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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스크랩 시의 천기를 누설한 천재 시인 김민부(2/3)
조정은 추천 0 조회 161 12.05.25 18:0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시의 천기를 누설한 천재 시인 김민부(2/3)

    시조기행: 길따라 시조따라(11) 부산과 일출봉/시의 천기를 누설한 천재 시인 김민부(2/3) 박구하 천마산 허리에 선 일출봉 시비 나는 부산 자갈치시장을 지나 송도 쪽으로 달렸다. 암남동 동물검역소(옛 혈청소)로 가는 길은 웬만큼 도로를 넓혔다고 하나 워낙 배산임해의 지형이라 임시수도 당시의 길 그대로 비뚤비뚤하고 꾸불꾸불하였다. 내가 고1때 봄소풍을 갔던 이 길은 40년의 세월에도 별로 변한 바가 없었다. 차는 송도 앞바다를 옆구리에 끼고 천마산의 허리를 배배 감고 달렸다. 그 허리의 배꼽쯤 되는 지점, 감천가도 고갯마루에 스무 평도 안 될 것 같은 자투리땅을 밟고 시비가 하나가 우뚝 솟아 있었다. 차를 대일 곳도 없어 발치께 얼른 두고 설레는 마음으로 시비 앞으로 갔다. 외지고 쓸쓸한 마련해서는 시비는 의외로 깨끗하였다. 현재 김종문의 글씨로 전면에 기다리는 마음이 새겨져 있고 뒷면에 1995년 3월에 부산서구청장이 설치한 것으로 나와 있었다. 주변에는 칠 벗겨진 벤치 두어 개와 기어오르다만 등나무 줄기가 엉거주춤 쓰러질 것 같은 차일 기둥을 붙들고 섰을 뿐, 아무도 찾지 않는 황량한 쉼터였다. 눈을 들어 앞을 보니 바다가 무슨 강물처럼 떠 있는데 레미콘을 실은 잡선들 너머 시선 끝에는 망망한 수평선이 아니라 영도의 제2송도가 앞을 막고 있었고 그 너머로 또 울창한 아파트, 그 위로 솟은 봉래산이 아침해를 가리고 있었다. 뒤는 어떠한가. 천마산이 지척에 솟아 있어 달은 뜨기도 전에 한밤이 먼저 올 것 같은 가파른 산 속이었다. 이곳 어디가 일출봉이고 월출봉이란 말인가. 나의 막연한 비감과는 딴판으로 그저 이만한 데라도 시비가 세워졌음에 감사하고 있다는 듯 시비는 저 혼자 달관한 듯 의연하였다. 그 옛날 사라호 태풍 때 저 송도 앞 바다에 매어둔 보트가 날아가 산꼭대기에 걸렸다는 그 과장법의 천마산 한 허리에 달랑 서 있는 시비는 그러고 보니 말잔등에 걸터앉은 형국이었다. 그래, '더러븐' 세상, 늘 보는 일출이나 월출인데 까짓거 못 보면 어떤가. 아무리 기다려도 기다려도 오지 않을 시인이여, 기왕에 천마를 탔으니 언제고 승천할 날만 기다리거라 하고 시비를 향해 묵도를 하고 있으려니 같이 간 시인들은 사진 한 장 찍고는 흥미 없다는 듯 저만치 몰운대 쪽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기왕 온 김에 나는 암남동 공원에 들어갔다. 암남동 공원은 신석기 시대 빗살무늬 패총이 있는 유서 깊은 곳, 17만 평 면적에 초록바다와 송림이 울울한 가파르고 외진 공원이다. 2002년에 이곳에서 열린 조각전에서 출품된 세계 유수의 조각품들이 온 공원에 설치되어 있었다. 어릴 적 기억에 있던 암벽에 부서지는 파도라도 보고 갈 요량으로 가파른 길을 올라가는데 노루목 명당자리에 거대한 외국조각이 길을 막고 서 있었다. 거대한 돌 두 쪽을 마주 세워놓았을 뿐인 이 조각물에는 "Two Pieces" 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누가 분단된 국가가 아니랄까봐 작품명마저 "두 조각"이란 말인가. 설치미술에 문외한인 내 눈에는 그냥 돌덩이일 뿐인 것을 최고 명당자리에 비싼 돈주고 사서 모셔둔 당국의 처사에 공연히 심통이 났다. 도대체 이 부산송도 바다와 이름 모를 외국인작품이 무슨 연관이 있단 말인가. 세운다면 이 자리에 김민부 시비가 세워져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김민부의 시비는 이 곳 말고 제주도 성산포에 세워져 있다는 말을 들었으나 확인하지는 못하였다. 