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천순대를 안주 삼아
십이월 셋째 수요일은 연금공단에서 실시하는 은퇴자 지원 연수 2일 차였다. 연수 장소인 수안보와 천안 두 곳 선택지 가운데 천안을 선택함은 거제에서 이동이 한 뼘이라도 가까워서였다. 내가 자차 운전이 가능했다면 수안보를 택했을 텐데 이유는 사우나 온천수가 매끄러워서다. 3박 4일 연수에서 새벽 일정은 사우나로 시작하려 했다. 코로나로 대중탕을 찾지 못한지가 오래다.
호텔 숙소 배정이 2인 1실로 한다더니 코로나 영향으로 투숙 손님이 적어선지 나는 1인실을 배정받았다. 수면 패턴은 초저녁에 일찍 잠들어 한밤중 잠을 깨 새벽 활동 시간이 무척 길어 2인실이었다면 낯선 사람에게 미안할 법했는데 그렇지 않아도 되었다. 자정 무렵 일어나 전날 연수 첫날 소회를 몇 줄 남겨놓고 날이 밝아오길 기다렸다. 호텔 사우나는 새벽 여섯 시부터 열리었다.
새벽 다섯 시에 호텔 1층 프런트로 내려가 봤더니 적막하기만 했다. 현관 밖으로 나가 어둠이 짙은 뜰을 서성이다가 다시 1층 로비에서 사우나가 문을 여는 여섯 시가 되길 기다려 제일 먼저 온탕에 몸을 담갔다. 누구보다 이른 시각 사우나를 찾아 그간 코로나로 들리지 못한 대중탕에서 땀을 빼고 묵은 때를 벗겨냈다. 이후 한증막과 냉탕을 번갈아들어 비누 샤워를 끝내고 나왔다.
꿩 대신 닭이라고 수안보에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천안 상록호텔 사우나도 다른 대중탕보다야 나을 듯했다. 연수생과 일반 투숙객이 적어 사우나가 혼잡하지 않아 좋았다. 무척 이른 시각이라 입욕객은 불과 네댓 명뿐이라 물이 깨끗하기는 말할 나위가 없었다. 내가 주기적으로 사우나를 가야 함은 남들보다 발바닥에 붙는 굳은살이 심해 자주 벗겨내는데 요즘은 관리가 잘 된 편이다.
객실로 올라와 아침밥을 들기 위해 어제 들린 식당으로 향했다. 요리사는 아침 식사 준비로 분주했고 나는 천연 잔디가 깔린 넓은 운동장 주변을 산책했다. 천안 상록리조트는 십여 년 전 모 정당이 대통령 선거 당시 차떼기 돈다발이 오간 참회로 국가에 헌납한 시설이었다. 부패 정당의 공룡 같던 연수원은 국민 눈총이 무서워 연금공단 호텔로 개조해 휴식 여가 시설로 바뀌었다.
식당에서 아침밥을 들고 일과가 시작되려면 시간이 많이 남아 시내버스로 상록호텔에서 멀지 않은 병천으로 나갔다. 유관순 열사 태생지 병천은 근래 순대로 유명했다. 일과를 마친 오후에 그곳으로 가면 날이 빨리 어두워져 가게 문을 닫아 아침에 순대를 미리 준비해 놓을 참이었다. 아우내 순대집에서 옛날 순대 포장을 마련 연수원으로 돌아와도 이틀째 일과가 시작되기 전이었다.
오전은 연금공단 관계자가 연금제도와 공단 사업에 대한 안내였다. 퇴직을 앞둔 연수생들은 곧 닥칠 현실 문제라 휴식도 없이 질의와 응답으로 진지하게 보냈다. 다수가 퇴직 후 연급 수급과 유족 연금에 대해 궁금한 점을 물어봤으나 나는 별로 흥미가 없었다. 소득세와 의료보험료 납부에 대한 얘기들도 오갔다. 점심시간이 되어 식당으로 가니 고등어구이로 정식 상차림이 나왔다.
점심 식후에는 귀농귀촌반과 같이 준비된 관광버스에 나누어 타고 현장 탐방을 나섰다. 상록호텔에서 그리 멀지 않은 독립 기념관으로 향했다. 이십여 년 전 학생들과 수학여행으로 들려본 곳이었는데 근래 전시물들이 상당수 달라졌다. 그때는 인솔 교사였으나 이제는 연수생이 되어 갔다. 5천 년을 면면히 이어온 우리나라 역사와 조국을 지켜온 선열의 혼과 충절을 느낄 수 있었다.
독립기념관 관람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니 저녁 상차림은 삼계탕이 나왔다. 본래 닭고기는 잘 먹지 않는 편인데 마침 아침에 준비해둔 순대가 있기에 일부는 남겼다. 구내 편의점에서 캔 맥주와 맑은 술을 준비해 숙소로 들어섰다. 누가 마주한 이가 있었으면 좋으련만 자작으로 잔을 채워 병천순대를 안주로 삼았다. 밤이 되니 적소와 같은 고요와 적막이 엄습해 잠을 일찍 청했다. 21.1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