡리에서 해주로 생활 터전을 옮기려고 한 것이다.
일가동거와 교육을 위한 해주 생활
사직한 이듬해(선조 10년) 정월에 우선 일가가 모여 살림할 수 있는 집이 완성되자, 어려서부터 꿈꾸어 왔던 일가동거의 계획을 실현하기로 하였다.
처음에는 7년 전에 죽은 맏형 선의 유가족을 데리고 와서 형수 곽씨로 하여금 집안 살림을 주관케 하고는 직계 형제 중심으로 모여 살았는데, 점점 가까운 친척 중에서 의지할 데 없는 사람이나 극도로 빈한하여 도와주어야 할 사람들까지 모여들어 나중에는 100여 명에 이르는 대가족이 되었다.
율곡은 동거계사라는 가족 사이에 지켜야 할 준칙을 만들어 이 많은 가족들을 무리 없이 잘 이끌었다.
율곡에게는 서인 출신 계모가 있었는데 변덕스럽고 성깔이 사나워서 평소에도 율곡 형제들에게 많은 시달림을 주었고, 홀로 된 후부터는 심사가 괴로워서인지 새벽에 꼭 해장술을 즐겼다. 이런 계모에게도 율곡은 아침 문안을 드린 후에 손수 술 주전자를 데워 두어 잔 부어 드리고 물러나왔다고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남 대하듯 하지 않고 부모에 대한 도리로 지성껏 모시자 계모도 마음을 바꾸어 온순한 태도를 가지게 되었고, 후에 율곡이 먼저 죽자 정성껏 보살펴준 고마움에 보답할 길이 없다 하여 소복으로 3년을 지냈다고 한다.
맏형수 곽씨도 율곡보다 한 살 아래지만 항상 웃어른으로 공경하였고 둘째 형 번에게도 예의를 다해 섬겼다. 번은 세상사 체면을 가리지 않는 사람으로 동생의 지위가 높아진 뒤에도 주위에 사람이 있건 말건 율곡에게 잔심부름을 시키곤 하였다. 율곡은 추호도 언짢은 기색 없이 형의 시중을 들었는데 이를 지켜본 제자들이 민망하여 말리면, "부형 앞에서 지위가 무슨 상관이며 그 분부를 어찌 다른 사람에게 대신하게 할 수 있겠는가? 무릇 부형 앞에는 지나친 공손이란 없는 것이며 형님이 돌아가신 뒤에는 예를 행하고 싶어도 할 수 없지 않은가?" 하고 반문하였다 한다.
이 둘째 형은 동생이 큰 인물이 될 사람인 줄을 미리 알았는지 율곡이 밖에서 돌아오면 오늘은 어떤 글을 지었는가를 꼭 물어서 그것을 손수 적어 놓아 오늘날까지 율곡의 작품이 많이 전해질 수 있게 하였다.
어쨌든 율곡부터 이렇게 솔선 수범하니 집안은 법도가 확실히 서고 항상 화평하였지만 대가족이 모여 살다 보니 먹고사는 문제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수입이라고 해야 31살 때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파주의 땅에서 나는 소출이 전부였는데, 이것만 가지고는 대가족의 생계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이 시절 율곡은 호구지책으로 대장간을 차리고 농기구를 만들어 팔아서 생계비를 충당했는데, 이런 모습에 대해 훗날 이항복은 자신의 문집에서 "성인은 참으로 매사에 구애를 받지않는다"라고 감탄하기도 했다.
이렇게 형편이 어려운 것을 알게 된 친구 최립이 재령 군수로 있으면서 양식을 보내왔지만 율곡은 받지 않고 돌려보냈다. 주위에서 그 이유를 묻자, "옛 친구의 사사로운 물건이라면 안 받을 리 없겠지만 관곡을 헐어 보낸 것 같아 받을 수가 없었다"고 대답하였다. 율곡은 어려운 처지이면서도 그렇게 항상 엄중하게 처신하였고 아무리 힘들어도 함께 굶을 망정 같이 살던 식구를 절대 내보내지 않았다.
그가 일가에 대해 베푸는 마음은 지극하기 이를 데 없어 먼 친척에 대하여도 늘 관심을 가지고 돌보아주려고 했다. 또한 이웃이나 비복들에게도 항상 예로서 대하였으며, 경조사에는 빠짐없이 참석하여 우애를 도모하였다. 이러한 일가동거에 대한 꿈은 7살 때 이륜행실을 읽게 된 후부터 가지게 된 것이었다.