사실 일출봉과 월출봉은 이 나라 어디에 가든 다 있을 것이다. 누구든 그 봉우리에 서면 망부석이 아니더라도 그립고 애틋한 마음이 생기지 않으랴. 장일남은 수많은 작곡 중에서도 김민부의 시를 보고 작곡한 「기다리는 마음」과 그가 쓴 오페라대본「원효대사」가 가장 애착이 가는 곡이라고 하였다. 욕심 같아서는 백두산에서 한라산까지 봉마다 시비를 세웠으면 한다. 김민부가 두고 간 사람들 짧은 순례를 마치고 나는 서둘러 서면 영광도서 앞에 있는 황규정 변호사 사무실로 갔다. 서울서 내려가기 전에 미리 전화로 약속해둔 시간에 맞추어 달려갔더니 거기에는 김민부의 문우 김천혜(문학평론가·부산대교수)씨도 와 있었다. 황 변호사는 김민부와 같은 고교동기생이자 서울서 하숙도 같이 하여 친동기간 이상으로 가깝게 지냈던 친구였다. 내게는 고교와 대학 양쪽 더블선배가 되어 초면인 나에게 김민부에 대한 모든 것, 심지어 그 뇌쇄적인 감각시에, 그 록 허드슨처럼 잘 생긴 외모에 뭇 여성들이 반하여 많이 따랐다는 얼핏 부끄러울 것 같은 부분까지 스스럼없이 이야기해 주었다. 심지어 벽제 화장장에까지 나타나 울던 여인이 있었는데 그녀는 거기서 김민부의 뼈 한 조각을 훔쳐 수락산 꼭대기에 묻었다가 뒤에 따로 재를 지냈다고 한다. 말끝에 황 변호사는 사랑하는 친구의 죽음에 자기 책임도 있다고 하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당시 김민부는 부산에서 MBC 방송의 스크립터로 일하다가 서울로 올라와 MBC 작가실에 고정 작가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때 막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사법연수원에 다니던 그는 별일 없으면 토요일마다 김민부와 만나 정동 MBC 앞 목로주점에서 술을 하는 것이 일과였다. 물론 술값은 김민부가 내었다. 1972년 10월27일, 운명의 그날도 토요일이었다. 그날 따라 뭔가 일이 생겨 약속을 지킬 수 없어 못 갔는데 김민부는 안 오는 그를 무려 2시간이나 기다리다 3시경에야 할 일없이 마침 밀려있던 연말특집 원고나 쓰자 하고 갈현동 집에 돌아갔다고 한다. 그날 저녁 갑자기 한파가 몰아닥쳐 석유난로를 피우고 원고를 쓰다 날린 폐지에 불이 붙어 졸지에 중화상을 입고 적십자병원에 옮겼으나 운명하고 만 것이다. 그날 그가 그와 만나 늘 하던 대로 술이나 마셨다면 그는 그런 참변을 당하지 않았을 지 모른다. 인간사는 필연이요 운명이라는 것이 있다고들 하지만 액운은 그 순간만 피하면 지나가는 것인데 그걸 못 피하고 가다니.... 이 죄 없는 죄책감은 그의 평생에 한이 되었다. 김민부의 죽음을 두고 자살이 아니냐 하는 말이 있지만, 또 그의 시를 보면 "죽음"이라는 말이 수도 없이 나오지만, 그는 실제로는 낙천적이요 긍정적인 면이 많았던 사람이다. 섣부른 감상에 목숨을 끊을 성격도 나이도 아니었다. 김민부는 서라벌 예대와 동국대(62년)를 나온 후 생활고로 천재성과는 상관없는 방송작가로 활약을 하면서 수많은 기행과 일화를 남겼다. 주요작품으로는 앞서 시조 외에 제1시집 『항아리』(1956년), 오페라 대본「원효대사」, 제2시집『裸婦와 새』(1968년) 등이 있다. 그는 시와 시조, 수필, 꽁트, 평론, 희곡, 코미디 대본, 멘트, 영화각본(1970년, 김귀섭 감독 황금마차) 등 무릇 글로 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다 잘 했다 . 시부문에서는 그는 시조의 율격을 체득하고 있어 그의 시에는 모두 강한 음악성이 깔려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의 시적 천재성은 생업에 쫓겨 제대로 발휘될 시간이 없었다. 100kg을 오르내리는 거구에 이국적인 눈망울로 끊임없이 원고지를 메워 나가던 그 무서운 필력은 어느 누구도 흉내조차 낼 수 없었다. 