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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2-18] I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묵상 I 마르 8,22-26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벳사이다로 갔다. 그런데 사람들이 눈먼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는 그에게 손을 대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그분께서는 그 눈먼 이의 손을 잡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그의 두 눈에 침을 바르시고 그에게 손을 얹으신 다음, “무엇이 보이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는 앞을 쳐다보며,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걸어다니는 나무처럼 보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분께서 다시 그의 두 눈에 손을 얹으시니 그가 똑똑히 보게 되었다. 그는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집으로 보내시면서,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하고 말씀하셨다.(마르 8,22-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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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독서 및 복음 묵상테마] : 저 마을로 들어가지 마라 <독서 : 창세 8,6-13. 20-22 / 복음 : 마르 8,22-26>
25년쯤 피우던 담배를 ‘안 피우기’ 시작한 지 1년이 되어간다. 끊은 게 아니고 안 피우고 있는 중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담배를 끊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전에는 ‘이 좋은 걸 왜 끊냐?’고 하다가 이제 끊기 시작했으니 다시 담배에 손을 댈까 봐 걱정된다.
물론 그동안 여러 차례 고비도 있었다. 근심이 있을 때, 화가 나서 안 풀릴 때, 글을 쓰거나 일을 하는데 도무지 잘 안될 때 ‘딱 한 대’ 생각이 간절하다. 그래도 참자고 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딱 한 대만 피우고 다시 안 피우면 되잖아!’라는 소리가 들린다.
그 유혹은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지금까지도 잘했으니 다시 잘할 수 있다는 일종의 ‘긍정적인’ 이유를 대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다시 피우기 시작하면 또 한참은 거기서 헤어나지 못하리라는 것 또한 분명하다. 좌우간 ‘무조건 참아야 하느니라.’가 정답인 것 같다. 다시 돌아가면 안 된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예수님은 “저 마을로 들어가지 마라.”고 하신다. 그 마을은 아마도 그 눈먼 이가 살던 벳사이다일 것이다. 그 마을은 예수님께 불행하다는 비난을 받은 고을이다.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 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다.”(루카 10,13) 회개하지 않은 마을이니 죄악이 넘쳐난 마을이었을 것이다. 사람을 따뜻한 심장을 가진 이로 보지 않고 걸어 다니는 나무 정도로 보는 마을인 것이다.
예수님은 그 눈먼 이에게 “저 마을로 들어가지 마라.”고 하신다. 회개하지 않는 삶, 사람을 그저 걸어 다니는 나무 정도로 보는 차가운 마음으로 돌아가지 말라는 말씀이 아닐까 싶다. 회개(悔改)는 후회(後悔)와 개선(改善)이 합쳐진 말이다. 진정한 회개는 새로운 삶에 대한 결심과 실천이 따라야 한다. 우리는 새 삶으로 불리어진 존재다..................◆
[말씀자료 : 이재학 신부(인천교구 바다의 별 청소년수련원)] |
[나해] 연중 제6주간 수요일 I 묵상기도방 |
시작기도 : ▷ 한결같이 사랑하시는 하느님
늘 우리 가까이 계시며 길을 잃고 잘못을 저지를 때도 한결같이 사랑하시는 하느님, 저희가 당신의 마음을 닮아 제 자신 안에 있는 한계와 가능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만나는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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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기도지향 : 병든 이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치유자이신 하느님, 고통 속에 있는 많은 이들과 함께 하시어 아픈 곳을 낫게 하시고, 그들을 돌보는 의료진들에게도 지혜와 사랑으로 함께 하소서.
오늘의 복음 : 연중 제6주간 수요일 마르 8,22-26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벳사이다로 갔다. 그런데 사람들이 눈먼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는 그에게 손을 대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그분께서는 그 눈먼 이의 손을 잡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그의 두 눈에 침을 바르시고 그에게 손을 얹으신 다음, “무엇이 보이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는 앞을 쳐다보며,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걸어다니는 나무처럼 보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분께서 다시 그의 두 눈에 손을 얹으시니 그가 똑똑히 보게 되었다. 그는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집으로 보내시면서,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하고 말씀하셨다.(마르 8,22-26)
영적독서 : 너희 마음에 내 자리를 마련하라
1985년 9월 21일
걸으면서.
"주님, '판단하지 말라'고 말들 하지만 판단하지 않을 수 없어요.