그 책에서 당나라 시절 장공예가 9세대가 동거하며 살았는데, 당시 황제가 그 비결을 묻자 참을 인자를 100개를 써서 바쳤다는 내용을 읽고 감명을 받아 그때부터 계획한 것이었다. 또 교육홀동을 하면서 격몽요결을 지어서 교습하였고, 향약과 사창을 세워 주민들의 교화에도 적극 노력하였다.
43살 되던 해(선조 11년)에는 은병정사를 세워 이곳을 통해 학문을 가르치면서 많은 인재를 육성해 냈다.
율곡은 강론을 할 때 중요한 부분에 대해서는 분명한 기준으로 설명하였으며, 내용에 대한 분석을 철저히 하였다. 질문이 있으면 머뭇거림 없이 곧바로 답을 주었는데 명쾌하면서도 이치에 틀림이 없었다. 암기보다는 스스로 사색하고 깨우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겼으며, 학문은 일상에 있다는 그의 지론대로 어느 자리에서나 항상 가르침을 베풀고자 하였다. 소학을 무엇보다 먼저 배워야 할 교과목으로 권장하였으며, 이의 효율적인 학습을 위해 소학집주를 만들기도 하였다.
이렇게 41살 2월에 은퇴하여 45살 12월에 대사간으로 다시 출사하기까지 5년 가까운 세월 동안 일가동거의 꿈을 실천하면서 교육과 지역사회에 대한 봉사활동에 주력하며 생활하였다.
그 동안 은퇴해 있던 시기에도 몇 차례 출사의 요청이 있었지만 모두 사양하면서 상소를 올려 동서붕당의 문제점과 이의 타파를 간청했다. 그러나 당파를 없애고 조정을 화해시키려던 율곡의 상소는 도리어 당시의 권력자들에게는 비난만 받았고 왕도 그의 진정을 알아주지 않았다.
45살 되던 해 5월에는 기자실기를 지었는데, 이는 윤두수가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중국 사람들이 조선으로 온 기자의 사저을 물었을 때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 책에서 율곡은 "이 땅에 기자가 들어와 오랑캐를 면하게 되었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그의 모화주의적 일면을 보여 주는 것이다. 사실 율곡으로서는 자신이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주자의 출생지가 중국이기 때문에 그의 이런 태도는 사대주의적 발상이라기보다 학문의 연원에 대한 존경심의 발로로 이해되어야 한다.
은병정사는 율곡이 다시 관직에 나갔을 때에도 폐쇄하지 않고 제자들에 의해 자체적으로 운영되었으며, 율곡도 비록 정사에 바빴으나 제자들에게 서신으로나마 계속적인 지도를 하였다.
마지막 관직 봉사
율곡은 선조 13년(1580년) 12월에 45살의 나이로 다시 대사간에 임명되었다가 이듬해 6월에 대사헌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예문관 제학도 겸임하게 되었다.
그 해 10월에는 호조판서로 잠시 있다가 11월에는 대제학으로 전임되었으며, 다음해(47살)정월에 이조판서를 겸임하면서 많은 새로운 인재를 등용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때에 율곡이 길을 열어준 인물 중에 훗날 영의정이 되는 이덕형과 이항복도 있었다. 이조판서 재직시에는 왕명에 의하여 인심도심설, 김시습전, 학교모범을 짓기도 하였다.
8월에는 형조판서로 전보되었다가 그 후 의정부 우참찬을 거쳐 우찬성까지 승진되면서 왕의 은혜에 보답하고 치도에 도움이 되고자 진시폐소라는 상소를 올렸다.
거기에서 그는 현실 문제를 먼저 지적하였는데, 첫째 풍속이 타락하였고, 둘째 관리가 개인의 이익에만 신경을 쓰며, 셋째 조정이 분열하여 기강이 해이해졌고, 넷째 백성들은 폐단에 시달려 점점 곤궁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의 해결을 위해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자세를 강조하고 세 가지 폐단을 고칠 것을 건의하였다. 즉 공안을 개정하고 아전 수를 줄이며 지방관을 자주 바꾸지 말 것 등이 그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 또한 당시 조정과 왕은 적극적으로 실천할 의지가 없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해 10월에는 명나라 사신을 맞는 원접사로 활동하였는데, 율곡에게 감명받은 명나라 사신들이 돌아가서는 자신들의 조정에 요청하여 조선 사신들의 대접을 더욱 융숭하게 하도록 조치해줄 정도였다고 한다.