그는 드라마도 쓰고, 쇼프로도 구성하고, 「웃으면 복이 와요」대본도 썼는가 하면, 시사 프로그램, 방송 에세이도 썼고, 시추에이션 드라마 등 닥치는 대로 써나갔다. 동아방송의 인기프로 「한밤의 플랫홈」 같은 것은 선배작가 한운사도 그 재치와 맛깔스런 멘트를 격찬하였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부산 MBC 라디오 최장수 프로그램인 「자갈치 아지매」의 창안자이자 최초의 PD가 김민부였다. 여기서 그 당시 같은 방송작가로 활동했던 윤청광 씨의 글을 잠깐 인용해 보자. 비위가 약한 나는 내 성격에 맞지 않은 프로그램은 청탁이 들어와도 사양하기 일쑤였는데, 김민부 형은 나와는 딴판이었다. “보거래이, 청탁은 물리치는 게 아닌 기야. 무슨 프로그램이건 청탁 오는 대로 다 써야 하는 기라.” 방송작가의 생활이 보장되어 있지 않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이것저것 사양하다가는 굶어죽기 알맞다는 충고였다. 그래서 그는 매일 나가는 프로그램만 해도 이 방송 저 방송에 대여섯 개나 되었다. 동아방송에는「밤의 플랫폼」, 기독교방송에는 「장군 멍군」, MBC에는「영이네 집」등 집필하는 프로그램이 수두룩했다. MBC 작가실 바로 내 옆 책상에서 그는 숨을 씩씩 몰아쉬며 글을 쓰곤 했는데, 그 숨소리가 어찌나 거셌던지, 그는 꼭 불 맞은 멧돼지 같은 거친 소리를 내고 있었다. 하얀 와이셔츠 뒷자락을 곧잘 허리 밑까지 흘리고 다니던 그는 글을 쓰다가 풀리지 않으면 화장실로 달려가서 수도꼭지에 머리를 박고 찬물을 뚝뚝 흘리면서 작가실로 돌아오곤 했었다. 참으로 열심히, 참으로 끈질기게 글을 썼고, 참으로 많이도 술을 마셨다. 어느 날 내가 병들어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 우리 집에 열흘쯤 누워 있을 때 그는 먼길을 김영곤 선생과 함께 걷고 걸어서 귤 한 상자 사들고 문병을 왔었다. “죽으믄 안 된데이, 퍼뜩 일나거라아.” 그는 씨익 웃으며 내 어깨를 쳤다. 그런데 그후 얼마 되지 않아서 그는 글을 쓰다가 난로가 엎어지는 바람에 일어난 불로 젊은 나이에 영영 다시 볼 수 없는 저 세상으로 먼저 가버렸다. 적십자병원에서 작가들의 정성으로 치러진 그의 장례식에서 한운사 선생은 “가난의 고통에서 해방된 것을 축하한다”고 조사를 해서 우리 모두를 다시 한 번 울게 하기도 했는데... 너나 없이 가난했던 시절, 그래도 동료작가들이 우정을 모아서 장례를 치르고 단 얼마의 돈을 남겨 부인 손에 전해드렸더니, 홀로 되신 부인은 가끔씩 작가협회에 꽃을 사들고 찾아오셨는데, 이제는 그나마 소식이 없다. 죽으면 안 된다고 해놓고 저 자신이 먼저 죽어버린 이 아이러니를 어찌 보아야 할까. 우리 시단의 큰 별이 되었을 김민부의 요절은 두고두고 애석하다. 어떤 청탁도 거부하지 않고 아무리 허접스러운 일감이라도 주어지면 열심히 해낼 뿐 아니라 어떤 고통도 강한 정신력 하나로 버티고 이겨내고 있었던 그가 자살하였다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위의 글처럼 집필 중 자기 실화에 의한 사고사인 것이다. 그의 아내는 그 화재시 불붙은 남편을 안고 불 속에서 끌어내다가 자신도 얼굴이 타버려 지금껏 베일을 쓰고 음지에서 살고 있다한다. 그의 사망시 네 살이었다는 딸 지숙이 뜻밖에 황변호사 사무실에 있었다. 황변호사는 친구와 사별 후 그의 딸 지숙에게 장학금도 대주고 졸업후 지금까지 자기 사무실에 데리고 있다고 한다. 가고 없는 친구에 대한 의리와 변함없는 우정에 가슴이 물컹해졌다. 나는 뜻밖에 김 시인의 한 점 혈육을 만나는 행운을 얻었다. 지숙은 이미 중년부인으로 몸집이 불어 뚱뚱하였으나 얼굴은 아직 앳되어 보였고 내가 본 사진 속의 김민부를 그대로 속 빼닮은 것 같았다. 