'비난하지 말라'는 말은 이해하겠지만 '판단하지 말라'는 말은 전혀 이해할 수 없어요."
"너에게 판단력을 주었으니 그것을 사용하라. 그러나 네 판단에 사람을 가두지는 마라."
"좀더 설명해 주세요."
"내가 그 사람 안에 있기 때문이야. 때때로 네가 그 현존을 바라보거나
느끼지 못한다 하더라도 나는 그 안에 있다.
내가 사람들 속에서 행하고 말하고 이루는 바를 가로막지 마라. 알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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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일
소성당에서 성체조배.
이번에는 이 특별한 장소에 나 홀로 있다. 운을 뗀 것은 그분이었다.
주님의 웃음에는 부드러움이 가득했지만 피로가 배어 있는 듯했다.
"자, 보아라. 두려워할 것 없다. 30분간의 성체조배가 너무 길지 않을까 걱정했지.
나와 함께 있으면 시간이 빨리 지나간다는 것을 이제 너도 알겠지."
"죄송해요, 주님. 옳으신 말씀이에요. 당신과 함께 있으면 평화로워요.
당신과 대화를 나누면 기운을 되찾는 것 같아요. 제 머리나 마음이 차가운가요 주님?"
"아니, 그런 것은 아니야. 약간 무심할 뿐이지."
"무슨 말씀이세요?"
"너는 얼마 전에 옷 입는 것을 잊어버려 감기에 걸렸지. 물론 지금은 나았지만 말이야.
무엇을 걸칠지 전혀 걱정하지 않고 쏘다녔지."
"제가 당신이라고 하는 옷을 걸치는 것을 잊는다는 말씀인가요?"
"그래. 나는 외투 같은 존재란다. 나를 입는 데 시간을 할애해라."
"왜요?"
"너를 보호하려고. 네 안에서 또 네 주위에서 행동하기 위해서지."...........<니콜 고스롱,「두려워 말라 너는 내 사람」중에서>
마침성가 : 진리가 너를 자유롭게 하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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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해] 연중 제6주간 수요일(2009-02-18) I 복음묵상방 |
<요한과 함께하는 묵상> : † 영적인 혜안(慧眼)을 주시려는 예수
예수와 일행을 태운 배가 베싸이다에 도착했다. 베싸이다는 북쪽의 요르단강이 갈릴래아 호수로 흘러드는 동쪽 호숫가에 위치한 어촌으로서 베드로와 안드레아와 필립보의 고향(요한 1,44)이다. 예수께서는 벳사이다에서 많은 기적을 베풀었지만 이곳 사람들이 회개하지도 예수를 믿지도 않았기 때문에 가파르나움과 코라진과 함께 불행을 선언 받은 마을이기도 하다.(마태 11,21)
오늘 복음은 이곳 뱃사이다에서 소경을 치유한 기적사화를 들려준다. 그런데 이 소경치유기적은 어제 복음과 상당한 관련이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많은 기적들 중에 단순한 하나의 기적으로 볼 수 있는 소경치유를 마르코가 굳이 이곳에 배치하였는지 하나씩 짚어보자.
우선 마르코복음을 펼쳐 예수님의 '물위를 걸으시고 풍랑을 그치게 하신 기적사화'(6,45-52)를 되살펴 보아야 한다. 이 이야기는 5,000명을 먹인 빵의 기적 직후 예수께서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를 태워 호수의 북동쪽 베싸이다로 먼저 가게 하신 것으로 시작된다. 그 동안 예수께서는 산에 올라가 기도하셨다. 그런데 얼마 후 제자들은 역풍을 만나 배를 젓느라고 심한 고생을 한다. 결국 배는 방향을 잃고 호수 위를 맴돌게 된다.
이를 보신 예수께서 물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다가가 "나다, 겁내지 말고 안심하여라" 하시며 배에 오르시자 풍랑이 그쳤던 것이다. 와중에 제자들은 스승을 유령으로 착각하고 비명을 지르며 놀라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 때도 제자들은 기적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였다. 그런데 흥미로운 일은 그러는 동안에 배가 베싸이다가 아닌 호수의 북서쪽 겐네사렛 마을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 또한 제자들의 영적(靈的) 맹인상태를 암시하는 것이라 하겠다.