원접사의 소임을 마치고 그 해 12월에 병조판서로 임명되었으며, 이듬해 2월에는 국방 대책을 위한 6조계를 올리고 그 유명한 10만 양병론을 주장하여 외침에 대비하자고 건의하였다. 그러나 붕당에 휩싸인 당시 조정에서는 이러한 그의 혜안을 이해하고 찬동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류성룡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중신들도 태평時에 군사를 양성하는 것은 공연히 민심을 불안하게 하여 화를 부르는 것이라고 반대하였다.
그러나 율곡의 예언대로 그로부터 10년도 되지 않은 선조 25년(1592년)에 왜군이 침략하여 전 국토가 토붕의 화를 당했으니 그의 선견이 실행되지 못한 것이 안타깝기 이루 말할 수 없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국방 개혁을 단행하였는데, 몇 가지 예를 들면 서얼 출신과 공사의 노비 중 원하는 자를 북방 수비 병력으로 차출하여 서얼은 관직을 허용하고 노비는 속량하는 방안으로 병력 증강을 도모하였으며, 상번군사를 면하는 조건으로 바치는 속포를 병조의 관리들이 사적으로 나누어 쓰던 것을 북방 병력 군수품으로 전용하게 조치한 것 등이 있다. 또 병사들의 양곡이 부족하자 서얼들이 곡식을 납입하고 관직에 나갈수 있는 길을 열어주어 신분제도의 폐습을 개선하고 군량도 마련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사수 1만여 명을 뽑으면서 3등 이하의 사수에게는 말을 바치고 군역의 임무를 면제해주어 부족한 전마를 충당하였으며, 관리들의 녹봉에서 각출하여 북방 파견 군사들의 가족을 도와주어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기도 하였다.
이렇듯 율곡의 정치 철학은 먼저 조정에서 처신을 올바르게 하여 백성들의 사표가 되어야 하고, 치도의 폐단이 되는 것은 어떠한 것이라도 고쳐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그러한 그의 원칙적 태도는 무사 안일한 자세가 팽배하였던 당시의 조정에서는 적을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또한 동, 서의 대립이 여전한 세파에서 그가 서있을 공간은 점점 좁아지고 있었다.
율곡에 대해 시기하고 미워하던 무리들이 그를 조정에서 몰아낼 기회를 노리고 있었는데, 어느 날 왕의 호출에 격무와 지병으로 인한 현기증 때문에 즉시 응하지 못하자 3사에서 탄핵이 일어났다.
이 기회에 반대파들은 율곡을 완전히 실각시키려고 집요하게 공격하여 결국에는 그 해 6월에 사임을 하고 파주로 내려갔다가 8월에는 해주로 돌아갔다.
그러나 선조는 율곡을 신임하여 그를 비난하던 무리들을 징벌하고, 9월에 판돈령 부사로 다시 부른 후 10월에는 이조판서를 제수하였다. 그렇지만 이때 율곡의 병은 깊어져 49살이 되던 이듬해(선조 17년) 정월부터는 완전히 병석에 눕게 되었다.
율곡은 병석에서도 항상 나라 일을 걱정하였는데 죽기 하루 전에도 서익이 북방을 순찰하는 임무를 받아 떠난다고 하자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육조방략을 만들어 준 후 혼수상태에 빠졌다. 그리고 얼마 후 깨어나서는 손발톱을 자르고 목욕을 하여 단정한 모습으로 한성대사동에서 숨을 거두었다.
49살의 한창 나이에 운명하여 무슨 한이 그토록 깊었던지 이틀 동안이나 눈을 감지 못했다고 한다. 율곡이 죽기 하루 전날 부인 노씨가 흑룡이 침실에서 하늘로 날아가는 꿈을 꾸었다고 하는데, 그는 태어날 때와 마찬가지로 죽을 때에도 가장 가까운 사람의 꿈에 용이 나타나는 기이한 인연을 가졌던 셈이다.
그는 사후에 남긴 유산이 없어 염습에 쓸 수의도 친구들이 추렴하여 준비하였으며, 그가 한성에서 지낼 때는 집을 세내어 지냈기 때문에 유가족들이 거처할 곳이 없자 친구와 제자들이 염출하여 집을 마련해 주기도 하였다.
장지는 선영이 있는 파주 자운산으로 정해졌으며, 발인하던 날에는 일반 백성들까지 슬피 애도하며 마지막 길을 가는 그를 전송하기 위해 길을 가득 메웠다. 사후에 소현서원(은병정사)과 묘소 근처 자운서원에서 제사를 모셨으며 현재까지 겨레의 영원한 스승으로 민족의 가슴에 남아 있다.
