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분 세탁에 앞서
창원의 내 집도 아니고 거제 연사 와실도 아닌 낯선 숙소에서 이틀을 보낸 은퇴자 지원 연수 사흘째다. 40여 명 연수생은 출신지와 직업이 모두 달라 이틀을 보내고도 서먹서먹해 서로 인사 나누기가 조심스러웠다. 나는 숙소 배정이 혼자라 룸메이트도 없어 말벗이 더 없었다. 앞으로 사회로 나가더라도 지속될 인간관계가 아닐진대, 이 나이 새롭게 사귀어둘 지기가 필요함은 아니다.
천안 상록호텔에서 이틀째 밤을 보내 새벽은 구내 사우나실로 가 온탕에 몸을 담갔다. 그간 이태 동안 코로나로 찾지 못했던 대중탕에 대한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심정이었다. 나는 겨울방학이면 북면 마금산 온천을 찾았더랬다. 그때도 이른 새벽에 길을 나서 다른 사람들이 탕으로 들기 전 깨끗한 온천수에 몸을 담그고, 그 이후 산행이나 강둑 산책을 나섬이 관례가 되다시피 했다.
사흘째 역시 일곱 시 반에 아침 식사가 제공되었는데 차림표는 해장국 뷔페였다. 식사 후 오전 연수가 시작되려면 시간 여유가 많았다. 상록호텔은 지방도를 사이에 두고 골프장과 호텔 위락시설로 나뉘었다. 내야 골프장으로 갈 일은 없고 호텔 경내를 한번 산책하고 싶었다. 짙은 안개에 미세먼지가 제법 낀 날씨였지만 낯선 풍광을 눈에 담으면서 호텔 경내 숲길 산책로를 걸었다.
천안 상록호텔은 어린이 놀이동산을 비롯해 부지 면적이 꽤 넓었다. 훗날 언제 다시 들리기 어려울 곳이기에 퇴직을 앞둔 나에게는 의미 있는 방점을 찍는 은퇴자 지원 연수다. 나는 평소 주말이나 방학이면 산과 들을 누비면서 자연에서 한 수 배우는 학생이었다. 이러다 주중이면 아이들 앞에 선 교사가 된 처지였는데 두 달 뒤 정년을 맞으면 신분은 세탁되어 학생으로 돌아간다.
근무 중 주중 아침에는 매일 같이 한 시간 남짓 연사 들녘을 둘러 산책을 하고 교정으로 들어섰다. 이제 앞으로 며칠만 더 머물면 떠나는 연사 와실이라 연수를 마치고 복귀해도 그 들녘과 천변을 걸어볼 날도 손에 꼽을 정도 남았다. 학교에서는 일과가 여덟 시 반에 시작해도 새벽에 길을 나서 교정에 들면 일곱 시였다. 이곳 연수 장소에서는 아홉 시 반 일과가 시작되어 느긋했다.
놀이동산과 함께 유스호스텔이 들어선 경내에 커다란 강당이 나왔다. 상록호텔에서 인수하기 전 대규모 정당 행사를 개최하던 장소로 짐작되었다. 아까 안개 속에 지나쳐 온 운동장은 수천 명을 모아도 될 듯했다. 5공 군사정권 당시 아날로그 형태의 정당 행사를 치른 곳인 듯했다. 지금은 시대가 달라져 선거운동도 디지털화 되어 지난날처럼 당원들을 모아 세를 과시하지 않아도 된다,
유스호스텔과 놀이동산 입구까지 천천히 걸었더니 한 시간 남짓 걸렸다. 아직 연수 일과가 시작되려면 시간 여유가 있어 숙소로 올라가 양치를 하고 휴식을 취하다 컨벤션센터 연수 장소로 갔다. 오전에는 ‘자아 찾기’라는 주제로 중부권 대학에서 유아교육을 가르치는 교수가 강사로 나와 열정적으로 강의했다. 퇴직 앞둔 연수생들은 자신을 던져 공직의 길을 걸어왔다고 추켜세웠다.
오전 일과를 마치고 식당으로 내려가 점심을 들었다, 호텔 요리사가 애써 차린 상차림은 버섯전골 밥상이었다. 학교에선 성장기 아이들을 위한 식단이었는데 내게는 감지덕지 고마웠다. 점심 식후 사단 병력 규모가 들어서도 될 잔디 운동장 둘레길을 걸어 숙소에 들어가 양치를 하고 곧장 나왔다. 오후 첫 시간은 은퇴 후 세무 관리로 상속과 증여였는데 나는 홀가분한 마음이었다.
사흘째 마지막 건강에 대한 강의는 한방병원 권위자가 중풍의 발병 원인과 치료를 소개해 잘 경청했다. 직업 세계에서 어느 분야든 꾸준한 연구로 탁월한 성과를 거둔 이는 여기저기서 불러주어 바삐 사는 듯했다. 정한 일과를 마치고 식당에 가니 해물덮밥이 차려져 있어 저녁 식사를 하고 나오니 바깥은 어둠이 짙었다. 숙소로 와 어제 남긴 순대로 캔 맥주를 비우고 잠에 들었다. 21.1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