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효 아키텍트-130] `더불어 사는 일상의 건축` 추구하는 건축가 이은경(下)
매일경제 2022.06.03
[효효 아키텍트-130] 이은경(이엠에이건축사사무소 대표) 건축의 또 다른 장르인 '소규모 공공건축'은 파출소, 소방서, 주민센터 등 시민들이 일상에서 접하는 작은 규모의 건물들을 말한다. 설계자를 저가 입찰 방식으로 정하다 보니 사용자인 시민들의 요구를 반영하지 못해왔다. 공공건축의 용도가 '관공서'라는 본래의 기능에 더해 점점 생활밀착형인 문화·체육시설로 수요가 확산되고 있다. 1억원 이상인 설계비는 공모하도록 규정이 바뀌면서 설계의 질도 높아지고 있다.
성북 선잠박물관 / 사진제공 = 신경섭 작가
시작은 성북선잠박물관(2017) 리모델링이었다. 선잠단은 조선 시대 왕비가 풍요로운 누에 농사 기원을 드리는 곳이다. 역사성과 상징성 제고, 문화 공간 조성을 위한 목적으로 선잠단의 복원과 성북선잠박물관 건설로 나뉘어 추진되었다. 총 예산이 3억원이었기에 설계사 선정은 입찰할 수준에도 이르지 못해 수의계약으로 진행했다.
건축가 이은경은 설계 방향을 내부보다 외관의 잠재력을 끌어내어, 수평적 장소로 인지되지 않는 선잠단을 알리는 사인 역할로, 높이가 가지는 장점을 활용하여 지역을 조망하는 전망대의 역할에 중점을 두었다. 알루미늄 재질의 파사드는 비단의 질감(silk wall)을 표현하고자 직조하는 비단처럼 사람 손으로 조립 가능한 단위에서 시작해서 전체를 만들어가는 구축 방식을 택하였다.
구로구 오류동 버들마을 주민 공동 이용시설(2019)은 저층 주거 밀접 지역에 있다. 설계 과정에서 시설을 자치적으로 운영할 주민협의체가 배치돼 층별 용도, 평면, 외관 등 건축설계 전반을 협의하는 파트너 겸 결정 주체가 되었다. 외장 재료는 지역에서 흔한 벽돌과 금속 지붕을 재해석하여 오렌지색의 벽돌 매스와 밝은 박공 금속 매스를 조합, 주민의 삶 일부로서 커뮤니티 공간의 경쾌함을 드러내고자 했다. 특히 금속 매스는 저층 주거지에 임의적으로 증축되는 옥상 공간을 형상화했다. 지역 주민의 고단한 삶에 대한 오마주이기도 하다.
남승룡 러닝센터(2020)가 자리한 서울 손기정 체육공원 후문 저층 주거지는 도시재생 지역이다. 서울로 7017에서 이어지는 공간의 거점 역할을 한다. 공간 내부적으로는 공원과 길, 두 개의 레벨이 이어진다. 공원 레벨은 전시, 기념품숍, 카페를 두어 운동 후 휴식 공간으로 활용된다. 길 레벨에서 접근하는 지하에는 로커, 샤워실, 화장실, 사무실 등이 제공된다.
장위동 청소년 문화 공간 / 사진제공 = 노경 작가
장위동 청소년 문화공간(2020)은 설계 과정에서 청소년 설계 워크숍에서 나온 다양한 의견을 반영, 프로그램 및 층별 배치가 결정되었다. 지하는 밴드, 댄스 동아리를 위한 공간, 1층은 바리스타 활동을 겸한 북카페, 2층은 학습, 3층은 요리사 활동 가능한 공유주방을 두었다.
구릉지에 위치한 일조권에 불리한 남북으로 좁고 동서로 긴 대지는 이웃 다세대 주택으로 빽빽한 창들을 면하고 있다. 밝은 벽돌은 지역과 조화를 이루며 골목을 밝게 한다. 벽면의 창은 절제하여 골목길과 직접 접하는 접지층만 유리창을 둔다. 입면 전체를 유리로 감싼 층은 골목길에 개방감을 제공토록 한다.
내부는 계단실을 중심으로 지하에서 3층까지 입체적인 관계로 구성했다. 계단실은 천창과 측창으로 빛이 들어오게끔 설계하여 각 실로 향이 향하게 한다. 복도와 창가에 벤치와 책상을 두어 계단실에서 연속된 공간에 아이들이 머물게 된다.