이이의 사상과 성품
먼저 율곡의 사상적 기저를 살펴보자.
모든 현상은 기(氣)의 작용으로 발생하는 것이고, 기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하는 근거가 이라는 것이 율곡 사상의 출발이다. 즉 이(理)가 아니면 기는 근거할 곳이 없고, 기가 아니면 이는 의착할 곳이 없다는 뜻이다. 그는 이통기국이라는 표현으로 양자 관계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즉 이는 어디서나 통하는 무소불통한 것이고 기는 형태나 자취를 가진 국한된 상태의 것으로서, 만물의 본연이요 변할 수 없는 이가 본말과 선후가 있는 기에 의하여 형상화되는 연고로 모든 현상계가 천태만상으로 구별되어 나타난다고 설명하였다.
이는 공기와 물 같은 것이고, 기는 그릇 같은 것으로서 공기와 물은 그것을 담는 그릇의 형태에 따라 천변만화로 구획되어질 수 있는 것처럼 이도 변화하지 않는 본연의 것이기는 하지만 성질이 국한되는 기의 존재 때문에 표출될 때는 서로 다른 현상으로 나타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에 의하면 이는 형이상이요 무위한 것이고, 기는 형이하의 것이고 유위한 존재이기 때문에 이는 기를 주재하면서 기를 타고 이가 나타난다고 보았다. 즉 발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기이고, 이는 그것을 탄다고 하는 기발이승도설을 주장하였다.
또 기청명어리라는 말을 사용하여 이의 명령에 대한 기의 청종 여부에 따라 현상의 질적 차이를 설명한다. 기가 이의 명령을 듣는 것을 주리라 하고, 기가 본연이 아니어서 이의 명령을 듣지 않는 상태를 주기라고 하여 전자를 지선으로 보았다.
율곡은 이가 만물의 본연이므로 물론 중요하지만 기에 의하여 국한되고 차별되므로 기의 탁마가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개별적인 규범인 소당연만 알고 만물의 근본 원리인 소이연을 깨닫지 못하면 참된 도에 이르지 못한다고 하여 당시의 교조적 견해를 반대하고 학문의 참된 이치를 탐구하는 자주적인 학풍을 세웠다.
따라서 그는 화담이나 퇴계처럼 재야에 머물러 학문 연구에만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정학일체의 정신에 따라 끊임없이 현실 정치에서의 실천을 추구하였다. 그는 자신의 마음을 가다듬는 공부도 중요하지만 경세제민의 경륜을 실천하는 것이 배운 자의 임무라고 생각한 것이다.
다음으로 율곡의 성품을 알아보자.
앞에서 이미 언급한 대로 그는 효성과 동기간의 우애가 깊고 인정이 많은 인물이었다. 성격도 담백하여 언행의 표리가 항상 일치하였고 심성이 맑고 깨끗하여 일찍이 타인과 밀담을 하거나 소곤거리는 법이 없었다. 광풍제월 같고 청통쇄락하다는 말은 율곡의 인물됨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이다.
다만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는 자기 주장이 강하고 분석적 사고 때문에 모든 사람을 샅샅이 들어 평하기를 좋아했다. 또대담하고 침착한 일면도 있었다. 젊어서 친구인 성혼과 화석정 아래 강에서 밸르 타고 유람할 때 갑자기 바람이 불어 배가 크게 요동쳐 성혼이 걱정하자 율곡은 "우리 같은 사람이 탔는데 무슨 염려가 있겠는가?"하고 태연하였다고 한다. 그만큼 그는 자신에 대하여 강한 신념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 부정하다고 생각되는 일은 철저히 피해갔으나 편벽되지 않은 자세로 융통 자재하는 성품을 가졌다. 이를 알 수 있는 두 가지 일화가 있다. 그 하나는 그의 정갈한 이성관을 증명해 주는 내용이다.
황해도 관찰사 시절에 몸종으로 데리고 있던 유지라는 아이가 평소에 율곡을 흠모하다가 율곡이 떠난 후 숙성하여 관기가 되었는데 율곡이 원접사나 황주에 있는 손위 누이를 만나러 가는 길에 해주를 들렸을 때 율곡을 찾아와 연모의 정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한 방에서 병풍으로 경계를 짓고 촛불을 밝혀둔 채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고 한다. 그리고 유지의 애끓는 마음에 혹여 상처라도 될까봐 다음과 같은 위로의 글을 전해주었다.
