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4. 29. 주일설교요약
본문▶ 사도행전 12장1절~5절
제목▶ 기도와 평안
오늘 주신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기도와 평안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려 합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이러합니다.
당시에 헤롯이라는 왕에 의해서
예수의 제자였던 야고보와 베드로가
체포되어 집니다.
이들이 체포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다가
헤롯에게 체포되었습니다.
이로인해 야고보는 참수를 당했습니다.
베드로는 그 이후에 말씀을 보면
탈출을 시키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볼 때 야고보는 첫 번째 순교자였습니다.
사실 이 두 사람을 보면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둘다 직업이 어부 출신이었고,
둘다 같은 시기에 제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참수형을 당하였고,
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구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어떤 면으로 보면 불공평하다
느껴질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두 사람이 달랐을까?
만약에 야고보와 베드로가 살아났다고 하면
이런 오해가 생길 가능성이 있습니다.
당시에 여러 가지로 회복되어지지 못하고
치유되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와 베드로가 모두 살아난다면
혹여라도 치유 받지 못한 사람, 회복되지 못한 사람이
잘못된 신앙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들면 병이 들어서 치유 받지 못한 사람,
육신의 삶이 회복되어지지 못한 사람이
나는 회복되지 못하고, 치유되지 못한 것을 보니까
나는 구원 받지 못한 사람이구나,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구나.
이런 오해가 생길 가능성이 있습니다.
또 하나 반대로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두 사람 모두다 참수형을 당했더라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서
구해주시지 않나 보구나?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문제가 있거나, 어떤 어려움이 있을 때,
하나님 앞에 우리가 기도를 하고 요청을 해도,
하나님은 이 땅의 문제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지 않나보다
이런 오해가 생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야고보를 참수 당하게 하시고
베드로를 옥에서 구출해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야고보는 너무 억울한 것이 아닌가?
우리는 생각을 해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시한번 말씀을 드리면
야고보와 베드로는 무엇을 하다가 잡힌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하다가 체포된 것입니다.
그렇기에 야고보는 이 땅에 삶에 대해서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순교의 길을 걸어가게 되었고,
베드로의 탈출을 보면서 하나님은 이 땅에
계속해서 역사하고 계시는 구나
이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다보면
어떤 사람은 치유가 되기도 하고,
또 육신의 삶이 회복되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베드로도 평안한 삶을 산게 아닙니다.
베드로는 이날 이후로 수배자가 됩니다.
그래서 평생을 도망자의 신분으로 살게 됩니다.
그리고 나중에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서
순교를 당하게 되어집니다.
결국 두 사람 모두 모두 순교를 당하게 됩니다.
여러분 성경을 보면 베드로가 굉장히 편안합니다.
내일이면 무교절 기간이 끝나서 베드라가 죽게 됩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놓고,
겉옷을 잘 정리 한 후에 편안하게 잠자리에 듭니다.
여러분 내일이 사형집행 날인데
솔직히 잠이 오겠습니까?
그런데 베드로는 평안하게 잠을 듭니다.
본래 사람이 매를 맞을 때
첫 번째 맞는 사람이 무서울까요?
두 번째 사람이 무서울까요?
야고보 같은 경우는 첫 번째 순교이기에
어떨결에 순교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이미 그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두렵겠습니까?
그런데 굉장히 평안하게 잠자리에 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베드로는 어떻게 이런
편안한 잠자리에 들 수 있을까요?
다시 말하지만 베드로는 부활을 증거하다가
옥에 갇힌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의 마음에는 부활에 대한 소망이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베드로의 마음이
그 어느 때보다 평안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서
자신을 구출해 줄 것이라 믿었다면
베드로는 성경의 모습처럼
이런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천사가 베드로를 구출하러 왔을 때
옥문을 나가고 있는데도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지 알았습니다.
만약에 자신이 구출 될 것이라는 것을 믿었다면
아마도 베드로는 꿈을 꾼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베드로와 야고보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담아주는 의미는
때로는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회복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당시에도 예수님을 믿었지만
병에서 회복되어지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는 야고보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생명을 연장시켜주셔서
그 병이 나아서 육신의 생명을 더 이어가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의 모습이
서로 다른 것 같이 보여지지만 똑같습니다.
베드로가 더 오래 살았다 생각할 수 있자나요.
인간의 시간으로 보면 다른 것 같지만
나중에 결과를 보면 두 사람이 똑같습니다.
지금 이 사람이 병을 치유 받아서
생명을 연장 받아 조금 오래 사는 것과
아니면 병을 치유 받지 못해서 주는 사람의 모습이나
모두 다 그 결과는 같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다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렇기에 자신들에게 닥쳐오는 고난을
평안하게 맞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은
누구를 사랑하고 누구를 사랑하지 않는다?
이렇게 차별하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헤롯에 대해서 나눌까 합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헤롯은 누구냐면?
예수님이 태어나던 당시에 헤롯왕이 아닙니다.
그의 손자 헤롯 아그립바 1세라고 합니다.
그런데 뒤에 말을 빼고 헤롯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이 헤롯이라는 사람이
수님의 제자를 죽이려고 했냐면
이 사람은 이두메인이었습니다.
이두메인이 어떤 사람이냐면?
이삭의 쌍둥이 아들이 에서와 야곱이자나요.
그리고 에서의 후손이 에돔이자나요.
그 에서의 후손이 이두메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야곱의 12아들의 후손이자나요.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두메인들을
정통 유대인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헤롯왕은 정통 유대인으로
인정을 받고 싶었던 거예요.
그래서 인정받고 싶어서 어떤 일을 하느냐?
헤롯 성전을 하나님 앞에 건축을 합니다.
말은 보수하는 것이고 재건하는 것이지만,
그 공사기간이 엄청나게 길었거든요.
