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킬 박사와 하이드>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 박찬원 / 펭귄클래식코리아 (2015)
오랜 만에 다시 손에 잡은 문학책이 또 <지킬 박사와 하이드>였다. 명작을 읽는 재미도 재미지만 고민거리가 많아진 요즘엔 '새로운 것'에 대한 가슴 콩닥거리는 도전보다 '익숙한 것'이 주는 편안함과 안락함이 더 그리워진 탓이다. 편안함과 안락함을 찾는다면서 '공포소설'을 손에 쥔 것이 웃기기도 하지만, 19세기말의 공포는 21세기를 살아가는 나에게 전혀 공포스럽지 않고, 도리어 '생각할 꺼리'를 던져주는 탓에 다시금 푹 빠져들 수 있었다.
한편, 이처럼 고전소설을 즐겨 읽는 까닭은 '읽을 때마다' 느낌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세월이 깊어지고 연륜이 묻어나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지만, '원작'이 가진 깊이와 심오함이 없었다면 느낌이 달라질 것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거듭 리뷰를 쓰면서도 '다른 내용'을 담을 수 있는 것일테다. 물론, 다양한 출판사의 '같은책'을 접하면서 조금씩 다른 뒤침(번역)과, 그로 인해 달라진 '뉘앙스'를 찾아내는 것도 쏠쏠한 재밋거리이기도 하다. 이번 책은 [펭귄클래식코리아]의 지킬 박사였는데, 저렴한 문고판 판본이라 '책의 내구성'이 조금 떨어지는 것 이외에는 '가격 대 성능비'가 꽤 좋은 책이었다. 물가가 고공행진을 하는 가운데 책 값도 점점 비싸지는 와중에 '문학책'만큼은 저렴한 값(?)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불행 중 다행일 것이다. 거기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 이외에도 '세 편의 단편소설'이 수록되어 있어 더욱 알찬 책이다. 더구나 수록된 단편이 은연중에 <지킬 박사와 하이드>의 집필과정에 영향을 끼쳤고, 쓰여질 당시 대유행을 했던 디킨스의 <크리스마스의 악몽>과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과도 밀접한 영향을 받은 작품들이라하니 '전작주의자'들에겐 필수템이 될 것이다. 자, 이제 각설하고, 다시 <지킬 박사와 하이드>에 집중하련다.
앞서도 말했다시피, 이 책은 '공포소설'로 분류된다. 스토커의 <드라큘라>, 셸리의 <프랑켄슈타인>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전혀 공포스럽지 않은 책들이지만, 그건 '외형적인 요소', 다시 말해 '시각적 공포'로 다가오지 않기에 그럴 뿐이지, 소설을 직접 읽으며 '내면의 목소리'에 집중하는 순간에야 비로소 '공포의 맛'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현대적 감각의 공포를 맛보기 위해서라도 '상상력'을 발휘해보길 바란다. 자, 이제부터 공포가 시작된다.
이 책을 설익게 읽은 독자들은 '선과 악의 대립'이라고 흔한 착각에 빠진다. 선한 지킬 박사와 악한 하이드 사이에서 고뇌에 빠진 주인공이 끝내 자살이라는 비극적 결말을 맞은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래선 전혀 공포스럽지 않다. 그러니 선과 악이 모두 '지킬 박사'의 내면에 공존하고 있었고, 두 가지 대립적인 요소가 서로 갈등을 벌이다 끝내 비극을 맞이했다고 이해를 해야 비로소 공포를 맛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는 종종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기준으로 선악을 구분하곤 한다. 또한 맹목적으로 이기적인 것은 악으로, 이타적인 것은 선으로 선을 긋기도 하는데, 이게 과연 딱 맞는 '구분법'일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과연 이타적이기만 하고 이기적은 모습은 없었더냔 말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모든 인간은 이기적이라는 객관적인 결론을 내리기도 하는데, 그렇다면 현대인은 결코 '선한 존재'가 될 수 없다는 말인가? 그건 아닐 것이다. 인간의 이기심은 자연스러운 것이며, 생존과 안전을 위해서라면 누구라도 '이기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흔히 '모성애'를 들먹이며 '이타심의 전형'으로 내세우곤 하는데, 이 얼마나 끔찍한 말인가? 자신의 아기를 위해서라면 스스로의 생명조차 내놓을 각오(?)로 사랑해야 한다는 '강요'는 아닌가 말이다. 세상의 모든 엄마들에게 강요하고 있는 모성애로 인해 엄마는 무조건적으로 자식들을 위해 '희생'해야 한다고 강요가 불러오는 공포감이 조금은 느껴지지 않는가?