문을 닫자 하니 인정을 상할 것이요, 같이 자자 하니 의리를 해칠 것이다.
이렇게 남녀 문제에 깨끗하게 처신한 율곡이었지만 지나치게 결벽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젊은 시절에 친구인 정철이 득남하여 축하잔치를 벌이는 자리에 기생까지 동원하자 고지식한 성혼은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라며 나무랐지만, 율곡은 웃으면서 "검은 먹을 들여도 검어지지 않는 것이 도인 것이다."라고 설득하여 잔치의 흥을 깨지 않았다고 한다.
이처럼 율곡은 곧으면서도 유하고 강하면서도 유하고 강하면서도 부드러웠으며 평생을 자기가 생각한 바를 솔선 수범하며 주변 사람들을 가르친 실천 철학자였다.
栗谷 李珥의 年譜
1536년 12월 26일 새벽 4시 외가(강릉 북평촌-지금의 오죽헌)에서 태어났다. 사임당이 검은 용이 동해 바다에서 침실 쪽으로 날아와 마루 사이에 서려 있는 꿈을 꾸고 낳았다 해서 어릴 적 이름을 현룡(見龍)이라 하였으며, 율곡이 태어난 방을 몽룡실이라 불렀다. 평생의 친구 정철이 태어남 토요토미 히데요시 태어남 1538년(3세) 말을 배우자 곧바로 글을 읽을 줄 알았다. 하루는 외할머니가 석류를 보고 "이것이 무엇과 같으냐?"라고 묻자 "껍질 속에 붉은 구슬이 부서져 있는 것과 같다(石榴皮囊碎紅珠)라고 하였다.
1540년(5세) 사임당이 병중이어서 온 집안이 시름에 잠겨 있을 때 율곡은 외조부 사당 안에 들어가서 기도하고 있었다.
1541년(6세) 강릉 외가에서 어머니를 따라 서울 집 수진방(壽進坊-지금의 청진동)으로 욌다.
1542(중종 37년 /7세) 어머니에게 글을 배우다 <진복창전(陳復昌傳)을 짓다 예술에 능한 아우 위가 태어남 유성룡이 태어남
1543년(8세) 본가인 파주 율곡리의 화석정(花石亭)에 올라 시를 지었다.
수풀 속 정자에 가을 저물어 시인의 시상은 가이 없구나 하늘과 잇닿아 물빛 파랗고 서리맞은 단풍은 해를 받아 붉구나 산 위에 둥근 달 돋아오르고 강물은 끝없이 바람 머금네 변방의 기러기 어디로 갈까 저무는 구름 속 소리 끊어져.
1544(중종 39년) 9세 <이륜행실록>을 보다가 옛날 장공예(張公藝)의 이야기를 읽고 그를 사모하여 형제들이 부모를 받들고 함께 사는 그림을 그려놓고 바라보다
1545(중종 40년 /10세) 강릉 외가에서 (경포대부)를 짓다 이순신이 태어남
1546(명종 원년 /11세) 아버지 이원수공이 병환이 나자 팔을 찔러 피를 드리고 사당에 들가서 쾌유를 기도하다
1548년(13세) 진사초시(進士初試) 장원 급제하다
1551년(16세) 5월에 어머니 사임당이 별세하자 경기도 파주 자운산(紫雲山)에 장사지내고,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였다. 어머니의 행장(行狀)을 지었다.
1553(명종 8년 /18세) 가을에 시묘살이를 마치고 관례(冠禮:성인식)를 행하다 1554년(19세) 우계(牛溪) 성혼(成渾)과 도의(道義)의 친분을 맺고 끝까지 변하지 않았다. 3월, "공자가 지혜로운 자는 물을 좋아하고, 어진 자는 산을 좋아한다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어질고 지혜로운 자가 그가 타고난 기를 제대로 잘 기르려면 산과 물을 버리고 어디에서 구하겠는가!" 라고 하면서 홀연히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1555년(20세) 봄에 서울에 있는 집으로 돌아와 다시 강릉 북평촌 외할머니에게 문안을 드리러 갔다. 이 때 스스로 경계하는 글인 자경문(自警文)을 지었다.
1556년(21세) 봄에 수진방으로 돌아가, 한성시(漢城試에) 응시하여 장원으로 뽑혔다.
1557년(22세) 9월에 성주목사(星州牧使) 노경린(盧慶麟)의 딸과 혼인하였다.