어제 복음에서 보았듯이 제자들은 선상(船上)에서 스승의 꾸지람을 들었다. 달마누타에 도착하자마자 다시 배를 타고 떠나야 했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하고, 바리사이와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라는 경고의 말씀도 흘려 듣고 턱없이 모자라는 빵 걱정을 하고 있었던 제자들이다. 그들에게 스승은 "너희는 눈이 있으면서도 알아보지 못하고 귀가 있으면서도 알아듣지 못하느냐?"(8,18)고 질타하셨다.
생명의 빵이신 주님을 곁에 두고 일용할 양식을 걱정하는 제자들에게 진정 주님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영적(靈的)인 혜안(慧眼)이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오늘 소경의 치유에는 또 한번 제자들의 영적 맹인상태를 지적하는 마르코의 편집의도가 담겼다고 하겠다.
맹인을 치유하는 과정에서 예수께서는 상당히 예외적인 수고를 하신다. 소경의 손을 잡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그의 두 눈에 침을 바르고 손을 얹으시는(23절) 수고는 다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다른 때 같으면 말씀만으로도 단번에 치유하셨을 그분께서 이런 수고를 하신 후에 "이제 보이느냐?"가 아니라 "무엇이 좀 보이느냐?"(23절)고 물으신 것을 생각해 보라.
치유된 소경에게 "저 마을(벳사이다)로는 들어가지 마라"(26절) 하시고 집으로 돌려보내신 이유는 또 무엇일까? 예수께 대한 믿음에 단계가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단계가 참으로 어려운 과정이라는 말이다. 예수의 말씀과 업적을 놓고 영적인 혜안을 얻는다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마을로 가서 개안(開眼)을 자랑할 것이 아니라 '집으로' 돌아가 그 경위를 정리하고 묵상하며 그분께 감사를 드리며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말씀자료 : 박상대 신부 /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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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과 함께하는 묵상> : † 벳사이다에서 소경 치유
제자들은 계속된 기적들을 보고, 가르침도 들었지만 예수님의 정체에 대해서 정확히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영적인 교훈을 물질적인 빵 문제로 오해하기도 했습니다. 주님은 그런 제자들을 보고 마음이 안타까웠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인내를 가지고 그들이 깨달을 수 있도록 인도해 주셨습니다. 마르코 사가는 이 사건 후에 주님께서 소경을 고쳐주신 일을 기록했습니다. 학자들 중에는 이 사건이 주님께서 영적 소경인 제자들을 고쳐 주실 것을 암시하는 사건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오늘복음에 기록된 사건은 다른 기적들과 몇 가지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다른 기적들은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즉시 치유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오늘 소경 치유사건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진적으로 치료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또한 다른 사건은 주님께서 한번 안수해서 고쳐주셨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주님께서 병자에게 두 번 안수를 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소경의 눈을 고치듯이, 제자들의 눈을 뜨게 하실 것입니다. 이 사건 후에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1. 사람들이 소경을 데리고 오다.
그들은 벳사이다로 갔다. 그런데 사람들이 눈먼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는 그에게 손을 대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그분께서는 그 눈먼 이의 손을 잡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마르 8,22-23ㄱ)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오는 표징을 요구하는 바리사이와 사두가이들을 뒤로하고 떠나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갈릴래아 호수를 건너서 갈릴래아 동북쪽에 있는 벳사이다가셨습니다. 벳사이다는 헤로데 필리피아가 다스리던 지역이었습니다. 이 곳은 규모 면에서 도시의 규모를 갖추었지만, 행정적으로는 고을이나 부락의 조직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벳사이다에 들어가셨을 때에 몇 사람이 소경 하나를 예수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소경을 고친 사건은 복음서에서 마르코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마을 사람들이 예수님께 소경을 데리고 와서 안수하여 고쳐주시기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요청을 받아들여, 그 소경의 손을 잡고 마을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마르코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와 같이 비공개적인 장소에서 환자를 데리고 가서 기적을 베푸신 일이 세 번 기록되어 있습니다(5,35-43. 7,31-37. 8,22-26 참조). 이러한 사건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비공개적으로 치료하신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개인적인 관계를 통해서 믿음을 주기 위해서.
