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릇 벌초의 계절, 예초의 계절이다. 도로변에서도, 공원에서도, 아파트단지내에서도 풀냄새를 쉽게 맡을 수 있다. 이슬이 맺힌다는 백로가 지났다. 스키장의 슬로프도 추석이 끝나면, 기를 쓰고 풀과 나무를 베기 시작한다. 추석이 지나야 예초꾼들이 시간이 난다. 그전까지는 묘지정리로 인력들이 바쁘기 때문이다. 자칫 늦어져 서리가 내리거나, 눈이라도 내리면 장비도 슬로프에 못 올라가고 하여 여간 큰일이 아니다.
곧 추석이다.
우리나라의 야트막한 산, 길에서 쉽게 접근이 가능한 산에는 빵꾸가 잔뜩 보인다. 모두 묘지들 때문이다. 그 많은 묘지들이 추석이 되기 전까지 모두 산뜻하고 예쁘게 단장되어지는 것이 참으로 신기하다.
나도 얼마전에 조상님들의 묘소에 대한 벌초를 모두 마쳤다. 우리는 증조할아버지 할머니 1장, 할아버지 할머니 2장, 할아버지의 2형제분 내외 3장, 아버지 4촌내외 2장, 큰아버지 어머니 1장, 나의 부모님1장, 사촌형님 1장 총 11장에 대한 벌초를 매년 실시한다. 벌초꾼들은 나, 형, (장)조카, 6촌 형, 이렇게 정예멤버 4명이다. 아직 다음 세대의 자식들은 참석이 뜸하다. 나와 조카는 예초기 담당, 형들은 산소 주변의 철쭉나무, 향나무 등의 나무전지와 오르내리는 길 보수, 잘려진 풀들을 각지로 치우는 담당이다. 예초기를 메었다 함은 실세라는 것이다. 나도 에초기를 멘지는 얼마되지 않았다.
예전에 아버지께서 살아계실 생전에는, 온 집안들이 총출동하여 남자들은 산으로 낫과 톱을 들고 벌초를 하러 떠났다. 벌초하는 날 전에는 여러 낫 -양은 낫, 목낫- 을 날이 시퍼렇게 갈아 놓고, 조금만 소주병에 물과 함께 숫돌도 준비한다. 날을 바싹 세워 놓아야 힘이 덜들었다. 그리고 산소 주변에는 물이 귀해서, 물을 미리 준비해야만 낫을 추가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소주병 주둥이를 갈대줄기로 막고 기울이면, 물이 숫돌에 똑똑 떨어져서 낫을 갈기 쉬었다. 땡삐 -땅벌을 우리는 그렇게 불렀다- 에 대비하여 F-킬러도 꼭 챙긴다. 독이 잔뜩 오른 가을벌에 쏘이면 큰 낭패다. 자칫하면 크게 위험해 질 수 있다.
그러면 아낙네들은 커다란 양회다리 아래에서 각자 집에서 준비해온 점심을 펼쳐 놓았다. 전도 있고 튀김도 있다. 물론 여러 종류의 김치도 있고 막걸리도 있다. 여자들끼리, 집안들끼리 서로 꿀리지 않으려고 과하게 음식준비를 한 탓에, 늘 음식이 남았다. 어린 꼬맹이 코흘리개 조카들은 물에 들어가 물고기를 잡거나, 중학생쯤되는 손위의 형,누나들이 같이 놀아주곤 했다. 그러노라면 남자들이 점심때쯤에 다리밑에 모여 점심을 먹고 헤어졌다. 집안의 전통이었다.