1558년(23세) 봄에 경상북도 예안(禮安)에 사는 퇴계(退溪) 이황(李滉) 을 찾아가 학문을 물었다. 그 때 퇴계는 율곡보다 35세 위였으나 "나중에 태어난 선비도 덕을 닦고 학문을 쌓으면 얼마나 진보될지 모르니 후생(後生)이 두렵다."라고 하였다. 그 길로 선산(善山) 매학정(梅鶴亭)에 들러 초서(草書)의 대가 고산(孤山) 황기로(黃耆老)를 만났다. 후에 황기로는 율곡의 아우, 옥산(玉山) 이우(李瑀)의 장인이 되었다. 이 해 겨울 별시해에 〈천도책(天道策)〉으로 장원급제하다
1560(명종 15년 /25세) 이 해에 한 장흥서 끝에 발문을 쓰고 지야서회(至夜書懷)라는 시(詩)를 짓다 <파주향약서>를 지음
1561년(26세) 5월에 아버지 이원수공이 별세하자 어머니 무덤에 합장하였다.
1564년(29세) 봄에 청송(聽松) 성수침(成守琛)의 빈소에 찾아가 문상하고 청송의 행장을 지었다. 7월에 생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8월에는 명경과(明經科)에 장원급제하여 첫 벼슬로 호조좌랑(戶曹佐郞)에 임명되었다. 율곡은 보는 시험마다 장원으로 뽑혔는데 모두 합치면 아홉 차례나 되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아홉 번이나 장원한 분(九度壯元公)'이라고 하였다.
1565년(30세) 봄에 예조좌랑(禮曹佐郞)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8월에 요승 보우와 외척 윤원형의 잘못을 상소하여 논박하다. 11월에는 사간원 정언에 임명되어 관리를 뽑는데 청탁을 배제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였다. 보우가 제주로 유배되었다가 죽음 윤원형이 삭탈관직당하고 쫒겨났다가 죽음
1566년(31세) 정언에 제수되어 '마음을 바로잡아 정치의 근본을 세우고, 어진 사람을 가려 뽑아 조정을 깨끗이 하며 백성을 안정시켜 국가의 근본을 튼튼히 해야 한다.'고 임금에게 상소하였다.
1567년(32세) 6월에 명종이 승하하자 퇴계선생에게 글을 올려 국장을 의논하고〈명종대왕의 만사(輓詞)>를 짓다 10월에 기대승의 편지를 받고 답하다
1568년(33세) 2월에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이 되고, 성균관 직강이 되다. 4월에 장인 노경린이 별세하였다. 5월에 우계선생과 지선(至善)중(中) 및 안자(顔子)의 격치성정(格致誠正)에 대한 설을 논하다 가을에 명나라로 가는 천추사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 수도를 다녀오다 겨울에 돌아와 홍문관 부교리에 제수받고 지제교겸 경연 시독관 춘추관 기주관이 되어 《명종실록》편찬에 참여하다 11월에 다시 이조좌랑(吏曹佐郞)에 임명되었으나 강릉 외조모 이씨의 병환이 급하다는 소식을 듣고 벼슬을 버리고 강릉으로 돌아왔다. 이 때에 간원(諫院)에서는 '본시 법전에 외조모 근친하는 것은 실려 있지 않다.' 해서 직무를 함부로 버리고 가는 것은 용서할 수 없으므로 파직시키라고 하였으나 선조 임금은 '비록 외조모일지라도 길러준 은혜가 있고 늙도록 아들이 없는 데다 또한 정이 간절하면 가볼 수도 있는 것이지, 효행에 관계된 일인데 어떻게 파직시킬 수 있느냐.'고 하면서받아들이지 아니하였다.
1569년(34세) 6월에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에 임명되자 상소하여 사양하였으나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자 7월에 조정으로 올라왔다 9월에〈동호문답(東湖問答)〉을 지어올리고 동료와 함께 〈시무구사(時務九事)>를 상소하다 외할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사임을 청했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10월에 휴가를 얻어 강릉으로 돌아왔다. 외할머니가 90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1570년(35세) 4월에 교리에 임명되어 조정으로 돌아왔다. 8월에 맏형 죽곡(竹谷) 선(璿)이 별세하였다 10월에 병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황해도 해주 야두촌(海州野頭村)으로 돌아갔다. 12월에 퇴계 이황(70세)의 부음을 듣고 영위를 갖추고 멀리서 곡하였으며, 아우 옥산으로 하여금 제문을 가지고 가 직접 조문케 하였다.