예수님은 병자들의 마음에 있는 믿음을 보고 그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러나 장애자들은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자기 믿음을 표현하는 일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러한 병자들을 따로 데리고 가서 그들과 개인적으로 대화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개인적인 대화를 통해서 병자가 믿음과 신뢰를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그 병자의 믿음과 신뢰를 보고 그 병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소경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신 일도, 이런 목적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2) 복음 전도 활동이 방해를 받지 않게 하려고
예수님은 종종 병자를 고쳐 주신 후에 병자들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경계하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이 병자를 고치는 사람으로 소문이 나는 것에 대해 매우 주의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는 분으로 소문이 나면 장차 몇 가지 어려움에 봉착할 수 있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자신이 로마에 항거하기 위해 군중들을 선동하는 정치적 지도자로 소문이 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되면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주님을 반역을 기도하는 인물로 로마에 고발할 근거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 예수님은 로마의 감시 대상이 되어 쓸데 없는 일로 복음 전도 활동에 방해를 받을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복음 전파와 제자 훈련에 전념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만일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친 일이 소문이 나면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 올 것이며, 이로 인해 예수님은 복음 전파와 제자 훈련에 지장을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몇 몇 병자들은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은밀하게 개인적으로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고쳐 주신 후에도 그들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경계하셨습니다.
2. 눈먼 이를 치유하시다.
그의 두 눈에 침을 바르시고 그에게 손을 얹으신 다음, “무엇이 보이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는 앞을 쳐다보며,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걸어다니는 나무처럼 보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분께서 다시 그의 두 눈에 손을 얹으시니 그가 똑똑히 보게 되었다. 그는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집으로 보내시면서,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하고 말씀하셨다.(마르 8,23ㄴ-26)
예수님은 그 눈먼 이의 손을 잡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그의 두눈에 침을 바르시고, 또 그에게 손을 얹어 주셨습니다. 그 후에 주님은 그 소경에게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소경은 주님의 말을 듣고 눈을 들어 앞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자 그의 눈에 사람들이 이리저리 걸어 다니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그의 시력이 완전히 회복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눈에는 사람들이 마치 나무들이 걸어 다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오늘복음에 언급된 소경이 나무를 분별하는 것을 보면, 그는 날 때부터 소경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일 그가 날 때부터 소경이었다면 나무가 무엇인지 알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그는 온전한 시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사고로 인해서 시력을 잃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눈이 완전히 시력을 찾지 못한 것을 보시고, 다시 그의 눈에 손을 대고(안수) 주셨습니다. 그때에야 그 소경은 완전히 시력을 회복했으며, 사물을 분명히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소경이 시력을 완전히 회복한 것을 확인하신 후에, 그에게 "마을(벳사이다)로 들어가지 말고 그의 집으로 가라!"고 명하셨습니다. 그 사람은 벳사이다 사람이 아니라, 다른 마을에서 병을 고치기 위해서 찾아온 사람으로 보입니다. 주님은 그가 마을에 가서 자신이 치유받은 일을 사람들에게 알리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 이 일로 소문이 나서 사람들이 찾아오면, 복음 전도와 제자 훈련이 방해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3. 이 사건이 주는 의미
1). 메시야 시대의 도래를 알림
이 사건은 다음과 같은 이사야의 예언의 성취였습니다.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 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 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광야에서는 물이 터져 나오고 사막에서는 냇물이 흐르리라.(이사 35,5-6)."
이사야는 오래 전에 이미 메시아 시대가 되면 소경이 눈을 뜨고, 벙어리가 말하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마르코는 소경을 고친 사건을 통해서 이사야가 예언했던 메시아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께서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아였으며, 예수님을 통해서 메시아 시대가 이 땅에 도래했다는 것을 증거해 주었던 것입니다.
2). 육체적인 질병을 치유해 주심.
예수님은 우리의 육체적인 질병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일찍이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이사 53,4)"고 예언했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에서 보듯이 예수님은 우리의 영혼 뿐 아니라 우리의 육체도 완전하게 회복시켜 주시는 분입니다.
오늘날도 우리 주님은 자기 질병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오는 자들의 질병을 치유해 주십니다. 주님은 먼저 우리의 죄와 영적인 질병을 고쳐 주십니다. 주님을 통해 영적인 질병을 고침 받은 사람들은 자신과 동행하시는 하느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또한 주님은 우리의 육신도 온전케 해주십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갈 때에 주님은 우리 육체의 허약함도 친히 담당해 주시고, 우리를 고쳐 주실 것입니다.
3). 영적인 눈을 뜨게 해 주심.