어머니와는 오래 떨어져 살았고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하나도 안 난다고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그 표정엔 그늘 같은 것은 별로 찾아볼 수 없었다. 아버지의 유품 같은 것 없느냐고 하니까 대학시절 누이(지숙의 고모)에게 보낸 편지가 하나 있다고 했다. 내가 아버지에 대한 글을 쓴다고 하여 그 편지를 카피해 받았고 단 한 장 남았다는 아버지 사진은 따로 우송해 받았다. 오빠는 잘 있다. 며칠을 해가 뵈이더니 종일 비가 나리는구나. 이렇게 비 속에서 갇혀 있는 날은 왈칵 고향생각이 나고 너희들이 보고싶어 눈시울이 뜨거워지는구나. 아렛밤 꿈에 누나를 보고 며칠을 누나걱정 때문에 편지오기만 기다린단다. 圭正이들이 신체검사 때문에 내려간다고 떠들썩하니 야단이니... 그래도 나는 부산으로 가고싶긴 하지만 내려갈 수가 없구나. 이것저것 마음이 가 닿지 않는 며칠이었다. 이 편지에는 그의 육친에의 정이 애틋하게 배어있고 어쩌다 불량배에게 맞은 부위가 흉터로 남아 그 흉이 평생 갈까 걱정하는 생활인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었다. 황변호사가 풀어놓는 이야기는 끝이 없었으나 나의 일정 때문에 아쉽게 일어서야 했다. 그 많은 이야기를 다 쓸 수는 없고 다만 한 가지 내가 김민부의 작품이 생각보다 적은 것 같다고 했더니 다방면에 걸쳐 글을 쓰다보니 정작 자신이 추구하는 글을 쓰는 데는 시간이 부족했을 것이라 했다. 또 워낙 자기 작품에 대한 애착이나 정리정돈을 못하는 성미라 제대로 남아 있는 것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당시 MBC의 사장비서실에 근무하던 배모라는 여사원이 김민부의 글을 가지고 있을지 모른다고 귀띔해 주었다. 그녀는 김민부의 글이 좋아 김민부를 따랐고 작가실에 자주 놀러왔다고 한다. 김민부는 글을 쓰다가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구겨서 던져버리기 일쑤였다는데 그 폐지마저 일일이 주워갈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김민부 사후 이 배여사는 『창밖의 여자』라는 소설을 발표하여 그것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일약 유명작가로 데뷰하였다. 그런데 김민부의 미망인 이영수 여사가 우연히 이 책을 보고 그 내용이 자신이 생전에 남편의 원고를 타이핑해준 것과 글자 한 자도 틀리지 않게 똑같았으므로 이 소설이 김민부 작품임을 알고 추궁하였으나 완강히 부인하는 바람에 더 밝혀내지 못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 소설에 나오는 시 "창가에 서면 눈물처럼 떠오르는 그대의 흰 손/ 돌아서 눈감으면 강물이어라/ 한줄기 바람 되어 거리에 서면/ 그대는 가로등 되어 내 곁에 머무네//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차라리 그대의 흰 손으로 나를 잠들게 하라." 라는 내용의 「창밖의 여자」는 뒤에 조용필이 곡을 붙여 노래하여 히트하였다. 곡은 히트하였으나 그 가사의 작사자는 아직도 밝혀져 있지 않다. 지금이라도 배여사가 김민부의 미발표 시를 가지고 있다면 저작권이야 그가 갖더라도 고인과 문단을 생각하여 자발적으로 세상에 내놓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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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6월 15일 옮겨적은이/비온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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