1571년(36세) 정월에 해주로부터 파주 율곡으로 돌아갔다. 여름에 다시 교리에 임명되어 의정부 검상사인(議政府檢詳舍人), 홍문관 부응교지제교 겸 경연시독관 춘추관 편수관(弘文館 副應敎知製敎 兼 經筵侍讀官 春秋館編修官)으로 옮겼으나 병으로 사퇴하고 해주로 돌아갔다. 6월에 청주목사(淸州牧使)에 임명되자 민생교화에 힘쓰며 손수 향약(鄕約)을 기초해서 실시케 하였다.
1572년(37세) 3월에 병으로 사직하고 서울로 올라와 여름에 파주 율곡으로 돌아갔다. 이 때에 우계와 유명한 이기설(理氣說)을 논하였다. 8월에 원접사종사관, 9월에 사간원사간, 12월에 홍문관응교, 홍문관전한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1573년(38세) 7월에 홍문관 직제학에 임명되자 병으로 사퇴하였다. 8월에 율곡으로 돌아갔다 거기서 감군은(感君恩) 시를 지었다. 9월에 직제학에 임명되어 다시 올라왔다. 통정대부승정원동부승지지제교에 승진되고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을 겸임하게 되었는데 소를 올려 사양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했다.
1574년(39세) 1월에 우부승지(右副承旨)에 승진되어 만언봉사(萬言封事)를 지어 올렸다. 일곱 가지의 시급히 고쳐야 할 폐단을 지적했는데 '위 아래가 서로 믿지 못하고, 일을 책임지려는 신하가 없고, 경연에는 성취하려는 의지가 없으며, 어진 이를 불러들이긴 하나 적재적소에 쓰지 못하고, 백성을 구제할 계책이 없고, 인심을 착한 곳으로 돌리려는 실상이 없다.'라고 하고 그 해결책을 제시하였다. 3월에 사간원 대사간에 임명되었으나 4월에 병을 이유로 물러났다. 또 얼마 안되어 우부승지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하고 율곡으로 돌아왔다. 6월에 서자 경림(景臨)이 출생하였다. 10월에 황해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다.
1575년(40세) 9월에 성학집요(聖學輯要)를 지어 올렸다.
1576년(41세) 2월에 율곡으로 돌아왔다. 10월에 해주 석담으로 돌아와 청계당(聽溪堂)을 지었다.
1577년(42세) 1월 석담으로 돌아와 동거계사(同居戒辭)를 지었다. 12월 격몽요결(擊蒙要訣)을 완성하였다. 처음 배우는 사람들이 학문의 방향을 알지 못하자 마음을 세우는 법, 구습을 개혁하는 법, 몸가짐을 바르게 가지는 법, 독서하는 법, 어버이를 섬기는 법, 남에게 처신하는 법 등을 상세히 서술하여 초학자의 지침서로 삼게 하였다.
1578년(43세) 우리 나라 최초의 사립대학인 은병정사(隱屛精舍)를 건립하고 주희(朱熹)의 무이도가(武夷棹歌)를 본떠 연시조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를 지었다. 3월과 5월 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었으나 상소를 올려 사직하였으며 어지러운 시국을 타개하고 난국을 극복할 수 있는 방책 만언소(萬言疏)를 지어 올렸다. 7월에 토정(土亭) 이지함(李之涵) 선생이 별세하자 조문하고 겨울에 해주석담(海州石潭)으로 돌아왔다. 눈 속에 소를 타고 우계를 방문하였다.
1579년(44세) 둘째 아들 경정(景鼎)이 태어났다. 5월에 대사간에 임명되었으나 상소를 올려 사직하면서 어지러운 시국을 바로 잡을 방도를 써서 올렸다. 동인·서인이 갈라져 당파 싸움이 점점 심해져 갔으며 율곡까지 싸잡아 공박하자, 송강 정철이 탄식하며 '앞으로 어떻게 이들을 선비라고 부를 수 있으리요?'라고 하였다.