이 사건은 영적인 소경인 제자들의 눈을 뜨게 해주실 것을 예고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오병이어 같은 기적을 보고도 예수님이 메시아인 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소경을 치유해 주심으로 제자들의 영적인 눈도 열어주실 것을 암시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 후에 베드로의 신앙 고백 사건이 기록된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이 영적인 눈을 떠서 주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된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말씀자료 : 두올 /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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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나와 함께하는 묵상> : † 이제야 모든 것이 뚜렷이 보입니다
오늘 복음이 지닌 맛을 제대로 보려면 좀 더 상세하게 눈을 뜰 필요가 있습니다. 오직 마르코 복음서에만 전해지는 오늘 복음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같은 마르코 복음서의 조금 뒷부분에 전해지는 예리코에서 소경을 고쳐주는 이야기(마르 10,46~52)와 비교해 보면 묵상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 두 소경을 치유한 이야기 중간에는 유명한 베드로의 고백, 수난과 부활의 세 번의 예고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문제의 초점은 오늘 복음이 다른 복음과는 차이가 있는 단계적 치유의 특이성에 있습니다. 모든 치유사화에서 예수님의 치유는 일회적이고 완벽했습니다. 그 유일한 예외가 바로 오늘 복음인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혹시 다른 복음서들이 이 이야기를 알면서도 인용하려 않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먼저 치유과정을 보면, 예수님께서 소경(눈먼 이)의 두 눈에 침을 바르시고 손을 얹으신 첫 번째 치유행위에서 환자의 반응은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걸어 다니는 나무처럼 보입니다.”라고 말했듯이 아직은 완전한 치유단계가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다시 그의 두 눈에 손을 얹으시니 그가 똑똑히 보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두 번째 치유행위를 통해서야 시력이 완전히 회복된 것입니다. 왜일까요?라는 물음을 던지면서 오늘복음을 함께 묵상해 봅시다.
예수님께서 벳사이다에 도착하시자 기다리던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군중들 가운데는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 한사람을 데리고 와 고쳐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소경을 고치신 기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 청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믈복음 8,22절을 보면 "그들은 벳사이다로 갔다. 그런데 사람들이 눈먼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는 그에게 손을 대어 주십사고 청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그를 데려온 사람들의 믿음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소경의 눈에 손을 대기만 하면 치유를 받게 되리라는 믿음으로 간청했던 것입니다.
마르코복음 2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신 기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네사람이 중풍병자를 침상에 누인 채 데려와 치유받게 한 기사입니다. 오늘복음에서 소경을 데려왔던 사람들이나 지난번 복음에서 중풍병자를 데려왔던 사람들은 환자를 돕는 사람들입니다. 봉사자들입니다.
그런데 마르코복음 2,5을 보면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라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봉사하는 사람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 봉사자들의 믿음을 보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 복음에서 교훈 받을 수 있는 점은 나를 예수님께로 데려와 준 사람이 있었던 것처럼 나도 누군가를 예수님께로 데려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누군가의 기도 때문에 오늘의 내가 존재하게 된 것처럼, 나도 그 누군가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죄로 인해 죽어 가는 사람들을 데려옵시다. 고독하고 힘든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남편은 아내를 위해, 아내는 남편을 위해, 부모는 자식을 위해, 자식은 부모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래니 울프가 만든 노래가 생각납니다. "마음이 지쳐서 기도할 수 없고, 눈물이 빗물처럼 흘러내릴 때, 주님은 우리 연약함을 아시고 사랑으로 인도하시네. 누군가 널 위하여 누군가 기도하네, 네가 홀로 외로 와서 마음이 무너질 때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2. 예수님께서 그 사람의 손을 잡아 주셨습니다.
2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 눈먼 이의 손을 잡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그의 두 눈에 침을 바르시고 그에게 손을 얹으신 다음..."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소경은 누군가가 손을 잡고 인도해 주어야 하는 사람입니다. 훈련받은 맹인견이 길 인도를 하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그러나 아내나 남편이나 가족이나 친구가 손을 잡아 주어야 합니다. 친구의 손에 이끌려 예수님을 찾아온 소경의 손을 주님이 잡아 주셨습니다. 누가 내 손을 붙잡아 주느냐, 누가 내 길을 인도하느냐가 중요합니다.
23절 속에 그 소경을 치료하신 과정이 설명되고 있습니다. 그를 데리고 마을 밖으로 나가사 눈에 침을 바르시고 손을 얹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병자들을 고치실 때마다 특별한 방법을 사용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때로 손을 대시거나, 침으로 진흙을 이겨 바르신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는 말씀으로만 고치셨습니다.