장위동 다목적 시설(2020)을 위한 기존 공영 주차장 용지는 다세대주택이 밀집한 급경사지에 위치하였고 가용 대지는 정북 일조를 받는다. 기존 거주자 주차면 수는 유지되어야 했고 조망 등 인근 주민의 민원을 피해야 했다. 동쪽은 5m 높이로 떨어지는 옹벽이다.
장위동 다목적 시설 / 사진제공 = 노경 작가
밀도 높은 주거지에 유일한 공공 공간의 지위를 강화하기 위해 인지가 잘 되는 백색 오브제로 매스를 계획하였다. 층을 오를수록 작아지는 평면을 적층하여 높이 부담을 덜어내고 입면을 사선으로 연속시켜 주거지로의 시선을 차폐하면서도 데크를 두어 사용자가 외기(外氣)를 느끼도록 하였다. 사선을 따라 둘러싸며 올라가는 내부 계단은 각 공간을 역동적으로 이어준다. 넓은 열린 데크를 가지는 최상층인 4층 주민카페는 사계절의 전망과 느낌을 공동 소유하게 한다.
개발에서 비껴간 장위동 오류동 등 서울의 도시재생 사업지에 소규모 공공건축을 설계한 이은경 건축가는 부족한 예산과 기간, 주민 의견 수렴 과정, 기획과 설계의 불일치, 운영과 관리의 부재 등 건축가가 당연히 떠안아야 할 이유가 없는 여러 난관을 돌파해야 했다. 그녀는 빠르게 핵심만을 집어 말을 하였다. 프로젝트 진행을 위한 의견 수렴 과정에서의 경험치가 녹아 있는 듯 보였다. 여하튼 건축가는 주어진 조건 안에서 고군분투하며 재료와 공법을 합리적으로 조율해 특유의 공간을 완성하였다.
1인 가구는 비혼, 고령화로 인해 <2016년 27.9%(539만8000가구) → 2020년 31.7%(664만3000가구) : 통계청> 가파른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부부와 자녀로 구성된 '정상 가족'을 전제로 한 주택 정책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이은경은 최근 서울도시건축전시관에서 가진 '원룸 원옵션' 주제의 '다음 세대를 위한 집' 전시에 '접속'이라는 이름으로 재구성된 원룸 모델을 선보였다.
'접속'은 복도, 발코니, 현관의 경계를 유연하게 함으로써 1인 가구의 일상이 확장된다는 개념이다. 이은경은 "내부의 완벽함을 추구하는 풀옵션 원룸이라는, 닫힌 구조를 벗어나 이웃과의 접속을 선택할 수 있다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현대 한국인들의 표준 주택이 되어버린 아파트와 열악한 주거 형태인 '원룸'은 '카페 공화국'으로 이어진다. 2018년 기준 한국의 카페 시장 규모는 세계 3위(유로모니터)다. 미국 261억달러, 중국 51억달러, 한국 43억달러, 일본 40억달러 순으로 인구가 한국의 2배인 일본보다 시장이 더 크다. 카페를 문화로 정착시킨 건 프랑스이지만, 동시대 주거 문화와는 크게 관련이 없다. 카페의 원형은 커피 문화를 이전한 오스만 제국이기도 하니 기호 식품 커피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한국화된 스타벅스를 비롯한 국내 기업 프랜차이즈 커피숍은, 도서관과 같은 개념의 공간을 파는 전략이 더 주효했다. 2000년대 이후 청년층의 주거 환경이 되어버린 '원룸'과도 직접 관련이 있는 듯 보인다. 최소한의 거주 기능만 갖춘 협소한 원룸을 벗어나 소음은 있으나 내부적으로는 열려 있고, 시야가 트인 카페에서 일상적으로 공부 및 사무를 보는 카페공화국이 된 것이다.
이은경은 국내에서 대학원 졸업 후 건축사사무소 기오헌에서 5년 실무 후 네덜란드의 베를라허 인스티튜트(The Berlage Institute)에 유학했다. 베를라허는 사회주택 분야를 선도하는 연구기관이다. 이후 공공건축에 집중하는 벨기에 자비에 드 가이터(XDGA Xaveer de Geyter Architects)에서 실무를 했다. 곧이어 '지역사회권'을 주창한 일본 건축가 야마모토 리켄이 대표인 건축사무소(Riken Yamamoto & Field Shop)에서도 실무를 익혔다.