1580년(45세) 12월에 다시 대사간의 부름을 받고 나아갔다. 임금이 율곡을 보고 "오랫동안 서로 보지 못하였는데 하고 싶은 말이 없는가?"라고 하자, 율곡은 "임금께서 즉위하셨을 때에는 모든 백성들이 태평을 기대하였는데, 지금까지 옛 제도를 고치지 못하고 폐습을 그대로 답습하고 계시니 어찌 발전을 보시겠습니까? 만약 옛날의 폐습을 버리지 않는다면 결코 좋은 정치를 할 수 있는 가망이 없습니다. 조정의 기강이 무너져 대소 관료들이 자신의 직분을 일삼지 않는 것이 이미 고질이 되었습니다. 먼저 임금께서 자신을 닦은 뒤에 어진 선비를 불러들여 그들에게 성취의 책임을 지우게 하신다면 치도(治道)가 일어날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사암(思菴) 박순(朴淳)이 "율곡이 조정에 나아가니 내 마음이 기뻐 잠을 이루지 못하겠다."고 하였다. 4월에 백성들을 구제하는 방책을 토의하기 위한 회의를 열자고 주청하여 실시하였다.
1581년(46세) 6월에 가선대부(嘉善大夫)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과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으로 특별 승진하였다. 10월에 자헌대부(資憲大夫) 호조판서(戶曹判書)로 승진하였다.
1582년(47세) 1월에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임명되어 세 번이나 사양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7월에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과 김시습전(金時習傳), 학교모범 (學校模範)을 지었다. 8월에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임명되었으며, 9월에 숭정대부(崇政大夫)로 특별 승진하고 의금부우찬성(議政府右贊成)에 임명되어 또다시 만언소(萬言疏)를 올렸다. 10월에 명(明)나라 사신 한림원 편수(翰林院編修) 황홍헌(黃洪憲)과 공과급사중(工科給事中) 왕경민(王敬民)을 영접하는 원접사(遠接使)의 명령을 받고 중국 사신들을 안내하였다. 12월에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임명되어 서도(潟)의 민폐를 임금에게 아뢰었다.
1583년(48세) 2월에 시국에 대한 정책을 써서 올렸으며, 4월에 또 시국 구제에 관한 의견을 써서 올렸는데 그 내용은 불필요한 벼슬을 도태할 것, 고을들을 병합할 것, 생산을 장려할 것, 황무지를 개간할 것, 백성들에게 과중한 부담이 되어 있는 공납(貢納)에 대한 법규를 개혁할 것, 성곽을 보수할 것, 군인의 명부를 정확히 할 것, 특히 서자들을 등용하되 곡식을 바치게 하고 또 노비들도 곡식을 가져다 바침에 따라 양민으로 허락해 줄 것 등이다. 그리고 또 국방을 튼튼히 하기 위하여 10만명의 군사를 양성하자고 주장하였다.
6월에 북쪽 오랑캐들이 국경을 침범해 들어온 사실로 삼사(三司)의 탄핵을 입어 인책 사직하고 파주 율곡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해주 석담으로 갔다. 9월에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에 제수되고 또 이조판서에 임명되었다.
1584년(49세) 정월 14일에 북방을 순무(巡撫)하러 가는 서익에게 〈마땅히 해야 할 여섯가지 방략(六條方略)〉을 최후로 진술하다 1월 16일에 서울 대사동(지금의 인사동) 집에서 49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며, 3월 20일 경기도 파주 자운산(紫雲山) 기슭 선영(先塋)에 묻혔다.
율곡은 성학집요 동호문답 만언봉사 경연일기 기자실기 격몽요결 사서율곡언해 고산구곡가 등 성리학은 물론 역사 교육 시문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저서를 남겼다. 그만큼 여러분야에 정통했다는 증거다. 특히 그가 만언봉사에서 밝힌 폐정개혁의 방향은 시대를 초월해 지도자의 귓전을 울린다 . 정치란 시세를 제대로 파악해 적절히 변통하는 일이다. 실정을 모르면 요순공맹이 있더라도 폐정을 개혁할 수 없다. 기강을 잡으려면 위에서 부터 잘해야 한다 .
율곡은 성학집요(聖學輯要) 동호문답(東湖問答) 만언봉사 경연일기(經筵日記) 기자실기 격몽요결(擊蒙要訣) 사서율곡언해 고산구곡가 등 성리학은 물론 역사 교육 시문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저서를 남겼다. 그만큼 여러분야에 정통했다는 증거다. 특히 그가 만언봉사에서 밝힌 폐정개혁의 방향은 시대를 초월해 지도자의 귓전을 울린다 . 정치란 시세를 제대로 파악해 적절히 변통하는 일이다. 실정을 모르면 요순공맹이 있더라도 폐정을 개혁할 수 없다. 기강을 잡으려면 위에서 부터 잘해야 한다 .
출처http://www.youya.co.kr/bbs/zboard.php?id [출처] 율곡 이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