그러던 것이,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사촌형님이 정권을 휘어 잡게 되자, 여자들이랑은 모두 빠져라, 벌초는 남자들끼리 한다로 되었다. 점심은 식당에서 먹었고, 비용은 돌아가면서 부담하였다. 그러자 여자들, 며느리들은 쾌재를 불렀다. 그러다 보니, 여자들끼리 얼굴을 볼일이 장례식때나, 결혼식때 뿐인데, 평소에 만나는 일이 없으니 자녀결혼식을 알리고 싶어도 연락처도 잘 모르고, 평소에 연락도 없다가 청첩장을 보내는 것도 어색해 하기도 한다. 좀 씁쓸하다. 자주 봐야 정도 생기는데.....아이들끼리도 그렇게 어색해 졌다. 그래도 남자들은 같은 성씨라, 덜 어색한데 말이다.
각설하고, 나는 고조할아버지와 할머니 산소는 어디에 소재하고 있는지 모른다. 돌아가신 4촌 형님들의 말에 따르면, 경기도 원당 ㅡ지금 고양시ㅡ에 사시다가, 경북 청도쪽으로 이사를 가셨다고는 하는데 자세한 내용은 모른다. 큰댁에 있는 세보世譜를 보면 원당이란 단어와 청도라는 말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맞는 말 같다.
그래서 증조할아버지 할머니 묘소부터 벌초를 한다. 그런데 남의 산에 모셨고, 어느날부터 그 앞의 밭은 인삼밭으로 변했다. 횡성군청에서 인삼과 더덕을 아주 힘있게 민다?!. 밭주변은 온통 울타리다. 벌초때에도, 설날에 눈이 쌓인 겨울에 성묘때에도 접근하기가 영~ 파이다. 그래서 나는 친형에게 조심스럽게 건의를 했다. 이제부터는 증조할아버지 할머니묘소는 벌초를 하지 않으면 어떨까하고. 내 생각은 그냥 묵묘로 만들면 좋겠다고. 이 모든것이 지관地官이 좋은 자리라고 해서 자리를 잡은 것일인데, 굳이 땅을 파헤치지 말고 그냥 자연스럽게 놔두자고 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자연화하는 것이 좋겠다고. 형은 그래도 그것은 예의가 아니고, 파묘는 제사를 지낸 후에 봉분을 파내어 유골을 수습하고 소각하는 것이 도리라고 했다.
그래서 벌초때 이 안건을 회의에 부치기로 했다. 땀을 많이 흘린 6촌 형이 늦게 도착하였다. 점심을 마친 후에 조심스럽게 의향을 물었다. 그랬는데, 그 형님은, 그래도 우리의 직접적인 뿌리인데, 우리가 아직 살아있는데 그러지 말고, 계속 늘 하던대로 하고, 길이 없으면 다른 쪽으로 길을 만들자고 했다. 가슴에 인공심장박동기를 장착하신 형이, 넷 중에서 가장 움직임이 힘드신 형님께서 그렇게 주장하셨다. 이에 다른 세명은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였다. 하여, 우리들이 살아있는 동안은 계속 벌초를 잘 하기로 하고, 그 이후의 일은 후세에 넘기기로 했다. 점심을 마친 우리들은 그길로 다시 산으로 돌아가 생숲을 헤치고 새로운 길을 만들었다. 나무도 자르고 풀도 베면서. 예전보다 2배의 시간이 흘렀다. 각자의 여자들이 집에서 전화로 진행사항을 물어온다. 끝났을 시간인데 끝났다는 낭보가 없으니 전화를 걸 수밖에.
앞으로도 우리 4명이, 그리고 세월이 흘러 그 다음은 나랑 동갑내기 5촌조카랑 둘이서 주력부대가 되어 벌초를 하게 생겼다. 요즘에 보면, 우리 다음 세대가 어찌 예초기를 등에 질까 싶다.
나는 개인적으로 묘지를 만드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납골당도 찬성하지 않는다. 연중에 몇번이나 납골당은 찾으며, 찾아간들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살아있을때 마음편하게 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늘 이야기하는 나이기 때문이다.