이것이 바로 '공포의 정체'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가 암암리에 강요하고 있는 도덕과 윤리 따위가 전부는 아닐지라도 '소수의 희생'을 강요하고, 때로는 그런 희생이 하나 뿐인 목숨마저 내놓으라며 압박을 가하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풀어놓고 나면, '지킬 박사'가 명예나 체면 따위를 내려놓고 마음껏 '해방감'을 느끼고 싶은 욕구도 절로 이해가 될 것이다. 뮤지컬을 볼 때, '지금 이순간~'이라는 배우의 열창이 더욱 그런 욕구를 잘 느낄 수 있게 한다. 알게 모르게 자신을 묶고 있던 사슬을 벗어던지는 '마법의 약'을 과학적인 힘으로 '통제'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함께 복용할 때, 그 얼마나 신나고 짜릿하고 통쾌한 느낌일지 가히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자신을 '통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사라지게 되면서 불현듯 '공포감'이 그 빈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바로 '공포감의 시작'이다. 내 안에서 '해방감'을 만끽하게 해주었던 '또 다른 자아'가 나의 통제에서 벗어나 마음껏 활개를 치고 다니며 '나 자신'이 힘겹게 쌓아올린 모든 것을 무너뜨리는 것을 깨닫는 순간부터 '공포감'이 극대로 치닫게 되는 것이다. 이를 테면, 운전중에 '나의 왼손'이 내 의지와는 아무 관계없이 운전대를 옆으로 돌려 중앙선을 침범하고 마주오는 차량과 아슬아슬하게 스쳐지나가게 만든다면 어떨 것 같은가. 깜짝 놀라는 것을 넘어 죽을 것 같은 '기시감'이 온몸에 퍼지며 식은땀이 온몸을 적시는 경험을 하게 되지 않겠느냔 말이다. 더욱 무서운 것은 '내 안의 또 다른 자아'가 그런 짓을 하면서도 짜릿한 스릴을 맛보는 것을 즐기며 더욱더 '자주' 그러한 짓을 서슴지 않게 된다면 어떨 것 같은가? 아주 잠깐만 그런 스릴을 즐긴다고 해도 '죽을맛'일텐데, 하루 24시간 중에 23시간 50분을 '그놈'에게 주도권을 넘겨준 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10분만 남게 된다면 어쩔 것 같으냔 말이다.
다행스럽게도(?) 그 마지막 10분에 지킬은 '하이드의 악행'을 멈출 수 있었다. 개인에겐 비극적 결말이었겠으나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킬 것이 분명한 '또 다른 자아'를 멈출 수 있었기에 다행이라고 한 것이다. 이렇게 읽으면 <지킬 박사와 하이드>는 분명 공포소설이다. 자, 이제 한 개인의 비극을 '확대'시켜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와 국가, 그리고 세계로 인식을 확장시켜보자. 그러면 이 책이 주는 공포감이 더욱 현실적이고 사실적으로 다가오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 내재하고 있는 '악한 본성'은 지극히 이기적인 기준으로 자신만의 기쁨을 위해 무슨 일이든 서슴지 않게 된다. 그런데 '또 다른 자아'가 자아내는 공포감을 맛본 이가 '사회지도층'이라면 어찌 될까? 심지어 국민이 허락한 '권력자'라면 어찌 될까? 더 나아가 초강대국으로 세계 패권을 다투는 국가지도자가 '또 다른 자아'를 만나 저만의 즐거움을 위해 독단적인 결심을 서슴지 않게 된다면 말이다. 통제가 안 되는 '나의 왼손'이 나의 생명을 좌지우지하는 것으로 모자라 마주오는 상대 차량의 무고한 희생을 일삼고 만다면 말이다. 마주오는 차량이 기름을 한가득 싣고 오는 트럭이라면, 단 한모금이라도 숨을 들이키면 사망에 이르게 하는 유독가스를 싣고 있다면, 도시 하나를 한순간에 사라지게 만드는 가공할 핵무기를 싣고 있다면, 아니, 전세계 주요 도시를 향해 핵무기를 발사시킬 수 있는 '버튼'을 아무 거리낌없이 눌러재끼는 '또 다른 자아'라면 어쩔 것이냔 말이다.
상상이 너무 과했다면 사과부터 드린다. 그저 소설책 한 권 읽었을 뿐인데 인류멸망 시나리오를 풀가동시키는 것이 너무 과한 '설정'이라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그런 공포를 인식하고 고뇌하는 '자아'를 간직한 사람이라면 다행이라는 점에서 이 책이 주는 메시지는 '안전핀'을 장착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만약 그런 '안전핀'마저 상실한 국가지도자가 등장한다면 어떻겠는가? 그런 상황을 '통제'할 수 있는 시스템을 우리는 갖추고 있는지 다시금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드라큘라>에서는 자신이 사랑하는 이를 해치려는 악마를 물리침으로써 공포를 씻어낸다. <프랑켄슈타인>에서는 미지의 생명을 신이 아닌 인간의 손으로 창조하려는 욕구가 자아내는 공포를 인간보다 선량한 생명체의 등장으로 안식시켰다. 하지만 <지킬 박사와 하이드>가 만들어낸 '또 다른 자아'의 공포는 좀처럼 씻어낼 수가 없었다. 내 안에 악함을 통제하는 것만으로도 힘든 일인데, 우리 사회의 '누군가의 악함'을 통제할 마땅한 장치가 변변치 못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나마 우리 사회에 '선량한 시민'이 더 많이 있을 거라는 기대만을 품을 따름이다. 우리가 '선량한 시민'을 더 많이 만들어낼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춰 나아가는 '중요성'을 깨닫기를 바라 마지 않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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