일부 성경학자들은 환자의 믿음상태를 따라 방법을 달리하셨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꼭 만져 주어야 할 환자는 만지셨고, 손을 대어야 할 환자는 손을 대셨고, 침을 발라야 할 환자는 침을 바르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누구였는지 어떤 병에 걸렸든지 예수님을 만나면 완전한 치유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듣지 못하는 사람도, 보지 못하는 사람도, 걷지 못하는 사람도, 38년 된 병자도, 12년 된 하혈병 환자도 완전한 치유를 받았습니다. 죽은 라자로도 살리셨고 나인성에 살고 있던 과부의 아들도 살리셨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죽은 죄인을 살려 주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를 믿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고 삶의 질이 달라지고 삶의 가치가 달라진 자들입니다.
다이아몬드의 값은 네 가지 기준으로 결정한답니다. 영어로 4C라고도 합니다. 첫째는 캐럿입니다. 1캐럿은 0.2g입니다. 캐럿이 클수록 비쌉니다. 둘째는 가공입니다(cut). 어떻게 잘랐느냐, 그 가공에 따라 색상과 투명도가 달라지고 값이 달라집니다. 셋째는 색상입니다(COLOR). A급 색상은 빨강, 분홍, 파랑, 초록, 샛노랑의 정갈한 색상인데 이것은 환상의 색깔이라고 합니다. 그런 색상의 다이아몬드는 희귀할 뿐 만 아니라 값이 비쌉니다. 넷째는 투명도입니다(Clarity). 확대경으로 드려다 보았을 때 흠집이 없어야 합니다. 눈으로 보아도 흠이 보이는 다이아몬드는 13등급인 꼴찌등급에 속합니다. 여러분은 어느 등급에 속합니까? (푸하하~~~ 등급 밖이라구요??? )
사람을 다이아몬드에 비할 수는 없지만 우리 모두는 다이아몬드보다 더 귀한 보석들입니다. 그런데 세상을 사는 동안 이런 일 저런 일로 상처받고 시달리면서 지울 수 없는 흠집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흠집은 그 어떤 노력으로도 지우거나 펼 수가 없습니다.
길을 가다보면 길가의 봉고차를 세워 놓고 간판을 내걸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찌그러진 곳 즉석에서 펴 드립니다. 흠집 제거해 드립니다." 자동차 찌그러진 것은 최신 기계나 공장에서 펼 수 있겠지만 인생이 찌그러지고 영혼이 찌그러진 것은 그 누구도 펼 수 없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이 찌그러진 내 인생과 가치를 펴 주셨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2코린 5,17)라고 했습니다. 잘못된 내 생각과 습관과 삶의 태도를 고치려면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내 영이 고침 받고 참 자유를 누리려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병든 가정과 병든 역사와 병든 나라가 고침 받으려면 주님 앞에 나와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주여 소경의 손을 붙들어 주신 것처럼 내 손을 붙들어 주옵소서. 내 머리에 안수하여 주옵소서. 나로 하여금 보게 하여 주옵소서.
3.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무엇이 보이느냐?" 그의 대답이 24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는 앞을 쳐다보며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걸어다니는 나무처럼 보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눈에 보인 것은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처럼 희미하게 보였습니다. 개안 수술에 성공한 사람의 경우 눈에 감았던 붕대를 푸는 순간 1.5의 시력이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희미하게 보이다가 점차 시력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도 시력이 회복되지 않고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다니는 것처럼 보이면 성공적 결과가 아닌 것입니다.
이 사람의 경우도 눈을 뜨는 순간 사물이 희미하게 보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다음입니다. 25절을 보면 "다시 그의 두 눈에 손을 얹으시니 그가 똑똑히 보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정상 시력이 회복되었다는 것입니다. 눈은 인체의 모든 부분 가운데 가장 소중한 부분입니다. 그래서 주님도 "눈은 몸의 등불이다"고 하셨습니다.
각막을 통해 빛이 들어오면 그 빛이 망막에 집중되고 그 빛이 모아져 시신경을 통해 대뇌에 전달이 되면 시각을 일으킨다고 합니다. 우표 크기만한 망막 속에 1억 3천만개의 세포가 들어있고 그 세포는 1w의 1백조분의 1이라는 약한 빛까지도 식별해 내는 초감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현대 과학으로도 상상할 수 없는 정밀도와 능력을 가진 것이 눈입니다. 그 눈에 무엇이 보이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생관이 결정됩니다.