야마모토 리켄은 내 집이라는 개념 자체를 버리고 함께 나눠 쓰고 개방하고 임대하는 방식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주창한다. '지역사회권'은 상부상조하는 삶의 이점을 극대화한 집합주택 정책으로 장소성을 강조한다. 최소한의 전용공간과 최대한의 공용공간이 어우러져 누구에게나 개방된 지역사회를 추구한다.
이은경은 지역사회권에 대해 '정확한 예측에 의한 수요와 공급 중심의 주거정책이 아닌 주거가 지향해야 할 도시에서의 삶의 방식에 대해 질문하고 있다'고 말한다. 한국 사회 가구의 소득 대부분이 주택에 소비되거나 빼앗기고 그 재산을 지키기 위해 우리의 의식은 내부로 향하면서도 생활하는 가족의 현실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
2009년에 처음 등장한 '지역사회권'은 우리의 1가구 1주택 시스템을 대신할 수 있는 새로운 생활방식의 제안으로 보인다. 지역사회권에서는 공용부분이 넓은 대규모 집합주택이 공적, 사적 부분을 원활하게 접속시켜 경계가 애매해진다. 건축물이 주변 환경과 상호 침투를 일으키며 유기적인 관계를 구축하기에 그 지역에만 존재하는 장소성이 창출된다.
20세기 도시계획은 주거·공업·상업지역처럼 용도에 따라 도시를 구분한 조닝(Zoning)이었다. 조닝은 '전용주택 거리'라는 20세기의 지역 형태를 낳았다. 사생활만을 소중히 여기는 주택단지에서는 지역공동체 형성이 어렵다. 주거전용지구, (가족전용)주택이라는 사고방식은 한계에 이르렀다. ?
탈전용주택은 일하고 상품을 만들고 판매하는 '개방공간'이 있는 주택이다. 이런 개방공간이 모여 지역사회권을 만드는 것이다.? 야마모토 리켄의 개념은 경기도 성남 월든힐스 2단지와 서울 강남 LH 공동주택에 일부 적용하고 있다.
성북 최만린 미술관 / 사진제공 = 텍스쳐 온 텍스쳐
조각가이자 미술 교육자 최만린(1935~2020)의 정릉 자택이 2020년 3월 성북구립미술관 분관으로 대중에 공개되었다. 1970년대에 지은 이 집은 1988년부터 최만린의 작업실이 되었다. 이은경은 공공 미술관으로 전시 공간 활용을 위해 집의 특징인 높은 천장과 계단 등의 기본 골격은 최대한 살리고, 방 2개는 터서 상설 전시장으로 만들고, 창을 크게 내 거실과 옥외 공간을 연결하는 정도로 리모델링을 진행했다.
성북 최만린 미술관 / 사진제공 = 텍스쳐 온 텍스쳐
높이 튼 천장과 복층 내부를 잇는 나무 계단, 조각 작품을 비추기 위해 설치한 곳곳의 작은 조명, 70년대의 아치형 문틀 등은 살렸다. 개인 이름을 딴 공립미술관은 작가의 주요 컬렉션을 중심으로 한국 근현대 조각의 오늘을 소개하는 역할뿐 아니라 지역에 살았던 예술가들과의 네트워크 구축도 염두에 두었다. 미술사학자 최순우(1916~1984)가 살았던 1930년대 근대 한옥인 '최순우옛집', 조각가 권진규(1922~1973) 아틀리에, 만해 한용운(1879~1944)이 말년에 거주한 '심우장' 등이 성북구에 산재한다.
지역 미술관은 마음 먹고 가는 큰 미술관이 아니다. 관객들이 예술가의 예술적 토양이 우리 일상에 속해 있었구나라고 느끼게 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주택 구조의 원형이 모던했다. 주택이었기에 닫혀있었으나 열려진(내부에서 외부를 바라보는) 공간의 힘을 유지시켰다.
정발산동 단독주택 / 사진 제공 = 텍스쳐 온 텍스쳐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정발산동 단독주택(2021)은 단열 등 근본적인 문제를 안고 있던 기존 주택을 해체하고 신축하였다. 후면 마당, 거실, 서재, 주방, 다락이 연속적으로 연결되도록 하였다.
[프리랜서 효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