공사기간을 보면 주전 20년부터
주후 63년까지 83년이 걸렸거든요.
그러니까 자기 할아버지때부터
자기가 다스리던 그 시절까지
계속해서 보수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적이 있으시자나요.
이 성전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예언을 한 적이 있자나요?
그런데 지은지 7년 만에 로마에 의해
완전하게 파괴가 되어집니다.
오늘 이 성전을 보면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 헤롯 성전 이스라엘 성전을
하나님을 위해서 지은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자신이 인정받기 위해서
이 성전을 지었다는 것입니다.
성전을 화려하게 지어서
자기도 정통 유대인으로 인정받고 싶었습니다.
자기의 위신과, 자기의 입장과 상황 때문에
이 성전을 지었던 것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위한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자신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바벨탑처럼
언젠가는 무너질 것을 예언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헤롯을 굉장히 나쁜 사람으로 인식되지만
그 당시에는 일부 사람들이 굉장히 좋아했습니다.
본문 3절 말씀을 보면
“유대인들이 이 있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이스라엘 성전을 건축하기 때문에
굉장히 좋아했다는 것입니다.
헤롯이 하나님을 위해서
자신들의 성전을 짖는거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헤롯이 이두메인지만 우리를 위해서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서 성전을 짓는다 생각하여
정말 괜찮은 사람이라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을 속일 수 있었을지 몰라도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헤롯 왕의 결말을 보면
벌레에 물려 죽었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오랫동안 지었던 성전도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모두 로마의 의해 무너져 내렸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외형적으로
하나님의 일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으로도 하나님의 일을 잘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알 수 있는 내용이 무엇이냐면?
본문 5절을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
교회는 베드로의 석방을 위해서 기도한 것 같지 않습니다.
왜나하면, 나중에 베드로가 탈출에 성공해서
기도하는 성도들에게 왔자나요.
그리고 그 모습을 보고
거짓말로 생각을 하고
또 너무나 놀랍니다.
만약에 그들이 베드로의 석방을 위해 기도했다면
베드로가 온 것을 보고, “하나님이 우리 기도를 들으셨다.
그리고 우리 기도를 응답하셨다“고 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이들은 베드로를 너무나 잘 압니다.
그리고 자기 모습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압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었을 때,
함께 십자가를 지고 싶지 않아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잖아요.
혹시라도 베드로가 연약해져서
자신이 전한 예수님의 부활을 번복할까봐
그의 마음을 굳건히 지켜달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아까 말씀을 드렸죠.
베드로는 굉장히 평안합니다.
야고보의 모든 과정을 다 지켜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평안하게 잠자리에 듭니다.
그렇다면 그가 평안하게 잠을 잘 수 있었던 이유는?
교회가 그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베드로의 마음에 평안을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란 이런 것입니다.
기도하면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지는 것
이러한 것만으로 목표를 삼지 않고
기도를 하면 마음에 평안이 온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드린 적이 있자나요.
은혜가 있으면 문제나 환경이나 상황이
변하는 것만을 문제 삼지 않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많이 기도한다고 한들
상황이 달라집니까? 환경이 달라집니다?
아니면 문제가 달라집니까?
아무런 변화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를 하면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편안하고 걱정도 근심도 없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내 마음에 평안이 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우리가 기도하는
최대의 목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에 기도가 내 뜻대로 이루어지는게
우리 인생의 최고의 목적이라면
우리는 언제든지 기도의 실패자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이런 질문을 하고 싶어요.
여러분이 기도 한 것이 얼마나 응답 받았습니까?
저도 제 기도를 돌아보았어요.
그런데 어떤 기도는 응답 받은 것이 있고,
어떤 것은 응답 되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기도하는 것이 응답이라면
우리는 기도의 힘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의 최종 목적은
내가 원하는대로 이루는 것이 아니라
기도함으로 인해 평안을 얻는 것입니다.
이 앞에 사도행전 10장을 보면
베드로의 기도의 모습이 나옵니다.
베드로는 늘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는 사도행전 3장에서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난 후에
부활의 예수님을 증언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때 잡혀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때 베드로를 한 번 놓아줍니다.
그때 조건이 다시는 입 밖에 예수를
증언하지 말라고 하며 풀어줍니다.
그래도 베드로는 예수님을 증언합니다.
그리고 시간만 되면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기도하던 베드로가
그 기도의 응답이 뭐예요?
결과적으로 옥에 갇혀 버립니다.
그리고 내일이면 참수형을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베드로 같은 사람을 볼 때
“이야~저렇게 기도를 많이 하는데
저 사람 살아가는 것 한번 봐봐
기도를 많이 하는데 되는 일이 없자나”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기도하는 사람이었기에
죽음 앞에 놓여있어도 평안했다는 것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부활을 믿었기에 그는 생명 걸고
복음을 전했고, 지금처럼 평안을 가진 것입니다.
그렇기에 저와 여러분은
기도의 평안을 구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가 응답받지 않더라도
절망하지 말고, 기도에 대한 불신을 갖는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는 집회를 다니면서 이런 이야기를 듣습니다.
“기도를 많이 하는데 되는 일이 없습니다.”
기도의 방향을 잘못 설정한 것입니다.
기도하는 최종 목적은 그런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도 어려우 성도들을 보면 두 가지를 두고 기도합니다.
“하나님 기도에 대한 응답을 한번만이라도 주십시오.”
또 한편으로는 어떠한 기도를 하나님께 하느냐?
“하나님 응답을 주시지 않는다면
베드로가 가지고 있는 평안을 허락해 주세요”라고 말입니다.
결론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기도에 차별을 두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영광을 두고 기도함으로
그 마음의 평안으로 얻고 살아가길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