"무엇이 보이느냐?"... "...네, 이제는 뚜렷이 보입니다" 17년 매미라는 이름을 가진 매미가 있다고 합니다. 크기는 보통 매미와 같습니다. 그런데 이 매미는 애벌레로 부화된 후 땅에 떨어지면서 땅속에 구멍을 파고 17년 동안 구멍 속에서 잠을 잔다고 합니다. 17년 이 지난 어느 날 나무에 기어오르면서 허물을 벗고 매미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리곤 5주간 날아다니고 먹고 알 낳고 울다가 죽고 맙니다. 5주간을 위해 17년을 준비하여 기다리는 매미얘기가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 까?
차분하게 준비합시다. 바르게 돈을 법시다. 그 기간이 17년이든 20년이든 서둘지 말고 준비합시다. 그리고 바로 보고, 바로 믿고, 바로 살아야 합니다. 영의 눈을 떠야 영적 세계가 보입니다. 영의 눈이 밝아져야 예수님이 보이고 내가 할 일이 보이게 됩니다.
여러분 지금 여러분 눈에 무엇이 보입니까? 예수님이 희미하게 보입니까? 하늘나라가 희미하게 보입니까? 그런가 하면 눈을 감아도 떠나지 않고 확실하게 보이는 것은 무엇입니까? 어떤 여자입니까? 어떤 남자입니까? 로또복권입니까? 부동산 권리증입니까? 증권입니까? 배추색 만원권입니까? 향락입니까? 포르노 영화입니까? 이웃의 흠집잡을꺼리만 보입니까? 부모에 대한 서운함만 보입니까?
주님, 이런 자들에게 어두운 눈 밝히시어 진리를 보게 하여 주소서. 예수님을 보게 하여 주옵소서. 영적 세계를 보게 하여 주옵소서. 아멘...............◆
[말씀자료 : --- 신부 /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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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가와 함께하는 묵상> : † 소외에서 어울림으로...
인간에게 질병이란 참으로 심한 고통을 줍니다. 경제적 생활고는 물론 사회적 관계의 소외를 가져오기 때문에 병자만이 가지는 영육적 고통은 당해보지 않으면 잘 모릅니다. 더우기 나병이나 에이즈같은 무서운 병에 걸리면 그 치료가 ‘불치’냐 ‘난치’냐...라는 섬뜩한 말에서부터 이 병으로 인해 초래되는 일그러진 외양까지 이 병마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무서운 만큼 이 병에 대한 기피 현상도 그 골이 깊은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미 지난 복음에서 다양한 병자를 치유하시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 중에서 연중 제6주일 복음인 나병환자의 치유는 많은 묵상거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나병만이 아니라 온갖 종류의 피부병을 통틀어 나병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두리뭉실한 것 같지만 성경은 나병이라는 자체의 규정보다는 ‘외향적으로 드러난 기이한 현상과 그 전염성’을 묘사함으로써 사람들이 기피하는 병에 더 무게 중심을 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남들이 기피하는 자, 곧 소외된 한 사람이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병을 낫게 해 달라고 소원하고 있습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는 대단한 믿음을 표현합니다. 이에 예수님의 대답도 환상적입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주님과 우리 신자간에 이 정도의 믿음과 응답이 있어야 되는 것 아닙니까?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짧은 말씀이지만 나병이라는 특수성을 감안할 때 ‘치유되었다’는 표현보다는 ‘깨끗하게 되었다’는 이 표현이 얼마나 통쾌감을 주고 있습니까? 그렇지만 어떻게 낫게 되었는가 궁금해 할 사람들에게 성경은 지면을 할애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믿음과 응답에는 쓸데없는 장황한 말의 묘사가 들어가지 않습니다. "척하면 ~~~ 압니다" 라는 관계에서 진정한 믿음이 뿌리깊이 구축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생활 기간 중 연중 제6주간에 계속되는 일련의 치유 활동은‘치유 자체보다는 사람의 변화’에 더 무게 중심을 두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이 ‘치유’ 사실에 초점을 두었다면 이 병자의 앞날에 대해서 ‘잘 먹고 잘 살았다’는 결론을 기대해야 할 것입니다. 더욱이 주님에 대해서도 ‘대단한 능력을 가지신 분’ 정도로 결말을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육체의 병고로 사람들로부터 소외되었던 한 사람이 주님을 만나고 나서는, 예상과는 달리 사람들 앞에 용감하게 나서게 된 것입니다. 그 당당함에 대해서 복음서는 전도사와 같은 모습으로 소개합니다. “그는 떠나가서 이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리기 시작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르코는 의도적으로 ‘복음’이라는 단어의 다음자리에 들어갈 ‘선포’라는 단어를 서슴없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이 병자는 주님께 치유만을 희망하였는데 막상 주님을 만나고 나서는 ‘하느님의 능력과 그 실현을 예수에게서 발견했노라’고 선포하였다는 것입니다. ‘주님과의 만남’이 가져온 대단한 변화요 변모입니다.