나는 화장 후에, 화장터 내에 재버리는 곳에 버리고, 아주 일부만의 유골을 챙겨서, 자녀들이 자주 찾아갈 만한 곳, 쉽게 없어지지 않을 큰나무, 큰바위, 산, 강등에 뿌려달라고 하고 싶다. 대신에 내 기일되면, 자식들끼리 모여 나를 주제삼아 밥이나 꼬박꼬박 먹었으면 좋겠다. 물론 이것도 다 자식들이 하기 나름이지만 말이다. 언젠가 나의 생각을 가족들에게 말한 적이 있다. 식구들은 그건 아닌것 같다고 했다. 내 생각이 너무 앞서 갔나 싶다.
이래저래 가을은 겨울을 준비하는 계절이고, 인생을 되짚어보는 계절인것 같다.
아무쪼록 친구분들도 추석, 잘 보내시게!
첫댓글 아 벌초 다녀왔구나~~^^
이제 곧 추석이네
모두 모두 즐겁고 행복한 추석 이 되길~~^^
하이, 향우~
먼 타국이지만 추석, 잘 보내길 진심으로 바래!
그리고 땡큐 쏘 머치!
매번 느끼는거지만 상수글은
잘 쓴 수필같다.
모아서 책으로 펴내도 좋을 것 같아.^^
산소의 잔디를 1장,2장 이렇게 부르는구나.^^
사촌형님의 전권을 휘두르는
칼날(?)이 맘에 든다.
암,여자들은 빠져줘야지.ㅎ
우린 상놈의 집안인지 벌초같은거 읎다.
조상묘는 파묘해서 화장하고 아버님 유골만 가까운 절에 모셨는데 넘 좋다.
추석 전에 조상님들 이발도 해주고 가뿐한
맘으로 명절맞이 하겠구나.
굿!!
앞서가는 집안이로세!
소중한 명절, 밝은 대보름달을 쳐다 볼 수 있는, 그런 여유를 즐기시길ㅡㅡ.
몇년 전까지 연례행사처럼 벌초얘기를 글로 올렸던 미남이,언제부턴가 그런 연례행사를
쓰지 못했다. 이유는 분명있었다.
그 이유는 집안 동생들이 개인의 일을 핑계삼았고 게다가 먼곳에 거주하는 동생은 먼
거리를 이유로 거부하는 분위기였다. 그래서 사람을 사기로 했다.
선산이 있는 동네에서 농사짓는 사촌동생이 주변의 아는 주민들을 2명 고용해 벌초한지도
벌써 몇년 됐다. 그 비용은 각 집안별로 일정액을 사촌동생에게 송금하는 식으로 해결했다.
이렇게 사람사서 벌초하니 편해서 좋긴 했지만,그나마 유지됐던 친척간의 유대관리가
사라지는 듯해 아쉬워하는 점도 있다.
하지만 어쩌랴!
변하는 세태를 사람힘으로 맋지 못하게 됐으니 말이다.
그래서 놀이동산 혹은 리조트 안에 납골당을 운영해야 한다는 의견이 힘을 얻는 듯 하다.
일타이피로.
워터파크에서 놀다가 혹은 스키타다가 잠깐 들르고 ㆍㆍ
좋은 생각이지 않은가?
상수 집안은 뿌리있는 가문이다.
상수가 묘사한 선친 살아계실적의 벌초관련 내외 장면은 90년대 TV문학관속 그림같다.
실제에서 -적어도 내 가까운 곳에서는- 보지못한 정겨운 풍경이다.
십여년전 볕좋은 야트막한 언덕위의 분묘자리를 찾아다닌 적이 있었다.
주변의 나름 능력있다는 부동산지인에게 부탁을 했었는데..쉽지가 않더군
해서 작년에 최종 포기를 했다. (어무이께는 죄송했으나..)
세상에는 아직 모르는게 너무 많다!
요즘은 매장문화가 거의 사라졌지. 그리고 동네사람들이 반대하면 내 명의의 산지라도 매장이 불가능한 것으로 알고있다. 따라서 너무 마음아파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