그러나 치유사화의 복음이 강조하는 바가 ‘치유보다는 변화’에 있다고 한다면 정작 중요한 것은 그 결과에 있습니다. 앞선 설명대로 질병이 고통과 소외의 상징으로 바라보고 있다면 주님과의 만남으로 이루어진 변화란, 고통과 소외를 넘어서 그가 이제 사람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진정한 치유는 바로 이 ‘어울림’이었습니다. 그 어울림의 정점에 우리 주님 예수께서 서 계십니다. 주님은 나병환자의 치유를 통하여 ‘하느님과의 어울림’을 지금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 시대에 철저하게 ‘소외되었던 자’가 당당하게 '사회 속으로 어울리는 자'가 되는 모습을 지켜본 수많은 군중들은 그들도 '하느님과의 어울림, 사람과의 어울림'이라는 희망을 않고 예수님께 몰려옵니다. 그중에서 '어떤 사람이 소경 한 사람을 예수께 데리고 와서 고쳐주기를 청한다'는 내용이 오늘복음의 테마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악령 들린 사람, 나병환자, 중병환자, 손이 오그라든 사람, 귀먹은 반벙어리를 고쳐 주어 '혼자만의 소외에서 벗어나 사회 속으로 어울리는 자'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소외된 자의 이웃들이 팔을 걷어서 나서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봉사라고 합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다고 믿고 예수를 찾아 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소경이 눈을 뜨는 것을 직접 봄으로 해서 그들의 믿음대로 확고하게 이루어지는 은혜를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남을 도와주면서(봉사하면서)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한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성경에서 보면 치유는 하느님 자비하심의 한 표현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자비심을 닮아 이웃에게 봉사하는 것은 성경 말씀의 완성입니다. 우리는 소외된 자에 대한 봉사를 통해서 '노아의 방주'를 함께 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노아의 방주'는 하느님의 목표인 인간의 구원사의 상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 종살이에서 구원하신 하느님은 이제 소경의 눈을 밝혀주시어 또 구원을 베풀고 있습니다. 또 그 소경을 위해 봉사한 사람들의 믿음의 눈을 활짝 뜨게 하여 구원을 베풀고 있습니다. 소경이나 소경을 데리고 온 모두가 이제 또다시 이웃에게 하느님을 증거하는 증인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시어 외아들을 보내주시고,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습니다. 치유를 통하여 우리는 구원의 하느님을 만나고 이러한 구원은 궁극적으로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으로까지 확대된다는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하느님은 나에게 사랑을 베풀면서 있다'고 믿으면 나는 새사람이 됩니다. '하느님은 나에게 자비를 베풀면서 있다'고 믿을 때가 최고의 회개의 순간이었습니다. '하느님은 나에게 봉사하면서 있다'고 믿은 때가 항구한 평화의 시작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최고의 분이시며 최고의 분의 사랑의 최고의 사랑입니다. 나는 하느님에게서 사랑을 받고 있다는 믿음은 나는 지금 내가 받을 수 있는 최고의 복을 받으면서 산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당신 자신을 자비로운 분으로 표명하고 있으며,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러한 하느님의 말씀을 믿어서 하느님은 사람들을 죽음에서 건져 올릴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상황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는 모든 죽은 사람들 가운데 가장 먼저 예수를 죽음으로부터 일으켰습니다. '하느님은 자비로운 분이다'는 믿음은 첫 열매를 맺었습니다.
하느님은 자비하신 분, 하느님이 한번 생명을 주신 것은 영원히 살아라고 주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은 병자들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라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어 그들의 믿음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하느님은 자비로운 분이라고 믿고 있는 우리에게도 믿음의 열매는 맺힐 것입니다..............◆
[말씀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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